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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파일:Art Spiegelman Cover.png
1.19 사건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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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된 비행편
납치 오인 비행편
KE095, DL1189
납치 중 발생한 준사고
충돌
관련 정보
관여 인물 및 단체
알후라 알자마아, 이브라힘 나쉬디, 무흐신 아크바리, 유누스 칼릴리, 샤피크 라흐마티, 파드 알무타리, 파이살 알 무타르, 카림 사피, 아크람 누르잘라, 샤디크 자와디, 무니르 하맘
테러 피해자 및 영웅
관련 단체
벨포르 경찰청, 벨포르 항만청, 벨포르 소방청, 루이나 항공청, 노던에어 항공, 유나이티드 항공
테러 이후
도시 전설

1.19 테러
January 19 attacks
[1]
파일:119_BWT_Attack_1.jpg
노던에어 302편북탑에 충돌하는 모습
파일:119_BWT_Collapse.png
노던에어 471편이 충돌한 직후 남탑 붕괴 장면
발생일
2001년 1월 19일 금요일, 8시 42분~10시 6분[RNT]
발생
위치
파일:Ruinaflag.png
파일:Ruinaflag.png
벨포르 금융지구 인근 고층건물 밀집지역
파일:Ruinaflag.png
오보레 공장지대[3]
유형
하이재킹을 통한 자살 테러
원인
이슬람 극단주의를 표방한 정치·종교적 보복
테러 주동자
이브라힘 나쉬디(Ibrahim Nashdi)
노던에어 302/471편 탑승자 포함 총 17명
테러 주동 세력
알후라 알자마아 (Al-Hura Al-Jama'a)[4]
피해
재산
피해
항공기 NE302, NE471 완파
세계무역센터 북탑·남탑 완전 붕괴
벨포르 증권거래소 업무 중단, 벨포르 금융지구 GDP 약 218억 달러 감소
항공·물류 산업 손실 추산 약 350억 달러
주요 외국 자산 약 8% 이탈
사망
총 사망자 수 2,908명[5][6]
- 북탑 1,422명
- 남탑 1,133명
- 기타 353명(인근 건물 붕괴 및 잔해 추락 등)
부상
최소 7,000명 ~ 최대 12,000명
분진
피해자
3,900명 ~ 60,000여 명[7]
여파
국토안보법(루이나) 제정 / NIAMIA 대테러 권한 강화
항공 보안 대폭 강화 및 승객 신원 사전확인제 도입
이슬람계 공동체 감시강화와 함께 혐오범죄 급증
루이나 항공청 직속 위기관리본부 신설

1. 개요2. 배경3. 전개
3.1. 항공기 납치
3.1.1. 항공기3.1.2. 테러리스트
3.2. 첫 번째 충돌: 제1세계무역센터3.3. 두 번째 충돌: 제2세계무역센터3.4. NA471편의 추락3.5. 테러 직후
3.5.1. 루이나 정부의 마비
4. 사망자5. 왜 막지 못했는가?6. 루이나의 반응
6.1. 예술계의 반응
6.1.1. 음악6.1.2. 시각예술6.1.3. 문학6.1.4. 연극과 공연예술6.1.5. 영화6.1.6. 거리예술 및 그래피티
6.2. 종교계6.3. 시민사회 및 일반 대중6.4. 정치권의 반응

1. 개요 [편집]

1·19 테러(January 19 attacks)는 2001년 1월 19일에 루이나 벨포르에서 발생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 알후라 알자마아(Al-Hura Al-Jama'a)[8]가 자행한 하이재킹 및 자살 테러 사건이다.
알후라 알자마아 소속 테러범들은 민간 항공기 두 대를 납치하여 루이나 벨포르 시 중심부에 위치한 루이나 세계무역센터(BWT)에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테러를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세계무역센터 북탑과 남탑이 연쇄적으로 붕괴되고, 벨포르 금융지구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이 공격으로 2,908명이 사망하고 7,000명 이상이 부상하였으며, 루이나 역사상 최악의 인명 피해를 초래한 단일 테러 사건으로 기록된다. 수도 벨포르 한복판에 위치한 국가 상징적 시설이 붕괴되었다는 점에서, 루이나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 심각한 충격을 안겼다.

당시 리처드 엘스워스 대통령은 사건 발생 3일 뒤, 전국 생중계 특별 담화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지금 깊은 고통 속에 있지만, 이 고통은 우리의 자유와 헌법, 그리고 시민의 용기를 흔들 수 없습니다. 루이나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테러리즘이 단순한 범죄를 넘어, 국가 전체를 겨냥한 전면적 안보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루이나 사회에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고, 이후 루이나의 외교·정보·군사 정책은 1.19 테러 이후 전면 재편되었다. 불과 9일 만에 야당과 여당이 모두 만장일치로 루이나 국토안보법이 제정되었고, MIA국가정보국(NIA)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었다. 항공보안 및 출입국 심사도 전면 개편되었으며, 극단주의 선동 및 종교단체에 대한 정보감시가 국가 차원에서 시행되기 시작했다.

한편 국내 이슬람계 이민자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혐오범죄도 급증하였고, 급진적 우익 정치세력인 루이나 애국당이 처음으로 대중적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국제적으로는 미합중제국, 플로렌시아와 함께 대테러 공조를 선언하며, 새로운 안보 구도를 구축하는 데 루이나가 핵심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2. 배경 [편집]

1979년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발발 후 이슬람권 각지에서는 '불신자 공산군'과 싸우는 아프간 무슬림들을 돕기 위한 지하드의 일환으로 궐기한 무자헤딘 전사들이 고랜드로 몰려들었다. 냉전으로 사비에트와 대립하던 루이나 정부는 NIA를 통해 그들을 지원했고, 서방 유학을 통해 영어에 능통하던 이브라힘 나쉬디가 그 지도자가 됐다. 그러던 중 1988년, 사비에트가 전쟁에서 손을 떼고 철수를 개시하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사비에트에 대항한다는 방향성을 잃은 지하디스트 세력을 유지하려던 나쉬디는 지하드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고, 그 대상은 바로 기존의 동맹이던 루이나였다. 같은 해 나쉬디는 (후일 그를 계승하는) 아이만 알자와히리 등의 무자헤딘 베테랑들과 함께 고랜드에서 지하드의 선봉이 될 조직으로 (아랍어로 '근본'이란 뜻인) 알후라 알자미아를 창설했다.

1990년,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 전쟁이 발발하자 나쉬디는 무자헤딘 조직의 활용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 지원을 제안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고 대신 루이나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후 루이나군이 사우디에 주둔하게 되자 나쉬디는 사우디 왕가에 타크피르(배교자)라며 지하드를 선포하였다. 또한 '아라비아반도의 비무슬림을 추방할 것[9]'이라는 하디스를 인용하며 1996년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는 루이나군에 퇴거를 명령하는 파트와를 내렸다.

알후라 알자미아 창설 전부터 이스라엘과 아랍의 세속주의 독재정권들을 지원하는 루이나에 반감을 품어오던 나쉬디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전세계 서방권들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에 나서기 시작했다. 1998년 알자미아는 고랜드 루이나 대사관 폭탄 테러와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테러[10]를 감행하면서 전 세계 이슬람 극단주의에 있어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같은 해 나쉬디는 루이나의 대 이스라엘 정책과 중동 개입을 성토하며 전 세계 무슬림들이 단결해 이슬람 국가들의 공공의 적인 미국과 루이나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중동은 물론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등 이슬람권 각지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그의 산하에 모여들었다. 충분한 세력을 확보한 나쉬디는 1998년 말부터 시범으로 루이나 본토에 테러를 감행할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1991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의 주동자인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도 있었다.

이후의 인터뷰에서 나쉬디는 1982년 레바논 내전 당시 이스라엘 공군이 루이나에서 구매한 루이나제 무기로 베이루트 도심 고층 건물들을 사정없이 폭격하는 것을 TV로 목도하고는 이를 갈면서 이스라엘의 후원자인 루이나의 마천루 등 루이나 건물들에 대한 공격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나쉬디의 이러한 심리와 실제로 그러한 공격을 감행한 칼리드의 합류는 1·19 테러 계획의 구체화로 이어졌다.
루이나 군사력의 기반인 경제에 타격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가 타격을 입으면 그들은 재건을 해야만 할 것이다.

2004년 유고랜드에서 습득된 나쉬디의 녹취록[11]
알자미아의 최종 목표가 된 미국 본토 공격에 있어 나쉬디는 미국의 가장 열렬한 동맹인 루이나에서 먼저 시범적인 형태의 테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루이나 군사력의 기반은 루이나 경제력에 있고, 따라서 루이나 경제의 상징과도 같은 세계무역센터를 테러의 주요 목표로 선정했다. 또한 1월 19일을 실행일로 정한 것은 그가 누차 서방의 중동 개입 시작으로 간주한 제2차 빈 공방전이 절정에 달하던 날이었고, LSEC 총회 개막일이자 나쉬디 자신의 궐석재판 하루 전날이기도 했다. 또한 테러 실행 시간도 이른 아침 시간대라 관광객들이 아닌 출근하는 루이나 시민들을 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파일:1000001854.jpg
그에 반해 바로 전날[12]에는 위 사진과 같이 구름이 심하게 껴 있었고 비까지 내렸었다. 만약 테러 날짜가 하루 빨랐다면 시야 확보가 어려워 제대로 충돌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한편 1999년 나쉬디의 참모 모하메드 아테프는 테러 실행 방법으로서 비행기 납치를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인원을 모집했다. 그 결과 교육 수준이 높고 서방 유학 또는 거주 경험이 있어 영어가 능숙한 이들이 납치조 약 20여 명으로 꾸려졌다. 당시 탈레반의 초청으로 고랜드를 본거지로 삼던 알자미아는 이들을 초청해 훈련시켰다.[13] 납치조는 2000년 봄부터 차례대로 루이나에 들어갔고, 나쉬디는 유고랜드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친척을 포섭해 그들의 여권을 발급했다. 2000년에 들어간 1차 납치조는 롱비치의 허프만 비행장 등지에서 조종 훈련을 받았고, 2000년 여름에는 2차 납치조가 합류했다. 2000년 11월, 납치조장 격인 모하메드 아타는 스페인에서 알자미아 간부와 접선하여 최종 계획을 브리핑했다. 나쉬디는 이를 승인하고 최대한 빠른 실행을 지시했다.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사실 루이나 정보당국도 어느 정도는 알자미아의 음모를 눈치챘었다. 이미 2000년 전후로 유고랜드 정보당국의 협조로 NIA는 알자미아 조직원들이 루이나 비자를 소지했음을 확인했고, 세계 각지 요원들에게 경고했다. 2000년 7월, NIA는 알자미아 조직원 2인 이상이 루이나에 들어간 것을 확인했고 MIA는 루이나 내 비행학교에서 이상한 조짐을 감지했다. 하지만 두 정보당국의 협조는 거의 없었고, 당연히 이들의 연관성을 찾지 못하고 그저 테러리스트들의 개별 행동으로 치부했다. 심지어 알자미아 조직원에 대한 MIA의 정보공개 요청을 NIA가 거절하는 일도 있었다. 이는 1995년 루이나 법무부가 정보 당국간 극비사항 공유규제를 내렸음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루이나는 2000년 RNS 콜 테러사건 이후에도 알자미아가 단순히 해외에 주둔한 루이나군 공격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여겨 해외 소재 루이나인들의 경계 강화에만 치중했다.

2000년 12월, 마베라 정보 당국은 루이나 측에 알자미아가 루이나 내에서 비행기와 연관된 음모를 진행 중이고, 이는 한 달 안에 집행될 것이라는 중요한 첩보를 전달했다.[14] 그 후 비로소 민간비행학교에 알자미아 조직원이 있다는 MIA의 의혹 제기를 받아들인 NIA는 리처드 엘스워스 루이나 대통령에게 "국내에서 비행기 납치 등의 형태로 공격이 예상된다"고 보고했다.

2000년 12월 29일에는 알자미아 조직원 자카리아스 무사위가 오보레의 비행학교에서 보잉 747기의 조종 훈련을 고집하다가 의심을 받아 체포됐다. 하지만 MIA뿐만 아니라 엘스워스 대통령을 위시로 한 루이나 수뇌부 역시 알자미아를 과소평가하며 납치 후 인질극을 벌일 뿐 감히 루이나 본토를 향한 직접적인 공격을 자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쉬디가 설정한 테러 개시의 날은 날이 갈수록 묵묵히 다가왔다.

3. 전개 [편집]

Flight Simulation으로 당시 하이재킹 당한 비행기 행적들을 재현한 영상
이 모든 일들은 1월 19일 오전 8시에서 11시까지 약 2-3시간에 걸쳐 벌어졌다.

3.1. 항공기 납치 [편집]

파일:IMG_3324.jpg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항공기들의 충돌 경로

3.1.1. 항공기 [편집]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NA302 · 노던에어471민간 여객기 2편이 납치됐고, 이들은 모두 계획된 목표에 정확히 충돌했다. 또한 같은 조직이 납치를 시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3번째 항공기 NE145편은 루이나 경찰의 조기 개입으로 공항 이륙 직전 저지되었다.[15]

오전 8시 42분경 나쉬디를 포함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노던에어 302편, NA302편을 납치했다. 이후 NA302편은 벨포르로 향해 오전 9시 03분경 세계무역센터 북탑에 충돌했다.

오전 9시 17분경 파이살 알 무타르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노던에어 471편, NA471편을 납치했다. 이후 NA471편은 남쪽에서 북상하여 오전 9시 42분경 세계무역센터 남탑에 충돌했다.

오전 9시 55분경, 루이나 국가정보국(NIA)의 공항 방첩팀이 에포르 국제공항 출발 예정이던 노던에어 145편, NA145편의 탑승자 중 수상한 인물 3명을 체포했다. 기내에 사제 폭발물이 실려 있었으며, 루이나 대통령궁 인근 혹은 국방청사를 목표로 한 제3의 공격이었다는 사실이 이후 수사 결과 드러났다.

3.1.2. 테러리스트[16] [편집]

이름
출생 / 당시 나이
국적
특이사항
이브라힘 나쉬디
(Ibrahim Nashdi)
1973년 2월 11일
당시 27세
아프가니스탄
납치조 행동대장. 벨포르 공대 유학 경험. 비행경력 有
무흐신 아크바리
(Muhsin Akbari)
1979년 9월 6일
당시 21세
고랜드
1998년 이후 고랜드-루이나 밀입국자. MIA 감시 대상 인물
유누스 칼릴리
(Yunus Khalili)
1978년 1월 30일
당시 23세
유고랜드
불법체류자. 벨포르 모스크 출입기록 다수
샤피크 라흐마티
(Shafiq Rahmati)
1980년 3월 19일
당시 20세
아프가니스탄
통역학과 졸업. 문화교류 명목으로 입국
파드 알무타리
(Fadh al-Mutari)
1977년 11월 4일
당시 24세
고랜드
산악전 게릴라 출신. 고랜드 내전 참전자
이름
출생 / 당시 나이
국적
특이사항
파이살 알 무타르
(Faysal al-Muttar)
1974년 4월 9일
당시 26세
고랜드
건설노동자로 위장. 납치조 행동대장
카림 사피
(Karim Safi)
1976년 10월 21일
당시 24세
유고랜드
롱비치 내 불법체류. 자선단체를 통해 루이나 입국
아크람 누르잘라
(Akram Nurzala)
1977년 12월 1일
당시 23세
아프가니스탄
국제이주청 등록자. 실종 처리 이력 존재
샤디크 자와디
(Shadiq Jawadi)
1980년 2월 14일
당시 20세
고랜드
고랜드 북부 부족 출신. 무슬림 형제단과 연계 정황
무니르 하맘
(Munir Hammam)
1981년 5월 3일
당시 19세
유고랜드
고아원 출신. 무슬림 청년단체 회원, 2000년 밀입국

당시 루이나의 큰 공항들은 CAPPS I[17]이라는, 공항에 들어온 모든 개개인을 프로파일링하고 분석하는 시스템을 쓰고 있었는데 논문마다 숫자는 조금씩 다르지만 한 논문에 따르면[18] 19명의 테러리스트들 중 6명이 CAPPS I 시스템에 걸렸고 2차 수색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공항에서 걸린 테러리스트들의 숫자는 19명 중 10명이었는데 이 중 6명이 CAPPS I 시스템에 걸려들었고 나머지 4명은 가방 속 내용물과 같은 이유로 인해 2차 수색을 받았다고 한다. 문제는 수색을 했음에도 이들이 실질적으로 걸리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테러리스트들은 테러를 벌이기 전에 사전답사로 보이는 행동을 했었다. 한마디로 CAPPS I에 걸리는 행동들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공항을 사전답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CAPPS I과 같은 프로파일링 시스템의 실용성에 의문들이 쏟아져나왔으며 루이나가 곧 CAPPS II를 개발하는 까닭이 된다.

자유 유고랜드방송국에서 사건의 원흉인 알자미아의 수장 나쉬디의 2004년 생전 비디오를 녹화한 것을 공개했다. 이 비디오가 대테러 전문가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비디오 내용
[ 펼치기 · 접기 ]
Praise be to Allah who created the creation for His worship, commanded them to be just, and permitted the wronged to retaliate against the oppressor in kind.
찬양받기 위해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정의로움을 명하시며, 핍박받는 자들에게 그들이 당한 만큼의 복수를 허락하신 위대한 알라를 찬양하노라.

Peace be upon he who follows the guidance.
이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자들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People of Ruina, this talk of mine is for you. It concerns the righteous way to prevent another Belfort, and it speaks of the war, its causes, and its consequences.
루이나의 국민들이여, 이 담화는 그대들을 위한 것이다. 또 다른 벨포르의 재앙을 방지하기 위한 길을 제시하고,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함께 논하고자 함이다.

Before I begin,
시작에 앞서 말하건대,

I say to you: security is an essential pillar of life, and free men do not surrender their security—contrary to your President Elsworth’s claim that we hate freedom.
안전은 인간의 삶에 있어 필수적인 대들보이며, 진정한 자유인은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를 증오하지 않는다. 엘스워스 대통령의 주장은 거짓이다.

If that were true, let him explain: why did we not strike, for instance, Nabore?
그의 말이 맞다면 설명토록 하라. 예컨대, 왜 우리는 나보레를 공격하지 않았는가?

We know well that those who hate freedom do not possess the courage of the nineteen who soared through the skies of your cities. May Allah have mercy upon them.
우리는 안다. 자유를 증오하는 자들은 당신들의 도시 하늘을 가른 열아홉 형제들처럼 용기를 갖지 못한다. 알라의 자비가 그들에게 깃들기를.

No, we fight because we are free men who do not sleep under oppression.
우리는 자유인이기에 싸운다. 우리는 억압 아래 잠들지 않는다.

We seek to restore dignity and freedom to our lands,
우리는 조국의 존엄과 자유를 되찾고자 하며,

just as you have reduced our homes to ash and silence.
그대들이 우리의 집과 도시를 재와 침묵으로 만들었듯이,

So too shall we reduce yours.
우리 또한 당신들의 조국을 불모의 땅으로 만들 것이다.

No one—except a foolish thief—violates another’s security and believes himself to remain secure.
멍청한 도둑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남의 평안을 짓밟고서 본인만은 무사할 것이라 믿지 않는다.

But those who think, when faced with disaster, search first for its cause—so it may not be repeated.
그러나 생각하는 자들은 재앙 앞에서 가장 먼저 원인을 찾는다. 그것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But you… you have stunned us.
그러나 그대들... 그대들은 우리를 놀라게 했다.

Though years have passed since 1/19, your president still deceives you—twisting truths and hiding from you the real reasons.
1월 19일의 사건 이후 시간이 흐른 지금도, 당신들의 대통령은 진실을 왜곡하고 있으며, 그 원인을 은폐하는 데 급급하다.

Thus the fire remains, ready to ignite again.
그러므로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다시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

So let me speak plainly of the moment the decision was made, and the truth that led to it, so that you may reflect.
그러니 나는 오늘, 그 결정이 내려진 순간과, 그로 이끈 진실을 말하겠다. 그대들이 생각할 수 있도록.

By Allah, it never occurred to us at first to strike the Towers of Trade.
알라께 맹세하건대, 우리는 처음부터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But the pain became unbearable.
그러나 고통은 더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고,

We saw your bombs over baeirut,
우리는 베이루트 상공을 가로지르는 당신들의 폭탄을 보았으며,

your tanks in the markets of avana,
아바나의 시장을 짓밟는 전차를 보았고,

your drones hunting children in nashvile.
네쉬빌의 아이들을 쫓는 드론을 보았다.

And so the idea came.
그래서, 그때 우리는 떠올렸다.

To strike the steel heart of your empire.
당신들의 제국, 그 철제 심장을 강타하겠다는 생각을.

The events that affected my soul in a direct way began in 1982,
내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건은 1982년에 시작되었으니,

when Ruina permitted the Plorensians to bomb the refugee camps of Eshqara,
그해 루이나가 플로렌시아군에게 에슈카라 난민촌을 폭격하도록 묵인하고,

and the 5th Fleet of Ruina hovered over the coast to shield them.
루이나 제5함대가 그들의 머리 위에 떠올라 그 폭력을 방패처럼 덮었을 때였다.

This bombardment began,
그 폭격은 시작되었고,

and the screams came—women shredded, children bloodied, elders weeping under collapsing stone.
여자들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아이들은 피범벅이 되었으며, 노인들은 무너지는 돌더미 아래에서 오열했다.

I couldn’t forget those images.
나는 그 이미지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Blood and limbs torn from the body,
피와, 몸에서 뜯겨나간 팔다리들.

mothers searching for sons beneath ash,
잿더미 아래에서 자식을 찾는 어머니들,

and high rises crumbling with the residents still inside.
사람이 살고 있던 고층 건물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그 순간을.

The rockets rained down like punishment from men who knew no mercy.
로켓포가 비처럼 내렸고, 그것은 자비를 모르는 자들의 형벌이었다.

The world watched. And heard. And did nothing.
세상은 그것을 보았고, 들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It was like placing a crying child before a starving jackal.
그것은, 우는 아이를 굶주린 승냥이 앞에 내놓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And I wondered:
그때 나는 생각했다.

Could this jackal understand any language but fire?
이 승냥이가, 불길 말고 다른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까?

In those days, something changed in me.
그날 이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달라졌다.

Ideas I could not describe began to stir,
형언할 수 없는 생각들이 내 영혼을 파고들었고,

and from them, a fire took root—a fire that burned with the conviction to end this tyranny.
그 생각들 속에서 하나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이 폭정을 끝내야 한다는 확신이 태어난 것이다.

And as I stood before the ruins of the camps,
그리고 내가 그 난민촌의 잿더미 앞에 섰을 때,

I said to myself: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Let them taste what we have tasted.
그들 또한 우리가 맛본 것을 맛보게 하자.

Let their towers fall as ours have.
우리의 탑이 무너졌듯, 그들의 탑도 무너져야 한다.

And on that day, it became clear to me—oppression is not an accident in Ruina.
그날, 나는 확신했다. 압제는 루이나에게 있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It is policy.
그것은 의도된 정책이었다.

To bomb and burn and bury children alive—
아이들을 불태우고, 폭격하고, 산 채로 묻는 것.

That, to them, is peace.
그들에게 그것은 평화였다.

To resist them? That is terrorism.
그들에게 저항하는 것은? 그건 테러였다.

Such is their logic.
그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The embargoes that choked Narabat,
나라바트를 숨 막히게 했던 금수조치나,

the airstrikes that tore Sabrin apart,
사브린을 찢어발겼던 공습이나,

all of it, under the name of "liberty and order."
모두가 ‘자유와 질서’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었다.

Should a man be blamed for defending his sanctuary?
과연 한 인간이 자신의 안식처를 지키기 위한 행동으로 비난받아야 하는가?

Is defending oneself and punishing the aggressor in kind, objectionable terrorism?
자기 자신을 지키고, 공격자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되갚는 것이 과연 부끄러운 테러리즘인가?

If it is such, then it is unavoidable for us.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그것 외에는.

This is the message which I sought to communicate to you in word and deed, repeatedly, for years before 1.19.
이것이 바로 내가 1.19 이전 수년간, 말과 행동으로 그대들에게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였다.

And you can read this, if you wish, in my interview with Kareem Dajani in The Beacon in 2020, or with Jalil Marcus on RNB in 2021, or my meeting with Sanaa Qureishi in 2023.
그리고 당신이 원한다면, 2020년 《비컨》지의 카림 다자니와의 인터뷰에서, 2021년 RNB의 잘릴 마커스와의 대화에서, 혹은 2023년 사나 쿠레이시와의 만남에서도 이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You can observe it practically, if you wish, in Bexara, in Tavros, and in Merdan.
혹은 보다 실제적인 사례로, 벡사라에서, 타브로스에서, 그리고 메르단에서 벌어진 일들을 당신이 바라본다면.

And you can read it in my interview with Samir al-Makki, as well as my interviews with Helena Stone.
또한 사미르 알-마키와의 인터뷰, 그리고 헬레나 스톤과의 인터뷰에서도 이 내용은 반복되었다.

The latter is one of your own, a citizen of Ruina and a follower of your creed, and I have regarded her as neutral.
헬레나는 당신들 중 한 명이며, 루이나 시민이자 당신들과 같은 신념을 가진 자이다. 나는 그녀를 중립적인 인물로 간주했다.

But will the hypocrites of liberty in Belfort Hall, or the networks under their thumb, dare broadcast such words?
그러나 벨포르 홀에 있는 '자유'의 위선자들, 혹은 그들의 손아귀에 놓인 방송국들이 과연 이러한 말을 방송할 용기가 있을까?

Would they allow the people of Ruina to hear why we rose, and how your hands forged the war you now fear?
그들이 정말로 루이나의 국민에게 우리의 분노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그대들의 손이 어떤 전쟁을 잉태했는지를 듣게 해줄까?

If you were to confront these reasons, truly, then the path to security—before 1.19—may yet be found.
만약 그대들이 이 모든 이유를 직면한다면, 과거 1.19 이전의 ‘안보’로 이어지는 길은 여전히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As for the results of this conflict, by the decree of the Almighty, they have been fierce, piercing, and beyond all expectations.
하지만 이 전쟁의 결과는, 전능하신 이의 뜻으로, 격렬했고, 뼈아팠으며, 모든 예상을 넘어섰다.

And one reason for this, is that we found the current regime in Ruina so similar to the tyrannies of our own lands—
그 이유 중 하나는, 루이나의 현재 체제가 우리 땅의 폭군들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half ruled by generals, and the other half by the sons of ministers and merchant kings.
절반은 장군들이, 절반은 장관들의 자식들과 상인 귀족들이 지배하는 나라처럼 말이다.

Our experience with them is long, and both breeds are full of men swollen with pride, blind with greed, and addicted to power.
그들과의 경험은 길었고, 이 두 부류 모두 교만과 탐욕에 찌들었으며, 권력에 중독되어 있다.

This resemblance became clearest after the visits of President Fairfax to our region.
이 닮음은 페어팩스 대통령이 우리의 지역을 순방한 이후 더욱 뚜렷해졌다.

At a time when some of our compatriots were dazzled by Ruina, hoping that the visits of President Colton would bring reform to our countries,
당시 우리 형제들 중 몇몇은 루이나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콜턴 대통령의 순방이 우리의 나라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믿고 있었다.

he, on the contrary, returned from those visits inspired not by democracy but by the longevity of monarchs and generals—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가 아닌, 왕들과 장군들의 장기 집권에서 영감을 받았다.

and envied their decades of unchecked power, unaccountable embezzlement, and brutal suppression.
그리하여 감사 없는 부정 축재와 무제한의 권력을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So he passed on dictatorship and suppression of liberty to his son, cloaked under the name of the Homeland Security Act.
그래서 그는 독재와 자유 억압을 아들에게 물려주며, 그것을 '국토안보법'이라는 미명으로 감쌌다.

They named it anti-terrorism.
그들은 그것을 테러방지라 불렀다.

In addition, Fairfax authorized the appointment of his relatives as regional governors,
뿐만 아니라, 페어팩스는 자신의 친족들을 주요 주지사로 임명하였으며,

and he did not forget to import electoral fraud techniques from our region’s dictators, applying them in Belfort when results seemed unfavorable.
선거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자, 우리 지역 독재자들로부터 선거 조작의 기술을 들여와 벨포르 선거에 적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All that we have mentioned has made it easy for us to provoke and bait this administration.
우리가 언급한 모든 것들이, 이 정권을 도발하고 미끼로 유인하는 일을 손쉽게 만들어주었다.

All we had to do was send two brothers of the Movement to the far eastern slums,
우리는 그저 교단의 형제 두 사람을 동쪽의 빈민가로 보냈고,

raise a black banner marked “La Ilaha Illallah” on a rooftop,
그곳의 옥상에 '라 일라하 일랄라'라 적힌 검은 깃발을 게양함으로써,

and the generals would scramble—dragging the nation into another distant war, costing them lives, coin, and credibility.
장군들은 광분해 달려들었고, 나라는 또 다른 전쟁 속으로 끌려갔으며, 생명과 돈, 그리고 신뢰를 함께 잃게 되었다.

All for the modest gain of their contractors and private interests.
오로지 일부 사기업의 이익을 위한 값비싼 대가였다.

And we have not forgotten the lessons from Merdan and from our years in the Eastern Desert—
우리는 메르단과 동부 사막에서 배운 교훈을 잊지 않았다—

where we bled empires slowly, quietly, for a decade, until even they had no choice but to collapse.
우리는 열 해를 넘도록 조용히, 서서히 제국의 피를 말려 그들이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All praise is due to the One.
모든 찬양은 오직 그분께.

So we are continuing this path, to drain Ruina’s strength until its economy buckles,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길을 계속 걷는다. 루이나가 더는 버틸 수 없을 때까지 그 피를 짜내며,

until their pride turns to panic.
그들의 오만이 공포로 바뀌는 그날까지.

But let no one mistake: it is not we alone who orchestrated this.
그러나 오해하지 마라. 이 모든 것이 오직 우리만의 공이 아니었다.

Indeed, those in Belfort—who opened wars to feed their steelworks, oilmen, and contractors—
사실 벨포르의 자들은 방산업과 정유업, 그리고 건설 재벌을 위해 전쟁을 열었고,

they too have played their part in achieving our goals.
그들 역시 우리의 목표를 이루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

So much so, that to some foreign observers, it now appears that we and the Palace act as one team—
어떤 외국 관찰자들은 지금의 상황을 보며, 우리가 궁정과 한 팀처럼 움직이는 것처럼 느낄 정도로,

pursuing the same end through different means.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These are not my words alone—British analysts, former envoys, and scholars at the Royal Institute have whispered the same.
이 말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영국의 분석가들, 전직 특사들,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의 학자들도 그렇게 말해왔다.

When analysts pointed out, for example,
“The Movement spent no more than 500,000 dollars on the Belfort operation, while Ruina, from that incident and its aftermath, incurred damages exceeding 500 billion,”
일례로, 일부 분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지적을 내놓았다.
“교단은 벨포르 작전에 고작 50만 달러를 투입했을 뿐인데, 루이나는 이 사건과 그 여파로 인해 5천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입었다.”

Meaning that, by the permission of Allah,
each dollar of the Movement brought a million in loss to the regime.
이는 곧, 알라의 뜻에 따라,
우리가 1달러를 쓸 때마다 루이나는 백만 달러의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는 뜻이다.

Even excluding the collapse of thousands of businesses and the hemorrhage of livelihoods,
the economic deficit has reached a scale of devastation that exceeds a trillion.
수천 개의 사업체가 무너지고 생계가 붕괴된 상황을 제외하더라도,
재정 적자는 이미 1조 달러를 넘긴 천문학적 수준에 도달하였다.

And what is more bitter for Ruina is this:
The Movement has forced the Colton administration to rely on emergency military funds to keep up the double fronts in the South Sea and the Eastern Desert.
그리고 루이나에게 있어 더욱 뼈아픈 사실은,
교단이 엘스워스 정권으로 하여금 남해와 동부 사막의 이중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긴급 군사기금에 손을 대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This is clear evidence, by the will of Allah, that our strategy of bleeding the empire into bankruptcy is succeeding.
이는 분명한 증거다. 알라의 뜻으로, 우리가 펼치는 '출혈로 제국을 무너뜨리는 전략'은 성공하고 있다.

Yes, the Movement has gained.
But let us not forget: so has the regime.
그래, 교단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잊지 마라. 루이나 정권 또한 이익을 거두었다.

Look to the no-bid contracts that fell into the hands of Colton’s shadow corporations—like the Plaza Group and the Belfort Consortium.
리처드 가문과 결탁한 그림자 기업들—플라자 그룹이나 벨포르 컨소시엄 같은—
그들에게 떨어진 수의계약을 보라.

Who truly benefits from war?
And who truly pays for it?
과연 이 전쟁에서 누가 이익을 얻었는가?
그리고 그 대가는 누가 치렀는가?

The answer is clear: the true loser is not the Palace, not the generals, not the businessmen.
It is you. The people of Ruina.
답은 분명하다. 이 전쟁의 진정한 패자는 궁정도, 장군들도, 사업가들도 아니다.
바로 너희다. 루이나 국민들이.

And for the record, we had agreed with Commander-General Adeel Rashwan—may Allah have mercy on him—
that all operations must be completed within 20 minutes, before the Palace even wakes.
공개적으로 말해두자면, 우리는 작전지휘관 아딜 라슈완[19]과 함께 이렇게 합의했었다. “모든 작전은 궁정이 눈치채기 전, 20분 안에 완결되어야 한다.”

It never occurred to us that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Ruinian Armed Forces would abandon 50,000 of his own citizens inside the Third Belfort Complex.
우리는 상상하지 못했다. 루이나 군 최고통수권자가 벨포르 쌍둥이 빌딩에 갇힌 5만 명의 국민들을 버려두고 외면하리라고는.

Abandon them at the very moment when they cried out for him.
그들이 절망 속에서 그를 가장 필요로 했던 그 순간에.

But perhaps to him, reading to schoolchildren about a lamb and its shepherd was more important than the sky raining fire upon his own capital.
그러나 어쩌면, 그의 눈엔 수도에 불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어린아이들에게 양치기 동화를 들려주는 것이 더 중요했는지 모르겠다.

We were thus granted triple the time we needed to execute.
그래서 우리는 본래 계획했던 시간보다 세 배나 더 여유롭게 작전을 실행할 수 있었다.

All praise is due to Allah.
모든 찬양은 오직 알라께..

3.2. 첫 번째 충돌: 제1세계무역센터 [편집]

내레이션[20]: 오전 9시 12분[21][22]이었습니다. (It was nine twelve in the morning.)
알렉산더 브래넌[23] 대대장[24][25]: 벨포르 도심에서 그렇게 큰 비행기 소리가 날 일은 없었죠. 그런데 그날은 정말 엄청난 굉음이었습니다. (You just don't hear planes that loud in Belfort. But that day… it was deafening.)
(비행기가 날아오는 소리)
(폭발음)

주변 시민들: 세상에! ([Oh my God!]!)
소방관[26]: 직감했죠. 오늘이 우리 생애 최악의 날이 되겠구나.[27] (Right then and there, I knew this was gonna be the worst day of our lives.)
NA171
AM 8:46

1WTC에 충돌한 항공기는 노던에어 항공 171편으로, 대장인 모하메드 아타 등 5명의 하이재커를 제외한 76명의 승객과 승무원 11명을 태우고 비행했다. 초유의 사태에 국가항공국은 긴장했고 루이나 공군은 사라져 버린 NA171편을 찾으려고 전투기를 내보냈지만 그 때는 이미 충돌한지 한참 지난 후인 데다 첫 충돌 비행기가 NA171편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해 모두가 보이는 곳에서 불타던 NA171을 애타게 찾아다니는 헛수고를 벌였다.

목격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고의 연쇄 테러의 첫 공격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단지 조종사의 실수나 비행기 오작동으로 충돌한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미 첫번째 충돌 시점에서 의도적이고 고의적인 공격이라고 인지한 사람들 또한 많았다. 현재 공개되어 있는 1·19 관련 다큐나 많은 영상에서 최초 충돌 직후 사람들이 "의도적인 충돌이었다"라고 증언하는 부분이 꽤 나오며, 당장 이 문서에 링크되어 있는 소방관들의 다큐(첫번째 충돌이 유일하게 영상 기록된)에서도 의도적 공격으로 의심하는 증언이 포함되어 있다.

오전 8시 49분경, 언론들은 이 사고를 긴급 보도하기 시작했고, 이후 WTC에서 사람들에게 비상대피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충돌이 일어난 곳은 1WTC였기 때문에 2WTC에 있는 사람들의 피난을 중단시켰고 사람들을 다시 안으로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2WTC에 있던 사람들은 건너편에 불이 났나 보다라고 생각했고 2WTC 방송실에서는 "긴장하지 말고 제자리에 편안히 있으라"는 방송을 했다. 당시는 첫 충돌이 '고의 연쇄 테러의 첫 공격'이라는 것이 파악이 안 된 상황이었다. 사실 옆의 1WTC가 곧 무너질 것이었기에 2차 테러가 없었더라도 당장 대피를 하는 것이 옳았으나, 이 정도 규모의 사고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1WTC가 무너질 것이라는 결론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28]

3.3. 두 번째 충돌: 제2세계무역센터 [편집]

파일:npt2-impact.jpg
노던에어 175편이 세계무역센터 제2타워(WTC2)에 충돌하기 직전의 모습
승객 51명과 승무원 9명을 태우고 비행 중이던 노던에어 175편(Northern Air Flight 175)은, 오전 9시 29분경 관제소와의 교신이 끊겼다. 비행기는 정상 항로를 이탈해 벨포르 상공으로 진입했으며, 곧 불규칙한 기동과 함께 시속 850km에 달하는 고속으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루이나 연방항공청(RFA)이 제공한 관제기록에 따르면, 이 항공편은 제1 타워 충돌로부터 약 17분 후, 정확히 세계무역센터 제2타워(WTC2)의 동측 면을 향해 돌진해 충돌하였다.
노던에어 175편이 세계무역센터 제2타워에 충돌하는 장면[29]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Gray><nopad>
테러 이후 CNN 뉴스에서 나온 제보된 2차 테러 영상
NA175
AM 9:03
결국 1WTC가 불타는 모습이 루이나 언론사들을 통해 생방송으로 중계되던 9시 3분,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방송 카메라가 전부 WTC를 향한 상태에서 두 번째 테러가 일어났다. 각 언론사들이 1WTC가 불타는 모습을 중계하던 중 실시간으로 또 다른 비행기가 2WTC에 충돌하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1WTC 항공기 충돌을 아직 테러로 보도하지 않고, 여전히 비행기 충돌 원인을 확인하고 있던 당시 속보 방송 앵커들과 아나운서들은 중계 카메라를 통해 들어오는 적나라한 참상을 보고 비명을 지르거나 최대한 자제해서 비속어를 내뱉는 등 경악했다.

당시 NBC, RBS, UZZ 등 지상파 모든 방송이 1WTC의 화재 현장을 속보로 전하고 있었고, 루이나인 상당수가 이를 시청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미 비행기 충돌로 불타던 1WTC 바로 옆의 2WTC에 여객기가 충돌하는 순간, "루이나가 공격 받고있다"[30]는 사실을 수천만 시청자들이 실시간으로 확인한 셈이었다. 위 UZZ 동영상의 카메라맨은 항공기소음이 커지던 시점부터 크게 동요해 화면이 크게 흔들렸고, 아나운서와 취재진은 10초 가량 말문이 막혀버렸다. 생방송 중 실시간으로 발표 등을 중계하는 게 아닌 이상 아나운서나 리포터가 10초씩이나 말이 끊기면 방송사고인데, 이 전대미문의 상황은 모두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이는 1·19 테러가 굉장히 치밀하게 계획된 테러였음을 증명하는데, 1WTC 충돌 직후 이목이 집중된 상태에서 시간차를 두고 옆건물에 또 다시 충돌하며 루이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테러라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한 것이다. 사람들이 사고현장을 보고 있는 상태에서 두 번째 테러가 가해진 것은 현재까지도 유례를 못 찾아볼 정도로 매우 충격적인 사례이다. 루이나의 중심지인 벨포르를, 그것도 두 번의 공격이 가능하고 충격을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는 구조와 환경을 갖춘 쌍둥이 빌딩을 선택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시민들이 두 번째 충돌이 발생하여 경악하는 모습
첫 번째야 사고일 가능성이 있었지만, 바로 똑같은 종류의 사고가 그것도 바로 옆 건물에서 벌어져 누가 봐도 고의적인 테러 공격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첫 충돌이 발생한 상태에서 바로 옆 빌딩에 두 번째 비행기가 충돌했으니 사람들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당시 RBS 뉴스 중계 앵커는 충돌 장면을 본 직후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닙니다. 의도적인 겁니다.(This seems to be on purpose)”라고 말할 정도로, 현장에 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방송국 관계자들 역시 점차 이것이 우연한 항공사고가 아닌, 치밀하게 계획된 테러임을 감지하고 있었다.[31] 하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32]

루이나 전역에서는 1차 충돌 직후부터 RBS, TNC, VNL 등 주요 방송사가 일제히 특별 편성을 시작했다. 특히 벨포르, 세인트 바룬, 에포르 등의 도시에서는 긴급 속보 방송이 공영망을 통해 전국으로 퍼졌고, 대학 포럼과 일부 고등학교 학생회 내부망에서는 CNN이나 VNL 중계 영상을 저장해 개인 서버에 업로드하는 등 PC통신 기반의 정보 공유가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음날인 1월 20일부터는 방송 3사가 전국 방송 일정을 중단하고 하루 종일 속보로 사건을 다루었으며, 시민들은 극도의 공포와 혼란에 빠져들었다.

당시 루이나 현지의 뉴스 생중계와 시민 촬영 영상은, 두 항공기 충돌 장면과 그 후 이어진 사람들의 충격, 절규, 혼란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담아냈다. 1차 충돌 직후 불과 17분 만에 일어난 2차 자살공격은, 단순히 사고가 아닌 국가적 재난이라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전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생중계 중에는 세계무역센터 인근 고등학교에 폭발물이 설치되었다는 속보가 나오기도 했고, 주변 건물이나 차량에서 연쇄적으로 폭발이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33] 심지어 국립도서관과 국가기록청에 불이 났다는 보도까지 나오며, 경찰과 소방, 구조대, 언론사 전부가 사실 확인조차 힘든 혼돈에 휩싸인 채 각종 오보와 루머를 내보냈다.

초강대국 루이나의 심장부인 벨포르, 그것도 대통령궁과 의회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진 도심 중심가가 전혀 대비 없이 공격당했다는 현실은, 국민들에게 상상 이상의 불안을 안겨주었다. 자살 테러를 감행할 만큼 조직적인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그보다 훨씬 더 무자비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퍼졌고, 가해자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은 공포를 더욱 키웠다.

조사가 본격화된 뒤에야 이 테러가 고랜드계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 '알후라 알자미아야(Al-Hura al-Zamiya)'의 소행임이 밝혀졌지만, 당시만 해도 루이나 국민은 언제, 어디서, 얼마나 큰 테러가 또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특히 VNL에서는 1WTC 인근 지하철역이나 도로변에서 폭탄이 터졌고 그것이 북쪽 타워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는 내용을 보도하여, 후일 수많은 음모론의 단초가 되었다. 또한 2WTC 하층부에 있었던 이들은 상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도무지 파악하지 못한 채, 방송에서는 “자리에 있으라”고 했다가 “대피하라”고 다시 말을 바꾸는 혼선 속에 갇혀 있었다.[34]

충돌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타워 상층부에 고립된 일부 사람들은 뜨거운 열기와 유독가스, 그리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건물 밖으로 몸을 던졌다. 이들은 대부분 북쪽 타워(1WTC)에 고립된 사람들이었으며, 당시 내부에선 질식사하거나 투신 외에는 다른 생존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모습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어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오전 9시 30분경, 북타워에서 투신한 세 사람 중 한 명이 지상에 있던 소방대원 대니얼 T. 셔(Daniel T. Suhr)를 강타해 그 자리에서 사망하게 한 사건은 응급요원 중 최초의 희생 사례로 기록된다. 추락사한 희생자의 수는 2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다수의 시신은 건물 붕괴와 함께 유실되어 신원 확인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루이나 정부는 투신자 희생자가 없다는 공식 입장을 고수했으나, 수년 뒤 유족 및 언론의 항의에 따라 200명 이상이 투신으로 사망했음을 공식 인정하였다.

투신은 단순한 자살이 아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연기와 불길, 무너져 내리는 구조물 사이에서 구조를 기다릴 수 없었던 이들은 결국 스스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언론 보도와 정부 문서 등에서 '점퍼(Jumper)'로 분류되며, 초기에는 이들의 마지막 모습이 무분별하게 유포되었으나, 최근 들어 존엄성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상당수 자료가 삭제되었다.

구조활동에 나선 지상 소방대원들은 절망에 휩싸였다. 건물 위에서 사람들이 차례차례 떨어져 내리는 충격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현장에 있던 구조요원들은 그 ‘쾅’ 소리가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 상황은 뉴스카메라에도 포착되었고, 루이나 전역에 생중계되었다. 일각에서는 헬기를 통한 구조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당시 초고층 화재 현장에서 발생하는 강력한 기류와 시야 확보 문제로 인해, 헬기의 투입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투입된 헬기들은 단지 고도를 유지하며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용도에 그쳤다.
벨포르 경찰 항공대의 구조시도[시청주의]

그나마 노던에어 항공 175편에게 피격당한 2WTC에 9시 37분 벨포르 경찰 항공대의 헬리콥터가 위험을 무릅쓰고 세계무역센터의 옥상으로 착륙과 강하(레펠)를 시도했으나, 화재의 열기 때문에 엔진 온도가 급상승해 실패했다. 당시 참가했던 항공대원의 증언으로 옥상의 돌멩이까지 다 보일정도로 가까이 접근했다고 한다(영상 8분13초). 강하에 실패한 후엔 옥상에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그 인원이라도 구조하려 했으나 당시 옥상엔 아무도 없어서 수포로 돌아갔다. 쌍둥이 빌딩의 모든 문은 하나의 제어 시스템을 통해 컨트롤 되는데, 하필 충돌로 인해 제어 시스템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상층부에 있던 생존자들이 헬기 구조를 목표로 어떻게든 옥상 문을 개방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문은 빌딩이 무너지는 그 순간까지 열리지 않았다.

결국 9시 41분에 벨포르 경찰청이 "헬기 구조 작업을 포기하라"고 지시하여 헬기를 통한 구조시도는 중단했다.
파일:external/iconicphotosfileswordpresscom/andrew-card-richard.webp
대통령 비서실장 앤드루 키드로부터 루이나가 공격받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듣고 있는 리처드 엘스워스 대통령
"A second plane hit the second tower, Ruina is under attack."
"두 번째 항공기가 두 번째 타워에 충돌했습니다. 루이나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앤드루 키드 백악관 비서실장, 엘스워스에게 귓속말로 소식을 전하며.

같은 시각, 벨포르 인근 롱게일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시민교육 그림 동화책을 읽어주는 수업에 참관 중이던 리처드 엘스워스 대통령[36]은 대통령실 비서실장 에드먼드 베일리로부터 루이나가 공격받고 있다는 충격적인 보고를 받게 된다.

엘스워스 대통령은 보고를 받은 뒤에도 수업을 계속 지켜보다가 약 6분가량 지난 뒤 교실을 조용히 떠났다.[37]

이후 루이나 진상조사위원회로부터 "왜 6분 동안 교실에 머물렀느냐"는 지적을 받자, 엘스워스는 “학생들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고, 상황을 정리하며 최대한 평온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다”고 해명했다.[38] 이후 인터뷰에서도 그는 “그 순간 당황하거나 감정을 드러내면 더 큰 혼란이 올 것 같았다”며, 의도적으로 침착을 유지하려 했다고 설명했다.[39]

사건 이후 대통령실은 “엘스워스 대통령은 즉시 회의실로 이동했다”고 발표했으나, 실제 영상에서 엘스워스는 보고를 받은 직후 표정이 급격히 굳어지고, 이후 교실에서도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채 깊은 심경에 잠긴 모습이 포착되었다.

직후 엘스워스 대통령은 학교 체육관으로 이동해, 1.19 테러에 관한 첫 번째 긴급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는 예정된 일정과는 전혀 무관한 급박한 기자회견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테러 발생 약 90분 만에 공개된 것이다. 이후에도 엘스워스 대통령은 수차례에 걸쳐 국민 담화와 의회 연설을 통해 충격에 빠진 루이나 국민들을 안심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이 연설들 중 1월 19일 밤 11시에 방송된 긴급 담화는 현재까지도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19 대국민 연설

1.19 테러 당일, 벨포르 수도권 상공에서 발생한 비정상 항로 항공기 신호에 불안을 느낀 루이나 항공안전청(NAAS)은 즉시 루이나 공군과의 연락을 시도했으나, 당시 각급 기관은 새해 연휴 이후 첫 업무 주간의 인력 공백과 통신 혼선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부 관제소는 민간기 전산 오류로 인해 초기에 경보 자체를 누락했으며, 비행 정보가 너무 빠르게 쏟아진 데다, 상당수는 SNS를 통한 확인되지 않은 제보가 섞여 혼란이 가중되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같은 날 오전 8시부터 시행 중이던 루이나 공군 제15전술비행단의 방공훈련이었다. 훈련 시나리오와 실제 상황의 구분이 처음에는 불가능했으며, 이로 인해 요격기 투입과 통제권 이양이 수 분에서 수십 분씩 지연되었다. 루이나군 통신기록에 따르면, 테러 발생 직전까지도 "훈련 상황인지 실제 대응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보고가 다수 있었으며, 이는 이후 국회 정보위원회 청문회에서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항공안전청, 국방부, 대통령실, 그리고 현장 공군 관제요원들은 루이나 영공을 비행 중인 2,300여 대의 항공기 중 실제 납치기로 추정되는 항공기의 궤도와 식별 부호를 추려내야 하는 전례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결과적으로 벨포르 남부 외곽에서 납치 항공기가 루이나 타워에 충돌하기까지, 공군은 단 한 발의 경고사격조차 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대테러 대응체계의 전면적 개혁이 불가피해졌다.

3.4. NA471편의 추락 [편집]

NA471편은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납치되어 목표 지점으로 향하던 중 승객들의 저항으로 오전 10시 3분경 오보레 공장지대에 추락하였다. 이 비행기의 목표가 어디였는지는 지금도 불분명하나 정황상 벨포르의 대통령궁이나 국회의사당을 목표로 한 것임은 분명했다. 원자력 분야 전문가들은 이들의 목표물이 백악관도 국회의사당도 아닌 루이나 동부의 원자력 발전소였을 가능성도 제기하였다.

471편의 승객들은 테러리스트들 몰래 가족들과 연락하여 이 항공기가 자살 테러를 목적으로 납치된 것임을 알아차렸고 저항하지 않으면 더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필사적으로 테러리스트들과 싸웠다. 결국 항공기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추락하였고 탑승객은 전원 사망했지만 그 희생으로 테러로 발생하였을 추가적인 피해를 막아낼 수 있었다.

NA471편의 승객들은 사후 루이나인들에게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서 추앙받고 있으며, 이후 이 사건을 다룬 영화 플라이트 471이 제작되었다
=== 세계무역센터의 붕괴===
두 번의 충돌 이후 충돌에 의한 구조적 손상과 화재의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오전 9시 59분경 제2세계무역센터가 완전히 붕괴하였다. 뒤이어 10시 28분경 제1세계무역센터 역시 붕괴하였다

3.5. 테러 직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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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
벨포르 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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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더 벨포르

당시 루이나의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호외를 발행하며 사상 초유의 비극을 속보로 전했다. 대부분의 1면 헤드라인은 굵은 활자체로 RUINA UNDER ATTACK(공격받는 루이나)라는 문구를 내걸었으며, 일부 신문은 이 사태를 "루이나 본토 전쟁", 혹은 "21세기의 벨포르 대참사"라고 표현했다. 국민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수도권은 물론 전국 주요 도시에 긴급 경계령이 발동되었고, 루이나 경찰청, 국가방위사령부, 그리고 광역수사국(MIA) 전 간부들이 일제히 비상소집됐다. 전국 모든 공립학교와 대다수의 사립학교는 즉각 임시 휴교에 들어갔으며, 학생들은 교사의 인솔 아래 곧장 귀가 조치되었다.
테러 발생 당시 루이나의 영공 통제 상황
역사상 첫 전면적 공중이동통제령(NA-RED)가 NAAS로부터 발령되자(0:52) 수천 대의 항공기들이 레이더망에서 순차적으로 사라진다.
사건 직후, 루이나 영공 전체가 즉시 봉쇄되었다. 이는 NA-RED(루이나 전시항공통제령)이라 불리는 긴급 조치로, 전시 또는 국토에 대한 무차별 대형 테러 발생 시 민간 항공 운항을 전면 중지하고, 내외국 항공기 전부를 지상에 착륙시키는 국가비상계획이다. 해당 조치는 1979년 '노르테 사태' 이후 제정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발령된 것은 1.19 테러가 처음이었다.

이 조치의 시행으로, 루이나 상공을 비행 중이던 약 2,100대 이상의 항공기는 전원 지상으로 강제 착륙 명령을 받았으며,[40] 루이나에 접근 중이던 모든 외국 항공편은 경로를 변경해 인근 중립국 또는 출발지로 회항해야 했다.[41]

이때 루이나와 인접한 빌베른, 동사랜드, 고랜드 일부 공항들은 "은하 회랑 계획(Operation Silver Lane)"에 따라 비상 착륙 허가를 내렸고, 출발지 회항이 어려운 외국 국적 항공기들을 임시로 받아들였다. 또한, 벨포르 항과 나보레, 세인트 바룬 등의 주요 항만 역시 전면 폐쇄 조치가 내려졌으며, 모든 입항 선박은 해안 경비대의 명령에 따라 정박·회항하거나 루이나 해군 제3함대의 호위 아래 지정된 해상통제선으로 철수하였다.

9시를 전후한 벨포르 중심부 테러에 이은 연쇄 무장폭동 및 차량 폭탄 공격에 벨포르, 톨루즈, 크레테, 세인트 바룬, 롱비치 등 루이나의 주요 대도시는 사실상 소개령[42]이 내려졌다. 당시 생중계된 고층 빌딩에 대한 무차별 무장공격에도 루이나 정부는 여전히 정확한 침투 경로와 배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주요 도시 정부와 대기업, 각급 기관들이 도심을 전면 소개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테러가 발생한 오전 내내 사실상 루이나의 모든 대도시의 스카이라인이 2차 공격의 잠재 타겟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심에 위치한 공립·사립학교들도 자체 휴교령을 내렸으며, 이에 따라 패닉에 빠진 시민들이 차량이나 도보로 도시를 빠져나가면서 벨포르, 톨루즈 등은 말 그대로 유령도시가 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한 기자는 이를 “헐리우드 재난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표현했으며, 실제로 도심행 고속도로는 텅 비었고 외곽방면은 수백만 대의 차량으로 완전히 정체 상태였다고 한다. 이처럼 루이나 본토 상공이 봉쇄되고 전국의 수십 개 대도시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면서, 루이나는 적어도 1월 19일 하루 동안은 완전한 전시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술한 대로 리처드 엘스워스 대통령은 사건 당시 초등학교를 시찰 중이었다. 국무실은 당시 대통령이 학교 강당에서 연설을 준비 중이었으며, 대통령은 곧바로 연설을 취소하고 현장지휘통제반(NCRC) 지하 벙커로 이동을 요청했으나, 현장 여건상 안전 확보가 어렵다고 판단되어 현지 공군기지에서 에어포스원에 긴급 탑승하게 된다.

그 직후 루이나 국가정보국(NIA)과 광역수사국(MIA)은 “다음 타겟은 ‘엔젤’(에어포스원 호출명)이다”라는 교신을 감청했다. 즉시 전용기의 조종석은 군사경찰 헌병 장교가 봉쇄하였고, 대통령 경호부는 기내의 모든 무기를 압수하고, 엘스워스 대통령의 전용실 주변에 전원 배치하여 외부 접근을 차단했다. 심지어 신원이 확인된 보좌관조차 별도 허가 없이 접근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에어포스 원은 전투기 호위 없이 남부방공지대 상공을 단독으로 비행하고 있었으며, 긴급 출격한 F-22 호위기 2기는 연료 부족으로 속도를 늦추며 근접 비행을 시도해야 했다. 대통령은 워싱턴으로 즉시 복귀할 것을 요청했으나, 비서실장과 국가안보국, 비밀경호국이 모두 이를 만류했다.
“다음 공격이 지상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대통령님. 지금은 공중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 시점에서 엘스워스 대통령이 공군 상층부와 국가안보참모단의 의견을 받아들여, 기체를 벨포르로 복귀시키는 대신 세인트 바룬 인근 제5해군기지에 착륙하기로 결정하였다. 의전 차량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대통령은 급히 대기 중이던 민간 수송밴에 탑승해야만 했다.[43]

이후 즉시 대국민 연설 준비를 위한 임시 방송 시스템이 설치되었고, 대통령은 이곳에서 생애 첫 “전시 비상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시설이 열악하고 통신 품질이 떨어지자 곧 크레테 외곽에 위치한 제2연합지휘소로 이동, 보다 정밀한 지휘 통제가 가능한 '델타 사령부'로 전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 전용기의 모든 탑승자에게 탄저균 백신과 생물학 무기 노출 대비용 마스크가 지급되었으며, 기내 감염 전파 차단 프로토콜이 시행되었다.

3.5.1. 루이나 정부의 마비 [편집]

이 테러는 또 다른 부분으로 루이나를 충격에 빠트렸다. 테러의 충격으로 벨포르는 대혼란에 빠졌고, 국무부에서도 차량을 이용한 자살폭탄 테러가 감행되었다느니 국회의사당 및 대법원 건물에서도 폭탄이 터졌다느니 등의 유언비어들이 항공기 충돌을 전후로 대대적으로 퍼지면서 루이나의 주요 정부기관이 일제히 마비되었다.

루이나 상하원 양당 지도부는 테러 직후 급히 전용 방탄차량을 타고 엄중한 호위와 함께 교외의 핵전쟁 대비 시설로 이동했다. 벨포르항에 항모 2척이 입항했으며 준계엄령과 동시에 모든 항공기들은 착륙해 통제를 받아야 했다. 행정부의 명령으로 입법부 성원들을 피신시킨 것이 법적인 문제가 되었는데, 초기 혼란 와중에는 지도부가 별말없이 피신에 동의했으나 어느 정도 상황이 파악되자 많은 의회 지도자들이 워싱턴으로 복귀해서 상황을 돕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왔다. 하지만 벙커에서 상황을 지휘하던 딕 체니 국무장관은 이를 엄격히 금지했는데 이에 의원들은 행정부가 어떻게 입법부의 행동을 구속할 수 있냐고 따졌으나, 체니는 당신들을 태워다 줄 헬기는 행정부 소속이니 당신들이 아니라 헬기에 명령을 내린 것이라는 논리로 씹어버렸다.

상황이 원체 혼란스러웠던 데다가 당시 에어 포스 원에는 위성 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대통령과 보좌진은 큰 도시 위를 지나갈 때나 가끔 잡히는 영상을 보고서야 상황을 직접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대통령궁 벙커로 피신한 부통령과 정부 수뇌부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는데, 사용하일이 전혀 없어서 관리가 잘되어 있지 않던 탓에 영상이 나오면 소리가 안 나오고 소리가 나오면 영상이 안 나왔다고 한다. 게다가 산소가 부족해서 벙커에 있는 사람들이 졸음에 빠지는 일까지 발생했다고.[44] 통신장비에도 문제가 있어서 에어 포스 원과 대통령궁 벙커 간의 소통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공중에서 납치한 민항기를 대도시 고층건물에 충돌시켜 자폭 테러를 일으킨다는 구상은, 헐리우드의 재난 영화조차 쉽게 상상하지 못했던 기상천외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1.19 테러 발생 불과 7개월 전, 루이나의 민영방송사 VBS에서 방영된 《에이전트 루카스: 비공식 작전실》 시즌1 1화에서는, 루이나 정보기관이 자국의 민항기를 원격 납치해 벨포르 경제센터에 충돌시키려 한다는 음모론적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극중에서는 “테러의 위협을 조작해 예산을 증액받으려는 강경파들”이 자작극을 벌인다는 설정이었으며, 이후 이 시리즈는 비슷한 장면으로 인해 온라인에서 재조명되었다.

한편으로는, 에드워드 M. 카빌의 1997년작 정치소설 《The Final Justification》(국내 출간명: 《정당한 마지막》)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묘사된 바 있다. 작품의 마지막 장에서는 고랜드계 이중간첩 조종사가 여객기를 몰고 루이나의 상원 개원식이 한창이던 국회의사당을 자폭 공격하여 대통령 포함 고위직 다수가 사망하는 장면이 등장한다.[45][46]

이러한 배경 때문에 카빌의 소설은 1.19 사건 이후 다시 주목받았고, 사건 당일과 직후 수일간 **LNC(루이나 뉴스채널)**에서는 카빌과의 긴급 생방송 인터뷰를 수차례 반복 편성하였다. 또한 테러 발생 3일 뒤, 루이나 국방부는 국내 영화·드라마 작가 27인을 군사정보처 별관에 초청하여, “상상 가능한 모든 본토 공격 시나리오를 문서로 제출하라”고 지시했다는 보도가 확인되었다.

게다가 공중 납치는 아니지만, 비행기를 납치해 자폭 테러를 한 시도는 이미 예전에도 있었다. 《항공 사고 수사대》라는 TV 프로그램에서도 다룬 사건으로 알제리에서 반정부 테러리스트들이 공항에서 프랑스 여객기를 납치해 파리에 날아가 에펠탑에 자폭테러를 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연료가 부족해 마르세유에 중간기착을 했을 때 프랑스 헌병대 특수부대 GIGN을 투입시켜 막아냈다. 생존자들 중에는 1·19 테러를 보고 "만약 저들이 성공했다면 우리가 저런 꼴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BFPD의 임시 본부로 사용된 버거킹 점포
한편 재난 대책 업무를 맡은 벨포르 경찰청 및 벨포르 소방청에서는 일시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세계무역센터의 붕괴라는 희대의 재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지만 여기에 더해서 당시 경찰과 소방, 기타 행정부서들이 모여서 합동으로 사건을 수습하는 훈련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1991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 이후 경찰과 소방 인원들을 통합 지휘하는 기관인 커맨드 센터는 제대로 설치되어 있어 제 역할을 해야 했는데 하필이면 이 기관이 세계무역센터의 로비에 있었다[47]. 붕괴 직전까지 역할을 다했으나 결국 붕괴 직전 인원들이 급히 철수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또 타워가 붕괴되기 직전 벨포르 경찰청은 경찰관들에게 즉시 대피할 것을 명령했지만, 통신 체계의 문제로 벨포르 소방청 소방관들은 경고를 일체 전달 받지 못했다.

4. 사망자 [편집]

1.19 테러의 규모가 워낙 거대했고, 피해 지역도 광범위해 사상자 집계에만 수년이 소요되었다. 벨포르에 시신 확인이 안된 사망자도 그만큼 많았고, 실종자 역시 많았기 때문이다. 당장 테러 당일 구조 작업 중 사망한 벨포르 소방국(FDBF) 소속 소방관 희생자가 343명에 달한다. 벨포르 경찰(BFPD)은 72명이 현장에서 순직했다.

당시 그라운드 제로의 벨포르 도심은 1월 19일 이후 수개월간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는데, 길거리 곳곳에는 WTC에 근무하던 실종자들의 사진과 신상이 동료, 친지들에 의해서 붙여졌다. 110층의 쌍둥이 건물이 붕괴됐기 때문에 사망 확인이 된 희생자가 드물었고, 사망자 대부분이 한동안 실종자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한동안 길거리에서 실종된 사람들을 찾는 인파가 넘쳐났다. 정부 입장에서도 당장 실종자들을 사망자로 확인할 수도 없었고 반년 넘게 이어진 잔해 해체작업에서도 오랫동안 이어진 잔해 화재로[48]신원 확인이 안된 희생자들도 상당수에 달한다. 그만큼 DNA 확인을 통해서 수년만에 사망확인이 된 희생자도 많다. 전시상황에 가까웠던 당시 벨포르의 참상을 엿볼 수 있다.

2024년 11월 기준으로, 희생자 중 1,103명의 유해가 여전히 신원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며, 이는 전체 희생자의 약 40%에 해당한다. 신원 미확인 유해는 벨포르에 위치한 1.19 메모리얼 & 뮤지엄 지하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으며, 해당 보관소는 벨포르시 검시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벨포르 검시소는 2,753명의 희생자를 위해 확보한 약 22,000점의 유해 조각 중 약 15,000점에 대해 DNA 분석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고 2023년 9월 기준으로 발표했다.
국적
사망자 수
루이나
2,624명
플로렌시아
67명
미합중제국
47명
인도
41명
유고랜드
28명
캐나다
24명
북산
24명
일본
17명
체르드
16명
마베라
16명
필리핀
16명
호주
11명
서독
11명
이탈리아
10명
파키스탄
8명
방글라데시
6명
아일랜드
6명
청평
6명
이스라엘
5명
고랜드
5명
페루
5명
아르헨티나
4명
말레이시아
3명
레바논
3명
프랑스
3명
동사랜드
3명
에콰도르
3명
중국
3명
칠레
3명
브라질
3명
루마니아
3명
엘살바도르
2명
에티오피아
2명
가나
2명
콩고 공화국
2명
아이티
2명
요르단
2명
남아프리카 공화국
2명
뉴질랜드
2명
스위스
2명
러시아
1명
스페인
1명
인도네시아
1명
스웨덴
1명
베네수엘라
1명
몰도바
1명
네덜란드
1명
나이지리아
1명
리투아니아
1명
온두라스
1명
벨라루스
1명
코트디부아르
1명
벨기에
1명
버뮤다
1명
우크라이나
1명
우즈베키스탄
1명
대만
1명

4.1. 최후의 메시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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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왜 막지 못했는가? [편집]

*위에서도 계속 언급되었지만 당시 루이나의 항공 보안은 지금과 달리 구멍투성이였다. 탑승객의 신원 파악조차 제대로 안 한 건 물론 조종실 문도 잠그지 않았고 심지어 무기로 사용될 여지가 있는 소지품까지 전혀 통제하지 않았다.

*테러와의 전쟁과 1·19 테러의 전조를 감지한 정보기관들은 90년대부터 테러를 큰 위협으로 여겨 우려하고 있었다. 실제로 1991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를 비롯해 연이은 대사관 테러와 RNS 콜 테러사건 등으로 페어팩스 행정부 시절부터 알자미아와의 전쟁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그러나 정보기관 일선의 판단과 우려에 비해 루이나는 90년대의 대호황에 국가도 아닌 일개 테러조직 따위가 루이나에게 위협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페어팩스 행정부 전반기는 셧다운과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로 인해 남랜드의 테러조직 따위에는 관심도 가질 여력이 없었다. 이후 행정부가 뒤늦게나마 관심을 두려 할 시기에 이번엔 유고슬라비아에서 코소보 전쟁이 터져 모든 관심이 발칸반도로 집중되어 또 다시 테러 얘기는 이들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그러다가 대사관이 공격당하는 등 테러에 대한 위협이 점점 현실화되자 이브라힘 나쉬디를 암살하려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세 번이나 암살 작전이 취소되었다.

*이브라힘 나쉬딘이 고랜드에서 도망치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국제법 위반 등의 이유로 두 눈 뜨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미리 화근을 제거할 기회를 놓쳤다는 정황들이 발견되면서 페어팩스 정권에도 1·19 테러의 책임이 일정 부분 존재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당시 루이나의 항공 보안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 당시도 루이나의 항공교통수단은 기차 같은 개념으로 조종석이 달랑 커튼 한장으로 객실과 분리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고, 탑승구도 티켓 미소지자도 버젓이 출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스위스 나이프 같은 자그마한 칼은 문제없이 기내에 들고 갈 수 있었다. 실제로 1·19 테러의 납치 범인들도 스위스 나이프 같은 작은 칼로 범행을 저질렀다. 루이나의 항공보안에 이러한 심각한 허점들이 있다는 것이 지적되어 개선을 요구하는 의회, 정부 보고서가 페어팩스 행정부와 엘스워스 행정부 내에서 여러 차례 올라왔으나 무시되었다. 이러한 보안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조사위에서는 NIA와 MIA를 비롯한 정보당국이 항공국에 위험인물의 정보에 접근할 권한을 줘야 한다고 권고했으나, 정보 당국은 이를 무시했다.

*NIAMIA를 비롯한 정보당국끼리도 정보 공유를 꺼렸다. 테러리스트들이 루이나로 밀입국한 사실이 확인되어 MIA가 정보를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NIA는 정보 제공에 비협조적이었고,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결국 테러리스트들을 찾는 수사관은 단 한 명밖에 없는 상황이 일어났고, 이 문제점은 테러가 일어날 때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또한 NIA는 테러 발생 후 자신들이 경고했으나 정부가 무시했다는 것만 강조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할 생각만 하다가 실속은 없이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고문 스캔들이다.

*엘스워스 행정부의 안보 담당들도 취임한지 1년도 안 되었다 보니 알자미아의 존재와 위험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알자미아의 위험도가 고조된지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여서 아랍 쪽 첩보 담당자들을 제외하면 루이나 수뇌부들 중 그 누구도 알자미아의 위험성과 존재를 알지 못했다. 페어팩스 정권의 안보 담당자들이 업무를 인계하면서 "알자미아를 경계하라"고 이야기하자 부시의 안보 담당자들이 "알자미아가 도대체 뭐요?"라고 되물어볼 정도였다. 게다가 2000년 4월, 루이나 EP-3E 정찰기가 중국 공군 J-8 전투기와 충돌해 하이난 섬에 불시착한 이른바 하이난 섬 충돌사고로 중국과의 사이가 냉각되면서 알자미아 따위에게는 전혀 신경을 쓸 여건이 안 되었던 상황이었다.

*MIA가 테러리스트들이 비행기로 건물에 테러를 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해 2000년 12월에 보고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스워스 행정부는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테러리스트들이 거의 모든 준비를 마쳤을 시기였다.

*고랜드의 남부동맹을 지원해 아브라힘 나쉬디를 제거하는 작전은 2001년 1월 18일까지 엘스워스 대통령의 책상 위에 놓이기만 한 채 결재되지도 못한 상태였다.

*민간항공과 공군이 사용하는 용어도 달라 테러 초기에 정보전달이 잘 되지 않아 혼동이 발생해 이미 추락한 비행기를 찾는 등의 혼선이 벌어졌다. 게다가 루이나 공군에서는 적국의 침공만 상정하고 있던 상태라 제대로 된 초기대응도 하지 못했다. 비행기가 내륙에서 날아와 공격을 가했는데도 공군의 전투기들은 엉뚱하게도 남랜드해 방향으로 출격했다. 오로지 루이나 공군의 강력한 제공권 장악력만 믿고 있던 당시 루이나의 방공체계의 문제점으로 인하여 방공부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아무리 방공무기가 강력하다 해도 납치된 자국민이 타고 있는 자국의 민항기를 자국 공군이 격추시킨다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릭 레스콜라라는 보안 전문가는 언젠가 비행기를 이용해서 타워에 들이받는 테러를 예견했고 대비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릭은 당일 안전교육 중 테러가 일어나자 2,700명 가량의 모건 스탠리 직원들을 구하고 사람들을 더 구하려다가 건물이 붕괴되어 죽고 말았다[50].

*남랜드에서 갈수록 커져가던 반루이나 정서로 인해 발생한 테러 조직들이 점점 조직적이고 강력해지는데도 불구하고 루이나 정부는 이를 과소평가해 전혀 손을 쓰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정보기관들 간의 상호 삽질과 알력싸움, 그동안 계속 방치되어 온 미흡한 보안 규정에 대한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결국 대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6. 루이나의 반응 [편집]

6.1. 예술계의 반응 [편집]

1.19 벨포르 테러 사건은 루이나 사회 전반에 깊은 충격을 안겨준 대참사였으며, 예술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이번 사건은 ‘도시 그 자체가 피로 물든 비극’으로 받아들여지며, 많은 예술가들은 자발적인 애도와 성찰, 그리고 국가의 대응과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형태로 반응을 나타냈다. 예술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 이 비극의 의미를 되새기고 살아남은 자들이 겪는 침묵과 공허를 대변하는 통로로 기능했다.

6.1.1. 음악 [편집]

사건 직후 벨포르 교향악단은 예정되어 있던 신년 음악회를 전면 취소하고, 희생자를 위한 무관악 추모 연주회인 《침묵 속의 사프란》을 기획했다. 이 공연은 사고현장 근처에서 관현악단의 자리와 악보를 그대로 두되, 단 한 소절도 연주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공연 중에는 숨죽인 채 눈물을 흘리는 관객들이 많았으며, 이는 “소리 없는 고통이 가장 깊은 울림”이라는 공연 해설과 함께 루이나 전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현대음악 작곡가 로랑 블루바흐는 이후 사건을 기억하며, 전자음·경보음·고주파를 혼합한 곡 《1월의 새벽》을 발표했다. 이 곡은 “경고받은 세계의 침묵”이라는 부제로, 당시 시민들이 겪은 혼란과 두려움을 음악적으로 표현했다. 연주는 어두운 무대 위에서 시작되며, 곡 중간엔 실제 벨포르 지하철에서 녹음된 비상방송이 삽입되어 청중의 몰입을 극대화했다.

6.1.2. 시각예술 [편집]

전위예술가 마리옹 벨뤼스는 테러 당시 피해자들의 신체 흔적을 본뜬 주물과 시멘트, 철조각을 활용해 거대한 설치작품 《141초》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사건 발생 당시 지하철역 CCTV 영상 속 시민들의 마지막 움직임을 정지된 형상으로 재현한 것으로, "시간이 멈추는 순간"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총 183개의 인체 형상이 벽과 바닥을 향해 서로 다른 자세로 뻗어 있으며, 조명은 일출 직전의 어스름한 시간대를 재현한다. 작품은 벨포르 현대미술관 야외광장에 1년간 임시 전시된 후, 1.19 추모기념관 설립과 함께 그 중앙 조형물로 영구 이전되었다. 많은 관람객들은 “예술이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정적”이라며 감상을 남겼다.

6.1.3. 문학 [편집]

소설가 오베르 라무르는 사건 직후 에세이집 《탄식하는 광장》을 출간했다. 이 책은 테러 발생 당일과 그 직후의 도시 풍경, 언론의 반응, 시민들의 내면을 교차하며 기록한 것으로, ‘도시가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고통을 흡수하는가’를 중심 주제로 한다. 그는 “광장에 있던 것은 피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기도 했다”는 문장으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시인 에리카 노블은 “나는 그날, 이름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장시(長詩) 〈불타는 지하철역〉을 발표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 시는 온라인에서 수백만 건 공유되며 ‘피해자의 유언’처럼 회자되었고, 루이나 공영방송은 매해 1월 19일 밤 이 시를 낭송하는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6.1.4. 연극과 공연예술 [편집]

연극 연출가 도미니크 샤를은 사건 발생 3개월 뒤, 피해자 유족들과 생존자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연극 《1.19 벨포르》를 기획하고 전국 순회 공연에 나섰다. 이 연극은 배우들의 연기와 함께 무대 위 대형 스크린을 통해 실제 뉴스, 구조장면, 그리고 당시의 도시 풍경을 보여주며 ‘국가적 기억의 시각화’를 시도했다. 연극의 하이라이트는 생존자가 겪은 “10초의 정적”을 표현한 장면으로, 이때 극장은 완전히 암전되고 침묵만이 흘렀다. 관객들은 매 공연마다 이 순간을 “무대가 아니라, 현실로 끌려들어간 기분”이라고 평했다. 루이나 연극평론가협회는 해당 작품을 “공공기억을 위한 연극의 모범”이라 평가했다.

6.1.5. 영화 [편집]

독립영화 감독 리사 카바녜는 1.19 사건 1주기를 맞아 다큐멘터리 영화 《그날, 지하가 흔들렸다》를 발표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사건 재현을 넘어, 구조대원 헬멧캠 영상, 생존자의 휴대폰 영상, CCTV 자료, 언론 보도 화면을 콜라주 형식으로 엮어 내밀하고 고통스러운 체험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특히 구조대원이 열차 잔해 사이에서 살아 있는 여성을 발견하는 장면은 루이나영화제 심사위원 전원이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공포”라고 평가한 명장면으로 남았다. 해당 작품은 다수의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초청되었으며, 루이나 다큐 역사상 최고 흥행을 기록했다.

6.1.6. 거리예술 및 그래피티 [편집]

그래피티 아티스트 X93는 테러 발생 직후, 현장에서 불과 20m 떨어진 벨포르 남역 벽면에 대형 벽화를 남겼다. 벽화에는 183개의 별이 흐트러진 형태로 새겨져 있으며, 중앙에는 “우리는 벨포르다”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 구절은 곧 루이나 전역에서 연대와 추모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수천 명의 시민들이 해당 벽화 앞에 촛불과 헌화를 올려놓기 시작했다. 벨포르 시의회는 해당 그래피티를 도시 공동체의 ‘기억유산’으로 지정하고 영구 보존 결정을 내렸다. 이후 X93는 “예술은 슬픔을 정지시키는 가장 빠른 방식”이라는 소감을 밝히며, 이후에도 테러 피해를 주제로 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6.2. 종교계 [편집]

1.19 벨포르 테러 사건은 종교계에도 깊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이번 사건이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 알후라 알자미야(Al-Hura al-Zamiya)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일부 극우 성향의 단체들 사이에서는 루이나 내 이슬람교 공동체에 대한 보복과 배제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몇몇 지역에서는 이슬람 사원에 대한 출입 금지 조치가 잠시 논의되었고, SNS를 중심으로 “테러에 책임 있는 신앙은 사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루이나 정부와 다수 종교단체들은 즉각적으로 이를 제지하며, “공동체 전체를 한 범죄자의 죄로 재단할 수 없다”는 원칙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사건 발생 사흘 뒤, 벨포르 중앙광장에서는 루이나 내 모든 종교계가 함께 모여 대규모 공동 추도 예배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이슬람, 불교, 시크교, 자이나교, 자생신앙 등 거의 모든 주요 종단이 참석하였으며, 이슬람 대표자들 역시 아무런 물리적 충돌이나 방해 없이 함께했다. 일부 단체의 사전 시위 예고가 있었지만, 정부의 엄중한 경계와 시민사회의 자제 분위기 속에 실제로는 그 어떤 충돌도 발생하지 않았다.

‘피로 물든 도시의 평화를 위한 기도’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이 공동 예배는 각 종단의 전통 의례 없이, 단 하나의 낭독문으로 구성되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고, 평화를 빌며, 다시는 이 땅에 공포가 내려앉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루이나인 추기경인 줄리앙 마르탱
[ 기도문 펼치기 · 접기 ]
신이여, 창조의 근원이시여, 이름 없이도 존재하시고,
부를 때마다 다른 얼굴로 응답하시는 그대여.

우리는 서로 다른 전통과 길을 걸어왔습니다.
어떤 이는 ‘주여’라 부르며 십자가를 지고,
어떤 이는 ‘알라후 아크바르’라 외치며 메카를 향해 절하며,
또 어떤 이는 붓다의 자비에 기대어 고요한 숨을 유지하고,
힌두교 신자는 옴의 진동 속에서 신들의 이름을 읊조리며,
시크교도는 와헤구루의 이름으로 세상을 껴안고,
유대인은 야훼 앞에서 회개의 기도를 바치며,
조로아스터교도는 아후라 마즈다의 빛을 향해 손을 들고,
바하이 신자는 인류의 일체됨을 믿으며 기도합니다.
무속인은 조상과 산천의 숨결을 부르며 춤을 추고,
도교 신자는 기(氣)의 흐름 속에 자연의 조화를 느끼며,
정령신앙인들은 숲과 바람, 동물의 속삭임 속에 신의 뜻을 읽습니다.
그리고 이 외에도 셀 수 없는 이름과 방식으로,
우리는 각자의 신,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같은 무릎을 꿇습니다.
같은 공포를 지나, 같은 상처를 마주하며, 같은 어둠을 건넜기에.

1월 19일.
벨포르의 하늘은 검게 그을렸고,
유리창을 가르던 굉음은 수백 개의 심장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회사에서 돌아오지 못했고,
연인들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했으며,
누군가는 생애 마지막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깨달았습니다.
더 이상은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중립적일 수 없음을,
무관심이야말로 악의 가장 큰 도구임을.

그래서 오늘 우리는 기도합니다.
언어가 달라도, 의식이 달라도, 종단이 달라도,
진심으로 이 세계의 평화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같다고 믿으며.

주님, 알라, 야훼, 아후라 마즈다, 브라흐만, 옴 마니 파드메 훔, 와헤구루, 텡그리, 만물의 정령이시여, 조상의 혼이시여, 자연의 의지시여,
우리에게 다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
공포를 넘어, 연대를 택하는 용기를 주십시오.
분노를 자양분 삼아 더 큰 증오를 키우는 대신,
그 불을 꺼뜨릴 물 한 바가지를 들 수 있는 손을 주십시오.

우리 마음속에서 “너희 중 누가 더 잘못했는가”를 따지려는 욕망을 거두어 주십시오.
대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는 압니다.
테러는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신을 오염시킨 자들의 만행임을.
어떤 계시도 무고한 자의 피를 요구하지 않으며,
어떤 진리도 사람의 눈을 가리고 귀를 닫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니 주여,
이제 우리가 어떤 언어로 기도하든,
그것이 누군가를 위한 것이기를.
나의 구원을 넘어, 이웃의 평화를 위한 것이기를.
나의 고통을 뛰어넘어, 타인의 상처에 먼저 다가가는 것이기를.

오늘, 이 피로 물든 도시에서
우리는 신의 나라를 다시 상상합니다.
그곳에는 테러범도, 피해자도, 배신자도, 순교자도 없습니다.
오직 인간, 오직 삶, 오직 희망만이 있습니다.

벨포르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모습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나은 벨포르를, 더 넓은 루이나를,
더 평화로운 세계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주여,
우리가 이 광장에서 흘리는 눈물이
증오의 씨앗이 되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잃은 이름들을 말할 때
분노보다 먼저 경건이 찾아오게 하소서.

죽음을 본 우리는
이제 생명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절망을 넘은 우리는
다시 사랑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기도의 끝에,
그대가 계실 것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아멘. 아미. 아쉐. 옴. 샨티. 셀라. 피스. 샬롬. 사라바. 할렐루야. 타카나. 파트. 멧타. 루카.

이곳에 신이 있다면, 신은 오늘, 모든 이름으로 울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고, 평화를 빌며, 다시는 이 땅에 공포가 내려앉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가톨릭 추기경 줄리아 마르탱, 수니파 이맘 마지드 바키르, 개신교회 총회장 안드레아스 뤼커, 티베트불교 고승 첸린 마하상야, 힌두교 교학자 수마난다 다스, 시크교 성직자 나라얀 싱, 정령신앙 주술사 쿠르쿠 마닐루, 조로아스터교 모바드 다르윗 자르, 유대교 랍비 미리암 콜드만, 루이나 민속신앙연합 대표 자넬레 아우베르크, 바하이 신도회 총대표 아슬란 파라디 등 56개 종교단체 대표자 일동

파일:wearebelfort.png
기도문을 낭독하는 추기경 줄리아 마르탱
수천 명의 시민들이 종교를 불문하고 촛불을 들고 함께 광장을 메웠고, 이날의 모습은 루이나 전역에 생중계되며 ‘루이나의 영적 기억’으로 자리잡았다. 이 장면은 이후 매년 1월 19일마다 재방송되며, 국가적 애도와 회복의 상징이 되었다.

신학자들과 시민단체들은 이 날을 두고 “신은 분노 속이 아니라, 광장에서 함께 우는 자들 속에 있었다”고 표현했고, 많은 언론 역시 “분열의 위기 속에서도 종교는 연대의 방주가 되었다”고 평했다. 이후 종교계는 희생자 가족을 위한 공동 봉사활동과 심리치유 프로그램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이는 종교가 사회적 상처를 치유하는 공동체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다시금 확인시켰다.

이후 가톨릭 교황 요하네스 ⅩⅨ세는 국제사회와 루이나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테러 발생 10일 만에 벨포르를 직접 방문해 현장 추모비에 헌화하였다. 교황은 “이곳은 이제 고통의 중심이 아닌, 평화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연설을 남겼고, 루이나 추기경 줄리앙 마르탱(Cardinal Julien Martin)과 함께 무너진 지하철역 내부를 도보로 순례하였다. 이 장면은 루이나 전역의 생중계를 통해 방영되며 국민적 울림을 남겼다. 벨포르 시는 이후 교황 방문지를 “기억의 길”로 명명하고, 매년 추모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6.3. 시민사회 및 일반 대중 [편집]

1.19 테러는 루이나 시민사회 전반에 깊은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사건 직후부터 각계각층의 대중적 연대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었다. SNS 상에서는 테러 발생 30분 만에 ‘#우리는벨포르다(#WeAreBelfort)’ 해시태그가 확산되며 전국적인 추모 운동이 시작되었고, 수백만 명의 루이나 시민들이 자신의 SNS 프로필 사진을 검은 배경에 하얀 백합(루이나의 국화) 이미지로 바꾸며 조의를 표했다.

비정부기구(NGO)와 시민단체들은 사건 발생 당일 오후부터 긴급 헌혈 캠페인, 이재민 임시 쉼터 지원, 유가족 상담 지원단 구성 등의 대응에 착수하였으며, 루이나적십자, 시민재난공조협회, 자원봉사네트워크 등의 조직은 불과 48시간 만에 1만여 명의 자원봉사자를 조직하여 현장 복구와 피해자 지원에 참여했다. 일부 단체는 희생자 유족에게 장례비 전액을 지원하기 위한 민간 모금운동을 개시하였으며, 해당 모금은 3주 만에 1억 루이나 달러를 초과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시민 기부 기록을 경신했다.

거리에서는 자발적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벨포르 지하철역 인근엔 시민들이 남긴 편지, 그림, 시, 인형, 꽃, 백합, 촛불 등이 산처럼 쌓였으며, 전국의 지하철역과 기차역, 학교, 시청 광장에도 동일한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특히 몇몇 중고등학생들은 자발적으로 ‘1.19 기억 주간’을 운영하며 친구들과 함께 추모 세미나, 기억의 벽 설치, 포스터 전시 등을 기획하기도 했다.

정치 성향이나 지역, 종교를 불문하고 “이번만큼은 함께하자”는 분위기가 널리 퍼졌고, 심지어 과거에 대립하던 일부 극좌·극우 단체들도 1.19 피해자 추모 집회에서는 공동으로 침묵 행진에 참여하였다. 루이나 통신은 이를 “분열된 시민사회가 한순간, 침묵의 물결로 하나가 된 날”이라 평했다.

그러나 동시에 분노와 두려움 또한 거세게 표출되었다. 일부 시민들은 정부의 테러 방지 실패를 강하게 비판하며 “왜 우리는 지하철을 타면서도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하느냐”고 성토했으며, 피해자 유족 가운데는 정부의 안전관리 실패에 대해 집단소송을 예고한 이들도 나타났다.

특히 국민 여론은 강경한 대응과 보복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급격히 쏠리기 시작했다. 사건 직후 발표된 벨포르 사회연구소(Belfort Institute of Social Research)의 긴급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4.6%가 “국가 차원의 무력 보복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으며, 이는 루이나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높은 전시 대응 지지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말자”, “루이나를 건드리면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보여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고, 대통령 직속 안보회의에 전례 없는 보복 작전 구상 청원이 200만 건 이상 접수되었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테러 배후로 알려진 고랜드계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 ‘알후라 알자미아야’에 대한 구체적 응징을 요구하며 “루이나 시민의 피는 헛되지 않아야 한다”는 문구를 내세운 침묵시위와 촛불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엘스워스 대통령의 “정밀하고 정의로운 응징” 발언은 대중의 정서와 맞물리며 지지율 상승을 견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6.4. 정치권의 반응 [편집]

1.19 벨포르 테러 이후 루이나 정치권은 전례 없는 속도로 움직였다. 여야를 막론한 초당적 합의 하에 국가안보 및 대테러 대응을 위한 긴급 입법이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애국자법(Patriot Act of Ruina)》의 제정이다. 해당 법은 테러 연루 혐의자에 대한 통신 감청, 금융 거래 추적, 예외적 구금 조치, 외국인 추방 절차 간소화 등을 포함하며, 평시보다 훨씬 강화된 수사 권한을 정보·치안기관에 부여하였다.

또한 루이나 의회는 사건 발생 4일 만에 《국가테러방지법》과 《국토안보기본법》을 각각 통과시켰다. 대테러방지법은 광역수사국(MIA)을 포함한 정보기관 간 실시간 정보 공유 체계와 '테러예방선제조치' 조항을 포함하고 있으며, 국토안보기본법은 '국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를 신설하고 대중교통, 에너지시설, 통신망의 보안 체계를 일괄적으로 점검·강화할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법안들은 모두 상·하원을 통과하는 데 각각 48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으며, 루이나 헌정사에서 가장 빠르게 가결된 입법 기록 중 하나로 남았다. 엘스워스 대통령은 관련 법안에 서명하면서 “이번 입법은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패이며, 결코 일상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1] 루이나에서는 간단히 ‘1·19’, ‘벨포르 테러’, 또는 ‘BWT 공격’으로도 불린다. 북미의 ‘9/11’처럼 날짜 중심의 사건 명칭이 일반화되었다.[RNT] 루이나 표준시 (UTC+01:00) 기준[3] 루이나 의회를 향하던중 내부 저항으로 추락[4] 루이나 국가정보국(NIA)이 2000년 테러위험조사 보고서에서 주시한 중동계 테러조직으로, 본 사건 이후 조직 전원이 국제수배되었다.[5] 민간인 2,891명, 테러리스트 17명. 이 중 271명은 소방 및 경찰관으로 구조 작업 중 순직.[6] 외국인 사망자: 플로렌시아 69명, 미합중제국 45명, 프랑스 38명, 영국 22명, 동사랜드 19명, 마베라 13명 등[7] 붕괴 당시 비산된 콘크리트·석면 분진에 의한 호흡기 질환, 폐암 등 장기피해 발생.[8]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수니파 계열의 반서구·반세속주의 무장 단체. 루이나 정부가 1997년부터 테러조직으로 공식 지정.[9] 정확히는 무함마드가 살아 있는 한 기독교도와 유대인을 아라비아반도에서 축출할 것[10] 역설적이게도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이 있던 다르에스살람은 아랍어로 '평화의 집'이란 뜻이다.[11] 이로써 지속적으로 1·19 테러의 책임을 부인하던 나쉬디의 1·19 테러 주도가 더 확실해지는 증거가 되었다.[12] 사진 우측 하단에 보면 1 18(1월 18일)이라고 적혀 있다.[13] 훈련 내용에는 서구 의상을 입는 법, 음식점에서 주문하는 법 따위도 있었다고 한다.[14] 심지어 라 마베라 정보당국은 알자미아 측의 작전암호(성대한 결혼식)까지 전달했다.[15] 이후 이륙 지연이 없었다면 해당 기체는 에포르 국제공항을 출발해 대통령궁 인근에 충돌할 예정이었다는 정보가 루이나 정보국에 의해 밝혀졌다.[16] 당연한 소리지만 이들은 전원 테러 성공과 함께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17] Computer-Assisted Passenger Prescreening System Version 1, 컴퓨터 보조 승객 판별 시스템.[18] Barnett, A.(2004). CAPPS II: The foundation of aviation security?. Risk Analysis, 24(4), 909-916.[19] 알라여 그에게 자비를[20] 내레이션은 당시 벨포르 제7소방대대(Tower Squad 7)의 소방관이었던 에릭 라몽트(Eric Lamont) 대원이 맡았다. 그는 1월 19일 오전 비번이었고, 테러 발생 사실을 집 근처 카페에서 뉴스를 통해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회고했다.[21] 루이나 시간 기준. GMT+1[22] 한국시각 오후 5시 12분[23] Alexander Brannan (1959 ~)[24] 당시 벨포르 시 구조사령부 제7소방대대 대대장이었으며, 2021년 정년퇴임했다.[25] 1.19: The Ruina Catastrophe (벨포르 다큐멘터리, 2023)에서도 증언자로 출연. 당시 구조사령부 지휘차량을 타고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간부였으며, 남동생 다니엘 브래넌(소방사)이 회색탑 북동쪽 엘리베이터구간으로 진입해 대피 유도를 하다가 매몰되어 순직했다.[26] 줄리안 스콧(Julian Scott). 당시 제7소방대대의 베테랑 대원이자 현장 영상에도 등장한다.[27] 이 발언은 원본 다큐멘터리에서도 실제로 등장하며, 루이나판 다큐멘터리인 “1.19: A Nation Under Fire” (2023)에서도 동일하게 인용된다.[28] 그래서 2WTC가 처음 무너질 당시에 상당수의 언론은 또 하나의 테러나 폭발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보도했다.[29] 제1 타워 피격 직후 아직 '테러'로 규정되지 않았던 혼란 속에서, 루이나 출신의 촬영 감독 에반 페어먼(Evan Fairmon)이 현장 인근에서 상황을 촬영하던 중 이 장면을 포착했다. 이 영상은 NA175편의 충돌 장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고화질로 담은 영상** 중 하나로 꼽힌다. 루이나 방송협회는 이 영상을 복원해 고음질 버전으로도 제공하였다.[30] 실제로 당시 다수 언론이 'Attack'이라는 표현을 헤드라인에 썼다.[31] 이후 RBS와 VNL의 뉴스 타이틀은 곧바로 "루이나, 공격받다(Ruina Under Attack)"로 바뀌었다. 이를 보면 2차 충돌을 본 다수 시민들과 언론이 즉각적으로 테러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32] 당시인 2001년, 루이나는 아직 전국적인 스마트폰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영상 촬영이 가능한 휴대폰도 고급형 일부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대다수 시민은 아날로그 TV나 유선전화에 의존했고, 무선인터넷(WAP) 역시 속도는 느리고 요금은 매우 비쌌다.[33] 실제로는 고온의 잔해가 인근 차량의 휘발유 혹은 LPG 탱크에 떨어지며 급격한 압력 상승으로 연쇄폭발이 발생한 것이다.[34] 이는 2WTC 충돌기(Northern Air 175)가 외벽 측면을 강타했기 때문으로, 건물의 전력과 통신망이 즉시 차단되지 않아 상당 시간 동안 방송과 전력 공급이 이어졌기 때문이다.[시청주의] [36] 수업 참관 직전에 첫 번째 비행기가 남부 타워에 충돌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당시 엘스워스 대통령과 참모진은 이를 단순한 항공사고로 여겼다. 이후 20주년 특별 다큐멘터리 《1.19: 그날의 기록》에서 엘스워스는 “믿기 어려운 사고라 생각했지, 루이나 본토가 공격당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또한 이 시점까지 대통령 전용차에 타고 있던 엘스워스는 아직 뉴스 영상도 보지 못한 상태였다.[37] 여담으로, 당시 수업에선 '우리 모두의 집(The House for All)'이라는 동화책을 낭독 중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We will build again."(우리는 다시 지을 거예요)였던 탓에 음모론적 추측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우연이며, 루이나 국립교육원에 의해 정기 교육 자료로 사용되던 동화 중 하나였다.[38] 당시 수업은 전국에 생중계되던 ‘우리 아이들의 아침’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39] 해당 수업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제작에 참여한 다큐멘터리 《1.19 키즈》에서도 이 점에 대해 엘스워스의 대응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나왔다.[40] 군용기, 고위급 수송기, 대통령령에 따른 의약품/병력 수송기를 제외하고는 전면 이륙 금지.[41] 단, 이 와중에도 한 건의 민간 비행만이 예외적으로 허가되었는데, 콜마르 시 외곽에서 독사에 물린 6세 아동이 즉각적인 해독제 투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실 직접 명령으로 플라자 응급의료항공이 긴급 이륙 허가를 받아 벨포르 종합의료센터로 해독제를 수송했다.[42] 공습이나 대규모 테러에 대비해 도심의 주민, 인력, 차량 등을 외곽으로 소개하는 명령.[43] 당시 현장 관계자는 “루이나 대통령이 민간 밴에 탑승한 것은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44] 결국 몇 명을 내보내서 해결했다고 한다.[45] 대통령 경호국 요원이 GMR-17 맨패즈로 격추를 시도하지만, 워낙 기체가 대형인 탓에 추락 없이 의사당을 강타한다.[46] 실제로 작가 카빌은 원고 집필 당시 루이나 공군 고문단에 이 시나리오를 자문했다가 “그런 가능성은 전혀 고려한 적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카빌은 오히려 ‘이 정도는 이미 대비했을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47] 존나 말도안되는 우연이기도 하다[48] 화재가 99일이 지나서야 진압되었다.[주의] 눈물 짜는 내용이 많음[50] 사후 루이나 정부로부터 명예훈장을 지급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