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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랜드 시대
2.1. 고원의 수로 문명2.2. 저지대 식민 도시2.3. 분수 전쟁2.4. 두 이름의 기원
3. 고대 사랜드 제국
3.1. 왕국의 통합3.2. 동방 팽창과 청평 정복3.3. 제국의 통치3.4. 고북산 원정3.5. 로마와의 전쟁과 붕괴
4. 분열기
4.1. 소영주의 시대4.2. 역병과 인구 감소4.3. 슬라브인의 이주
5. 제정 사랜드6. 장미 혁명과 사랜드 공화국
6.1. 제1차 세계대전6.2. 장미 혁명6.3. 사랜드 공화국6.4. 사랜드 공산당6.5. 대공황과 군부 정권6.6. 추축국 가담6.7. 종전과 과도정부
7. 붉은 혁명
7.1. 내전의 발발7.2. 연합국의 방관7.3. 동부의 동맹7.4. 내전의 전선7.5. 인민군의 승리7.6. 동사랜드 합병
8. 노스탈린 시대
8.1. 연방의 설계8.2. 사회의 개조8.3. 집단화와 5개년 계획8.4. 대정리8.5. 소련과의 동맹8.6. 청평과 해협8.7. 노스탈린의 와병과 동사랜드 봉기8.8. 노스탈린의 죽음
9. 안토노프 시대
9.1. 집단지도 체제9.2. 탈노스탈린화9.3. 유엔 가입과 평화 공존9.4. 노스탈린그라드9.5. 농업 개혁과 관개 사업9.6. 청평과의 동맹과 결별9.7. 동사랜드의 분리9.8. 우주경쟁의 시작9.9. 콘스탄티노폴9.10. 해협 남부의 공산화와 안토노프의 실각
10. 브레자코프 시대
10.1. 안정과 정체10.2. 반체제와 민족 문제10.3. 궤도의 검10.4. 선전 없는 경쟁10.5. 해협 남부의 위성국10.6. NLTO와 해르샤바 조약기구10.7. 청북전쟁과 동사랜드10.8. 고랜드 침공10.9. 노스탈린그라드 올림픽과 브레자코프의 죽음
11. 원로 정치와 재편
11.1. 체르노프와 벨랴예프11.2. 카멘스키의 재편11.3. 재편의 그늘11.4. 궤도의 휴전11.5. 고랜드 철군11.6. 카멘스키의 실각
12. 1990년대의 혼란
12.1. 유르첸코와 경제 위기12.2. 쿠르딘의 개혁12.3. 레베데프와 과도기12.4. 소련의 원조12.5. 체제의 생존
13. 미하일 인터루쇼프 시대
13.1. 집권13.2. 통치 방식13.3. 성장과 격차13.4. 1.19 사건과 벨포르 협정13.5. 해협의 정세13.6. 신우주경쟁13.7. 오늘날의 사비에트
14. 역사 인식15. 연표


1. 개요 [편집]

사비에트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사비에트의 역사는 크게 여섯 층으로 나뉜다. 북부 고원의 수로 문명 고랜드와 그 저지대 식민 도시들이 갈라져 나온 분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동방을 호령한 고대 사랜드 제국, 제국이 무너진 뒤 슬라브인이 평원에 자리 잡은 분열기, 711년부터 1917년까지 이어진 제정 사랜드, 장미 혁명으로 세워졌다가 추축국 편에 서서 무너진 사랜드 공화국, 그리고 1949년 붉은 혁명 이후의 사회주의 연방이다.

사비에트 역사 서술을 관통하는 말은 '분수(分水)'다. 고원의 본국이 물길을 돌려 저지대를 굶기려 했을 때 저지대가 공납을 끊고 떨어져 나온 일이 곧 사랜드의 출발이었고,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이후의 모든 전환점을 억압에 맞선 이탈과 새 질서의 수립으로 서술한다. 제정을 끝낸 1917년의 장미 혁명과 공화국을 끝낸 1949년의 붉은 혁명은 이 서사 안에서 '미완의 혁명'과 '혁명의 완성'이라는 한 쌍으로 묶인다.

지리적으로 사비에트의 역사는 북부 고원과 중부 대평원, 동부 몬순 저지대라는 세 지대의 관계로 읽히기도 한다. 고원은 문명의 발상지이자 끊임없는 국경 분쟁의 상대였고, 평원은 고대 제국과 제정, 두 차례 혁명의 무대였으며, 동부 저지대는 정복과 상실이 되풀이된 변경이었다. 오늘날 고원에는 고랜드가, 롱 강 너머의 동부 저지대에는 동사랜드가 자리하고 있으며, 두 나라와의 관계는 사비에트 현대사의 가장 큰 전쟁과 분리로 이어졌다.

또 하나의 축은 해협 너머의 루이나다. 1949년 수립된 사회주의 연방은 처음부터 루이나의 적이었던 것이 아니다. 공화국 정부가 추축국 편에 섰던 탓에 내전 기간 연합국은 공화국을 돕지 않았고, 두 나라가 대립하기 시작한 것은 1949년 이후 해협 주변에 공산 정권이 잇따라 들어서면서부터였다. 1963년 제1차 랜드 대전이 끝나고 해협 남부가 차례로 공산화되자 대치선은 해협을 따라 굳어졌고, 이후 두 나라는 우주 공간의 군사적 활용을 두고 반세기 넘게 경쟁해 왔다. 2026년 현재에도 이 대립은 끝나지 않았다.

1949년 이후 사비에트는 11명의 서기장을 거쳤다. 초대 서기장 이오시프 노스탈린의 권위주의 체제, 안토노프 시대의 부분적 해빙, 브레자코프 시대의 장기 정체와 고랜드 침공, 카멘스키의 재편, 1990년대의 혼란을 거쳐 1998년 미하일 인터루쇼프가 집권했다. 1950~60년대 총리를 지낸 할아버지 니키타 인터루쇼프 이래 3대에 걸친 인터루쇼프 가문의 권력은 혁명국가 안의 세습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2. 고랜드 시대 [편집]

2.1. 고원의 수로 문명 [편집]

사비에트 역사의 출발점은 랜드해협 최초의 문명인 고랜드다. 기원전 1천년기 전반 북부 고원 분지에서 성립한 고랜드는 산정의 수원에서 지하 수로를 끌어내 농사를 지었다. 비가 적은 고원에서 수로는 곧 생존이었고, 수로망을 설계하고 보수하며 물을 배분하는 신관단이 그대로 국가가 되었다.

고랜드의 신앙도 물에서 나왔다. 신관단은 산정의 샘을 신들이 머무는 곳으로 여겼고, 해마다 우기가 끝날 무렵 수원의 문을 여는 의례를 통해 한 해의 물 배분을 선포했다. 물을 나누는 권한과 신의 뜻을 전하는 권한이 같은 손에 있었다는 점이 고랜드 체제의 핵심이었다.

고랜드의 도시는 수원을 따라 계단식으로 들어섰다. 가장 높은 곳에는 샘과 신전이, 그 아래로 신관단의 거처와 창고, 다시 그 아래로 농민의 마을과 계단식 밭이 자리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권위도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이 공간 배치는 고랜드 사회의 위계를 그대로 보여 주었고, 훗날 저지대 사람들이 고원을 '높은 곳의 나라'로 부르게 된 배경이 되었다.

2.2. 저지대 식민 도시 [편집]

기원전 7~6세기부터 고원의 인구가 수로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자, 고랜드는 남쪽 강 하류의 저지대 평원에 식민 도시를 세웠다. 평원은 물이 풍부하고 땅이 기름졌다. 식민 도시들은 곡물을 고원으로 올려 보내는 공납 체계에 묶였고, 수로 의례와 공납량의 결정은 여전히 고원의 신관단이 맡았다.

수백 년이 지나면서 구조가 역전되었다. 저지대 도시들은 인구와 생산력에서 본국을 앞질렀고, 강을 따라 서로 교역하며 독자적인 상인층과 장인층을 길렀다. 그러나 정치적 결정권은 끝까지 고원에 있었다. 저지대의 부가 고원의 의례를 떠받치는 이 불균형이 분화의 뿌리가 되었다.

2.3. 분수 전쟁 [편집]

기원전 5세기 말 수십 년에 걸친 대가뭄이 닥쳤다. 산정의 샘이 줄자 본국은 저지대의 공납을 크게 올렸고, 고원에서 발원해 평원으로 흐르는 강의 상류에 둑을 쌓아 물길을 고원 쪽으로 돌렸다. 저지대에서는 이를 '분수(分水)'라 불렀다. 강 하류의 논이 마르고 흉년이 이어지면서 저지대 도시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기원전 4세기 초 저지대 도시들은 연합해 공납을 거부하고 상류의 둑을 허물었다. 본국은 군대를 보내 둑을 다시 쌓으려 했고, 이후 약 30년간 이어진 싸움을 분수 전쟁이라 부른다. 고원군은 좁은 산길과 수로 방어에는 능했지만 넓은 평원에서는 저지대 연합의 병력과 보급을 당해 내지 못했다. 전쟁은 어느 쪽의 완승도 없이 끝났고, 두 지역의 경계는 고원 가장자리에서 굳어졌다.

2.4. 두 이름의 기원 [편집]

고랜드어에서 '고'는 높은 곳과 근원을, '사'는 아래와 낮은 곳을 뜻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본국은 반기를 든 저지대를 '사랜드', 곧 아랫땅이라 얕잡아 불렀는데, 저지대 연합은 이 이름을 오히려 자칭으로 삼았다. 사비에트의 옛 국호 사랜드는 이렇게 모욕의 말에서 출발했다.

분화는 신앙도 갈라놓았다. 고원은 산정 수원 신앙을 지켰고, 평원은 강과 태양을 중심으로 신앙을 재편했다. 수원의 문을 여는 신관의 권위를 부정한 평원에서는 물이 신관의 선물이 아니라 강이 모두에게 주는 것이라는 관념이 자리 잡았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학은 이를 '최초의 해방'이라 부르지만, 연구자들은 분수 전쟁이 신분 해방이라기보다 저지대 상인·지주층이 고원 신관단을 대신해 권력을 쥔 사건에 가까웠다고 본다.

3. 고대 사랜드 제국 [편집]

3.1. 왕국의 통합 [편집]

분수 전쟁 뒤 한 세기 가까이 저지대 도시들은 느슨한 연합으로 지냈다. 기원전 3세기 무렵 강 중류의 도시가 주변 도시들을 차례로 복속시켜 하나의 왕국을 이루었고, 왕은 연합의 수장이 아니라 평원 전체의 군주를 자처했다. 고원의 신관단이 가졌던 물 배분의 권한은 왕이 임명한 수리관에게 넘어갔다.

통합된 왕국은 곧 팽창에 나섰다. 수리 기술로 늘어난 곡물과 인구, 평원의 기병이 그 바탕이었다. 고원의 고랜드와는 이후에도 국경 분쟁이 이어졌으나, 왕국은 고원을 다시 정복하려 하지 않았다. 험한 산지를 차지하는 비용보다 고원이 평원을 넘보지 못하게 막는 쪽이 싸다는 계산이었다.

3.2. 동방 팽창과 청평 정복 [편집]

기원전 3세기 후반부터 사랜드는 동쪽과 남쪽으로 영역을 넓혔다. 동쪽의 몬순 저지대, 곧 오늘날 동사랜드가 자리한 땅의 마을 연합들이 먼저 복속되었고, 기원전 2세기경에는 그 너머의 청평이 정복되었다. 사랜드는 청평을 동방 변경의 핵심 거점으로 삼아 대규모 도로와 요새를 건설하고 총독부를 두어 세금과 병역을 부과했다.

사랜드의 동방 통치는 대체로 간접 통치였다. 현지 수장들은 총독부에 공납과 병력을 바치는 대신 내부 자치를 인정받았다. 제국은 동방의 곡물과 목재, 수산물로 평원의 인구를 먹였고, 제국 상인이 드나드는 항구를 통해 철기와 직물, 화폐가 동방으로 퍼졌다. 이 시기에 사랜드는 사실상 기원전 랜드해협 남동부의 유일한 제국이었다.

3.3. 제국의 통치 [편집]

제국의 중심은 여전히 물이었다. 왕이 임명한 수리관은 강의 본류와 지류마다 배치되어 둑과 운하의 보수, 물 배분, 곡물 징수를 함께 맡았고, 수리관의 관할 구역이 곧 제국의 행정 단위가 되었다. 고랜드의 신관단이 신의 뜻으로 물을 나누었다면, 사랜드의 수리관은 왕의 법으로 물을 나누었다. 사비에트 역사학은 이를 신권에서 세속 권력으로 넘어간 전환으로 평가한다.

제국은 평원 전역에 도로와 역참을 깔고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했다. 사랜드어는 평원과 동방 변경의 행정 언어가 되었고, 고원의 문자를 고쳐 만든 문자가 공문서에 쓰였다. 그러나 제국의 부는 평원 중부의 왕도와 강변 도시에 몰렸고, 변경 주민에게 제국은 무엇보다 세금과 병역, 부역을 걷는 존재였다. 동방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3.4. 고북산 원정 [편집]

동방 변경을 완성하려면 청평 북쪽 산악의 고북산을 제국 질서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사랜드 궁정의 판단이었다. 기원후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중반까지 사랜드는 수십 년 간격으로 세 차례 고북산을 원정했다. 청평의 도로와 요새가 원정군의 집결지와 보급 기지로 쓰였고, 병사와 짐꾼의 상당수는 청평 주민이었다.

첫 원정은 산악의 매복과 보급난으로 실패했고, 두 번째 원정은 성곽 도시 몇 곳을 점령했으나 오래 지키지 못했다. 총력을 기울인 세 번째 원정에서 사랜드군은 고북산의 수도를 불태웠지만, 같은 시기 서부에서 벌어진 로마와의 전쟁 때문에 병력을 거두어야 했다. 북산의 전통 사학은 이를 고북산의 승리로 서술하지만, 사비에트 역사학은 이 원정을 제국이 힘에 부칠 만큼 영역을 넓힌 과잉 팽창의 상징으로 다룬다.

3.5. 로마와의 전쟁과 붕괴 [편집]

기원후 3세기 서방의 로마 제국이 사랜드의 서부를 침공하면서 제국은 모든 역량을 서부 전선에 쏟아야 했다. 동방 변경은 사실상 방치되었다. 관료와 주둔군이 차례로 철수하자 청평에서는 '동방 해방'이라 불리는 연쇄 봉기가 일어났고, 동부 저지대의 마을 연합들도 공납을 끊었다.

서부에서 로마와 싸우는 동안 평원 내부에서는 왕위 계승 분쟁과 지방 총독들의 자립이 잇따랐다. 3세기 후반 중앙의 통제가 무너지면서 사랜드 제국은 해체되었다. 기원전 3세기의 통합에서 약 500년 만의 일이었다. 제국이 남긴 도로와 수리 시설, 그리고 '사랜드'라는 이름은 이후 평원에 들어선 모든 세력이 계승을 주장하는 정통성의 근거가 되었다.

4. 분열기 [편집]

4.1. 소영주의 시대 [편집]

제국 붕괴 후 평원은 약 400년간 소영주들이 난립하는 분열기에 들어갔다. 옛 총독과 지방 귀족, 수리 시설을 장악한 호족들이 저마다 성채를 쌓고 주변 마을에서 세금을 걷었다. 제국의 수리 체계는 영주들의 경계를 따라 쪼개졌고, 상류의 영주가 물길을 막아 하류를 압박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분수는 이 시기 평원 정치의 일상적인 무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평원에는 옛 제국의 계승을 주장하는 소왕국이 여럿 명멸했다. 이들은 저마다 '사랜드'의 이름을 내걸었지만 어느 쪽도 평원 전체를 다시 묶지 못했고, 영주들 사이의 동맹과 혼인, 물길을 둘러싼 전쟁이 수백 년 동안 되풀이되었다. 관리되지 않은 옛 제국의 도로와 역참은 무너졌고, 평원의 교역은 강을 따라 이어진 몇몇 도시 사이로 줄어들었다.

4.2. 역병과 인구 감소 [편집]

535년과 670년, 721년에 거듭된 흑사병은 평원의 인구를 크게 줄였다. 특히 6세기의 역병은 강 유역의 도시들을 휩쓸어 일부 도시는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버려진 논과 마을이 늘면서 평원의 여러 지역은 사실상 비어 있는 땅이 되었다.

인구가 줄자 수리 시설을 유지할 일손도 사라졌다. 관리되지 않은 둑이 무너지면서 강 하류의 일부 평야는 습지로 돌아갔고, 운하가 끊긴 지역에서는 논이 목초지로 바뀌었다. 고대 제국이 쌓아 올린 수리 문명은 이 시기에 사실상 해체되었으며, 평원의 농업은 제정 사랜드 시기에 들어서야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4.3. 슬라브인의 이주 [편집]

인구가 줄어든 평원에 6~7세기 서북쪽에서 슬라브계 집단이 대거 이주해 들어왔다. 이주민은 처음에는 영주들의 용병이나 개간민으로 정착했으나, 곧 버려진 땅을 차지하고 기존 사랜드인과 섞이며 평원의 다수 집단이 되었다. 오늘날 사비에트 인구의 62%를 차지하는 남슬라브족의 기원이 이 이주다.

옛 사랜드어를 지킨 동남부 산지 주민은 이주민과 섞이지 않고 독자적인 언어와 관습을 유지했는데, 이들이 오늘날 카스탄족의 조상이다. 사비에트 역사학은 이 시기를 두 민족이 한 땅에서 나뉘어 살기 시작한 시기로 보며, 카스탄족 사회에서는 지금도 '사랜드의 진짜 후손'이라는 자의식이 강하다.

5. 제정 사랜드 [편집]

상세 내용은 제정 사랜드 문서 참고.


711년 서부의 슬라브계 귀족인 인크론슈타트 공작 인터르스키 1세가 평원을 통일하고, 고대 사랜드 제국의 계승을 내세워 황제를 칭했다. 이것이 1917년까지 1,206년 동안 이어진 제정 사랜드다. 제정은 몇 차례 왕조가 바뀌면서도 황제 칭호와 '사랜드'라는 국체를 끝까지 유지했고, 근세 이후의 수도는 서부의 인터그라드였다.

제정 초기에는 동쪽으로 옛 제국의 영역을 회복하려 했으나 사무탁호 일대에서 빌베른 공화국과 충돌해 789년 전쟁에서 패배했다. 13세기 중엽부터 14세기 초까지 이어진 몽골의 침입은 제정의 동쪽 절반을 초토화했고, 원(元)은 비어 버린 동부에 고려인과 화북 한인, 열도인, 대월인을 강제로 옮겨 훗날 북산과 동사랜드가 되는 사회의 모체를 만들었다. 1321년 몬타나 화산 대분화와 1349년 흑사병이 겹치면서 제정의 동부 지배는 끊겼다.

근세의 제정 사랜드는 농노제에 기반한 거대한 농업 제국이자 전제 군주정이었다. 1620년대에는 동쪽의 남꽝 왕국을 침공했으나 청평의 원군에 막혀 1627년 롱 강을 경계로 강화했고, 이 선은 오늘날 사비에트와 동사랜드의 국경이 되었다. 19세기의 근대화 시도는 귀족층의 반발로 번번이 좌초했고, 제정은 농노제와 전제정을 안은 채 20세기를 맞았다.

6. 장미 혁명과 사랜드 공화국 [편집]

6.1. 제1차 세계대전 [편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제정 사랜드는 러시아 제국과 함께 협상국 편으로 참전했다. 황제와 궁정은 전쟁을 제정의 위신을 되살릴 기회로 보았으나, 농노 출신 징집병과 낡은 보급 체계로 치른 소모전은 재앙이었다. 1916년까지 전사자와 실종자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고, 철도가 군수 수송에 매달리면서 도시의 식량 사정은 급격히 나빠졌다.

1916년의 흉작은 결정타였다. 평원의 곡물이 전선으로 징발되는 사이 인터그라드를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빵 배급이 끊기다시피 했고, 공장 노동자와 병사 가족 사이에서 전쟁 반대와 황제 퇴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공공연해졌다.

6.2. 장미 혁명 [편집]

1917년 3월 인터그라드의 방직공장 여공들이 빵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시위대는 가슴에 붉은 장미를 달았는데, 이는 원래 인터그라드 노동자 공제회가 장례와 파업 때 쓰던 표식이었다. 시위는 사흘 만에 도시 전체로 번졌고, 진압 명령을 받은 수비대 일부가 발포를 거부하고 시위대에 합류했다. 3월 16일 마지막 황제가 퇴위하면서 711년 이래 1,206년 이어진 제정 사랜드는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을 장미 혁명이라 부른다. 같은 달 러시아에서도 2월 혁명으로 차르가 물러났고, 동맹국이던 두 제국의 몰락은 서로의 혁명 세력을 자극했다.

혁명을 이끈 것은 공화파 정치인과 자유주의 지식인, 그리고 도시 노동자 조직이었다. 임시정부는 전쟁을 계속하는 쪽을 택했고, 1918년 11월 협상국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면서 사랜드는 형식상 승전국이 되었다. 그러나 수백만의 인명과 경제를 대가로 치른 승리는 새 정부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1918년부터 1920년까지의 과도기에 임시정부는 농노제 폐지와 보통선거를 선포했다. 그러나 전선에서 돌아온 병사들과 토지를 요구하는 농민들이 곳곳에서 영지를 점거하면서 평원은 무정부 상태에 가까워졌다. 임시정부는 군을 동원해 점거를 해산하는 한편 토지 개혁을 제헌의회로 미루었고, 이 결정은 이후 30년 동안 사랜드 정치를 짓누른 토지 문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6.3. 사랜드 공화국 [편집]

1920년 제헌의회가 제정한 헌법으로 사랜드 공화국이 정식 출범했다. 헌법은 직선 대통령과 양원제 의회를 둔 단일 국가 체제를 채택했고, 초대 대통령에는 장미 혁명 당시 임시정부를 이끈 공화파의 밀란 S. 보이노비치가 선출되었다. 농노제는 폐지되었지만 토지 개혁은 지주 출신 의원들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어, 해방된 농노의 상당수는 옛 지주의 소작농으로 남았다.

공화국은 수도를 제정의 상징이던 인터그라드에서 평원 중부의 공업 도시 크라슬리스크로 옮겼다. 황제와 귀족의 도시를 떠나 새 나라를 시작한다는 뜻이었으나, 인터그라드는 이후에도 경제와 문화의 중심으로 남았고 옛 귀족과 관료층의 근거지가 되었다.

공화국 정치는 불안정했다. 1920년부터 1934년까지 내각이 스물세 차례 바뀌었고, 의회는 지주 정당과 도시 자유주의 정당, 농민당, 사회주의 정당으로 쪼개져 안정된 다수를 만들지 못했다. 동남부의 카스탄족이 요구한 언어·교육 자치도 단일 국가 원칙에 막혀 거부되었다. 1920년대 후반의 짧은 호황은 도시 중산층을 키웠지만 농촌의 빈곤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6.4. 사랜드 공산당 [편집]

1921년 공화국의 사회주의 정당에서 떨어져 나온 급진파가 사랜드 공산당을 창당했다. 이듬해인 1922년 당 서기장에 오른 이오시프 노스탈린은 청년기부터 러시아 혁명 운동에 몸담았다가 1917년 귀국한 인물로, 당을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 규율 있는 간부 정당으로 만들었다. 초기 간부 다수가 모스크바에서 교육을 받았고, 러시아어는 당 문서와 교육의 사실상의 공용어가 되었다.

공산당은 1920년대 동안 합법 정당으로 의회에 진출했으나 의석은 많지 않았다. 당의 기반은 인터그라드와 크라슬리스크의 공장 지대, 그리고 토지 개혁에서 소외된 평원의 소작농이었다. 노스탈린은 의회 활동보다 노동조합과 농민 조직을 장악하는 데 힘을 쏟았고, 이 조직망이 훗날 인민군의 모체가 되었다.

6.5. 대공황과 군부 정권 [편집]

1929년 대공황으로 곡물 가격이 폭락하자 평원의 농촌은 파산 상태에 빠졌다. 1932년 각지에서 소작 폭동과 공장 점거가 잇따랐고, 공산당의 세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 지주와 기업가, 장교단은 의회 정치가 혁명을 막지 못한다고 보았다.

1934년 5월 드라고슬라프 M. 페트코비치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국가재건위원회를 세웠다. 군부 정권은 공산당과 사회주의 정당을 불법화하고 노동조합을 해산했으며, 수천 명의 활동가를 수용소로 보냈다. 노스탈린은 체포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했고, 공산당은 지하 조직으로 명맥을 이었다. 공화국 헌법은 형식상 남았지만 대통령은 군부가 지명하는 자리가 되었다.

페트코비치 정권은 이탈리아의 조합주의를 본떠 노사를 국가가 지정한 직능 조합으로 묶고, 공공사업과 군비 확장으로 실업을 흡수하려 했다. 지주의 토지는 그대로 두었고 소작료 인하는 약속에 그쳤다. 정권은 단일 민족 국가를 내세워 카스탄어 출판을 금지했으며, 동남부 산지에서 일어난 카스탄족의 저항을 군대로 진압했다. 이때 산지로 숨어든 공산당 활동가들과 카스탄족 저항 세력이 맺은 연계는 훗날 동남부 해방구의 토대가 되었다.

6.6. 추축국 가담 [편집]

반공을 국시로 내건 페트코비치 정권은 1930년대 후반 독일, 이탈리아와 가까워졌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한동안 중립을 지키던 정권은 1941년 추축국과 조약을 맺고 참전했다. 사랜드군은 해협 남부 전선에 투입되어 연합군과 싸웠고, 평원의 곡물과 광물은 추축국의 전쟁 물자로 실려 나갔다.

공산당은 참전 직후 무장 조직인 인민군을 결성해 반파시즘 파르티잔 투쟁에 나섰다. 인민군은 고원 가장자리와 동남부 산지에 해방구를 세우고 철도와 보급로를 공격했으며, 망명지에서 돌아온 간부들이 지휘를 맡았다. 소련은 무기와 무전 장비를 보냈고, 연합국 역시 추축국 후방을 교란하는 인민군을 사실상 동맹 세력으로 대우했다.

1943년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사랜드 국토는 전장이 되었다. 1944년 가을 전황이 기울자 군부 내부의 온건파가 페트코비치를 체포하고 연합국과 휴전 교섭에 나섰으나, 추축국군과 친페트코비치 부대의 저항으로 국토는 한동안 세 갈래로 찢겼다. 1945년 5월 휴전이 발효되었을 때 평원의 도시와 철도는 대부분 파괴되어 있었고, 전쟁 기간의 사망자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약 300만 명으로 추산된다.

6.7. 종전과 과도정부 [편집]

휴전 후 사랜드는 연합국 관리위원회의 감독 아래 과도정부를 세웠다. 총리 스테판 R. 일리치가 이끈 과도정부는 공화국 헌법의 복원을 약속했지만, 행정과 군의 요직은 여전히 군부 정권 시절의 관료와 장교들이 차지했다. 전범 처벌은 페트코비치를 비롯한 소수 지도부에 그쳤다.

인민군은 해방구에서 무장 해제를 거부했다. 인민군은 전쟁 중 수십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고, 해방구에서 이미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소작농에게 나눠 주고 있었다. 과도정부가 토지 반환과 인민군 해산을 요구하자, 평원 곳곳에서 옛 지주의 사병과 농민 무장대의 충돌이 이어졌다. 1946년 3월 총선에서 과도정부 측이 부정 선거로 압승하자 충돌은 전면전으로 번졌다.

7. 붉은 혁명 [편집]

7.1. 내전의 발발 [편집]

1946년 4월 12일 인민군은 과도정부를 '파시스트 잔당의 정권'으로 규정하고 총공세에 나섰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이날을 붉은 혁명의 기점으로 삼는다. 과도정부군은 병력과 중화기에서 앞섰지만, 징집병의 사기가 낮고 지휘부는 군부 정권 출신 장교들 사이의 파벌로 갈라져 있었다.

인민군은 해방구의 토지 개혁을 앞세워 농촌을 장악해 갔다. '땅은 경작하는 자에게'라는 구호는 장미 혁명 이후 30년 동안 토지를 기다려 온 소작농에게 가장 강력한 선전이었다.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곧바로 토지 분배와 함께 과도정부 관리와 지주에 대한 인민재판이 벌어졌고, 이 과정의 보복과 처형은 오늘날까지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았다.

7.2. 연합국의 방관 [편집]

내전 기간 연합국은 과도정부를 돕지 않았다. 과도정부의 주축이 추축국 편에서 싸운 군부 정권 출신이었던 반면, 인민군은 전쟁 내내 연합국과 같은 편에서 싸운 반파시즘 저항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루이나는 전후 제헌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고, 해협 남부의 옛 추축국 정부를 위해 개입할 이유가 없었다. 공산주의가 루이나의 주된 위협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49년 청평에 공산 정권이 들어선 뒤의 일이다.

인민군을 지원한 것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노획한 추축국 무기와 군사고문단을 보냈고, 인민군 참모부의 상당수가 소련식 교범으로 훈련받았다. 러시아어는 이 시기 인민군의 명령과 문서의 언어가 되었으며, 이것이 훗날 러시아어가 연방 공용어로 지정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7.3. 동부의 동맹 [편집]

동쪽 롱 강 너머에서는 1945년 9월 혁명으로 성립한 동사랜드 인민공화국이 인민군의 후방 기지가 되었다. 1947년 4월 사랜드 공산당과 동사랜드 노동당은 띠엔화 협정을 맺고 공동 작전에 합의했으며, 협정은 "혁명이 승리한 뒤 양측은 서로의 주권과 영토를 존중한다"고 규정했다. 동사랜드의 쌀은 인민군의 군량이 되었고, 동사랜드 인민적군 부대가 롱 강을 건너 과도정부군의 측면을 쳤다.

이 동맹은 붉은 혁명의 공식 서사에서 '형제 인민의 연대'로 기려졌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의 합병으로 그 의미는 뒤집혔고, 동사랜드에서 띠엔화 협정은 오늘날 사비에트의 배신을 증명하는 문서로 기억된다.

7.4. 내전의 전선 [편집]

내전 초기의 전선은 평원을 가로질러 여러 번 오르내렸다. 1946년 여름 과도정부군은 철도와 도시를 따라 반격해 인민군을 고원 가장자리와 동남부 산지로 밀어냈고, 1947년 초까지 해방구의 절반 가까이를 되찾았다. 그러나 과도정부군은 도시와 철도만 지켰을 뿐 농촌을 장악하지 못했다. 징집된 농민 병사들은 토지를 약속하는 인민군 쪽으로 대거 탈영했고, 과도정부의 곡물 징발은 농촌의 민심을 더욱 멀어지게 했다.

1947년 가을 인민군은 동사랜드를 거친 보급로와 소련의 무기를 바탕으로 반격에 나섰다. 인민군은 도시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대신 도시와 도시를 잇는 철도와 교량을 끊어 과도정부군을 고립시켰고, 고립된 수비대가 하나씩 항복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이 과정에서 양측 모두 포로와 민간인을 처형했다. 과도정부의 헌병대와 지주 사병은 인민군 협력 혐의를 받은 마을을 불태웠고, 인민군은 점령지에서 '반혁명 분자'를 즉결 처형했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이 가운데 전자만을 '백색 테러'로 기록한다.

7.5. 인민군의 승리 [편집]

1948년 인민군은 평원의 곡창 지대를 장악하고 과도정부군을 서부와 북부로 몰아냈다. 1949년 봄 수도 크라슬리스크가 함락되었고, 8월에는 과도정부가 마지막 거점으로 삼은 옛 제정의 수도 인터그라드가 3주간의 포위 끝에 함락되었다. 일리치를 비롯한 과도정부 지도부는 해외로 망명했다. 3년 반의 내전 사망자는 약 18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인터그라드 포위 동안 시내에서는 옛 귀족과 관료, 장교 가족들의 탈출 행렬이 이어졌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해외로 건너가 사비에트 망명자 사회를 이루었고, 망명자 사회는 이후 수십 년 동안 루이나와 해협 북부 나라들에서 반사비에트 선전의 한 축이 되었다.

1949년 10월 7일 노스탈린은 크라슬리스크에서 사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수립을 선포했다. 사랜드 공산당은 사비에트 노동인민당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새 국호 '사비에트'는 옛 국호 사랜드와 평의회를 뜻하는 러시아어 소비에트를 합친 말로 만들어졌다. 공식 역사는 1917년의 장미 혁명을 '미완의 혁명', 1949년의 붉은 혁명을 그 완성으로 규정했고, 장미 혁명의 붉은 장미는 새 국가의 국화가 되었다.

7.6. 동사랜드 합병 [편집]

연방 수립 직후 크라슬리스크의 지도부는 동사랜드에 '혁명 성과의 통합'을 요구했다. 1949년 12월 동사랜드 노동당 친사비에트파의 '형제적 원조 요청'을 명분으로 사비에트군 3개 사단이 롱 강을 넘었고, 12월 28일 포위 속에서 소집된 동사랜드 인민회의가 연방 가입 청원을 의결했다. 최고인민평의회는 12월 30일 이를 승인해 동사랜드를 탈퇴권 없는 자치공화국으로 편입했다. 띠엔화 협정의 주권 조항은 이로써 휴지가 되었다.

상세 내용은 동사랜드/역사 문서 참고.

8. 노스탈린 시대 [편집]

8.1. 연방의 설계 [편집]

1949년 연방 헌법은 사비에트 노동인민당의 영도를 명시하고, 최고인민평의회를 최고 국가기관으로 두었다. 최고인민평의회 주석은 국가원수였고, 행정은 총리가 이끄는 인민위원회가 맡았다. 그러나 실권은 헌법 기관이 아니라 당 서기장과 정치국에 있었다.

연방의 구성 단위는 주와 자치 주, 자치지역, 자치공화국으로 나뉘었다. 헌법은 구성 공화국의 지위를 가진 주에 명목상의 연방 탈퇴권을 주었으나, 자치 주와 자치지역, 자치공화국에는 이 권리를 주지 않았다. 동남부의 카스탄족 거주지는 카스탄 자치지역으로, 타르타르족이 많은 동부 일부는 자치 주로 편성되었다. 수도는 공화국 시기와 마찬가지로 크라슬리스크에 두었고, 러시아어는 여러 민족 사이의 중립적인 공용어라는 명분으로 연방 공용어가 되었다.

8.2. 사회의 개조 [편집]

노스탈린 정권은 연방 수립과 동시에 사회 전체를 새로 짜려 했다. 1950년부터 전국적인 문맹 퇴치 운동이 벌어져 농촌의 성인들이 야학에서 러시아어와 모국어를 함께 배웠고, 초등 의무교육이 도입되었다. 공업화와 함께 평원의 농민 수백만 명이 크라슬리스크와 인터그라드, 새로 건설된 공업 도시로 옮겨 가면서 1950년대 내내 도시 인구가 빠르게 늘었다. 여성은 공장과 집단농장의 노동력으로 대거 동원되었고, 탁아소와 공동 식당이 그 뒤를 받쳤다.

종교는 '인민의 의식을 흐리는 낡은 관습'으로 규정되었다. 성직자는 대정리의 주요 대상이 되었고, 상당수의 종교 시설이 창고와 공회당으로 바뀌었다. 헌법은 국가 무신론 원칙을 명시했으나 개인의 신앙 자체를 처벌하지는 않았고, 종교는 가정과 비공식 모임의 영역으로 밀려난 채 명맥을 이었다.

인민군은 1950년 사비에트 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되었다. 내전의 파르티잔 부대는 소련식 편제의 정규군으로 재편되었고, 당 중앙군사위원회가 군을 지휘하는 체계가 이때 만들어졌다. 군은 이후 연방의 가장 큰 기득권 집단이자 체제의 마지막 버팀목이 되었다.

8.3. 집단화와 5개년 계획 [편집]

1950년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다. 계획은 중공업과 군수 산업을 최우선에 두었고, 평원의 농업은 공업화 자금을 대는 원천으로 규정되었다. 내전기에 분배된 토지는 불과 몇 년 만에 집단농장으로 다시 묶였다. 소작농에게 땅을 준 혁명이 곧바로 그 땅을 거두어 간 셈이었고, 1950~1951년 평원 곳곳에서 집단화에 반대하는 농민 소요가 일어났다.

집단화 첫 두 해의 혼란은 1951년의 흉작과 겹쳐 동남부와 동부 일부에 기근을 불렀다. 카스탄 자치지역에서만 수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추정이지만, 사비에트 정부는 이 기근을 1990년대까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8.4. 대정리 [편집]

1950년부터 1952년까지 노동인민당은 '대정리'라 불리는 숙청을 벌였다. 옛 공화국 관료와 장교, 지주와 성직자, 그리고 당 안에서 '민족주의 편향'이나 '과도정부와의 내통' 혐의를 받은 간부들이 대상이었다. 이 기간 수십만 명이 노동교화소로 보내졌고, 처형된 사람은 공식 기록으로 약 2만 명, 연구자 추정으로는 그 몇 배에 이른다.

대정리는 동사랜드 자치공화국과 카스탄 자치지역에서 특히 가혹했다. 동사랜드에서는 노동당 출신 간부들이 사비에트 본토 출신으로 교체되었고, 카스탄 자치지역에서는 카스탄어 학교와 신문이 '분리주의의 온상'으로 몰려 문을 닫았다.

숙청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대부분 북부 고원 가장자리의 광산과 벌목장, 운하 건설 현장에 흩어진 노동교화소로 보내졌다. 수감자들은 5개년 계획의 값싼 노동력이 되었고, 1950년대 초 사비에트의 대형 토목 공사 상당수가 이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노동교화소 체계는 1956년 이후 대폭 축소되었지만, 정치범 수용 시설은 형태를 바꾸어 1980년대까지 남았다.

8.5. 소련과의 동맹 [편집]

연방 수립 이듬해인 1950년 사비에트는 소련과 우호·동맹·상호원조 조약을 맺었다. 소련은 내전기에 이어 공업화에 필요한 설비와 기술자, 차관을 보냈고, 사비에트의 초기 5개년 계획과 군 편제, 보안기관은 대부분 소련의 모델을 따랐다. 이후 소련은 세계 공산권의 맹주로, 사비에트는 랜드해협 공산권의 맹주로 자리 잡았다. 사비에트가 청평과 해협 남부 나라들에 준 원조의 상당 부분은 소련에서 받은 것을 다시 나눈 것이었고, 사비에트의 대외 노선은 큰 틀에서 소련과 보조를 맞추었다.

8.6. 청평과 해협 [편집]

대외적으로 노스탈린 정권은 1949년 12월 수립된 청평 인민공화국의 후원국으로 나섰다. 사비에트는 청평에 차관과 기술자를 보냈으나, 1950년 청평이 요구한 500개 이상의 공장 건설은 비현실적이라며 규모를 줄여 승인했다. 같은 시기 사비에트는 루이나, 플로렌시아와 함께 식량을 무기로 영향력을 넓히려던 마베라를 견제하는 외교 공조에 참여하기도 했다. 해협 너머의 루이나와 사비에트가 한편에 선 거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러나 공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49년 한 해 동안 사비에트와 청평이 잇따라 공산화되자 루이나는 해협 남부 전체가 공산권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우려하기 시작했고, 해협 동쪽의 북산을 반공의 방벽으로 삼는 쪽으로 정책을 틀었다. 사비에트 역시 청평과 동사랜드를 묶은 동방의 공산권을 루이나와 그 동맹국에 맞서는 전략적 배후로 여겼다.

8.7. 노스탈린의 와병과 동사랜드 봉기 [편집]

1951년 초 노스탈린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는 목숨을 건졌지만 1년 넘게 공식 석상에 나서지 못했고, 정치국은 누가 서기장의 권한을 대행할지를 두고 몇 달간 사실상 마비되었다. 동사랜드 노동당 출신 간부들은 이 공백을 독립을 되찾을 기회로 보았다.

와병 기간 정치국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대정리를 지휘한 국가보안위원회 수뇌부는 서기장의 권한을 넘겨받으려 했고, 원로들은 최고령 위원 레프 화크로츠키를 중심으로 이를 견제했으며, 농업과 경제를 맡은 젊은 서기들은 집단화의 속도 조절을 요구했다. 어느 쪽도 노스탈린의 권한을 공식적으로 넘겨받지 못한 채 중요한 결정이 미뤄졌고, 지방과 자치공화국에 대한 중앙의 통제는 눈에 띄게 느슨해졌다.

1951년 10월 9일 동사랜드 자치공화국 인민평의회는 연방 탈퇴를 의결했고, 연방 지도부가 평의회를 해산하고 평의원들을 체포하자 옛 인민적군 출신 부대가 봉기했다. 봉기는 1952년 봄까지 진압되었으나, 인민적군은 산악으로 물러나 10년 넘는 항전을 이어 갔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이 사건을 '동부 소요'로만 짧게 기록한다.

8.8. 노스탈린의 죽음 [편집]

노스탈린은 1952년 말 업무에 복귀했으나 이전의 장악력을 되찾지 못했고, 1953년 3월 5일 사망했다. 1922년 당 서기장에 오른 지 31년, 연방을 세운 지 3년 반 만이었다. 정치국은 최고령 위원인 화크로츠키를 서기장 대행으로 세웠다.

화크로츠키 대행 체제 아래에서 정치국은 반년 가까이 권력 다툼을 벌였다. 대정리를 지휘한 국가보안위원회 수뇌부가 이 과정에서 실각해 처형되었고, 1953년 9월 당 중앙위원회는 농업 담당 서기였던 세르게이 안토노프를 새 서기장으로 선출했다. 같은 해 인민위원회 의장, 곧 총리에는 대외 경제를 맡아 온 니키타 인터루쇼프가 임명되었다.

9. 안토노프 시대 [편집]

9.1. 집단지도 체제 [편집]

세르게이 안토노프는 농업 담당 서기로 집단화의 뒷수습을 맡아 온 인물이었다. 정치국 안에 뚜렷한 세력 기반이 없다는 점이 오히려 그를 타협 후보로 만들었다. 집권 초기 그는 서기장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던 노스탈린식 운영을 버리고 정치국의 합의에 따른 집단지도를 내세웠다. 당은 서기장이, 정부는 총리가, 국가 의전은 최고인민평의회 주석이 나눠 맡는 구도가 이때 자리 잡았다.

이 구도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총리 니키타 인터루쇼프였다. 대외 경제를 맡아 온 그는 총리가 된 뒤 외교와 대외 원조를 사실상 도맡으며 해외에 '사비에트의 얼굴'로 알려졌다. 서방 언론과 청평이 그를 사비에트의 지도자로 부르는 일이 잦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안토노프가 당과 국내 경제를 쥐고 인터루쇼프가 대외 노선을 이끄는 분업은 196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동부 정책도 인터루쇼프의 몫이었다. 그는 1954년 동사랜드 봉기 가담자를 부분 사면하고 베트남어의 로마자 표기를 다시 허용하는 한편, 1955년부터 본토의 슬라브계 주민 수십만 명을 동사랜드 저지대로 이주시키는 '동부 개척 사업'을 벌였다. 회유와 정착으로 동부를 붙들어 두려는 정책이었으나, 산악의 인민적군은 해방구를 유지하며 항전을 이어 갔다.

9.2. 탈노스탈린화 [편집]

1956년 2월 제5차 당대회 비공개 회의에서 안토노프는 노스탈린 시대의 '혁명적 법질서 위반'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연설은 대정리 기간의 무고한 처형과 개인숭배를 인정했으나, 집단화와 5개년 계획, 붉은 혁명의 정당성은 건드리지 않았다. 비판의 초점은 노스탈린 개인과 이미 처형된 보안기관 수뇌부에 맞춰졌고, 당은 오히려 피해자의 자리에 놓였다.

연설 이후 노동교화소 수감자 수십만 명이 석방되거나 복권되었고, 카스탄 자치지역에서는 카스탄어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나 1951년 기근과 동사랜드 봉기 진압은 여전히 금기로 남았고, 노스탈린의 이름을 딴 거리와 공장의 개칭도 일부에 그쳤다. 사비에트의 탈노스탈린화가 '부분적 해빙'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9.3. 유엔 가입과 평화 공존 [편집]

1955년 사비에트는 유엔에 가입했다. 안토노프 지도부는 자본주의 국가와의 전쟁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평화 공존' 노선을 내세웠고, 인터루쇼프는 해협 북쪽 나라들과의 무역과 차관 협상에 직접 나섰다. 1950년대 중반까지 루이나와의 관계는 차가웠지만 아직 군사적 대치로 굳어지지는 않았고, 두 나라 사이에는 곡물과 기계류의 제한적인 교역도 오갔다. 이 짧은 해빙은 1957년 첫 인공위성이 루이나 상공을 지나가면서 급격히 식었다.

9.4. 노스탈린그라드 [편집]

노스탈린의 이름이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곳이 노스탈린그라드다. 노스탈린 생전에 구상되어 1954년 착공된 이 계획도시는 평원 남부의 강 합류점에 공장과 연구소, 노동자 주거를 한데 모은 '사회주의 도시'의 본보기로 설계되었다. 기존 도시의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니라 빈 땅에 처음부터 세운 신도시였고, 1950년대 후반부터 설계국과 연구 기관이 잇따라 옮겨 오면서 연방의 주요 공업·연구 도시로 자랐다.

1956년 연설 이후 개칭 논의가 있었으나, 당은 도시 이름을 한 개인이 아닌 '혁명 건설의 업적'을 기리는 것이라며 그대로 두었다. 옛 제정의 수도 인터그라드가 제2의 도시로 남은 것과 달리, 노스탈린그라드는 사회주의 사비에트가 무에서 만든 도시라는 상징을 얻었고 1980년에는 하계 올림픽을 개최했다.

9.5. 농업 개혁과 관개 사업 [편집]

농업 서기 출신인 안토노프가 가장 공을 들인 분야는 농업이었다. 그는 집단농장의 의무 납품 가격을 올리고 개인 텃밭의 제한을 풀어 농민의 생산 의욕을 끌어올리려 했고, 1956년부터는 북부 고원 가장자리의 건조한 구릉지를 새 곡창으로 만드는 대규모 관개 사업을 벌였다. 평원을 흐르는 강의 상류에 댐과 운하를 쌓아 물을 구릉지로 끌어올리는 이 사업은 선전에서 '인민의 분수'라 불렸다. 고대의 분수가 억압의 상징이었다면, 이번 분수는 인민이 자연을 다스리는 혁명의 증거라는 것이었다.

첫 몇 해의 수확은 기대를 웃돌았다. 그러나 1960년대 초가 되자 과도한 관개로 구릉지의 토양이 염분에 덮이기 시작했고, 상류에서 물을 빼앗긴 강 하류의 농지는 가뭄을 겪었다. 1963년의 흉작으로 사비에트는 처음으로 해외에서 곡물을 수입해야 했다. 역사가들은 관개 사업의 실패를 안토노프 실각의 가장 큰 국내적 원인으로 꼽으며, 고랜드는 이 사업을 사비에트가 다시 고원의 물을 탐내는 증거로 비난했다.

9.6. 청평과의 동맹과 결별 [편집]

1956년 사비에트는 청평과 청소합작 협정을 맺어 탄도미사일과 핵 기술의 이전을 약속했다. 청평을 동방의 핵심 동맹으로 묶어 두려는 인터루쇼프의 구상이었다. 그러나 협정 직후 청평의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면서 계산이 어긋났다. 청평이 투자를 낭비하고 차관 상환을 미루자, 사비에트는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1959년부터 원조를 단계적으로 줄였고 1960년에는 기술자 대부분을 철수시켰다. 협정의 핵심인 핵과 미사일 기술은 끝내 이전되지 않았다.

노선 갈등도 깊어졌다. 청평 지도자 려우 즈카이는 핵전쟁도 두렵지 않다는 발언으로 사비에트 지도부를 경악하게 했고, 원조가 줄어든 뒤에는 공개 석상에서 총리 인터루쇼프를 조롱했다. 1960년대 초 두 나라는 사실상 결별했다. 청평의 공식 역사는 원조 중단을 '동맹의 배신'으로 기억하지만, 사비에트의 기록은 대약진의 실패가 원조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서술한다.

9.7. 동사랜드의 분리 [편집]

결별의 대가는 곧 동부에서 나타났다. 1961년부터 청평이 국경 산악로를 통해 인민적군에 소총과 박격포를 보내기 시작하자, 잦아들던 항전이 다시 격화되었다. 인민적군은 1961~1962년 건기 공세로 자치공화국 북부의 군 소재지 여러 곳을 점령했고, 동부 개척 사업으로 이주한 슬라브계 정착촌도 공격 대상이 되었다.

청평과의 국경 긴장, 우주경쟁에 따른 재정 부담, 유엔에서 제기된 '공산권 내부의 식민 전쟁'이라는 비판이 겹치자 지도부는 동사랜드를 붙들어 두는 비용이 이득을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1962년 11월 정전이 성립했고, 1963년 3월 크라슬리스크 조약으로 사비에트는 동사랜드 자치공화국의 연방 탈퇴를 승인했다. 사비에트는 조약을 수도에서 서명하게 하고 조문에 '연방의 승인에 따른 분리'라는 표현을 넣는 데 집착했다. 1949년 가입은 자발적이었고 1951년 탈퇴 결의는 무효라는 입장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였다.

조약은 롱 강을 국경으로 정하고 슬라브계 주민에게 5년간 국적 선택권을 보장했으나, 롱 강의 하중도들은 '추후 협의'로 남겼다. 이 미결 조항은 14년 뒤 두 나라의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상세 내용은 동사랜드/역사 문서 참고.

9.8. 우주경쟁의 시작 [편집]

1957년 12월 19일 사비에트는 카스탄 자치지역의 사르다 발사장에서 제1설계국의 S-2 발사체로 「프레드베스트니크 1호」를 궤도에 올렸다. 제1설계국 수석설계자 발렌틴 P. 오를로프는 첫 위성을 과학 위성으로 만들고 싶어 했으나, 국방인민위원회는 군사 수신 장치의 탑재를 발사 승인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첫 인공위성이 군사 위성이었다는 점은 이후 30년 동안 랜드해협 우주경쟁의 성격을 결정했다. 위성이 루이나 해군기지 상공을 하루 최대 여섯 차례씩 지나가자, 루이나는 이를 곧바로 안보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1961년 6월 17일 사르다 발사장에서 제7설계국의 신형 탄도미사일 K-7이 첫 비행시험을 준비하던 중 발사대 위에서 폭발했다. 6월 26일 개막하는 제6차 당대회에 맞추려고 일정을 무리하게 당긴 결과였다. 인민해방군 로켓포병 총감 이고리 D. 네스테렌코를 비롯해 발사대 주변에 있던 인원 다수가 목숨을 잃었으나, 정부는 네스테렌코가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르다 발사장 참사의 실체는 28년 동안 감춰졌다.

1962년 3월 9일에는 인민해방군 소령 세르게이 T. 라도프를 태운 유인 우주선 「스트라시 1호」가 발사되었다. 같은 해 10월 28일 사비에트는 자국 내륙 상공 290km에서 고고도 핵실험을 실시했는데, 궤도 위의 핵폭발이 위성과 통신에 미치는 영향이 드러나자 두 나라 모두 위기감을 느꼈다. 사비에트는 1964년 3월 대기권과 우주 공간의 핵실험을 금지하는 조약에 가입했고, 1965년에는 루이나의 수도 벨포르와 크라슬리스크를 잇는 직통선이 개설되었다.

9.9. 콘스탄티노폴 [편집]

1959년 해협 서부의 남북을 잇는 요충지 콘스탄티노폴에 공산 정부가 들어서 외국 조차지를 일괄 회수하자, 사비에트는 곧바로 새 정부를 승인하고 군사고문 약 180명과 기술자 약 600명을 보냈다. 해협 서부에 처음으로 친사비에트 정권이 생긴 것이었다. 조차지를 잃은 루이나는 1961년 콘스탄티노폴에 대한 금수 조치로 맞섰고, 콘스탄티노폴은 두 나라가 해협에서 맞부딪친 첫 무대가 되었다.

사비에트는 금수 조치로 끊긴 연료와 식량을 해로로 실어 날랐고, 콘스탄티노폴의 항만과 발전소, 군 비행장 건설에는 사비에트 기술자들이 투입되었다. 서방은 이를 해협 서부에 사비에트의 전진 기지가 들어서는 것으로 보았고, 콘스탄티노폴 문제는 1960년대 내내 두 나라 관계의 가장 날카로운 쟁점으로 남았다.

9.10. 해협 남부의 공산화와 안토노프의 실각 [편집]

1963년 제1차 랜드 대전이 끝나자 사비에트의 물밑 작업 속에 1963~1965년 해협 남부의 여러 나라가 도미노처럼 공산화되었다. 사비에트는 각국 공산당에 자금과 무기, 정치 고문을 보냈고, 새 정권들은 사비에트식 헌법과 계획경제를 받아들였다. 해협 북쪽의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는 이를 사비에트 팽창주의의 증거로 받아들였고, 해협을 사이에 둔 대치선은 이때 굳어졌다.

대외적 성공과 달리 국내에서 안토노프의 입지는 약해지고 있었다. 관개 사업의 실패와 1963년의 흉작은 농업 전문가라는 그의 권위를 무너뜨렸고, 청평과의 결별과 동사랜드 상실은 정치국 안에서 '동방을 두 번 잃었다'는 비판을 불렀다. 1964년 10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건강 문제를 명분으로 안토노프를 해임하고 제2서기 레오니트 브레자코프를 새 서기장으로 선출했다. 안토노프는 연금을 받고 은퇴했는데, 실각한 최고지도자가 처형도 투옥도 되지 않은 것은 사비에트에서 처음이었다.

10. 브레자코프 시대 [편집]

10.1. 안정과 정체 [편집]

레오니트 브레자코프는 18년 동안 서기장을 지냈다. 그의 통치는 '간부의 안정'이라는 구호로 요약된다. 대정리와 안토노프 시대의 잦은 개편에 지친 당 관료들에게 브레자코프는 자리를 보장했고, 정치국과 지방 당 조직의 간부들은 수십 년씩 같은 자리를 지켰다. 1966년 니키타 인터루쇼프가 고령을 이유로 총리에서 물러나면서 안토노프 시대의 인물들도 대부분 퇴장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전반까지 경제는 완만하게 성장했고, 도시 주택과 소비재 공급이 늘어 생활 수준은 눈에 띄게 나아졌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이르자 성장률이 떨어졌고, 중공업과 군수, 우주 개발에 쏠린 투자는 소비재 부족과 농업 생산의 정체로 이어졌다. 오늘날 사비에트에서 이 시기는 안정의 시대이자 정체의 시대로 함께 기억된다.

10.2. 반체제와 민족 문제 [편집]

브레자코프 시대의 억압은 노스탈린 시대처럼 대규모 숙청의 형태를 띠지 않았다. 대신 체제를 비판한 작가와 학자, 과학자는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었고, 일부는 해외로 추방되었다. 1976년 루이나로 추방된 화학자 보리슬라프 T. 얀코비치가 사르다 참사의 경위를 해외에 처음 자세히 알린 것처럼, 추방된 지식인들은 사비에트가 감춘 사건을 바깥에 알리는 통로가 되었다.

민족 문제도 잠잠하지 않았다. 안토노프 시대에 되살아난 카스탄어 교육은 1970년대 들어 다시 러시아어 중심 교육으로 밀려났고, 카스탄 자치지역에서는 학생과 지식인들의 언어 청원 운동이 몇 차례 일어났다가 해산되었다. 동사랜드를 잃은 지도부는 또 다른 분리주의의 싹을 용납하지 않았다.

10.3. 궤도의 검 [편집]

브레자코프 시대의 사비에트는 우주를 가장 공격적으로 군사화했다. 1966년 로켓포병과 방공군에 흩어져 있던 우주 부대를 통합해 인민해방군 궤도방위군을 독립 군종으로 창설했고, 1967년 우주조약에는 두 초강대국이 궤도를 나눠 갖기 위한 문서라며 서명을 거부했다. 1968년 9월에는 부분궤도 폭격체계 「메치」의 첫 부대가 실전 배치되어 1971년까지 사르다에 18기의 발사대가 갖춰졌다. 사비에트는 메치가 궤도를 한 바퀴 다 돌지 않으므로 궤도 무기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1968년 제1설계국의 오를로프가 사망하자 군사 우주 개발을 이끌던 제7설계국의 영향력이 커졌다. 위성 요격체 「야스트레브」의 시험이 이 무렵 시작되었고, 무장 우주정거장 「크레포스트」 계획도 추진되었다. 1976년 10월에는 사비에트 내륙 타르칸 고원 상공을 지나던 루이나 정찰위성의 센서가 강한 빛에 포화되는 타르칸 섬광 사건이 일어났고, 이후 루이나는 사비에트가 지상 레이저로 위성의 눈을 멀게 할 능력을 가졌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10.4. 선전 없는 경쟁 [편집]

사비에트의 우주 개발은 처음부터 군이 이끌었고, 그 성과는 대부분 비밀에 부쳐졌다. 정부는 발사하는 위성을 임무를 밝히지 않은 일련번호로만 발표했고, 설계국과 수석설계자의 이름도 그들이 죽은 뒤에야 공개되었다. 1962년 라도프의 비행처럼 선전에 쓰인 성과도 있었지만, 1966년 저압실 화재로 우주비행사 2명이 숨진 사고를 비롯한 실패는 모두 감춰졌다. 사비에트 국민 대부분은 자국의 우주 계획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궤도의 강국'이라는 구호만을 들었고, 이 비밀주의는 198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10.5. 해협 남부의 위성국 [편집]

1963~1965년 공산화된 해협 남부의 나라들은 브레자코프 시대에 사비에트를 정점으로 한 위성국 체제로 굳어졌다. 사비에트는 이들 나라의 당과 군, 보안기관에 고문단을 두었고, 현지 지도부가 노선에서 벗어나거나 민주화 요구가 커질 때마다 개입했다. 개입은 한 번의 대규모 침공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되풀이된 소규모 개입의 형태를 띠었다. 고문단이 지도부 교체를 조종하거나, 주둔 부대가 시위 진압을 거들거나, 보안기관 요원이 망명한 반체제 인사를 추적하는 식이었다. 서방은 이를 남부랜드의 민주화 움직임에 대한 조직적 탄압으로 규정했다.

경제적으로도 위성국들은 사비에트에 묶였다. 사비에트는 이들 나라에 국제 시세보다 싼 값으로 원유와 기계류를 공급하는 대신 농산물과 경공업 제품을 사들였고, 각국의 계획경제는 사비에트의 5개년 계획에 맞춰 분업 구조를 이루었다. 이 구조는 위성국 정권을 지탱하는 힘이었지만, 1990년대 사비에트 경제가 흔들리자 곧바로 위성국들의 위기로 번졌다.

10.6. NLTO와 해르샤바 조약기구 [편집]

1969년 4월 4일 해협 남부의 공산화에 위협을 느낀 루이나와 플로렌시아 등 서방 국가들이 NLTO를 창설했다. 이듬해인 1970년 루이나가 콘스탄티노폴을 침공하면서, 현지에 남아 있던 사비에트 군사고문과 기술자들이 루이나군에 억류되었다. 사비에트는 군사적 대응 대신 협상을 택했고 이들은 같은 해 7월 송환되었다. 해협 서부의 교두보를 잃은 것은 브레자코프 지도부에 큰 타격이었으나, 이후 루이나가 콘스탄티노폴에서 기나긴 수렁에 빠지면서 사비에트는 좋은 선전 소재를 얻었다.

1974년 3월 사비에트는 '랜드해협의 안보에 이바지하겠다'며 NLTO 가입을 신청했다. 서방 동맹의 명분을 흔들려는 선전성 제안이었고, 신청은 곧바로 반려되었다. 두 달 뒤인 1974년 5월 14일 사비에트는 파랜드의 해르샤바에서 해협 남부의 공산국들과 함께 해르샤바 조약기구를 출범시켰다. 1960년대부터 양자 조약과 고문단으로 이어져 온 공산권의 결속이 이때 처음 하나의 군사·정치 동맹으로 제도화되었다.

1975년 사비에트는 해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 가운데 처음으로 LSEC에 가입했다. LSEC는 지금까지도 사비에트와 루이나가 같은 표결에 참여하는 사실상 유일한 국제기구이며, 1978년 루이나의 표결권 정지 안건이 올라왔을 때 사비에트는 찬성표를 던졌다.

10.7. 청북전쟁과 동사랜드 [편집]

1974~1977년 해협 동부에서 벌어진 청북전쟁에서 사비에트는 옛 동맹국 청평에 소규모 무기와 외교적 비난만을 제공했다. 1975년 9월 루이나가 북산 편으로 직접 참전하자 사비에트는 그해에만 정찰위성 41기를 쏘아 올려 해협과 청평 인근 해역의 루이나 함대를 감시했지만, 전쟁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청평은 이 소극적인 태도를 1960년대의 원조 중단과 함께 '동맹의 배신'으로 기억한다.

1977년에는 크라슬리스크 조약이 미결로 남긴 롱 강의 바익롱 섬, 사비에트 명칭 벨리 섬을 두고 동사랜드와 국지 교전이 벌어졌다. 3월 2일 순찰대 사이의 총격전에 이어 3월 15일 사비에트군이 포병 지원 아래 섬을 점령했고, 동사랜드군의 역습과 산발적 교전이 4월까지 이어졌다. 동사랜드는 5월 사비에트와의 국교를 끊었고, 두 나라 사이에는 지금까지 국교가 없다.

10.8. 고랜드 침공 [편집]

1978년 고원의 고랜드에서 인민민주당이 권력을 잡고 공산 정권을 세웠다. 그러나 급진적인 토지 개혁과 종교 탄압은 곧 전국적인 반란을 불렀다. 1979년 3월 헤라트 반란으로 사비에트인 고문들이 살해되고 고랜드 혁명평의회 의장 타라키가 파병을 요청했을 때, 총리 콘스탄틴 D. 루진은 이를 거절했다. 내전 끝에 스스로 혁명을 이룬 사비에트 지도부는 지도부 교체만으로 들어선 정권이 강압적인 변혁을 밀어붙이면 어떤 반발을 부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상황은 1979년 9월 피델 성베르트가 타라키를 죽이고 권력을 잡으면서 바뀌었다. 성베르트는 사비에트도 통제할 수 없는 인물이었고, 크라슬리스크에서는 그가 루이나 쪽으로 돌아설지 모른다는 의심까지 나왔다. 브레자코프는 이 무렵 이미 병석에 있었고, 결정은 정치국의 소수가 내렸다. 12월 6일 정치국은 제176호 결정서로 병력 500명의 파견을 승인했으나, 12월 12일 국가보안위원회 의장 유리 V. 아브데예프와 국방인민위원장 바실리 I. 체르냐호프를 중심으로 한 밀실 합의가 성베르트를 제거하고 본격적인 군사작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1979년 12월 24일 사비에트 제40군은 접경 도시 테르미스크 인근의 국경 강에 부교를 놓았고, 이튿날부터 국경을 넘었다. 특수작전 '폭풍 333호'로 성베르트를 제거한 사비에트는 카르말을 새 지도자로 세웠다. 이렇게 시작된 사비에트-고랜드 전쟁은 9년 넘게 이어졌다. 각지의 이슬람 무장세력이 고랜드로 모여들었고, 1983년부터 루이나가 이들을 본격적으로 지원하면서 전쟁은 수렁이 되었다. 고랜드 측 선전은 이 전쟁을 "아랫땅이 다시 물길을 빼앗으러 왔다"는 분수 전쟁의 언어로 묘사했다.

10.9. 노스탈린그라드 올림픽과 브레자코프의 죽음 [편집]

1980년 여름 노스탈린그라드에서 하계 올림픽이 열렸다. 사비에트는 대회를 앞두고 고랜드 증파를 미룰 만큼 이 대회에 공을 들였지만, 루이나를 비롯한 NLTO 회원국 대부분은 고랜드 침공에 항의해 대회를 보이콧했다. 해협 양쪽의 체제 경쟁은 이제 경기장에서도 벌어졌다.

1981년 1월 24일에는 원자로를 실은 해양감시위성 「볼나 14호」가 원자로를 폐기 궤도로 올리지 못한 채 대기권에 재돌입했다. 루이나는 넉 달에 걸쳐 방사성 파편을 회수하고 1,380만 달러를 청구했으나, 사비에트는 1983년 그 가운데 410만 달러만 지급했다. 1982년 6월 18일에는 전략군이 약 6시간 사이에 탄도미사일과 요격 미사일, 위성을 잇달아 발사하는 대규모 연합 훈련을 벌였다. 서방이 '6시간 전쟁'이라 부른 이 훈련은 야스트레브의 마지막 시험이기도 했다.

브레자코프는 1982년 11월 사망했다. 말년의 그는 병으로 집무를 거의 보지 못했고, 고랜드 침공을 비롯한 중대 결정은 그의 이름 아래 정치국의 소수가 내렸다. 사비에트에서 브레자코프의 18년은 가장 안정되고 풍요로웠던 시절로 기억되는 동시에, 이후의 원로 정치와 경제 위기를 낳은 시기로 평가된다.

11. 원로 정치와 재편 [편집]

11.1. 체르노프와 벨랴예프 [편집]

브레자코프의 뒤는 정치국 원로 알렉세이 체르노프가 이었다. 그는 노동 규율 강화와 부패 척결을 내걸고 브레자코프 시대에 굳어진 지방 간부들을 일부 교체했으나, 집권 1년여 만인 1984년 초 병으로 사망했다. 후임 드미트리 벨랴예프는 선출 당시 이미 고령에 병을 앓고 있었고, 1985년 사망할 때까지 1년 남짓 재임했다. 3년 사이 서기장 세 명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자, 사비에트 안에서도 '장례식 정치'라는 자조가 퍼졌다.

이 시기 사비에트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나라였다. 고랜드의 전쟁은 교착에 빠졌지만 철군을 입에 올리는 지도자는 없었고, 성장률이 바닥을 기는 가운데에도 계획 당국은 브레자코프 시대의 목표치를 그대로 되풀이했다. 정치국의 평균 연령이 70세를 넘기면서, 당 안의 젊은 간부들 사이에서는 세대 교체 없이는 체제가 버티지 못한다는 인식이 퍼져 갔다.

원로 정치의 공백 속에서도 궤도의 대치는 이어졌다. 1984년 마테르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사비에트는 교전 당사국이 아니었지만, 루이나군 전체가 전시 태세에 들어가면서 두 나라의 경계 수위도 높아져 있었다. 이 와중인 5월 11일 사비에트가 정지궤도에 올린 「궤도 연구 위성 1127호」가 루이나의 조기경보위성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비에트는 벨포르-크라슬리스크 직통선으로 17차례 교신하며 추진기 고장으로 표류 중인 시험기라고 설명했으나, 위성이 40km까지 다가오자 루이나는 전략잠수함을 출항시켰다. 제1차 우주경쟁에서 두 나라가 전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으로 꼽히는 정지궤도 위기다.

11.2. 카멘스키의 재편 [편집]

1985년 정치국 최연소 위원이던 보리스 카멘스키가 서기장에 올랐다. 평원 남부의 농업 주에서 당 제1서기를 지내며 집단농장의 자율 경영을 시험했던 그는 체르노프에게 발탁되어 중앙으로 올라온 인물로, 원로들의 잇따른 죽음 끝에 세대 교체의 상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정체된 경제와 고랜드의 수렁, 끝없는 궤도 경쟁을 함께 풀지 않으면 체제가 버티지 못한다고 보았고, 이를 '재편'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했다. 국영기업에 생산량과 가격의 일부를 스스로 정할 권한을 주고, 대도시 외곽과 항구에 시장 거래가 허용되는 시장 구역을 지정했으며, 지방 당과 정부에 예산 권한을 나눠 주었다. 재편은 체제 전환이 아니라 계획경제를 보완하려는 개혁으로 설계되었고, 당의 영도와 일당 체제는 건드리지 않았다.

재편의 또 다른 축은 제한적인 정보 공개였다. 언론은 관료주의와 부패를 비판할 수 있게 되었고, 국가가 수십 년간 감춰 온 사건들이 하나씩 공개되기 시작했다. 1989년 한 신문 기사를 계기로 국방인민위원회는 1961년 사르다 발사장의 인명 사고를 처음으로 인정했고, 1991년에는 무장 우주정거장 크레포스트의 궤도 사격 시험과 위성 요격체 야스트레브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11.3. 재편의 그늘 [편집]

재편은 곧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낳았다. 가격 결정권을 얻은 국영기업들은 수익이 나는 제품만 만들고 값싼 생필품 생산을 줄였고, 시장 구역에서는 국영 상점에서 빼돌린 물자가 비싼 값에 팔렸다. 1988~1990년 생필품 부족과 물가 상승이 겹치면서 도시의 불만이 커졌다. 정보 공개로 과거의 비리와 사고가 드러날수록 당의 권위도 흔들렸다.

1989~1990년에는 카스탄 자치지역에서 카스탄어의 공용어 지위와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카멘스키 지도부는 무력 진압 대신 카스탄어를 자치지역의 공용어로 인정하는 타협을 택했는데, 오늘날 연방 언어법이 카스탄어를 보장하는 것은 이때의 결정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보수파는 이 타협을 연방 해체의 전조로 보았다.

11.4. 궤도의 휴전 [편집]

카멘스키 지도부는 1985년부터 루이나와 궤도 무기 협상에 나섰다. 협상은 루이나 공군의 요격 시험 때문에 한때 무산될 뻔했으나, 14차례의 회담을 거쳐 1987년 10월 21일 센츄리움에서 루이나 대통령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와 사비에트 최고인민평의회 주석 니콜라이 S. 트로핀이 센츄리움 궤도협정에 서명했다. 최고인민평의회는 1988년 4월 26일 만장일치로 협정을 비준했고, 협정은 같은 해 6월 1일 발효되었다.

협정에 따라 사비에트는 메치 발사대 18기를 해체했고, 해체는 1990년 5월 루이나 측의 여섯 차례 현장 사찰을 거쳐 완료가 확인되었다. 1957년부터 30년 동안 이어진 제1차 우주경쟁은 이로써 일단락되었고, 이후 약 15년의 '궤도의 휴전'이 이어졌다.

11.5. 고랜드 철군 [편집]

1988년 사비에트 지도부는 고랜드 철군을 결정했다. 그러나 군부 강경파는 철군 이후 고랜드의 공산 정권이 무너질 것을 우려했고, 정권의 안전 보장을 명분으로 병력 약 5만 명과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고랜드에 배치하는 안이 철군의 조건처럼 관철되었다. 10월 루이나 정찰기가 미사일 기지를 포착하면서 두 나라는 고랜드 미사일 위기로 치달았고, 10월 28일 카멘스키가 미사일 철수를 발표하면서 위기는 가라앉았다.

사비에트군은 1989년 2월 15일 고랜드 철수를 마쳤다. 9년 넘는 전쟁은 사비에트에 막대한 인명과 비용의 손실을 남겼다. 정부는 전사자를 '국제주의 의무를 수행하다 순직한 병사'로만 발표했고, 관은 봉인된 채 가족에게 돌아왔다. 1980년대 중반부터 귀환병의 후유증과 전사자 가족의 항의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으며, 정보 공개로 전쟁의 실상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전쟁은 체제에 대한 불신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사비에트가 남긴 고랜드의 공산 정권은 철군 이후에도 무너지지 않고 내전을 버텨 냈고, 이 점은 오늘날 사비에트가 고랜드 전쟁을 '실패한 전쟁'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 낸 전쟁'으로 서술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같은 해 해협 동쪽의 청평에서 인민광장 사건이 일어나자, 사비에트는 내정 문제라며 논평을 삼갔다. 재편을 추진하던 지도부조차 이웃 공산국의 시위 진압에 대해 침묵했다는 점은 재편의 한계를 보여 주는 장면으로 자주 거론된다.

11.6. 카멘스키의 실각 [편집]

1990년이 되자 재편은 지지 기반을 거의 잃었다. 도시 주민은 치솟는 물가와 빈 상점에 지쳤고, 당과 국영기업의 관료들은 권한을 빼앗긴 데 반발했으며, 군부는 고랜드 철군과 궤도협정을 굴욕으로 여겼다. 카스탄 자치지역에 대한 양보는 다른 소수민족 지역의 자치 요구로 번질 조짐을 보였고, 정보 공개로 쏟아진 과거의 비밀은 당의 정통성 자체를 흔들었다. 정치국의 보수파는 재편이 계획경제도 시장경제도 아닌 혼란만 낳았으며, 이대로 가면 연방이 해체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1991년 봄 크라슬리스크와 인터그라드에서 생필품 부족에 항의하는 시위가 잇따르자 보수파가 행동에 나섰다. 같은 해 가을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경제 혼란과 '민족 분열 조장'의 책임을 물어 카멘스키를 해임하고, 보수파의 안드레이 유르첸코를 서기장으로 선출했다.

카멘스키의 실각은 무혈로 이루어졌고, 그는 은퇴 후에도 당적을 유지했다. 오늘날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재편의 경제 정책은 계승하되 정보 공개의 '과도함'은 바로잡았다는 식으로 그의 시대를 절반만 평가한다.

12. 1990년대의 혼란 [편집]

12.1. 유르첸코와 경제 위기 [편집]

안드레이 유르첸코는 정보 공개를 거두어들이고 당의 통제를 다시 조였다. 재편기에 생겨난 비판적 신문과 잡지는 폐간되거나 당 기관지로 흡수되었고, 공개가 예정되어 있던 일부 기록은 다시 기밀로 묶였다. 경제에서도 그는 재편 이전으로 돌아가려 했다. 기업의 가격 결정권을 거두고 중앙의 생산 할당을 되살렸지만, 재편기 동안 이미 시장 거래에 맞춰 바뀐 기업들의 공급망은 중앙의 지시만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국정 가격과 시장 가격이 뒤섞인 이중 구조가 무너지면서 물자는 국영 유통망을 빠져나가 암시장으로 흘러갔고, 1992~1993년 공업 생산은 크게 줄었으며 대도시에서는 식료품 배급이 되살아났다. 임금을 받지 못한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 인터그라드와 크라슬리스크에서 잇따랐는데, 노동자 국가를 자처하는 체제에서 노동자의 파업은 그 자체로 큰 충격이었다.

유르첸코 지도부는 파업을 무력으로 해산하면서도 위기를 수습할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1994년 당 중앙위원회는 경제 관료 출신의 니콜라이 쿠르딘을 새 서기장으로 선출했다.

12.2. 쿠르딘의 개혁 [편집]

쿠르딘은 재편의 경제 정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국영기업의 자율 경영과 시장 구역을 넓히고, 농촌에는 집단농장의 토지를 가구 단위로 장기 임대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 조치로 도시의 식료품 사정은 1990년대 중반부터 나아지기 시작했다. 다만 쿠르딘은 경제 개혁과 정치 개방을 엄격히 분리했다. 시장은 넓히되 당의 영도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원칙은 이후 사비에트 개혁의 기본 공식이 되었다.

1994년에는 퇴역 대령 블라디미르 I. 이브니치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조사위원회가 설치되어 사르다 참사를 비롯한 군사 사고를 조사했고, 위원회는 1996년 보고서를 냈다. 재편기의 정보 공개와 달리 이 조사는 당이 통제하는 틀 안에서 진행되었다.

12.3. 레베데프와 과도기 [편집]

지방 분권의 범위를 두고 당내 갈등이 이어지면서 쿠르딘은 1996년 물러났다. 후임 알렉산드르 레베데프는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에서 과도적 인물로 선출되었다. 레베데프 재임 중인 1996년 고랜드에서 탈레반이 수도 아바나를 점령해 공산 정부가 북부로 밀려났고, 사비에트는 무기와 연료를 보내 북부의 공산 정부를 떠받쳤다. 레베데프는 1998년 건강을 이유로 물러났다. 1991년부터 7년 사이 서기장이 네 번 바뀐 것이다.

12.4. 소련의 원조 [편집]

위기 속에서 사비에트를 떠받친 것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1992년부터 긴급 차관과 저가 원유를 제공해 사비에트 경제의 붕괴를 막았고, 그 대가로 사비에트 지도부에 급격한 개혁도 급격한 복고도 아닌 '질서 있는 안정'을 요구했다. 1994년 경제 관료 출신인 쿠르딘이 선출된 데에도 소련 지도부의 뜻이 작용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1990년대 해협 남부의 위성국들에서도 경제 위기와 시위가 이어졌으나, 사비에트는 병력을 보내는 대신 소련에서 들여온 원유와 식량을 다시 나눠 주는 방식으로 각국 정권을 지탱했다. 세계 공산권의 맹주인 소련 아래에서 사비에트가 랜드해협 공산권을 이끄는 이중 구조는 이 위기를 거치며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12.5. 체제의 생존 [편집]

1990년대의 사비에트는 서기장이 네 번 바뀌고 경제가 한때 무너질 만큼 흔들렸지만, 일당 체제는 무너지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그 이유로 몇 가지를 든다. 당이 군과 보안기관을 끝까지 장악했고, 재편기에도 당 밖의 조직된 반대 세력이 자라지 못했다. 해협 건너의 루이나와 유고랜드 국경의 NLTO 병력은 외부의 위협이라는 명분을 끊임없이 제공했다. 무엇보다 뒤에는 건재한 소련이 있었다. 소련의 긴급 원조는 경제의 완전한 붕괴를 막았고, 소련이라는 후원자의 존재는 당내 어느 세력도 체제 밖의 대안을 꿈꾸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1917년부터 1949년까지 30년 넘게 이어진 공화국의 혼란과 내전에 대한 기억은, 체제의 붕괴가 곧 또 한 번의 내전을 뜻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작동했다.

13. 미하일 인터루쇼프 시대 [편집]

13.1. 집권 [편집]

1998년 당 중앙위원회는 미하일 인터루쇼프를 서기장으로 선출했다. 그는 1950~60년대 총리를 지낸 니키타 인터루쇼프의 손자였고, 아버지 역시 당 중앙위원을 지낸 고위 간부였다. 미하일은 1990년대 인터그라드 주 당위원회 제1서기로 일하며 시장 구역을 넓혀 도시 경제를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 경력이 당내 개혁파와 보수파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후보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미하일은 서기장에 오른 뒤 최고인민평의회 주석까지 겸했고, 당과 국가의 최고직을 한 사람이 쥐는 체제가 이때 굳어졌다. 1990년대의 잦은 교체 끝에 들어선 그의 체제는 2026년 현재까지 약 30년째 이어지고 있다.

미하일은 쿠르딘 시대의 경제 정책을 이어받아 시장 구역과 기업 자율 경영을 제도화하는 한편, 정치적으로는 1990년대의 혼란을 끝낸 '안정의 지도자'를 내세웠다. 할아버지 니키타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선전은 혁명국가 안의 세습이라는 비판을 불렀다.

13.2. 통치 방식 [편집]

미하일 체제는 경제 성장과 정치 통제를 한데 묶은 통치로 요약된다. 2000년대 시장 구역에서 성장한 민간 기업과 국영기업 경영진은 당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대가로 사업을 보장받았고, 당의 노선에서 벗어난 기업인과 지방 간부는 '반부패 운동'의 이름으로 숙청되었다. 언론은 당의 지도 아래 있으며, 인터넷은 국가가 관리하는 연방망을 거쳐 제한적으로만 해외와 연결된다.

선전은 두 개의 기억을 함께 활용한다. 하나는 1990년대의 혼란과 배급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경쟁 초기의 영광과 브레자코프 시대의 안정이다. 사비에트 정부는 미하일 체제를 혼란을 끝내고 안정을 되찾은 시대로 서술하며, 해마다 12월 19일 첫 인공위성 발사일을 '궤도의 날'로 기념한다.

13.3. 성장과 격차 [편집]

2000년대 사비에트 경제는 시장 구역의 확대와 원자재 수출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했다. 대도시에는 고층 주거 단지와 상업 지구가 들어섰고, 해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 및 LSEC 회원국과의 교역도 늘었다. 그러나 성장의 과실은 시장 구역이 있는 대도시와 당·국영기업 간부층에 집중되었다. 평원의 농촌과 카스탄 자치지역, 쇠락한 옛 공업 도시는 뒤처졌고, 지역과 계층 사이의 격차는 2010년대 들어 체제의 가장 큰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성장률은 둔화되었고, 신우주경쟁에 따른 군사비 부담은 다시 늘고 있다.

13.4. 1.19 사건과 벨포르 협정 [편집]

2001년 1월 19일 고랜드 전쟁 때 루이나의 지원으로 모여든 외국인 의용병에서 출발한 국제 지하드 조직 알자미아가 루이나를 공격했다. 이 1.19 사건 이후 루이나는 알자미아를 비호하는 탈레반을 공격하기로 했고, 개전까지의 몇 달 동안 루이나와 고랜드 공산 정부, 사비에트 사이에 비밀 교섭이 이어졌다. 사비에트는 탈레반을 지원하지 않기로 했고, 루이나는 고랜드의 공산 체제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공산 정부와 함께 탈레반을 공격했다.

2001년 12월 5일 루이나와 고랜드 민주공화국은 벨포르 협정을 맺었고, 사비에트는 부속 의정서로 협정에 참여했다. 의정서에 서명한 사람은 미하일 인터루쇼프였다. 한때 고랜드에서 서로의 대리 세력을 지원하던 두 나라가 같은 협정에 이름을 올린 것은 냉전 이후 가장 이례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협정에는 공개되지 않은 비밀 부속서가 있었고, 이는 훗날 폭로되어 논란을 불렀다.

13.5. 해협의 정세 [편집]

2002년 루이나가 빌베른을 침공하자 사비에트는 유엔에서 침공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주도했으나 채택되지 못했고, 이후 사비에트 선전은 이 침공을 루이나 제국주의의 증거로 되풀이해 다루었다. 2021년 루이나가 협상 없이 고랜드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하자, 사비에트는 고랜드 공산 정부에 대한 군사·경제 지원을 늘렸다. 벨포르 협정은 지금도 유효하지만, 루이나의 철수 이후 고랜드는 다시 사비에트 쪽으로 기울었다.

13.6. 신우주경쟁 [편집]

궤도의 휴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2년 루이나가 해상 기반 미사일 방어에 착수하자 사비에트는 이것이 센츄리움 궤도협정의 근간을 무너뜨린다고 항의했다. 2008년 루이나가 자국 위성을 요격하자 사비에트는 협정 위반이라고 주장했고, 2011년 9월 3일에는 사비에트가 지상에서 발사한 요격 미사일로 고도 830km의 자국 퇴역 기상위성을 파괴했다. 사비에트는 이를 시험이 아닌 '폐기'라고 설명했다.

2013년 6월 17일 사비에트는 루이나의 미사일 방어 체계를 이유로 센츄리움 궤도협정 탈퇴를 통보했고, 탈퇴는 같은 해 12월 17일 효력을 발생했다. 이후 언론에서 '신우주경쟁'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다. 2015년 3월 사비에트의 정지궤도 사찰 위성 「텐 2호」가 루이나의 조기경보위성에 12km까지 접근해 7주간 머물렀고, 루이나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2025년 한 해 동안 루이나 위성에 대한 사비에트 위성의 근접 접근은 23건에 이르렀다. 파괴 대신 관찰과 위협으로 경쟁하는 '그림자 위성'의 시대가 된 것이다.

13.7. 오늘날의 사비에트 [편집]

2026년 현재 사비에트는 서기장 겸 최고인민평의회 주석 미하일 인터루쇼프와 총리 리디아 바르노바의 체제 아래 있다. 경제는 계획경제의 틀 안에 시장 구역과 기업 자율 경영을 들인 혼합형으로 운영되며, 대외 경제는 최대 후원국이자 교역국인 소련, 해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 그리고 LSEC를 통한 거래가 중심이다.

랜드해협의 냉전은 끝나지 않았다. 루이나군이 주둔하는 유고랜드와의 국경은 두 진영이 직접 마주하는 최전선이고, 궤도에서는 신우주경쟁이 계속되고 있다. 청평과는 경제 교류를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관계가 회복되었으나, 동사랜드와는 1977년 이후 국교가 없다. 당과 정부의 요직을 인터루쇼프 가문과 그 측근이 차지한 지 30년 가까이 되면서, 미하일 이후의 후계 문제는 사비에트 정치의 가장 큰 불확실성으로 남아 있다.

14. 역사 인식 [편집]

사비에트의 역사 서술에는 몇 가지 오래된 쟁점이 있다.

첫째는 분수 서사와 고랜드의 기억이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기원전 4세기의 분수 전쟁을 억압에 맞선 '최초의 해방'으로, 이후의 모든 혁명을 그 계승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같은 사건을 고랜드는 식민 도시의 반란과 본국의 몰락으로 기억한다. 1979년 고랜드 침공 때 고랜드 측이 사비에트를 '물길을 빼앗으러 온 아랫땅'으로 묘사한 것은, 2,000년 넘은 기원 서사가 현대의 전쟁 선전으로 되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둘째는 두 혁명의 관계다. 공식 역사는 1917년의 장미 혁명을 '미완의 혁명', 1949년의 붉은 혁명을 '혁명의 완성'으로 짝지어 가르친다. 이 틀에서 1920~1949년의 사랜드 공화국은 실패한 과도기로만 다루어지고, 장미 혁명을 이끈 자유주의자와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역할은 축소된다. 공화국 초기의 헌법과 의회 정치를 사비에트 민주주의의 한 원천으로 재평가하려는 시도는 1990년대 이후 학계 일부에서 나왔으나 공식 교과서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셋째는 추축국 과거와 인민군 신화다. 사비에트는 공화국 군부 정권의 추축국 가담을 '지주와 장군의 반역'으로 규정하고, 인민군의 저항을 민족 전체의 반파시즘 투쟁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추축국 편에서 싸운 병사와 관료의 상당수가 평범한 징집병과 공무원이었다는 점, 내전 기간 소련의 원조가 인민군의 승리에 결정적이었다는 점은 공식 서술에서 흐려진다. 연합국이 내전에 개입하지 않은 것도 사비에트 교과서에서는 '인민의 힘만으로 이룬 승리'의 증거로 쓰인다.

넷째는 노스탈린의 평가다. 1956년 안토노프의 연설은 대정리의 무고한 처형과 개인숭배를 인정했지만, 집단화와 1951년 기근은 1990년대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노스탈린은 오늘날에도 '과오가 있었으나 연방을 세운 지도자'로 평가되며, 노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이 절반의 평가를 상징한다. 대정리 희생자 수를 두고는 공식 기록과 연구자 추정의 격차가 여전히 크다.

다섯째는 동사랜드 문제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1949년 합병을 동사랜드의 자발적 가입으로, 1963년 크라슬리스크 조약을 '연방의 승인에 따른 평화적 분립'으로 서술하며, 1951~1962년의 봉기와 진압은 '동부 소요'라는 짧은 표현으로만 다룬다. 반면 동사랜드는 1949~1963년을 점령기로 보고 독립 연도를 1951년으로 적는다. 미하일 인터루쇼프 체제 이후 사비에트는 동사랜드를 '역사적 오류'라 부르던 표현을 공식 문서에서 쓰지 않게 되었으나, 합병의 성격에 대한 입장은 바꾸지 않았다.

여섯째는 비밀과 공개의 문제다. 사르다 참사는 28년, 크레포스트와 야스트레브는 30년 가까이 감춰졌다가 재편기와 1990년대에 공개되었다. 그러나 1991년 카멘스키의 실각 이후 정보 공개는 다시 좁아졌고, 고랜드 침공의 결정 과정이나 위성국 개입의 기록 상당 부분은 지금도 비공개로 남아 있다. 사비에트 현대사 연구의 상당수가 여전히 루이나의 기밀 해제 문서에 기대고 있는 까닭이다.

일곱째는 인터루쇼프 가문의 세습이다. 공식 선전은 미하일의 집권을 능력과 당내 합의의 결과로 설명하지만,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에 걸친 권력은 혁명국가 안의 왕조라는 비판을 받는다. 1,206년의 제정을 무너뜨린 혁명의 나라가 다시 한 가문의 이름 아래 통치된다는 역설은 해외의 사비에트 비판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수사가 되었다.

여덟째는 카스탄족의 역사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슬라브인의 이주 이후 평원의 역사를 남슬라브족 중심으로 서술하고, 카스탄족은 연방을 이루는 소수민족의 하나로 다룬다. 반면 카스탄족 사회는 스스로를 고대 사랜드의 직계 후손으로 여기며, 제정과 공화국, 연방을 거치는 동안 언어와 자치가 번번이 억눌린 역사를 강조한다. 1989~1990년 언어 집회 이후 카스탄어는 공용어 지위를 얻었지만, 카스탄 역사학의 관점은 연방 교과서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아홉째는 해협 남부에 대한 개입의 기억이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1963~1965년 해협 남부의 공산화를 각국 인민의 자발적인 혁명으로, 이후의 고문단 파견과 개입을 '형제국에 대한 국제주의적 원조'로 서술한다. 그러나 해협 남부 여러 나라의 체제 비판자와 망명자들은 사비에트의 개입을 민주화를 가로막은 외세의 간섭으로 기억하며, 한 번의 큰 사건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작은 개입들이었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그 전모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15. 연표 [편집]

시기
사건
기원전 1천년기 전반
고원의 수로 문명 고랜드 성립
기원전 7~6세기
저지대 평원에 고랜드의 식민 도시 건설
기원전 4세기 초
분수 전쟁, 사랜드의 분화
기원전 3세기
사랜드 왕국 통합, 동방 팽창 시작
기원전 2세기
청평 정복
2~3세기
고북산 원정
3세기
로마와의 전쟁, 사랜드 제국 붕괴
6~7세기
역병과 슬라브인의 이주
711년
인터르스키 1세 즉위, 제정 사랜드 성립
789년
빌베른과의 전쟁에서 패배
13~14세기
몽골의 침입
1627년
남꽝 왕국과 롱 강 경계로 강화
1914년
협상국 편으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
1917년
장미 혁명, 황제 퇴위
1920년
사랜드 공화국 헌법 제정
1921년
사랜드 공산당 창당
1922년
이오시프 노스탈린, 공산당 서기장 취임
1934년
군부 쿠데타, 페트코비치 정권
1941년
추축국 가담
1945년
휴전, 과도정부 수립
1946~1949년
붉은 혁명
1949년
사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수립, 동사랜드 합병
1950~1952년
대정리
1951년
노스탈린 와병, 기근, 동사랜드 봉기
1953년
노스탈린 사망, 안토노프 서기장 취임
1955년
유엔 가입
1956년
탈노스탈린화 연설, 청소합작 협정
1957년
프레드베스트니크 1호 발사
1959년
콘스탄티노폴 공산 정부 지원
1959~1960년
청평 원조 축소, 청평과 결별
1961년
사르다 발사장 참사
1962년
스트라시 1호 발사
1963년
크라슬리스크 조약, 동사랜드 분리
1963~1965년
해협 남부의 공산화
1964년
브레자코프 서기장 취임
1965년
벨포르-크라슬리스크 직통선 개설
1966년
궤도방위군 창설
1968년
메치 실전 배치
1970년
루이나의 콘스탄티노폴 침공, 고문단 억류와 송환
1974년
해르샤바 조약기구 출범
1975년
LSEC 가입
1977년
동사랜드와 국경 충돌, 단교
1979년
고랜드 침공
1980년
노스탈린그라드 올림픽
1982년
브레자코프 사망
1984년
정지궤도 위기
1985년
카멘스키 서기장 취임, 재편 시작
1987년
센츄리움 궤도협정 서명
1988년
고랜드 미사일 위기
1989년
고랜드 철군 완료
1991년
카멘스키 실각
1994년
쿠르딘 서기장 취임, 국가조사위원회 설치
1996년
탈레반의 아바나 점령, 고랜드 공산 정부 지원
1998년
미하일 인터루쇼프 서기장 취임
2001년
벨포르 협정 부속 의정서 서명
2011년
자국 기상위성 요격
2013년
센츄리움 궤도협정 탈퇴
2015년
텐 2호의 정지궤도 접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