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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표적을 향해 솟구치며 미사일을 발사하는 F-15 「골든 이글」 (1985년 9월 26일, 요격 시험 당일) |
1. 개요 [편집]
AQ-7은 루이나 공군이 개발한 공중발사식 위성 요격 미사일이다. 전투기가 초음속으로 급상승하면서 고고도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면, 미사일이 3단 로켓으로 우주까지 솟구쳐 올라가 무게 14kg의 소형 유도체를 표적 위성에 직접 충돌시키는 방식이었다. 사업명은 「소형 공중발사 요격체(SALV)」였다.
1985년 9월 26일 고도 530km에서 자국의 기상위성 「헤일로 4호」를 파괴해, 랜드해협에서 전투기가 발사한 미사일로 궤도상의 위성을 파괴한 유일한 사례로 남았다. 그러나 이 시험은 두 달 뒤 시작될 예정이던 센츄리움 궤도협정 협상을 무산시킬 뻔했고, 표적 위성이 아직 일부 관측 자료를 보내오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루이나 안에서도 논란을 불렀다. 실제 위성을 표적으로 한 시험은 이 한 번뿐이었다.
AQ-7은 해군의 KINGFISHER와 달리 표적의 궤도 아래로 함정을 보낼 필요 없이, 전투기가 몇 시간 안에 어느 궤도면 아래로든 날아가 발사할 수 있다는 기동성을 내세웠다. 1982년 사비에트의 '6시간 전쟁' 이후 루이나의 위성 요격 예산은 AQ-7로 집중되었지만, 비용이 당초 예상의 10배 이상으로 불어나고 1987년 궤도협정으로 시험이 금지되면서 1988년 실전 배치 없이 취소되었다. 모든 요격은 자국 표적을 대상으로 한 시험이었고, 사비에트의 위성을 공격한 적은 없다.
1985년 9월 26일 고도 530km에서 자국의 기상위성 「헤일로 4호」를 파괴해, 랜드해협에서 전투기가 발사한 미사일로 궤도상의 위성을 파괴한 유일한 사례로 남았다. 그러나 이 시험은 두 달 뒤 시작될 예정이던 센츄리움 궤도협정 협상을 무산시킬 뻔했고, 표적 위성이 아직 일부 관측 자료를 보내오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루이나 안에서도 논란을 불렀다. 실제 위성을 표적으로 한 시험은 이 한 번뿐이었다.
AQ-7은 해군의 KINGFISHER와 달리 표적의 궤도 아래로 함정을 보낼 필요 없이, 전투기가 몇 시간 안에 어느 궤도면 아래로든 날아가 발사할 수 있다는 기동성을 내세웠다. 1982년 사비에트의 '6시간 전쟁' 이후 루이나의 위성 요격 예산은 AQ-7로 집중되었지만, 비용이 당초 예상의 10배 이상으로 불어나고 1987년 궤도협정으로 시험이 금지되면서 1988년 실전 배치 없이 취소되었다. 모든 요격은 자국 표적을 대상으로 한 시험이었고, 사비에트의 위성을 공격한 적은 없다.
2. 명칭 [편집]
AQ-7은 공군 제식명으로, 공중발사(Air-launched) 특수목적 미사일 계열의 일곱 번째 형식이라는 뜻이다. 개발 단계의 사업명은 「소형 공중발사 요격체(Small Air-Launched Vehicle, SALV)」였고, 공군 내부와 제작사에서는 「SKYLANCE(하늘의 창)」라는 별칭이 쓰였다. 사비에트 정보당국의 식별명은 「코피요(Копьё)」로, 역시 '창'이라는 뜻이다.
해군이 우주 사업에 바닷새 이름을 붙였던 것과 달리 공군은 AQ-7에 새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공군 우주사업 담당자들 사이에서는 "해군은 새를 날리고, 공군은 창을 던진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해군이 우주 사업에 바닷새 이름을 붙였던 것과 달리 공군은 AQ-7에 새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공군 우주사업 담당자들 사이에서는 "해군은 새를 날리고, 공군은 창을 던진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3. 개발 배경 [편집]
3.1. 공군의 우주 [편집]
루이나 공군은 우주개발 초기부터 해군과 주도권을 다퉈 왔지만, 위성 요격 분야에서는 번번이 해군에 밀렸다. 공군의 첫 시도는 1960년 10월의 공중발사 시험 「BLACK ARROW」였다. 전략폭격기에서 발사한 2단 로켓이 궤도를 돌던 해군의 헤론 1호를 향해 날아가 약 7km 거리를 스쳐 지나갔는데, 이 거리에서 위성을 파괴하려면 핵탄두가 필요했다. 1963년 루이나가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에 가입하면서 핵 요격의 길은 막혔고, BLACK ARROW는 한 번의 시험으로 끝났다. 공군이 쏜 첫 위성 요격 미사일의 과녁이 해군의 위성이었다는 사실은 이후 두 군의 관계를 상징하는 일화로 자주 인용된다.
1970년 국방부가 위성 요격 능력의 소요를 제기했을 때 공군은 본토의 고정 기지에서 발사하는 지상 발사형 요격 미사일을 제안했으나, 1971년 8월 함정의 기동성을 내세운 해군의 KINGFISHER에 밀렸다. 같은 달 궤도 핵무기 연구 HIGH TIDE까지 해군의 반대로 기각되면서, 1970년대 루이나의 궤도 군사 전략은 해군이 주도하게 되었다.
1970년 국방부가 위성 요격 능력의 소요를 제기했을 때 공군은 본토의 고정 기지에서 발사하는 지상 발사형 요격 미사일을 제안했으나, 1971년 8월 함정의 기동성을 내세운 해군의 KINGFISHER에 밀렸다. 같은 달 궤도 핵무기 연구 HIGH TIDE까지 해군의 반대로 기각되면서, 1970년대 루이나의 궤도 군사 전략은 해군이 주도하게 되었다.
3.2. 공중발사라는 해법 [편집]
1977년 5월 KINGFISHER가 첫 요격에 성공하자 공군은 반격의 논리를 찾았다. KINGFISHER의 약점은 표적이 발사함 가까이를 지나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함대를 감시하러 오는 사비에트 위성을 잡기에는 충분했지만, 루이나 본토의 미사일 기지와 공군 기지를 촬영하는 위성, 해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지나는 위성을 잡으려면 함정이 며칠씩 이동해야 했다.
공군의 답은 전투기였다. 전투기는 몇 시간 안에 수천 km를 날아가 어느 궤도면 아래든 도달할 수 있었고, 고도 12km 안팎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면 대기가 가장 두꺼운 구간을 건너뛸 수 있어 미사일을 작고 가볍게 만들 수 있었다. 이 개념은 1977년 말 공군 시스템사령부의 내부 연구로 처음 정리되었고, 1978년 2월 제24대 대통령 리처드 잭슨이 개념 연구를 승인했다.
공군의 답은 전투기였다. 전투기는 몇 시간 안에 수천 km를 날아가 어느 궤도면 아래든 도달할 수 있었고, 고도 12km 안팎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면 대기가 가장 두꺼운 구간을 건너뛸 수 있어 미사일을 작고 가볍게 만들 수 있었다. 이 개념은 1977년 말 공군 시스템사령부의 내부 연구로 처음 정리되었고, 1978년 2월 제24대 대통령 리처드 잭슨이 개념 연구를 승인했다.
4. 개발 경위 [편집]
사업은 곧 멈춰 섰다. 1978년 군정이 성립하자 국가비상위원회는 우주예산을 18% 삭감하면서 신규 사업의 착수를 전면 동결했고, 개념 연구를 막 마친 SALV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해군의 유인 궤도 관측소 CROW'S NEST가 1979년 종료된 것도 같은 삭감의 결과였다.
사업이 재개된 것은 10.24 시민혁명으로 헌정이 회복된 뒤였다. 1981년 제25대 대통령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 정부는 SALV를 재승인했고, 같은 해 브라이턴 항공우주가 개발 계약을 따냈다. 1982년 12월 첫 탑재 비행 시험이 이루어졌다.
전환점은 1982년 6월 18일 사비에트의 대규모 전략 훈련, 이른바 '6시간 전쟁'이었다. 이날 사비에트의 야스트레브가 루이나 해군의 항법위성 LODESTAR를 흉내 낸 표적을 요격하자, 국방부는 1983년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이 훈련을 근거로 SALV 예산의 대폭 증액을 요구했다. 공군은 전투기에서 발사하는 요격 미사일이 몇 시간 안에 어느 궤도면이든 공격할 수 있는 반면 KINGFISHER는 함대 근처에서만 쓸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의회는 공군의 손을 들어 줬다. 같은 해 KINGFISHER의 배치 규모는 순양함 2척으로 확정되었고, SALV는 AQ-7이라는 제식명을 받았다.
사업이 재개된 것은 10.24 시민혁명으로 헌정이 회복된 뒤였다. 1981년 제25대 대통령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 정부는 SALV를 재승인했고, 같은 해 브라이턴 항공우주가 개발 계약을 따냈다. 1982년 12월 첫 탑재 비행 시험이 이루어졌다.
전환점은 1982년 6월 18일 사비에트의 대규모 전략 훈련, 이른바 '6시간 전쟁'이었다. 이날 사비에트의 야스트레브가 루이나 해군의 항법위성 LODESTAR를 흉내 낸 표적을 요격하자, 국방부는 1983년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이 훈련을 근거로 SALV 예산의 대폭 증액을 요구했다. 공군은 전투기에서 발사하는 요격 미사일이 몇 시간 안에 어느 궤도면이든 공격할 수 있는 반면 KINGFISHER는 함대 근처에서만 쓸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의회는 공군의 손을 들어 줬다. 같은 해 KINGFISHER의 배치 규모는 순양함 2척으로 확정되었고, SALV는 AQ-7이라는 제식명을 받았다.
5. 구성 [편집]
AQ-7 체계는 미사일, 소형 유도체, 발사 전투기로 이루어진다.
5.1. 미사일 [편집]
항목 | 제원 |
전장 | 5.5m |
직경 | 0.51m |
중량 | 약 1,180kg |
추진 | 3단 고체 로켓 |
유도체 | 14kg |
탐색기 | 냉각식 적외선 |
파괴 방식 | 직접 충돌 |
요격 고도 | 최대 약 590km |
발사 플랫폼 | F-15 전투기 |
1단은 공군의 공대지 미사일 「SABRE」의 2펄스 고체 로켓 모터를 개량해 썼다. 2단은 루이나 항공우주국(RASA)의 소형 과학위성 발사체 「피콜로」의 상단 로켓을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하이드라진 자세 제어 추력기를 갖추고 있어 3단을 표적 방향으로 정확히 겨눌 수 있었다. 민간 기관의 과학 로켓이 위성 요격 미사일의 한 단이 된 셈인데, RASA는 이 사실을 1985년 요격 시험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5.2. 소형 유도체 [편집]
3단에 해당하는 소형 유도체는 무게 14kg, 직경 약 30cm의 원통형으로, AQ-7의 핵심이었다. 2단은 분리 직전 유도체를 초당 약 30회전으로 회전시켰고, 유도체는 이 회전을 이용해 적외선 탐색기의 시야를 훑으며 표적의 위치를 잡았다. 탐색기는 액체헬륨으로 극저온까지 냉각되었는데, 이를 위해 전투기의 기관포 탄약통 자리에 액체헬륨 저장 용기를 설치하고 발사 직전까지 배관으로 냉매를 공급했다.
유도체의 둘레에는 진로를 옆으로 트는 소형 고체 추력기 56개와, 충돌 직전 마지막 미세 조정을 위한 절반 추력의 추력기 8개가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유도체는 표적과의 거리나 고도를 계산하지 않고, 탐색기 시야 안에서 표적이 움직이는 방향만 보고 그 반대쪽 추력기를 점화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표적을 쫓았다. 폭약은 싣지 않았다.
해군 KINGFISHER의 요격체가 38kg에 직경 4.2m의 우산형 전개 장치를 펼쳐 명중 면적을 넓혔던 것과 달리, AQ-7의 유도체는 그보다 3분의 1 남짓한 무게로 우산 없이 표적을 맞히도록 설계되었다. 공군은 이를 두고 KINGFISHER보다 한 세대 앞선 기술이라고 선전했지만, 해군은 적외선 탐색기와 추력기 배열의 기본 개념이 KINGFISHER에서 이미 검증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유도체의 둘레에는 진로를 옆으로 트는 소형 고체 추력기 56개와, 충돌 직전 마지막 미세 조정을 위한 절반 추력의 추력기 8개가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유도체는 표적과의 거리나 고도를 계산하지 않고, 탐색기 시야 안에서 표적이 움직이는 방향만 보고 그 반대쪽 추력기를 점화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표적을 쫓았다. 폭약은 싣지 않았다.
해군 KINGFISHER의 요격체가 38kg에 직경 4.2m의 우산형 전개 장치를 펼쳐 명중 면적을 넓혔던 것과 달리, AQ-7의 유도체는 그보다 3분의 1 남짓한 무게로 우산 없이 표적을 맞히도록 설계되었다. 공군은 이를 두고 KINGFISHER보다 한 세대 앞선 기술이라고 선전했지만, 해군은 적외선 탐색기와 추력기 배열의 기본 개념이 KINGFISHER에서 이미 검증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5.3. 발사 전투기 [편집]
발사는 공군의 주력 제공전투기 F-15이 맡았다. F-15은 동체 중앙 파일런에 AQ-7을 1발 장착했으며, 임무 컴퓨터와 전방 시현기를 개조해 조종사에게 발사 지점까지의 진로와 급상승 각도를 지시했다. 공군은 제41전투요격비행대대(톨루즈 앨드리치 공군기지)와 제77전투요격비행대대(콜마르 헤이든 공군기지)의 F-15 20기를 AQ-7 발사기로 개조했다.
6. 요격 방식 [편집]
AQ-7의 요격은 다음 순서로 이루어졌다.
- 표적 궤도 산출: 공군 우주방위센터가 표적 위성의 궤도를 산출하고, 발사 지점과 발사 시각을 전투기 임무 컴퓨터에 입력한다.
- 발사 지점 이동: F-15이 표적의 지상 궤적 아래 발사 지점으로 비행한다. 필요하면 공중급유를 받는다.
- 급상승: 발사 지점 근처에서 마하 1.2로 가속한 뒤 3.8G로 기수를 들어 65도 각도로 급상승한다.
- 발사: 고도 약 12,000m, 속도 마하 0.95 부근에서 미사일이 자동으로 분리된다.
- 상승: 1단과 2단이 차례로 연소하며 미사일을 우주로 밀어 올리고, 2단이 3단을 표적 방향으로 겨눈 뒤 회전시켜 분리한다.
- 종말 유도: 소형 유도체가 적외선 탐색기로 표적을 포착하고 추력기를 점화해 진로를 맞춘다.
- 충돌: 유도체가 초속 약 6.7km의 상대 속도로 표적에 부딪친다.
AQ-7의 가장 큰 장점은 발사 지점을 고르는 자유였다. 야스트레브는 표적의 궤도면이 사르다 상공을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KINGFISHER는 발사함이 표적 궤적 근처로 이동해야 했지만, AQ-7은 전투기가 날아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발사할 수 있었다. 공군은 기지에서 이륙해 발사하기까지 대부분의 경우 3시간 안쪽이면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반면 요격 고도는 최대 약 590km로, 공군이 1983년 KINGFISHER의 한계로 지적했던 650km보다 오히려 낮았다. 정지궤도는 물론 고도 600km를 넘는 사비에트 위성에는 닿을 수 없었고, 전투기 1기당 미사일 1발만 실을 수 있었다. 공군이 의회에서 내세운 논리가 성능보다 운용 방식의 차이에 가까웠다는 점은 이후 AQ-7을 둘러싼 논쟁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되었다.
7. 시험 이력 [편집]
AQ-7은 모두 15발이 생산되어 5발이 비행 시험에 쓰였다. 실제 위성을 표적으로 한 시험은 제3차 한 번뿐이고, 나머지는 우주 공간의 가상 지점을 향해 쏘거나 먼 별을 표적 삼아 유도체의 추적 능력을 확인하는 시험이었다.
번호 | 일자 | 표적 | 결과 |
1 | 1984.01.19 | 가상 지점 | 성공 |
2 | 1984.11.08 | 별 | 실패 |
3 | 1985.09.26 | 헤일로 4호 | 성공 |
4 | 1986.08.21 | 별 | 성공 |
5 | 1986.10.02 | 별 | 성공 |
제1차 시험은 유도체를 싣지 않은 채 발사체의 비행 성능만 확인했고, 제2차 시험에서는 유도체가 별을 추적하는 도중 탐색기 냉각 계통의 이상으로 표적을 놓쳤다.
7.1. 1985년 9월 26일 [편집]
제3차 시험의 표적은 RASA가 1976년 발사한 기상위성 「헤일로 4호」였다. 고도 530km를 돌던 무게 약 900kg의 위성으로, 공군은 이를 "수명이 다한 위성"으로 발표했다.
이날 제41전투요격비행대대의 공군 중령 레이먼드 A. 코스텔로가 조종한 F-15 「골든 이글」는 북부 해안에서 약 320km 떨어진 바다 상공에서 급상승해 AQ-7을 발사했다. 발사 약 7분 뒤 소형 유도체가 헤일로 4호에 초속 약 6.7km로 충돌했고, 위성은 완전히 부서졌다. 무게 14kg의 유도체가 900kg의 위성을 파괴한 것이다.
시험 직후 두 가지 논란이 일었다. 첫째는 시기였다. 루이나와 사비에트는 11월부터 센츄리움에서 궤도 군비 협상을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고, 공군이 협상으로 시험이 막히기 전에 실제 위성 요격 기록을 남기기 위해 시험을 서둘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03년 공개된 공군 내부 문서는 이 의혹을 상당 부분 뒷받침했다.
둘째는 표적이었다. 헤일로 4호의 기상 관측 장비는 1983년 이후 대부분 멈췄지만, 태양 자외선 관측기 1기는 시험 당일까지 자료를 보내오고 있었다. RASA의 연구자들은 이 관측기로 태양 활동 주기를 11년째 추적하던 중이었고, 시험 계획을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다. RASA 소속 과학자 140여 명은 연명으로 항의 서한을 냈고, 이 일은 RASA가 법적으로는 평화적 목적의 민간 기관이면서도 실제로는 군사 우주 사업의 외피로 쓰여 왔다는 오랜 불만을 공개적으로 터뜨린 계기가 되었다.
이날 제41전투요격비행대대의 공군 중령 레이먼드 A. 코스텔로가 조종한 F-15 「골든 이글」는 북부 해안에서 약 320km 떨어진 바다 상공에서 급상승해 AQ-7을 발사했다. 발사 약 7분 뒤 소형 유도체가 헤일로 4호에 초속 약 6.7km로 충돌했고, 위성은 완전히 부서졌다. 무게 14kg의 유도체가 900kg의 위성을 파괴한 것이다.
시험 직후 두 가지 논란이 일었다. 첫째는 시기였다. 루이나와 사비에트는 11월부터 센츄리움에서 궤도 군비 협상을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고, 공군이 협상으로 시험이 막히기 전에 실제 위성 요격 기록을 남기기 위해 시험을 서둘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03년 공개된 공군 내부 문서는 이 의혹을 상당 부분 뒷받침했다.
둘째는 표적이었다. 헤일로 4호의 기상 관측 장비는 1983년 이후 대부분 멈췄지만, 태양 자외선 관측기 1기는 시험 당일까지 자료를 보내오고 있었다. RASA의 연구자들은 이 관측기로 태양 활동 주기를 11년째 추적하던 중이었고, 시험 계획을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다. RASA 소속 과학자 140여 명은 연명으로 항의 서한을 냈고, 이 일은 RASA가 법적으로는 평화적 목적의 민간 기관이면서도 실제로는 군사 우주 사업의 외피로 쓰여 왔다는 오랜 불만을 공개적으로 터뜨린 계기가 되었다.
7.2. 의회의 제동 [편집]
1985년 12월 루이나 의회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AQ-7을 우주의 실제 물체를 향해 시험하는 것을 금지했다. 공교롭게도 공군은 그 전날 다음 시험에 쓸 표적 위성 2기를 궤도에 올려 둔 상태였다. 두 표적 위성은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채 궤도를 돌다가 1990년대 초 대기권에 재돌입했다. 공군은 1986년 별을 표적으로 한 시험 두 차례를 더 실시해 모두 성공했지만, 이것이 AQ-7의 마지막 비행이 되었다.
8. 파편 [편집]
헤일로 4호의 파괴로 추적 목록에 오른 파편은 285개였다. 당시 RASA는 이 파편들이 1990년대 내내 궤도에 남아 다른 위성을 위협할 것으로 예측했다.
실제 경과는 예측과 달랐다. 파편 대부분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떨어졌는데, 1989~1991년 태양 활동 극대기에 대기가 예상보다 크게 부풀어 오르면서 대기 저항이 커졌기 때문이다. 또 광학 망원경으로 관측한 파편들은 예상과 달리 매우 어두웠다. RASA 연구진은 충돌의 열로 위성 내부의 플라스틱이 증발했다가 파편 표면에 그을음으로 달라붙은 것으로 분석했는데, 이 발견은 그때까지 밝고 작은 파편으로 추정되던 궤도 물체 가운데 일부가 실제로는 어둡고 큰 파편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줬다. 위성 요격 무기의 시험이 궤도 파편 연구의 기준 자료가 된 셈이다.
1998년까지 285개 가운데 대부분이 소멸했으나, 충돌 순간 더 높은 궤도로 튕겨 나간 파편 3개는 2026년 현재까지도 추적 목록에 남아 있다.
실제 경과는 예측과 달랐다. 파편 대부분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떨어졌는데, 1989~1991년 태양 활동 극대기에 대기가 예상보다 크게 부풀어 오르면서 대기 저항이 커졌기 때문이다. 또 광학 망원경으로 관측한 파편들은 예상과 달리 매우 어두웠다. RASA 연구진은 충돌의 열로 위성 내부의 플라스틱이 증발했다가 파편 표면에 그을음으로 달라붙은 것으로 분석했는데, 이 발견은 그때까지 밝고 작은 파편으로 추정되던 궤도 물체 가운데 일부가 실제로는 어둡고 큰 파편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줬다. 위성 요격 무기의 시험이 궤도 파편 연구의 기준 자료가 된 셈이다.
1998년까지 285개 가운데 대부분이 소멸했으나, 충돌 순간 더 높은 궤도로 튕겨 나간 파편 3개는 2026년 현재까지도 추적 목록에 남아 있다.
9. 배치 계획과 취소 [편집]
공군은 AQ-7 112발과 개조 전투기 20기로 2개 비행대대를 편성할 계획이었다. 두 비행대대의 전투기 개조는 1986년까지 끝났지만, 미사일은 시험용을 포함해 15발만 생산되었다.
비용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1981년 계약 당시 5억 달러로 잡혔던 배치 비용은 1986년 53억 달러로 늘었고, 공군은 배치 규모를 3분의 1로 줄이는 안을 검토했다. 여기에 1987년 10월 체결된 센츄리움 궤도협정이 파편을 남기는 요격 시험을 금지하면서, AQ-7은 앞으로도 실제 위성을 표적으로 시험할 수 없게 되었다. 공군은 1987년 스스로 사업 취소를 건의했고, 1988년 루이나 정부는 기술적 문제와 비용 증가를 이유로 AQ-7 사업을 공식 취소했다. AQ-7은 한 번도 실전 배치되지 않았다.
AQ-7의 발사기로 개조된 전투기들이 배치되었던 톨루즈 앨드리치 공군기지와 콜마르 헤이든 공군기지는, 2019년 루이나 우주군 창설 이후 우주군기지로 전환되어 각각 국가우주정보센터와 스페이스 델타7이 자리 잡았다.
비용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1981년 계약 당시 5억 달러로 잡혔던 배치 비용은 1986년 53억 달러로 늘었고, 공군은 배치 규모를 3분의 1로 줄이는 안을 검토했다. 여기에 1987년 10월 체결된 센츄리움 궤도협정이 파편을 남기는 요격 시험을 금지하면서, AQ-7은 앞으로도 실제 위성을 표적으로 시험할 수 없게 되었다. 공군은 1987년 스스로 사업 취소를 건의했고, 1988년 루이나 정부는 기술적 문제와 비용 증가를 이유로 AQ-7 사업을 공식 취소했다. AQ-7은 한 번도 실전 배치되지 않았다.
AQ-7의 발사기로 개조된 전투기들이 배치되었던 톨루즈 앨드리치 공군기지와 콜마르 헤이든 공군기지는, 2019년 루이나 우주군 창설 이후 우주군기지로 전환되어 각각 국가우주정보센터와 스페이스 델타7이 자리 잡았다.
10. 사비에트의 반응 [편집]
사비에트는 1985년 9월의 요격 시험을 "궤도 환경에 대한 도발"로 규정하고, 11월로 예정된 센츄리움 협상에 불참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협상은 결국 예정대로 시작되었지만, 사비에트 대표단은 첫 회담에서 AQ-7 시험의 파편 목록을 회의 탁자 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발언을 시작했다고 한다.
사비에트 군부는 AQ-7이 기존의 두 요격 무기와 전혀 다른 위협이라고 평가했다. 야스트레브는 사르다에서만, KINGFISHER는 루이나 함대 근처에서만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사비에트는 위성이 언제 위험한 구간을 지나는지 미리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루이나 영공 어디서든 이륙할 수 있는 전투기는 발사 지점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센츄리움 궤도협정 제4조가 요격 무기의 보유가 아니라 파편을 남기는 시험을 금지하는 방식으로 정리된 데에는, 무기를 없애기보다 시험을 막는 편이 검증하기 쉽다는 양측의 판단과 함께 AQ-7 시험의 파편이 남긴 인상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
사비에트 군부는 AQ-7이 기존의 두 요격 무기와 전혀 다른 위협이라고 평가했다. 야스트레브는 사르다에서만, KINGFISHER는 루이나 함대 근처에서만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사비에트는 위성이 언제 위험한 구간을 지나는지 미리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루이나 영공 어디서든 이륙할 수 있는 전투기는 발사 지점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센츄리움 궤도협정 제4조가 요격 무기의 보유가 아니라 파편을 남기는 시험을 금지하는 방식으로 정리된 데에는, 무기를 없애기보다 시험을 막는 편이 검증하기 쉽다는 양측의 판단과 함께 AQ-7 시험의 파편이 남긴 인상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
11. 평가 [편집]
AQ-7은 기술적으로는 성공한 무기였다. 14kg의 유도체로 900kg의 위성을 맞힌 제3차 시험은 폭약 없는 직접 충돌 요격이 전투기에서 발사하는 작은 미사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고, 이 기술은 이후 루이나의 미사일 방어 체계 개발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AQ-7이 실제로 무엇을 위한 무기였는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린다. 요격 고도는 KINGFISHER보다 낮았고, 발사 방식의 기동성은 뛰어났지만 전투기 1기당 1발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AQ-7의 진짜 목표가 사비에트의 위성이 아니라 해군이 쥐고 있던 궤도 전략의 주도권이었다고 본다. 1983년 예산을 따낸 뒤 공군 지휘부의 관심이 빠르게 식었고 1987년 공군이 스스로 취소를 건의했다는 사실이 그 근거로 거론된다. 해군에게서 궤도를 빼앗기 위해 만든 무기를, 빼앗은 뒤에는 공군 스스로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한편 AQ-7의 요격 시험은 역설적으로 궤도 파편 문제를 루이나 사회에 처음 널리 알린 사건이기도 했다. 이 시험 이후 RASA는 궤도 파편 연구를 독립 부서로 분리했고, 이는 1991년 루이나와 사비에트가 궤도 물체 목록을 교환하는 부속 합의를 맺는 데 루이나 측 실무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AQ-7이 실제로 무엇을 위한 무기였는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린다. 요격 고도는 KINGFISHER보다 낮았고, 발사 방식의 기동성은 뛰어났지만 전투기 1기당 1발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AQ-7의 진짜 목표가 사비에트의 위성이 아니라 해군이 쥐고 있던 궤도 전략의 주도권이었다고 본다. 1983년 예산을 따낸 뒤 공군 지휘부의 관심이 빠르게 식었고 1987년 공군이 스스로 취소를 건의했다는 사실이 그 근거로 거론된다. 해군에게서 궤도를 빼앗기 위해 만든 무기를, 빼앗은 뒤에는 공군 스스로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한편 AQ-7의 요격 시험은 역설적으로 궤도 파편 문제를 루이나 사회에 처음 널리 알린 사건이기도 했다. 이 시험 이후 RASA는 궤도 파편 연구를 독립 부서로 분리했고, 이는 1991년 루이나와 사비에트가 궤도 물체 목록을 교환하는 부속 합의를 맺는 데 루이나 측 실무 근거가 되었다.
12. 여담 [편집]
- 요격 시험에 쓰인 F-15 「골든 이글」에는 동체 옆면에 작은 위성 모양의 격추 표시가 그려졌다. 전투기에 위성 격추 표시가 그려진 것은 루이나 공군 역사상 이 기체가 유일하며, 기체는 현재 벨포르 공군박물관에 AQ-7 탑재 비행 시험용 미사일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 액체헬륨 저장 용기를 설치하기 위해 기관포 탄약통을 떼어 낸 탓에, AQ-7 발사기로 개조된 F-15은 기관포를 쏠 수 없었다.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총알 대신 헬륨을 싣고 다니는 전투기"라는 농담이 돌았다.
- 헤일로 4호의 태양 자외선 관측기가 마지막으로 보낸 자료는 요격 38분 전의 것이었다. RASA는 이 자료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으며, 연구진이 정리한 헤일로 4호의 관측 기록 마지막 장에는 "1985년 9월 26일, 관측 종료. 사유: 요격"이라고 적혀 있다.
- 1960년 BLACK ARROW 시험에서 공군 미사일이 7km 옆을 스쳐 지나간 해군의 헤론 1호는 그 뒤로도 11년간 궤도를 돌다가 1971년 대기권에 재돌입했다. 해군 관계자들은 이를 두고 "공군이 맞히지 못한 첫 위성"이라고 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