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콘스탄티노폴 공화국 República de Constantinopól Republic of Constantinopo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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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기 | 문장 | ||||||||||||||||||||||||||||||||||||||
PLVS VLTRA 보다 더 멀리[과거] | |||||||||||||||||||||||||||||||||||||||
상징 | |||||||||||||||||||||||||||||||||||||||
국가 | |||||||||||||||||||||||||||||||||||||||
국화 | 양귀비[과거] | ||||||||||||||||||||||||||||||||||||||
국조 | 검독수리[과거] | ||||||||||||||||||||||||||||||||||||||
역사 | |||||||||||||||||||||||||||||||||||||||
1945년 빌베른으로부터 독립 1956년 에우프로야 스타투드라 집권 1979년 인민혁명정부 수립 1982년 루이나군 개입 현재 무정부 상태, 루이나 보호령 | |||||||||||||||||||||||||||||||||||||||
수도 | 최대도시 | ||||||||||||||||||||||||||||||||||||||
콘스탄티노폴 | |||||||||||||||||||||||||||||||||||||||
면적 | |||||||||||||||||||||||||||||||||||||||
약 24,000㎢ (측정 불가) | |||||||||||||||||||||||||||||||||||||||
인문 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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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 행정구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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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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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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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LD (국가 코드 최상위 도메인) | |||||||||||||||||||||||||||||||||||||||
.ct (루이나에 의해 차단됨) | |||||||||||||||||||||||||||||||||||||||
국가 코드 | |||||||||||||||||||||||||||||||||||||||
CTP | |||||||||||||||||||||||||||||||||||||||
국제 전화 코드 | |||||||||||||||||||||||||||||||||||||||
+63 (일부 지역만 통신 가능) | |||||||||||||||||||||||||||||||||||||||
단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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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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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상징 [편집]
상징물은 사실상 부재.
무정부 상태이기에 루이나 국기와 과거 빌베른령 콘스탄티니예 당시의 국기를 비공식적으로 혼용중이다.
이외 여러 자경단과 기업의 로고등이 이지역과 거주민에 관련된 조약등서 상징물로 이용된다.[7]
이외 여러 자경단과 기업의 로고등이 이지역과 거주민에 관련된 조약등서 상징물로 이용된다.[7]
3. 역사 [편집]
콘스탄티노폴의 역사는 원래 빌베른의 해외영토이자 고위 귀족층의 휴양지였다. 한때는 ‘바다 위의 궁정’이라 불리며, 왕족과 상류층이 여름을 보내던 별궁과 정원이 언덕마다 들어서 있었다. [8]
로마제국이 랜드해협에서 철수하고 얼마 안가 멸망한뒤 무주공산이된 랜드해협 제2 대도시이던 콘스탄티노폴을 빌베른이 병합, 유럽-랜드해협무역의 거점으로 작용하며 이가 제1 제국 멸망후로도 공화국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빌베른 본국의 장거리 통치는 효율이 떨어졌고, 특히 공화국 전환 200년대에 제1차 랜드대전쟁 전후 식민지 확장에 실패하면서 콘스탄티노폴에 대한 행정적·군사적 통제는 급속히 느슨해졌다. [9]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폴은 자연스럽게 자치기반을 형성하게 되었고, 곧 독립적인 도시국가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초기에는 항만 상인 연맹과 무기한으로 선출된 집정관이 도시를 운영했으며, 이들은 빌베른 왕실과의 ‘우호적 분리’를 천명하였으나 통치 효율을 위해 현 델라웨어 지역을 빌베른이 포기한후 육로가 끊기며 언어외엔 빌베른의 흔적이 급격히 퇴색된다. 이 시기의 콘스탄티노폴은 범유럽 무역 중심지로 급부상했고, 랜드해의 상업 루트를 장악하면서 급속한 번영을 이루었다. [10]
그러나 이런 연합체계에하의 호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11]
왕정파는 구 왕실의 먼 일족을 내세워 왕정복고를 주장하며 해상 귀족 및 일부 도시 귀족 세력을 등에 업고 저항했으나, 군대의 다수를 장악한 공화주의파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왕당파는 패주[12]. 이로써 콘스탄티노폴은 명목상 ‘공화국’의 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공화정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제2대 수상 에우프로야 스타투드라(1902–1959)는 집권 초기에 정치깡패 조직인 서번트 갱과 정부 내 비밀경찰을 동원해 야당과 언론을 숙청하고, 사실상 일당독재 체제를 확립한다. [13]
스타투드라 정권은 외국 자본과의 유착을 통해 단기적인 경제 성장을 도모했지만, 이윤은 소수에게 집중되었고 실업률과 빈곤율은 점차 상승했다. 이에 따라 민중의 불만이 극에 달했고, 결국 1959년 ‘신보석운동(New Jewel Movement)’이라 불리는 시민혁명 세력이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대통령궁을 점령하고 스타투드라 및 그의 측근들을 처형하거나 추방하면서 정권을 전복시켰다.
신정부를 이끈 모리스 비숍(Maurice Bishop)은 수상에 취임하여 '콘스탄티노폴 인민 혁명정부'를 선포한다. 그는 곧바로 헌법을 정지시키고 기존 의회를 해산했으며, 영국식 민주주의를 "식민 유산의 잔재"라 비판하면서 새로운 국가체제를 구축한다. [14]혁명정부는 상공회의소 설립, 무상의료, 공교육 확대, 관광산업 개발 등 복지 중심의 개혁을 추진했으며, 이에 따라 초기에는 높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주변국들은 이를 ‘불법 정권’으로 규정하고 외교적 승인에 난색을 보였다.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만이 끝까지 승인하지 않았고, 특히 루이나는 스타투드라 시기부터 이어져온 자본 투자 관계 때문에 비숍 정부에 적대적이었다. [15]
1960년대 중반, 혁명정부는 주변국인 체르드 공화국에 대한 비판 성명을 내며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라 마베라 지역에서 좌파 정권이 붕괴되자 콘스탄티노폴은 고립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와중에 정부 내부의 분열도 심화되었다. 부수상이던 버나드 코드(Bernard Coard)는 비숍의 개혁을 ‘반(半)혁명적 타협’이라 비판하며, 보다 급진적인 공산주의 정책을 요구했다. 결국 1969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폴 인민군 사령관 허드슨 오스틴(Hudson Austin)은 버나드 코드의 지지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고, 모리스 비숍 수상은 감금되었다. 루이나는 체르드 정부에 비숍 수상의 구출을 요청했지만, 10월 19일, 비숍 수상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민 봉기가 발발했고, 이에 대응한 군은 비숍 및 각료들을 총살하며 사태를 진압했다.
버나드 코드와 허드슨 오스틴은 곧 '혁명군사 평의회'를 구성하고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폴 스쿤(Paul Scoon) 국회의장을 체포하고 시민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에 대해 루이나는 긴급 특별상황팀을 구성하고, 10월 20일 침공계획을 리처드 잭슨 대통령에게 제출했고, 대통령의 승인을 받은 루이나 정부는 본격적인 무력개입에 나서게 된다. 한편, 22일부터 랜드해협 공동체의 긴급회의가 소집되었으나, 사비에트와 소련 등의 공산권 국가들은 평화유지군 파병에 반대했으며, 이에 회의는 결렬되었다. 결국 1970년 5월 8일 오전 5시, 루이나는 공식적인 선전포고 없이 콘스탄티노폴에 대한 침공을 개시한다. 명분은 “민주주의 수호”와 “자국민 보호”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루이나 자본의 국외탈취와 정치적 영향력 확대가 그 중심에 있었다는 평가가 많다. [16]
콘스탄티노폴 침공은 3주간의 교전 끝에 루이나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혁명정부는 해산되고,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에 ‘민정이양위원회’를 설치하여 사실상 보호령 체제를 가동하게 된다.하지만 그건 단지 ‘전투의 종료’였을 뿐 ‘전쟁의 종결’은 아니었다. 기동전 중심의 작전으로 도시의 요충지들을 선점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점령 이후의 병력은 형편없이 부족했고 전후 재건을 위한 계획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전기와 수도, 식량 배급이 끊긴 상황에서 방치되었고, 루이나는 그 상태를 ‘자치의 시작’이라며 콘스탄티노폴 자치정부를 급조해버렸다. [17]
이 막장스러운 전후 처리는 곧바로 시민 저항을 낳았다. 도심에 몰려든 저항세력은 루이나군이 퇴각한 구역을 중심으로 무장했고, 특히 수복되지 않은 외곽 지역은 사실상 국경이 무너진 무주공산 상태가 되었다. 온갖 이국의 깡패, 범죄조직, 무장세력들이 국경 없는 콘스탄티노폴로 유입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유고랜드 출신 갱스터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가 이끌던 ‘유일신과 성전(Jama'at al-Tawhid wal-Jihad)’이 있었으며, 이들은 곧 알카에다와 연계되어 지하디스트 수용·양성소로 도시를 활용하게 된다. [18]이들 세력은 단순히 루이나를 적대하는 것을 넘어서, 콘스탄티노폴 내의 각 무장세력들을 교묘히 충돌시키는 전략을 펼쳤고, 결국 루이나는 지속적인 병력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콘스탄티노폴에 대한 정보 작전과 국지전을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매년 수백 명의 루이나군 장병과 민간인이 사망하는 상태가 1970년까지 지속되었고, 결국 루이나 정부는 철군을 단행한다. 이는 명백한 실패였다.
루이나군이 철수하자마자, 콘스탄티노폴 자치정부는 급속히 무너졌다. 행정 체계는 유지되지 않았고, 경찰과 군부는 장비를 그대로 들고 탈영하거나 갱단에 합류했다. 그 결과 도시에는 수십 개의 무장세력, 마피아 조직, 민병대, 자경단이 등장했고, 그들 사이의 충돌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루이나가 두고 간 M67 무반동포, FN-FAL 소총, 박격포 등 중화기들이 암시장에 흘러들었고, 일부 민병대는 중대급 화력을 보유하며 도시의 시가지 곳곳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19]오로지 민간인만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전기와 수도는 끊긴 지 오래였고, 병원은 무장조직이 병사 치료를 위한 사병 클리닉으로 점거했다. 아이들은 학교 대신 갱단의 아지트에서 AK-47을 조립하는 법을 배우며 자랐고, 하루 세 끼는커녕 하루 한 끼라도 얻어먹으면 ‘운 좋은 날’로 여겨졌다.
현재 콘스탄티노폴은 명목상으로만 자치정부가 있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도시 구역이 군벌 체제로 나뉜 무정부 사회였다. 각 세력은 자신들의 구역을 ‘해방구’라 칭하며 징집, 검문, 납치, 마약 밀매, 인신매매, 무기 거래 등을 일삼았고, 도시는 사실상 암시장과 전투로 돌아가는 구조가 되었다. 유엔은 평화유지군 파견을 논의했지만, 무장세력의 수가 너무 많고 목표가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개입을 포기했고, 루이나도 더 이상 대규모 개입은 하지 않았다. [20]
이러한 내전 상황은 1980년대 내내 지속되었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루이나는 결국 ‘자치권 회복’이라는 형식적 선언을 발표하며 도시에서 손을 떼버렸다. 그러나 이때의 자치란 말 그대로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도시의 통치 기능은 사실상 해체되었고, 유일하게 기능하는 것은 각 구역별 ‘보안연합’이라는 이름의 민병대였으며, 이들조차 치안보다는 수익 기반 확장에 주력했다. 현재는 루이나인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플라자 그룹이 보호하고 있는 것 외에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에 더이상 행정력을 투입하고있지 않다.
로마제국이 랜드해협에서 철수하고 얼마 안가 멸망한뒤 무주공산이된 랜드해협 제2 대도시이던 콘스탄티노폴을 빌베른이 병합, 유럽-랜드해협무역의 거점으로 작용하며 이가 제1 제국 멸망후로도 공화국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빌베른 본국의 장거리 통치는 효율이 떨어졌고, 특히 공화국 전환 200년대에 제1차 랜드대전쟁 전후 식민지 확장에 실패하면서 콘스탄티노폴에 대한 행정적·군사적 통제는 급속히 느슨해졌다. [9]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폴은 자연스럽게 자치기반을 형성하게 되었고, 곧 독립적인 도시국가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초기에는 항만 상인 연맹과 무기한으로 선출된 집정관이 도시를 운영했으며, 이들은 빌베른 왕실과의 ‘우호적 분리’를 천명하였으나 통치 효율을 위해 현 델라웨어 지역을 빌베른이 포기한후 육로가 끊기며 언어외엔 빌베른의 흔적이 급격히 퇴색된다. 이 시기의 콘스탄티노폴은 범유럽 무역 중심지로 급부상했고, 랜드해의 상업 루트를 장악하면서 급속한 번영을 이루었다. [10]
그러나 이런 연합체계에하의 호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11]
왕정파는 구 왕실의 먼 일족을 내세워 왕정복고를 주장하며 해상 귀족 및 일부 도시 귀족 세력을 등에 업고 저항했으나, 군대의 다수를 장악한 공화주의파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왕당파는 패주[12]. 이로써 콘스탄티노폴은 명목상 ‘공화국’의 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공화정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제2대 수상 에우프로야 스타투드라(1902–1959)는 집권 초기에 정치깡패 조직인 서번트 갱과 정부 내 비밀경찰을 동원해 야당과 언론을 숙청하고, 사실상 일당독재 체제를 확립한다. [13]
스타투드라 정권은 외국 자본과의 유착을 통해 단기적인 경제 성장을 도모했지만, 이윤은 소수에게 집중되었고 실업률과 빈곤율은 점차 상승했다. 이에 따라 민중의 불만이 극에 달했고, 결국 1959년 ‘신보석운동(New Jewel Movement)’이라 불리는 시민혁명 세력이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대통령궁을 점령하고 스타투드라 및 그의 측근들을 처형하거나 추방하면서 정권을 전복시켰다.
신정부를 이끈 모리스 비숍(Maurice Bishop)은 수상에 취임하여 '콘스탄티노폴 인민 혁명정부'를 선포한다. 그는 곧바로 헌법을 정지시키고 기존 의회를 해산했으며, 영국식 민주주의를 "식민 유산의 잔재"라 비판하면서 새로운 국가체제를 구축한다. [14]혁명정부는 상공회의소 설립, 무상의료, 공교육 확대, 관광산업 개발 등 복지 중심의 개혁을 추진했으며, 이에 따라 초기에는 높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주변국들은 이를 ‘불법 정권’으로 규정하고 외교적 승인에 난색을 보였다.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만이 끝까지 승인하지 않았고, 특히 루이나는 스타투드라 시기부터 이어져온 자본 투자 관계 때문에 비숍 정부에 적대적이었다. [15]
1960년대 중반, 혁명정부는 주변국인 체르드 공화국에 대한 비판 성명을 내며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라 마베라 지역에서 좌파 정권이 붕괴되자 콘스탄티노폴은 고립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와중에 정부 내부의 분열도 심화되었다. 부수상이던 버나드 코드(Bernard Coard)는 비숍의 개혁을 ‘반(半)혁명적 타협’이라 비판하며, 보다 급진적인 공산주의 정책을 요구했다. 결국 1969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폴 인민군 사령관 허드슨 오스틴(Hudson Austin)은 버나드 코드의 지지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고, 모리스 비숍 수상은 감금되었다. 루이나는 체르드 정부에 비숍 수상의 구출을 요청했지만, 10월 19일, 비숍 수상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민 봉기가 발발했고, 이에 대응한 군은 비숍 및 각료들을 총살하며 사태를 진압했다.
버나드 코드와 허드슨 오스틴은 곧 '혁명군사 평의회'를 구성하고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폴 스쿤(Paul Scoon) 국회의장을 체포하고 시민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에 대해 루이나는 긴급 특별상황팀을 구성하고, 10월 20일 침공계획을 리처드 잭슨 대통령에게 제출했고, 대통령의 승인을 받은 루이나 정부는 본격적인 무력개입에 나서게 된다. 한편, 22일부터 랜드해협 공동체의 긴급회의가 소집되었으나, 사비에트와 소련 등의 공산권 국가들은 평화유지군 파병에 반대했으며, 이에 회의는 결렬되었다. 결국 1970년 5월 8일 오전 5시, 루이나는 공식적인 선전포고 없이 콘스탄티노폴에 대한 침공을 개시한다. 명분은 “민주주의 수호”와 “자국민 보호”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루이나 자본의 국외탈취와 정치적 영향력 확대가 그 중심에 있었다는 평가가 많다. [16]
콘스탄티노폴 침공은 3주간의 교전 끝에 루이나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혁명정부는 해산되고,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에 ‘민정이양위원회’를 설치하여 사실상 보호령 체제를 가동하게 된다.하지만 그건 단지 ‘전투의 종료’였을 뿐 ‘전쟁의 종결’은 아니었다. 기동전 중심의 작전으로 도시의 요충지들을 선점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점령 이후의 병력은 형편없이 부족했고 전후 재건을 위한 계획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전기와 수도, 식량 배급이 끊긴 상황에서 방치되었고, 루이나는 그 상태를 ‘자치의 시작’이라며 콘스탄티노폴 자치정부를 급조해버렸다. [17]
이 막장스러운 전후 처리는 곧바로 시민 저항을 낳았다. 도심에 몰려든 저항세력은 루이나군이 퇴각한 구역을 중심으로 무장했고, 특히 수복되지 않은 외곽 지역은 사실상 국경이 무너진 무주공산 상태가 되었다. 온갖 이국의 깡패, 범죄조직, 무장세력들이 국경 없는 콘스탄티노폴로 유입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유고랜드 출신 갱스터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가 이끌던 ‘유일신과 성전(Jama'at al-Tawhid wal-Jihad)’이 있었으며, 이들은 곧 알카에다와 연계되어 지하디스트 수용·양성소로 도시를 활용하게 된다. [18]이들 세력은 단순히 루이나를 적대하는 것을 넘어서, 콘스탄티노폴 내의 각 무장세력들을 교묘히 충돌시키는 전략을 펼쳤고, 결국 루이나는 지속적인 병력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콘스탄티노폴에 대한 정보 작전과 국지전을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매년 수백 명의 루이나군 장병과 민간인이 사망하는 상태가 1970년까지 지속되었고, 결국 루이나 정부는 철군을 단행한다. 이는 명백한 실패였다.
루이나군이 철수하자마자, 콘스탄티노폴 자치정부는 급속히 무너졌다. 행정 체계는 유지되지 않았고, 경찰과 군부는 장비를 그대로 들고 탈영하거나 갱단에 합류했다. 그 결과 도시에는 수십 개의 무장세력, 마피아 조직, 민병대, 자경단이 등장했고, 그들 사이의 충돌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루이나가 두고 간 M67 무반동포, FN-FAL 소총, 박격포 등 중화기들이 암시장에 흘러들었고, 일부 민병대는 중대급 화력을 보유하며 도시의 시가지 곳곳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19]오로지 민간인만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전기와 수도는 끊긴 지 오래였고, 병원은 무장조직이 병사 치료를 위한 사병 클리닉으로 점거했다. 아이들은 학교 대신 갱단의 아지트에서 AK-47을 조립하는 법을 배우며 자랐고, 하루 세 끼는커녕 하루 한 끼라도 얻어먹으면 ‘운 좋은 날’로 여겨졌다.
현재 콘스탄티노폴은 명목상으로만 자치정부가 있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도시 구역이 군벌 체제로 나뉜 무정부 사회였다. 각 세력은 자신들의 구역을 ‘해방구’라 칭하며 징집, 검문, 납치, 마약 밀매, 인신매매, 무기 거래 등을 일삼았고, 도시는 사실상 암시장과 전투로 돌아가는 구조가 되었다. 유엔은 평화유지군 파견을 논의했지만, 무장세력의 수가 너무 많고 목표가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개입을 포기했고, 루이나도 더 이상 대규모 개입은 하지 않았다. [20]
이러한 내전 상황은 1980년대 내내 지속되었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루이나는 결국 ‘자치권 회복’이라는 형식적 선언을 발표하며 도시에서 손을 떼버렸다. 그러나 이때의 자치란 말 그대로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도시의 통치 기능은 사실상 해체되었고, 유일하게 기능하는 것은 각 구역별 ‘보안연합’이라는 이름의 민병대였으며, 이들조차 치안보다는 수익 기반 확장에 주력했다. 현재는 루이나인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플라자 그룹이 보호하고 있는 것 외에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에 더이상 행정력을 투입하고있지 않다.
4. 자연환경 [편집]
남으로는 랜드본해, 북으로는 포르틸락해협, 동서륙지로 각각 델라웨어, 루이나와 접한다.
사료, 연구상 지중해성 기후였으나 1980년대 후론 자체적인 환경오염과 이로 초래된 랜드해협 전체의 기후이변(무려 루이나 보호령화 후로 현 델라웨어가 사막이 되고 루이나와 플로렌시아의 평균기온이 2도 상승, 랜드해협 북부와 서부의 기준선이 남하(콜마르시-체르드 경계의 기온차가 매우 심해졌다)하고 서부와 동부의 습도, 강수량차가 극단화 되었다, 그것도 1970-1990년대라는 짧은 시기에)으로 현재는 기후를 정의하기힘든 항시 운무-불우와 극단적계절차의 특징을 보이는 불경지가 된 상태이다.
사료, 연구상 지중해성 기후였으나 1980년대 후론 자체적인 환경오염과 이로 초래된 랜드해협 전체의 기후이변(무려 루이나 보호령화 후로 현 델라웨어가 사막이 되고 루이나와 플로렌시아의 평균기온이 2도 상승, 랜드해협 북부와 서부의 기준선이 남하(콜마르시-체르드 경계의 기온차가 매우 심해졌다)하고 서부와 동부의 습도, 강수량차가 극단화 되었다, 그것도 1970-1990년대라는 짧은 시기에)으로 현재는 기후를 정의하기힘든 항시 운무-불우와 극단적계절차의 특징을 보이는 불경지가 된 상태이다.
5. 인문환경 [편집]
5.1. 인문개요 [편집]
독립 이전과 그 이후의 문화차가 상당히 심하며 이전의 문화는 언어를 제외하면 상당부분 소실되었기에 본문서에선 1970-2020년대의 문화만 다룬다.
5.2. 언어 [편집]
5.3. 식문화 [편집]
5.4. 도시(주거) [편집]
5.5. 대중문화 [편집]
1997년, 메디센트레 캄피톨랴 투 오피시알레 티아 글로발 이 콘스탄티녜 (빌베른 제1 라지오-테레비방송국)의 철수와 루이나가 정보화사회대비위공서시초고속무선통신망시험설치실험(AOL시대의 종막을 앞두고 각 산업분야의 기술대기업들과 인터넷검열, 관련법마련을 위한 각국의 연구소의 지원을 받은 대규모 실험이였다)을 시행하며 빌베른 내수를 위한 대중매체가 성장할 기회조차 사라졌기에 인스타그램등의 국제적인 사회매체망서비스의 데이타를 제외하면 연구와 실태조사 결과가 매우 신뢰하기 어렵다.
5.5.1. 음악 [편집]
5.5.2. 빌베른령당시문화 [편집]
5.6. 기타 [편집]
6. 정치 [편집]
7. 외교 [편집]
8. 경제 [편집]
9. 군사 [편집]
10. 여담 [편집]
[과거] 1.1 1.2 1.3 1.4 [5] 원어 발음은 포르틸락이지만, 루이나가 콘스탄티노폴을 지배하면서 현재의 공용표기인 포틸락스(Portilax)로 변경되었다.[6] 지역이라 표기됨은 독립후 공식정부가 들어서지 못하고 무정부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7] 현재 일부 지역의 방어와 치안유지를 맡는 플라자 그룹의 로고가 주로 사용된다.[8] 현재도 도심 외곽에는 당시의 유적이 일부 보존되어 있어 관광 명소로 활용된다.[9] 당시 빌베른 해군은 랜드해 전투에서 사실상 괴멸했고, 무역선 보호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다.[10] 특히 금융업과 해상보험업에서의 독자적 규제가 자본을 끌어들이는 주요 요인이었다. 또한 지정학적 이점을 이용하여 무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11] 말은 연합이지, 매주 다투고 다음주엔 같이 술 마시는 수준의 유연한 체제였다.[12] 사실상 전멸했고 일부는 루이나나 체르드로 망명함[13] 그는 당시 콘스탄티노폴의 경찰청장 임명권과 병력 운영권을 직접 장악했으며, 재임 중 시민 실종건만 4천 건이 넘는다.[14] 당시 발표된 임시헌장에는 “민주주의란 다수가 굶는 것에 투표하는 체제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15] 루이나의 광산회사인 플라자 그룹은 콘스탄티노폴 남부의 희귀광물 채굴권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해당 광산은 곧 국유화 대상이 되었다.[16] 이후 공개된 비밀 외교 문서에 따르면, 루이나 외무부는 콘스탄티노폴 남항구의 통제권을 ‘전략적 안보지대’로 명시해놓고 있었다.[17] 해당 정부는 루이나 외교안보국 직속의 임시통치위원회가 관할했으며, 초대 행정관은 벨포르 출신 전직 외교관이었다.[18] 훗날 ISIL로 이어지는 최초의 도시기반 전투조직이 여기서 탄생했다는 설도 있다.[19] 이 무기들은 루이나군이 “임시 보급창고”에 남기고 간 것이며, 철수 직후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20] 다만, 이후에도 루이나 정보기관들은 콘스탄티노폴 내에 잔류하며 비공식 작전을 수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