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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대
2.1. 토착 사회2.2. 사랜드의 지배2.3. 동방 해방
3. 제정 사랜드의 변경
3.1. 재복속3.2. 사무탁호3.3. 몽골의 침입3.4. 대월인의 이주
4. 남꽝 왕국
4.1. 건국과 책봉4.2. 책봉 체제4.3. 서부 국경 전쟁4.4. 19세기의 동요
5. 북산 보호국
5.1. 1929년 독립 승인5.2. 보호국 체제5.3. 동사랜드 노동당5.4. 제2차 세계대전과 인민적군
6. 9월 혁명과 인민공화국
6.1. 9월 혁명6.2. 띠엔화 협정
7. 사비에트 합병
7.1. 1949년 진주7.2. 동사랜드 자치공화국7.3. 자치공화국 초기의 통치
8. 1951년 봉기
8.1. 노스탈린의 죽음8.2. 탈퇴 의결8.3. 봉기8.4. 진압과 산악 항전
9. 자치공화국 시대
9.1. 인터루쇼프의 민족 정책9.2. 해방구와 이중 권력9.3. 청평의 지원
10. 독립
10.1. 1962년 정전10.2. 크라슬리스크 조약10.3. 동사랜드 민주공화국
11. 건국 초기
11.1. 일당 체제의 정비11.2. 슬라브계 문제11.3. 제3세력 외교
12. 1977년 국경 충돌
12.1. 배경12.2. 바익롱 섬 교전12.3. 단교
13. 고립과 쇄신
13.1. 경제 위기13.2. 1986년 쇄신13.3. 1989년 이후
14. 현대
14.1. 성장과 한계14.2. 사비에트와의 관계14.3. 현 지도부
15. 역사 인식


1. 개요 [편집]

동사랜드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동사랜드는 사랜드 평원 동쪽의 몬순 저지대와 구릉지에 자리 잡은 나라다. 고대 사랜드 제국과 제정 사랜드의 변경이던 이 땅은 몽골의 침입으로 거의 비었고, 원(元)이 옮겨 놓은 대월(大越) 출신 이주민이 그 자리를 채워 오늘날 베트남계 주민의 모체가 되었다. 1418년 이들이 세운 남꽝 왕국은 1420년부터 500년 넘게 청평의 책봉을 받는 속국으로 존속했다.

1929년 청평을 침공한 북산은 청평의 종주권을 끊기 위해 남꽝 왕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국호를 동사랜드 왕국으로 바꾸게 했으나, 실제로는 북산의 보호국이었다. 1945년 9월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동사랜드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1949년 사비에트가 군대를 보내 이를 자치공화국으로 편입했다.

1951년 자치공화국 인민평의회가 연방 탈퇴를 의결하고 인민적군이 봉기하면서 독립 투쟁이 다시 시작되었고, 12년에 걸친 항전 끝에 1963년 크라슬리스크 조약으로 독립이 승인되었다. 독립 이후에는 공산국가이면서도 사비에트 중심의 H.P.(헤르샤바 조약)에 가담하지 않은 제3세력 국가로 남았고, 1977년 국경 충돌 이후 사비에트와는 국교가 없다.

2. 고대 [편집]

2.1. 토착 사회 [편집]

동부 저지대에 사람이 정착한 흔적은 선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농경 사회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기원전 1천년기 무렵이다. 우기마다 범람하는 하천과 습지는 밭농사에는 불리했으나 벼농사에는 알맞아, 저지대 주민들은 물을 가두는 논과 제방을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었다. 이들 토착민은 몽골의 침입 이후 대부분 베트남계 이주민 사회에 흡수되었고, 일부는 구릉지의 소수민족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마을들은 제방과 수문을 함께 관리하는 '제방 연합'으로 묶였고, 그 수장은 무엇보다 물 분배를 조정하는 사람이었다. 서쪽 평원의 사랜드 도시들이 신전과 성벽을 중심으로 성장한 데 비해, 동부의 제방 연합은 오랫동안 느슨한 형태로 남았다.

2.2. 사랜드의 지배 [편집]

기원전 3세기 이후 동쪽으로 팽창한 고대 사랜드 제국은 기원전 2세기경 동부 저지대를 복속시켰다. 사랜드는 이 일대를 청평으로 향하는 원정로이자 곡물 공급지로 삼아, 주요 하천을 따라 요새와 역참을 세우고 제방 연합의 수장들에게 공납과 병력 차출을 요구했다.

사랜드의 지배는 직접 통치보다는 수장을 통한 간접 통치에 가까웠다. 수장들은 총독부에 공납을 바치는 대신 내부 자치를 인정받았다.

2.3. 동방 해방 [편집]

기원후 3세기 로마 제국의 침공으로 사랜드 제국이 서부 방어에 매달리자 동부의 수비대는 차례로 철수했다. 청평에서 '동방 해방'이라 불리는 연쇄 봉기가 일어났을 때 동부 저지대의 제방 연합들도 공납을 끊었다.

사랜드 제국이 붕괴한 뒤 동부는 수백 년 동안 어떤 외부 세력에도 속하지 않은 제방 연합들의 땅이 되었다. 동사랜드 역사학은 이 시기를 '제방의 시대'라 부르며, 훗날 베트남계 이주민이 이어받게 되는 제방 공동체의 전통이 형성된 시기로 본다.

3. 제정 사랜드의 변경 [편집]

3.1. 재복속 [편집]

711년 서부 평원을 통일한 제정 사랜드는 고대 제국의 옛 영역을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동쪽 원정을 시작했다. 8세기 중엽까지 동부의 주요 제방 연합들이 제정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제정은 이들을 '동방 토후령'으로 편성해 고대와 같은 간접 통치를 되살렸다.

3.2. 사무탁호 [편집]

제정의 동부 변경에서 가장 큰 분쟁지는 사무탁호 일대였다. 사무탁호는 매년 몬순이 올 때마다 지형이 바뀌는 늪지대라 물길이 바뀔 때마다 경계도 달라졌다. 제정 사랜드는 이곳에서 빌베른 공화국과 충돌했고, 안나 세네타 카투시의 충돌을 거쳐 789년 빌베른공화국-제정사랜드전쟁에서 패배했다. 이후 300년 가까이 국경 분쟁이 되풀이된 끝에 Insull'a Pallsxx'i Samutkxx'i(現 Thi Sam Ngu Di)를 기준으로 경계가 합의되었다.

분쟁 기간 동안 동부 토후들은 두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제정의 징발이 가혹해지면 빌베른 쪽으로 기울었고, 빌베른의 영향력이 커지면 제정의 보호를 청했다.

3.3. 몽골의 침입 [편집]

13세기 중엽부터 14세기 초에 걸친 몽골의 침입은 제정 사랜드의 동쪽 절반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동부 저지대는 원정로에 놓여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제방과 수문이 파괴되면서 논은 다시 늪으로 돌아갔다. 인구는 수십 년 사이 절반 아래로 줄었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구릉지로 흩어졌다. 여기에 1321년 몬타나 화산 대분화와 1349년 흑사병이 겹쳤다.

몽골의 침입으로 제정 사랜드의 동부 지배는 완전히 끊겼다. 이후 동사랜드 지역이 다시 사랜드권에 들어가는 것은 600년 뒤인 1949년의 일이다.

3.4. 대월인의 이주 [편집]

원은 황폐해진 동부 저지대를 다시 경작지로 만들기 위해 강제 이주를 실시했다. 북쪽의 정사주관에 고려인과 화북 한인, 열도인을 옮긴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동부 저지대로 보내진 것은 주로 대월 출신이었다. 13세기 후반 원의 대월 원정에서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과 원의 남방 변경에서 징발된 대월계 주민이,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전반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둔전에 배치되었다.

대월인 둔전민은 파괴된 제방과 수문을 복구해 늪으로 돌아간 논을 되살렸다. 홍수가 잦은 강 하류에서 벼농사를 지어 온 이들의 기술은 동부 저지대의 환경에 잘 맞았고, 둔전 촌락은 빠르게 늘어났다. 구릉지로 흩어졌던 토착민 일부는 저지대로 돌아와 이주민 촌락에 섞였고, 베트남어가 저지대의 공용어로 자리 잡았다. 토착민의 언어는 제방과 물길에 관한 어휘로 베트남어에 흡수되었다.

4. 남꽝 왕국 [편집]

4.1. 건국과 책봉 [편집]

14세기 후반 원의 통제가 무너지자 동부 저지대에서는 둔전 지휘관 출신의 토호들이 서로 다투었다. 1418년 티삼응우지(Thi Sam Ngu Di)의 토호 푹 반 찌엔이 주변 세력을 통합해 남꽝 왕국을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1945년까지 이어진 푹 왕조다.

푹 반 찌엔은 건국 직후 북쪽의 청평에 사신을 보냈다. 1412년 몽골을 몰아내고 성립한 청평대제국은 1414년 북산 국왕을 책봉한 데 이어, 1420년 푹 반 찌엔을 남꽝 국왕으로 책봉했다. 서쪽에서 제정 사랜드가 다시 세력을 뻗쳐 올 가능성에 대비해, 청평의 보호를 보험으로 삼으려는 선택이었다. 대월에서 온 이주민의 후손들에게 책봉과 조공은 조상의 기억 속에 있던 익숙한 질서이기도 했다.

4.2. 책봉 체제 [편집]

남꽝 왕국은 3년에 한 번 청평에 조공 사절을 보내 쌀과 향료, 상아를 바치고 비단과 도자기, 서적을 받았다. 국왕은 즉위할 때마다 청평 칙사의 책봉을 받아야 했고, 공문서에는 청평의 연호와 역법을 썼다. 대신 내정과 군사는 온전히 왕국의 몫이었다.

청평의 영향은 제도와 문화 전반에 미쳤다. 15세기 후반 남꽝 왕국은 청평식 과거제를 도입해 청평 문자를 읽는 관료층을 길렀고, 궁정 의례와 법전도 청평의 것을 본떴다. 다만 촌락 단위에서는 둔전 시절부터 이어진 제방 공동체의 자치가 강해, '왕의 법도 마을의 관습에는 진다'는 속담이 말해 주듯 위는 청평식 관료제, 아래는 마을 자치라는 이중 구조가 왕조 내내 이어졌다.

문자 생활의 중심은 청평 문자였다. 공문서와 과거 시험은 청평 문자로 치렀고, 베트남어를 그대로 적을 때는 청평 문자를 빌리거나 변형한 표기가 민간에서 쓰였다. 17세기 중엽에는 청평을 거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이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적는 표기법을 만들었으나, 이 표기는 오랫동안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만 쓰였다.

청평은 왕위 계승 분쟁에 여러 차례 개입했다. 1547년 두 왕자가 왕위를 다투었을 때 청평은 3년 동안 책봉을 보류하며 한쪽을 지지했고, 이 일은 책봉이 형식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 사례로 꼽힌다.

4.3. 서부 국경 전쟁 [편집]

17세기 초 제정 사랜드는 옛 '동방 토후령'의 회복을 내걸고 남꽝 왕국의 서부를 침공했다. 1622년 서부의 요새 세 곳이 함락되자 남꽝 왕국은 청평에 원군을 청했고, 1624년 청평군이 남하하면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1627년 강화로 롱 강이 두 나라의 경계로 정해졌다. 이 경계는 이후 300년 넘게 유지되었고, 오늘날 동사랜드와 사비에트의 국경도 대체로 이 선을 따른다.

4.4. 19세기의 동요 [편집]

19세기 들어 청평이 쇠퇴하고 열강의 개항장과 조차지가 청평 해안에 들어서자, 남꽝 왕국도 그 여파를 피하지 못했다. 1860년대 왕국은 열강과 잇따라 통상 조약을 맺고 항구 두 곳을 개방했으며, 서쪽에서는 제정 사랜드의 슬라브계 개척민이 롱 강 유역으로 밀려들었다.

1880년대 국왕 푹 반 떤은 군제와 세제를 근대식으로 고치는 개혁을 시도했으나, 과거제로 선발된 관료층과 청평 조정 양쪽의 반대로 좌초했다. 청평은 쇠퇴 속에서도 마지막 남은 번속국을 붙들기 위해 남꽝 궁정에 대한 간섭을 오히려 늘렸다.

5. 북산 보호국 [편집]

5.1. 1929년 독립 승인 [편집]

1929년 4월 북산이 청평을 침공했고, 8월 2일 청평의 희안제가 항복하면서 517년 이어진 청평대제국이 무너졌다. 남꽝 왕국은 종주국이 소멸하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11월 북산 함대가 티삼응우지 앞바다에 나타났고, 북산은 남꽝 왕국과 티삼응우지 조약을 맺었다. 조약 제1조는 "북산은 남꽝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며, 청평에 대한 일체의 전례(典禮)는 폐지한다"였다. 북산은 청평의 종주권을 법적으로 끊어 청평 식민 통치의 걸림돌을 없애려 했고, 국호도 청평과의 연결을 지우는 '동사랜드 왕국'으로 바꾸게 했다. 청평 이전 시대의 지리 명칭을 되살린 이 국호는 북산 고문단이 고안한 것이었다.

5.2. 보호국 체제 [편집]

그러나 같은 조약의 부속 의정서는 북산 고문의 국정 참여, 외교 사무의 북산 경유, 북산군의 주둔을 규정했다. 동사랜드는 이름만 독립국이었고 실제로는 북산의 보호국이었다. 마지막 국왕 푹 반 캉은 북산 고문부의 결재 없이는 칙령을 낼 수 없었다.

보호국 시기 북산은 동사랜드를 청평 식민지의 배후 곡창으로 삼았다. 저지대의 논은 북산 자본의 농장으로 넘어갔고, 쌀은 철도를 통해 북쪽으로 반출되었다. 과거제 출신 관료층은 북산 고문부에 협력하는 쪽과 등을 돌리는 쪽으로 갈라졌다.

5.3. 동사랜드 노동당 [편집]

1931년 띠엔화의 교사와 철도 노동자들이 동사랜드 노동당을 결성했다. 지도자는 교사 출신의 쩐 반 럼이었다. 노동당은 북산의 보호국 체제와 왕정을 함께 타도 대상으로 삼았고, 청평의 반식민 혁명 조직, 사랜드 공산당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쩐 반 럼은 1930년대 두 차례 투옥되었고, 출옥 뒤에는 구릉지 농촌에 당 조직을 뿌리내리는 데 주력했다.

5.4. 제2차 세계대전과 인민적군 [편집]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 측으로 참전한 북산은 동사랜드의 쌀을 전쟁 물자로 대량 징발했다. 1944~1945년 청평 북부에 대기근이 들었을 무렵 동사랜드 저지대에서도 쌀 징발로 수만 명이 굶어 죽었다.

노동당은 1942년 무장 조직인 인민적군을 창설해 구릉지 일대를 장악하고, 곡물 징발 거부를 내세워 농민의 지지를 얻었다. 종전 무렵 인민적군은 약 3만 명 규모로 성장해 동사랜드 농촌의 상당 부분을 실효 지배하고 있었다.

6. 9월 혁명과 인민공화국 [편집]

6.1. 9월 혁명 [편집]

종전 직후 북산이 청평의 저항을 누르기 위해 병력을 북쪽으로 집중하면서 동사랜드 주둔군은 크게 줄었다. 1945년 9월 인민적군은 전국적인 봉기에 나서 띠엔화와 티삼응우지를 차례로 장악했고, 9월 17일 국왕 푹 반 캉이 퇴위했다. 527년 이어진 푹 왕조는 이로써 끝났다.

같은 날 동사랜드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고, 쩐 반 럼이 주석에 올랐다. 청평 문제에 매달린 북산은 동사랜드를 되찾으려 하지 않았다. 동사랜드 정부는 이 봉기를 '9월 혁명'이라 부른다.

인민공화국 정부는 첫 사업으로 문맹 퇴치 운동을 벌이면서 로마자 베트남어 표기를 국자로 채택했다. 배우기 쉬운 문자로 농민의 문맹을 없애는 동시에, 500년 동안 이어진 청평 문자권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이었다. 청평 문자는 1947년까지 공문서에서 모두 퇴출되었다.

6.2. 띠엔화 협정 [편집]

1946년 서쪽의 사랜드에서 공화국 정부와 사랜드 공산당의 인민군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자, 동사랜드 인민공화국은 인민군의 후방 기지가 되었다. 인민적군 부대가 롱 강을 건너 공동 작전에 나섰고, 동사랜드의 쌀이 인민군의 군량이 되었다.

1947년 4월 동사랜드 노동당과 사랜드 공산당은 띠엔화에서 협정을 맺었다. 협정은 "혁명이 승리한 뒤 양측은 서로의 주권과 영토를 존중한다"고 규정했다. 동사랜드 측에게 이 조항은 독립의 보증이었다.

7. 사비에트 합병 [편집]

7.1. 1949년 진주 [편집]

1949년 내전에서 승리한 사랜드 공산당은 사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선포했다. 크라슬리스크의 새 지도부는 곧 동사랜드에 '혁명 성과의 통합'을 요구했고, 동사랜드 노동당 안의 친사비에트파가 이에 호응했다.

1949년 12월 친사비에트파 간부들의 '형제적 원조 요청'을 명분으로 사비에트군 3개 사단이 롱 강을 넘었다. 쩐 반 럼은 유혈을 피하기 위해 인민적군에 저항하지 말 것을 지시했으나 일부 부대가 교전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이 사망했다. 쩐 반 럼은 체포를 피해 구릉지로 잠적했다.

12월 28일 사비에트군이 포위한 가운데 소집된 동사랜드 인민회의는 연방 '가입 청원'을 의결했고, 사비에트 최고인민평의회는 12월 30일 이를 승인했다. 11일 전 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청평은 사비에트의 원조에 기대고 있던 처지라 침묵했다.

7.2. 동사랜드 자치공화국 [편집]

동사랜드는 연방의 구성 공화국인 주(州)가 아니라 한 단계 낮은 자치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사비에트 헌법은 주에는 명목상의 연방 탈퇴권을 부여했지만 자치공화국에는 이 권리를 주지 않았다.

자치공화국에는 인민평의회와 자치 정부가 설치되었고, 동사랜드 노동당은 사비에트 노동인민당의 지부로 흡수되었다. 인민적군은 해산되어 사비에트 인민해방군의 1개 군단으로 재편되었으나, 지휘관 대부분은 인민적군 출신이 그대로 맡았다.

7.3. 자치공화국 초기의 통치 [편집]

1950~1951년 자치공화국에서는 논의 집단화와 러시아어 교육이 서둘러 도입되었고, 1950년에는 베트남어를 키릴 문자로 적는 개정 표기법이 공포되었다. 물길 단위로 관리되는 동사랜드의 논은 서부 평원식 대규모 집단농장에 맞지 않았고, 집단화 첫해 쌀 수확량은 3분의 1 가까이 줄었다.

같은 시기 연방 지도부는 노동당 출신 간부 가운데 '민족주의 편향'이 있다고 본 인물들을 교체하기 시작했다. 1950년 한 해 동안 자치 정부 부장급 간부 11명 중 7명이 사비에트 본토 출신으로 바뀌었다.

8. 1951년 봉기 [편집]

8.1. 노스탈린의 죽음 [편집]

1951년 6월 사비에트의 초대 지도자 노스탈린이 사망하자 크라슬리스크의 지도부는 후계 문제로 몇 달간 사실상 마비되었다. 노동당 출신 간부들은 이 공백을 독립을 되찾을 기회로 보았다.

8.2. 탈퇴 의결 [편집]

1951년 10월 9일 동사랜드 자치공화국 인민평의회는 찬성 187표, 반대 41표, 기권 23표로 연방 탈퇴를 의결했다. 의결을 이끈 사람은 인민평의회 의장 호앙 티 마이였다.

결의문의 논리는 세 갈래였다. 첫째, 1949년의 가입 청원은 군대가 포위한 가운데 강요된 것이므로 무효다. 둘째, 띠엔화 협정은 동사랜드의 주권을 보장했다. 셋째, 사비에트 스스로 1949년의 가입을 '자발적'이라 주장하는 이상, 자발적으로 들어온 나라는 자발적으로 나갈 수도 있어야 한다.

8.3. 봉기 [편집]

연방 지도부는 결의가 헌법상 효력이 없다고 선언하고 인민평의회를 해산했다. 10월 12일 연방 보안기관이 호앙 티 마이를 비롯한 평의원 60여 명을 체포하자, 옛 인민적군 출신 군단 병력의 상당수가 부대를 이탈해 잠적해 있던 쩐 반 럼의 지휘 아래 봉기했다. 봉기군은 한때 띠엔화와 자치공화국 동부 대부분을 장악했다.

동사랜드에서 '인민적군 혁명'이라 부르는 사건이 이것이다. 동사랜드 정부는 봉기군이 띠엔화 시청에 깃발을 올린 10월 14일을 혁명 기념일로 지킨다.

8.4. 진압과 산악 항전 [편집]

니키타 인터루쇼프가 새 지도자로 권력을 굳힌 1951년 말부터 사비에트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952년 봄까지 띠엔화를 비롯한 저지대 도시는 모두 탈환되었고, 인민적군은 북부 구릉지와 밀림으로 물러나 유격전으로 전환했다.

호앙 티 마이는 1953년 크라슬리스크의 교도소에서 사망했으며, 사인은 지금도 공개되지 않았다. 봉기와 진압 과정의 사망자는 동사랜드 정부 추계로 약 4만 명이며, 사비에트는 공식 수치를 발표한 적이 없다.

9. 자치공화국 시대 [편집]

9.1. 인터루쇼프의 민족 정책 [편집]

니키타 인터루쇼프는 진압과 회유를 병행했다. 1954년 봉기 가담자에 대한 부분 사면을 단행하고 베트남어를 자치공화국 공용어로 복원하고 로마자 표기를 다시 허용했으며, 논 집단화를 물길 단위의 협동조합 방식으로 완화했다.

한편으로는 1955년부터 '동부 개척 사업'을 벌여 사비에트 본토의 슬라브계 주민 수십만 명을 동사랜드 저지대의 국영 농장과 신설 공업 도시로 이주시켰다. 자치공화국의 새 행정 중심지로 건설된 살랑시티도 이때 옛 왕도 티삼응우지 곁에 들어선 신도시였다. 오늘날 동사랜드 인구의 12%를 차지하는 슬라브계의 상당수가 이 시기 이주민의 후손이다.

9.2. 해방구와 이중 권력 [편집]

1950년대 중반 이후 자치공화국은 사실상 둘로 나뉘었다. 저지대 도시와 국영 농장은 사비에트 행정 아래 있었고, 북부 구릉지와 밀림의 상당 부분은 인민적군이 '해방구'로 운영했다.

해방구에서는 노동당이 재건되어 토지 분배와 로마자 베트남어 학교를 운영했다. 저지대 마을에도 밤이면 인민적군의 조세 징수원이 드나들었고, 같은 마을이 낮에는 자치 정부에, 밤에는 해방구에 세금을 내는 이중 권력 상태가 10년 가까이 이어졌다.

9.3. 청평의 지원 [편집]

전환점은 청평과 사비에트의 결별이었다. 1959~1960년 사비에트가 청평 원조를 줄이고 기술자를 철수시키자, 청평은 남쪽 국경 너머의 인민적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49년 합병을 묵인했던 옛 종주국이 10여 년 만에 태도를 바꾼 것이다.

1961년부터 청평제 소총과 박격포가 국경 산악로를 따라 해방구로 들어왔고, 인민적군은 1961~1962년 건기 공세로 자치공화국 북부의 군 소재지 여러 곳을 점령했다.

10. 독립 [편집]

10.1. 1962년 정전 [편집]

1962년 사비에트 지도부는 동사랜드 문제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청평과의 국경 긴장, 루이나와의 우주경쟁에 따른 재정 부담, 유엔에서 제기된 '공산권 내부의 식민 전쟁'이라는 비판이 겹치면서, 동사랜드를 붙들어 두는 비용이 이득을 넘어섰다는 판단이었다. 1962년 11월 양측은 정전에 합의했다.

10.2. 크라슬리스크 조약 [편집]

1963년 3월 크라슬리스크에서 체결된 분리 조약으로 사비에트는 동사랜드 자치공화국의 연방 탈퇴를 승인했다. 사비에트는 조약을 수도에서 서명하게 하고 조문에 '연방의 승인에 따른 분리'라는 표현을 넣는 데 집착했는데, 1949년 가입이 자발적이었다는 입장과 1951년 결의가 무효라는 입장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였다.

조약은 1627년 이래의 롱 강 경계를 국경으로 정하고, 슬라브계 주민에게 5년간 국적 선택권을 보장했다. 다만 롱 강의 하중도들은 "추후 협의"로 남겨졌다. 같은 해 9월 동사랜드는 유엔에 가입했다.

청평은 동사랜드를 가장 먼저 승인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청평 조정 일각에서는 옛 책봉 관계를 의례적으로라도 되살리자는 제안이 나왔으나, 동사랜드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10.3. 동사랜드 민주공화국 [편집]

1963년 4월 동사랜드 민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초대 국가평의회 위원장은 쩐 반 럼이었고, 노동당은 집권당으로 복귀했다. 인민적군은 해산되지 않고 해방구 시절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 국군인 동사인민적군(ESPA)이 되었다. 수도는 자치공화국 시기 행정 중심지였던 살랑시티로 정해졌다.

국호는 1929년 이래의 '동사랜드'를 그대로 이었다. 청평과의 연결을 끊기 위해 북산이 붙인 이름이었지만, 1945년 이후에는 왕정과 보호국 모두에서 벗어난 나라의 이름이 되었고, 1963년에는 사비에트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게 되었다. 사비에트는 1949년 스스로 국호에서 지운 '사랜드'를 동사랜드가 쓰는 것을 두고 영토적 야심의 표현이라며 항의했다.

11. 건국 초기 [편집]

11.1. 일당 체제의 정비 [편집]

1963년 헌법은 동사랜드 노동당의 영도와 국가평의회 체제를 규정했다. 쩐 반 럼 정부는 해방구 시절의 방식을 전국으로 넓혀, 사비에트식 국영 농장을 해체하고 물길 단위의 농업 협동조합으로 재편했다.

공업은 사비에트가 남긴 국영 공장을 국유화해 운영했으나, 기술자 상당수가 슬라브계였던 탓에 이들이 떠나면서 생산이 크게 흔들렸다. 1960년대 후반 동사랜드는 청평의 기술 지원으로 이 공백을 일부 메웠다.

11.2. 슬라브계 문제 [편집]

조약에 따른 국적 선택 기간(1963~1968) 동안 슬라브계 주민 약 40%가 사비에트로 떠났고, 나머지는 동사랜드 국적을 택했다. 남은 슬라브계는 헌법상 동등한 시민이었으나 공직과 당 요직에서는 사실상 배제되었고, 러시아어 학교는 단계적으로 줄었다.

사비에트는 이를 '동포 탄압'이라 비난했다. 슬라브계 문제는 이후 국경 문제와 함께 두 나라 관계에서 가장 민감한 쟁점이 되었다.

11.3. 제3세력 외교 [편집]

동사랜드는 공산국가였지만 H.P.(헤르샤바 조약)에 가입하지 않고 제3세력 노선을 택했다. 가장 가까운 나라는 청평이었다. 청북전쟁(1974~1977) 때는 청평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고 국경을 넘어온 피난민을 받아들였으나, 참전하지는 않았다.

12. 1977년 국경 충돌 [편집]

12.1. 배경 [편집]

크라슬리스크 조약이 미결로 남긴 롱 강의 하중도들은 1970년대 들어 두 나라의 초소가 마주 보는 분쟁지가 되었다. 여기에 슬라브계 문제와 동사랜드의 친청평 노선이 겹치며 긴장이 높아졌다.

12.2. 바익롱 섬 교전 [편집]

1977년 3월 2일 롱 강의 바익롱 섬(사비에트명 벨리 섬)에서 양측 순찰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3월 15일에는 사비에트군이 포병 지원 아래 섬을 공격해 점령했고, 동사랜드군은 이틀 뒤 역습으로 섬 남쪽을 되찾았다. 교전은 4월까지 하천 유역 세 곳에서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사망자는 동사랜드 발표로 자국 군인 186명, 사비에트 발표로 자국 군인 71명이며, 양측 모두 상대의 손실이 수백 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청평은 동사랜드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12.3. 단교 [편집]

1977년 5월 동사랜드는 사비에트와의 국교를 단절했다. 사비에트는 교역을 전면 중단했고, 바익롱 섬은 이후 두 나라 초소가 남북을 나누어 점유한 채 지금까지 분쟁지로 남아 있다.

13. 고립과 쇄신 [편집]

13.1. 경제 위기 [편집]

사비에트와의 단교는 동사랜드 경제에 큰 타격이었다. 석유와 기계류의 대부분을 사비에트에 의존하던 공업 부문이 멈추다시피 했고, 1979~1982년에는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1979년 쩐 반 럼이 사망한 뒤 뒤를 이은 응우옌 흐우 딘은 배급제를 강화했으나, 쌀 부족은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같은 해 12월 사비에트가 고랜드를 침공하자 동사랜드는 유엔에서 철군 결의에 찬성했다.

13.2. 1986년 쇄신 [편집]

1986년 동사랜드 노동당 대회는 '쇄신'을 채택했다. 협동조합의 논을 가구 단위로 장기 임대하고 쌀의 자유 판매를 허용했으며, 수출 가공 구역을 설치해 외국 자본을 받아들였다. 쇄신을 이끈 즈엉 반 푹 총리는 제3세력 노선을 경제 외교로 넓혀, 청평뿐 아니라 LSEC 회원국들과의 교역을 늘렸다.

13.3. 1989년 이후 [편집]

1989년 청평의 인민광장 사건 이후 동사랜드는 청평 망명자들이 제3국으로 빠져나가는 경유지가 되었다. 청평은 이를 묵인하는 동사랜드 당국에 항의했고, 두 나라 관계는 한동안 냉각되었다. 동사랜드는 1990년대 들어 망명자 문제를 조용히 봉합하며 청평과의 관계를 복원했다.

14. 현대 [편집]

14.1. 성장과 한계 [편집]

2000년대 이후 동사랜드는 쌀·섬유·전자 조립을 중심으로 꾸준히 성장했으나, 1인당 명목 GDP는 약 4,900달러로 여전히 이웃 나라들에 못 미친다. 국가신용등급은 B+(2024년)이다. 인구 약 3,400만 명에 출산율이 높고 수도권 집중이 심해, 청년 고용과 도시 주거가 주요 과제로 꼽힌다.

14.2. 사비에트와의 관계 [편집]

사비에트와는 1977년 이후 국교가 없다. 2000년대 몇 차례 비공식 접촉이 있었으나 바익롱 섬과 슬라브계 문제에서 진전이 없었다. 미하일 인터루쇼프 체제 이후 사비에트는 동사랜드를 '역사적 오류'라고 부르던 표현을 공식 문서에서 쓰지 않게 되었으나, 동사랜드 정부는 이를 관계 개선의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2010년대 이후에는 루이나, 유고랜드와 제한적인 외교 관계를 구축하며 제3세력 노선의 폭을 넓히고 있다.

14.3. 현 지도부 [편집]

현재 국가평의회 위원장은 류 반 찌, 총리는 팜 쭝 히엔이다.

15. 역사 인식 [편집]

동사랜드 역사 서술의 첫 번째 쟁점은 민족의 기원이다. 공식 역사는 '제방의 시대'의 토착 공동체와 몽골 이후의 베트남계 사회를 하나로 이어진 동사랜드사로 서술하며, 강제 이주라는 기원보다 무너진 제방을 되살려 땅을 일군 개척의 역사를 강조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오늘날 주민의 주류가 원의 강제 이주민에서 기원한다는 점이 정설이며, 이주민 사회에 흡수되지 않고 구릉지에 남은 토착 소수민족이 경제적·문화적으로 주변화되어 있다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된다.

동사랜드 역사학은 남꽝 왕국의 책봉 체제를 '형식은 사대, 실질은 자주'로 평가한다. 조공과 책봉은 의례였을 뿐 내정과 군사는 왕국이 스스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반면 청평 역사학은 남꽝 왕국을 청평 문명권의 남방 번속국으로 서술하며, 1620년대 서부 국경 전쟁에서 청평군이 왕국을 지켜 낸 일을 강조한다.

1929년 티삼응우지 조약에 대한 평가는 더 엇갈린다. 동사랜드 역사학은 이를 '독립이라는 이름의 보호국화'로 보지만, 청평을 떠나 독자 국가로 인정받은 첫 계기였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는다. 국호 '동사랜드'가 이 조약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지금도 동사랜드 안에서 불편한 주제로 남아 있다.

동사랜드 정부의 공식 역사관은 1945년 9월 혁명으로 성립한 인민공화국이 오늘날 국가의 직접적인 기원이며, 1949~1963년은 '점령기'라고 본다. 1951년 10월의 탈퇴 의결과 봉기는 점령에 맞서 주권을 되찾으려 한 '인민적군 혁명'으로 서술되고, 1963년 크라슬리스크 조약은 사비에트가 이를 뒤늦게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동사랜드의 공식 문서가 독립 연도를 1951년으로 적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비에트의 공식 입장은 정반대다. 1949년 가입은 동사랜드 인민회의의 자발적 청원에 따른 것이고, 1951년 결의는 헌법상 권한이 없는 기관의 무효 행위이며, 1963년 분리는 연방이 선의로 승인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사비에트 역사 교과서는 동사랜드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으며, 1951~1963년의 진압과 항전은 '동부 소요'로 짧게 언급될 뿐이다.

슬라브계 주민의 기억은 두 서사 어디에도 온전히 들어가지 않는다. 1950년대 이주민의 후손들은 스스로를 국가 정책에 따라 옮겨진 사람들로 기억하며, 1963년 이후의 공직 배제와 러시아어 학교 축소를 '두 번째 이주'라고 부른다. 호앙 티 마이의 사인, 1949년 진주와 1951~1952년 진압의 사망자 수, 동부 개척 사업의 강제성 여부는 지금도 두 나라 역사학계의 쟁점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