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다 발사장 조립동에서 발사체 결합을 기다리는 야스트레브-M 요격체 (1979년) |
1. 개요 [편집]
야스트레브(Ястреб, 매)는 사비에트 제7설계국이 개발하고 인민해방군 궤도방위군이 운용한 공궤도(共軌道) 방식의 위성 요격 체계다. 흔히 '야스트레브 미사일'로 불리지만, 엄밀히는 지상에서 발사체로 쏘아 올린 요격체가 표적 위성과 같은 궤도에 진입해 한두 바퀴 안에 접근한 뒤 파편탄두를 터뜨려 파괴하는 '요격 위성'과 그 발사·지휘 체계 전체를 가리킨다.
1968년 2월 21일 자국 표적 위성을 상대로 한 시험에서 첫 요격에 성공해, 궤도상의 위성을 실제로 파괴한 세계 최초의 무기가 되었다. 1982년 6월 18일 마지막 시험까지 공식 시험 20회 중 11회 성공했으며, 1972년 실전 채택 이후 1993년까지 사르다 발사장에서 상시 발사 대기 태세를 유지했다. 루이나 정보당국의 식별명은 「TALON」이었다.
야스트레브는 랜드해협 우주경쟁 제1차 경쟁기에 사비에트가 보유한 유일한 실전 배치 위성 요격 무기였으며, 루이나 해군의 KINGFISHER와 공군의 AQ-7 개발을 촉발한 직접적 원인이었다. 20년 넘게 발사 대기 상태에 있었지만 루이나의 위성을 실제로 공격한 적은 없고, 모든 요격은 사비에트 자국의 표적 위성을 대상으로 한 시험이었다.
1968년 2월 21일 자국 표적 위성을 상대로 한 시험에서 첫 요격에 성공해, 궤도상의 위성을 실제로 파괴한 세계 최초의 무기가 되었다. 1982년 6월 18일 마지막 시험까지 공식 시험 20회 중 11회 성공했으며, 1972년 실전 채택 이후 1993년까지 사르다 발사장에서 상시 발사 대기 태세를 유지했다. 루이나 정보당국의 식별명은 「TALON」이었다.
야스트레브는 랜드해협 우주경쟁 제1차 경쟁기에 사비에트가 보유한 유일한 실전 배치 위성 요격 무기였으며, 루이나 해군의 KINGFISHER와 공군의 AQ-7 개발을 촉발한 직접적 원인이었다. 20년 넘게 발사 대기 상태에 있었지만 루이나의 위성을 실제로 공격한 적은 없고, 모든 요격은 사비에트 자국의 표적 위성을 대상으로 한 시험이었다.
2. 명칭 [편집]
제7설계국 내부의 개발 명칭은 「제품 7-IS」였으며, '야스트레브'라는 이름은 1962년 국방인민위원회의 개발 승인 문서에서 처음 쓰였다. 이름은 제7설계국 수석설계자 예브게니 A. 스테파노프가 직접 붙인 것으로, 매가 높은 곳에서 원을 그리며 먹잇감을 따라가다가 내리꽂는 습성에서 따왔다고 한다. 목표를 향해 곧장 날아가는 대신 먼저 같은 궤도를 돌며 따라붙는 공궤도 요격 방식을 빗댄 이름이다.
사비에트는 1991년까지 야스트레브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요격체와 표적 위성은 모두 다른 군사 위성과 마찬가지로 「궤도 연구 위성 ○호」라는 일련번호로만 발표되었다. 루이나 정보당국은 1968년 첫 요격 시험을 탐지한 뒤 이 체계에 「TALON」(발톱)이라는 식별명을 붙였고, 루이나 언론과 연구서에서는 1991년 이후에도 이 이름이 한동안 함께 쓰였다.
사비에트는 1991년까지 야스트레브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요격체와 표적 위성은 모두 다른 군사 위성과 마찬가지로 「궤도 연구 위성 ○호」라는 일련번호로만 발표되었다. 루이나 정보당국은 1968년 첫 요격 시험을 탐지한 뒤 이 체계에 「TALON」(발톱)이라는 식별명을 붙였고, 루이나 언론과 연구서에서는 1991년 이후에도 이 이름이 한동안 함께 쓰였다.
3. 개발 배경 [편집]
1957년 12월 프레드베스트니크 1호로 시작된 랜드해협 우주경쟁에서 사비에트는 궤도에 먼저 올랐지만, 곧 같은 궤도를 루이나와 나눠 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1960년 3월 루이나 해군의 전자정찰위성 TIDEMARK가 사비에트 방공 레이더망의 위치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사비에트 국방인민위원회는 이듬해까지 루이나가 사진 정찰위성까지 확보할 것으로 내다봤다. 상대 영공을 침범하지 않고 매일 수차례 머리 위를 지나가는 정찰위성은 방공망으로 막을 수 없었다.
스테파노프는 1960년 9월 국방인민위원회에 「궤도 요격체에 관하여」라는 제안서를 제출했다. 제안서의 논리는 단순했다. 상대의 눈을 가질 수 없다면 상대의 눈을 멀게 할 수 있어야 하며, 궤도를 도는 물체는 궤도를 도는 물체로만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1설계국의 발렌틴 P. 오를로프는 궤도에서 표적을 찾아 1km 이내로 접근하는 유도 기술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며 제안이 시기상조라고 반대했다.
개발은 출발부터 차질을 빚었다. 1961년 6월 17일 사르다 발사장 참사로 제7설계국은 시험부장을 비롯한 인력의 절반가량을 잃었고, 요격체의 두뇌에 해당하는 레이더 탐색기를 맡기로 되어 있던 제3설계국은 수석설계자 그리고리 L. 바비치와 핵심 기술자들을 한꺼번에 잃었다. 국방인민위원회는 1962년 4월 개발을 정식 승인했지만, 탐색기 개발은 바비치의 후임인 발레리 N. 셰르바코프가 설계국을 재건하는 동안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야스트레브의 첫 요격 성공이 개발 승인으로부터 6년 가까이 걸린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이다.
스테파노프는 1960년 9월 국방인민위원회에 「궤도 요격체에 관하여」라는 제안서를 제출했다. 제안서의 논리는 단순했다. 상대의 눈을 가질 수 없다면 상대의 눈을 멀게 할 수 있어야 하며, 궤도를 도는 물체는 궤도를 도는 물체로만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1설계국의 발렌틴 P. 오를로프는 궤도에서 표적을 찾아 1km 이내로 접근하는 유도 기술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며 제안이 시기상조라고 반대했다.
개발은 출발부터 차질을 빚었다. 1961년 6월 17일 사르다 발사장 참사로 제7설계국은 시험부장을 비롯한 인력의 절반가량을 잃었고, 요격체의 두뇌에 해당하는 레이더 탐색기를 맡기로 되어 있던 제3설계국은 수석설계자 그리고리 L. 바비치와 핵심 기술자들을 한꺼번에 잃었다. 국방인민위원회는 1962년 4월 개발을 정식 승인했지만, 탐색기 개발은 바비치의 후임인 발레리 N. 셰르바코프가 설계국을 재건하는 동안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야스트레브의 첫 요격 성공이 개발 승인으로부터 6년 가까이 걸린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이다.
4. 개발 경위 [편집]
탐색기 개발이 늦어지는 동안 제7설계국은 요격체의 궤도 기동 능력부터 검증했다. 1964년 8월과 1965년 5월 발사된 「궤도 연구 위성 31호」와 「47호」는 탐색기 없이 추진장치만 갖춘 시험기로, 궤도에서 엔진을 여러 차례 재점화해 궤도 고도와 궤도면을 바꾸는 기동을 실증했다. 이는 궤도에서 계획적으로 궤도를 바꾼 사비에트 최초의 사례였다.
1967년에는 탐색기를 갖춘 요격체의 시험 두 차례가 모두 실패했다. 5월 시험에서는 발사체 2단이 정상 연소하지 못해 요격체가 궤도에 오르지 못했고, 11월 시험에서는 궤도 진입 후 요격체가 발사체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이 두 차례와 앞선 기동 시험은 이후 사비에트가 매긴 공식 시험 계열 번호에 포함되지 않는다.
1968년 2월 21일, 먼저 발사된 표적 위성을 쫓아 사르다에서 발사된 요격체가 두 바퀴째 궤도에서 고도 520km의 표적에 약 0.9km까지 접근한 뒤 탄두를 터뜨렸다. 표적은 수십 개의 파편으로 부서졌고, 지상 레이더가 표적의 신호 소실과 파편 구름을 확인했다. 궤도상의 위성을 무기로 파괴한 세계 최초의 사례였다. 소식을 전해 들은 스테파노프는 일기에 "탐색기는 1961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어야 했다. 우리는 6년을 사막에 묻었다"고 적었다.
1967년에는 탐색기를 갖춘 요격체의 시험 두 차례가 모두 실패했다. 5월 시험에서는 발사체 2단이 정상 연소하지 못해 요격체가 궤도에 오르지 못했고, 11월 시험에서는 궤도 진입 후 요격체가 발사체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이 두 차례와 앞선 기동 시험은 이후 사비에트가 매긴 공식 시험 계열 번호에 포함되지 않는다.
1968년 2월 21일, 먼저 발사된 표적 위성을 쫓아 사르다에서 발사된 요격체가 두 바퀴째 궤도에서 고도 520km의 표적에 약 0.9km까지 접근한 뒤 탄두를 터뜨렸다. 표적은 수십 개의 파편으로 부서졌고, 지상 레이더가 표적의 신호 소실과 파편 구름을 확인했다. 궤도상의 위성을 무기로 파괴한 세계 최초의 사례였다. 소식을 전해 들은 스테파노프는 일기에 "탐색기는 1961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어야 했다. 우리는 6년을 사막에 묻었다"고 적었다.
5. 구성 [편집]
야스트레브 체계는 요격체, 발사체, 지상 지휘·추적 체계, 그리고 시험용 표적 위성으로 이루어진다.
5.1. 요격체 [편집]
항목 | 제원 |
전장 | 4.4m |
직경 |
|
중량 | 약 1,450kg |
탄두 | 방향성 파편탄두 2기 |
살상 반경 | 약 1km |
탐색기 | 능동 레이더 |
요격 고도 | 160~1,600km |
요격 소요 | 1회전 약 100분 2회전 약 200분 |
요격체는 앞쪽의 레이더 탐색기 구획, 가운데의 탄두·기기 구획, 뒤쪽의 추진 구획으로 나뉜다. 추진 구획에는 여러 차례 재점화할 수 있는 주 엔진과 자세 제어용 소형 추력기가 실려 있었으며, 추진제는 K-7 미사일과 같은 계열의 상온 저장 추진제를 사용했다. 덕분에 요격체는 추진제를 채운 상태로 장기간 보관할 수 있었고, 이는 상시 발사 대기 태세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
탄두는 요격체 앞쪽을 향해 파편을 원뿔 모양으로 뿌리도록 설계된 방향성 파편탄두 2기로 구성되었다. 탄두 두 기는 표적과의 거리와 접근 각도에 따라 하나씩 또는 동시에 터뜨릴 수 있었다. 표적을 직접 들이받는 것이 아니라 표적이 지나갈 공간을 파편으로 채우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요격체는 표적에 수백 m에서 1km 정도까지만 접근하면 충분했다.
탐색기는 제3설계국이 개발한 능동 레이더로, 최종 접근 단계에서 표적을 스스로 포착해 요격체의 마지막 기동을 유도했다. 제2기 시험에서는 전파를 내지 않아 표적에게 탐지될 위험이 적은 광학 탐색기가 시험되었으나, 다섯 차례 시험이 모두 실패해 채택되지 않았다.
5.2. 발사체 [편집]
요격체는 K-7 탄도미사일을 개량한 2단 발사체 K-7R로 발사되었다. K-7은 1961년 사르다 발사장 참사를 일으킨 바로 그 미사일로, 같은 계열의 발사체가 핵탄두를 부분궤도로 올리는 메치와 위성을 파괴하는 야스트레브를 모두 쏘아 올렸다. 발사는 사르다 발사장의 제12발사대와 제14발사대에서 이루어졌는데, 제12발사대는 1961년 폭발 사고 후 같은 자리에 재건된 발사대였다.
5.3. 지상 체계 [편집]
요격의 두뇌는 지상에 있었다. 크라슬리스크 근교 노보셀키의 궤도방위군 중앙통제소가 궤도 추적 레이더망이 보내오는 자료로 표적의 궤도를 산출하고, 계산소가 요격 궤적을 계산해 발사 제원을 사르다로 보냈다. 요격체가 궤도에 오른 뒤에도 지상 레이더가 요격체와 표적을 함께 추적하며 궤도 수정 명령을 올려 보냈고, 탐색기는 마지막 수십 km 구간에서만 작동했다. 지상에서는 요격체의 탄두를 원격으로 기폭하거나 기폭을 취소할 수 있었다.[1]
5.4. 표적 위성 [편집]
시험에는 전용 표적 위성 「미셴(Мишень)」이 쓰였다. 무게 약 650kg, 직경 1.4m의 다면체로, 초기형은 단순한 금속 구조물이었지만 1970년부터는 표면에 장갑판과 파편 충돌 감지 센서를 붙인 계측형이 도입되어 파편이 표적의 어느 부위에 몇 개나 맞았는지를 지상으로 전송했다. 계측형 표적은 파편이 비껴간 경우 부서지지 않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여러 번의 시험에 재사용되기도 했다.
6. 요격 방식 [편집]
야스트레브의 요격은 다음 순서로 이루어졌다.
- 표적 궤도 산출: 중앙통제소가 추적 레이더 자료로 표적의 궤도를 확정한다.
- 발사 시각 결정: 표적의 궤도면이 사르다 상공을 지나는 시각에 맞춰 발사 시각을 정한다. 이 기회는 하루 두 번 찾아온다.
- 궤도 진입: K-7R이 요격체를 표적과 거의 같은 궤도면에, 표적보다 약간 낮거나 높은 궤도로 올린다.
- 궤도 수정: 지상의 명령에 따라 요격체가 엔진을 재점화해 표적과의 거리와 고도 차를 줄인다.
- 탐색기 포착: 마지막 수십 km 구간에서 탐색기가 표적을 포착하고 요격체가 최종 기동을 한다.
- 기폭: 표적과의 거리가 1km 안쪽으로 들어오면 탄두를 터뜨린다.
요격은 1회전 방식과 2회전 방식으로 나뉜다. 2회전 방식은 첫 바퀴 동안 지상 레이더가 요격체의 실제 궤도를 측정해 수정 명령을 올려 보낸 뒤 두 번째 바퀴에서 요격하는 방식으로, 발사 후 요격까지 약 200분이 걸렸지만 정확도가 높았다. 1회전 방식은 첫 바퀴 안에 요격체가 스스로 접근과 기폭을 끝내는 방식으로, 요격까지 약 100분이면 충분해 표적이 회피 기동을 할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1회전 방식은 제2기 시험에서 처음 도입되었다.
공궤도 방식은 몇 가지 뚜렷한 제약을 안고 있었다.
- 발사 기회가 표적의 궤도면이 발사장 상공을 지날 때로 한정되어, 명령을 받은 뒤 실제 발사까지 최대 12시간을 기다려야 할 수 있었다.
- 사르다의 위도보다 낮은 궤도 경사각을 가진 위성은 공격할 수 없었다. 다만 해협을 관측하는 루이나 위성 대부분은 이보다 경사각이 높아 실질적인 제약은 크지 않았다.
- 고도 1,600km를 넘는 위성, 특히 정지궤도의 조기경보위성 WATCHFIRE와 통신위성에는 닿을 수 없었다.
- 요격체가 궤도를 도는 동안 상대가 발사를 탐지하고 표적 위성을 회피 기동시킬 여유가 생겼다.
이 제약들 때문에 야스트레브는 해협의 7분을 다투는 기습 무기가 될 수 없었다. 명령에서 파괴까지 짧게는 2시간, 길게는 14시간이 걸리는 무기는 핵 선제공격의 첫 수로는 쓸모가 없었고, 궤도방위군 교범 역시 야스트레브의 임무를 "장기화된 위기와 재래식 전쟁에서 적 정찰위성을 순차적으로 제거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7. 시험 이력 [편집]
7.1. 제1기 시험 (1968~1971) [편집]
1968년 2월 첫 성공 이후 제1기 시험은 요격 가능한 고도의 범위를 넓히는 데 집중되었다. 1969년 11월에는 고도 1,020km, 1971년 5월에는 1,340km의 표적 요격에 성공했다. 1970년 6월 시험부터 계측형 표적이 도입되어 파편의 명중 분포가 측정되었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탄두의 기폭 시점 계산이 개선되었다. 제1기에는 모두 2회전 방식으로 8회 시험해 6회 성공했으며, 실패 2회는 각각 탐색기의 표적 포착 실패와 최종 접근 실패였다.
7.2. 시험 중단 (1972~1975) [편집]
1971년 12월 시험을 마지막으로 사비에트는 4년간 야스트레브 시험을 하지 않았다. 체계가 1972년 실전 채택되면서 시험보다 배치가 우선되었고, 궤도방위군은 이미 검증된 능력을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 시기 루이나에서는 사비에트가 요격 무기 개발을 포기했다는 분석과 이미 완성해 감춰 두었다는 분석이 엇갈렸다.
7.3. 제2기 시험 (1976~1982) [편집]
시험은 1976년 2월 재개되었다. 재개의 계기로는 청북전쟁 기간 루이나 정찰위성과 해양감시위성이 사비에트 함대를 상시 추적하게 된 상황, 그리고 루이나 해군이 함정 발사 요격 미사일 KINGFISHER를 개발하고 있다는 첩보가 꼽힌다. 제2기의 과제는 세 가지였다. 요격 시간을 줄이는 1회전 방식, 전파를 내지 않는 광학 탐색기, 그리고 요격 고도의 확대였다.
1976년 2월 첫 1회전 시험은 실패했으나 1977년 3월 두 번째 시도에서 성공했다. 1976년 7월에는 역대 최고 고도인 1,570km, 1977년 10월에는 근지점 162km의 타원궤도 표적 요격에 성공해 요격 가능 고도 범위가 160~1,600km로 확정되었다. 반면 광학 탐색기는 1978년부터 1981년까지 다섯 차례 시험이 모두 실패했다. 제2기에는 12회 시험해 5회 성공했다.
1976년 2월 첫 1회전 시험은 실패했으나 1977년 3월 두 번째 시도에서 성공했다. 1976년 7월에는 역대 최고 고도인 1,570km, 1977년 10월에는 근지점 162km의 타원궤도 표적 요격에 성공해 요격 가능 고도 범위가 160~1,600km로 확정되었다. 반면 광학 탐색기는 1978년부터 1981년까지 다섯 차례 시험이 모두 실패했다. 제2기에는 12회 시험해 5회 성공했다.
7.4. 1982년 6월 18일 [편집]
야스트레브의 마지막 시험은 1982년 6월 18일 사비에트 전략군이 실시한 대규모 연합 훈련의 일부로 진행되었다. 이날 사비에트는 약 6시간 사이에 K-7 탄도미사일 2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1발, 탄도탄 요격 미사일 2발, 정찰위성 1기, 그리고 야스트레브 요격체 1기를 잇달아 발사했다. 야스트레브는 1회전 방식으로 표적을 요격하는 데 성공했다.
주목받은 것은 표적이었다. 이날의 표적 위성은 루이나 해군의 항법위성 LODESTAR와 같은 고도와 궤도 경사각에 투입되어 있었다.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위치 산출을 LODESTAR에 의존하던 루이나 해군은 이 훈련을, 전쟁의 첫 단계에서 항법위성을 제거해 루이나 전략잠수함의 정확도를 떨어뜨린 뒤 핵 공격을 주고받는 시나리오의 예행연습으로 해석했다. 루이나 언론은 이 훈련을 '6시간 전쟁'이라 불렀다.
이 시험은 루이나의 대응을 가속했다. 1983년 루이나 국방부는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6월 18일 훈련을 근거로 공군 AQ-7 계획의 예산 증액을 요구했고, AQ-7은 1985년 9월 실제 요격 시험에 성공했다. 해군은 LODESTAR의 위성 수를 늘리고 지상 예비 위성을 비축하는 방향으로 항법 체계를 재편했다.
주목받은 것은 표적이었다. 이날의 표적 위성은 루이나 해군의 항법위성 LODESTAR와 같은 고도와 궤도 경사각에 투입되어 있었다.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위치 산출을 LODESTAR에 의존하던 루이나 해군은 이 훈련을, 전쟁의 첫 단계에서 항법위성을 제거해 루이나 전략잠수함의 정확도를 떨어뜨린 뒤 핵 공격을 주고받는 시나리오의 예행연습으로 해석했다. 루이나 언론은 이 훈련을 '6시간 전쟁'이라 불렀다.
이 시험은 루이나의 대응을 가속했다. 1983년 루이나 국방부는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6월 18일 훈련을 근거로 공군 AQ-7 계획의 예산 증액을 요구했고, AQ-7은 1985년 9월 실제 요격 시험에 성공했다. 해군은 LODESTAR의 위성 수를 늘리고 지상 예비 위성을 비축하는 방향으로 항법 체계를 재편했다.
7.5. 시험 목록 [편집]
공식 시험 계열 번호 기준이며, 1964~1967년의 기동 시험과 발사 실패는 포함하지 않는다.
번호 | 일자 | 방식 | 탐색기 | 결과 |
1 | 1968.02.21 | 2회전 | 레이더 | 성공 |
2 | 1968.07.09 | 2회전 | 레이더 | 실패 |
3 | 1969.04.15 | 2회전 | 레이더 | 성공 |
4 | 1969.11.03 | 2회전 | 레이더 | 성공 |
5 | 1970.06.24 | 2회전 | 레이더 | 성공 |
6 | 1970.10.30 | 2회전 | 레이더 | 실패 |
7 | 1971.05.18 | 2회전 | 레이더 | 성공 |
8 | 1971.12.07 | 2회전 | 레이더 | 성공 |
9 | 1976.02.12 | 1회전 | 레이더 | 실패 |
10 | 1976.07.20 | 2회전 | 레이더 | 성공 |
11 | 1977.03.08 | 1회전 | 레이더 | 성공 |
12 | 1977.10.26 | 2회전 | 레이더 | 성공 |
13 | 1978.05.19 | 1회전 | 광학 | 실패 |
14 | 1978.12.14 | 1회전 | 광학 | 실패 |
15 | 1979.08.02 | 2회전 | 광학 | 실패 |
16 | 1980.04.18 | 1회전 | 레이더 | 성공 |
17 | 1980.11.25 | 1회전 | 광학 | 실패 |
18 | 1981.03.21 | 1회전 | 광학 | 실패 |
19 | 1981.09.09 | 2회전 | 레이더 | 실패 |
20 | 1982.06.18 | 1회전 | 레이더 | 성공 |
레이더 탐색기만 놓고 보면 15회 중 11회 성공으로 성공률은 약 73%다. 전체 성공률이 55%에 그친 것은 광학 탐색기 시험 다섯 차례가 모두 실패했기 때문으로, 루이나 정보당국도 1983년 평가에서 "실전에서 쓰일 레이더형의 신뢰도는 공식 성공률보다 높다"고 결론지었다.
8. 배치와 운용 [편집]
야스트레브는 1972년 실전 채택되어 사르다에 주둔한 궤도방위군 제51궤도요격연대에 배치되었다. 1979년 7월에는 1회전 요격 능력과 확대된 요격 고도를 반영한 개량형 야스트레브-M이 채택되어 기존 요격체를 대체했다.
제51궤도요격연대는 제12발사대와 제14발사대에 요격체를 결합한 발사체를 1기씩 세워 두고, 발사 명령 후 90분 안에 발사할 수 있는 태세를 유지했다. 두 발사대는 한 발을 쏜 뒤 수 시간 안에 다음 발을 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이론상 하루에 여러 기의 루이나 위성을 차례로 공격할 수 있었다. 연대의 병력은 약 1,100명이었고, 1972년부터 1993년까지 생산된 배치용 요격체는 모두 18기였다.
1984년 정지궤도 위기 당시 루이나 조기경보위성 WATCHFIRE 4호에 접근한 「궤도 연구 위성 1127호」를 두고, 루이나 일각에서는 야스트레브를 정지궤도용으로 개량한 이른바 「야스트레브-G」의 시험기라는 분석이 나왔다. 2004년 기밀 해제된 루이나 문서도 1127호를 근접 기동 능력을 갖춘 사찰 위성으로 결론지었지만, 이것이 야스트레브 계열이었는지는 사비에트 측 자료로 확인되지 않았다. 사비에트는 정지궤도 요격 무기를 개발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제51궤도요격연대는 제12발사대와 제14발사대에 요격체를 결합한 발사체를 1기씩 세워 두고, 발사 명령 후 90분 안에 발사할 수 있는 태세를 유지했다. 두 발사대는 한 발을 쏜 뒤 수 시간 안에 다음 발을 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이론상 하루에 여러 기의 루이나 위성을 차례로 공격할 수 있었다. 연대의 병력은 약 1,100명이었고, 1972년부터 1993년까지 생산된 배치용 요격체는 모두 18기였다.
1984년 정지궤도 위기 당시 루이나 조기경보위성 WATCHFIRE 4호에 접근한 「궤도 연구 위성 1127호」를 두고, 루이나 일각에서는 야스트레브를 정지궤도용으로 개량한 이른바 「야스트레브-G」의 시험기라는 분석이 나왔다. 2004년 기밀 해제된 루이나 문서도 1127호를 근접 기동 능력을 갖춘 사찰 위성으로 결론지었지만, 이것이 야스트레브 계열이었는지는 사비에트 측 자료로 확인되지 않았다. 사비에트는 정지궤도 요격 무기를 개발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9. 루이나의 평가와 대응 [편집]
루이나는 1968년 2월 첫 요격 시험을 궤도 추적 레이더로 탐지했다. 표적 위성이 파편 구름으로 흩어지는 모습이 추적 자료에 나타났지만, 사비에트가 아무 발표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의도된 요격인지 사고인지를 판단하는 데 몇 달이 걸렸다. 1969년 루이나 국가정보판단은 "사비에트는 저궤도 위성을 요격할 능력을 실증했으며, 성공률은 50~60%로 추정된다"고 평가했다.
루이나의 대응은 세 갈래였다. 첫째, 사르다에서의 발사를 탐지하는 즉시 표적이 될 수 있는 저궤도 정찰위성에 회피 기동을 명령하는 절차가 마련되었다. 요격체가 궤도를 도는 100~200분이 곧 루이나가 가진 회피 시간이었다. 둘째, 정찰위성을 잃었을 때 곧바로 대체할 수 있도록 지상에 예비 위성을 비축했다. 셋째, 같은 능력으로 맞서기 위해 해군의 KINGFISHER와 공군의 AQ-7을 개발했다. 1978년 루이나 국방부의 비공개 분석은 전쟁이 벌어질 경우 야스트레브가 첫 1주일 안에 루이나 저궤도 정찰위성의 약 3분의 1을 제거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루이나의 대응은 세 갈래였다. 첫째, 사르다에서의 발사를 탐지하는 즉시 표적이 될 수 있는 저궤도 정찰위성에 회피 기동을 명령하는 절차가 마련되었다. 요격체가 궤도를 도는 100~200분이 곧 루이나가 가진 회피 시간이었다. 둘째, 정찰위성을 잃었을 때 곧바로 대체할 수 있도록 지상에 예비 위성을 비축했다. 셋째, 같은 능력으로 맞서기 위해 해군의 KINGFISHER와 공군의 AQ-7을 개발했다. 1978년 루이나 국방부의 비공개 분석은 전쟁이 벌어질 경우 야스트레브가 첫 1주일 안에 루이나 저궤도 정찰위성의 약 3분의 1을 제거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10. 센츄리움 궤도협정 이후 [편집]
1987년 센츄리움 궤도협정은 파편을 남기는 위성 요격 시험을 금지했지만 위성 요격 무기의 보유는 금지하지 않았다. 야스트레브는 협정 이후에도 발사 대기 태세를 유지했으나, 실제 요격 시험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체계의 신뢰도를 확인할 방법이 사라졌다. 궤도방위군은 요격체를 표적에 접근시키되 기폭하지 않는 비파괴 시험을 두 차례 실시했으나, 이는 탄두와 기폭 계통을 검증하지 못했다.
사비에트는 1991년 크레포스트 2호의 궤도 사격 시험과 함께 야스트레브의 존재를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993년 궤도방위군은 요격체와 발사체의 노후화, 시험 불가에 따른 신뢰도 저하를 이유로 상시 발사 대기 태세를 해제했고, 야스트레브는 1996년 공식 퇴역했다. 남은 요격체는 1998년까지 해체되었으며, 1기는 인민해방군 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야스트레브의 기술 가운데 표적에 접근해 거리를 유지하는 근접 기동 기술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2015년 루이나 조기경보위성 WATCHFIRE III 1호에 12km까지 접근해 7주간 머문 사비에트의 사찰 위성 「텐」을 두고, 연구자들은 야스트레브의 궤도 접근 기술이 파괴 대신 관찰의 형태로 계승된 것으로 본다.
사비에트는 1991년 크레포스트 2호의 궤도 사격 시험과 함께 야스트레브의 존재를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993년 궤도방위군은 요격체와 발사체의 노후화, 시험 불가에 따른 신뢰도 저하를 이유로 상시 발사 대기 태세를 해제했고, 야스트레브는 1996년 공식 퇴역했다. 남은 요격체는 1998년까지 해체되었으며, 1기는 인민해방군 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야스트레브의 기술 가운데 표적에 접근해 거리를 유지하는 근접 기동 기술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2015년 루이나 조기경보위성 WATCHFIRE III 1호에 12km까지 접근해 7주간 머문 사비에트의 사찰 위성 「텐」을 두고, 연구자들은 야스트레브의 궤도 접근 기술이 파괴 대신 관찰의 형태로 계승된 것으로 본다.
11. 파편 문제 [편집]
야스트레브의 시험은 궤도에 상당한 양의 파편을 남겼다. 성공한 시험 11회에서는 표적과 요격체가 함께 부서졌고, 실패한 시험에서도 요격체를 자폭시킨 경우가 있었다. 루이나와 사비에트의 추적망이 목록에 올린 야스트레브 관련 파편은 누계 약 700개에 이른다.
특히 고도 1,000km 이상에서 이루어진 시험의 파편은 대기 저항이 거의 없어 수백 년 동안 궤도에 남을 것으로 예측된다. 2026년 현재에도 약 190개가 추적 목록에 남아 있으며, 2009년에는 루이나의 기상위성 1기가 1971년 5월 시험에서 나온 파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회피 기동을 한 일이 있었다. 사비에트가 루이나의 위성을 겨냥해 만든 무기의 파편이 40년 뒤 실제로 루이나 위성의 궤도를 바꾸게 만든 셈이다.
특히 고도 1,000km 이상에서 이루어진 시험의 파편은 대기 저항이 거의 없어 수백 년 동안 궤도에 남을 것으로 예측된다. 2026년 현재에도 약 190개가 추적 목록에 남아 있으며, 2009년에는 루이나의 기상위성 1기가 1971년 5월 시험에서 나온 파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회피 기동을 한 일이 있었다. 사비에트가 루이나의 위성을 겨냥해 만든 무기의 파편이 40년 뒤 실제로 루이나 위성의 궤도를 바꾸게 만든 셈이다.
12. 평가 [편집]
야스트레브는 기술적으로 투박한 무기였다. 표적 하나를 잡기 위해 1.4t이 넘는 요격체를 궤도에 올려야 했고, 요격까지 몇 시간이 걸렸으며, 상대가 발사를 알아채고 피할 여유를 줬다. 그럼에도 야스트레브는 궤도에 있는 위성이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증명했고, 이 사실은 이후 루이나와 사비에트 양국이 궤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 놓았다.
역설적으로 야스트레브의 가장 큰 의미는 한 번도 실전에서 쓰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는 평가가 많다. 사비에트는 루이나의 위성을 언제든 부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고, 루이나는 그것을 알고 대비했으며, 양쪽 모두 그 능력이 실제로 쓰이는 순간 전쟁이 궤도에서 지상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역사학자 마들렌 R. 고티에는 야스트레브를 두고 "20년 동안 발사대 위에 서 있었다는 것만으로 임무를 다한 무기"라고 평가했다.
역설적으로 야스트레브의 가장 큰 의미는 한 번도 실전에서 쓰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는 평가가 많다. 사비에트는 루이나의 위성을 언제든 부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고, 루이나는 그것을 알고 대비했으며, 양쪽 모두 그 능력이 실제로 쓰이는 순간 전쟁이 궤도에서 지상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역사학자 마들렌 R. 고티에는 야스트레브를 두고 "20년 동안 발사대 위에 서 있었다는 것만으로 임무를 다한 무기"라고 평가했다.
13. 여담 [편집]
- 사르다 발사장에서 야스트레브를 발사한 제12발사대는 1961년 사르다 발사장 참사가 일어난 자리에 재건된 발사대다. 발사장 사람들은 이 발사대에서 야스트레브를 쏠 때마다 발사대 옆에 보존된 휘어진 철조망 앞에 모자를 벗었다고 한다.
- 첫 요격 성공 당시 표적 위성의 일련번호는 「궤도 연구 위성 211호」, 요격체는 「212호」였다. 표적이 먼저 발사되고 하루 이틀 뒤 연속된 번호의 위성이 같은 궤도면으로 발사된 다음, 몇 시간 뒤 둘 다 추적 목록에서 사라지는 패턴은 이후 루이나 정보당국이 야스트레브 시험을 식별하는 가장 확실한 징후가 되었다.
- 계측형 표적 위성 가운데 파편이 비껴가 살아남은 1기는 1970년대에 모두 세 차례의 시험에서 표적으로 쓰였다. 궤도방위군 내에서는 이 표적을 '불사조'라고 불렀다.
- 스테파노프는 회고록에서 야스트레브를 자신이 만든 무기 가운데 "유일하게 쓰이지 않기를 바라며 만든 것"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같은 책의 다른 장에서는 메치와 크레포스트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남겨, 이 대목의 진정성을 두고 해석이 갈린다.
14. 관련 문서 [편집]
[1] 이 기능 덕분에 야스트레브는 표적에 접근해 관측만 하고 파괴하지 않는 '사찰' 임무도 이론상 수행할 수 있었다. 루이나가 1984년 정지궤도 위기 당시 사비에트 위성의 접근을 요격 준비와 구별하지 못한 배경에는 이러한 이중 기능에 대한 인식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