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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조
2.1. 기록 이전의 초상 현상
3. 역사
3.1. 최초의 공식 관측 — 1921년 브라질 사건3.2. 각국 정부의 반응 — 1920~1930년대3.3. 2차 세계대전과 강제 실험 — 1930~1940년대3.4. 냉전기의 군비 경쟁 — 1950~1980년대
3.4.1. 레벨 6 시프트 계획3.4.2. 유폭 실험
3.5. 내부 균열3.6. 냉전의 실전화와 검은 지진 — 1990년대3.7. 최초의 국제 접촉 — 2000년대3.8. UBATM 창설 — 2010년대
4. UBATM
4.1. 개요 및 기능4.2. 한계 및 비판
5. 관련 문서


1. 개요 [편집]

초상사(超象史)는 인류가 신비(神秘) 현상을 최초로 공식 관측한 1921년부터 현재까지의 초상 관련 역사를 총칭하는 용어다.

2. 전조 [편집]

2.1. 기록 이전의 초상 현상 [편집]

1921년의 사건이 최초로 공식 관측된 초상이었을 뿐, 인류의 역사에는 훨씬 이전부터 신비의 흔적이 산재해 있었다. 초상 연구자들이 이를 소급 분석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이후의 일이지만, 과거의 사료들을 다시 들여다보면 놀랍도록 일관된 패턴이 반복된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중세 유럽에서 기적이라 불렸던 사건들 중 상당수는 교회가 성인 시성(諡聖)의 근거로 삼은 목격담에 기반하고 있었다.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수도사, 강물이 갈라진 것을 목격했다는 군중, 손을 대지 않고 병자를 낫게 했다는 사제들이 그 예다. 당대의 기록은 이를 신의 의지로 설명했지만, 훗날 초상 연구자들은 이 중 일부가 능력자의 자연 발현, 즉 원석의 초기 사례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류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의 생존자 증언들 중에는 무너지는 잔해가 특정 구역을 빗겨 갔다거나, 화염 속에서 수십 명이 멀쩡히 살아 나왔다는 기록이 섞여 있다. 1940년대 포르투갈 정보부가 초상 연구를 시작하면서 이 기록들을 재검토했고, 당시 구출된 생존자 중 한 명의 행적이 이후 수십 년 동안 어떤 사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도 설명되지 않는 사례들이 보고되었다. 1917년 서부전선에서 한 독일군 소대 전체가 참호 안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사건, 1918년 이탈리아 전선에서 포격이 한 병사를 중심으로 반경 수 미터를 비켜 간 것으로 보이는 기록 등이 이후 초상사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사건들은 전쟁 상황의 혼란 속에서 모두 기록 누락이나 전투 혼선으로 처리되었다.

이외에도 고대중국, 중동, 랜드해협 동부등 고대부터 기록물이 발달한 지역서 여러차례 신비와 관련된것으로 추정되는 현상들이 기록이 되어왔다.

3. 역사 [편집]

3.1. 최초의 공식 관측 — 1921년 브라질 사건 [편집]

1921년 3월, 브라질 북동부의 작은 해안 마을 상프란시스쿠 두 술에서 152명이 사흘 만에 사라졌다. 일부는 흔적도 없이 소멸했고, 일부는 신체의 일부만이 남아 발견되었다. 브라질 연방 경찰은 처음에 전염병을 의심했고, 이후에는 집단 실종 사건으로 처리하려 했다. 그러나 현장에 파견된 조사관들이 맞닥뜨린 것은 어떤 기존의 범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건물 구조물은 멀쩡했고, 토양에는 어떤 독성 물질도 검출되지 않았으며, 남아 있는 신체 부위들은 절단의 흔적이 아니라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경계면에서 깔끔하게 끝나 있었다.

이 사건은 공식적으로는 원인 불명의 집단 실종으로 기록되었고 언론에도 제한적으로만 보도되었다. 그러나 브라질 내무부 산하의 한 소규모 조사팀은 극비로 조사를 계속했다. 이들이 마을의 생존자들을 면담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증언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마을 전체가 무언가에 대해 집단적인 두려움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중심에는 한 명의 소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조사팀은 그녀를 결코 찾지 못했다. 마을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도 아무것도 세워지지 않았다.

브라질 내무부의 해당 파일은 1923년 국가 안전 문서 1류로 재분류되어 봉인되었다. 이 작은 조사팀의 보고서가 이후 전 세계 초상 연구의 씨앗이 된다는 사실을 당시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3.2. 각국 정부의 반응 — 1920~1930년대 [편집]

브라질 조사팀의 보고서는 외교 채널을 통해 몇몇 국가의 정보기관에 비공식적으로 전달되었다. 반응은 나라마다 달랐다.

미국은 처음에 회의적이었다. 1923년 보고서를 접한 국무부 담당자는 이를 남미 지역 특유의 과장된 민간 전설로 치부했다. 그러나 국방부 내의 한 소수 집단은 달랐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브라질에 조사원을 파견했고, 1925년 내부 메모를 통해 현상의 진위와 무관하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군사적 함의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훗날 미국 초상 연구 기관의 전신이 되는 섹션 그레이(Section Gray)의 출발점이었다.

영국은 보다 신속하게 반응했다. MI6 산하의 비공개 분과가 1924년 브라질 사건의 물리적 증거 수집에 착수했고, 1927년에는 이미 독자적인 이론화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영국 연구자들이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은 군사적 활용 가능성이 아니라 위험성의 통제였다. 당시 내부 보고서에는 이 현상이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대중에게 알려질 경우 사회 질서의 붕괴는 불가피하다는 문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소련은 가장 적극적이었다. 1920년대 중반 소련 과학 아카데미 내부에 비밀 분과가 설립되었고, 이들은 초상을 유물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려 했다. 신비를 신이나 초자연의 산물이 아닌 아직 해명되지 않은 물질적 메커니즘으로 보는 시각이었다. 이 접근은 소련 이데올로기와 잘 맞아떨어졌고, 덕분에 소련의 초상 연구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국가 지원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일본 역시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자적인 연구에 착수했다. 만주 점령 이후 일본 육군 내 특수 부서는 점령지에서 수집한 이상 현상 관련 목격담을 분류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초상에 접근하는 방식은 처음부터 철저히 군사적이었다.

이 시기 어느 나라도 서로가 같은 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각국의 정보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고, 그 결과 같은 현상에 대해 전혀 다른 이론과 전혀 다른 윤리 기준이 병렬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3.3. 2차 세계대전과 강제 실험 — 1930~1940년대 [편집]

2차 세계대전은 초상 연구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나치 독일은 1934년부터 아넨에르베(Ahnenerbe) 산하에 초상 관련 비밀 프로젝트를 운영했다. 이들은 아리아 혈통에 신비 발현 능력이 집중된다는 이데올로기적 전제를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이 전제를 증명하기 위해 수용소 피수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 각성 실험을 자행했다. 전기 자극, 극한 환경 노출, 약물 투여를 동시에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수백 명의 피실험자가 사망했고, 각성에 성공한 경우는 극소수였으며, 그마저도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발현되어 시설 내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반복되었다. 나치의 초상 연구는 성과보다 피해가 훨씬 컸지만, 그 기록은 전쟁 이후 연합국에 의해 고스란히 수거되어 각국의 후속 연구에 활용되었다.

일본은 더욱 체계적으로 접근했다. 731부대와 병렬하여 만주에는 특기반이라는 이름의 별도 조직이 존재했다. 이들은 현지 주민과 전쟁 포로를 대상으로 신비 각성 가능성을 실험했고, 각성에 성공한 피실험자를 대상으로 능력의 발동 조건을 분석했다. 특기반의 연구 방법론은 나치보다 훨씬 정밀했고, 이들이 남긴 데이터는 전후 일본의 비밀 초상 연구 기관이 물려받게 된다.

연합국이라고 해서 손이 깨끗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 섹션 그레이는 1940년대 중반부터 자국 내 강제 수용된 일본계 미국인 집단 중 초상 발현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선별하여 비밀 시설로 이송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영국 역시 식민지 지역에서 수집한 이상 능력자 관련 정보를 바탕으로 아프리카와 인도 출신의 피실험자를 대상으로 한 관찰 실험을 진행했다는 기록이 내부 고발자를 통해 후대에 알려지게 된다.

소련은 이 시기에 가장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43년, 소련의 초상 연구팀은 특정 조건 하에서 능력 발현이 반복 재현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이들은 이것을 조건 반사의 확장이라는 파블로프식 언어로 표현했고, 이 틀 안에서 능력자의 훈련과 통제 방법론을 발전시켜나갔다. 1940년대 소련의 능력자 운용 능력은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앞서 있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세계는 원자폭탄이라는 새로운 공포와 동시에 아직 공개되지 않은 또 다른 공포를 품고 있었다.

3.4. 냉전기의 군비 경쟁 — 1950~1980년대 [편집]

냉전의 도래는 초상 연구에 새로운 차원의 긴박감을 불어넣었다.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 경쟁과 병행하여, 상대방이 초상 능력자를 군사 자산으로 운용하고 있다는 확신 아래 자국의 연구를 대폭 확장했다. 핵과 달리 초상의 경쟁은 그 존재 자체를 세상에 드러낼 수조차 없었다.

미국의 섹션 그레이는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SIGMA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비밀 프로젝트로 재편되었다. 전국에 분산된 능력자 원석의 탐지 및 등록, 자원자와 피강제 대상 양쪽을 포함한 인위적 각성 실험, 그리고 각성된 능력자의 능력을 군사 작전에 통합하는 교리 개발이 핵심이었다. SIGMA 프로그램은 외형상 특수 재능 지원 연구소라는 명칭으로 위장되어 있었고, 일부 참가자들은 자신이 무엇에 참여하는지조차 명확히 고지받지 못했다.

소련은 이 시기 이미 실전 운용 단계에 진입해 있었다. KGB 산하 제14국으로 불리는 조직이 능력자들을 정보 수집, 암살, 시설 파괴 등의 작전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고아원이나 국가 시설에서 어린 시절부터 선별되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연구 및 훈련 대상이 된 인물들이었다. 소련의 초상 전력은 1960년대에 최소 두 번의 서방 정보 시설에 대한 실제 작전에 투입된 것으로 훗날 파악되었다.

3.4.1. 레벨 6 시프트 계획 [편집]

이 시기 가장 악명 높은 프로젝트는 미국에서 1961년 시작된 레벨 6 시프트 계획이다. 연구자들은 신비 연구의 이론적 분류에서 최고 수준의 능력을 인위적으로 달성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실험하려 했다. 이를 위해 이미 각성된 능력자에게 약물, 전기 자극, 장기간의 감각 박탈을 동시에 가하는 복합 프로토콜이 시행되었다. 세 명의 피실험자 중 두 명은 실험 도중 사망했고, 한 명은 능력이 폭주하여 시설 일부를 파괴한 뒤 영구 격리되었다. 계획은 중단되었지만, 관련 데이터는 폐기되지 않았다.

3.4.2. 유폭 실험 [편집]

소련에서는 유폭 실험이라 불리는 프로젝트가 1966년부터 1971년까지 진행되었다. 능력자의 신비를 의도적으로 한계 이상으로 밀어붙여 임계 붕괴를 유도하고, 그 순간 발생하는 에너지 방출을 무기화하려는 시도였다. 실험은 수차례 성공적인 붕괴를 관찰하는 데 성공했으나, 1969년 시설 내부의 물리 법칙이 국소적으로 왜곡되는 현상이 발생하여 연구진 전체가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소련은 멈추지 않았다.

3.5. 내부 균열 [편집]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통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부 능력자들이 조직적으로 탈출을 시도하거나 자신이 겪은 사실을 외부에 알리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미국에서는 1968년 SIGMA 프로그램 출신의 한 능력자가 언론사에 접촉하려다 실종된 사건이 있었고, 소련에서는 1972년 제14국 소속 능력자가 서방으로의 망명을 시도했다. 이 사건들은 미소 양측 모두에게 새로운 종류의 공포를 심어주었다. 능력자는 무기인 동시에 스스로 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1974년 프랑스 남부의 한 비밀 시설에서는 내부 연구원 두 명이 시설 관련 문서 일부를 빼돌려 언론사에 전달하려 했다. 프랑스 정보기관이 인쇄 직전에 이를 막았지만, 이미 몇 부의 사전 교정쇄가 외부에 유출된 상태였다. 이 교정쇄들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유럽 초상 연구자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돌아다니는 문서가 된다.

같은 해 동독에서는 슈타지 산하 초상 연구 부서의 실험 중 피실험자의 능력이 예상치 못한 형태로 발현되면서 시설 외부에 가시적인 현상이 관측되었고, 인근 주민들이 이를 목격했다. 이 사건은 내부적으로 드레스덴 잡음이라고 기록되었다.

1980년대에는 미국의 5월 계획이 결정적인 실패로 끝났다. 특정 능력자의 신비 발동 방식을 분석하여 그 패턴을 다른 인간의 신경계에 강제로 이식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이 실험에서, 이식을 받은 피실험자들은 예외 없이 심각한 신경계 손상을 입었고 일부는 뇌사 상태에 빠졌다. 문제는 이 실험이 교도소 수형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었다. 관련 사실이 1988년 의회 내 일부 의원들에게 내부 경로로 알려지면서 SIGMA 프로그램 전체가 대규모 내부 감사를 받게 되었다. 프로그램은 외형상 축소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더욱 깊은 지하로 이동했을 뿐이었다.

이 시기 냉전의 진영 논리는 초상 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동서 양 진영의 위성국들은 각각 종주국의 연구 방법론을 이식받아 자국만의 초상 연구 시설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쿠바는 소련의 방법론을, 한국, 서독, 이탈리아는 미국의 SIGMA 체계를 기반으로 움직였다. 초상 연구는 이제 열강의 전유물이 아니라 냉전 질서 전체에 걸쳐 분산된 비밀 인프라가 되어 있었다.

3.6. 냉전의 실전화와 검은 지진 — 1990년대 [편집]

1990년대는 양 진영 모두 초상 전력의 실전화에 가장 근접한 시기였다. 소련은 1991년을 전후하여 제14국의 능력자 운용 규모를 대폭 확장했다. 내부 문건에 따르면 이 시기 소련이 작전 가능 상태로 분류한 능력자의 수는 공식 기록상 역대 최대였다. 이들 중 일부는 동유럽 위성국들의 친서방 성향 정치 운동을 억압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는 정황이 있으며, 일부 사건에서 목격된 설명 불가능한 현상들이 훗날 능력자 개입의 증거로 재분류되었다.

미국 역시 이 시기를 공세적으로 보냈다. SIGMA 프로그램의 후계 조직은 제3세계 국가들에서 자연 각성한 원석들을 선제적으로 포섭하기 위한 선취 작전을 전개했다.

1990년대를 가장 긴장감 있게 만든 것은 두 초강대국의 직접적인 충돌 가능성이었다. 1994년, 중동의 한 분쟁 지역에서 서방과 소련 계통의 능력자가 같은 작전 공간에서 맞닥뜨린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있었다. 현지에서 발생한 설명 불가능한 대규모 물리 현상은 공식적으로 지진으로 처리되었지만, 양국의 정보기관은 모두 이것이 능력자 간 충돌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은 이후 검은 지진이라는 비공식 명칭으로 초상 연구자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능력자를 전략 자산으로 직접 충돌시키는 것은 통제 가능한 군사 교전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물리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검은 지진은 경고하고 있었다. 양 진영 모두 이 사실을 인지했지만, 어느 쪽도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3.7. 최초의 국제 접촉 — 2000년대 [편집]

냉전이 지속되는 가운데, 처음으로 양 진영의 초상 연구 기관 사이에 비공식적인 접촉이 이루어졌다. 계기는 2002년 9월 동남아시아의 한 도시에서 발생한 대규모 초상 현상이었다. 반경 수백 미터의 구역 안에서 모든 전자기기가 동시에 오작동했고, 수십 명이 동일한 환각을 경험했다. 미국과 소련은 물론 영국, 일본, 중국, 프랑스의 초상 관련 기관이 각기 독립적으로 현장에 인원을 파견했고, 그 과정에서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

이 어색한 첫 조우는 적대적이라기보다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냉전의 적들이 같은 현상을 같은 방식으로 쫓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현상이 어느 한쪽의 소행이 아니라는 사실이 동시에 확인된 순간이었다. 이후 몇 년에 걸쳐 실무자 수준의 비공식 접촉이 이어졌고, 초상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념의 경계를 넘은 공통 언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처음으로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의 초상 연구 기관 실무 책임자들이 핀란드의 한 외딴 시설에서 비밀리에 회동했다. 이 자리에서 공유된 것은 정보보다 오히려 우려였다. 통제되지 않은 고위 능력자가 야기할 수 있는 피해는 전술핵에 준하거나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현재 어느 진영도 그런 사태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협력은 쉽지 않았다. 수십 년간 쌓인 불신과 더불어, 냉전 중에 초상 전력을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전략적 자살에 가깝다는 현실이 이후 수년간의 교착으로 이어졌다.

3.8. UBATM 창설 — 2010년대 [편집]

교착을 깨뜨린 것은 대화가 아니라 사건이었다. 2012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자연 각성한 원석이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능력을 발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인물은 어느 국가의 등록 체계에도 포함되지 않았고, 어느 진영의 포섭망에도 걸리지 않은 완전한 무소속이었다. 능력은 광역에 걸쳐 물리 법칙을 왜곡했고, 해당 지역의 위성 데이터는 사건이 발생한 72시간 동안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사망자는 수천 명에 달했다.

미국과 소련은 각각 독자 대응팀을 파견했고, 두 팀은 현장에서 마주쳤다. 어느 한쪽이 단독으로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현장 지휘관들은 본국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임시 협력을 결정했다. 이 임시 협력의 결과 보고서가 양국 수뇌부에 동시에 도달했을 때, 처음으로 구조적인 체계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정치 수준에서 공유되었다.

2013년, 최초의 다국적 초상 정보 공유 협정이 체결되었다. 냉전 중의 핵 군비 통제 협상과 마찬가지로 이 협정은 신뢰가 아니라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협정의 당사국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독일, 일본이었다. 협정의 핵심은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고위 능력자의 발생 시 상호 통보하고, 필요한 경우 공동 대응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수년간의 협상 끝에 능력자의 법적 지위와 기밀 연구에 대한 상호 사찰 범위를 두고 난항을 겪었으나, 결국 모두가 불만족스러운 타협에 이르렀다. 2018년 9월, UBATM(United Bureau for Anomalous Transcendence Management)이 공식 창설되었다. 본부는 오스트리아 빈에 설치되었고, 창설 당시 참여국은 38개국이었다. 냉전의 양 진영 국가들이 모두 이름을 올렸다는 점에서, 이 기구는 역사상 가장 이례적인 다자 협력 체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UBATM은 공식적으로는 미확인 물리 현상에 관한 국제 조사 협력 기구라는 명칭으로 등록되었다. 초상이라는 단어는 공식 문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4. UBATM [편집]

4.1. 개요 및 기능 [편집]

UBATM의 실질적인 기능은 세 축으로 나뉜다. 전 세계 초상 관련 사건의 공동 모니터링과 대응 조율, 각국의 능력자 등록 체계를 연결하는 공통 데이터베이스의 운용, 그리고 비윤리적 실험 및 능력자 학대에 관한 최소 기준의 설정과 상호 감시다. 세 번째 기능은 특히 상징적이었다. 수십 년간 국가들이 묵인하거나 자행한 일들에 대해, 적어도 명문화된 금지선을 긋겠다는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4.2. 한계 및 비판 [편집]

그러나 UBATM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냉전은 UBATM 창설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양 진영은 기구의 테두리 안에서 협력하는 동시에 테두리 밖에서 경쟁했다. 능력자 학대에 관한 최소 기준은 이미 관행이 된 방법론들에 비하면 너무 낮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과거 실험들에 대한 책임 문제는 소위원회에 넘겨진 채 지금도 실질적인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UBATM은 냉전이 낳은 기구였다. 적들이 공멸을 피하기 위해 만든 최소한의 공간. 1921년 브라질의 한 마을에서 시작된 공포가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돌아, 마침내 인류가 그것으로 서로를 죽이는 것을 잠시 멈추고 함께 바라보기로 합의한 자리에 도달한 것이었다. 냉전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한복판에, 아주 작고 불완전한 공통의 방이 하나 생겼다.

5. 관련 문서 [편집]

  • 신비(神秘)
  • 능력자
  • 예언자
  • UBATM
  • 프로젝트 KV
  • 란카르 사건
  • 검은 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