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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 | 2001년 1월 19일 금요일, 8시 42분~10시 6분[RNT] | |
발생 위치 | ||
벨포르 금융지구 인근 고층건물 밀집지역 | ||
오보레 공장지대[3] | ||
유형 | 하이재킹을 통한 자살 테러 | |
원인 | 이슬람 극단주의를 표방한 정치·종교적 보복 | |
테러 주동자 | 이브라힘 나쉬디(Ibrahim Nashdi) 노던에어 302/471편 탑승자 포함 총 17명 | |
테러 주동 세력 | 알후라 알자마아 (Al-Hura Al-Jama'a)[4] | |
피해 | 재산 피해 | 항공기 NE302, NE471 완파 세계무역센터 북탑·남탑 완전 붕괴 벨포르 증권거래소 업무 중단, 벨포르 금융지구 GDP 약 218억 달러 감소 항공·물류 산업 손실 추산 약 350억 달러 주요 외국 자산 약 8% 이탈 |
사망 | ||
부상 | 최소 7,000명 ~ 최대 12,000명 | |
분진 피해자 | 3,900명 ~ 60,000여 명[7] | |
여파 | ||
1. 개요 [편집]
1·19 테러(January 19 attacks)는 2001년 1월 19일에 루이나 벨포르에서 발생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 알후라 알자마아(Al-Hura Al-Jama'a)[8]가 자행한 하이재킹 및 자살 테러 사건이다.
알후라 알자마아 소속 테러범들은 민간 항공기 두 대를 납치하여 루이나 벨포르 시 중심부에 위치한 루이나 세계무역센터(BWT)에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테러를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세계무역센터 북탑과 남탑이 연쇄적으로 붕괴되고, 벨포르 금융지구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이 공격으로 2,908명이 사망하고 7,000명 이상이 부상하였으며, 루이나 역사상 최악의 인명 피해를 초래한 단일 테러 사건으로 기록된다. 수도 벨포르 한복판에 위치한 국가 상징적 시설이 붕괴되었다는 점에서, 루이나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 심각한 충격을 안겼다.
당시 리처드 엘스워스 대통령은 사건 발생 3일 뒤, 전국 생중계 특별 담화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알후라 알자마아 소속 테러범들은 민간 항공기 두 대를 납치하여 루이나 벨포르 시 중심부에 위치한 루이나 세계무역센터(BWT)에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테러를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세계무역센터 북탑과 남탑이 연쇄적으로 붕괴되고, 벨포르 금융지구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이 공격으로 2,908명이 사망하고 7,000명 이상이 부상하였으며, 루이나 역사상 최악의 인명 피해를 초래한 단일 테러 사건으로 기록된다. 수도 벨포르 한복판에 위치한 국가 상징적 시설이 붕괴되었다는 점에서, 루이나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 심각한 충격을 안겼다.
당시 리처드 엘스워스 대통령은 사건 발생 3일 뒤, 전국 생중계 특별 담화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지금 깊은 고통 속에 있지만, 이 고통은 우리의 자유와 헌법, 그리고 시민의 용기를 흔들 수 없습니다. 루이나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테러리즘이 단순한 범죄를 넘어, 국가 전체를 겨냥한 전면적 안보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루이나 사회에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고, 이후 루이나의 외교·정보·군사 정책은 1.19 테러 이후 전면 재편되었다. 불과 9일 만에 야당과 여당이 모두 만장일치로 루이나 국토안보법이 제정되었고, MIA와 국가정보국(NIA)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었다. 항공보안 및 출입국 심사도 전면 개편되었으며, 극단주의 선동 및 종교단체에 대한 정보감시가 국가 차원에서 시행되기 시작했다.
한편 국내 이슬람계 이민자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혐오범죄도 급증하였고, 급진적 우익 정치세력인 루이나 애국당이 처음으로 대중적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국제적으로는 미합중제국, 플로렌시아와 함께 대테러 공조를 선언하며, 새로운 안보 구도를 구축하는 데 루이나가 핵심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2. 배경 [편집]
1979년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발발 후 이슬람권 각지에서는 '불신자 공산군'과 싸우는 아프간 무슬림들을 돕기 위한 지하드의 일환으로 궐기한 무자헤딘 전사들이 고랜드로 몰려들었다. 냉전으로 사비에트와 대립하던 루이나 정부는 NIA를 통해 그들을 지원했고, 서방 유학을 통해 영어에 능통하던 이브라힘 나쉬디가 그 지도자가 됐다. 그러던 중 1988년, 사비에트가 전쟁에서 손을 떼고 철수를 개시하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사비에트에 대항한다는 방향성을 잃은 지하디스트 세력을 유지하려던 나쉬디는 지하드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고, 그 대상은 바로 기존의 동맹이던 루이나였다. 같은 해 나쉬디는 (후일 그를 계승하는) 아이만 알자와히리 등의 무자헤딘 베테랑들과 함께 고랜드에서 지하드의 선봉이 될 조직으로 (아랍어로 '근본'이란 뜻인) 알후라 알자미아를 창설했다.
1990년,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 전쟁이 발발하자 나쉬디는 무자헤딘 조직의 활용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 지원을 제안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고 대신 루이나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후 루이나군이 사우디에 주둔하게 되자 나쉬디는 사우디 왕가에 타크피르(배교자)라며 지하드를 선포하였다. 또한 '아라비아반도의 비무슬림을 추방할 것[9]'이라는 하디스를 인용하며 1996년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는 루이나군에 퇴거를 명령하는 파트와를 내렸다.
알후라 알자미아 창설 전부터 이스라엘과 아랍의 세속주의 독재정권들을 지원하는 루이나에 반감을 품어오던 나쉬디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전세계 서방권들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에 나서기 시작했다. 1998년 알자미아는 고랜드 루이나 대사관 폭탄 테러와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테러[10]를 감행하면서 전 세계 이슬람 극단주의에 있어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같은 해 나쉬디는 루이나의 대 이스라엘 정책과 중동 개입을 성토하며 전 세계 무슬림들이 단결해 이슬람 국가들의 공공의 적인 미국과 루이나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중동은 물론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등 이슬람권 각지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그의 산하에 모여들었다. 충분한 세력을 확보한 나쉬디는 1998년 말부터 시범으로 루이나 본토에 테러를 감행할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1991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의 주동자인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도 있었다.
이후의 인터뷰에서 나쉬디는 1982년 레바논 내전 당시 이스라엘 공군이 루이나에서 구매한 루이나제 무기로 베이루트 도심 고층 건물들을 사정없이 폭격하는 것을 TV로 목도하고는 이를 갈면서 이스라엘의 후원자인 루이나의 마천루 등 루이나 건물들에 대한 공격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나쉬디의 이러한 심리와 실제로 그러한 공격을 감행한 칼리드의 합류는 1·19 테러 계획의 구체화로 이어졌다.
1990년,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 전쟁이 발발하자 나쉬디는 무자헤딘 조직의 활용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 지원을 제안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고 대신 루이나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후 루이나군이 사우디에 주둔하게 되자 나쉬디는 사우디 왕가에 타크피르(배교자)라며 지하드를 선포하였다. 또한 '아라비아반도의 비무슬림을 추방할 것[9]'이라는 하디스를 인용하며 1996년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는 루이나군에 퇴거를 명령하는 파트와를 내렸다.
알후라 알자미아 창설 전부터 이스라엘과 아랍의 세속주의 독재정권들을 지원하는 루이나에 반감을 품어오던 나쉬디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전세계 서방권들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에 나서기 시작했다. 1998년 알자미아는 고랜드 루이나 대사관 폭탄 테러와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테러[10]를 감행하면서 전 세계 이슬람 극단주의에 있어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같은 해 나쉬디는 루이나의 대 이스라엘 정책과 중동 개입을 성토하며 전 세계 무슬림들이 단결해 이슬람 국가들의 공공의 적인 미국과 루이나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중동은 물론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등 이슬람권 각지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그의 산하에 모여들었다. 충분한 세력을 확보한 나쉬디는 1998년 말부터 시범으로 루이나 본토에 테러를 감행할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1991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의 주동자인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도 있었다.
이후의 인터뷰에서 나쉬디는 1982년 레바논 내전 당시 이스라엘 공군이 루이나에서 구매한 루이나제 무기로 베이루트 도심 고층 건물들을 사정없이 폭격하는 것을 TV로 목도하고는 이를 갈면서 이스라엘의 후원자인 루이나의 마천루 등 루이나 건물들에 대한 공격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나쉬디의 이러한 심리와 실제로 그러한 공격을 감행한 칼리드의 합류는 1·19 테러 계획의 구체화로 이어졌다.
루이나 군사력의 기반인 경제에 타격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가 타격을 입으면 그들은 재건을 해야만 할 것이다.2004년 유고랜드에서 습득된 나쉬디의 녹취록[11]
알자미아의 최종 목표가 된 미국 본토 공격에 있어 나쉬디는 미국의 가장 열렬한 동맹인 루이나에서 먼저 시범적인 형태의 테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루이나 군사력의 기반은 루이나 경제력에 있고, 따라서 루이나 경제의 상징과도 같은 세계무역센터를 테러의 주요 목표로 선정했다. 또한 1월 19일을 실행일로 정한 것은 그가 누차 서방의 중동 개입 시작으로 간주한 제2차 빈 공방전이 절정에 달하던 날이었고, LSEC 총회 개막일이자 나쉬디 자신의 궐석재판 하루 전날이기도 했다. 또한 테러 실행 시간도 이른 아침 시간대라 관광객들이 아닌 출근하는 루이나 시민들을 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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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바로 전날[12]에는 위 사진과 같이 구름이 심하게 껴 있었고 비까지 내렸었다. 만약 테러 날짜가 하루 빨랐다면 시야 확보가 어려워 제대로 충돌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한편 1999년 나쉬디의 참모 모하메드 아테프는 테러 실행 방법으로서 비행기 납치를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인원을 모집했다. 그 결과 교육 수준이 높고 서방 유학 또는 거주 경험이 있어 영어가 능숙한 이들이 납치조 약 20여 명으로 꾸려졌다. 당시 탈레반의 초청으로 고랜드를 본거지로 삼던 알자미아는 이들을 초청해 훈련시켰다.[13] 납치조는 2000년 봄부터 차례대로 루이나에 들어갔고, 나쉬디는 유고랜드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친척을 포섭해 그들의 여권을 발급했다. 2000년에 들어간 1차 납치조는 롱비치의 허프만 비행장 등지에서 조종 훈련을 받았고, 2000년 여름에는 2차 납치조가 합류했다. 2000년 11월, 납치조장 격인 모하메드 아타는 스페인에서 알자미아 간부와 접선하여 최종 계획을 브리핑했다. 나쉬디는 이를 승인하고 최대한 빠른 실행을 지시했다.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사실 루이나 정보당국도 어느 정도는 알자미아의 음모를 눈치챘었다. 이미 2000년 전후로 유고랜드 정보당국의 협조로 NIA는 알자미아 조직원들이 루이나 비자를 소지했음을 확인했고, 세계 각지 요원들에게 경고했다. 2000년 7월, NIA는 알자미아 조직원 2인 이상이 루이나에 들어간 것을 확인했고 MIA는 루이나 내 비행학교에서 이상한 조짐을 감지했다. 하지만 두 정보당국의 협조는 거의 없었고, 당연히 이들의 연관성을 찾지 못하고 그저 테러리스트들의 개별 행동으로 치부했다. 심지어 알자미아 조직원에 대한 MIA의 정보공개 요청을 NIA가 거절하는 일도 있었다. 이는 1995년 루이나 법무부가 정보 당국간 극비사항 공유규제를 내렸음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루이나는 2000년 RNS 콜 테러사건 이후에도 알자미아가 단순히 해외에 주둔한 루이나군 공격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여겨 해외 소재 루이나인들의 경계 강화에만 치중했다.
2000년 12월, 마베라 정보 당국은 루이나 측에 알자미아가 루이나 내에서 비행기와 연관된 음모를 진행 중이고, 이는 한 달 안에 집행될 것이라는 중요한 첩보를 전달했다.[14] 그 후 비로소 민간비행학교에 알자미아 조직원이 있다는 MIA의 의혹 제기를 받아들인 NIA는 리처드 엘스워스 루이나 대통령에게 "국내에서 비행기 납치 등의 형태로 공격이 예상된다"고 보고했다.
2000년 12월 29일에는 알자미아 조직원 자카리아스 무사위가 오보레의 비행학교에서 보잉 747기의 조종 훈련을 고집하다가 의심을 받아 체포됐다. 하지만 MIA뿐만 아니라 엘스워스 대통령을 위시로 한 루이나 수뇌부 역시 알자미아를 과소평가하며 납치 후 인질극을 벌일 뿐 감히 루이나 본토를 향한 직접적인 공격을 자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쉬디가 설정한 테러 개시의 날은 날이 갈수록 묵묵히 다가왔다.
한편 1999년 나쉬디의 참모 모하메드 아테프는 테러 실행 방법으로서 비행기 납치를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인원을 모집했다. 그 결과 교육 수준이 높고 서방 유학 또는 거주 경험이 있어 영어가 능숙한 이들이 납치조 약 20여 명으로 꾸려졌다. 당시 탈레반의 초청으로 고랜드를 본거지로 삼던 알자미아는 이들을 초청해 훈련시켰다.[13] 납치조는 2000년 봄부터 차례대로 루이나에 들어갔고, 나쉬디는 유고랜드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친척을 포섭해 그들의 여권을 발급했다. 2000년에 들어간 1차 납치조는 롱비치의 허프만 비행장 등지에서 조종 훈련을 받았고, 2000년 여름에는 2차 납치조가 합류했다. 2000년 11월, 납치조장 격인 모하메드 아타는 스페인에서 알자미아 간부와 접선하여 최종 계획을 브리핑했다. 나쉬디는 이를 승인하고 최대한 빠른 실행을 지시했다.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사실 루이나 정보당국도 어느 정도는 알자미아의 음모를 눈치챘었다. 이미 2000년 전후로 유고랜드 정보당국의 협조로 NIA는 알자미아 조직원들이 루이나 비자를 소지했음을 확인했고, 세계 각지 요원들에게 경고했다. 2000년 7월, NIA는 알자미아 조직원 2인 이상이 루이나에 들어간 것을 확인했고 MIA는 루이나 내 비행학교에서 이상한 조짐을 감지했다. 하지만 두 정보당국의 협조는 거의 없었고, 당연히 이들의 연관성을 찾지 못하고 그저 테러리스트들의 개별 행동으로 치부했다. 심지어 알자미아 조직원에 대한 MIA의 정보공개 요청을 NIA가 거절하는 일도 있었다. 이는 1995년 루이나 법무부가 정보 당국간 극비사항 공유규제를 내렸음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루이나는 2000년 RNS 콜 테러사건 이후에도 알자미아가 단순히 해외에 주둔한 루이나군 공격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여겨 해외 소재 루이나인들의 경계 강화에만 치중했다.
2000년 12월, 마베라 정보 당국은 루이나 측에 알자미아가 루이나 내에서 비행기와 연관된 음모를 진행 중이고, 이는 한 달 안에 집행될 것이라는 중요한 첩보를 전달했다.[14] 그 후 비로소 민간비행학교에 알자미아 조직원이 있다는 MIA의 의혹 제기를 받아들인 NIA는 리처드 엘스워스 루이나 대통령에게 "국내에서 비행기 납치 등의 형태로 공격이 예상된다"고 보고했다.
2000년 12월 29일에는 알자미아 조직원 자카리아스 무사위가 오보레의 비행학교에서 보잉 747기의 조종 훈련을 고집하다가 의심을 받아 체포됐다. 하지만 MIA뿐만 아니라 엘스워스 대통령을 위시로 한 루이나 수뇌부 역시 알자미아를 과소평가하며 납치 후 인질극을 벌일 뿐 감히 루이나 본토를 향한 직접적인 공격을 자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쉬디가 설정한 테러 개시의 날은 날이 갈수록 묵묵히 다가왔다.
3. 전개 [편집]
Flight Simulation으로 당시 하이재킹 당한 비행기 행적들을 재현한 영상 |
이 모든 일들은 1월 19일 오전 8시에서 11시까지 약 2-3시간에 걸쳐 벌어졌다.
3.1. 항공기 납치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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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항공기들의 충돌 경로 |
3.1.1. 항공기 [편집]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NA302 · 노던에어471 등 민간 여객기 2편이 납치됐고, 이들은 모두 계획된 목표에 정확히 충돌했다. 또한 같은 조직이 납치를 시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3번째 항공기 NE145편은 루이나 경찰의 조기 개입으로 공항 이륙 직전 저지되었다.[15]
오전 8시 42분경 나쉬디를 포함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노던에어 302편, NA302편을 납치했다. 이후 NA302편은 벨포르로 향해 오전 9시 03분경 루이나 세계무역센터 북탑에 충돌했다.
오전 9시 17분경 파이살 알 무타르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노던에어 471편, NA471편을 납치했다. 이후 NA471편은 남쪽에서 북상하여 오전 9시 42분경 루이나 세계무역센터 남탑에 충돌했다.
오전 9시 55분경, 루이나 국가정보국(NIA)의 공항 방첩팀이 에포르 국제공항 출발 예정이던 노던에어 145편, NA145편의 탑승자 중 수상한 인물 3명을 체포했다. 기내에 사제 폭발물이 실려 있었으며, 루이나 대통령궁 인근 혹은 국방청사를 목표로 한 제3의 공격이었다는 사실이 이후 수사 결과 드러났다.
오전 8시 42분경 나쉬디를 포함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노던에어 302편, NA302편을 납치했다. 이후 NA302편은 벨포르로 향해 오전 9시 03분경 루이나 세계무역센터 북탑에 충돌했다.
오전 9시 17분경 파이살 알 무타르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노던에어 471편, NA471편을 납치했다. 이후 NA471편은 남쪽에서 북상하여 오전 9시 42분경 루이나 세계무역센터 남탑에 충돌했다.
오전 9시 55분경, 루이나 국가정보국(NIA)의 공항 방첩팀이 에포르 국제공항 출발 예정이던 노던에어 145편, NA145편의 탑승자 중 수상한 인물 3명을 체포했다. 기내에 사제 폭발물이 실려 있었으며, 루이나 대통령궁 인근 혹은 국방청사를 목표로 한 제3의 공격이었다는 사실이 이후 수사 결과 드러났다.
3.1.2. 테러리스트[16] [편집]
이름 | 출생 / 당시 나이 | 국적 | 특이사항 |
이브라힘 나쉬디 (Ibrahim Nashdi) | 1973년 2월 11일 당시 27세 | 아프가니스탄 | 납치조 행동대장. 벨포르 공대 유학 경험. 비행경력 有 |
무흐신 아크바리 (Muhsin Akbari) | 1979년 9월 6일 당시 21세 | 고랜드 | 1998년 이후 고랜드-루이나 밀입국자. MIA 감시 대상 인물 |
유누스 칼릴리 (Yunus Khalili) | 1978년 1월 30일 당시 23세 | 유고랜드 | 불법체류자. 벨포르 모스크 출입기록 다수 |
샤피크 라흐마티 (Shafiq Rahmati) | 1980년 3월 19일 당시 20세 | 아프가니스탄 | 통역학과 졸업. 문화교류 명목으로 입국 |
파드 알무타리 (Fadh al-Mutari) | 1977년 11월 4일 당시 24세 | 고랜드 | 산악전 게릴라 출신. 고랜드 내전 참전자 |
이름 | 출생 / 당시 나이 | 국적 | 특이사항 |
파이살 알 무타르 (Faysal al-Muttar) | 1974년 4월 9일 당시 26세 | 고랜드 | 건설노동자로 위장. 납치조 행동대장 |
카림 사피 (Karim Safi) | 1976년 10월 21일 당시 24세 | 유고랜드 | 롱비치 내 불법체류. 자선단체를 통해 루이나 입국 |
아크람 누르잘라 (Akram Nurzala) | 1977년 12월 1일 당시 23세 | 아프가니스탄 | 국제이주청 등록자. 실종 처리 이력 존재 |
샤디크 자와디 (Shadiq Jawadi) | 1980년 2월 14일 당시 20세 | 고랜드 | 고랜드 북부 부족 출신. 무슬림 형제단과 연계 정황 |
무니르 하맘 (Munir Hammam) | 1981년 5월 3일 당시 19세 | 유고랜드 | 고아원 출신. 무슬림 청년단체 회원, 2000년 밀입국 |
당시 루이나의 큰 공항들은 CAPPS I[17]이라는, 공항에 들어온 모든 개개인을 프로파일링하고 분석하는 시스템을 쓰고 있었는데 논문마다 숫자는 조금씩 다르지만 한 논문에 따르면[18] 19명의 테러리스트들 중 6명이 CAPPS I 시스템에 걸렸고 2차 수색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공항에서 걸린 테러리스트들의 숫자는 19명 중 10명이었는데 이 중 6명이 CAPPS I 시스템에 걸려들었고 나머지 4명은 가방 속 내용물과 같은 이유로 인해 2차 수색을 받았다고 한다. 문제는 수색을 했음에도 이들이 실질적으로 걸리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테러리스트들은 테러를 벌이기 전에 사전답사로 보이는 행동을 했었다. 한마디로 CAPPS I에 걸리는 행동들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공항을 사전답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CAPPS I과 같은 프로파일링 시스템의 실용성에 의문들이 쏟아져나왔으며 루이나가 곧 CAPPS II를 개발하는 까닭이 된다.
자유 유고랜드방송국에서 사건의 원흉인 알자미아의 수장 나쉬디의 2004년 생전 비디오를 녹화한 것을 공개했다. 이 비디오가 대테러 전문가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비디오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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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첫 번째 충돌: 제1세계무역센터 [편집]
3.3. 두 번째 충돌: 제2세계무역센터 [편집]
3.4. NA471편의 추락 [편집]
=== 세계무역센터의 붕괴===
3.5. 테러 직후 [편집]
3.5.1. 루이나 정부의 마비 [편집]
4. 사망자 [편집]
4.1. 최후의 메시지 [편집]
5. 왜 막지 못했는가? [편집]
6. 루이나의 반응 [편집]
6.1. 예술/문화계 [편집]
6.2. 종교계 [편집]
6.3. 시민사회 및 일반 대중 [편집]
6.4. 정치권의 반응 [편집]
7. 이후 [편집]
7.1. 끝나지 않은 피해 [편집]
7.2. 후속 테러 [편집]
8. 음모론 [편집]
9. 9.11 테러와의 연관성 [편집]
10. 기타 [편집]
11. 여담 [편집]
[1] 루이나에서는 간단히 ‘1·19’, ‘벨포르 테러’, 또는 ‘BWT 공격’으로도 불린다. 북미의 ‘9/11’처럼 날짜 중심의 사건 명칭이 일반화되었다.[RNT] 루이나 표준시 (UTC+01:00) 기준[3] 루이나 의회를 향하던중 내부 저항으로 추락[4] 루이나 국가정보국(NIA)이 2000년 테러위험조사 보고서에서 주시한 중동계 테러조직으로, 본 사건 이후 조직 전원이 국제수배되었다.[5] 민간인 2,891명, 테러리스트 17명. 이 중 271명은 소방 및 경찰관으로 구조 작업 중 순직.[6] 외국인 사망자: 플로렌시아 69명, 미합중제국 45명, 프랑스 38명, 영국 22명, 동사랜드 19명, 마베라 13명 등[7] 붕괴 당시 비산된 콘크리트·석면 분진에 의한 호흡기 질환, 폐암 등 장기피해 발생.[8]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수니파 계열의 반서구·반세속주의 무장 단체. 루이나 정부가 1997년부터 테러조직으로 공식 지정.[9] 정확히는 무함마드가 살아 있는 한 기독교도와 유대인을 아라비아반도에서 축출할 것[10] 역설적이게도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이 있던 다르에스살람은 아랍어로 '평화의 집'이란 뜻이다.[11] 이로써 지속적으로 1·19 테러의 책임을 부인하던 나쉬디의 1·19 테러 주도가 더 확실해지는 증거가 되었다.[12] 사진 우측 하단에 보면 1 18(1월 18일)이라고 적혀 있다.[13] 훈련 내용에는 서구 의상을 입는 법, 음식점에서 주문하는 법 따위도 있었다고 한다.[14] 심지어 라 마베라 정보당국은 알자미아 측의 작전암호(성대한 결혼식)까지 전달했다.[15] 이후 이륙 지연이 없었다면 해당 기체는 에포르 국제공항을 출발해 대통령궁 인근에 충돌할 예정이었다는 정보가 루이나 정보국에 의해 밝혀졌다.[16] 당연한 소리지만 이들은 전원 테러 성공과 함께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17] Computer-Assisted Passenger Prescreening System Version 1, 컴퓨터 보조 승객 판별 시스템.[18] Barnett, A.(2004). CAPPS II: The foundation of aviation security?. Risk Analysis, 24(4), 909-916.[19] 알라여 그에게 자비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