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편집]
북산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북산의 역사는 크게 다섯 층으로 나뉜다. 산악 부족 연맹이 세운 고대 왕국 고북산, 몽골 제국이 이주민을 옮겨 세운 소(昭)나라, 1398년 카게무라 하세가와의 통일로 시작된 하세가와 왕조, 1861년 개혁정변 이후의 근대 국가와 식민 제국, 그리고 1948년 이후의 공화국이다. 오늘날의 북산인과 북산어는 이 가운데 두 번째 층, 곧 13~14세기의 강제 이주에서 직접 기원하지만, 국호와 건국 서사는 첫 번째 층에서 빌려 왔다. 이 어긋남은 북산의 역사 서술이 처음부터 정통성의 문제와 얽혀 있었음을 보여 준다.
북산 정치사를 관통하는 논점은 '누구의 질서 안에 있는가'이다. 북산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청평의 책봉을 받는 제후국이었고, 1929년에는 거꾸로 청평을 정복해 20년간 식민지로 삼았으며, 1949년 그 식민지를 잃은 뒤로는 루이나의 원조와 군사 보호에 기대는 나라가 되었다. 종속에서 지배로, 지배에서 다시 의존으로 이어진 이 궤적은 북산의 대외 정책과 국내 정치를 오늘날까지 규정하고 있다.
또 하나의 축은 무력과 정통성의 관계다. 북산의 역대 체제는 대부분 무력을 가진 집단이 세웠으나, 그 권력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언제나 바깥에서 빌려 왔다. 하세가와 왕조는 청평의 책봉에, 유신 정부는 국왕의 이름에, 1948년 이후의 공화국은 루이나와의 동맹에 기댔다. 무신정변과 1·23 사건처럼 이 구도에 정면으로 도전한 시도는 모두 외부 후원자의 개입으로 끝났다.
북산의 역사는 크게 다섯 층으로 나뉜다. 산악 부족 연맹이 세운 고대 왕국 고북산, 몽골 제국이 이주민을 옮겨 세운 소(昭)나라, 1398년 카게무라 하세가와의 통일로 시작된 하세가와 왕조, 1861년 개혁정변 이후의 근대 국가와 식민 제국, 그리고 1948년 이후의 공화국이다. 오늘날의 북산인과 북산어는 이 가운데 두 번째 층, 곧 13~14세기의 강제 이주에서 직접 기원하지만, 국호와 건국 서사는 첫 번째 층에서 빌려 왔다. 이 어긋남은 북산의 역사 서술이 처음부터 정통성의 문제와 얽혀 있었음을 보여 준다.
북산 정치사를 관통하는 논점은 '누구의 질서 안에 있는가'이다. 북산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청평의 책봉을 받는 제후국이었고, 1929년에는 거꾸로 청평을 정복해 20년간 식민지로 삼았으며, 1949년 그 식민지를 잃은 뒤로는 루이나의 원조와 군사 보호에 기대는 나라가 되었다. 종속에서 지배로, 지배에서 다시 의존으로 이어진 이 궤적은 북산의 대외 정책과 국내 정치를 오늘날까지 규정하고 있다.
또 하나의 축은 무력과 정통성의 관계다. 북산의 역대 체제는 대부분 무력을 가진 집단이 세웠으나, 그 권력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언제나 바깥에서 빌려 왔다. 하세가와 왕조는 청평의 책봉에, 유신 정부는 국왕의 이름에, 1948년 이후의 공화국은 루이나와의 동맹에 기댔다. 무신정변과 1·23 사건처럼 이 구도에 정면으로 도전한 시도는 모두 외부 후원자의 개입으로 끝났다.
2. 고대 [편집]
2.1. 고북산 [편집]
고북산(古北山)은 오늘날 북산 북부의 고원과 산악지대에 자리했던 고대 왕국을 가리키는 후대의 역사학 용어다. 이 왕국이 스스로를 무엇이라 불렀는지는 전하지 않으며, 동시대 기록은 대부분 남쪽 사랜드 측의 사료와 고고학 자료에 의존한다. 사랜드 측 기록은 이들을 '북쪽 산의 사람들'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불렀다. 1398년 새 왕조가 국호를 정하면서 이 표현을 한자로 옮긴 '북산(北山)'을 채택했고, 이후 옛 왕국을 구분하기 위해 '고북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고북산은 여러 부족 연맹이 하나의 왕권 아래 통합되면서 성립했다. 척박한 산지에서 잡곡 농업을 하면서 목축과 사냥을 겸했고, 이러한 생활 양식 때문에 일찍부터 무장한 전사 집단이 사회의 중심을 이루었다. 산의 정상과 수원을 신성시하는 산악 신앙이 왕권의 종교적 기반이었으며, 왕은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최고 제사장을 겸했다.
고고학적으로 고북산은 산등성이를 따라 쌓은 석축 산성과 계단식 경작지, 산 정상의 제단 유적으로 확인된다. 북부 고원에서는 사랜드제 청동기와 화폐가 함께 출토되어, 전쟁과 별개로 두 지역 사이에 교역이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다만 고북산의 왕도가 어디였는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며, 사랜드 측 기록의 지명과 실제 유적을 맞추는 작업은 오늘날에도 논쟁 중이다.
고북산의 언어는 오늘날의 북산어와 계통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일부 산과 강의 이름, 산악 신앙의 의례 용어에만 흔적이 남아 있으며, 북부 산악 지방의 방언에 남은 몇몇 어휘가 고북산어에서 왔다는 주장이 있으나 학계의 합의는 없다.
고북산은 여러 부족 연맹이 하나의 왕권 아래 통합되면서 성립했다. 척박한 산지에서 잡곡 농업을 하면서 목축과 사냥을 겸했고, 이러한 생활 양식 때문에 일찍부터 무장한 전사 집단이 사회의 중심을 이루었다. 산의 정상과 수원을 신성시하는 산악 신앙이 왕권의 종교적 기반이었으며, 왕은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최고 제사장을 겸했다.
고고학적으로 고북산은 산등성이를 따라 쌓은 석축 산성과 계단식 경작지, 산 정상의 제단 유적으로 확인된다. 북부 고원에서는 사랜드제 청동기와 화폐가 함께 출토되어, 전쟁과 별개로 두 지역 사이에 교역이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다만 고북산의 왕도가 어디였는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며, 사랜드 측 기록의 지명과 실제 유적을 맞추는 작업은 오늘날에도 논쟁 중이다.
고북산의 언어는 오늘날의 북산어와 계통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일부 산과 강의 이름, 산악 신앙의 의례 용어에만 흔적이 남아 있으며, 북부 산악 지방의 방언에 남은 몇몇 어휘가 고북산어에서 왔다는 주장이 있으나 학계의 합의는 없다.
2.2. 사랜드의 침공 [편집]
기원후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중반까지, 남쪽의 사랜드 제국은 수십 년 간격으로 세 차례 고북산 정복을 시도했다. 기원전 2세기에 이미 청평 지역을 정복한 사랜드는 동방 변경을 완성하려면 북쪽 산악지대를 제국 질서에 편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첫 번째 침공에서 사랜드군은 대군을 동원해 남부 평야를 장악하려 했으나, 산악을 오가는 매복과 기습에 보급로가 끊기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 철수했다. 두 번째 침공은 더 치밀하게 준비되어 성곽 도시 몇 곳을 점령했지만, 각지의 부족 세력과 귀족이 독자적으로 항전하면서 점령지를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세 번째 침공은 사랜드가 총력을 기울인 원정이었다. 원정군은 고북산의 수도를 직접 공격해 불태웠고, 이 전쟁은 고북산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로마 제국이 사랜드의 서부를 공격하면서, 수도가 위협받던 사랜드는 동방의 변경에 더 이상 병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최후의 방어선에서 왕실과 무사 집단이 버티는 사이 원정군은 철수했다. 북산의 전통 사학은 이를 고북산의 승리로 서술해 왔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로마와 사랜드의 전쟁이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통설이다.
첫 번째 침공에서 사랜드군은 대군을 동원해 남부 평야를 장악하려 했으나, 산악을 오가는 매복과 기습에 보급로가 끊기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 철수했다. 두 번째 침공은 더 치밀하게 준비되어 성곽 도시 몇 곳을 점령했지만, 각지의 부족 세력과 귀족이 독자적으로 항전하면서 점령지를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세 번째 침공은 사랜드가 총력을 기울인 원정이었다. 원정군은 고북산의 수도를 직접 공격해 불태웠고, 이 전쟁은 고북산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로마 제국이 사랜드의 서부를 공격하면서, 수도가 위협받던 사랜드는 동방의 변경에 더 이상 병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최후의 방어선에서 왕실과 무사 집단이 버티는 사이 원정군은 철수했다. 북산의 전통 사학은 이를 고북산의 승리로 서술해 왔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로마와 사랜드의 전쟁이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통설이다.
2.3. 고북산의 해체와 분립기 [편집]
세 차례 전쟁을 막아 낸 대가는 컸다. 수십 년에 걸친 전쟁으로 농토가 황폐해지고 국고가 바닥났으며, 전쟁 영웅을 자처하는 귀족과 무사 집단이 왕권을 부정하면서 왕위 계승 분쟁이 이어졌다. 고북산 왕조는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 사이에 해체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이 지역은 성채를 중심으로 한 작은 수장국들이 흩어져 있는 상태로 오랜 기간을 보냈다.
4세기부터 13세기까지의 약 900년은 북산사에서 기록이 가장 부족한 시기로, 역사학에서는 이를 분립기(分立期)라 부른다. 8세기 이후 서쪽에서 제정 사랜드가 성립하자 남부 평야의 수장국 일부는 제정 사랜드에 공납을 바쳤고, 산악 깊숙한 곳의 공동체는 사실상 독립을 유지했다. 이 시기의 주민은 고북산 계열의 토착민이었으며, 산악 신앙과 부족 단위의 생활 방식은 큰 변화 없이 이어졌다.
4세기부터 13세기까지의 약 900년은 북산사에서 기록이 가장 부족한 시기로, 역사학에서는 이를 분립기(分立期)라 부른다. 8세기 이후 서쪽에서 제정 사랜드가 성립하자 남부 평야의 수장국 일부는 제정 사랜드에 공납을 바쳤고, 산악 깊숙한 곳의 공동체는 사실상 독립을 유지했다. 이 시기의 주민은 고북산 계열의 토착민이었으며, 산악 신앙과 부족 단위의 생활 방식은 큰 변화 없이 이어졌다.
3. 소나라 [편집]
3.1. 몽골의 침입과 정사주관 [편집]
13세기 중엽 몽골 제국의 원정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제정 사랜드의 동부는 초토화되었다. 몽골군은 항복하지 않은 성채를 파괴하고 주민을 학살하거나 끌고 갔으며, 분립기의 수장국들도 대부분 이때 소멸했다. 인구가 급감하면서 오늘날 북산 영토의 평야와 해안 지대는 사실상 비어 있는 땅이 되었다. 이 지역의 유적 가운데 이 시기 이전의 건물이 석축 이상으로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1265년 몽골은 점령지 관리를 위한 군사·행정 기구로 정사주관(征沙洲館)을 설치했다. 정사주관은 처음에는 원정군의 보급 기지였으나, 원이 성립한 뒤에는 둔전을 경영하고 이주민을 배치하는 기구로 성격이 바뀌었다.
1265년 몽골은 점령지 관리를 위한 군사·행정 기구로 정사주관(征沙洲館)을 설치했다. 정사주관은 처음에는 원정군의 보급 기지였으나, 원이 성립한 뒤에는 둔전을 경영하고 이주민을 배치하는 기구로 성격이 바뀌었다.
3.2. 강제 이주 [편집]
원은 황폐해진 동부를 다시 경작지로 만들고 변경을 지킬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 강제 이주를 실시했다. 이주민은 크게 세 집단이었다. 하나는 고려에서 징발된 농민과 장인, 다른 하나는 화북 출신의 한인 군호(軍戶)와 문서 행정을 맡은 서리층, 그리고 마지막이 열도인이었다. 열도인은 원의 일본 원정 과정에서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과 이후 여러 경로로 원의 군호에 편입된 집단으로 이루어졌는데, 정사주관은 이들을 주로 둔전병으로 편성해 해안과 평야의 변경 거점에 배치했다. 같은 시기 원은 청평 남쪽의 저지대, 곧 오늘날의 동사랜드에도 대월(大越) 원정에서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과 남방 변경의 대월계 주민을 옮겨 둔전을 경영하게 했다.
이주 규모는 사료에 따라 수만에서 수십만까지 크게 차이가 나며,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주가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전반까지 수십 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이루어졌고, 둔전병으로 편성된 열도인 집단이 무장과 토지를 함께 보유했다는 점은 여러 사료가 일치한다. 이 때문에 열도인의 언어가 군사와 촌락의 공용어로 자리 잡았고, 고려어는 농사와 생활 어휘로, 한어는 문서 행정의 한자어로 흡수되었다. 오늘날 북산어가 열도계 언어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한자어와 고려어계 어휘를 많이 포함하는 것은 이 시기의 결과로 설명된다.
이주 규모는 사료에 따라 수만에서 수십만까지 크게 차이가 나며,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주가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전반까지 수십 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이루어졌고, 둔전병으로 편성된 열도인 집단이 무장과 토지를 함께 보유했다는 점은 여러 사료가 일치한다. 이 때문에 열도인의 언어가 군사와 촌락의 공용어로 자리 잡았고, 고려어는 농사와 생활 어휘로, 한어는 문서 행정의 한자어로 흡수되었다. 오늘날 북산어가 열도계 언어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한자어와 고려어계 어휘를 많이 포함하는 것은 이 시기의 결과로 설명된다.
3.3. 소나라의 성립 [편집]
1287년 원은 정사주관을 개편하고 원 황실의 방계 왕족을 왕으로 봉해 제후국을 세웠다. 이것이 소(昭)나라다. 소나라의 왕은 원 황실에 대한 충성을 조건으로 봉해진 몽골 귀족이었고, 실제 통치는 정사주관 출신 관료와 이주민 둔전군의 지휘관들이 맡았다. 소나라는 원의 역참망과 연결되어 곡물과 목재를 원으로 보냈으며, 원은 소나라의 둔전군을 서쪽 변경의 방위에 동원했다.
소나라 사회는 출신 집단에 따라 층이 나뉘어 있었다. 몽골 귀족과 한인 서리가 상층을, 열도인 둔전병 지휘관이 무장 세력을 이루었고, 고려인과 열도인 농민이 촌락을 구성했다. 산악 지대로 밀려난 고북산 계열 토착민은 공납을 바치며 제한적인 자치를 유지했다. 한인 서리층을 통해 한자와 불교, 그리고 성리학이 이 지역에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들어왔다.
소나라의 기본 단위는 둔전이었다. 정사주관 시절부터 이주민은 군호 단위로 묶여 일정한 토지를 받았고, 평시에는 농사를 짓다가 동원령이 내려지면 병력으로 나갔다. 둔전은 대개 강 하구의 평야와 해안의 항구 주변에 집중되었는데, 오늘날 북산의 주요 도시 상당수가 이 둔전 거점에서 출발했다. 수도 신린 역시 소나라의 치소가 있던 둔전 도시였다.
종교적으로는 이주민이 가져온 불교가 촌락 단위로 퍼지는 한편, 토착민의 산악 신앙이 이주민 사회에 흡수되었다. 이주민들은 낯선 땅의 산과 강에 제사를 지내며 토착의 신들을 자신들의 신앙 안에 받아들였고, 오늘날 북산 민족종교의 핵심인 산신 숭배는 이 혼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14세기 초가 되면 둔전병 지휘관들은 자신이 관리하던 둔전과 병력을 자식에게 물려주기 시작했다. 원래 국가의 둔전이던 토지가 지휘관 가문의 사실상의 영지가 된 것이며, 이들이 훗날 전국시대 영주 가문의 모체가 된다.
소나라 사회는 출신 집단에 따라 층이 나뉘어 있었다. 몽골 귀족과 한인 서리가 상층을, 열도인 둔전병 지휘관이 무장 세력을 이루었고, 고려인과 열도인 농민이 촌락을 구성했다. 산악 지대로 밀려난 고북산 계열 토착민은 공납을 바치며 제한적인 자치를 유지했다. 한인 서리층을 통해 한자와 불교, 그리고 성리학이 이 지역에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들어왔다.
소나라의 기본 단위는 둔전이었다. 정사주관 시절부터 이주민은 군호 단위로 묶여 일정한 토지를 받았고, 평시에는 농사를 짓다가 동원령이 내려지면 병력으로 나갔다. 둔전은 대개 강 하구의 평야와 해안의 항구 주변에 집중되었는데, 오늘날 북산의 주요 도시 상당수가 이 둔전 거점에서 출발했다. 수도 신린 역시 소나라의 치소가 있던 둔전 도시였다.
종교적으로는 이주민이 가져온 불교가 촌락 단위로 퍼지는 한편, 토착민의 산악 신앙이 이주민 사회에 흡수되었다. 이주민들은 낯선 땅의 산과 강에 제사를 지내며 토착의 신들을 자신들의 신앙 안에 받아들였고, 오늘날 북산 민족종교의 핵심인 산신 숭배는 이 혼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14세기 초가 되면 둔전병 지휘관들은 자신이 관리하던 둔전과 병력을 자식에게 물려주기 시작했다. 원래 국가의 둔전이던 토지가 지휘관 가문의 사실상의 영지가 된 것이며, 이들이 훗날 전국시대 영주 가문의 모체가 된다.
3.4. 소나라의 해체 [편집]
14세기 중엽 원이 내분과 반란으로 흔들리면서 소나라는 본국과의 연결을 잃었다. 원의 지원과 책봉에 권위를 의존하던 소나라 왕실은 1350년대부터 둔전군 지휘관들을 통제하지 못했고, 1368년 원이 명에 밀려 북쪽으로 물러나자 사실상 무너졌다. 마지막 소왕이 몽골 초원으로 돌아가려다 도중에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는다.
4. 전국시대 [편집]
소나라가 흔들리던 1350년대 중반부터 북산 지역은 둔전군 지휘관 출신의 무장 세력들이 영지를 두고 다투는 시대로 들어갔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때부터 1398년 통일까지의 약 40년을 전국시대(戰國時代)라 부른다.
전국시대 영주들은 소나라에서 물려받은 둔전과 병력을 기반으로 성채를 쌓고, 자기 영지 안에서 세금을 걷고 법을 정했다. 이들은 원이나 소나라 왕실의 권위를 빌리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이들을 봉건 귀족의 후계자가 아니라 무력으로 권력을 쥔 전사 군주로 보아 전국영주(戰國領主)라 부른다. 동맹과 배신이 반복되었고, 주군을 몰아내고 스스로 영주가 되는 하극상도 흔했다. 한때 넓은 영역을 지배하던 가문이 하룻밤 사이에 멸망하는가 하면, 변방의 무명 세력이 전투 한 번으로 강자가 되기도 했다.
혼란은 사회 전체를 흔들었다. 농민은 전쟁 동원과 수탈에 시달렸지만, 일부는 공을 세워 무사로 올라섰고 군수 물자를 대던 상인들은 막대한 부를 쌓았다. 역설적으로 전국시대는 계층 이동이 활발한 시기이기도 했다. 철제 무기의 대량 보급과 보병 중심의 전술, 성곽 축조 기술이 이 시기에 크게 발전했다.
무사 계급은 이 시기 사회의 중심 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주군에 대한 충성과 용맹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가치관이 무사층에 퍼졌고, 후대에 무사도로 정리되는 규범의 뿌리가 이때 형성되었다. 이주민 집단 사이의 경계도 전쟁을 거치며 흐려졌다. 영주들은 출신을 가리지 않고 병력과 인재를 모았고, 열도인·고려인·한인의 후손은 한두 세대 사이에 같은 언어를 쓰는 하나의 집단으로 섞여 갔다. 오늘날 북산 민족의 형성을 이 시기로 보는 견해가 많은 이유다.
통일을 시도한 인물도 여럿 나타났다. 북부의 아라카네 슈겐은 1360년대에 수십 개의 성을 차지하며 패권에 가장 가까이 갔으나, 1371년 가신의 반란으로 암살되었다. 이어 남부 해안의 도하라 겐류가 농민과 상인 세력을 끌어들여 1370년대 후반 북산 대부분을 장악했고, 잠시나마 통일에 가까운 질서를 세웠다. 두 사람의 시대를 합쳐 아라도하라 시대(荒土原時代)라 부르며, 영주들이 학자와 예술가를 후원한 덕분에 북산 고유의 회화와 연극이 처음 꽃핀 시기로도 평가된다. 그러나 1383년 겐류가 죽자 그의 가신단은 후계를 두고 분열했고, 북산은 다시 전란에 빠졌다.
전국시대 영주들은 소나라에서 물려받은 둔전과 병력을 기반으로 성채를 쌓고, 자기 영지 안에서 세금을 걷고 법을 정했다. 이들은 원이나 소나라 왕실의 권위를 빌리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이들을 봉건 귀족의 후계자가 아니라 무력으로 권력을 쥔 전사 군주로 보아 전국영주(戰國領主)라 부른다. 동맹과 배신이 반복되었고, 주군을 몰아내고 스스로 영주가 되는 하극상도 흔했다. 한때 넓은 영역을 지배하던 가문이 하룻밤 사이에 멸망하는가 하면, 변방의 무명 세력이 전투 한 번으로 강자가 되기도 했다.
혼란은 사회 전체를 흔들었다. 농민은 전쟁 동원과 수탈에 시달렸지만, 일부는 공을 세워 무사로 올라섰고 군수 물자를 대던 상인들은 막대한 부를 쌓았다. 역설적으로 전국시대는 계층 이동이 활발한 시기이기도 했다. 철제 무기의 대량 보급과 보병 중심의 전술, 성곽 축조 기술이 이 시기에 크게 발전했다.
무사 계급은 이 시기 사회의 중심 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주군에 대한 충성과 용맹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가치관이 무사층에 퍼졌고, 후대에 무사도로 정리되는 규범의 뿌리가 이때 형성되었다. 이주민 집단 사이의 경계도 전쟁을 거치며 흐려졌다. 영주들은 출신을 가리지 않고 병력과 인재를 모았고, 열도인·고려인·한인의 후손은 한두 세대 사이에 같은 언어를 쓰는 하나의 집단으로 섞여 갔다. 오늘날 북산 민족의 형성을 이 시기로 보는 견해가 많은 이유다.
통일을 시도한 인물도 여럿 나타났다. 북부의 아라카네 슈겐은 1360년대에 수십 개의 성을 차지하며 패권에 가장 가까이 갔으나, 1371년 가신의 반란으로 암살되었다. 이어 남부 해안의 도하라 겐류가 농민과 상인 세력을 끌어들여 1370년대 후반 북산 대부분을 장악했고, 잠시나마 통일에 가까운 질서를 세웠다. 두 사람의 시대를 합쳐 아라도하라 시대(荒土原時代)라 부르며, 영주들이 학자와 예술가를 후원한 덕분에 북산 고유의 회화와 연극이 처음 꽃핀 시기로도 평가된다. 그러나 1383년 겐류가 죽자 그의 가신단은 후계를 두고 분열했고, 북산은 다시 전란에 빠졌다.
5. 하세가와 왕조 [편집]
5.1. 통일과 건국 [편집]
전국시대의 마지막 승자는 카게무라 하세가와(長谷川 景村)였다. 그는 남서부 변경의 작은 영주였는데, 가문은 본래 둔전의 농노였다가 전국시대 초에 무공으로 무사가 된 집안이었다. 하세가와는 도하라 가신단의 분열을 틈타 세력을 넓혔고, 전쟁에 지친 농민과 상인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한편 구 영주 가문과 신흥 세력을 혼인과 관직으로 묶었다. 그의 세력은 단순한 군벌이 아니라 새 왕조를 준비하는 정치 공동체에 가까웠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390년의 로쿠 평원 전투였다. 하세가와는 이 전투에서 남부 최대 세력인 도하라 가신단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중부 평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이후 경쟁 세력을 차례로 제압해 1383년부터 15년에 걸친 전쟁을 끝냈고, 1398년 소나라의 옛 치소였던 신린에 입성해 국왕을 칭했다. 그는 국호를 '북산'이라 정해 이 땅의 고대 왕국을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농노 출신 가문이 세운 이주민의 나라가 천 년 전 토착 왕국의 이름을 빌려 온 것이며, 이는 새 왕조의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390년의 로쿠 평원 전투였다. 하세가와는 이 전투에서 남부 최대 세력인 도하라 가신단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중부 평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이후 경쟁 세력을 차례로 제압해 1383년부터 15년에 걸친 전쟁을 끝냈고, 1398년 소나라의 옛 치소였던 신린에 입성해 국왕을 칭했다. 그는 국호를 '북산'이라 정해 이 땅의 고대 왕국을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농노 출신 가문이 세운 이주민의 나라가 천 년 전 토착 왕국의 이름을 빌려 온 것이며, 이는 새 왕조의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5.2. 체제 정비 [편집]
하세가와가 가장 먼저 단행한 것은 사병 철폐였다. 통일 직후 모든 영주에게 병력 해산을 명했고, 이를 거부한 영주는 즉시 토벌했다. 해산된 병력은 국왕 직속군으로 재편되어 군사권이 중앙에 집중되었다. 영주들은 봉토와 지위를 보장받았지만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의 통제를 받게 되어,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워졌다. 하세가와는 전국을 신린·후잔·로쿠·하쿠센의 네 도(道)로 나누고 도마다 관찰관을 두었는데, 이 구획은 오늘날 북산의 광역 행정구역으로 이어지고 있다.
통치 이념으로는 성리학이 채택되었다. 성리학은 소나라 시기 한인 서리층을 통해 이미 들어와 있었는데, 하세가와는 이들의 후손인 문인들을 등용해 국가 이념을 정비하고 과거제와 비슷한 시험 제도를 도입했다. 이렇게 형성된 문신(文臣) 계급이 행정과 정치를 맡았고, 무사 계급은 국왕의 군대에 흡수되어 군사적 기능으로 한정되었다. 북산 왕국은 무력으로 세워졌지만 운영은 문치(文治)를 지향했다.
경제적으로는 전란으로 황폐해진 농업을 되살리기 위한 수리 사업과 토지 제도 개편이 이루어졌다. 농민에게 일정한 경작권을 보장해 생산을 끌어올렸고, 상업을 장려해 수도 신린과 동해안의 항구 도시들이 빠르게 성장했다. 북방의 마베라와는 국경에 교역장을 두어 충돌을 줄였다. 전국시대 무사층의 가치이던 충(忠)과 용(勇)은 성리학적 질서 안으로 편입되어 왕조의 통치 이념이 되었다.
통치 이념으로는 성리학이 채택되었다. 성리학은 소나라 시기 한인 서리층을 통해 이미 들어와 있었는데, 하세가와는 이들의 후손인 문인들을 등용해 국가 이념을 정비하고 과거제와 비슷한 시험 제도를 도입했다. 이렇게 형성된 문신(文臣) 계급이 행정과 정치를 맡았고, 무사 계급은 국왕의 군대에 흡수되어 군사적 기능으로 한정되었다. 북산 왕국은 무력으로 세워졌지만 운영은 문치(文治)를 지향했다.
경제적으로는 전란으로 황폐해진 농업을 되살리기 위한 수리 사업과 토지 제도 개편이 이루어졌다. 농민에게 일정한 경작권을 보장해 생산을 끌어올렸고, 상업을 장려해 수도 신린과 동해안의 항구 도시들이 빠르게 성장했다. 북방의 마베라와는 국경에 교역장을 두어 충돌을 줄였다. 전국시대 무사층의 가치이던 충(忠)과 용(勇)은 성리학적 질서 안으로 편입되어 왕조의 통치 이념이 되었다.
5.3. 신분 질서와 궁정 [편집]
하세가와 왕조의 사회는 이른바 4민 3신(四民三臣)의 질서로 짜여 있었다. 4민은 국왕의 군대를 이루는 무사 계급인 군신(軍臣), 학식과 시험으로 관료가 되는 사가(士家), 농사와 병역을 함께 지는 농병(農兵), 그리고 장인과 상인, 노비를 아우르는 상민(常民)이었다. 농병이라는 이름은 소나라의 둔전병 제도에서 온 것으로, 평시에는 농사를 짓고 유사시에는 마을 단위로 동원되는 의무를 지녔다. 법적 보호는 위로 갈수록 두터웠고, 상민은 재산과 생명에 대한 보호가 가장 약했다.
3신은 정식 신분 체계 밖에서 궁정을 둘러싼 비공식 권력을 형성한 외척(外戚), 환관(宦官), 사제(司祭)를 가리킨다. 이 가운데 사제는 북산 특유의 존재였다. 소나라 시기 이주민 신앙과 토착 산악 신앙이 섞여 생긴 산신 숭배는 왕조 성립 후 국가 제사로 편입되었고, 왕궁의 봉천사(奉天司)와 전국의 소사전(小祀殿)에 소속된 사제들이 의례를 맡았다. 국왕은 성리학적 군주인 동시에 산신과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최고 제사장이었으며, 사제층은 이 의례를 매개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늘날 북산 인구의 절반 이상이 믿는 민족종교는 이 국가 제사의 전통에서 이어진 것이다.
3신은 정식 신분 체계 밖에서 궁정을 둘러싼 비공식 권력을 형성한 외척(外戚), 환관(宦官), 사제(司祭)를 가리킨다. 이 가운데 사제는 북산 특유의 존재였다. 소나라 시기 이주민 신앙과 토착 산악 신앙이 섞여 생긴 산신 숭배는 왕조 성립 후 국가 제사로 편입되었고, 왕궁의 봉천사(奉天司)와 전국의 소사전(小祀殿)에 소속된 사제들이 의례를 맡았다. 국왕은 성리학적 군주인 동시에 산신과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최고 제사장이었으며, 사제층은 이 의례를 매개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늘날 북산 인구의 절반 이상이 믿는 민족종교는 이 국가 제사의 전통에서 이어진 것이다.
5.4. 청평과의 책봉 관계 [편집]
1412년 남쪽에서 려우 다이가 몽골 세력을 몰아내고 청평대제국을 세우자, 하세가와는 곧바로 사절을 보냈다. 1414년 북산 국왕은 청평 황제로부터 왕으로 책봉을 받았다. 농노 출신 가문이라는 약점을 안고 있던 하세가와에게 책봉은 '국제 질서 속에서 인정받은 군주'라는 외형을 주는 수단이었고, 청평에게는 북방 국경을 전쟁 없이 안정시키는 수단이었다.
초기의 책봉 관계는 상호 이익의 성격이 강했다. 북산은 말과 모피, 인삼, 은을 바쳤고 청평은 비단과 도자기, 서적과 철기를 내려 주었다. 그러나 청평이 전성기를 맞은 17세기에 조공은 해마다 사절을 보내는 정례 의무로 굳어졌고, 청평은 북산의 왕위 계승과 외교 노선에도 개입했다. 북산 귀족 자제들이 띠에우리엔에 유학하고 청평의 율령과 의례가 북산 궁정에 도입되는 동안, 북산 사신이 청평 궁정에서 올리는 절은 종속의 상징이 되었다. 이는 훗날 북산 근대 민족주의가 '굴욕의 역사'로 기억하는 대상이 된다.
책봉 관계에 대한 반발도 꾸준히 있었다. 특히 북부 변경의 귀족들은 청평의 간섭을 굴욕으로 여겨 간헐적으로 봉기했으나, 역대 국왕은 책봉이 왕조의 안정을 보장한다고 판단해 이들을 제어했다.
청평의 책봉국은 북산만이 아니었다. 1420년에는 청평 남쪽의 남꽝 왕국, 곧 오늘날의 동사랜드도 책봉을 받았다. 1876년 북산이 조공을 일방적으로 중단한 뒤 청평에 남은 책봉국은 남꽝 하나뿐이었고, 1929년 북산은 청평을 정복하면서 이 마지막 책봉 관계까지 끊게 된다.
초기의 책봉 관계는 상호 이익의 성격이 강했다. 북산은 말과 모피, 인삼, 은을 바쳤고 청평은 비단과 도자기, 서적과 철기를 내려 주었다. 그러나 청평이 전성기를 맞은 17세기에 조공은 해마다 사절을 보내는 정례 의무로 굳어졌고, 청평은 북산의 왕위 계승과 외교 노선에도 개입했다. 북산 귀족 자제들이 띠에우리엔에 유학하고 청평의 율령과 의례가 북산 궁정에 도입되는 동안, 북산 사신이 청평 궁정에서 올리는 절은 종속의 상징이 되었다. 이는 훗날 북산 근대 민족주의가 '굴욕의 역사'로 기억하는 대상이 된다.
책봉 관계에 대한 반발도 꾸준히 있었다. 특히 북부 변경의 귀족들은 청평의 간섭을 굴욕으로 여겨 간헐적으로 봉기했으나, 역대 국왕은 책봉이 왕조의 안정을 보장한다고 판단해 이들을 제어했다.
청평의 책봉국은 북산만이 아니었다. 1420년에는 청평 남쪽의 남꽝 왕국, 곧 오늘날의 동사랜드도 책봉을 받았다. 1876년 북산이 조공을 일방적으로 중단한 뒤 청평에 남은 책봉국은 남꽝 하나뿐이었고, 1929년 북산은 청평을 정복하면서 이 마지막 책봉 관계까지 끊게 된다.
5.5. 무신정변 [편집]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문치 체제의 모순이 드러났다. 문신 관료가 정치를 독점하면서 무사 계급은 군사 실무에서조차 밀려났고, 국경 분쟁에서 경험 없는 문신이 전략을 주도해 패전이 반복되었다. 1453년 수도의 무사 집단이 궁궐을 장악하고 문신 관료 수백 명을 숙청했는데, 이를 무신정변(武臣政變)이라 부른다. 정변을 이끈 오니즈카 다다마사(鬼塚 忠正)는 "문신의 나라가 나라를 망친다"며 정권을 정당화했고, 국왕은 한동안 무신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무신 정권은 13년 만에 무너졌다. 무신들 사이의 권력 다툼이 이어진 데다, 청평이 무신이 옹립한 국왕의 책봉을 미루면서 정권의 정통성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1466년 국왕은 청평의 지지를 배경으로 문신 세력을 복권시키고 친정을 회복했다.
이 경험은 두 가지 유산을 남겼다. 하나는 청평의 책봉이 북산 왕권의 실질적 보증 장치가 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문신들이 무사를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1471년 설립된 사육당(士育堂)은 무사 가문의 자제를 문신의 감독 아래 교육해 충성을 길들이려는 기관이었다. 무사를 길들이려고 만든 이 기관은 400년 뒤 북산 장교단의 산실이 된다.
무신 정권은 13년 만에 무너졌다. 무신들 사이의 권력 다툼이 이어진 데다, 청평이 무신이 옹립한 국왕의 책봉을 미루면서 정권의 정통성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1466년 국왕은 청평의 지지를 배경으로 문신 세력을 복권시키고 친정을 회복했다.
이 경험은 두 가지 유산을 남겼다. 하나는 청평의 책봉이 북산 왕권의 실질적 보증 장치가 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문신들이 무사를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1471년 설립된 사육당(士育堂)은 무사 가문의 자제를 문신의 감독 아래 교육해 충성을 길들이려는 기관이었다. 무사를 길들이려고 만든 이 기관은 400년 뒤 북산 장교단의 산실이 된다.
5.6. 근세의 정체 [편집]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북산 왕국은 외형상 안정을 유지했으나, 체제는 점차 경직되었다. 무신정변 이후 복귀한 문신들은 이전보다 보수적으로 변해 군비 확충과 실용적 개혁을 경계했고, 성리학적 의례와 명분 논쟁이 정치의 중심을 차지했다. 무사 계급은 직업 군인이라기보다 녹봉을 받는 세습 신분으로 변해 갔고, 군사 기술은 산성과 지형에 의존한 방어 전략에 머물렀다.
그 사이 경제와 문화는 나름의 성장을 이어 갔다. 동해안의 호라쿠를 비롯한 항구 도시에서 상인층이 성장했고, 청평과의 조공 무역에 딸린 사무역이 이들의 주된 수입원이 되었다. 신린에는 상설 극장과 서점이 들어섰고, 전국시대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연극과 목판 소설이 도시 서민층에 널리 읽혔다. 무사의 충성과 죽음을 미화한 이 대중문화는 정작 무사가 정치에서 밀려나 있던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현실의 무사보다 이상화된 무사를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인구 증가로 토지가 부족해지자 소작과 부채에 시달리는 농민이 늘었다. 문신 관료의 녹봉과 궁정 의례에 드는 비용은 늘어나는데 세수는 정체되었고, 조정은 부족분을 새로운 잡세로 메웠다. 18세기에는 농민 봉기와 하급 무사의 소요가 잇따랐으며, 봉기의 지도자 가운데에는 녹봉만으로 생계를 잇지 못하게 된 하급 무사가 적지 않았다.
18세기 후반 청평이 무능한 군주가 잇따르는 이른바 '암군의 시대'로 들어서자, 북산은 조공 사절의 규모와 횟수를 줄이기 시작했다. 청평의 약화는 북산이 종속 질서에서 벗어날 기회였지만, 경직된 왕조는 이를 개혁의 동력으로 삼지 못했다.
그 사이 경제와 문화는 나름의 성장을 이어 갔다. 동해안의 호라쿠를 비롯한 항구 도시에서 상인층이 성장했고, 청평과의 조공 무역에 딸린 사무역이 이들의 주된 수입원이 되었다. 신린에는 상설 극장과 서점이 들어섰고, 전국시대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연극과 목판 소설이 도시 서민층에 널리 읽혔다. 무사의 충성과 죽음을 미화한 이 대중문화는 정작 무사가 정치에서 밀려나 있던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현실의 무사보다 이상화된 무사를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인구 증가로 토지가 부족해지자 소작과 부채에 시달리는 농민이 늘었다. 문신 관료의 녹봉과 궁정 의례에 드는 비용은 늘어나는데 세수는 정체되었고, 조정은 부족분을 새로운 잡세로 메웠다. 18세기에는 농민 봉기와 하급 무사의 소요가 잇따랐으며, 봉기의 지도자 가운데에는 녹봉만으로 생계를 잇지 못하게 된 하급 무사가 적지 않았다.
18세기 후반 청평이 무능한 군주가 잇따르는 이른바 '암군의 시대'로 들어서자, 북산은 조공 사절의 규모와 횟수를 줄이기 시작했다. 청평의 약화는 북산이 종속 질서에서 벗어날 기회였지만, 경직된 왕조는 이를 개혁의 동력으로 삼지 못했다.
6. 쇄국과 외세의 도전 [편집]
6.1. 세 차례의 침공 [편집]
19세기 전반 북산은 세 차례 외세의 무력 도전을 받았다.
1821년 프랑스 원정군은 화포와 머스킷으로 무장하고 서부 연안에 상륙해 항구 개방을 요구했다. 무신 출신 장수 하네자와 노부카쓰(羽根沢 信勝)는 서부의 요충지 치카마쓰 산성(近松山城)에 군세를 모아 매복과 야간 기습으로 맞섰고, 보급로가 끊긴 프랑스군은 철수했다. 이 승리는 "산성이야말로 북산의 방패"라는 믿음을 굳혔다.
1833년에는 플로렌시아의 무장 상선단이 동해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고, 충돌은 호라쿠 만(甫樂灣) 해전으로 번졌다. 제독 아라카네 요시나리(荒鐘 義成)가 이끈 북산 수군은 선박을 총동원해 플로렌시아 함대를 몰아냈으나, 화력과 선박 기술의 격차로 막대한 손실을 입어 이후 대규모 해상 작전을 수행할 능력을 잃었다.
1845년에는 북방의 마베라가 기병 중심의 육군으로 국경 사막을 넘어 침공했다. 장수 도하라 마사토라(土原 正寅)는 깊은 계곡 위의 가와네 산성(河音山城)에서 방어선을 폈고, 협곡에서 기동력을 쓸 수 없었던 마베라군은 겨울 혹한과 보급난 속에 철수했다.
1821년 프랑스 원정군은 화포와 머스킷으로 무장하고 서부 연안에 상륙해 항구 개방을 요구했다. 무신 출신 장수 하네자와 노부카쓰(羽根沢 信勝)는 서부의 요충지 치카마쓰 산성(近松山城)에 군세를 모아 매복과 야간 기습으로 맞섰고, 보급로가 끊긴 프랑스군은 철수했다. 이 승리는 "산성이야말로 북산의 방패"라는 믿음을 굳혔다.
1833년에는 플로렌시아의 무장 상선단이 동해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고, 충돌은 호라쿠 만(甫樂灣) 해전으로 번졌다. 제독 아라카네 요시나리(荒鐘 義成)가 이끈 북산 수군은 선박을 총동원해 플로렌시아 함대를 몰아냈으나, 화력과 선박 기술의 격차로 막대한 손실을 입어 이후 대규모 해상 작전을 수행할 능력을 잃었다.
1845년에는 북방의 마베라가 기병 중심의 육군으로 국경 사막을 넘어 침공했다. 장수 도하라 마사토라(土原 正寅)는 깊은 계곡 위의 가와네 산성(河音山城)에서 방어선을 폈고, 협곡에서 기동력을 쓸 수 없었던 마베라군은 겨울 혹한과 보급난 속에 철수했다.
6.2. 쇄국론과 개혁론 [편집]
세 차례의 침공을 모두 물리쳤지만 대가는 컸다. 해안 도시가 불탔고 전쟁 동원으로 농촌이 피폐해졌으며, 특히 호라쿠 만 해전은 북산의 군사력이 세계의 변화에 뒤처져 있음을 드러냈다. 왕실과 문신 관료들은 외세와의 교류가 곧 침탈로 이어진다고 보고 쇄국 정책을 강화했다. 외국 상인의 출입은 극도로 제한되었고, 북산은 '성문을 걸어 잠근 나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같은 전쟁은 문을 닫는 것만으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인식도 낳았다. 하급 무사와 사육당 출신 무관, 연안의 상공업자, 일부 소장 문신 사이에서 서양식 군비와 제한적 개방을 주장하는 개혁론이 퍼졌다. 1850년대가 되면 조정은 쇄국을 고수하는 보수파와 개혁파로 뚜렷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같은 전쟁은 문을 닫는 것만으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인식도 낳았다. 하급 무사와 사육당 출신 무관, 연안의 상공업자, 일부 소장 문신 사이에서 서양식 군비와 제한적 개방을 주장하는 개혁론이 퍼졌다. 1850년대가 되면 조정은 쇄국을 고수하는 보수파와 개혁파로 뚜렷하게 갈라져 있었다.
7. 개혁정변과 개항 [편집]
1861년 무사 출신 무관과 신진 문신, 상공업자 세력이 연합해 왕궁을 포위하고 보수 문신들을 축출했다. 이를 북산 개혁정변이라 부른다. 정변을 이끈 나카츠카 겐로(中塚 玄郎)는 당시 서른두 살의 사육당 출신 무관으로, 전국시대의 무사 전통을 이상화하면서도 서양의 군사·산업 체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변 세력은 쇄국을 고수하던 국왕을 퇴위시키고 하세가와 가문의 방계에서 열네 살의 왕자를 새 국왕으로 세웠다. 이로써 463년 동안 이어진 하세가와 왕조의 친정 체제는 끝났고, 왕가는 존속하되 실권은 스스로를 '개혁 정부(維新政府)'라 칭한 정변 세력에게 넘어갔다.
개혁 정부는 개방 자체에는 찬성했으나 그 속도와 조건을 두고 내부 논쟁을 거듭했다. 이 틈을 파고든 것이 빌베른이었다. 1865년 빌베른은 증기 군함과 철갑함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호라쿠 만에 보내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며, 거부하면 포격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른바 포함외교였다. 해군력이 없던 개혁 정부는 전쟁을 치를 수 없다고 판단했고, 같은 해 《호라쿠 조약》을 맺었다. 조약은 항구 세 곳의 개항과 빌베른 국민에 대한 영사재판권, 협정 관세를 담은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듬해까지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도 비슷한 조약을 맺었다.
개항의 충격은 개혁 정부 안에서도 컸다. 정변 세력 일부는 조약 체결을 굴복으로 받아들여 정부를 떠났고, 1866년에는 개항장의 빌베른 상관이 습격당해 상인 네 명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빌베른이 배상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자 개혁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는 한편, 습격 사건을 구실로 보수파 문신의 근거지였던 지방 서원을 대거 폐쇄했다. 외세의 압력이 국내 개혁을 앞당기는 도구로 쓰인 이 방식은 유신 기간 내내 되풀이되었다.
보수 세력은 조약을 '국가의 치욕'이라 비난했지만, 개혁 정부는 이를 근대화를 밀어붙이는 명분으로 삼았다. 불평등 조약의 개정은 이후 30여 년 동안 북산 외교의 가장 큰 과제가 된다.
개혁 정부는 개방 자체에는 찬성했으나 그 속도와 조건을 두고 내부 논쟁을 거듭했다. 이 틈을 파고든 것이 빌베른이었다. 1865년 빌베른은 증기 군함과 철갑함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호라쿠 만에 보내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며, 거부하면 포격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른바 포함외교였다. 해군력이 없던 개혁 정부는 전쟁을 치를 수 없다고 판단했고, 같은 해 《호라쿠 조약》을 맺었다. 조약은 항구 세 곳의 개항과 빌베른 국민에 대한 영사재판권, 협정 관세를 담은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듬해까지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도 비슷한 조약을 맺었다.
개항의 충격은 개혁 정부 안에서도 컸다. 정변 세력 일부는 조약 체결을 굴복으로 받아들여 정부를 떠났고, 1866년에는 개항장의 빌베른 상관이 습격당해 상인 네 명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빌베른이 배상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자 개혁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는 한편, 습격 사건을 구실로 보수파 문신의 근거지였던 지방 서원을 대거 폐쇄했다. 외세의 압력이 국내 개혁을 앞당기는 도구로 쓰인 이 방식은 유신 기간 내내 되풀이되었다.
보수 세력은 조약을 '국가의 치욕'이라 비난했지만, 개혁 정부는 이를 근대화를 밀어붙이는 명분으로 삼았다. 불평등 조약의 개정은 이후 30여 년 동안 북산 외교의 가장 큰 과제가 된다.
8. 북산 유신 [편집]
8.1. 제도 개혁 [편집]
1861년 정변과 1865년 개항 이후 약 30년 동안 진행된 일련의 개혁을 북산 유신(北山維新)이라 부른다. 개혁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변 세력 내부의 대립과 보수파의 저항 속에서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첫 단계는 신분제와 관료제의 해체였다. 1869년 문신·무사의 세습 특권이 폐지되었고, 옛 시험 제도는 근대식 관리 임용 시험으로 대체되었다. 1872년에는 전국 학제가 공포되어 초등 교육이 의무화되었고, 이듬해 징병령으로 신분과 관계없이 성인 남성이 병역을 지는 국민군이 창설되었다. 같은 해 토지세 개혁으로 현물 납부가 화폐 납부로 바뀌면서 국가 재정의 기반이 안정되었다.
사육당은 1870년 육군 장교 양성 기관으로 개편되었다. 옛 이름은 그대로 두었는데, 무사 자제를 길들이던 기관이 국민군의 장교를 길러 내는 기관이 된 것이다. 사육당은 이후 북산 장교단의 핵심 배출 경로가 되어, 20세기에 들어서도 군 내 파벌과 사상의 산실 역할을 했다.
개혁 정부 내부도 한목소리가 아니었다. 정변을 이끈 무관 출신들은 군비 확충을 서둘러야 한다고 보았고, 신진 문신과 상공업자 출신들은 재정과 산업을 먼저 다져야 한다고 맞섰다. 1874년 청평과의 조공 관계를 무력으로 끊자는 주장이 정부 안에서 제기되었을 때 이 대립은 정점에 이르렀는데, 나카츠카 겐로는 시기상조라며 이를 막았고, 주전론자들은 정부를 떠나 재야 세력이 되었다. 북산은 1876년 청평에 대한 조공을 일방적으로 중단했으나 전쟁은 일으키지 않았다. 청평을 '언젠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는 인식은 이때부터 군부의 전통이 되었다.
첫 단계는 신분제와 관료제의 해체였다. 1869년 문신·무사의 세습 특권이 폐지되었고, 옛 시험 제도는 근대식 관리 임용 시험으로 대체되었다. 1872년에는 전국 학제가 공포되어 초등 교육이 의무화되었고, 이듬해 징병령으로 신분과 관계없이 성인 남성이 병역을 지는 국민군이 창설되었다. 같은 해 토지세 개혁으로 현물 납부가 화폐 납부로 바뀌면서 국가 재정의 기반이 안정되었다.
사육당은 1870년 육군 장교 양성 기관으로 개편되었다. 옛 이름은 그대로 두었는데, 무사 자제를 길들이던 기관이 국민군의 장교를 길러 내는 기관이 된 것이다. 사육당은 이후 북산 장교단의 핵심 배출 경로가 되어, 20세기에 들어서도 군 내 파벌과 사상의 산실 역할을 했다.
개혁 정부 내부도 한목소리가 아니었다. 정변을 이끈 무관 출신들은 군비 확충을 서둘러야 한다고 보았고, 신진 문신과 상공업자 출신들은 재정과 산업을 먼저 다져야 한다고 맞섰다. 1874년 청평과의 조공 관계를 무력으로 끊자는 주장이 정부 안에서 제기되었을 때 이 대립은 정점에 이르렀는데, 나카츠카 겐로는 시기상조라며 이를 막았고, 주전론자들은 정부를 떠나 재야 세력이 되었다. 북산은 1876년 청평에 대한 조공을 일방적으로 중단했으나 전쟁은 일으키지 않았다. 청평을 '언젠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는 인식은 이때부터 군부의 전통이 되었다.
8.2. 반발과 진압 [편집]
개혁은 격렬한 반발을 불렀다. 보수파는 왕권의 약화를 천명을 거스르는 반역이라 비난했고, 녹봉과 신분을 잃은 옛 무사층의 불만은 1877년 북부에서 일어난 구로미네 봉기(黒峰蜂起)로 폭발했다. 약 3만 명의 옛 무사와 농민이 가담한 이 봉기는 반년 가까이 이어졌으나, 징병제로 편성된 신식 군대에 진압되었다. 구로미네 봉기는 옛 무사 계급이 무력으로 체제에 도전한 마지막 사건이었으며, 농민의 아들로 이루어진 국민군이 옛 무사를 이긴 이 전쟁은 신식 군대의 권위를 확립했다.
유신 정부는 국민 의식을 만드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1880년대 국정 역사 교과서는 고북산이 사랜드의 침공을 물리친 이야기를 민족사의 첫 장에 두고, 하세가와 왕조를 거쳐 유신 정부에 이르는 하나의 연속된 민족사를 서술했다. 소나라와 강제 이주의 역사는 짧게 언급되거나 '이민족 지배기'로 처리되었다. 이 서술 틀은 공화국 시기의 교과서에도 거의 그대로 이어져, 오늘날 북산인의 역사 인식에 큰 영향을 남겼다.
유신 정부는 국민 의식을 만드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1880년대 국정 역사 교과서는 고북산이 사랜드의 침공을 물리친 이야기를 민족사의 첫 장에 두고, 하세가와 왕조를 거쳐 유신 정부에 이르는 하나의 연속된 민족사를 서술했다. 소나라와 강제 이주의 역사는 짧게 언급되거나 '이민족 지배기'로 처리되었다. 이 서술 틀은 공화국 시기의 교과서에도 거의 그대로 이어져, 오늘날 북산인의 역사 인식에 큰 영향을 남겼다.
8.3. 입헌 체제 [편집]
정치 제도의 정비는 가장 늦게 이루어졌다. 개혁 정부는 서양 여러 나라의 헌법을 조사한 끝에 1884년 《북산국 헌법》을 반포했다. 헌법은 국왕을 국가원수로 두되 통치권은 내각의 보필을 거쳐서만 행사하도록 했고, 이 때문에 국왕은 사실상 국가의 상징이 되었다. 의회는 양원제로, 상원은 왕족과 옛 귀족·고위 문신 출신, 국왕이 임명한 칙선 의원으로 구성되었고, 하원은 일정액 이상의 세금을 내는 남성만 투표할 수 있는 제한 선거로 뽑았다. 1886년 첫 하원 선거가 치러졌다. 전통 왕정과 근대 의회 정치의 절충이었다.
8.4. 산업화와 조약 개정 [편집]
경제 개혁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정부는 관영 공장을 세워 방적과 제사 같은 경공업을 일으킨 뒤 민간에 불하했고, 1872년 신린과 호라쿠를 잇는 첫 철도가 개통되었다. 전신망이 전국으로 연결되면서 중앙의 명령이 지방에 닿는 시간이 크게 줄었다. 유학생이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를 비롯한 서양 여러 나라로 파견되었고, '부국강병(富國強兵)'과 '문명개화(文明開化)'가 시대의 구호가 되었다. 성리학은 존중되었으나 국가 발전을 뒷받침하는 도덕적 틀로만 남았다.
1890년대 중반 북산은 경공업 중심의 근대 국가로 자리 잡았다. 1897년 빌베른과의 조약 개정으로 영사재판권이 폐지되었고, 1911년에는 관세 자주권을 회복했다. 이 시점에서 북산은 동방에서 서양 열강의 불평등 조약을 벗어난 드문 나라가 되었으며, 이 자신감은 곧 대외 팽창의 욕구로 이어졌다.
1890년대 중반 북산은 경공업 중심의 근대 국가로 자리 잡았다. 1897년 빌베른과의 조약 개정으로 영사재판권이 폐지되었고, 1911년에는 관세 자주권을 회복했다. 이 시점에서 북산은 동방에서 서양 열강의 불평등 조약을 벗어난 드문 나라가 되었으며, 이 자신감은 곧 대외 팽창의 욕구로 이어졌다.
9. 제국 시대 [편집]
9.1. 정당 정치와 군부 [편집]
20세기 초 북산에서는 하원을 기반으로 한 정당들이 성장했다. 1910년대에는 하원 다수당의 당수가 총리가 되는 관행이 자리 잡았고, 1920년에는 남성 보통선거가 도입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중립을 지킨 북산은 교전국들에 군수품과 선박을 팔아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고, 이 시기에 조선과 제철 같은 중공업이 처음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전후 불황이 닥치자 정당 정치의 기반은 빠르게 약해졌다. 농촌에서는 쌀값 폭락과 소작 쟁의가 이어졌고, 도시에서는 정당과 재벌의 유착을 둘러싼 추문이 잇따랐다. 사육당 출신 장교들 사이에서는 부패한 정당 정치가 나라를 약하게 만든다는 인식이 퍼졌고, 유신 초기부터 군부에 이어져 온 청평 해결론이 다시 공공연히 거론되기 시작했다. 18세기 이후 쇠락을 거듭한 청평은 1920년대에 들어 황실의 권위가 무너지고 각지의 군벌과 반란 세력이 난립하는 상태였다. 북산의 군부와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옛 종주국에 대한 역사적 복수와 자원·시장 확보를 한꺼번에 이룰 기회로 보았다.
개전 결정은 정당 내각과 군부의 힘겨루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1928년 청평 국경에서 북산인 상인들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군부와 우익 단체는 이를 청평 정부의 무능과 적의의 증거로 선전했다. 당시 내각은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으나, 육군이 국경에 병력을 증강하며 기정사실을 만들어 가자 여론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다. 1929년 2월 내각은 개전을 승인했고, 총리는 전쟁이 끝난 직후 사임했다. 군부가 정부의 방침을 앞질러 행동하고 정부가 이를 뒤늦게 추인하는 이 방식은 이후 북산 정치에서 반복되는 유형이 된다.
그러나 전후 불황이 닥치자 정당 정치의 기반은 빠르게 약해졌다. 농촌에서는 쌀값 폭락과 소작 쟁의가 이어졌고, 도시에서는 정당과 재벌의 유착을 둘러싼 추문이 잇따랐다. 사육당 출신 장교들 사이에서는 부패한 정당 정치가 나라를 약하게 만든다는 인식이 퍼졌고, 유신 초기부터 군부에 이어져 온 청평 해결론이 다시 공공연히 거론되기 시작했다. 18세기 이후 쇠락을 거듭한 청평은 1920년대에 들어 황실의 권위가 무너지고 각지의 군벌과 반란 세력이 난립하는 상태였다. 북산의 군부와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옛 종주국에 대한 역사적 복수와 자원·시장 확보를 한꺼번에 이룰 기회로 보았다.
개전 결정은 정당 내각과 군부의 힘겨루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1928년 청평 국경에서 북산인 상인들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군부와 우익 단체는 이를 청평 정부의 무능과 적의의 증거로 선전했다. 당시 내각은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으나, 육군이 국경에 병력을 증강하며 기정사실을 만들어 가자 여론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다. 1929년 2월 내각은 개전을 승인했고, 총리는 전쟁이 끝난 직후 사임했다. 군부가 정부의 방침을 앞질러 행동하고 정부가 이를 뒤늦게 추인하는 이 방식은 이후 북산 정치에서 반복되는 유형이 된다.
9.2. 청평 침공 [편집]
1929년 4월 북산은 청평을 침공했다. 이를 청평 침공 또는 제1차 청북전쟁이라 부른다. 총사령관 나카무라 겐로쿠(中村 玄六) 장군이 지휘한 약 25만 명의 북산군은 포병과 기관총, 신설된 기갑부대와 항공정찰대를 동원했고, 철도와 전신망으로 전선과 후방을 연결했다. 청평군은 병력 규모에서는 북산을 크게 웃돌았고 일부 부대는 외국제 소총과 야포도 갖추고 있었으나, 황실군과 지방군, 군벌의 사병으로 나뉘어 통일된 지휘를 받지 못했다. 보급과 탄약 생산도 전쟁을 치를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국경 요새는 개전 며칠 만에 무너졌고, 북산군은 철도를 따라 남하하며 주요 도시를 차례로 점령했다. 1929년 7월 수도 띠에우리엔이 포위되었고, 8월 2일 청평 황실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북산 언론은 이를 '과거의 굴욕을 씻고 동방의 주도자가 된 날'이라 선전했고, 8월 2일은 이후 20년간 국가 기념일로 지켜졌다. 이 전쟁을 흔히 '북산 제국'의 출발점으로 보는데, 공식 국호는 여전히 북산국이었고 '제국'은 이 시기 선전과 후대 역사 서술에서 쓰인 표현이다.
정복은 청평 본토에서 끝나지 않았다. 1929년 11월 북산 함대가 청평의 마지막 책봉국 남꽝 왕국의 수도 티삼응우지 앞바다에 나타났고, 북산은 남꽝과 티삼응우지 조약을 맺었다. 조약은 남꽝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고 청평에 대한 일체의 전례를 폐지했는데, 북산 정부는 이를 '청평의 사슬에서 남방을 해방한 조약'이라 선전했다. 1876년 북산 스스로 청평에 대한 조공을 끊은 일을 남꽝에 되풀이해 준 셈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같은 조약의 부속 의정서는 북산 고문의 국정 참여와 외교 사무의 북산 경유, 북산군의 주둔을 규정했고, 국호도 '동사랜드 왕국'으로 바뀌었다. 동사랜드는 이름만 독립국인 북산의 보호국이 되었다.
국경 요새는 개전 며칠 만에 무너졌고, 북산군은 철도를 따라 남하하며 주요 도시를 차례로 점령했다. 1929년 7월 수도 띠에우리엔이 포위되었고, 8월 2일 청평 황실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북산 언론은 이를 '과거의 굴욕을 씻고 동방의 주도자가 된 날'이라 선전했고, 8월 2일은 이후 20년간 국가 기념일로 지켜졌다. 이 전쟁을 흔히 '북산 제국'의 출발점으로 보는데, 공식 국호는 여전히 북산국이었고 '제국'은 이 시기 선전과 후대 역사 서술에서 쓰인 표현이다.
정복은 청평 본토에서 끝나지 않았다. 1929년 11월 북산 함대가 청평의 마지막 책봉국 남꽝 왕국의 수도 티삼응우지 앞바다에 나타났고, 북산은 남꽝과 티삼응우지 조약을 맺었다. 조약은 남꽝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고 청평에 대한 일체의 전례를 폐지했는데, 북산 정부는 이를 '청평의 사슬에서 남방을 해방한 조약'이라 선전했다. 1876년 북산 스스로 청평에 대한 조공을 끊은 일을 남꽝에 되풀이해 준 셈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같은 조약의 부속 의정서는 북산 고문의 국정 참여와 외교 사무의 북산 경유, 북산군의 주둔을 규정했고, 국호도 '동사랜드 왕국'으로 바뀌었다. 동사랜드는 이름만 독립국인 북산의 보호국이 되었다.
상세 내용은 청평 침공 문서 참고.
9.3. 식민 통치 [편집]
북산은 청평 황실을 폐위하고 띠에우리엔에 임시 군정청을 설치했다. 나카무라 겐로쿠가 초대 총독을 맡았고, 1931년 군정청은 청평 총독부로 개편되었다. 총독부는 수도와 북부 평야, 철도 연선과 해안의 항구를 직접 통치했으나, 광대한 남부와 산악 지대까지 관리할 인력은 없었다. 이 때문에 총독부는 투항한 옛 관료와 지방 유력자를 하급 행정에 기용하는 간접 통치를 병행했고, 북산의 지배는 도시와 교통로를 중심으로 한 '점과 선의 지배'에 가까웠다.
식민 통치의 목적은 본국의 산업화와 재정이었다. 토지 조사 사업으로 소유가 불분명한 토지가 총독부와 북산 기업으로 넘어갔고, 곡물과 광물이 대량으로 반출되었다. 철도와 항만은 반출과 군수를 위해 확장되었으나 청평인이 이를 이용할 권리는 제한되었다. 학교 교육은 북산어로만 이루어졌고, 청평어 사용과 전통 의례는 억압되었다. 북산 본국에서는 농민과 소상인, 퇴역 군인 등 약 50만 명이 식민지로 건너가 정착했는데, 이들은 1949년 이후 본국으로 돌아오는 인양자의 대부분을 이룬다.
식민지는 북산 사회의 자기 인식도 바꾸었다. 정부와 언론은 청평 지배를 '동방의 신질서'라 부르며, 수백 년 동안 조공을 바치던 나라가 이제 옛 종주국을 문명화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선전했다. 학교에서는 조공 시대를 굴욕의 역사로, 1929년을 그 굴욕을 씻은 해로 가르쳤다. 식민지 경영으로 이익을 본 것은 주로 총독부와 연결된 대기업과 군 출신 관료였지만, 식민지 이주와 군 복무를 통해 본국의 농촌 청년들도 제국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저항도 끊이지 않았다. 산악 지대에서는 청평 유격대가 북산군을 공격했고, 도시에서는 비밀결사가 독립을 선동했다. 1937년의 띠에우리엔 봉기는 수천 명이 참가했으나 북산군의 포격으로 진압되어 대규모 학살로 끝났다. 총독부는 저항이 거세질수록 군대의 비중을 늘렸고, 식민지 경영은 점차 본국 재정을 잠식하는 부담이 되어 갔다.
식민 통치의 목적은 본국의 산업화와 재정이었다. 토지 조사 사업으로 소유가 불분명한 토지가 총독부와 북산 기업으로 넘어갔고, 곡물과 광물이 대량으로 반출되었다. 철도와 항만은 반출과 군수를 위해 확장되었으나 청평인이 이를 이용할 권리는 제한되었다. 학교 교육은 북산어로만 이루어졌고, 청평어 사용과 전통 의례는 억압되었다. 북산 본국에서는 농민과 소상인, 퇴역 군인 등 약 50만 명이 식민지로 건너가 정착했는데, 이들은 1949년 이후 본국으로 돌아오는 인양자의 대부분을 이룬다.
식민지는 북산 사회의 자기 인식도 바꾸었다. 정부와 언론은 청평 지배를 '동방의 신질서'라 부르며, 수백 년 동안 조공을 바치던 나라가 이제 옛 종주국을 문명화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선전했다. 학교에서는 조공 시대를 굴욕의 역사로, 1929년을 그 굴욕을 씻은 해로 가르쳤다. 식민지 경영으로 이익을 본 것은 주로 총독부와 연결된 대기업과 군 출신 관료였지만, 식민지 이주와 군 복무를 통해 본국의 농촌 청년들도 제국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저항도 끊이지 않았다. 산악 지대에서는 청평 유격대가 북산군을 공격했고, 도시에서는 비밀결사가 독립을 선동했다. 1937년의 띠에우리엔 봉기는 수천 명이 참가했으나 북산군의 포격으로 진압되어 대규모 학살로 끝났다. 총독부는 저항이 거세질수록 군대의 비중을 늘렸고, 식민지 경영은 점차 본국 재정을 잠식하는 부담이 되어 갔다.
9.4. 동사랜드 보호국 [편집]
북산은 동사랜드 왕국에 고문부를 두고 국정을 관리했다. 마지막 국왕 푹 반 캉은 고문부의 결재 없이는 칙령을 낼 수 없었고, 북산군 1개 연대가 수도 티삼응우지와 항구에 주둔했다. 북산에게 동사랜드는 청평 식민지의 남쪽 울타리이자 배후 곡창이었다. 저지대의 논은 북산 자본의 농장으로 넘어갔고, 쌀은 철도를 통해 청평과 북산 본국으로 반출되었다.
보호국 통치에 대한 저항도 이어졌다. 1931년 띠엔화의 교사와 철도 노동자들이 결성한 동사랜드 노동당은 북산의 보호국 체제와 왕정을 함께 타도 대상으로 삼았고, 1942년에는 무장 조직인 인민적군을 창설해 구릉지 일대를 장악했다.
보호국 통치에 대한 저항도 이어졌다. 1931년 띠엔화의 교사와 철도 노동자들이 결성한 동사랜드 노동당은 북산의 보호국 체제와 왕정을 함께 타도 대상으로 삼았고, 1942년에는 무장 조직인 인민적군을 창설해 구릉지 일대를 장악했다.
상세 내용은 동사랜드/역사 문서 참고.
9.5. 군정원의 설치 [편집]
식민지 경영은 본국 정치의 구도를 바꾸었다. 총독부의 요직은 장성들이 차지했고, 식민지 근무는 군 인사의 출세 경로가 되었다. 1930년대 대공황으로 식민지 수탈이 한층 강화되는 가운데, 1934년 정부는 식민지와 국방에 관한 군부의 의견을 국정에 반영한다는 명목으로 군정원(軍政院)을 설치했다. 군정원은 법적으로는 국왕의 자문 기구였으나, 실제로는 육해군 수뇌부의 합의체로서 국방 예산과 장성 인사, 총독 임명에 사실상의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후 군정원의 동의 없이 구성된 내각은 오래 버티지 못했고, 1930년대 후반부터 정당 내각의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
10. 제2차 세계대전과 식민지의 상실 [편집]
10.1. 연합국 참전 [편집]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북산은 처음에는 중립을 선언했으나, 1941년 연합국 측으로 참전했다. 청평을 식민지로 보유한 북산에게 추축국의 팽창은 식민지 체제 자체에 대한 위협이었고, 연합국에 가담하는 것이 전후 식민지 보유를 인정받는 길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북산군은 랜드해협 동부 전역에서 연합군의 보급로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고, 북산의 항구와 청평의 철도는 연합군의 병참 기지로 쓰였다.
전쟁은 북산을 승전국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국력을 소진시켰다. 청평의 식량과 노동력, 보호국 동사랜드의 쌀은 전쟁 수행을 위해 한층 가혹하게 동원되었고, 이 동원이 식민지의 불만에 불을 붙였다. 려우 즈카이가 이끄는 혁명 조직이 농민과 노동자, 학생을 규합해 세력을 넓힌 것도 이 시기였다. 본국에서도 전시 통제 경제 아래 물자 배급과 노동 동원이 이루어졌고, 군정원은 전쟁 수행을 이유로 의회의 예산 심의권을 사실상 정지시켰다. 한편 전쟁 기간 북산은 루이나와 군수·해운 분야에서 협력했는데, 이것이 전후 두 나라 관계의 출발점이 되었다.
전쟁은 북산을 승전국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국력을 소진시켰다. 청평의 식량과 노동력, 보호국 동사랜드의 쌀은 전쟁 수행을 위해 한층 가혹하게 동원되었고, 이 동원이 식민지의 불만에 불을 붙였다. 려우 즈카이가 이끄는 혁명 조직이 농민과 노동자, 학생을 규합해 세력을 넓힌 것도 이 시기였다. 본국에서도 전시 통제 경제 아래 물자 배급과 노동 동원이 이루어졌고, 군정원은 전쟁 수행을 이유로 의회의 예산 심의권을 사실상 정지시켰다. 한편 전쟁 기간 북산은 루이나와 군수·해운 분야에서 협력했는데, 이것이 전후 두 나라 관계의 출발점이 되었다.
10.2. 식민 전쟁 [편집]
1945년 종전 이후 청평 전역에서 독립 투쟁이 무장 봉기로 번졌다. 북산은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본국의 병력을 다시 보냈고, 전쟁 중 쌓인 부채와 물가 폭등 속에서 전비는 본국 재정을 짓눌렀다. 청평에 병력을 집중하느라 남쪽의 보호국은 사실상 비워 두었고, 1945년 9월 동사랜드에서 인민적군이 봉기해 국왕을 퇴위시키고 인민공화국을 세웠을 때도 북산은 보호국을 되찾으려 하지 않았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북산에서는 내각이 다섯 차례 바뀌었고, 징집 반대 시위와 쌀 폭동이 도시마다 일어났다.
북산은 연합국 시절의 동맹이던 루이나에 지원을 요청했고, 루이나는 1946년부터 무기와 차관을 제공했다. 그러나 1949년이 되자 루이나의 판단이 바뀌었다. 전후 재건과 제헌 작업에 몰두하던 루이나에서는 식민 전쟁 지원에 대한 여론이 나빴고, 같은 해 사비에트가 공산화되면서 루이나 정부는 이길 수 없는 식민 전쟁보다 북산 본토를 반공의 방벽으로 지키는 쪽이 낫다고 결론지었다. 1949년 봄 루이나가 식민 전쟁에 대한 무기 지원을 중단하자, 북산군은 청평 전역을 유지할 힘을 잃었다.
북산은 연합국 시절의 동맹이던 루이나에 지원을 요청했고, 루이나는 1946년부터 무기와 차관을 제공했다. 그러나 1949년이 되자 루이나의 판단이 바뀌었다. 전후 재건과 제헌 작업에 몰두하던 루이나에서는 식민 전쟁 지원에 대한 여론이 나빴고, 같은 해 사비에트가 공산화되면서 루이나 정부는 이길 수 없는 식민 전쟁보다 북산 본토를 반공의 방벽으로 지키는 쪽이 낫다고 결론지었다. 1949년 봄 루이나가 식민 전쟁에 대한 무기 지원을 중단하자, 북산군은 청평 전역을 유지할 힘을 잃었다.
10.3. 공화국 수립 [편집]
식민 전쟁이 수렁에 빠진 가운데, 국정의 주도권은 군정원과 고위 관료층으로 넘어갔다. 이들은 식민 전쟁의 실패 책임을 정당 정치인과 왕실 측근에게 돌리고, 강한 행정부를 세워 위기를 수습하려 했다. 1948년 4월 군정원과 내각은 1884년 헌법의 효력을 정지하고 임시헌장을 공포했으며, 북산국을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국가원수는 국왕에서 대통령으로 바뀌었고, 초대 대통령에는 육군 대장 출신으로 군정원 의장을 지낸 가미야 료스케(神谷 亮介)가 의회의 간접 선거로 선출되었다.
국왕과 왕실은 폐지되지 않았다. 임시헌장은 국왕을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모든 정치적 권한을 박탈했지만, 왕가의 지위와 의례는 그대로 두었다. 수백 년 이어진 왕실을 없애는 데 따르는 반발을 피하면서, 식민 전쟁의 상징이던 왕권을 정치에서 떼어 내려는 절충이었다. 북산 정부는 이 전환을 '국민의 독립'이라 불렀고, 1948년을 국가의 기점으로 삼는다. 공식 문서에서 '1948년 독립'이라는 표현이 쓰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국왕과 왕실은 폐지되지 않았다. 임시헌장은 국왕을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모든 정치적 권한을 박탈했지만, 왕가의 지위와 의례는 그대로 두었다. 수백 년 이어진 왕실을 없애는 데 따르는 반발을 피하면서, 식민 전쟁의 상징이던 왕권을 정치에서 떼어 내려는 절충이었다. 북산 정부는 이 전환을 '국민의 독립'이라 불렀고, 1948년을 국가의 기점으로 삼는다. 공식 문서에서 '1948년 독립'이라는 표현이 쓰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10.4. 청평에서의 철수 [편집]
1949년 말 띠에우리엔에서 대규모 민중 봉기가 일어나 총독부가 함락되었고, 북산 총독은 항복을 선언했다. 20년의 식민 통치는 이로써 끝났다. 뒤이어 군인과 관리, 이주민 약 60만 명이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이들을 인양자(引揚者)라 부른다. 인양자 상당수는 연고지 농촌으로 흘러들었으나 땅이 없어 소작과 실업을 오갔고, 인양자 문제는 1950년대 북산 정치의 가장 큰 불안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0.5. 가미야 정부 [편집]
가미야 료스케 정부는 임시헌장 아래 사실상 군정원과 내각의 공동 통치로 운영되었다. 1949년 가미야 정부는 반국가활동방지법을 제정해 북산 공산당을 불법화했고, 청평 혁명에 동조하거나 식민 전쟁에 반대한 좌파 정치인과 노동운동가 수천 명을 검거했다. 청평에서 돌아온 인양자 단체와 퇴역 군인 조직은 정부의 가장 강력한 지지 기반이 되었는데, 이들은 식민지를 잃은 책임을 본국의 좌파와 '약한 정치'에 돌리는 경향이 강했다.
식민지 상실에 대한 공식적인 책임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총독부와 군 지휘부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정권 자체가 식민 전쟁을 이끈 군정원과 관료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북산 사회에는 식민 지배와 그 상실을 모두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공화국이 시작되었다는 인식이 남았다.
식민지 상실에 대한 공식적인 책임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총독부와 군 지휘부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정권 자체가 식민 전쟁을 이끈 군정원과 관료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북산 사회에는 식민 지배와 그 상실을 모두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공화국이 시작되었다는 인식이 남았다.
11. 공화국 초기와 하쿠센 체제 [편집]
11.1. 원조 경제와 농지 개혁 [편집]
식민지를 잃은 북산 경제는 1950년대 초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식민지에서 들여오던 쌀과 광물, 식민지 시장이 한꺼번에 사라졌고, 인양자까지 더해져 도시 실업과 농촌 빈곤이 겹쳤다. 국경 너머에는 공산 정권을 세운 청평이 새로운 적대국으로 자리 잡았고, 1956년 사비에트가 청평에 탄도미사일과 핵 기술을 이전하는 협정을 맺자 북산의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1950년대 초부터 루이나의 원조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1950년대 중반에는 원조가 국가 세출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이 구조는 규모를 달리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루이나는 원조의 조건으로 농지 개혁을 요구했고, 1952년 농지개혁법에 따라 부재 지주의 토지가 유상으로 매수되어 소작농과 인양자에게 분배되었다. 개혁은 농촌의 불만을 일부 누그러뜨렸으나, 분배된 농지가 영세해 인양자 가정의 상당수는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50년대 초부터 루이나의 원조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1950년대 중반에는 원조가 국가 세출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이 구조는 규모를 달리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루이나는 원조의 조건으로 농지 개혁을 요구했고, 1952년 농지개혁법에 따라 부재 지주의 토지가 유상으로 매수되어 소작농과 인양자에게 분배되었다. 개혁은 농촌의 불만을 일부 누그러뜨렸으나, 분배된 농지가 영세해 인양자 가정의 상당수는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1.2. 1955년 헌법 [편집]
임시헌장 체제는 1955년 새 헌법의 제정으로 끝났다. 루이나 법률 고문단의 자문을 거쳐 만들어진 1955년 헌법은 직선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두고, 의회의 신임을 받는 총리가 내각을 이끄는 혼합형 체제를 채택했다. 대통령 유고 시 그 직을 승계하는 부통령은 대통령과 별도의 선거로 뽑았다. 국왕은 다시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되었고, 군정원은 국방과 국내 치안에 관한 대통령의 최고 심의기관으로 헌법에 명시되었다. 형식상 민주 헌법이었지만, 대통령의 비상대권 조항과 헌법 기관이 된 군정원은 이후 권위주의 통치의 제도적 기반이 된다. 같은 해 치러진 첫 직선 대통령 선거에서는 여당인 자유당의 관료 출신 후보 다나베 쇼조(田辺 省三)가 당선되었다.
다나베 정부는 군정원의 영향력 아래에서 경제 재건과 원조 관리를 맡은 관료 정부였다. 다나베는 1959년 재선되어 두 번의 임기를 채웠는데, 이 시기에 원조 물자를 관리하는 경제기획청이 신설되어 관료와 원조 재벌, 루이나 공동위원회를 잇는 경제 운영 구조가 자리 잡았다. 정치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으나, 의회에서 야당의 발언권은 반국가활동방지법의 적용 범위를 둘러싼 논쟁에 번번이 막혔다.
북산은 1956년 유엔에 가입했다. 1955~1956년 동서 양 진영이 서로의 가입 신청을 묶어 처리한 일괄 가입 타협의 결과였다.
다나베 정부는 군정원의 영향력 아래에서 경제 재건과 원조 관리를 맡은 관료 정부였다. 다나베는 1959년 재선되어 두 번의 임기를 채웠는데, 이 시기에 원조 물자를 관리하는 경제기획청이 신설되어 관료와 원조 재벌, 루이나 공동위원회를 잇는 경제 운영 구조가 자리 잡았다. 정치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으나, 의회에서 야당의 발언권은 반국가활동방지법의 적용 범위를 둘러싼 논쟁에 번번이 막혔다.
북산은 1956년 유엔에 가입했다. 1955~1956년 동서 양 진영이 서로의 가입 신청을 묶어 처리한 일괄 가입 타협의 결과였다.
11.3. 하쿠센 조약 [편집]
1957년 오야마 마코토(大山 誠) 총리는 하쿠센에서 루이나와 《하쿠센 조약》(북산-루이나 상호안보 및 원조 조약)을 맺었다. 조약은 루이나군과 군사고문단의 주둔권, 원조 집행에 대한 공동위원회의 감독권, 루이나군 구성원에 대한 루이나의 제1차 재판권, 그리고 북산 정부의 요청이 있으면 루이나군이 국내의 내란 진압을 도울 수 있게 한 제4조를 담고 있었다. 형식상 대등한 상호 방위 조약이었지만, 북산 안에서는 이 조약 아래의 질서를 '하쿠센 체제'라 부르며 사실상의 종속으로 보는 시각이 퍼졌다.
이듬해인 1958년 북산은 루이나, 빌베른과 함께 랜드 안보 3국 동맹을 결성해 지역 집단 방위 체제에 들어갔고, 1969년 루이나 주도로 NLTO가 창설된 뒤에는 그 회원국이 되었다. 북산군은 루이나식 편제와 교범으로 재편되었고, 주요 장비는 루이나제로 표준화되었다. 원조 물자의 배정과 불하는 공동위원회와 연결된 소수 기업에 집중되어, 이른바 '원조 재벌'이 성장했다. 원조 재벌과 정치인, 장성 사이의 유착은 1960년대 초 여러 차례 의혹으로 불거졌으나 제대로 수사된 적이 없었다.
이듬해인 1958년 북산은 루이나, 빌베른과 함께 랜드 안보 3국 동맹을 결성해 지역 집단 방위 체제에 들어갔고, 1969년 루이나 주도로 NLTO가 창설된 뒤에는 그 회원국이 되었다. 북산군은 루이나식 편제와 교범으로 재편되었고, 주요 장비는 루이나제로 표준화되었다. 원조 물자의 배정과 불하는 공동위원회와 연결된 소수 기업에 집중되어, 이른바 '원조 재벌'이 성장했다. 원조 재벌과 정치인, 장성 사이의 유착은 1960년대 초 여러 차례 의혹으로 불거졌으나 제대로 수사된 적이 없었다.
11.4. 1·23 사건 [편집]
1960년대 들어 하쿠센 체제에 대한 반발은 군 내부에서 먼저 표면화되었다. 루이나 유학과 연수를 거친 참모 장교들이 군정원과 육군본부의 요직을 차지한 반면, 사육당 출신의 위관급 장교들은 진급에서 밀리며 원조 재벌과 고위 장성의 유착을 비판했다. 전자를 친루파(親淚派), 후자를 반루파(反淚派)라 부른다. 1963년 사육당 교과에서 전통 과목이 대폭 줄고 루이나식 교범이 도입되자 두 세력의 대립은 더욱 깊어졌다.
1966년 1월 23일 반루파 청년장교들이 약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수도 신린에서 봉기했다. 이들은 전 총리 오야마 마코토와 육군교육총감을 살해하고, 국왕에게 대통령과 내각의 해임을 청했다. 국왕이 이를 거부하면서 반란은 명분을 잃었고, 1월 25일 하쿠센 조약 제4조에 따라 투입된 루이나군과 북산 정부군에 의해 수도에서 진압되었다. 정부는 사건을 '공산 반란'으로 규정하고 계엄 아래 3,000명 이상을 연행했으며, 군사재판과 재판 밖의 처형으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건 이후 군부 내 반루파는 소멸했다.
1966년 1월 23일 반루파 청년장교들이 약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수도 신린에서 봉기했다. 이들은 전 총리 오야마 마코토와 육군교육총감을 살해하고, 국왕에게 대통령과 내각의 해임을 청했다. 국왕이 이를 거부하면서 반란은 명분을 잃었고, 1월 25일 하쿠센 조약 제4조에 따라 투입된 루이나군과 북산 정부군에 의해 수도에서 진압되었다. 정부는 사건을 '공산 반란'으로 규정하고 계엄 아래 3,000명 이상을 연행했으며, 군사재판과 재판 밖의 처형으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건 이후 군부 내 반루파는 소멸했다.
상세 내용은 1·23 사건 문서 참고.
12. 권위주의의 제도화 [편집]
12.1. 5.13 부정선거 [편집]
1·23 사건 이후 정국은 친루파 군부와 이들과 가까운 관료, 원조 재벌의 연합이 장악했다. 1963년 자유당 후보로 당선된 하세가와 쇼이치(長谷川 正一) 대통령은 옛 왕가인 하세가와 가문의 방계 출신 관료로, 자유당은 그를 '왕가의 피를 이은 공화국의 지도자'로 내세웠다. 그러나 1963년 선거에서 하세가와는 유력 야당 후보가 선거 도중 병사했는데도 55.7%를 얻는 데 그쳤고,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나카무라 마사아키가 당선되었다. 1965년 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은 주요 도시를 휩쓸었다. 정권은 1·23 사건 이후의 계엄 수사를 틈타 제3당 국가민주진보당의 오카다 타츠오를 청평 내통 혐의로 기소해 1967년 3월 처형했다.
1967년 5월 13일의 제5대 대통령·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후지타 히로유키가 선거 한 달 전 사망해 하세가와가 단독 후보가 되었고, 실질적인 승부는 부통령 선거였다. 69세의 하세가와가 임기 중 사망하면 대통령직이 야당 부통령에게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당은 내무장관 사이토 다카아키의 지휘 아래 공무원과 경찰을 동원해 사전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공개 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등 전국적인 부정을 저질렀다. 공식 결과 자유당의 다카하시 요시후미가 79.19%를 얻어 현직 부통령 나카무라를 크게 앞섰으나, 투표율이 97%를 넘고 여러 선거구에서 투표자 수가 유권자 수를 넘는 등 조작의 흔적이 뚜렷했다. 이를 5.13 부정선거라 부른다. 대학생과 야당은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항의 시위를 벌였고, 5월 18일 후잔에서 고등학생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시위는 정권을 무너뜨리지는 못했으나 이후 2년 가까이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부정선거에 루이나가 관여했는지는 오랫동안 의혹으로 남았다. 선거 직후 민주당은 사이토가 루이나에 비밀 자금과 선거 기법 지원을 요청하자고 건의한 이른바 '사이토 보고서' 사본을 공개했고, 1996년 루이나 시사주간지 《코망테르》는 국가정보국이 자유당 계열 단체에 선거 자금을 제공한 정황이 1981년 루이나 정보기관 조사위원회의 비공개 부속서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도했다. 선거 직후 체결된 광업권·항만 사용 협정이 그 대가였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루이나 정부는 개입 사실을 확인하지도 부인하지도 않고 있다.
1967년 5월 13일의 제5대 대통령·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후지타 히로유키가 선거 한 달 전 사망해 하세가와가 단독 후보가 되었고, 실질적인 승부는 부통령 선거였다. 69세의 하세가와가 임기 중 사망하면 대통령직이 야당 부통령에게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당은 내무장관 사이토 다카아키의 지휘 아래 공무원과 경찰을 동원해 사전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공개 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등 전국적인 부정을 저질렀다. 공식 결과 자유당의 다카하시 요시후미가 79.19%를 얻어 현직 부통령 나카무라를 크게 앞섰으나, 투표율이 97%를 넘고 여러 선거구에서 투표자 수가 유권자 수를 넘는 등 조작의 흔적이 뚜렷했다. 이를 5.13 부정선거라 부른다. 대학생과 야당은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항의 시위를 벌였고, 5월 18일 후잔에서 고등학생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시위는 정권을 무너뜨리지는 못했으나 이후 2년 가까이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부정선거에 루이나가 관여했는지는 오랫동안 의혹으로 남았다. 선거 직후 민주당은 사이토가 루이나에 비밀 자금과 선거 기법 지원을 요청하자고 건의한 이른바 '사이토 보고서' 사본을 공개했고, 1996년 루이나 시사주간지 《코망테르》는 국가정보국이 자유당 계열 단체에 선거 자금을 제공한 정황이 1981년 루이나 정보기관 조사위원회의 비공개 부속서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도했다. 선거 직후 체결된 광업권·항만 사용 협정이 그 대가였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루이나 정부는 개입 사실을 확인하지도 부인하지도 않고 있다.
상세 내용은 5.13 부정선거 문서 참고.
12.2. 1969년 긴급조치 [편집]
1969년 3월 청평 접경의 히노타니(日の谷) 일대에서 양국 국경 경비대가 교전해 북산군 수십 명이 전사했다.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서 청평 지방 부대가 일으킨 충돌이었으나, 하세가와 정부는 이를 국가 비상사태로 규정하고 1955년 헌법의 비상대권 조항에 근거해 긴급조치 제1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는 헌법 비판과 개정 청원의 금지, 집회와 시위의 허가제, 언론의 사전 검열, 그리고 긴급조치 위반 사건의 군사법원 관할을 담았다. 5.13 부정선거 이후 이어져 온 학생 시위는 이 조치로 사실상 봉쇄되었다.
이듬해인 1970년 자유당을 중심으로 친정부 세력이 북산국민당으로 통합되었고, 같은 해 개헌을 통해 대통령 선거가 의회 간접선거로 바뀌고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났으며 중임 제한은 없어졌다. 부통령제도 이때 폐지되었다. 하세가와는 1971년 간선으로 세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긴급조치는 이후 여러 차례 완화와 재강화를 거쳤지만 한 번도 폐지되지 않았고, 2026년 현재까지 형식상 유효하다. 북산 정부가 1948년, 1955년과 함께 1969년을 오늘날 체제의 기점으로 꼽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듬해인 1970년 자유당을 중심으로 친정부 세력이 북산국민당으로 통합되었고, 같은 해 개헌을 통해 대통령 선거가 의회 간접선거로 바뀌고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났으며 중임 제한은 없어졌다. 부통령제도 이때 폐지되었다. 하세가와는 1971년 간선으로 세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긴급조치는 이후 여러 차례 완화와 재강화를 거쳤지만 한 번도 폐지되지 않았고, 2026년 현재까지 형식상 유효하다. 북산 정부가 1948년, 1955년과 함께 1969년을 오늘날 체제의 기점으로 꼽는 것은 이 때문이다.
13. 청북전쟁 [편집]
1970년 려우 즈카이가 사망한 뒤 청평에서는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 북산 군부는 청평이 내부 혼란에서 회복하기 전에 군사적 우위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부는 청평의 정치·외교적 압박과 국내 친청 세력 문제를 공격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개전 결정은 긴급조치 아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의회와 언론의 검증을 거의 받지 않았다. 군정원은 청평군의 장비 노후화와 지휘 체계의 혼란을 근거로 단기전을 자신했고, 루이나의 군사 지원이 뒤따를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정부 안에서 장기전 가능성을 경고한 목소리는 소수에 그쳤다. 1974년 7월 25일 북산군은 뇌우 작전을 개시해 청평을 침공했다. 1929년의 침공과 구분해 이를 청북전쟁 또는 제2차 청북전쟁이라 부른다.
북산군은 개전 초기 기갑부대와 공수부대를 앞세워 청평의 지휘 체계를 무너뜨렸으나, 수도 점령과 정부의 항복이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전쟁은 점령지의 유격전과 보급로를 둘러싼 소모전으로 번졌고, 1975년 봄 청평의 반격으로 북산군은 전선을 축소하며 후퇴했다. 1975년 9월 할리만 사건을 계기로 루이나가 직접 참전하면서 전황은 다시 뒤집혔다. 연합군은 10월 22일 띠에우리엔을 점령했으나, 점령 직후 루이나군과 북산군 일부 부대가 저지른 띠에우리엔 대학살은 연합군의 정치적 목표에 치명상을 입혔다. 이후 전쟁은 수도와 항만을 지키는 연합군과 농촌·산악을 되찾은 청평 사이의 소모전으로 굳어졌고, 1977년 7월 27일 바젤 정전협정으로 대규모 전투가 끝났다.
북산은 청평을 굴복시키려던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정전협정에 따라 국경은 전쟁 전으로 돌아갔고, 북산군은 5년간 루이나 군사고문단의 감독 아래 재편되었다. 청평을 압박하려고 시작한 전쟁이 결과적으로 자국 군대의 재편까지 루이나에 맡기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국내에서는 전사자와 참전자의 처우, 개전 결정의 책임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졌고, 79세의 하세가와는 1977년 임기 만료와 함께 정계에서 물러났다.
전쟁은 북산 사회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3년 동안 수십만 명이 동원되었고, 전사자와 부상자의 규모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다. 띠에우리엔 대학살에 북산 부대가 관여했다는 사실은 긴급조치 아래에서 보도가 금지되었으며, 북산 국내에서 이 문제가 공개적으로 거론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북산군은 개전 초기 기갑부대와 공수부대를 앞세워 청평의 지휘 체계를 무너뜨렸으나, 수도 점령과 정부의 항복이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전쟁은 점령지의 유격전과 보급로를 둘러싼 소모전으로 번졌고, 1975년 봄 청평의 반격으로 북산군은 전선을 축소하며 후퇴했다. 1975년 9월 할리만 사건을 계기로 루이나가 직접 참전하면서 전황은 다시 뒤집혔다. 연합군은 10월 22일 띠에우리엔을 점령했으나, 점령 직후 루이나군과 북산군 일부 부대가 저지른 띠에우리엔 대학살은 연합군의 정치적 목표에 치명상을 입혔다. 이후 전쟁은 수도와 항만을 지키는 연합군과 농촌·산악을 되찾은 청평 사이의 소모전으로 굳어졌고, 1977년 7월 27일 바젤 정전협정으로 대규모 전투가 끝났다.
북산은 청평을 굴복시키려던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정전협정에 따라 국경은 전쟁 전으로 돌아갔고, 북산군은 5년간 루이나 군사고문단의 감독 아래 재편되었다. 청평을 압박하려고 시작한 전쟁이 결과적으로 자국 군대의 재편까지 루이나에 맡기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국내에서는 전사자와 참전자의 처우, 개전 결정의 책임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졌고, 79세의 하세가와는 1977년 임기 만료와 함께 정계에서 물러났다.
전쟁은 북산 사회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3년 동안 수십만 명이 동원되었고, 전사자와 부상자의 규모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다. 띠에우리엔 대학살에 북산 부대가 관여했다는 사실은 긴급조치 아래에서 보도가 금지되었으며, 북산 국내에서 이 문제가 공개적으로 거론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상세 내용은 청북전쟁 문서 참고.
14. 전후 체제와 중화학 공업화 [편집]
14.1. 첫 번째 해빙 [편집]
하세가와 쇼이치의 뒤를 이어 1977년 간선으로 선출된 미즈시마 겐지(水島 健二) 대통령은 육군 대장 출신으로, 전후 수습과 군 재편을 맡았다. 북산군은 바젤 정전협정에 따라 루이나 군사고문단의 감독 아래 재편되었다.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이어진 재편으로 기갑·공수부대의 편제가 바뀌고 장교 교육 과정이 전면 개정되었으며, 개전 결정에 관여한 장성 상당수가 예편되었다. 전쟁의 책임을 진 것은 정치 지도부가 아니라 일부 군 지휘관이었고, 재편은 동시에 군의 무기 체계와 교리를 이전보다 더 깊이 루이나에 묶어 두었다.
전쟁 책임론으로 군부의 권위가 흔들리고 국민의 불만이 커지자, 미즈시마 정부는 1979년 긴급조치의 적용을 유예하고 정치범 일부를 석방했다. 야당 활동이 재개되었고, 대학가에서는 직선제 복원과 하쿠센 조약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해빙의 배경에는 루이나의 변화도 있었다. 1978년 루이나에서 군사반란이 일어나 군정이 들어서자, 북산 군부는 루이나 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전후 재편 과정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지켰다. 그러나 1980년 10.24 시민혁명으로 루이나의 군정이 무너지고 문민 정부가 들어서자, 새 정부는 북산 군부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인권 문제를 원조 협의의 의제로 올렸다. 이웃 나라에서 시민의 힘으로 군정이 무너진 일은 북산의 학생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고, 북산의 해빙은 이 틈에서 잠시 넓어졌다.
해빙은 2년을 넘기지 못했다. 1981년 5월 총선에서 야당이 하원 의석의 40% 가까이를 차지하자, 군정원은 치안 악화를 이유로 긴급조치의 재적용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1981년 10월 정부는 긴급조치를 다시 적용하고 야당 지도부 일부를 가택 연금했다. 이를 10월 조치라 부른다. 계엄은 선포되지 않았고 유혈 사태도 크지 않았지만, 첫 번째 해빙은 이로써 끝났다.
전쟁 책임론으로 군부의 권위가 흔들리고 국민의 불만이 커지자, 미즈시마 정부는 1979년 긴급조치의 적용을 유예하고 정치범 일부를 석방했다. 야당 활동이 재개되었고, 대학가에서는 직선제 복원과 하쿠센 조약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해빙의 배경에는 루이나의 변화도 있었다. 1978년 루이나에서 군사반란이 일어나 군정이 들어서자, 북산 군부는 루이나 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전후 재편 과정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지켰다. 그러나 1980년 10.24 시민혁명으로 루이나의 군정이 무너지고 문민 정부가 들어서자, 새 정부는 북산 군부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인권 문제를 원조 협의의 의제로 올렸다. 이웃 나라에서 시민의 힘으로 군정이 무너진 일은 북산의 학생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고, 북산의 해빙은 이 틈에서 잠시 넓어졌다.
해빙은 2년을 넘기지 못했다. 1981년 5월 총선에서 야당이 하원 의석의 40% 가까이를 차지하자, 군정원은 치안 악화를 이유로 긴급조치의 재적용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1981년 10월 정부는 긴급조치를 다시 적용하고 야당 지도부 일부를 가택 연금했다. 이를 10월 조치라 부른다. 계엄은 선포되지 않았고 유혈 사태도 크지 않았지만, 첫 번째 해빙은 이로써 끝났다.
14.2. 중화학 공업화 [편집]
1983년 대통령에 오른 시노하라 마사후미(篠原 正文)는 경제 관료 출신으로, 군 출신이 아닌 첫 대통령이었다. 시노하라 정부는 원조 의존에서 벗어나 산업 기반을 키우겠다며 중화학 공업화를 국가 목표로 내걸었다. 국가 주도로 제철소와 조선소, 석유화학 단지와 기계 공업 단지가 건설되었고, 루이나와 플로렌시아의 차관과 기술 이전이 핵심 재원이 되었다. 원조 재벌은 정부의 특혜 금융을 받아 중화학 재벌로 탈바꿈했다.
공업화는 사회 구조를 바꾸었다. 농업 기계화와 수리 사업으로 농촌 인구가 줄고 수도 신린과 항구 도시로 인구가 몰렸으며, 북산은 농업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변모했다. 그러나 성장의 과실은 소수 재벌에 집중되었고, 노동조합 활동은 긴급조치 아래 엄격히 통제되었다. 산업 구조 역시 루이나의 자본과 기술, 루이나 시장에 크게 기대고 있었다.
통제된 노동 현장은 결국 충돌로 이어졌다. 1987년 호라쿠 조선소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노동조합 인정을 요구하며 조선소를 점거하자, 정부는 긴급조치를 근거로 경찰 기동대를 투입해 11일 만에 농성을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3명이 숨지고 수백 명이 연행되었다. 호라쿠 조선소 점거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대기업 사업장마다 비공인 노동조합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고, 1990년대 개헌 운동에서 노동자 조직이 한 축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공업화는 사회 구조를 바꾸었다. 농업 기계화와 수리 사업으로 농촌 인구가 줄고 수도 신린과 항구 도시로 인구가 몰렸으며, 북산은 농업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변모했다. 그러나 성장의 과실은 소수 재벌에 집중되었고, 노동조합 활동은 긴급조치 아래 엄격히 통제되었다. 산업 구조 역시 루이나의 자본과 기술, 루이나 시장에 크게 기대고 있었다.
통제된 노동 현장은 결국 충돌로 이어졌다. 1987년 호라쿠 조선소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노동조합 인정을 요구하며 조선소를 점거하자, 정부는 긴급조치를 근거로 경찰 기동대를 투입해 11일 만에 농성을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3명이 숨지고 수백 명이 연행되었다. 호라쿠 조선소 점거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대기업 사업장마다 비공인 노동조합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고, 1990년대 개헌 운동에서 노동자 조직이 한 축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15. 선거권위주의 [편집]
15.1. 두 번째 개헌 운동 [편집]
1990년대 초 공업화로 성장한 도시 중산층과 노동자층을 중심으로 대통령 직선제 복원 요구가 다시 일어났다. 1993년 지식인과 종교인, 야당 정치인 200여 명이 발표한 신린 선언은 직선제 복원과 긴급조치 폐지, 군정원의 정치 관여 금지를 요구했다. 수도와 몇몇 공업 도시에서 수만 명 규모의 집회가 열렸지만, 시위는 전국적인 봉기로 번지지 않았고 군은 동원되지 않았다.
정부 여당은 부분적인 양보로 대응했다. 1994년 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복원되고 임기는 5년 단임으로 바뀌었지만, 긴급조치와 군정원의 헌법상 지위는 그대로 남았다. 정당 등록 요건과 선거구 획정, 방송 허가권을 쥔 정부 여당은 이후 치러진 모든 대통령 선거와 총선에서 승리했다. 선거는 정기적으로 치러지되 정권 교체는 일어나지 않는 이 체제를 연구자들은 선거권위주의라 부른다.
직선제 복원 이후에도 여당의 대통령 후보는 군정원과 재벌, 당 원로의 조율 속에서 전임 대통령이 사실상 후계자를 지명하는 방식으로 정해졌고, 본선거는 그 결정을 확인하는 절차에 가까웠다. 야당은 선거 때마다 30~40%의 득표를 얻었으나, 선거구 획정과 비례 의석 배분 방식 때문에 하원 의석으로는 그만큼 이어지지 않았다.
정부 여당은 부분적인 양보로 대응했다. 1994년 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복원되고 임기는 5년 단임으로 바뀌었지만, 긴급조치와 군정원의 헌법상 지위는 그대로 남았다. 정당 등록 요건과 선거구 획정, 방송 허가권을 쥔 정부 여당은 이후 치러진 모든 대통령 선거와 총선에서 승리했다. 선거는 정기적으로 치러지되 정권 교체는 일어나지 않는 이 체제를 연구자들은 선거권위주의라 부른다.
직선제 복원 이후에도 여당의 대통령 후보는 군정원과 재벌, 당 원로의 조율 속에서 전임 대통령이 사실상 후계자를 지명하는 방식으로 정해졌고, 본선거는 그 결정을 확인하는 절차에 가까웠다. 야당은 선거 때마다 30~40%의 득표를 얻었으나, 선거구 획정과 비례 의석 배분 방식 때문에 하원 의석으로는 그만큼 이어지지 않았다.
15.2. 외환 위기 [편집]
1990년대 말 북산 경제는 외환 위기를 맞았다. 중화학 재벌의 과잉 투자와 단기 외채가 누적된 상태에서 수출이 부진하자, 1998년 북산 환의 가치가 폭락하고 재벌 여러 곳이 도산했다. 루이나의 긴급 차관으로 국가 부도는 피했으나, 그 대가로 공기업 매각과 재정 긴축, 루이나 자본에 대한 시장 개방이 이루어졌다. 위기 이후 북산의 성장률은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고, 1인당 소득은 오늘날까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외환 위기는 정치적으로도 파장을 남겼다. 재벌 도산과 대량 해고로 실업자가 늘자 1999년 신린과 호라쿠에서 대규모 노동자 시위가 일어났고, 정부는 긴급조치를 근거로 이를 진압했다. 그러나 위기의 책임을 둘러싼 여론의 압박 속에 당시 대통령은 여당 내에서 후계 지명권을 잃었고, 북산국민당은 처음으로 당내 경선을 통해 다음 대통령 후보를 정했다. 경선은 당 원로와 재벌의 조율 안에서 치러졌지만, 선거권위주의 체제 안에서도 여당 내부의 경쟁이 제도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외환 위기는 정치적으로도 파장을 남겼다. 재벌 도산과 대량 해고로 실업자가 늘자 1999년 신린과 호라쿠에서 대규모 노동자 시위가 일어났고, 정부는 긴급조치를 근거로 이를 진압했다. 그러나 위기의 책임을 둘러싼 여론의 압박 속에 당시 대통령은 여당 내에서 후계 지명권을 잃었고, 북산국민당은 처음으로 당내 경선을 통해 다음 대통령 후보를 정했다. 경선은 당 원로와 재벌의 조율 안에서 치러졌지만, 선거권위주의 체제 안에서도 여당 내부의 경쟁이 제도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6. 현대 [편집]
2002년 루이나가 빌베른을 침공하면서 랜드 안보 3국 동맹은 사실상 기능을 잃었다. 빌베른 측의 참여가 멈춘 뒤 동맹은 형식상 존속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하쿠센 조약에 기반한 루이나와 북산의 양자 동맹으로 운영되고 있다. 북산 정부는 침공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으나 병력은 보내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 북산은 루이나·플로렌시아 기업의 하청 생산 기지로서 철강과 선박, 화학 제품을 수출하며 완만한 성장을 이어 왔다. 그러나 국가 세출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루이나의 원조로 충당되고, 군사·기술·금융의 대부분을 루이나에 의존하는 구조도 바뀌지 않았다. 환경 오염과 산업재해, 빈부 격차, 농촌 공동화 같은 문제도 누적되고 있다.
청평과의 관계도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청북전쟁 이후 경제 개혁을 추진한 청평이 1980년대부터 저비용 제조국으로 빠르게 성장하면서, 북산의 경공업과 일부 중공업은 가격 경쟁력을 잃었다. 한때 식민지였던 나라가 경제 규모에서 옛 식민 본국을 훨씬 앞지르게 된 것이다. 두 나라는 바젤 정전 이후 평화 조약을 맺지 않은 채 정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국경은 루이나 주도의 평화감시단이 관리하는 완충지대로 나뉘어 있다. 북산 정부는 청평의 경제적 부상을 새로운 안보 위협으로 규정하고 있고, 이는 루이나와의 동맹과 긴급조치를 유지하는 명분으로도 쓰이고 있다.
국왕과 왕실은 1948년 이후 정치에서 물러나 의례적 역할만 맡고 있다. 1·23 사건 당시 국왕이 반란군의 상주를 거부한 일은 왕실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굳힌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 왕실은 국가 행사와 민족종교 의례의 주재자로서 비교적 높은 국민적 신뢰를 받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북산국민당의 집권이 반세기 넘게 이어지고 있다. 2025년 취임한 하라 히데오(原 英雄) 대통령과 무라사키 료(紫 亮) 총리 체제 아래에서도 긴급조치는 유지되고 있으며, 언론은 부분적으로 통제되고 있다. 냉전이 끝나지 않은 랜드해협에서 북산은 청평과 정전 상태로 대치하는 루이나 동맹 체제의 동부 전초로 남아 있고, 이 안보상의 역할이 체제 유지의 가장 큰 명분이 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북산은 루이나·플로렌시아 기업의 하청 생산 기지로서 철강과 선박, 화학 제품을 수출하며 완만한 성장을 이어 왔다. 그러나 국가 세출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루이나의 원조로 충당되고, 군사·기술·금융의 대부분을 루이나에 의존하는 구조도 바뀌지 않았다. 환경 오염과 산업재해, 빈부 격차, 농촌 공동화 같은 문제도 누적되고 있다.
청평과의 관계도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청북전쟁 이후 경제 개혁을 추진한 청평이 1980년대부터 저비용 제조국으로 빠르게 성장하면서, 북산의 경공업과 일부 중공업은 가격 경쟁력을 잃었다. 한때 식민지였던 나라가 경제 규모에서 옛 식민 본국을 훨씬 앞지르게 된 것이다. 두 나라는 바젤 정전 이후 평화 조약을 맺지 않은 채 정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국경은 루이나 주도의 평화감시단이 관리하는 완충지대로 나뉘어 있다. 북산 정부는 청평의 경제적 부상을 새로운 안보 위협으로 규정하고 있고, 이는 루이나와의 동맹과 긴급조치를 유지하는 명분으로도 쓰이고 있다.
국왕과 왕실은 1948년 이후 정치에서 물러나 의례적 역할만 맡고 있다. 1·23 사건 당시 국왕이 반란군의 상주를 거부한 일은 왕실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굳힌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 왕실은 국가 행사와 민족종교 의례의 주재자로서 비교적 높은 국민적 신뢰를 받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북산국민당의 집권이 반세기 넘게 이어지고 있다. 2025년 취임한 하라 히데오(原 英雄) 대통령과 무라사키 료(紫 亮) 총리 체제 아래에서도 긴급조치는 유지되고 있으며, 언론은 부분적으로 통제되고 있다. 냉전이 끝나지 않은 랜드해협에서 북산은 청평과 정전 상태로 대치하는 루이나 동맹 체제의 동부 전초로 남아 있고, 이 안보상의 역할이 체제 유지의 가장 큰 명분이 되고 있다.
17. 역사 인식 [편집]
북산의 역사 서술에는 몇 가지 오래된 쟁점이 있다.
첫째는 고북산과의 연속성이다. 1398년 이래 북산의 왕조와 국가는 고북산을 민족사의 시작으로 서술해 왔고, 오늘날의 국정 교과서도 사랜드의 세 차례 침공을 물리친 고북산의 항전을 민족 정신의 원형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언어와 유전자 연구는 현대 북산인의 주류가 13~14세기 이주민에서 기원한다는 점을 보여 주며, 학계에서는 고북산 계승론을 왕조의 정통성 담론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 문제는 강제 이주민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민족의 기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와 맞닿아 있어 여전히 민감하게 다루어진다.
둘째는 식민 지배에 대한 평가다. 북산 정부는 청평 식민 통치를 '문명의 전파'로 서술하던 입장을 1977년 정전 이후 공식적으로는 거두었으나, 식민 지배 기간의 수탈과 학살에 대해 청평에 사과한 적은 없다. 청북전쟁 당시 북산 지도부가 옛 종주국 청평의 간섭을 강조하며 자국의 식민 지배 책임을 축소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동사랜드 보호국화에 대해서도 북산 교과서는 티삼응우지 조약을 청평의 속박에서 남방을 해방한 조약으로 서술하는 반면, 동사랜드는 이를 '독립이라는 이름의 보호국화'로 규정한다.
셋째는 루이나와의 관계다. 정부와 여당은 하쿠센 조약 이후의 동맹을 북산을 공산 청평으로부터 지켜 낸 선택으로 평가하지만, 비판적인 연구자들은 1·23 사건과 5.13 부정선거, 청북전쟁 이후의 군 재편을 들어 북산의 주권이 조약 아래에서 체계적으로 제약되어 왔다고 본다. 청평의 책봉을 받던 시대와 루이나의 원조를 받는 시대를 같은 종속의 역사로 묶어 보는 시각도 있다.
넷째는 공화국 시기 국가 폭력의 기록이다. 1·23 사건 이후의 처형과 5.13 부정선거, 긴급조치 아래의 인권 침해는 긴급조치가 유지되는 동안 공개적으로 다루기 어려웠다. 1994년 개헌 이후 제한적으로나마 연구와 보도가 가능해지면서 1997년 1·23 유족회가 결성되었고, 2000년대에는 문학과 다큐멘터리를 통한 재조명이 이어졌다. 그러나 정부는 관련 기록의 공개와 공식 조사를 거부하고 있으며, 재조명 작품 일부는 방영 금지나 수입 불허 처분을 받았다.
첫째는 고북산과의 연속성이다. 1398년 이래 북산의 왕조와 국가는 고북산을 민족사의 시작으로 서술해 왔고, 오늘날의 국정 교과서도 사랜드의 세 차례 침공을 물리친 고북산의 항전을 민족 정신의 원형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언어와 유전자 연구는 현대 북산인의 주류가 13~14세기 이주민에서 기원한다는 점을 보여 주며, 학계에서는 고북산 계승론을 왕조의 정통성 담론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 문제는 강제 이주민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민족의 기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와 맞닿아 있어 여전히 민감하게 다루어진다.
둘째는 식민 지배에 대한 평가다. 북산 정부는 청평 식민 통치를 '문명의 전파'로 서술하던 입장을 1977년 정전 이후 공식적으로는 거두었으나, 식민 지배 기간의 수탈과 학살에 대해 청평에 사과한 적은 없다. 청북전쟁 당시 북산 지도부가 옛 종주국 청평의 간섭을 강조하며 자국의 식민 지배 책임을 축소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동사랜드 보호국화에 대해서도 북산 교과서는 티삼응우지 조약을 청평의 속박에서 남방을 해방한 조약으로 서술하는 반면, 동사랜드는 이를 '독립이라는 이름의 보호국화'로 규정한다.
셋째는 루이나와의 관계다. 정부와 여당은 하쿠센 조약 이후의 동맹을 북산을 공산 청평으로부터 지켜 낸 선택으로 평가하지만, 비판적인 연구자들은 1·23 사건과 5.13 부정선거, 청북전쟁 이후의 군 재편을 들어 북산의 주권이 조약 아래에서 체계적으로 제약되어 왔다고 본다. 청평의 책봉을 받던 시대와 루이나의 원조를 받는 시대를 같은 종속의 역사로 묶어 보는 시각도 있다.
넷째는 공화국 시기 국가 폭력의 기록이다. 1·23 사건 이후의 처형과 5.13 부정선거, 긴급조치 아래의 인권 침해는 긴급조치가 유지되는 동안 공개적으로 다루기 어려웠다. 1994년 개헌 이후 제한적으로나마 연구와 보도가 가능해지면서 1997년 1·23 유족회가 결성되었고, 2000년대에는 문학과 다큐멘터리를 통한 재조명이 이어졌다. 그러나 정부는 관련 기록의 공개와 공식 조사를 거부하고 있으며, 재조명 작품 일부는 방영 금지나 수입 불허 처분을 받았다.
18. 연표 [편집]
시기 | 사건 |
2~3세기 | 사랜드의 세 차례 침공 |
3~4세기 | 고북산 해체, 분립기 시작 |
1265년 | 몽골, 정사주관 설치 |
1287년 | 소나라 성립 |
1350년대~1398년 | 전국시대 |
1368년 | 원의 북천, 소나라 붕괴 |
1398년 | 하세가와 왕조 건국 |
1414년 | 청평의 책봉 |
1453~1466년 | 무신정변과 무신 정권 |
1471년 | 사육당 설립 |
1821년 | 프랑스의 침공 |
1833년 | 호라쿠 만 해전 |
1845년 | 마베라의 침공 |
1861년 | 개혁정변 |
1865년 | 빌베른 포함외교, 호라쿠 조약 |
1877년 | 구로미네 봉기 |
1884년 | 북산국 헌법 반포 |
1897년 | 영사재판권 폐지 |
1929년 | 청평 침공, 식민 통치 시작, 티삼응우지 조약 |
1934년 | 군정원 설치 |
1941년 | 연합국 측 참전 |
1945년 | 동사랜드 보호국 상실 |
1948년 | 공화국 선포 |
1949년 | 청평 총독부 함락 |
1955년 | 1955년 헌법 제정 |
1956년 | 유엔 가입 |
1957년 | 하쿠센 조약 |
1958년 | 랜드 안보 3국 동맹 결성 |
1966년 | 1·23 사건 |
1967년 | 5.13 부정선거 |
1969년 | 긴급조치 발효 |
1974~1977년 | 청북전쟁 |
1979~1981년 | 첫 번째 해빙, 10월 조치 |
1994년 | 직선제 복원 개헌 |
1998년 | 외환 위기 |
2002년 | 3국 동맹 기능 정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