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알자미아
الجامعة
al-Jamia
정식 명칭
알자미아 알후라 릴무자히딘
(무자헤딘의 자유 결집체)
결성
1988년 8월 18일
창설지
본거지
고랜드 남부 (탈레반 장악 지역, 추정)
창설자
지도자
아미르
공석 (2022~)
사실상 지도자 아부 하짐 알미스리 (추정)
역대 아미르
이브라힘 나쉬디 (1988~2011)
아이만 알자와히리 (2011~2022)
이념
살라피 지하디즘, 범이슬람주의, 반루이나주의, 반공주의
종파
수니파
규모
핵심 조직원 약 2,500명 (2001년 최성기)
수백 명 (2026년, 추정)
지부
하라카트 알-파즈르 (고랜드 봉쇄구역)
비호 세력
적대
선전 매체
사우트 알자미아
테러조직 지정
루이나 (1997) 외
세력 추이 [ 펼치기 · 접기 ]
연도
핵심 조직원
주 거점
1988
13
유고랜드
1996
약 800
고랜드
2001
약 2,500
고랜드
2011
약 400
유고랜드 서부
2014
약 300
고랜드 남부
2026
수백
고랜드 남부


1. 개요2. 명칭3. 역사
3.1. 배경3.2. 창설3.3. 유고랜드 시기 (1988~1996)3.4. 고랜드 시기 (1996~2001)3.5. 1.19 사건3.6. 루이나-고랜드 전쟁 (2001~2011)3.7. 나쉬디 사살과 분열 (2011~2014)3.8. 철수 이후 (2021~현재)
4. 이념
4.1. 먼 적 우선론4.2. 루이나에 대한 명분4.3. 탈레반과의 관계
5. 조직
5.1. 지도부5.2. 지부와 연계 조직5.3. 자금
6. 주요 공격7. 분파: 다울라 알무하지린8. 루이나의 대응9. 평가
9.1. 사이클론 작전의 역풍9.2. 「야합」의 역설
10. 관련 문서



1. 개요 [편집]

알자미아(الجامعة, al-Jamia)는 사비에트-고랜드 전쟁에 참전한 아랍계 외국인 의용병 네트워크에서 태어난 수니파 국제 지하드 조직이다. 1988년 8월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재벌 가문 출신의 이브라힘 나쉬디가 이집트 출신 의사 아이만 알자와히리 등과 함께 유고랜드 나크시에 로스탐에서 창설했다. 루이나의 공문서와 언론에서는 「알후라 알자미아」(Al-Hura al-Jami'a)라는 표기도 함께 쓰인다.

사비에트군이 고랜드에서 철수하던 시기에 출범한 이 조직은 처음부터 사비에트가 아니라 루이나를 주적으로 삼았다. 명분은 세 가지였다. 무슬림 거주 지역이 있는 유고랜드에 1985년부터 주둔해 온 루이나군, 사이클론 작전으로 의용병을 끌어들였다가 전쟁이 끝나자 등을 돌렸다는 루이나의 배신, 그리고 1993년 공동 선언 이후 고랜드를 사이에 두고 루이나가 사비에트와 손잡았다는 이른바 「야합」이다.

1996년 탈레반의 초청으로 고랜드에 본거지를 옮긴 뒤 훈련소를 세워 세력을 키웠고, 1997년 루이나 정부로부터 테러조직으로 지정되었다. 2001년 1월 19일 조직원 17명이 루이나 국내선 여객기를 납치해 벨포르의 루이나 세계무역센터에 충돌시킨 1.19 사건으로 2,891명이 사망했으며, 이 사건은 루이나-고랜드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2011년 나쉬디가 오리온 작전으로 사살되었고, 지도자 자리를 이은 알자와히리도 2022년 루이나 무인기 공습으로 사망했다. 그 사이 2014년에는 서부 국경 지부가 떨어져 나가 「다울라 알무하지린」을 선포하면서 조직이 둘로 갈라졌다. 2026년 현재 알자미아는 후계 지도자를 공식 발표하지 않은 채, 고랜드의 탈레반 장악 지역에 남은 핵심부와 고랜드 봉쇄구역의 지부 하라카트 알-파즈르로 이루어진 느슨한 연합체로 존속하고 있다.

2. 명칭 [편집]

조직의 자칭 정식 명칭은 「알자미아 알후라 릴무자히딘」(الجامعة الحرة للمجاهدين), 곧 「무자헤딘의 자유 결집체」이다. 내부 문서와 성명에서는 대개 앞머리의 「알자미아」만 쓴다.

「자미아」(جامعة)는 '모으는 것', '한데 묶는 것'을 뜻하는 말로, 현대 아랍어에서는 대학이나 연맹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조직명은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중 나시르 알 물크에서 운영되던 외국인 의용병 숙소 「바이트 알자미아」(بيت الجامعة, 결집의 집)에서 왔다. 이슬람권 각지에서 온 지원자들은 이곳에서 신원을 등록하고 기초 교육을 받은 뒤 고랜드 전선으로 보내졌는데, 갓 도착한 청년들이 교리와 전술을 여기서 '배웠다'는 데서 의용병들 사이에서는 '대학'이라는 농담 섞인 뜻으로도 통했다. 숙소가 관리하던 의용병 명부 역시 「자미아」라 불렸고, 1988년 창설 회의는 이 명부에 오른 인맥을 그대로 조직의 뼈대로 삼았다.

루이나 공문서의 「알후라 알자미아」는 아랍어 어순과 반대이다. 1997년 국가정보국(NIA)이 테러조직 지정 평가서를 작성하면서 근거로 삼은 감청 자료의 번역본이 수식어 「알후라」(الحرة, 자유로운)를 앞에 둔 채 옮겨졌고, 이 표기가 지정 고시에 그대로 실리면서 굳었다. 1.19 사건 직후 일부 언론은 '집단'을 뜻하는 「자마아」(جماعة)와 혼동해 「알후라 알자마아」로 적기도 했다.[1]

3. 역사 [편집]

3.1. 배경 [편집]

상세 내용은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문서 참고.


1979년 12월 25일 사비에트가 고랜드에 개입하자, 루이나는 1983년부터 국가정보국이 주도하는 사이클론 작전으로 고랜드 무자헤딘에 무기와 자금을 댔다. 1984년 독립한 유고랜드는 이 작전의 핵심 병참기지가 되었고, 유고랜드 군정보국이 무자헤딘 각 파벌에 대한 물자 배분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이집트, 리비아, 사헬 지역과 사우디아라비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유고랜드 남부 아랍어권에서 '자원병'이라는 명목의 외국인 전투원이 모여들었다. 전쟁 기간 전체의 유입 인원은 2만~3만 5천 명으로 추정되지만,[2] 실제로 전선에 투입된 것은 그 일부였고 상당수는 국경 지대의 숙소와 훈련소에 머물렀다.

외국인 의용병의 수용은 사이클론 작전의 공식 경로 밖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을 맞이해 전선에 배치한 것은 걸프 지역 기부금으로 운영되던 민간 숙소들이었고, 그 가운데 가장 컸던 곳이 1981년 요르단 출신 성직자 무스타파 알카디리가 당시 웨스타시아 치하 유고랜드의 세테트에 연 바이트 알자미아였다. 나쉬디(1958~2011)는 1982년 처음 이 지역에 들어와 가문의 자금으로 숙소 운영비 대부분을 댔고, 곧 알카디리와 함께 의용병 네트워크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3.2. 창설 [편집]

1988년 들어 사비에트군의 철수가 기정사실이 되자, 의용병 네트워크의 진로를 두고 지도부가 갈라졌다. 알카디리는 의용병들을 고랜드 재건과 무슬림이 공격받는 지역의 방어 전쟁을 돕는 지원 조직으로 남겨 두자고 주장했다. 나쉬디와 알자와히리는 명부에 남은 인원을 바탕으로 국경을 넘어 움직이는 상설 무장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1988년 8월 18일 나크시에 로스탐의 나쉬디 소유 가옥에서 열린 회의에 13명이 참석해 새 조직의 창설에 합의했다. 회의록[3]은 조직의 목적을 "신의 말씀을 높이고 무슬림의 땅에서 이교도의 군대를 몰아내는 것"으로 적고, 가입 조건으로 아미르에 대한 충성 서약(바이아), 훈련소 수료, 기밀 유지를 들었다. 나쉬디가 아미르로 추대되었고, 알자와히리는 조직 규약과 교리 문서 작성을 맡았다.

알카디리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1989년 11월 나크시에 로스탐에서 금요 예배에 가던 중 차량 폭탄으로 사망했고, 범행 주체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사비에트 정보기관, 고랜드 공산 정부, 유고랜드 군정보국, 알자미아 내부 강경파가 모두 거론되었지만 어느 쪽도 입증되지 않았다.[4] 그의 사망으로 바이트 알자미아의 인맥과 자금은 사실상 모두 나쉬디에게 넘어갔다.

3.3. 유고랜드 시기 (1988~1996) [편집]

창설 직후 몇 년 동안 알자미아는 고랜드 내전에 참여하는 의용병 조직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1989년 사비에트군 철수 이후 조직원들은 고랜드 공산 정부와 싸우는 무자헤딘 파벌에 합류했고, 루이나 정보기관도 이 시기 알자미아를 독자적인 위협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전환점은 1993년이었다. 루이나와 사비에트가 「고랜드 복구와 안정화를 위한 1차 공동 선언」에 서명해 정보 공유와 국경 협력에 합의하자, 나쉬디는 이를 두 패권이 고랜드를 나눠 갖기로 한 증거로 받아들였다. 1994년 2월 그가 발표한 「나시르 알 물크 선언」은 루이나와 사비에트를 "고랜드의 피 위에서 악수한 두 우상"으로 부르고, 루이나군의 유고랜드 철수를 요구하면서 그 군대를 공격하는 것을 모든 무슬림의 의무로 규정했다. 선언은 유고랜드에서 루이나군이 저지른 범죄, 특히 1987년 루이나군 하다드 성폭행 사건과 가해자에 대한 루이나 군사법정의 경미한 처벌을 되풀이해 언급했다. 이 사건과 주둔군지위협정의 재판권 조항은 이후 알자미아 선전물의 고정 소재가 되었다.

같은 해 6월 25일 유고랜드 나시르 알 물크의 루이나 공군 기지 외곽 숙소에서 트럭 폭탄이 터져 루이나군 23명이 사망했다(와디 사크르 기지 폭탄 테러). 당시 루이나 정부는 배후를 특정하지 못했고, 알자미아의 연루는 1997년에야 공식 확인되었다.

유고랜드 정부는 1995년 3월 나쉬디를 포함한 외국 국적 지도부 11명에게 국외 추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지도부 대부분은 출국하지 않고 정부의 행정력이 거의 미치지 않는 서부 국경 산악지대로 옮겨 갔으며, 이 지역은 이후 30년 가까이 알자미아의 피난처가 되었다. 같은 해 나쉬디 가문은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을 통해 그와의 관계를 끊는다고 발표했다.[5]

3.4. 고랜드 시기 (1996~2001) [편집]

1996년 9월 27일 탈레반이 아바나를 점령하고 고랜드 이슬람 토후국을 선포하자, 나쉬디는 탈레반의 초청으로 본거지를 고랜드로 옮겼다. 그는 탈레반 지도자 물라 우마르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탈레반은 그 대가로 고랜드 동부와 남부에 훈련소를 세울 땅과 보호를 제공했다. 1996~2001년 이 훈련소들을 거친 인원은 1만 5천~2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대부분은 탈레반의 전선에 투입되거나 출신 지역으로 돌아갔고, 알자미아의 정식 조직원이 된 것은 일부였다.

1997년 4월 12일 유고랜드 수도 시디벨아베스의 영랑 호텔에서 폭탄이 터져 41명이 사망했다(영랑호텔 폭탄 테러). 이 호텔은 루이나군 장교와 군무원, 플라자 그룹 계열 경비업체 직원들이 장기 투숙하던 곳이었으나, 사망자 41명 가운데 루이나인은 17명이었고 22명은 호텔 직원을 비롯한 유고랜드인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1994년 와디 사크르 사건과의 연결이 드러났고, 루이나 정부는 같은 해 5월 국가정보국의 평가를 근거로 알자미아를 테러조직으로 지정했다.

1998년 2월 나쉬디와 알자와히리는 고랜드에서 두 번째 선언을 발표했다. 「전선 선언」으로 불리는 이 문서는 1994년 선언이 공격 대상으로 삼은 루이나 군대에 더해 루이나 시민을 군인과 구별하지 않는다고 밝혀, 이후 알자미아가 공격 대상을 민간인으로 넓히는 근거가 되었다.

1999년 9월 8일, 유고랜드 독립 기념일에 고랜드 접경의 국경감시소 한 곳이 습격당했다(제7국경감시소 습격). 이 감시소는 1993년 공동 선언에 따라 1995년 설치된 루이나·사비에트 공동 국경감시소 가운데 하나로, 루이나 요원 6명과 사비에트 요원 5명, 유고랜드 경비병 3명이 사망했다. 알자미아는 성명에서 루이나인과 사비에트인이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죽었다"는 점을 내세웠고, 이 습격은 「야합」이라는 선전을 가장 직접적으로 형상화한 사건으로 꼽힌다.

3.5. 1.19 사건 [편집]

상세 내용은 1.19 사건 문서 참고.


2001년 1월 19일 오전, 알자미아 조직원 17명이 루이나 국내선 노던에어 여객기들을 노린 동시다발 납치를 벌였다. 두 대가 탈취되어 벨포르 루이나 세계무역센터(BWT)의 북탑과 남탑에 차례로 충돌했고, 세 번째 납치는 공항에서 저지되었다. 범인을 제외한 사망자는 2,891명으로, 루이나에서 일어난 단일 테러로는 가장 많은 인명 피해였다.

공격 준비는 1998년 말부터 고랜드에서 시작되었다. 실행조는 훈련소 수료자 가운데서 선발되었고, 일부는 학생 신분으로 루이나에 들어와 머물렀다. 사건 후 의회 조사는 1999~2000년 사이 국가정보국과 광역수사국(MIA)이 실행조원 일부의 입국과 체류 사실을 각각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두 기관 사이에 정보가 공유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사건 당시 대통령은 발렌타인이었다. 루이나 정부는 며칠 만에 알자미아를 배후로 지목하고 탈레반에 나쉬디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탈레반은 이를 거부했다. 루이나는 곧바로 플로렌시아·사비에트와 「벨포르 긴급 합의」를 맺어 정보 공유와 국경 단속에 나섰고, 1월부터 10월 개전까지의 공백은 고랜드 공산 정부·사비에트와의 비밀 교섭에 쓰였다. 그 결과 루이나는 고랜드의 공산 체제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공산 정부와 함께 탈레반을 공격하기로 했다. 알자미아가 「야합」이라고 규탄해 온 루이나와 공산권의 협력은 1.19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공식적인 동맹의 형태를 갖추었다.

3.6. 루이나-고랜드 전쟁 (2001~2011) [편집]

상세 내용은 루이나-고랜드 전쟁 문서 참고.


2001년 9월 취임한 캘러핸 대통령은 10월 9일 고랜드 개입을 개시했다. 탈레반 정권은 12월 8일 무너졌고, 알자미아 지도부는 고랜드 동부 토라보라의 산악 동굴 지대로 물러났다. 12월 12일부터 루이나군의 집중 공습이 이어졌지만 나쉬디는 12월 중순 산길을 넘어 유고랜드 서부 나크시에 로스탐 부의 산악지대로 빠져나갔고, 루이나 정부가 17일 토라보라 점령을 발표했을 때 그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토라보라에서 나쉬디를 놓친 일은 훗날 전쟁 전체의 흐름을 가른 실책으로 평가된다.

이후 알자미아는 중앙집권적 조직에서 지부와 연계 조직의 연합체로 바뀌었다. 지도부는 유고랜드 서부 국경지대에 숨어 서신과 녹음 성명으로 조직을 이끌었고, 2003년에는 국경 양쪽의 잔존 인력을 묶어 「서부 국경 지부」를 두었다.

2005년 3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로 고랜드 봉쇄구역이 설치되고 루이나·플로렌시아·사비에트 3국이 국제보안지원군(ISAF)을 통해 이곳을 공동 관리하게 되자, 알자미아는 이를 「야합」의 완성으로 규정하고 봉쇄구역을 새 활동 무대로 삼았다. 2007년 11월 3일 봉쇄구역 북부 외곽의 국제보안지원군 공동사령부에서 차량 자폭 공격으로 31명이 사망했다(봉쇄구역 공동사령부 자폭 공격). 사망자는 루이나군 9명, 사비에트군 6명, 플로렌시아군 4명, 현지 고용인 12명이었다. 공격은 봉쇄구역 남부 고원을 장악한 하라카트 알-파즈르의 대원들이 실행했고, 알자미아 서부 국경 지부가 자금과 기술을 제공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하라카트 알-파즈르는 2009년 나쉬디에게 충성을 서약해 알자미아의 공식 지부가 되었다.

2008년부터 루이나는 유고랜드 정부의 비공개 동의 아래 서부 국경지대에서 무인기 공습을 벌여 알자미아 중간 간부들을 제거했다. 공습은 조직의 지휘 체계를 크게 약화시켰지만, 민간인 피해와 유고랜드의 주권 문제를 둘러싼 논란을 남겼다.

3.7. 나쉬디 사살과 분열 (2011~2014) [편집]

상세 내용은 오리온 작전 문서 참고.


2011년 5월 7일 새벽, 루이나 해군 특수전단 대원 24명을 태운 헬기 두 대가 유고랜드 남부 나크시에 로스탐의 소도시 카르바즈 외곽에 있는 3층 저택에 내렸다. 대원들은 40분 만에 저택을 장악하고 3층 침실에 있던 이브라힘 나쉬디를 사살했다. 엘스워스 대통령은 작전 직후 대국민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1. 19의 희생자들에게 약속한 정의가 이루어졌다.

    엘스워스 대통령, 2011년 5월 7일 대국민 연설

카르바즈 저택은 유고랜드 육군 산악훈련소에서 2km 남짓 떨어진 곳에 있었고, 나쉬디는 이곳에서 5년 넘게 머문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때문에 사이클론 작전 시절부터 무자헤딘과 인맥을 이어 온 유고랜드 군정보국 일부가 그를 비호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유고랜드 정부는 비호를 부인하는 한편, 사전 통보 없이 이루어진 작전을 주권 침해라고 항의했다. 루이나 의회 정보위원회는 2012년 보고서에서 "비호를 입증할 증거도, 배제할 증거도 확보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고, 의혹은 지금까지 규명되지 않았다.

지도자 자리는 공동 창설자 알자와히리가 이었다. 그러나 나쉬디가 개인적으로 쌓은 권위와 자금 인맥은 알자와히리에게 고스란히 넘어가지 않았고, 이미 지부 연합체가 된 조직에서 중앙의 통제력은 빠르게 약해졌다. 가장 큰 균열은 서부 국경 지부에서 나왔다.

서부 국경 지부장 아부 우바이다 알나크시는 지도부와 세 가지 점에서 부딪쳤다. 첫째, 그는 고랜드 공산 정부 지역의 주민과 시아파, 선거에 참여한 유고랜드 무슬림까지 배교자로 규정해 공격했고, 지도부는 이것이 무슬림 대중의 지지를 잃게 한다며 반대했다. 둘째, 그는 먼 적 루이나를 치는 것보다 지금 당장 영토를 장악해 국가를 세우는 것이 먼저라고 주장했다. 셋째, 그는 알자미아 지도자가 탈레반 지도자에게 바친 충성 서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2014년 2월 알자와히리는 서부 국경 지부와의 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넉 달 뒤인 6월 17일 알나크시는 고랜드 남서부 국경 산간 지역에서 다울라 알무하지린 수립을 선포했고, 서부 국경 지부 인원의 3분의 2가량이 그를 따라갔다.

3.8. 철수 이후 (2021~현재) [편집]

2021년 루이나가 고랜드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하고 탈레반이 8월 아바나를 다시 점령하자, 알자미아 핵심부는 다시 탈레반 장악 지역으로 들어갔다. 철수 직전인 8월 29일 아바나 국제공항 외곽 검문소에서 일어난 자폭 테러는 알자미아가 아니라 다울라 알무하지린 산하 알 카흐프 여단의 소행이었다.

2022년 7월 31일 루이나 무인기가 탈레반 점령 아래의 아바나 남부 주택가에서 알자와히리를 미사일 두 발로 사살했다. 그를 숨겨 준 것이 하카니 네트워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탈레반이 알자미아와 관계를 끊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알자미아는 2026년 현재까지 후계자를 공식 발표하지 않았다. 탈레반이 자국 수도에서 알자와히리가 사살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후계자를 발표하는 것은 곧 비호자인 탈레반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루이나 국가정보국은 1988년 창설 회의 참석자 가운데 한 명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출신의 아부 하짐 알미스리를 사실상의 지도자로 보고 있으나, 그의 소재는 확인되지 않았다.

국가정보국의 2025년 위협 평가는 핵심부가 루이나 본토를 직접 공격할 능력은 크게 약해졌다고 보았다. 다만 탈레반 치하의 고랜드에서 훈련 시설이 다시 운영되고 있고, 하라카트 알-파즈르를 통해 봉쇄구역의 터널 경제에 자금줄을 두고 있다는 점을 경고했다.

4. 이념 [편집]

4.1. 먼 적 우선론 [편집]

알자미아 이념의 중심은 「먼 적」을 먼저 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1980년대까지 이슬람권 무장 운동의 대부분은 자국의 세속 정권, 곧 「가까운 적」을 타도 대상으로 삼았다. 나쉬디와 알자와히리는 이 순서를 뒤집었다. 가까운 적들이 버티는 것은 그 뒤에 루이나라는 후원자가 있기 때문이므로, 후원자를 먼저 쳐서 물러나게 해야 가까운 적도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서 유고랜드 정부와 고랜드 공산 정부는 각각 루이나와 사비에트의 대리인으로 취급되었다.

4.2. 루이나에 대한 명분 [편집]

알자미아의 선언과 성명이 루이나를 겨냥해 되풀이해 온 명분은 세 갈래로 정리된다.

* 주둔군: 1985년부터 이어진 루이나군의 유고랜드 주둔을 "무슬림의 땅에 대한 점령"으로 규정했다. 하다드 사건과 진양통 사건 같은 주둔군 범죄, 그리고 루이나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주둔군지위협정의 재판권 조항은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사례로 쓰였다.
* 배신: 루이나가 사이클론 작전으로 무슬림 청년들을 전쟁에 끌어들였다가, 사비에트가 물러나자 고랜드를 내버려 두고 유고랜드에 자국 군대만 남겼다는 주장이다. 알자미아는 자신이 사이클론 작전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오히려 정당성의 근거로 뒤집어 썼다.
* 공산권과의 야합: 1993년 공동 선언에서 1.19 이후의 벨포르 긴급 합의와 벨포르 협정, 2005년 봉쇄구역의 3국 공동 관리로 이어진 루이나와 사비에트의 협력을, 겉으로는 적대하는 두 패권이 무슬림을 상대로는 한편이라는 증거로 제시했다.

4.3. 탈레반과의 관계 [편집]

알자미아 지도자는 1996년 이래 탈레반 지도자에게 충성을 서약해 왔으며, 형식상 탈레반의 토후국 아래 있는 조직이다. 이 관계는 알자미아에게 피난처를 주었지만 동시에 제약이기도 했다. 탈레반은 고랜드 안에서의 통치를 우선했고, 1.19 사건 이전에도 루이나와의 정면 충돌을 부를 국외 공격에 대해 사전 협의를 요구했다고 전해진다.[6] 2021년 이후 탈레반은 국제 사회에 자국 영토가 국외 공격에 쓰이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2022년 알자와히리 사살은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보여 준 사례로 꼽힌다.

5. 조직 [편집]

5.1. 지도부 [편집]

최고 지도자인 아미르 아래 10명 안팎의 슈라(협의) 위원회가 주요 결정을 내린다. 그 아래에는 군사·재정·종교·선전의 4개 위원회가 있었다. 군사위원회가 훈련소와 공격 계획을, 재정위원회가 기부금과 사업 자금을, 종교위원회가 공격의 교리적 정당화와 파트와를, 선전위원회가 성명과 영상 배포를 맡았다. 선전 매체 「사우트 알자미아」(알자미아의 목소리)는 1998년 녹음 테이프로 처음 유통되었고 2000년대 중반 이후 인터넷으로 옮겨 갔다.

2001년 이후에도 이 구조는 형식상 유지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부가 공격을 직접 계획하고 중앙은 승인과 자금, 이름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루이나 정보기관은 이를 「프랜차이즈 구조」라 부른다.

5.2. 지부와 연계 조직 [편집]

조직
지역
관계
고랜드 봉쇄구역 남부 고원
지부 (2009~)
서부 국경 지부
유고랜드 남서부·고랜드 남서부
지부 (2003~2014)
고랜드
비호
고랜드
비호
고랜드 남서부
적대 (2014~)

하라카트 알-파즈르는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때 훈련받은 전투원들의 후예가 중심이 된 조직으로, 봉쇄구역 남부 고원을 장악하고 터널 경제로 재정을 유지한다. 2009년 충성 서약 이후 알자미아의 지부 가운데 가장 큰 공격 능력을 가진 조직이 되었고, 2014년 분열 때 알자미아에 남았다. 이후 봉쇄구역 안에서는 다울라 알무하지린을 지지하는 세포들과 하라카트 알-파즈르 사이에 충돌이 이어지고 있다.

5.3. 자금 [편집]

초기 자금은 나쉬디의 개인 재산과 걸프 지역의 기부금이었다. 기부금은 주로 자선 단체를 거쳐 들어왔고, 루이나와 사우디아라비아 당국이 이 경로를 본격적으로 단속하기 시작한 것은 1.19 사건 이후였다. 고랜드 시기에는 나쉬디가 세운 건설·운송 위장 사업체와 탈레반 영역에서 걷힌 통행세의 일부가 더해졌다.

2001년 이후에는 비공식 송금망(하왈라), 납치 몸값, 그리고 하라카트 알-파즈르를 거친 봉쇄구역 터널 경제가 주된 자금원이 되었다. 1.19 사건에 든 비용은 약 45만 달러로 추정되며, 이 금액과 사건이 낳은 피해 규모 사이의 격차는 이후 루이나 대테러 정책 논쟁에서 자주 인용되었다.

6. 주요 공격 [편집]

연도
사건
장소
사망
1994
유고랜드 나크시에 로스탐
23
1997
유고랜드 시디벨
41
1999
유고랜드–고랜드 국경
14
2001
루이나 벨포르
2,891
2007
고랜드 봉쇄구역
31

2001~2021년 고랜드 주둔 루이나군을 겨냥한 공격은 탈레반과 함께 벌인 경우가 많아 조직별 귀속이 분명하지 않다. 1.19 사건 이후 루이나 본토를 겨냥한 알자미아의 음모는 국가정보국 집계로 2002~2015년 사이 9건이 적발되었으며, 실행 단계에 이른 것은 없다.

7. 분파: 다울라 알무하지린 [편집]

상세 내용은 다울라 알무하지린 문서 참고.


다울라 알무하지린(دولة المهاجرين, 이주자들의 국가)은 2014년 알자미아 서부 국경 지부가 떨어져 나와 세운 조직이다. 루이나 언론에서는 흔히 「무하지린국」이라 줄여 부른다. '무하지린'은 신앙을 위해 고향을 떠난 이주자를 뜻하는 말로, 외국인 의용병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름이다. 알자미아 역시 의용병에게서 태어났지만, 알나크시는 "이주는 국가가 있어야 완성된다"며 영토 국가의 수립을 조직의 존재 이유로 내세웠다.

창설자 아부 우바이다 알나크시(본명 사미르 칼릴)는 1969년 유고랜드 존 하다드, 현 세테트시 함맘-마나스지구에서 태어났다. 1987년 하다드 사건 당시 18세였던 그는 사건 이후의 항의 시위에 참여했다가 1989년 고랜드로 건너가 의용병이 되었고, 1990년대에는 알자미아 훈련소 교관을 지냈다. 알자미아가 선전 소재로 삼아 온 주둔군 범죄의 현장에서 자란 인물이 알자미아를 깨고 나왔다는 점이 자주 지적된다.

알나크시는 2014년 6월 17일 국가 수립을 선포하면서 스스로 '아미르 알무으미닌'(신도들의 지도자)을 칭했다. 이 칭호는 탈레반 지도자가 써 온 것이어서, 선포는 알자미아뿐 아니라 탈레반에 대한 정면 도전이기도 했다. 최대 판도였던 2016년 다울라 알무하지린은 고랜드 남서부 국경 산간 지역에서 약 30만 명이 사는 지역을 통치하며 세금을 걷고 종교 경찰을 운영했다.

2017~2018년 루이나군과 고랜드 공산 정부군의 합동 공세, 그리고 이와 별개로 진행된 탈레반의 공세로 다울라 알무하지린은 영토 대부분을 잃었다. 루이나와 탈레반이 사실상 같은 적을 상대한 것은 이 전선이 유일했다. 알나크시는 2018년 11월 공습으로 사망했고, 조직은 이듬해 1월 그의 사망을 확인했다.

영토를 잃은 뒤 주력은 고랜드 남부 자르간 계곡의 석회암 산 밑 터널 시설로 들어가 '동굴'을 뜻하는 「알 카흐프 여단」으로 재편되었고, 이후 다울라 알무하지린의 고랜드 지부로 활동했다. 2021년 8월 29일 아바나 국제공항 외곽 검문소 자폭 테러로 루이나군 11명과 민간인 약 140명이 사망했으며, 2023년 4월 19일 루이나는 이 여단의 지휘부 근거지를 궤도 무기 ORW-91로 타격했다. 루이나 정부는 조직원 34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알자미아와 다울라 알무하지린은 서로를 배교자로 규정하고 있으며, 고랜드와 봉쇄구역 곳곳에서 교전을 벌여 왔다. 탈레반은 알자미아를 감싸는 한편 다울라 알무하지린을 탄압했고, 이 구도는 알자미아를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쪽'으로 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8. 루이나의 대응 [편집]

루이나는 1997년 5월 알자미아를 테러조직으로 지정했지만, 1.19 사건 이전까지의 대응은 국외 정보 수집과 지도부 추적에 머물렀다. 국외는 국가정보국, 국내는 광역수사국이 맡는 분업 구조에서 두 기관의 정보는 따로 쌓였고, 1.19 사건 이후 의회 조사는 이 단절을 사건을 막지 못한 핵심 원인으로 꼽았다.

1.19 사건 이후 루이나는 국토안보법을 제정하고 국가정보국과 광역수사국의 권한을 강화했으며, 항공보안을 전면 개편해 루이나 항공청 직속 위기관리본부를 신설했다. 대외적으로는 플로렌시아·사비에트와의 벨포르 긴급 합의, 루이나-고랜드 전쟁, 고랜드 공산 정부와의 벨포르 협정, 그리고 2005년 봉쇄구역의 3국 공동 관리로 이어지는 테러와의 전쟁을 벌였다.

지도부 제거는 2008년 이후 유고랜드 서부 국경지대의 무인기 공습, 2011년 오리온 작전, 2022년 알자와히리 사살로 이어졌다. 분파 쪽으로는 2023년 알 카흐프 여단에 대한 ORW-91 타격이 있었다. 이 가운데 무인기 공습과 ORW-91 타격은 모두 민간인 피해 논란을 남겼다.

9. 평가 [편집]

9.1. 사이클론 작전의 역풍 [편집]

알자미아는 루이나가 고랜드에서 키운 전쟁의 부산물이라는 점에서, 루이나 안에서는 사이클론 작전의 「역풍」을 상징하는 사례로 거론된다. 국가정보국은 사이클론 작전의 자금이 유고랜드 군정보국을 거쳐 고랜드인 무자헤딘 파벌에게만 갔을 뿐 아랍계 의용병에게 직접 흘러간 적은 없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의용병 숙소와 훈련소는 사이클론 작전이 깔아 놓은 무기와 병참망 위에서 운영되었고, 국가정보국은 의용병의 대규모 유입을 알면서도 고랜드 전선에 보탬이 된다는 이유로 묵인했다는 것이다. 1980년대 국가정보국이 가장 믿을 만한 지휘관으로 꼽아 자금을 댔던 하카니 네트워크가 2022년 알자와히리를 숨겨 준 조직이었다는 사실은, 이 논쟁에서 자주 인용되는 대목이다.

9.2. 「야합」의 역설 [편집]

알자미아가 루이나를 공격한 명분 가운데 하나는 루이나와 사비에트의 「야합」이었다. 그러나 1993년의 공동 선언은 정보 공유와 국경 협력에 관한 선언문 한 장에 지나지 않았다. 이 협력에 실체를 준 것은 오히려 알자미아였다. 1.19 사건 직후의 벨포르 긴급 합의, 사비에트가 부속 의정서로 참여한 벨포르 협정, 그리고 봉쇄구역의 3국 공동 관리는 모두 1.19 사건이 없었다면 성립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알자미아는 자신이 규탄한 동맹을 스스로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7~2018년 다울라 알무하지린을 상대로 루이나와 탈레반이 사실상 같은 편에 선 일은, 알자미아에서 갈라져 나온 조직이 그 역설을 한 번 더 되풀이한 사례로 꼽힌다.

10. 관련 문서 [편집]

[1] 루이나 정부는 2002년 표기 지침에서 「알자미아」를 기본 표기로 정했지만, 지정 고시상의 법률 명칭은 지금도 「알후라 알자미아」이다.[2] 정확한 집계는 없다. 1992년 유고랜드 군정보국이 루이나에 넘긴 자료는 출입 기록이 확인된 인원만 11,400명으로 잡았다.[3] 2002년 고랜드 남부의 옛 훈련소에서 루이나군이 회수한 문서철에 들어 있었다. 4쪽 분량의 아랍어 수기 문서로, 참석자 서명은 없다.[4] 알자미아는 그의 죽음을 사비에트의 소행으로 규정했다. 반면 1990년대 후반 조직을 이탈한 전직 조직원 일부는 루이나 수사기관에서 지도부가 그의 영향력을 부담스러워했다고 진술했다.[5] 가문 소유 기업의 지분에서 나오는 배당이 실제로 끊겼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루이나 재무 당국은 2003년까지 가문 계열사를 거친 자금 흐름을 추적했다.[6] 1.19 사건 계획이 탈레반 지도부에 사전 통보되었는지는 지금도 논란이다. 회수 문서에는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