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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루이나/역사
1. 개요2. 고대
2.1. 구전 시대2.2. 로마 지배기
3. 중세
3.1. 번역과 보편 논쟁3.2. 오드런과 유명론3.3. 신비주의와 논리학
4. 르네상스와 근세 초
4.1. 인문주의4.2. 회의주의4.3. 실험 철학
5. 17세기
5.1. 토머스 홉스
5.1.1. 생애와 저작5.1.2. 방법5.1.3. 물체론과 감각론5.1.4. 언어와 추론5.1.5. 인간론5.1.6. 정치철학5.1.7. 종교 비판
5.2. 홉스를 둘러싼 논쟁
5.2.1. 자유와 필연 논쟁5.2.2. 원적 문제 논쟁
5.3. 벨포르 플라톤주의5.4. 펨브룩의 생기론5.5. 데카르트주의
6. 18세기: 계몽철학
6.1. 르노블과 신뢰론6.2. 바르텔르미와 감각론6.3. 케어루의 숭고론6.4. 델로름과 동정론
7. 19세기
7.1. 칸트 수용과 관계 실재론7.2. 언어철학7.3. 역사철학7.4. 고통 우선 원칙7.5. 사회철학7.6. 논리학7.7. 생명철학
8. 20세기 전반
8.1. 벨포르 학파8.2. 망명자의 철학8.3. 필요의 철학
9. 20세기 후반
9.1. 법철학9.2. 마르크스주의9.3. 현상학과 증언의 인식론9.4. 분석철학9.5. 구조주의 이후
10. 현대
10.1. 책임의 윤리학10.2. 홉스 재해석10.3. 돌봄 윤리10.4. 탈식민 철학10.5. 형이상학10.6. 심리철학과 기계의 판단
11. 주요 철학자

1. 개요 [편집]

루이나의 철학사를 다루는 문서.

루이나 철학은 오랫동안 남의 언어로 쓰였다. 고대에는 라틴어, 중세에는 라틴어와 빌베른어가 학문의 언어였고, 루이나어는 17세기 토머스 홉스에 이르러서야 철학의 언어가 되었다. 이 때문에 루이나 철학에는 처음부터 "말이 사물을 제대로 가리키는가"라는 의심이 깊게 배어 있다. 중세 오드런의 유명론에서 홉스의 언어 비판, 19세기 펜윅의 논리학, 20세기 벨포르 학파로 이어지는 흐름이 루이나 철학의 주류이며, 흔히 '말을 의심하는 전통'이라 불린다.

그 반대편에는 세계를 계산 가능한 물체의 운동으로 환원하는 데 저항한 흐름이 있다. 펨브룩의 생기론, 델로름의 동정론, 테론의 습관론, 망명 러시아 철학자들의 인격주의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살아 있는 것의 전통'이라 불린다. 루이나 철학사는 이 두 전통이 서로를 비판하며 주고받은 역사로 읽을 수 있다.

2. 고대 [편집]

2.1. 구전 시대 [편집]

문자 이전 켈트계 주민 사회에서 지식은 법률·계보·천문을 운율로 외우는 시인 계급이 독점했다. 철학 문헌은 남아 있지 않지만, 셋을 한 묶음으로 엮는 삼제(三題) 격언이 대량으로 전한다. "되돌릴 수 없는 것 셋: 쏜 화살, 뱉은 말, 지나간 때" 같은 형식이다. 사물을 셋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이 습관은 후대 루이나 철학자들의 서술 방식에도 끈질기게 남는다.[1]

로마 측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영혼이 죽은 뒤 다른 몸으로 옮겨 간다고 믿었다. 다만 이것이 체계적인 교리였는지, 로마인이 그리스의 윤회설에 빗대어 이해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2.2. 로마 지배기 [편집]

가이우스 렌티우스 알레니우스(120?~185?)는 올덴버그 출신의 켈트계 로마 시민으로, 루이나 땅에서 나온 최초의 철학자다. 서간집 『항구에서 보낸 편지』(52통 현존)에서 그는 스토아 윤리를 항해의 비유로 풀었다. 바람은 고를 수 없지만 돛은 고를 수 있다는 것이다. 외부 사건은 우리 권한 밖에 있지만, 그에 대한 판단과 태도는 우리 권한 안에 있다.

알레니우스는 또 모든 사람이 이성을 공유하는 세계 시민이면서 동시에 태어난 땅의 시민이라는 이중 시민권을 "두 항구에 닻을 내린 배"에 빗댔다. 어느 한쪽 닻만 내린 배는 폭풍에 끌려가거나 항구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정복된 켈트인으로서 제국의 보편과 고향의 특수를 어떻게 함께 지킬 것인가가 그의 숨은 주제였다.

세베리누스 브리간티누스(410?~480?)는 로마 지배 말기의 주교로, 신플라톤주의로 그리스도교 교리를 해석했다. 『빛과 그림자에 관하여』에서 그는 악이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선의 결여라고 주장했다. 그림자가 빛 없이 존재할 수 없듯 악은 선에 기생하며, 순수한 악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는 루이나 최초의 그리스도교 철학자로 꼽힌다.

3. 중세 [편집]

빌베른 지배 아래에서 학문은 수도원과 대성당 학교에 모였고, 그 언어는 라틴어와 빌베른어였다. 루이나어는 설교와 생활의 언어에 머물렀다. 학문의 언어와 생활의 언어가 갈라져 있었다는 사실이 루이나 중세 철학의 기본 조건이다.

3.1. 번역과 보편 논쟁 [편집]

브렌단 마크 콜(780?~845?)은 수도원 필사실에서 라틴어-루이나어 대역 용어집 『두 혀의 책』을 엮었다. 실체·본질·영혼 같은 라틴 철학 용어를 루이나어로 옮기려 했지만, 상당수는 옮길 말을 찾지 못해 빈칸으로 남았다. 그는 서문에서 "옮길 수 없는 말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아직 생각하지 않은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 질문은 루이나 언어철학의 출발점으로 오래 인용되며, 『두 혀의 책』의 빈칸은 '브렌단의 빈칸'이라는 관용어가 되었다.

12세기에는 빌베른에서 수학한 아드리아누스 사르비우스(1105?~1172)가 보편 논쟁을 들여왔다. 그는 『보편자에 관하여』에서 온건 실재론을 폈다. '인간'이나 '말(馬)' 같은 보편자는 신의 정신 속에는 원형으로, 개별 사물 속에는 공통 본성으로 실재한다. 보편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학문이 다루는 것은 이름뿐이 되고, 학문은 말장난이 된다는 것이 그의 논거였다.

3.2. 오드런과 유명론 [편집]

사르비우스의 실재론에 정면으로 맞선 사람이 페르구스 오드런(1251?~1309)이다. 오드런은 스승과 제자의 대화 형식으로 쓴 『말과 사물에 관한 문답』에서 기호 이론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사물에서 개념으로, 개념에서 말로 이어지는 의미의 사슬에서 개념은 사물의 '자연적 기호'이고, 말은 개념의 '약속된 기호'다. 연기가 불의 기호이듯 개념은 누구에게나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가리키지만, 말은 사람들이 그렇게 쓰기로 정했기 때문에 사물을 가리킨다. 보편자란 여러 개체를 한꺼번에 가리키는 기호일 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그는 "이름이 둘이라고 사물이 둘인 것은 아니다"라는 원칙으로 실재론자들이 늘려 놓은 본질·형상·성질을 하나씩 걷어냈다. 또 "이름은 약속이다"라는 명제로, 말의 의미가 사물 자체에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합의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1302년 빌베른 대주교의 단죄 목록에 그의 명제 19개가 올랐다.

오드런은 루이나 유명론의 시조이며, '말을 의심하는 전통'은 그에게서 시작된다. 그의 저작은 단죄 이후 한동안 잊혔다가 19세기 카다른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3.3. 신비주의와 논리학 [편집]

오드런과 같은 시대의 신비가 에일리스 니 카흐린(1285?~1342)은 루이나어로 글을 쓴 첫 사상가다. 『빛나는 어둠의 노래』에서 그는 신에게 붙인 이름, 곧 선·존재·빛이 모두 피조물에게서 빌려 온 것이어서 신을 가리키지 못한다고 보았다. 오드런의 말대로 이름이 약속이라면, 인간이 신과 맺은 약속은 없으므로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신을 아는 길은 이름을 하나씩 지워 가는 침묵뿐이다. 유명론과 부정신학이 만난 독특한 사례로 평가된다.

14세기 논리학자 리처드 핀치(1318?~1376)는 『풀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에서 거짓말쟁이 역설("지금 내가 하는 말은 거짓이다")을 다뤘다. 그의 해법은 시간에 기댄다.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문장은 말해지는 순간에는 아직 진리값이 없고, 말해진 뒤에야 앞선 발화를 대상으로 진리값을 갖는다. 따라서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엄밀히 말해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핀치는 또 '같은 순간에 다르게 될 수 있었음'을 뜻하는 동시적 가능성 개념을 다듬었다. 어떤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더라도, 바로 이 순간에 그것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지금과 다른 세계를 택할 수 있었다는 이 양상 이론은 20세기 말 볼코바에 의해 재발견된다.

4. 르네상스와 근세 초 [편집]

빌베른의 학문적 권위가 약해지고 궁정과 상업 도시가 새 후원자가 되면서, 철학은 수도원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4.1. 인문주의 [편집]

윌리엄 그레이브스(1489~1547)는 그리스어를 익혀 플라톤의 『국가』를 루이나어로 옮겼다(미완). 『대화의 기술』에서 그는 스콜라의 삼단논법 대신 수사학을 철학의 도구로 내세웠다. 진리는 증명만이 아니라 설득을 통해 공동체에 뿌리내리며, 아무도 설득하지 못하는 진리는 공동체에게는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4.2. 회의주의 [편집]

이자크 몰랭(1541~1603)은 고대 회의주의를 되살렸다. 『판단 유보에 관한 열 개의 대화』에서 그는 세 가지를 근거로 들었다. 감각은 서로 어긋나고, 관습은 나라마다 다르며, 이성은 어느 쪽에든 같은 무게의 논증을 세울 수 있다. 그러니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마음의 평정에 이르는 길이다.

종교 문제에서 몰랭은 이성이 신앙을 증명할 수 없으니 조상의 관습을 따르는 편이 안전하다는 신앙주의로 나아갔다. 그의 회의는 다음 세기 철학자들이 '확실한 출발점'을 찾게 만든 압력이었다.

4.3. 실험 철학 [편집]

자연철학자 에드워드 렌(1561~1626)은 실험과 측정을 학문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의 심문』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숨은 성질' 설명을 거부했다. 아편이 잠을 부르는 것은 '잠재우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수로 셀 수 없는 성질은 아직 이해되지 않은 성질일 뿐이다. 젊은 홉스가 그의 비서로 일했다.

5. 17세기 [편집]

5.1. 토머스 홉스 [편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토머스 홉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1.1. 생애와 저작 [편집]

토머스 홉스(1588~1679)는 루이나 철학사에서 가장 큰 이름이다. 1588년 빌베른 함대가 해안에 나타났다는 소식에 놀란 어머니가 조산해 태어났고, 훗날 "어머니는 쌍둥이를 낳았다, 나와 공포를"이라고 썼다.[2]

렌의 비서를 거쳐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하던 그는 마흔 무렵 우연히 유클리드의 『원론』을 펼쳤다가 기하학에 사로잡혔다. 펼쳐진 쪽의 정리를 보고 "말도 안 된다"고 외친 그는, 그 증명이 앞의 정리에 기대고 그것이 다시 앞의 정리에 기대는 것을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납득했다고 한다. 정의에서 출발해 한 걸음씩 확실한 결론으로 나아가는 이 방법으로 자연과 인간과 국가를 모두 설명하겠다는 것이 이후 그의 평생 기획이 되었다.

이 기획은 3부작으로 완성되었다. 『시민론』(1642, 라틴어), 『물체론』(1655), 『인간론』(1658)이다. 정치철학 부분을 루이나어로 새로 쓴 것이 『리바이어던』(1651)이다. 『리바이어던』은 루이나어로 쓰인 최초의 체계적 철학서이며, 이 책 이후 루이나어는 철학의 언어가 되었다.

5.1.2. 방법 [편집]

홉스는 대상을 가장 단순한 요소로 분해한 뒤 그 요소에서 다시 대상을 합성해 내는 분해·합성법을 썼다. 시계를 이해하려면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해 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국가를 이해하려면 국가를 개인으로 분해하고(자연상태), 개인에서 국가를 다시 조립해야(계약) 한다.

5.1.3. 물체론과 감각론 [편집]

존재하는 것은 물체뿐이며, 모든 변화는 운동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이 말하는 '비물체적 실체'는 '둥근 사각형'처럼 그 자체로 모순인 말이다. 신조차 물체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무신론 혐의의 직접적 근거가 되었다.

외부 물체의 운동이 감각 기관을 누르면, 그 압력이 신경을 타고 뇌와 심장에 전해지고 이에 맞서는 반작용 운동이 생긴다. 이 반작용이 우리에게 색·소리·냄새로 나타나는 '환영'이다. 따라서 색은 사물 안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다. 상상은 대상이 사라진 뒤에도 남아 점점 약해지는 감각이고, 기억은 그 약해짐을 의식하는 것이다. 꿈은 잠든 몸 안에서 일어나는 운동이 깨어 있을 때의 환영을 되살린 것이다.

5.1.4. 언어와 추론 [편집]

이름은 생각을 기억해 두는 표지이자 남에게 전하는 기호다. 참과 거짓은 사물이 아니라 명제에 속한다. 사물은 그저 있을 뿐이고, 참이 되거나 거짓이 되는 것은 사물에 대해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학문은 정확한 정의에서 출발해야 한다.

추론이란 이름들을 더하고 빼는 계산이다. 정의 없이 말을 이어 붙이면 '부조리', 곧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말이 생긴다. 홉스는 '비물체적 실체'나 '자유로운 의지' 같은 표현이 이런 부조리이며, 스콜라 철학의 상당 부분이 그렇다고 보았다. 오드런의 유명론이 여기서 근대적 형태를 얻는다.

5.1.5. 인간론 [편집]

몸 안의 운동이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의 작은 시작을 홉스는 '노력'이라 불렀다. 무언가를 향하는 노력이 욕구이고, 무언가에서 멀어지는 노력이 혐오다.

'선'은 욕구의 대상에 붙이는 이름일 뿐 사물 자체의 성질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선이 다르고, 이를 판정할 공통 척도가 없다. 이 척도의 부재가 자연상태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는 근본 원인이다.

숙고는 욕구와 혐오가 번갈아 드는 과정이며, 의지는 숙고 끝의 마지막 욕구다. 자유는 운동을 막는 외적 장애가 없는 상태일 뿐이다. 물이 비탈을 따라 흐를 때 막는 것이 없으면 자유롭게 흐른다고 하듯, 사람도 원하는 것을 하는 데 막는 것이 없으면 자유롭다. 따라서 모든 행위가 원인에 의해 결정되어 있어도 사람은 자유로울 수 있다.

5.1.6. 정치철학 [편집]

인간은 자연적으로 평등하다. 가장 약한 자도 속임수나 동맹으로 가장 강한 자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공통의 권력이 없는 자연상태에서는 경쟁·불신·명예심 때문에 만인이 만인과 전쟁 상태에 놓인다. 여기서 전쟁이란 실제 전투가 아니라 싸울 의지가 공공연히 드러나 있는 상태 전체를 뜻한다. 그 속에서는 산업도 학문도 없고,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짧다.

이성은 자연법을 알려 준다. 평화를 추구하라, 남들도 그러하다면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아라, 맺은 약속을 지키라. 그러나 자연법은 양심 안에서만 구속할 뿐, 남들이 지키리라는 보장이 없는 한 혼자 지키는 것은 자신을 먹잇감으로 내놓는 일이다. 칼 없는 약속은 말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계약해 자신들의 권리를 한 사람이나 합의체에 넘기고, 그 결정을 자신의 결정으로 인정한다. 홉스는 이를 '작자'와 '행위자'의 관계로 설명했다. 주권자가 행위하고, 계약한 모든 사람이 그 행위의 작자가 된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을 '대표'하는 인공 인격이 국가, 곧 리바이어던이다. 주권은 나눌 수 없으며, 나뉜 주권은 내전을 부른다.

다만 자기 목숨을 지킬 권리는 넘길 수 없다. 사람이 권리를 넘기는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이므로, 자신을 죽이는 것에 저항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무효다. 주권자가 더 이상 보호하지 못하면 복종의 의무도 끝난다.

5.1.7. 종교 비판 [편집]

『리바이어던』 후반부에서 홉스는 성서를 문헌으로 읽었다. 그는 모세오경을 모세가 다 썼을 리 없다고 지적했고, 기적과 예언은 주권자가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만 공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또 교회가 세속 권력을 탐하며 사람들을 무지 속에 묶어 두는 상태를 '어둠의 왕국'이라 불렀다.

5.2. 홉스를 둘러싼 논쟁 [편집]

5.2.1. 자유와 필연 논쟁 [편집]

에드먼드 칼로웨이(1594~1663) 주교는 망명지에서 홉스와 만나 자유와 필연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칼로웨이는 모든 것이 필연이라면 칭찬과 비난, 상과 벌, 신의 심판이 모두 무의미해진다고 반박했다. 그에게 의지는 앞선 원인 없이 스스로 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었고, 그 능력이 인간을 짐승과 구별한다.

홉스는 처벌이 지나간 일에 대한 앙갚음이 아니라 앞으로의 행동을 바꾸는 원인이므로 필연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오히려 행위가 원인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면 처벌로 행동을 바꿀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 논쟁은 양측의 동의 없이 루이나어로 출판되어 이후 자유의지 논의의 기본 문헌이 되었다.

5.2.2. 원적 문제 논쟁 [편집]

수학자 너새니얼 셰리던(1616~1703)은 원과 같은 넓이의 정사각형을 작도했다는 홉스의 주장을 반박했다. 20년 넘게 이어진 이 논쟁에서 홉스는 대수학을 "기호를 휘갈긴 딱지"라며 경멸했지만, 수학적으로는 셰리던이 옳았다. 이 패배는 홉스의 학문적 명성에 오래 그림자를 드리웠고, 반대파는 "원 하나 네모로 못 만드는 자가 국가를 만들겠다고 한다"며 조롱했다.

5.3. 벨포르 플라톤주의 [편집]

랠프 위더스(1617~1688)를 중심으로 한 벨포르 플라톤주의자들은 홉스의 유물론에 맞섰다. 위더스는 『영원한 진리에 관하여』에서 도덕의 진리가 수학의 진리처럼 영원하다고 주장했다. 삼각형 내각의 합을 누구도 명령으로 바꿀 수 없듯, 정의와 부정의의 구별도 주권자의 명령은 물론 신의 의지로도 바꿀 수 없다. 선이 욕구의 대상에 붙인 이름일 뿐이라면 정의도 힘센 자의 이름표가 된다는 것이다.

위더스는 또 물질과 정신 사이에서 생명체의 형태를 짓는 무의식적인 힘을 상정했다. 씨앗이 나무가 되는 과정은 물체의 충돌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신이 매 순간 직접 개입한다고 보는 것도 신을 하찮은 일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신이 세계에 심어 둔 '형상 짓는 힘'이 그 일을 대신한다.

5.4. 펨브룩의 생기론 [편집]

위더스와 서신을 나눈 앤 펨브룩(1631~1679)은 더 과감했다. 사후 출간된 『살아 있는 물질에 관하여』(1690)에서 그는 정신과 물질이 서로 다른 실체가 아니라 같은 실체의 정도 차이라고 주장했다. 가장 거친 물질도 희미한 감각을 지니고, 가장 섬세한 정신도 어느 정도 물질성을 지닌다. 모든 물체는 어느 정도 살아 있다.

홉스는 물질을 죽은 것으로 보았고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을 갈랐지만, 펨브룩은 둘 다 틀렸다고 보았다. 죽은 물질에서 생명이 나올 수 없고, 완전히 다른 두 실체는 서로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평생 원인 모를 두통에 시달린 그는 고통이 존재를 더 섬세한 상태로 바꾸는 과정이라는 독특한 신정론도 남겼다. 그는 '살아 있는 것의 전통'의 시작으로 꼽힌다.

5.5. 데카르트주의 [편집]

피에르 데마레(1638~1702)는 신이 세계를 매 순간 새로 창조한다는 연속 창조설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매 순간이 새로운 창조라면, 앞 순간의 사물이 다음 순간의 사물을 일으킨다고 할 수 없다. 당구공이 다른 공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신이 한 공을 이 자리에 창조한 다음 순간 다른 공을 저 자리에 창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인이라 부르는 것은 신의 일정한 창조 방식이 만든 규칙적인 잇따름일 뿐이다.

인과의 필연성을 부정한 이 논증은 신을 빼면 그대로 인과 회의론이 된다. 데마레 자신은 독실한 신자였지만, 그의 논증은 다음 세기 인과 회의론의 선구로 평가된다.

6. 18세기: 계몽철학 [편집]

벨포르의 살롱과 학회가 철학의 중심이 되었고, 철학자들은 대체로 홉스를 넘어서야 할 고전으로 대했다.

6.1. 르노블과 신뢰론 [편집]

장바티스트 르노블(1711~1774)은 『신뢰론』(1758)에서 홉스의 "칼 없는 약속은 말뿐"이라는 명제를 뒤집었다.

사람이 약속을 지키는 것은 처음에는 다음 거래를 위한 이해타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상대와 거래가 거듭되면 이 타산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마침내 제2의 본성이 된다. 오래 정직하게 장사한 상인은 이익이 없는 순간에도 속이지 못한다. 칼이 약속을 지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속을 지키는 습관이 칼에 권위를 준다. 사람들이 이미 서로 믿고 있지 않다면 주권자의 명령도 집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르노블은 상업이 사람들을 서로 예측 가능한 존재로 만들어 거친 정념을 누그러뜨린다고 보았다. 그의 신뢰론은 20세기 로슈포르의 증언 인식론으로 이어진다.

6.2. 바르텔르미와 감각론 [편집]

클로드 바르텔르미(1715~1771)는 철저한 감각론자이자 유물론자였다. 『감각의 체계』(1754)에서 그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을 상정했다.

처음에는 냄새 하나만 깨어난다. 이 사람에게 세계는 장미 향 그 자체이며, 아직 '나'와 '장미'의 구별도 없다. 이어 소리, 촉각, 시각이 차례로 깨어나며, 감각들이 겹치고 비교되는 과정에서 기억·판단·욕구가 생겨난다. 특히 자기 몸을 만졌을 때 만지는 감각과 만져지는 감각이 동시에 일어나는 경험에서 처음으로 '나'라는 관념이 생긴다.

따라서 타고난 관념은 없고, 영혼은 신경 조직이 하는 일의 이름이다. 그의 책은 공개 소각되었고, 그는 생애 마지막 10년을 빌베른에서 보냈다.

6.3. 케어루의 숭고론 [편집]

조지 케어루(1729~1797)는 『바다와 숭고에 관하여』(1767)에서 미와 숭고를 구분했다. 미는 작고 매끄럽고 조화로운 것이 주는 즐거움이다. 숭고는 폭풍 치는 바다처럼 압도적인 것 앞에서 자신이 사라질 것 같은 예감이다.

케어루는 숭고 체험의 핵심을 공포가 아니라 경계의 소멸로 보았다. 거대한 것 앞에서 나와 남의 차이는 무의미해지고, 같은 해안에 선 사람들은 잠시 한 몸처럼 느낀다. 그는 이것이 공동체 감정의 뿌리라고 보았다. 홉스가 공포를 사람들을 갈라놓는 정념으로 본 것과 정반대의 해석이다.

6.4. 델로름과 동정론 [편집]

마리안 델로름(1732~1790)은 『동정에 관하여』(1771)에서 도덕의 기초를 이성이나 이익이 아니라 동정에 두었다. 동정은 타인의 고통을 상상으로 내 몸에 옮겨 오는 능력이다. 내가 그 사람의 자리에 서 보는 것이지, 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능력은 거리와 친숙함에 따라 약해진다. 이웃의 손가락 상처가 먼 나라의 대참사보다 더 아프게 느껴지는 '동정의 원근법'이 그것이다. 델로름은 원근법 자체는 자연스럽지만 그것을 도덕의 척도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았다. 그림에서 멀리 있는 사람이 작게 그려진다고 실제로 작은 것은 아니듯, 먼 사람의 고통이 작게 느껴진다고 실제로 작은 것은 아니다. 도덕 교육과 제도가 할 일이 이 원근법을 교정하는 것이며, 그는 이 논리로 노예무역을 비판했다.

『여성의 판단에 관하여』에서는 여성의 판단력이 열등해 보이는 것은 본성이 아니라 교육을 받지 못한 결과라고 논했다. 델로름은 루이나 최초의 주요 여성 철학자로, 20세기 말 몽고메리에 의해 재조명되었다.

7. 19세기 [편집]

7.1. 칸트 수용과 관계 실재론 [편집]

앙투안 셰브리에(1762~1830)는 칸트 철학을 루이나에 들여왔다. 『비판 이후』(1801)에서 그는 우리가 사물 자체를 알 수 없다는 칸트의 결론은 받아들이되, 물자체 개념은 버려야 한다고 했다. 알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이미 그것에 대해 무언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셰브리에에 따르면 우리가 아는 것은 사물들 사이의 관계이며, 관계 바깥의 사물 자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무게는 다른 물체와의 관계이고, 색은 빛과 눈의 관계이며, 크기는 다른 크기와의 관계다. 관계를 모두 걷어내면 남는 것은 없다. 따라서 관계야말로 실재다. 이 '관계 실재론'은 이후 루이나 논리학과 과학철학의 배경이 된다.

7.2. 언어철학 [편집]

오언 카다른(1803~1871)은 문헌학자이자 언어철학자다. 『루이나어 문법』(1838)과 『말의 지층』(1846)에서 그는 언어를 사고를 담는 옷이 아니라 사고의 몸으로 보았다. 같은 세계라도 언어마다 다르게 나누고 묶으므로, 언어가 다르면 세계도 조금씩 다르다.

카다른은 켈트 기층 위에 라틴어와 빌베른어 차용어가 켜켜이 쌓인 루이나어를 '지층'에 빗댔다. 단어 하나를 파 내려가면 그 말을 쓴 사람들이 겪은 지배와 저항의 역사가 드러난다. 그는 브렌단의 물음에 "옮길 수 없는 말은 아직 생각하지 않은 것"이라고 답했다. 언어는 새 생각을 따라 자라며, 브렌단의 빈칸은 7백 년에 걸쳐 대부분 채워졌다는 것이다. 중세의 오드런과 브렌단을 재발견한 것도 그다.

7.3. 역사철학 [편집]

알렉시 모랭(1807~1874)은 헤겔의 역사철학을 받아들여, 역사를 공동체가 기억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는 과정으로 정의했다. 씨족은 몇 세대를 기억하고, 왕국은 왕조를 기억하며, 국가는 민족 전체의 과거를 기억한다. 정신이 완성된다는 것은 인류가 자신의 모든 과거를 기억하게 된다는 뜻이다.

모랭 사후 제자들은 둘로 갈라졌다. 우파는 국가를 기억의 완성으로 보았고, 좌파는 국가가 기록하지 않은 자들, 곧 패배한 자와 가난한 자의 기억이 빠진 역사는 완성이 아니라 망각의 조직이라고 반박했다.

7.4. 고통 우선 원칙 [편집]

헨리 웨이크필드(1811~1883)는 『행복의 계산』(1859)에서 공리주의를 받아들이되 뒤집었다. 행복은 사람마다 너무 달라 비교할 수 없다. 어떤 이는 음악에서, 어떤 이는 사냥에서 행복을 얻으며, 둘의 크기를 잴 공통의 저울은 없다. 홉스가 말한 '선의 공통 척도 부재'가 행복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고통은 훨씬 균일하다. 굶주림, 추위, 신체의 상처는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나쁘다. 따라서 도덕과 입법의 목표는 최대 행복이 아니라 최소 고통이어야 한다. 행복을 늘리는 일은 각자에게 맡기고, 국가는 고통을 줄이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이 '고통 우선 원칙'은 루이나 사회정책 논의에 오래 영향을 미쳤다.

7.5. 사회철학 [편집]

피에르 앙셀(1828~1890)은 『노동과 지붕』(1867)에서 소유는 사용에서만 정당화된다는 사용권 우위론을 폈다. 쓰지 않고 쥐고만 있는 땅과 집은 소유가 아니라 독점이다. 실제로 그곳에 살고 일하는 사람들의 결사가 소유의 정당한 주인이다. 그는 국가 대신 협동조합을 사회 재편의 단위로 보았고, 국가가 모든 것을 소유하는 체제는 지주 한 명이 거대해진 것에 불과하다며 국가사회주의도 비판했다.

7.6. 논리학 [편집]

논리학자 아이작 펜윅(1831~1894)은 홉스의 "추론은 계산"이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실현하려 했다. 『사고의 대수』(1873)에서 그는 '사람이다' 같은 성질이 아니라 '~보다 크다', '~의 아버지다' 같은 관계를 논리의 기본 단위로 삼았다.

펜윅의 관계 논리에서는 관계끼리 합성할 수 있다. '~의 아버지'와 '~의 아버지'를 합성하면 '~의 할아버지'가 되고, 관계를 뒤집으면 '~의 자식'이 된다. 그는 이 합성 규칙을 기호로 정리해, 전통 논리학이 다루지 못하던 "모든 사람에게는 어머니가 있다"류의 추론을 계산할 수 있게 만들었다. 셰브리에의 관계 실재론이 논리학으로 옮겨 간 셈이며, 대수를 경멸했던 홉스의 꿈이 역설적으로 대수에서 이루어졌다는 평을 듣는다.

7.7. 생명철학 [편집]

마르셀 테론(1859~1938)은 『습관에 관하여』(1893)에서 생명을 반복 속의 미세한 차이로 보았다. 기계는 같은 동작을 똑같이 되풀이하지만, 생명체는 되풀이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며 그 차이가 쌓여 새로운 형태가 나온다.

습관은 처음에는 의지로 하던 일이 몸에 내려앉은 것이다.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은 처음에 건반 하나하나를 의식하며 누르지만, 익숙해지면 손가락이 스스로 움직인다. 테론은 이를 '굳은 자유'라 불렀다. 습관은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의 자유로운 선택을 몸에 저장해 의식이 다음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는 르노블의 습관론을 생명철학으로 확장했고, 펨브룩 이래의 '살아 있는 것의 전통'을 근대적 형태로 복원했다.

8. 20세기 전반 [편집]

8.1. 벨포르 학파 [편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벨포르 학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20년대 벨포르에서는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모인 토론 모임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벨포르 학파'로 불렸다. 학파는 스스로를 오드런과 홉스의 '부조리' 비판을 계승한 것으로 여겼다.

지도자 로렌스 앨더(1889~1962)는 『의미의 조건』(1928)에서 문장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 문장이 참일 때와 거짓일 때 세계에서 무엇이 달라지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준을 내세웠다. "절대자는 스스로를 전개한다"는 문장이 참이든 거짓이든 세계에서 달라지는 것이 없다면, 그 문장은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다. 신, 절대자, 물자체에 관한 문장 대부분이 이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다.

러시아계 물리학자 출신 마그다 셰르바코바(1897~1971)는 확률을 반복되는 사건의 빈도로 정의했다. 그는 양자역학의 확률이 우리의 무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자체의 성질이라고 주장해, 결정론을 당연시하던 학파 내부에서 논쟁을 일으켰다.

빅토르 하인(1902~1980)은 논리와 수학의 진리가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호를 쓰기로 한 약속에서 나온다는 규약주의를 폈다. "2+2=4"가 언제나 참인 것은 세계가 그렇게 생겨서가 아니라 우리가 '2', '+', '4'를 그렇게 쓰기로 정했기 때문이다. 오드런의 "이름은 약속이다"가 7백 년 만에 논리학의 언어로 돌아온 것이다.

8.2. 망명자의 철학 [편집]

러시아 혁명 이후 망명자들이 들어오면서 정교 종교철학과 현상학이 유입되었다.

세르게이 베르흐네프(1884~1961)는 『리바이어던과 교회』(1934)에서 인격과 개체를 구분했다. 개체는 다른 것과 떨어져 셀 수 있는 하나다. 인격은 다른 인격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혼자서는 인격일 수 없다. 홉스의 국가는 개체들이 공포로 맺은 계약이지만, 교회는 인격들이 사랑으로 이루는 '함께함'(소보르노스트)이다. 그는 악을 신의 실패가 아니라 피조물에게 주어진 자유의 비극적 대가로 해석했다.

안나 쿠즈미나(1893~1977)는 망명 전 독일에서 현상학을 배웠다. 『의식과 몸』(1946)에서 그는 몸을 의식이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세계를 갖는 방식 자체로 보았다. 손으로 컵을 잡을 때 나는 손을 의식하지 않고 컵을 의식한다. 손은 이미 세계 쪽으로 열려 있다. 몸이 다치거나 낯설어질 때에야 우리는 몸을 '대상'으로 의식하게 된다. 그는 루이나 현상학의 창시자다.

8.3. 필요의 철학 [편집]

루이즈 아르노(1889~1957)는 『보존의 국가』(1931)에서 '욕구'와 '필요'를 구분했다. 욕구는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바뀐다. 필요, 곧 먹을 것, 머물 곳, 아플 때의 돌봄은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사람이 해를 입는다는 점에서 객관적이다.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실망하지만,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다친다.

아르노는 홉스가 자기보존을 국가의 존재 이유로 삼았다면, 보존은 칼만으로 지켜지지 않으며 필요의 충족으로 이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웨이크필드의 고통 우선 원칙과 함께 루이나 복지 철학의 두 기둥으로 꼽힌다.

9. 20세기 후반 [편집]

9.1. 법철학 [편집]

법철학자 가스통 브레몽(1902~1981)은 『질서의 조건』(1956)에서 법의 효력이 최종적으로 어디서 나오는지 물었다. 법률은 헌법에서, 헌법은 제정 권력에서 효력을 얻는다. 그러나 그 사슬의 맨 끝에는 법이 아닌 것, 곧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겠다는 결단이 있다. 법은 질서를 전제하며, 질서를 만들지는 못한다.

그는 홉스를 "질서의 철학자"로 읽었고, 질서는 저절로 서지 않는다고 썼다. 그의 법철학은 냉전기 비상사태 법리의 토대가 되었으나, 1980년대 이후 권위주의를 정당화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9.2. 마르크스주의 [편집]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레옹 테시에(1921~1994)는 『공포의 생산』(1968)에서 이데올로기를 공포의 경제로 분석했다. 국가와 언론은 사회의 불안을 단지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고 유통하며, 대중은 그것을 소비하는 대가로 복종을 지불한다.

테시에는 홉스의 자연상태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국가가 자신의 필요성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시 상연해야 하는 연극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근거로 한 무장 투쟁에는 끝까지 반대했다.

9.3. 현상학과 증언의 인식론 [편집]

쥘리에트 로슈포르(1918~1999)는 쿠즈미나의 제자로, 『증언에 관하여』(1972)에서 증언의 인식론을 세웠다. 우리 지식의 대부분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남의 말을 믿은 것이다. 나는 내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지구가 둥근 것을 직접 확인하지 않았으며, 역사는 전부 남의 증언이다.

그렇다면 남의 말을 언제 믿어도 되는가? 로슈포르는 증언을 믿는 일이 지식의 문제이기 전에 신뢰의 문제라고 답했다. 그리고 증언이 체계적으로 조작되는 사회에서는 거짓 하나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지식이라는 제도 자체가 무너진다고 보았다. 르노블의 신뢰론을 인식론으로 옮긴 작업이다.

9.4. 분석철학 [편집]

제임스 할로란(1926~2003)은 『약속과 규칙』(1964)에서 "약속합니다"라는 말이 어떻게 의무를 만드는지 물었다. 그 말은 무언가를 묘사하지 않고 행한다. "약속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곧 약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가 가능한 것은 그런 말을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한 공동체의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할로란은 이를 의미 일반으로 확장했다. 말의 의미는 머릿속 관념이 아니라 공동체의 규칙을 따르는 일이다. 그는 오드런의 "이름은 약속이다"를 현대 언어철학의 정식으로 다시 세웠다.

헬렌 마서(1931~2015)는 『뇌라는 물체』(1967)에서 마음의 상태가 곧 뇌의 상태라는 동일론을 폈다. 번개가 곧 전기 방전이듯 고통은 곧 특정한 신경 활동이며, 그 사실은 개념 분석이 아니라 경험적 탐구로 발견된다. 홉스의 '환영' 이론의 현대판이라는 평을 들었고, 이로써 '벨포르 유물론'이 하나의 학파로 자리 잡았다.

9.5. 구조주의 이후 [편집]

레몽 비달(1930~1992)은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출발해, 기호의 의미가 사물이 아니라 다른 기호와의 차이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빨강'의 의미는 빨간 사물이 아니라 '주황'·'분홍'과 구별되는 데서 나온다.

『기호의 경제』(1974)에서 그는 어떤 차이를 표시하고 어떤 차이를 지울지를 정하는 것이 권력이라고 주장했다. 무엇을 같은 이름으로 묶고 무엇을 다른 이름으로 가를지 정하는 자가 세계의 모양을 정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오드런으로의 귀환'이라 불렀다.

10. 현대 [편집]

10.1. 책임의 윤리학 [편집]

미셸 다르시(1935~2008)는 『책임의 네 겹』(1983)에서 책임을 네 층위로 나누었다. 직접 행한 자의 형사적 책임, 지위와 권한을 가진 자의 정치적 책임, 알면서 침묵한 자의 도덕적 책임, 그리고 그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지는 역사적 책임이다.

다르시가 가장 오래 붙든 물음은 마지막 것, 곧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내가 책임을 질 수 있는가였다. 그의 답은 '죄'는 물려받지 않지만 '응답할 의무'는 물려받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조상이 한 일 때문에 벌받지 않지만, 그 일에 대해 묻는 사람에게 대답해야 한다.

10.2. 홉스 재해석 [편집]

나탈리 오베르(1941~)는 홉스 연구자로, 『배신당한 리바이어던』(1984)에서 홉스를 권위주의의 철학자로 읽는 해석에 반대했다. 홉스의 체계에서 국가가 정당한 이유는 오직 보호에 있다. 따라서 공포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국가는 홉스의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홉스를 권위주의의 근거로 쓰는 것은 그를 절반만 읽은 것이다.

10.3. 돌봄 윤리 [편집]

클라라 몽고메리(1955~)는 델로름을 복권한 돌봄 윤리학자다. 『의존에 관하여』(1991)에서 그는 홉스의 자연상태에는 다 자란 남자들만 있을 뿐 아이도, 노인도, 아픈 사람도 없다고 지적했다. 홉스의 인간은 버섯처럼 땅에서 솟아 곧바로 다 자란 채 서로 마주친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의존 상태로 태어나고 의존 상태로 죽으며, 독립된 성인은 그 사이의 짧은 예외다. 누군가 나를 먹이고 씻기지 않았다면 나는 계약을 맺을 나이까지 살아남지 못했다. 따라서 사회 이론의 출발점은 계약이 아니라 돌봄이어야 한다.

10.4. 탈식민 철학 [편집]

세레나 발로티(1962~)는 콘스탄티노폴 출신 빌베른계 철학자로, 『두 번의 제국』(2004)에서 '번역의 비대칭'을 분석했다. 중세 루이나어가 빌베른어 앞에서 '옮길 말이 없는' 언어였듯, 20세기에는 빌베른계 언어가 루이나어 앞에서 같은 처지가 되었다.

발로티는 카다른이 브렌단의 빈칸이 채워졌다고 한 것에 반대했다. 빈칸은 채워진 것이 아니라 지배의 방향이 바뀌면서 자리만 옮겼다는 것이다. 한 언어의 빈칸이 채워지는 동안, 다른 언어에는 새 빈칸이 생긴다.

10.5. 형이상학 [편집]

이리나 볼코바(1968~)는 양상 형이상학자로, 핀치의 동시적 가능성 개념을 재발굴했다. 『다르게 될 수 있었음』(2001)에서 그는 '가능하다'는 것을 다른 세계의 존재로 설명하는 이론들에 맞섰다. "유리잔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은 유리잔이 깨진 다른 세계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계의 유리잔이 지금 지닌 실제 성향, 곧 깨지기 쉬움을 말하는 것이다. 가능성은 이 세계 바깥이 아니라 이 세계의 사물 안에 있다.

10.6. 심리철학과 기계의 판단 [편집]

사무엘 레비츠키(1970~)는 심리철학자로, 국가 전략 인공지능 도입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판단하는 기계』(2024)를 썼다. 정부와 개발 기관은 이 체계가 '자율적으로 판단한다'고 홍보했지만, 레비츠키는 판단과 계산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홉스는 추론을 계산이라 했고, 그 점에서 기계는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게 추론한다. 그러나 판단은 계산의 결과를 자기 것으로 떠맡고 그에 대해 책임지는 일이다. 쿠즈미나가 말했듯 의식은 몸을 통해 세계를 '갖는' 것인데, 기계는 세계를 계산할 뿐 세계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기계는 계산하고 사람이 판단한다. 판단을 기계에 넘겼다는 말은 실제로는 책임을 아무에게도 넘기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논쟁은 다르시의 책임론과 맞물려 현재 루이나 철학계에서 가장 활발한 분야 중 하나다.

11. 주요 철학자 [편집]

시대
철학자
생몰년
주저
고대
가이우스 렌티우스 알레니우스
120?~185?
『항구에서 보낸 편지』
세베리누스 브리간티누스
410?~480?
『빛과 그림자에 관하여』
중세
브렌단 마크 콜
780?~845?
『두 혀의 책』
아드리아누스 사르비우스
1105?~1172
『보편자에 관하여』
페르구스 오드런
1251?~1309
『말과 사물에 관한 문답』
에일리스 니 카흐린
1285?~1342
『빛나는 어둠의 노래』
리처드 핀치
1318?~1376
『풀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근세 초
윌리엄 그레이브스
1489~1547
『대화의 기술』
이자크 몰랭
1541~1603
『판단 유보에 관한 열 개의 대화』
에드워드 렌
1561~1626
『자연의 심문』
17세기
토머스 홉스
1588~1679
『리바이어던』
에드먼드 칼로웨이
1594~1663
『왕관의 근원』
너새니얼 셰리던
1616~1703
-
랠프 위더스
1617~1688
『영원한 진리에 관하여』
앤 펨브룩
1631~1679
『살아 있는 물질에 관하여』
피에르 데마레
1638~1702
-
18세기
장바티스트 르노블
1711~1774
『신뢰론』
클로드 바르텔르미
1715~1771
『감각의 체계』
조지 케어루
1729~1797
『바다와 숭고에 관하여』
마리안 델로름
1732~1790
『동정에 관하여』
19세기
앙투안 셰브리에
1762~1830
『비판 이후』
오언 카다른
1803~1871
『말의 지층』
알렉시 모랭
1807~1874
-
헨리 웨이크필드
1811~1883
『행복의 계산』
피에르 앙셀
1828~1890
『노동과 지붕』
아이작 펜윅
1831~1894
『사고의 대수』
마르셀 테론
1859~1938
『습관에 관하여』
20세기 전반
로렌스 앨더
1889~1962
『의미의 조건』
마그다 셰르바코바
1897~1971
-
빅토르 하인
1902~1980
-
세르게이 베르흐네프
1884~1961
『리바이어던과 교회』
안나 쿠즈미나
1893~1977
『의식과 몸』
루이즈 아르노
1889~1957
『보존의 국가』
20세기 후반
가스통 브레몽
1902~1981
『질서의 조건』
레옹 테시에
1921~1994
『공포의 생산』
쥘리에트 로슈포르
1918~1999
『증언에 관하여』
제임스 할로란
1926~2003
『약속과 규칙』
헬렌 마서
1931~2015
『뇌라는 물체』
레몽 비달
1930~1992
『기호의 경제』
현대
미셸 다르시
1935~2008
『책임의 네 겹』
나탈리 오베르
1941~
『배신당한 리바이어던』
클라라 몽고메리
1955~
『의존에 관하여』
세레나 발로티
1962~
『두 번의 제국』
이리나 볼코바
1968~
『다르게 될 수 있었음』
사무엘 레비츠키
1970~
『판단하는 기계』
[1] 다르시의 『책임의 네 겹』이 넷으로 나눈 것을 두고 "루이나 철학자가 셋을 넘긴 드문 사례"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2] 말년에 라틴어 운문으로 쓴 자서전의 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