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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북전쟁 == 1970년 려우 즈카이가 사망한 뒤 청평에서는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 북산 군부는 청평이 내부 혼란에서 회복하기 전에 군사적 우위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부는 청평의 정치·외교적 압박과 국내 친청 세력 문제를 공격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개전 결정은 긴급조치 아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의회와 언론의 검증을 거의 받지 않았다. 군정원은 청평군의 장비 노후화와 지휘 체계의 혼란을 근거로 단기전을 자신했고, 루이나의 군사 지원이 뒤따를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정부 안에서 장기전 가능성을 경고한 목소리는 소수에 그쳤다. 1974년 7월 25일 북산군은 뇌우 작전을 개시해 청평을 침공했다. 1929년의 침공과 구분해 이를 청북전쟁 또는 제2차 청북전쟁이라 부른다. 북산군은 개전 초기 기갑부대와 공수부대를 앞세워 청평의 지휘 체계를 무너뜨렸으나, 수도 점령과 정부의 항복이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전쟁은 점령지의 유격전과 보급로를 둘러싼 소모전으로 번졌고, 1975년 봄 청평의 반격으로 북산군은 전선을 축소하며 후퇴했다. 1975년 9월 할리만 사건을 계기로 루이나가 직접 참전하면서 전황은 다시 뒤집혔다. 연합군은 10월 22일 띠에우리엔을 점령했으나, 점령 직후 루이나군과 북산군 일부 부대가 저지른 [[띠에우리엔 대학살]]은 연합군의 정치적 목표에 치명상을 입혔다. 이후 전쟁은 수도와 항만을 지키는 연합군과 농촌·산악을 되찾은 청평 사이의 소모전으로 굳어졌고, 1977년 7월 27일 바젤 정전협정으로 대규모 전투가 끝났다. 북산은 청평을 굴복시키려던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정전협정에 따라 국경은 전쟁 전으로 돌아갔고, 북산군은 5년간 루이나 군사고문단의 감독 아래 재편되었다. 청평을 압박하려고 시작한 전쟁이 결과적으로 자국 군대의 재편까지 루이나에 맡기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국내에서는 전사자와 참전자의 처우, 개전 결정의 책임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졌고, 79세의 하세가와는 1977년 임기 만료와 함께 정계에서 물러났다. 전쟁은 북산 사회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3년 동안 수십만 명이 동원되었고, 전사자와 부상자의 규모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다. 띠에우리엔 대학살에 북산 부대가 관여했다는 사실은 긴급조치 아래에서 보도가 금지되었으며, 북산 국내에서 이 문제가 공개적으로 거론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상세 내용은 [[청북전쟁]] 문서 참고.}}}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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