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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차 랜드 전쟁의 배경을 다루는 문서.
2차 랜드 전쟁은 1973년 7월 14일 마베라 내전의 국제화로 시작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1963년 이후 10년 동안 쌓인 여러 갈등이 있었다. 이 문서는 오로아 조약 체제의 해체, 루이나의 콘스탄티노폴 침공,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각각의 내부 균열, 라 마베라와 체르드의 공산화, 북산과 청평의 분쟁을 차례로 다룬다.
이 갈등들은 처음부터 하나의 전쟁으로 이어질 운명은 아니었다. 1963년의 시점에서 해협 북부의 두 패전국은 비공산 국가였고, 청평은 사비에트와 결별한 직후였으며, 루이나와 사비에트는 비밀 양해로 확전을 막는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10년 사이에 이 조건이 하나씩 무너졌고, 해협 북부의 내전과 해협 동부의 국경 분쟁이 1973~1974년에 하나의 전쟁으로 묶였다. 2차 랜드 전쟁이 단일 강화 조약 없이 전역별로 끝난 것은, 애초에 하나의 원인에서 시작된 전쟁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2차 랜드 전쟁은 1973년 7월 14일 마베라 내전의 국제화로 시작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1963년 이후 10년 동안 쌓인 여러 갈등이 있었다. 이 문서는 오로아 조약 체제의 해체, 루이나의 콘스탄티노폴 침공,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각각의 내부 균열, 라 마베라와 체르드의 공산화, 북산과 청평의 분쟁을 차례로 다룬다.
이 갈등들은 처음부터 하나의 전쟁으로 이어질 운명은 아니었다. 1963년의 시점에서 해협 북부의 두 패전국은 비공산 국가였고, 청평은 사비에트와 결별한 직후였으며, 루이나와 사비에트는 비밀 양해로 확전을 막는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10년 사이에 이 조건이 하나씩 무너졌고, 해협 북부의 내전과 해협 동부의 국경 분쟁이 1973~1974년에 하나의 전쟁으로 묶였다. 2차 랜드 전쟁이 단일 강화 조약 없이 전역별로 끝난 것은, 애초에 하나의 원인에서 시작된 전쟁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2. 1차 랜드 전쟁의 유산 [편집]
1958년 해협 통행권 분쟁으로 시작된 1차 랜드 전쟁은 루이나·플로렌시아·빌베른의 협상국과 사비에트·체르드·라 마베라·고랜드의 동맹국이 맞선 전쟁이었다. 동맹국 가운데 공산국가는 사비에트뿐이었다. 체르드는 대통령과 총리가 이끄는 공화국이었고, 라 마베라와 고랜드는 국왕이 다스리는 왕국이었다. 1차 랜드 전쟁은 이념 전쟁이라기보다 해협의 통행 질서를 둘러싼 지역 패권 전쟁이었고, 해협 북부의 왕국과 공화국이 사비에트 편에 선 것도 해협 통항에서 루이나의 우위를 꺾으려는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전쟁은 5년을 끌었고 비교전국도 깊이 관여했다. 북산은 3국 동맹에 따라 협상국을 후방에서 지원했고, 소련은 사비에트에 무기와 고문단을 보냈으며, 청평은 1959~1960년 결별 전까지 사비에트를 도왔다. 협상국은 사비에트 영내에서 봉기를 이어 가던 동사랜드 인민적군을 비밀리에 지원했다.
1963년 오로아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패전국들의 처지는 서로 달랐다. 사비에트는 공산 체제를 유지한 채 군비 제한을 받았고, 고랜드는 바티스타 왕가의 왕정 아래 비교적 빨리 안정을 되찾았다. 반면 체르드와 라 마베라는 패전의 책임과 배상의 짐을 함께 떠안았다. 이념이 아니라 이해관계로 사비에트 편에 섰던 두 비공산 국가가 10년 뒤 공산 혁명의 무대가 된 과정이 2차 랜드 전쟁 배경의 중심에 있다.
전쟁은 5년을 끌었고 비교전국도 깊이 관여했다. 북산은 3국 동맹에 따라 협상국을 후방에서 지원했고, 소련은 사비에트에 무기와 고문단을 보냈으며, 청평은 1959~1960년 결별 전까지 사비에트를 도왔다. 협상국은 사비에트 영내에서 봉기를 이어 가던 동사랜드 인민적군을 비밀리에 지원했다.
1963년 오로아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패전국들의 처지는 서로 달랐다. 사비에트는 공산 체제를 유지한 채 군비 제한을 받았고, 고랜드는 바티스타 왕가의 왕정 아래 비교적 빨리 안정을 되찾았다. 반면 체르드와 라 마베라는 패전의 책임과 배상의 짐을 함께 떠안았다. 이념이 아니라 이해관계로 사비에트 편에 섰던 두 비공산 국가가 10년 뒤 공산 혁명의 무대가 된 과정이 2차 랜드 전쟁 배경의 중심에 있다.
3. 오로아 체제의 해체 [편집]
3.1. 오로아 조약의 구조 [편집]
1963년 1차 랜드 전쟁을 끝낸 오로아 조약은 영토 변경 없이 전쟁 이전의 상태를 확인하는 강화였다. 강화 회의는 1963년 봄 중립 도시 오로아에서 넉 달 동안 열렸고, 조약은 협상국과 동맹국 7개국이 모두 서명한 다자 조약으로 체결되었다. 그 대신 패전한 동맹국, 즉 사비에트·체르드·라 마베라·고랜드에 두 가지 부담을 지웠다. 하나는 협상국에 대한 배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군비 제한이었다. 이행 여부는 협상국과 중립국 대표로 구성된 감시위원회가 확인하도록 했다. 감시위원회는 협상국 3개국과 중립국 2개국의 대표 5명으로 구성되었고, 사찰 결과는 위원회의 다수결로 판정했다. 상설 사무국은 처음에 플로렌시아에 두었다가 1966년 중립국으로 옮겼다.
조약에는 해협 조항도 있었다. 전쟁의 직접 계기였던 해협 통행권 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해, 포르틸락해협을 비롯한 해협 수로에서 모든 체약국 선박의 평시 자유 통항을 보장한 조항이었다. 그러나 포르틸락해협의 한쪽 연안을 차지한 콘스탄티노폴은 조약의 체약국이 아니었다. 1959년 집권한 콘스탄티노폴 혁명정부는 조약 체결 직후 해협 조항이 자국 주권을 침해한다며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조약 체제는 처음부터 패전국의 협조를 전제로 설계되었다. 감시위원회의 사찰권, 배상 연체 시의 제재 조항, 해협 조항 가운데 어느 것도 패전국이 협조를 거부할 때 이를 강제할 별도의 수단을 두지 않았다. 강제할 수단이 있다면 그것은 다시 전쟁을 하는 것뿐이었다. 1960년대 후반 이 전제가 차례로 무너졌다.
조약에는 해협 조항도 있었다. 전쟁의 직접 계기였던 해협 통행권 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해, 포르틸락해협을 비롯한 해협 수로에서 모든 체약국 선박의 평시 자유 통항을 보장한 조항이었다. 그러나 포르틸락해협의 한쪽 연안을 차지한 콘스탄티노폴은 조약의 체약국이 아니었다. 1959년 집권한 콘스탄티노폴 혁명정부는 조약 체결 직후 해협 조항이 자국 주권을 침해한다며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조약 체제는 처음부터 패전국의 협조를 전제로 설계되었다. 감시위원회의 사찰권, 배상 연체 시의 제재 조항, 해협 조항 가운데 어느 것도 패전국이 협조를 거부할 때 이를 강제할 별도의 수단을 두지 않았다. 강제할 수단이 있다면 그것은 다시 전쟁을 하는 것뿐이었다. 1960년대 후반 이 전제가 차례로 무너졌다.
3.2. 배상 체제의 붕괴 [편집]
배상은 조약에서 가장 먼저 흔들린 부분이었다. 패전국 가운데 사비에트는 경제 규모가 커서 배상을 감당할 수 있었으나, 체르드와 라 마베라에게 배상은 국가 재정을 짓누르는 짐이었다. 두 나라는 전쟁 기간 해협 봉쇄로 대외 무역이 끊겼고, 전후에도 협상국 시장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 1965년 기준 배상 지급액은 체르드 정부 세출의 18%, 라 마베라 정부 세출의 14%에 달했다.
1960년대 후반 체르드와 라 마베라는 경제난을 이유로 배상금 지급을 거듭 미루었다. 협상국은 조약의 제재 조항을 들어 경고했지만 실제 제재에는 나서지 않았다. 루이나는 배상 문제로 두 나라의 정치 불안을 키우면 오히려 공산주의 운동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다고 보았고, 배상 수령국인 플로렌시아는 국경을 맞댄 체르드와의 충돌을 피하려 했다.
1970년 체르드가 배상금 지급 중단을 선언했다. 루이나가 콘스탄티노폴을 점령한 직후였고, 체르드 정부는 루이나의 침공으로 해협 조항이 무의미해진 이상 배상 의무도 유지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이듬해 라 마베라도 뒤를 따랐다. 협상국은 이번에도 제재하지 않았고, 배상 중단은 묵인 속에 기정사실이 되었다.
1960년대 후반 체르드와 라 마베라는 경제난을 이유로 배상금 지급을 거듭 미루었다. 협상국은 조약의 제재 조항을 들어 경고했지만 실제 제재에는 나서지 않았다. 루이나는 배상 문제로 두 나라의 정치 불안을 키우면 오히려 공산주의 운동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다고 보았고, 배상 수령국인 플로렌시아는 국경을 맞댄 체르드와의 충돌을 피하려 했다.
1970년 체르드가 배상금 지급 중단을 선언했다. 루이나가 콘스탄티노폴을 점령한 직후였고, 체르드 정부는 루이나의 침공으로 해협 조항이 무의미해진 이상 배상 의무도 유지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이듬해 라 마베라도 뒤를 따랐다. 협상국은 이번에도 제재하지 않았고, 배상 중단은 묵인 속에 기정사실이 되었다.
3.3. 감시위원회의 마비 [편집]
감시위원회도 같은 시기에 기능을 잃었다. 군비 제한의 이행 여부는 감시위원회 사찰단의 현지 확인으로 판정했는데, 체르드는 1967년부터 사찰이 주권 침해라며 사찰단의 입국을 거듭 막았다. 라 마베라는 사찰을 받아들이되 군부가 사찰 대상 시설을 미리 비우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1971년 이후에는 사찰이 한 번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패전국 가운데 사찰에 가장 협조적이었던 것은 고랜드였다. 바티스타 왕정은 협상국과의 관계 회복을 우선했고, 배상도 1960년대 후반까지 대부분 이행했다. 고랜드가 2차 랜드 전쟁의 교전국에서 빠진 것은 이 시기의 관계 회복과도 관련이 있다.
사비에트의 대응은 달랐다. 사비에트는 사찰을 형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실제 군비 재건은 사찰 대상 바깥에서 진행했다. 조약이 제한한 것은 주력함 척수와 육군 상비 병력이었는데, 사비에트는 제한 대상이 아닌 잠수함과 미사일정, 지상 발사 미사일 부대를 늘렸다. 1966년부터 루이나 해군정보부는 사비에트 해군의 실질 전력이 조약의 상한을 넘어섰다는 보고를 잇달아 올렸으나, 조약 문언상 위반을 입증하기는 어려웠다. 조약은 위반되기 전에 우회되었다.
사비에트의 대응은 달랐다. 사비에트는 사찰을 형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실제 군비 재건은 사찰 대상 바깥에서 진행했다. 조약이 제한한 것은 주력함 척수와 육군 상비 병력이었는데, 사비에트는 제한 대상이 아닌 잠수함과 미사일정, 지상 발사 미사일 부대를 늘렸다. 1966년부터 루이나 해군정보부는 사비에트 해군의 실질 전력이 조약의 상한을 넘어섰다는 보고를 잇달아 올렸으나, 조약 문언상 위반을 입증하기는 어려웠다. 조약은 위반되기 전에 우회되었다.
3.4. 해협 조항의 소멸 [편집]
해협 조항은 콘스탄티노폴이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았던 데다, 1970년 루이나가 콘스탄티노폴을 점령하면서 사실상 의미를 잃었다. 조항은 모든 체약국 선박의 평시 통항을 보장했지만, 점령 이후 포르틸락해협의 통항은 루이나 해군의 검색과 허가에 좌우되었다. 조약이 지키려던 해협의 자유 통항을 조약의 승전국이 거두어 간 셈이었다.
배상은 중단되었고, 사찰은 멈췄으며, 해협 조항은 지켜지지 않았다. 1970년대 초에 이르러 오로아 조약은 문서로만 남은 조약이 되었다. 어느 체약국도 조약의 폐기를 선언하지 않았지만, 어느 체약국도 조약을 근거로 행동하지 않았다.
배상은 중단되었고, 사찰은 멈췄으며, 해협 조항은 지켜지지 않았다. 1970년대 초에 이르러 오로아 조약은 문서로만 남은 조약이 되었다. 어느 체약국도 조약의 폐기를 선언하지 않았지만, 어느 체약국도 조약을 근거로 행동하지 않았다.
3.5. 살아남은 비밀 양해 [편집]
조약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은 조약 바깥에 있던 약속이었다. 1963년 루이나와 사비에트는 핵무기를 쓰지 않고 서로의 본토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비밀 양해를 주고받았는데, 이 양해는 오로아 조약이 사문화된 뒤에도 두 나라 모두 깨지 않았다.
양해는 서면 조약이 아니라 강화 회의 기간에 두 나라 대표단장이 교환한 각서와 구두 확인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존재는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두 나라 모두 이를 의회나 동맹국에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1960년대 후반 해협의 긴장이 높아지는 동안 외부에서는 두 강대국이 직접 충돌할 가능성을 실제보다 높게 보았다.
2차 랜드 전쟁은 이 양해가 정한 테두리 안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두 나라는 서로의 동맹국과 대리 세력, 해상 교통로와 제3국 영토에서 싸웠지만 서로의 본토에는 끝까지 손대지 않았다. 1973년 9월 사비에트 공군이 빌베른의 코스트파랄라 항을 폭격하면서도 루이나 본토는 건드리지 않은 것도 이 테두리 때문이었다.
양해는 서면 조약이 아니라 강화 회의 기간에 두 나라 대표단장이 교환한 각서와 구두 확인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존재는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두 나라 모두 이를 의회나 동맹국에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1960년대 후반 해협의 긴장이 높아지는 동안 외부에서는 두 강대국이 직접 충돌할 가능성을 실제보다 높게 보았다.
2차 랜드 전쟁은 이 양해가 정한 테두리 안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두 나라는 서로의 동맹국과 대리 세력, 해상 교통로와 제3국 영토에서 싸웠지만 서로의 본토에는 끝까지 손대지 않았다. 1973년 9월 사비에트 공군이 빌베른의 코스트파랄라 항을 폭격하면서도 루이나 본토는 건드리지 않은 것도 이 테두리 때문이었다.
4. 콘스탄티노폴 침공과 해협 [편집]
4.1. 콘스탄티노폴 혁명정부 [편집]
콘스탄티노폴은 오랫동안 빌베른의 지배를 받다가 19세기 후반 외국 조차지가 난립하는 땅이 되었고, 1945년 빌베른이 이 지역을 루이나에 넘기는 것과 동시에 독립했다. 독립 이후의 정부들은 조차지를 쥔 외국 세력과 토착 빌베른계 주민 사이에서 어느 쪽도 장악하지 못했고, 1950년대 콘스탄티노폴의 정치는 부패와 잦은 정변으로 얼룩졌다.
1959년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혼란은 끝났다. 혁명정부는 집권 직후 외국 조차지를 일괄 회수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루이나계 기업과 주민의 자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루이나에게 콘스탄티노폴 혁명정부는 자국 자산을 빼앗고 해협 한쪽 연안을 차지한 적대 정권이었고, 혁명정부에게 루이나는 조차지 시대의 상징이었다.
1959년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혼란은 끝났다. 혁명정부는 집권 직후 외국 조차지를 일괄 회수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루이나계 기업과 주민의 자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루이나에게 콘스탄티노폴 혁명정부는 자국 자산을 빼앗고 해협 한쪽 연안을 차지한 적대 정권이었고, 혁명정부에게 루이나는 조차지 시대의 상징이었다.
4.2. 1969년의 콘스탄티노폴 [편집]
콘스탄티노폴은 1959년 공산 혁명정부가 들어서 외국 조차지를 일괄 회수한 이후 루이나와 적대 관계에 있었다. 혁명정부는 1960년대 내내 체르드와 라 마베라의 좌파 세력을 지원했고, 해협 북부 좌파 운동의 정신적 근거지 역할을 했다.
1969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폴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혁명정부 안의 강경파 장교들이 온건파 지도부를 체포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세운 것이다. 새 정권은 '혁명의 순수성 회복'을 내걸고 구 조차지 시절의 외국계 기업과 주민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으며, 반대파에 대한 대규모 검거에 나섰다. 여름 동안 검거된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해협 연안의 항만 시설을 군 관리 아래 두고, 구 조차지 시절 이주민 후손이 많이 사는 항만 지구에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루이나 국적 주민 가운데 상당수가 이 시기에 콘스탄티노폴을 떠났다.
10월 19일 구시가의 중앙 광장에서 검거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군이 발포했다. 이날 하루에만 4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희생자 가운데에는 조차지 시절 이주민의 후손과 루이나 국적 주민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학살은 루이나 정부가 콘스탄티노폴 문제를 국제 의제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학살을 외국 세력이 사주한 폭동의 진압이라고 발표했다. 사비에트 관영 매체도 같은 입장을 보도했다. 반면 루이나 언론은 연일 학살 현장의 사진과 탈출한 루이나 국적 주민들의 증언을 실었고, 루이나 국내 여론은 빠르게 강경론으로 기울었다.
1969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폴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혁명정부 안의 강경파 장교들이 온건파 지도부를 체포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세운 것이다. 새 정권은 '혁명의 순수성 회복'을 내걸고 구 조차지 시절의 외국계 기업과 주민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으며, 반대파에 대한 대규모 검거에 나섰다. 여름 동안 검거된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해협 연안의 항만 시설을 군 관리 아래 두고, 구 조차지 시절 이주민 후손이 많이 사는 항만 지구에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루이나 국적 주민 가운데 상당수가 이 시기에 콘스탄티노폴을 떠났다.
10월 19일 구시가의 중앙 광장에서 검거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군이 발포했다. 이날 하루에만 4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희생자 가운데에는 조차지 시절 이주민의 후손과 루이나 국적 주민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학살은 루이나 정부가 콘스탄티노폴 문제를 국제 의제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학살을 외국 세력이 사주한 폭동의 진압이라고 발표했다. 사비에트 관영 매체도 같은 입장을 보도했다. 반면 루이나 언론은 연일 학살 현장의 사진과 탈출한 루이나 국적 주민들의 증언을 실었고, 루이나 국내 여론은 빠르게 강경론으로 기울었다.
4.3. 랜드해협 공동체 긴급회의 [편집]
루이나는 학살 직후 랜드해협 공동체에 긴급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루이나가 내놓은 결의안은 콘스탄티노폴 군사혁명위원회에 대한 제재와 함께 외국인 보호를 위한 국제 감시단 파견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사비에트는 이를 내정 간섭이라며 반대했고, 소련도 사비에트의 입장을 지지했다. 11월 4일 긴급회의는 결의안 없이 결렬되었다.
회의 결렬 이후 루이나 국내에서는 군사 개입론이 빠르게 힘을 얻었다. 아서 W. 그랜트 행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외교적 해결을 강조했지만, 1969년 말부터 해군과 해병대에 콘스탄티노폴 상륙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한 사실이 훗날 밝혀졌다.
회의 결렬 이후 루이나 국내에서는 군사 개입론이 빠르게 힘을 얻었다. 아서 W. 그랜트 행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외교적 해결을 강조했지만, 1969년 말부터 해군과 해병대에 콘스탄티노폴 상륙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한 사실이 훗날 밝혀졌다.
4.4. 새벽 파수 작전 [편집]
1970년 5월 8일 그랜트 행정부는 선전포고 없이 '새벽 파수 작전'으로 콘스탄티노폴을 침공했다. 해병대가 해협 연안의 항만 지구에 상륙하는 동시에 공수부대가 시 외곽의 비행장을 장악했고, 군사혁명위원회 지도부는 침공 나흘 만에 도시를 버리고 내륙으로 달아났다. 지도부는 체르드 국경에 가까운 내륙 산악지대로 물러나 망명 정부를 자처했고, 이후 점령 기간 내내 저항 세력의 상징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루이나 정부는 작전 목적을 자국민 보호와 해협 통항의 안전 확보로 설명했다.
작전에는 해병대 2개 여단과 공수부대 1개 사단이 투입되었고, 해군은 해협 입구를 봉쇄해 외부의 증원을 막았다. 첫 주의 루이나군 전사자는 46명이었다. 침공 직후 루이나 국내의 지지율은 60%를 넘었고, 의회는 사후에 작전을 승인하는 결의를 압도적 다수로 통과시켰다. 사비에트는 침공을 '해협에 대한 제국주의적 강탈'이라고 비난했지만, 외교적 항의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침공과 함께 루이나는 NLTO 이사회에 제4조 협의를 요청했으나, 플로렌시아와 빌베른은 동맹 차원의 지지를 거부했다. 이 협의에서 당사국이 스스로 개시한 역외 군사행동은 조약 제5조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이른바 '콘스탄티노폴 원칙'이 나왔다.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에 홀로 들어갔다.
작전에는 해병대 2개 여단과 공수부대 1개 사단이 투입되었고, 해군은 해협 입구를 봉쇄해 외부의 증원을 막았다. 첫 주의 루이나군 전사자는 46명이었다. 침공 직후 루이나 국내의 지지율은 60%를 넘었고, 의회는 사후에 작전을 승인하는 결의를 압도적 다수로 통과시켰다. 사비에트는 침공을 '해협에 대한 제국주의적 강탈'이라고 비난했지만, 외교적 항의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침공과 함께 루이나는 NLTO 이사회에 제4조 협의를 요청했으나, 플로렌시아와 빌베른은 동맹 차원의 지지를 거부했다. 이 협의에서 당사국이 스스로 개시한 역외 군사행동은 조약 제5조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이른바 '콘스탄티노폴 원칙'이 나왔다.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에 홀로 들어갔다.
상세 내용은 북랜드해협조약기구(NLTO) 문서 참고.
4.5. 해협의 주인이 바뀌다 [편집]
침공으로 루이나는 포르틸락해협을 사실상 단독으로 통제하게 되었다. 해협 이북의 내해에 자리한 체르드와 라 마베라에게 이는 바다로 나가는 유일한 길이 루이나의 손에 넘어갔다는 뜻이었다. 두 나라의 대외 무역은 대부분 포르틸락해협을 거쳤고, 루이나 해군은 1970년 하반기부터 '안전 검색'을 명목으로 해협을 지나는 선박을 임검하기 시작했다.
라 마베라에게 해협 통제는 무엇보다 경제 문제였다. 라 마베라의 주요 수출품인 곡물과 광물은 포르틸락해협을 거쳐야 했고, 루이나 해군의 임검으로 통관이 길어지자 수출 단가가 올랐다. 1971년 라 마베라의 배상 지급 중단은 이 경제적 압박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특히 콘스탄티노폴과 맞닿은 체르드에서는 루이나에 대한 반감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체르드 정부는 침공 직후 루이나 주재 대사를 소환했고, 수도 비셰나르에서는 연일 반루이나 시위가 이어졌다. 1960년대 내내 좌파를 탄압하던 체르드 정부조차 루이나 비판에 앞장서야 할 만큼 여론은 한쪽으로 쏠렸다. 체르드에서 콘스탄티노폴은 오랫동안 경계해야 할 혁명의 근거지였지만, 1970년 5월 이후에는 루이나에 짓밟힌 이웃이 되었다.
라 마베라에게 해협 통제는 무엇보다 경제 문제였다. 라 마베라의 주요 수출품인 곡물과 광물은 포르틸락해협을 거쳐야 했고, 루이나 해군의 임검으로 통관이 길어지자 수출 단가가 올랐다. 1971년 라 마베라의 배상 지급 중단은 이 경제적 압박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특히 콘스탄티노폴과 맞닿은 체르드에서는 루이나에 대한 반감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체르드 정부는 침공 직후 루이나 주재 대사를 소환했고, 수도 비셰나르에서는 연일 반루이나 시위가 이어졌다. 1960년대 내내 좌파를 탄압하던 체르드 정부조차 루이나 비판에 앞장서야 할 만큼 여론은 한쪽으로 쏠렸다. 체르드에서 콘스탄티노폴은 오랫동안 경계해야 할 혁명의 근거지였지만, 1970년 5월 이후에는 루이나에 짓밟힌 이웃이 되었다.
4.6. 점령의 수렁 [편집]
점령은 곧 수렁이 되었다. 군사혁명위원회의 잔당, 도시 빈민가의 민병대, 빌베른계 민족주의 세력이 각기 무장 저항을 이어 갔고, 루이나군은 도시 곳곳에서 끝없는 소모전을 벌였다. 저항 세력의 일부는 국경 너머 체르드로부터 무기와 은신처를 얻었다. 체르드 정부는 공식적으로 개입을 부인했지만, 국경 지대의 체르드 군과 경찰이 저항 세력의 이동을 묵인한 정황은 1971년부터 루이나 정보기관 보고서에 나타난다.
루이나는 점령 통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민정이양위원회를 세우고 빌베른계 주민을 표적으로 한 동화 정책을 밀어붙였다. 훗날 콘스탄티노폴 민족성 말살로 불리게 되는 이 정책은 빌베른계와 혼혈계를 갈라 혼혈계를 우대하는 분할 통치였고, 저항을 잠재우기는커녕 저항 세력의 명분을 키웠다. 1970년 5월부터 1973년 7월까지 콘스탄티노폴에서 전사한 루이나군은 1,100여 명에 이르렀다. 주둔 병력은 1971년 말 4만 명으로 정점에 이르렀고, 1973년까지도 3만 명 이상이 유지되었다.
점령에 대한 국제 반응은 진영에 따라 갈렸다. 랜드해협 공동체에서는 1970~1972년 루이나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세 차례 상정되었으나 루이나와 우방국들의 반대로 모두 부결되었다. 사비에트는 점령을 반제국주의 선전의 소재로 삼았지만 저항 세력에 대한 직접 지원은 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폴 저항 세력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 나라는 국경을 맞댄 체르드뿐이었다.
콘스탄티노폴 점령은 루이나의 군사력을 묶어 두는 동시에, 해협 북부의 반루이나 세력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되었다. 체르드의 민족주의자, 라 마베라의 좌파, 콘스탄티노폴의 저항 세력은 서로 다른 이유로 루이나에 맞섰지만, 1972년 무렵에는 해협을 루이나에게서 되찾는다는 하나의 구호를 공유하게 되었다. 이 구호는 1972년 11월 체르드 혁명정부의 첫 성명에 그대로 들어갔고, 이듬해 라 마베라 혁명정부의 강령에도 실렸다. 해협 북부의 혁명은 계급 혁명의 언어로 말하면서도, 그 동력의 상당 부분은 해협을 빼앗긴 민족의 분노에서 나왔다.
루이나는 점령 통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민정이양위원회를 세우고 빌베른계 주민을 표적으로 한 동화 정책을 밀어붙였다. 훗날 콘스탄티노폴 민족성 말살로 불리게 되는 이 정책은 빌베른계와 혼혈계를 갈라 혼혈계를 우대하는 분할 통치였고, 저항을 잠재우기는커녕 저항 세력의 명분을 키웠다. 1970년 5월부터 1973년 7월까지 콘스탄티노폴에서 전사한 루이나군은 1,100여 명에 이르렀다. 주둔 병력은 1971년 말 4만 명으로 정점에 이르렀고, 1973년까지도 3만 명 이상이 유지되었다.
점령에 대한 국제 반응은 진영에 따라 갈렸다. 랜드해협 공동체에서는 1970~1972년 루이나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세 차례 상정되었으나 루이나와 우방국들의 반대로 모두 부결되었다. 사비에트는 점령을 반제국주의 선전의 소재로 삼았지만 저항 세력에 대한 직접 지원은 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폴 저항 세력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 나라는 국경을 맞댄 체르드뿐이었다.
콘스탄티노폴 점령은 루이나의 군사력을 묶어 두는 동시에, 해협 북부의 반루이나 세력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되었다. 체르드의 민족주의자, 라 마베라의 좌파, 콘스탄티노폴의 저항 세력은 서로 다른 이유로 루이나에 맞섰지만, 1972년 무렵에는 해협을 루이나에게서 되찾는다는 하나의 구호를 공유하게 되었다. 이 구호는 1972년 11월 체르드 혁명정부의 첫 성명에 그대로 들어갔고, 이듬해 라 마베라 혁명정부의 강령에도 실렸다. 해협 북부의 혁명은 계급 혁명의 언어로 말하면서도, 그 동력의 상당 부분은 해협을 빼앗긴 민족의 분노에서 나왔다.
5. 혼란한 자유진영 [편집]
1970년대 초 자유진영은 숫자로는 우세했다. NLTO 3개국에 북산·웨스타시아 같은 권위주의 우방이 더해져 있었고, 해협의 제해권은 루이나 해군이 쥐고 있었다. 그러나 각국은 저마다의 국내 위기와 이해관계에 묶여 있었고, 진영을 하나로 묶는 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뿐이었다.
5.1. 루이나 [편집]
1970년대 초 루이나는 해협 최강의 해군과 동맹 체제를 가진 패권국이었지만, 국내는 검은 10년의 혼란 속에 있었다. 1970년부터 극좌·극우 무장조직의 테러가 잇따랐고, 1971년 혁명적 노동자동맹, 1973년 프롤레타리아 행동대 같은 무장조직이 차례로 등장했다. 정부가 1950년대 후반부터 은밀히 키워 온 극우 조직 공화국의 방패도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혼란의 뿌리 가운데 하나는 1966년 아르덴역 폭발이었다. 수사 당국은 좌파 단체 회원 11명을 기소해 유죄판결을 받아 냈지만, 수사 과정의 의혹은 1970년대 내내 좌파의 분노를 키우는 연료가 되었다. 1971년 9월 결성된 혁명적 노동자동맹은 1967년 이 사건으로 해체된 단체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이어받았고, 1973년 4월 콜마르에서 결성된 프롤레타리아 행동대는 아르덴역 사건 수형자들과 같은 교도소 사동에서 정치화된 일반 수형자들이 만든 조직이었다.
극우 쪽의 사정도 복잡했다. 1958년 결성된 공화국의 방패는 정부의 비호 아래 세를 불렸으나, 1970년 무렵에는 정부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1971년 5월 방패의 온건파가 해산을 선언한 뒤 남은 강경파는 더욱 과격해졌다. 경찰 조직이 부처별로 나뉘어 있던 루이나에서 이 폭력에 대한 초기 대응은 무력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1970년 무렵 정부는 스스로 키운 극우 세력이 통제를 벗어나자 이들과 적대하기 시작했는데, 이 사실은 당시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70년대 초 루이나 시민들이 본 것은 좌우 양쪽에서 동시에 터지는 폭탄과 총격, 그리고 그것을 막지 못하는 국가였다.
경제도 흔들리고 있었다. 1971년 8월 미국이 금 태환을 정지한 뒤에도 루이나는 랜드해협 역내 중앙은행에 대한 금 창구를 배급제로 유지했는데, 이는 역내 통화 질서를 지키는 대가로 루이나의 금 보유량을 계속 깎아 먹었다. 콘스탄티노폴 주둔 비용이 더해지면서 루이나 재정에 대한 압박은 점점 커졌다.
1973년 대통령에 취임한 토머스 데이븐포트는 전임 그랜트 행정부로부터 콘스탄티노폴 점령과 국내 치안 위기를 함께 넘겨받았다. 1972년 대통령 선거의 쟁점도 이 두 가지였다. 데이븐포트는 콘스탄티노폴 점령의 정당성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으나, 점령의 비용과 출구 전략을 따져 물으며 그랜트 행정부의 대응을 비판했다. 루이나는 남녀를 모두 징집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해외 파병의 부담은 곧바로 가정과 거리의 불만으로 번졌다. 콘스탄티노폴 파병 반대 시위는 1971년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이어졌고, 1972년에는 징집 거부로 기소된 사람이 처음으로 연간 1,000명을 넘었다. 의회에서는 원내 제1당인 중도 성향의 공화연합이 정부를 떠받쳤으나, 콘스탄티노폴 문제를 두고 당 안에서도 이견이 컸다. 야당인 사회민주당은 점령의 단계적 종료를 요구했고, 우파의 민주공화당은 체르드를 포함한 해협 북부 전체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했다. 점령을 끝낼 수도, 확대할 수도 없는 상태가 1973년까지 이어졌다. 데이븐포트 행정부의 첫 반년은 콘스탄티노폴 주둔의 비용을 줄일 방안을 검토하는 데 쓰였지만, 그 검토는 해협 북부에서 터진 새 전쟁으로 의미를 잃었다.
돌이켜 보면 그랜트 행정부의 4년은 루이나가 해협 북부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떠안은 시기였다. 콘스탄티노폴 침공은 해협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결과 해협 북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루이나의 문제가 되었다. 데이븐포트가 물려받은 것은 해협의 통제권과 함께 그 통제권이 만들어 낸 적들이었다.
혼란의 뿌리 가운데 하나는 1966년 아르덴역 폭발이었다. 수사 당국은 좌파 단체 회원 11명을 기소해 유죄판결을 받아 냈지만, 수사 과정의 의혹은 1970년대 내내 좌파의 분노를 키우는 연료가 되었다. 1971년 9월 결성된 혁명적 노동자동맹은 1967년 이 사건으로 해체된 단체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이어받았고, 1973년 4월 콜마르에서 결성된 프롤레타리아 행동대는 아르덴역 사건 수형자들과 같은 교도소 사동에서 정치화된 일반 수형자들이 만든 조직이었다.
극우 쪽의 사정도 복잡했다. 1958년 결성된 공화국의 방패는 정부의 비호 아래 세를 불렸으나, 1970년 무렵에는 정부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1971년 5월 방패의 온건파가 해산을 선언한 뒤 남은 강경파는 더욱 과격해졌다. 경찰 조직이 부처별로 나뉘어 있던 루이나에서 이 폭력에 대한 초기 대응은 무력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1970년 무렵 정부는 스스로 키운 극우 세력이 통제를 벗어나자 이들과 적대하기 시작했는데, 이 사실은 당시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70년대 초 루이나 시민들이 본 것은 좌우 양쪽에서 동시에 터지는 폭탄과 총격, 그리고 그것을 막지 못하는 국가였다.
경제도 흔들리고 있었다. 1971년 8월 미국이 금 태환을 정지한 뒤에도 루이나는 랜드해협 역내 중앙은행에 대한 금 창구를 배급제로 유지했는데, 이는 역내 통화 질서를 지키는 대가로 루이나의 금 보유량을 계속 깎아 먹었다. 콘스탄티노폴 주둔 비용이 더해지면서 루이나 재정에 대한 압박은 점점 커졌다.
1973년 대통령에 취임한 토머스 데이븐포트는 전임 그랜트 행정부로부터 콘스탄티노폴 점령과 국내 치안 위기를 함께 넘겨받았다. 1972년 대통령 선거의 쟁점도 이 두 가지였다. 데이븐포트는 콘스탄티노폴 점령의 정당성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으나, 점령의 비용과 출구 전략을 따져 물으며 그랜트 행정부의 대응을 비판했다. 루이나는 남녀를 모두 징집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해외 파병의 부담은 곧바로 가정과 거리의 불만으로 번졌다. 콘스탄티노폴 파병 반대 시위는 1971년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이어졌고, 1972년에는 징집 거부로 기소된 사람이 처음으로 연간 1,000명을 넘었다. 의회에서는 원내 제1당인 중도 성향의 공화연합이 정부를 떠받쳤으나, 콘스탄티노폴 문제를 두고 당 안에서도 이견이 컸다. 야당인 사회민주당은 점령의 단계적 종료를 요구했고, 우파의 민주공화당은 체르드를 포함한 해협 북부 전체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했다. 점령을 끝낼 수도, 확대할 수도 없는 상태가 1973년까지 이어졌다. 데이븐포트 행정부의 첫 반년은 콘스탄티노폴 주둔의 비용을 줄일 방안을 검토하는 데 쓰였지만, 그 검토는 해협 북부에서 터진 새 전쟁으로 의미를 잃었다.
돌이켜 보면 그랜트 행정부의 4년은 루이나가 해협 북부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떠안은 시기였다. 콘스탄티노폴 침공은 해협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결과 해협 북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루이나의 문제가 되었다. 데이븐포트가 물려받은 것은 해협의 통제권과 함께 그 통제권이 만들어 낸 적들이었다.
5.2. 플로렌시아 [편집]
플로렌시아는 1965년 셀레스티아의 독립으로 식민제국을 잃은 뒤, 식민지 대신 NLTO 안에서 자리를 찾아야 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이어진 단계적 탈식민의 마지막 장이었고, 이후 플로렌시아의 대외 정책은 랜드해협 안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셀레스티아의 독립은 협상으로 이루어졌으나, 독립 직전 몇 년 동안 이어진 현지의 시위와 파업은 플로렌시아 국내에 식민지 유지 비용에 대한 회의를 퍼뜨렸다. 이 경험은 이후 플로렌시아 정치가 해외 군사 개입에 신중해진 배경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69년 NLTO 창립 회원국이 된 것은 그 결과였다. 플로렌시아 군은 식민지 주둔군을 본국으로 불러들이면서 규모를 줄이는 대신 해협 방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1960년대 후반 국방 예산의 무게는 해군에서 육군으로 옮겨 갔다. 체르드와 국경을 맞댄 나라로서 육상 위협이 더 직접적이었기 때문이다.
플로렌시아는 루이나와의 동맹을 안보의 중심에 두었지만, 루이나의 콘스탄티노폴 침공에는 여러 차례 우려를 표했다. 1970년 NLTO 이사회에서 루이나의 협의 요청을 거부한 것도 플로렌시아였다. 플로렌시아 정부는 루이나가 스스로 시작한 전쟁에 동맹이 끌려 들어가는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 했고, 이 태도는 이후 2차 랜드 전쟁 내내 이어졌다.
그러나 플로렌시아는 동시에 해협 북부의 정세에 가장 민감한 나라이기도 했다. 자크 르몽 총리의 정부는 체르드와 국경을 맞댄 나라로서 해협 북부의 공산화를 가장 직접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1972년 11월 체르드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플로렌시아는 국경 지대에 예비군을 소집했고, 이듬해 봄에는 체르드에서 넘어온 피란민이 1만 명을 넘었다. 플로렌시아는 NLTO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체르드 국경 지대의 방어 계획 수립을 요청했는데, 이는 루이나의 역외 전쟁에는 선을 그으면서도 자국 영토의 방어에는 동맹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 한 플로렌시아의 이중적 태도를 보여 준다. 루이나의 전쟁을 경계하면서도 공산화의 위협에서는 루이나에 기대야 하는 처지가 플로렌시아의 딜레마였다.
르몽 정부는 1973년 봄 체르드 혁명정부와의 국경 협상을 시도했다. 피란민 송환과 국경 지대 비무장을 논의하는 협상이었는데, 체르드가 플로렌시아의 NLTO 탈퇴를 사실상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면서 두 차례 회담 끝에 결렬되었다. 이 실패 이후 르몽 정부 안에서도 해협 북부 문제는 결국 무력으로 결론이 날 것이라는 판단이 우세해졌다.
플로렌시아는 루이나와의 동맹을 안보의 중심에 두었지만, 루이나의 콘스탄티노폴 침공에는 여러 차례 우려를 표했다. 1970년 NLTO 이사회에서 루이나의 협의 요청을 거부한 것도 플로렌시아였다. 플로렌시아 정부는 루이나가 스스로 시작한 전쟁에 동맹이 끌려 들어가는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 했고, 이 태도는 이후 2차 랜드 전쟁 내내 이어졌다.
그러나 플로렌시아는 동시에 해협 북부의 정세에 가장 민감한 나라이기도 했다. 자크 르몽 총리의 정부는 체르드와 국경을 맞댄 나라로서 해협 북부의 공산화를 가장 직접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1972년 11월 체르드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플로렌시아는 국경 지대에 예비군을 소집했고, 이듬해 봄에는 체르드에서 넘어온 피란민이 1만 명을 넘었다. 플로렌시아는 NLTO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체르드 국경 지대의 방어 계획 수립을 요청했는데, 이는 루이나의 역외 전쟁에는 선을 그으면서도 자국 영토의 방어에는 동맹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 한 플로렌시아의 이중적 태도를 보여 준다. 루이나의 전쟁을 경계하면서도 공산화의 위협에서는 루이나에 기대야 하는 처지가 플로렌시아의 딜레마였다.
르몽 정부는 1973년 봄 체르드 혁명정부와의 국경 협상을 시도했다. 피란민 송환과 국경 지대 비무장을 논의하는 협상이었는데, 체르드가 플로렌시아의 NLTO 탈퇴를 사실상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면서 두 차례 회담 끝에 결렬되었다. 이 실패 이후 르몽 정부 안에서도 해협 북부 문제는 결국 무력으로 결론이 날 것이라는 판단이 우세해졌다.
5.3. 빌베른 [편집]
NLTO의 또 다른 창립 회원국인 빌베른에게 콘스탄티노폴 침공은 국내 정치의 문제였다. 콘스탄티노폴은 오랫동안 빌베른의 지배를 받은 땅이었고 주민 다수가 빌베른계였다. 루이나의 점령 당국이 빌베른계를 표적으로 동화 정책을 펴자 빌베른 국내 여론은 크게 반발했고, 빌베른 정부는 동맹국 루이나와 자국 여론 사이에서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빌베른 정부가 택한 것은 동맹 안에서의 소극적 저항이었다. 1970년 NLTO 협의에서 플로렌시아와 함께 지지를 거부한 것이 그 표현이었다. 그러나 빌베른은 경제와 안보 모두 루이나에 깊이 의존하고 있었고, 그 이상의 반대는 하지 못했다. 20세기 초 니에미이 금융조약 이래 빌베른의 재정은 루이나 자본과 루이나 달러 표시 차관에 묶여 있었고, 빌베른 군의 장비와 훈련도 대부분 루이나에서 왔다. 콘스탄티노폴 문제로 루이나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빌베른 정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2차 랜드 전쟁이 시작된 뒤 빌베른이 남부의 코스트파랄라 항을 루이나의 보급 거점으로 내준 것은 이 의존의 결과였다.
빌베른 정부가 택한 것은 동맹 안에서의 소극적 저항이었다. 1970년 NLTO 협의에서 플로렌시아와 함께 지지를 거부한 것이 그 표현이었다. 그러나 빌베른은 경제와 안보 모두 루이나에 깊이 의존하고 있었고, 그 이상의 반대는 하지 못했다. 20세기 초 니에미이 금융조약 이래 빌베른의 재정은 루이나 자본과 루이나 달러 표시 차관에 묶여 있었고, 빌베른 군의 장비와 훈련도 대부분 루이나에서 왔다. 콘스탄티노폴 문제로 루이나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빌베른 정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2차 랜드 전쟁이 시작된 뒤 빌베른이 남부의 코스트파랄라 항을 루이나의 보급 거점으로 내준 것은 이 의존의 결과였다.
5.4. 웨스타시아와 유고랜드 [편집]
1956년 쿠데타로 집권한 앨빈 카펜트리 요크의 웨스타시아는 경제 개발 계획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한편, 1958년부터 괴뢰국으로 둔 유고랜드 공화국을 강압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요크 정권은 NLTO 회원국이 아니었지만 철저한 반공 노선을 걸었고, 루이나와의 양자 관계를 통해 자유진영에 속해 있었다.
요크 정권의 경제 개발은 수출 산업에 대한 국가의 집중 지원과 노동 통제를 두 축으로 했다. 1960년대 웨스타시아는 해협에서 가장 빠른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그 성장은 노동조합의 금지와 임금 억제 위에 서 있었다. 유고랜드 공화국은 이 체제에서 값싼 노동력과 원료의 공급지 역할을 했다. 웨스타시아가 세운 유고랜드 정부는 형식상 독립국이었으나 국방과 외교, 주요 경제 정책은 모두 웨스타시아가 결정했고, 1960년대 유고랜드의 한국계와 아랍계 주민들 사이에서는 웨스타시아 통치에 맞선 저항 운동이 이어졌다.
요크 정권에게 북쪽 국경 너머 라 마베라의 정세 변화는 오랜 숙적의 문제이자 정권의 안보 문제였다. 웨스타시아와 라 마베라는 국경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반목해 온 사이였고, 1차 랜드 전쟁 때도 서로 반대편에 섰다. 라 마베라에서 좌파 무장투쟁이 커지자 요크 정권은 그 불길이 유고랜드로 번지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유고랜드에서는 웨스타시아의 강압 통치에 대한 반감이 쌓여 있었고, 국경 너머의 혁명은 유고랜드의 저항 세력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었다.
요크 정권의 경제 개발은 수출 산업에 대한 국가의 집중 지원과 노동 통제를 두 축으로 했다. 1960년대 웨스타시아는 해협에서 가장 빠른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그 성장은 노동조합의 금지와 임금 억제 위에 서 있었다. 유고랜드 공화국은 이 체제에서 값싼 노동력과 원료의 공급지 역할을 했다. 웨스타시아가 세운 유고랜드 정부는 형식상 독립국이었으나 국방과 외교, 주요 경제 정책은 모두 웨스타시아가 결정했고, 1960년대 유고랜드의 한국계와 아랍계 주민들 사이에서는 웨스타시아 통치에 맞선 저항 운동이 이어졌다.
요크 정권에게 북쪽 국경 너머 라 마베라의 정세 변화는 오랜 숙적의 문제이자 정권의 안보 문제였다. 웨스타시아와 라 마베라는 국경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반목해 온 사이였고, 1차 랜드 전쟁 때도 서로 반대편에 섰다. 라 마베라에서 좌파 무장투쟁이 커지자 요크 정권은 그 불길이 유고랜드로 번지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유고랜드에서는 웨스타시아의 강압 통치에 대한 반감이 쌓여 있었고, 국경 너머의 혁명은 유고랜드의 저항 세력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었다.
5.5. 북산 [편집]
북산은 1957년 하쿠센 조약 이후 루이나의 영향권 안에서 권위주의 체제를 굳혀 가고 있었다. 하쿠센 조약은 루이나의 안보 보장과 경제 원조를 대가로 북산 정부의 요청이 있으면 루이나군이 내란 진압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한 1950년대식 안보 조약이었다. 북산은 그보다 앞서 결성된 루이나·빌베른·북산의 3국 동맹에도 속해 있었다.
1966년 반루파 청년장교들의 1.23 내란은 하쿠센 조약의 내란 조항에 따라 루이나군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반란은 국왕 친정을 표방했으나 정부는 이를 공산 반란으로 규정했고, 진압 이후 북산 정부는 군부와 루이나에 대한 의존을 더욱 키웠다. 1967년 5.13 부정선거와 1969년 긴급조치가 뒤를 이었다.
긴급조치는 북산의 NLTO 가입에도 영향을 미쳤다. 1969년 NLTO 창설 협상에서 루이나는 3국 동맹의 일원인 북산을 창설 회원국에 넣으려 했으나, 플로렌시아가 긴급조치 아래의 북산을 받아들이면 의회 비준을 장담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결국 북산은 창설 회원국에서 빠졌고, 루이나는 3국 동맹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북산에 대한 안보 공약을 이어 갔다. 북산의 NLTO 가입은 2차 랜드 전쟁이 시작된 뒤인 1974년 5월 9일에야 이루어진다.
1966년 반루파 청년장교들의 1.23 내란은 하쿠센 조약의 내란 조항에 따라 루이나군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반란은 국왕 친정을 표방했으나 정부는 이를 공산 반란으로 규정했고, 진압 이후 북산 정부는 군부와 루이나에 대한 의존을 더욱 키웠다. 1967년 5.13 부정선거와 1969년 긴급조치가 뒤를 이었다.
긴급조치는 북산의 NLTO 가입에도 영향을 미쳤다. 1969년 NLTO 창설 협상에서 루이나는 3국 동맹의 일원인 북산을 창설 회원국에 넣으려 했으나, 플로렌시아가 긴급조치 아래의 북산을 받아들이면 의회 비준을 장담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결국 북산은 창설 회원국에서 빠졌고, 루이나는 3국 동맹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북산에 대한 안보 공약을 이어 갔다. 북산의 NLTO 가입은 2차 랜드 전쟁이 시작된 뒤인 1974년 5월 9일에야 이루어진다.
5.6. NLTO의 창설 [편집]
자유진영에서 이 시기에 생긴 가장 큰 변화는 1969년 NLTO의 창설이었다. 1960년대 중반 사비에트의 군비 재건과 해협 북부의 좌파 운동 확산을 지켜보던 루이나는 1967년 3국 동맹을 상설 다자 기구로 바꾸고 플로렌시아를 끌어들이는 구상을 내놓았다. 1차 랜드 전쟁을 함께 치렀으면서도 평시 동맹 관계가 없던 플로렌시아를 묶어 두는 것이 핵심이었다.
1968년 벨포르 협상에서 루이나는 통합 사령부의 지휘권을 얻는 대신 사무총장 자리를 루이나 국적자에게 주지 않는 데 합의했고, 플로렌시아의 요구에 따라 조약의 적용 범위를 랜드해협과 그 주변으로 한정했다. 1969년 4월 4일 루이나·플로렌시아·빌베른 3개국이 벨포르에서 북랜드해 조약에 서명했다.
NLTO의 창설은 자유진영을 제도로 묶었지만, 동시에 그 한계도 제도로 만들었다. 이듬해 콘스탄티노폴 침공 때 드러났듯이, 플로렌시아와 빌베른은 NLTO를 루이나의 전쟁에 끌려 들어가지 않기 위한 장치로도 썼다.
1968년 벨포르 협상에서 루이나는 통합 사령부의 지휘권을 얻는 대신 사무총장 자리를 루이나 국적자에게 주지 않는 데 합의했고, 플로렌시아의 요구에 따라 조약의 적용 범위를 랜드해협과 그 주변으로 한정했다. 1969년 4월 4일 루이나·플로렌시아·빌베른 3개국이 벨포르에서 북랜드해 조약에 서명했다.
NLTO의 창설은 자유진영을 제도로 묶었지만, 동시에 그 한계도 제도로 만들었다. 이듬해 콘스탄티노폴 침공 때 드러났듯이, 플로렌시아와 빌베른은 NLTO를 루이나의 전쟁에 끌려 들어가지 않기 위한 장치로도 썼다.
5.7. 흔들리는 동맹 [편집]
1973년 여름 자유진영의 모습은 하나의 진영이라기보다 루이나를 중심으로 한 여러 관계의 묶음에 가까웠다. NLTO는 콘스탄티노폴 원칙으로 루이나의 역외 전쟁에 선을 그었고, 북산과 웨스타시아는 NLTO 바깥에서 루이나와 양자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루이나 자신은 국내 폭력과 재정 압박에 시달렸다.
이 진영이 1973년 이후 하나의 전쟁 연합으로 묶일 수 있었던 것은 상대편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해협 북부에서 두 공산 정권이 손을 잡고 사비에트가 이를 승인하자, 서로 다른 계산을 하던 자유진영 국가들은 처음으로 같은 위협을 보게 되었다. 이들은 이후 '연합국'으로 불리게 된다.
이 진영이 1973년 이후 하나의 전쟁 연합으로 묶일 수 있었던 것은 상대편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해협 북부에서 두 공산 정권이 손을 잡고 사비에트가 이를 승인하자, 서로 다른 계산을 하던 자유진영 국가들은 처음으로 같은 위협을 보게 되었다. 이들은 이후 '연합국'으로 불리게 된다.
6. 공산 진영 내의 정치적 불만 고조 [편집]
6.1. 사비에트 [편집]
1964년 안토노프를 이어 집권한 레오니트 브레자코프의 사비에트는 안정과 정체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사비에트는 1963~1965년 공산화된 해협 남부의 위성국들을 관리하며 현상 유지를 앞세웠고, 루이나와는 우주 공간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직접 충돌은 피했다.
해협 남부의 위성국들은 1차 랜드 전쟁 직후의 혼란 속에서 사비에트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 세력이 차례로 집권한 나라들이었다. 사비에트는 이들 나라에 군사고문단과 경제 원조를 제공하는 대신 대외 정책의 보조를 요구했다. 1960년대 후반 사비에트 대외 원조의 대부분이 이 위성국들에 들어갔고, 이는 사비에트가 해협 북부나 동부에 쓸 수 있는 자원을 제약했다.
브레자코프 지도부의 신중함에는 이유가 있었다. 1차 랜드 전쟁의 패전과 오로아 조약의 군비 제한은 사비에트 군부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지도부는 군비를 재건할 시간이 필요했다. 해협 남부의 위성국들은 아직 체제가 굳지 않았고, 이들을 관리하는 데 드는 경제적·군사적 비용도 적지 않았다. 루이나와의 비밀 양해는 사비에트 본토의 안전을 보장했지만, 동시에 사비에트가 먼저 판을 키울 수 없게 묶어 두는 족쇄이기도 했다.
국내 사정도 신중론을 뒷받침했다. 브레자코프 체제 아래 노동인민당은 1950년대의 격동을 끝내고 관료적 안정을 우선했고, 경제는 중공업과 군수에 치우친 채 성장 속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1차 랜드 전쟁 이후 발언권이 커진 군부는 군비 재건을 요구했지만, 재건이 끝나기 전의 모험에는 오히려 반대했다. 사비에트가 1970년대 초 해협 북부의 혁명을 주도하지 않고 뒤따라간 것은 이 내부 균형의 결과였다.
랜드해협 우주경쟁은 이 시기 두 나라의 경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진 무대였다. 직접 충돌이 막힌 상황에서 우주는 서로의 기술력과 군사적 잠재력을 과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고, 사비에트는 우주 개발에 막대한 자원을 쏟았다. 이는 지상에서의 신중함과 우주에서의 공격성이라는 브레자코프 시대 대외 정책의 이중성을 보여 준다. 사비에트의 후원국인 소련은 이 시기 사비에트의 군비 재건과 우주 개발에 기술과 자금을 대면서도, 루이나와의 직접 충돌로 번질 수 있는 모험에는 일관되게 반대했다.
이 신중함은 진영 안에서 비판을 받았다. 청평은 사비에트를 수정주의라 비난했고, 해협 북부의 좌파 세력은 사비에트가 혁명을 외면한다고 불만을 품었다. 콘스탄티노폴이 루이나에 점령될 때 사비에트가 외교적 항의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해협 북부 좌파 사이에서 사비에트에 대한 불신을 결정적으로 키웠다.
1972~1973년 체르드와 라 마베라에서 실제로 혁명이 일어나자, 브레자코프 지도부는 진영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두 혁명정부를 승인하고 지원하는 쪽을 택했다. 노동인민당 정치국 안에서는 신중론도 만만치 않았다. 두 혁명정부를 승인하면 루이나와의 대결이 불가피하고, 해협 너머의 정권을 지킬 수단도 마땅치 않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청평이 해협 북부의 혁명을 사비에트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근거로 삼고 있던 상황에서, 승인을 미루는 것은 진영의 지도국 지위를 스스로 내려놓는 일이었다. 혁명을 외면하면 진영의 주도권을 청평이나 해협 북부의 독자 세력에게 넘겨줄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지원에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사비에트와 해협 북부 사이에는 루이나가 쥔 포르틸락해협이 있었고, 비밀 양해 때문에 사비에트는 루이나 해군과의 정면 대결로 해협을 열 수도 없었다.
해협 남부의 위성국들은 1차 랜드 전쟁 직후의 혼란 속에서 사비에트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 세력이 차례로 집권한 나라들이었다. 사비에트는 이들 나라에 군사고문단과 경제 원조를 제공하는 대신 대외 정책의 보조를 요구했다. 1960년대 후반 사비에트 대외 원조의 대부분이 이 위성국들에 들어갔고, 이는 사비에트가 해협 북부나 동부에 쓸 수 있는 자원을 제약했다.
브레자코프 지도부의 신중함에는 이유가 있었다. 1차 랜드 전쟁의 패전과 오로아 조약의 군비 제한은 사비에트 군부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지도부는 군비를 재건할 시간이 필요했다. 해협 남부의 위성국들은 아직 체제가 굳지 않았고, 이들을 관리하는 데 드는 경제적·군사적 비용도 적지 않았다. 루이나와의 비밀 양해는 사비에트 본토의 안전을 보장했지만, 동시에 사비에트가 먼저 판을 키울 수 없게 묶어 두는 족쇄이기도 했다.
국내 사정도 신중론을 뒷받침했다. 브레자코프 체제 아래 노동인민당은 1950년대의 격동을 끝내고 관료적 안정을 우선했고, 경제는 중공업과 군수에 치우친 채 성장 속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1차 랜드 전쟁 이후 발언권이 커진 군부는 군비 재건을 요구했지만, 재건이 끝나기 전의 모험에는 오히려 반대했다. 사비에트가 1970년대 초 해협 북부의 혁명을 주도하지 않고 뒤따라간 것은 이 내부 균형의 결과였다.
랜드해협 우주경쟁은 이 시기 두 나라의 경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진 무대였다. 직접 충돌이 막힌 상황에서 우주는 서로의 기술력과 군사적 잠재력을 과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고, 사비에트는 우주 개발에 막대한 자원을 쏟았다. 이는 지상에서의 신중함과 우주에서의 공격성이라는 브레자코프 시대 대외 정책의 이중성을 보여 준다. 사비에트의 후원국인 소련은 이 시기 사비에트의 군비 재건과 우주 개발에 기술과 자금을 대면서도, 루이나와의 직접 충돌로 번질 수 있는 모험에는 일관되게 반대했다.
이 신중함은 진영 안에서 비판을 받았다. 청평은 사비에트를 수정주의라 비난했고, 해협 북부의 좌파 세력은 사비에트가 혁명을 외면한다고 불만을 품었다. 콘스탄티노폴이 루이나에 점령될 때 사비에트가 외교적 항의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해협 북부 좌파 사이에서 사비에트에 대한 불신을 결정적으로 키웠다.
1972~1973년 체르드와 라 마베라에서 실제로 혁명이 일어나자, 브레자코프 지도부는 진영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두 혁명정부를 승인하고 지원하는 쪽을 택했다. 노동인민당 정치국 안에서는 신중론도 만만치 않았다. 두 혁명정부를 승인하면 루이나와의 대결이 불가피하고, 해협 너머의 정권을 지킬 수단도 마땅치 않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청평이 해협 북부의 혁명을 사비에트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근거로 삼고 있던 상황에서, 승인을 미루는 것은 진영의 지도국 지위를 스스로 내려놓는 일이었다. 혁명을 외면하면 진영의 주도권을 청평이나 해협 북부의 독자 세력에게 넘겨줄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지원에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사비에트와 해협 북부 사이에는 루이나가 쥔 포르틸락해협이 있었고, 비밀 양해 때문에 사비에트는 루이나 해군과의 정면 대결로 해협을 열 수도 없었다.
6.2. 청평 [편집]
청평은 1960년 사비에트와 결별한 뒤 독자 노선을 걸었다. 두 나라는 1956년 기술 협력 협정을 맺었으나, 사비에트가 경제적 이유로 원조를 끊으면서 약속했던 핵·미사일 기술은 끝내 이전되지 않았다. 청평 지도부는 이를 배신으로 받아들였고, 1960년대 내내 사비에트를 혁명을 버린 수정주의 국가로 비난했다.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국가 기구를 마비시켰다. 당 중앙의 이론가 집단이 동원한 청년 조직이 각지의 당 위원회와 행정 기관을 장악했고, 지방 관료와 지식인 수십만 명이 '반혁명 분자'로 몰려 하방되거나 투옥되었다. 당과 정부의 관료 조직이 공격 대상이 되면서 행정은 멈췄고, 군만이 유일하게 기능하는 국가 기구로 남았다. 이 혼란은 대외 관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청평은 사비에트와도 자유진영과도 적대하는 고립 상태에 빠졌다. 청평의 대외 무역은 1960년대 후반 크게 줄었고, 군의 장비는 1950년대 사비에트제의 노후화가 진행되는데도 교체되지 못했다. 사비에트와의 결별로 끊긴 부품과 기술은 국내 생산으로 메워야 했지만,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서 방위산업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1969년 3월에는 북산과의 국경에서 히노타니 교전이 벌어졌다. 문화대혁명기의 청평이 외부에 대한 강경 노선으로 내부 결속을 꾀하던 시기였다.
1970년 지도자 려우 즈카이가 죽은 뒤 청평은 극심한 권력투쟁에 빠졌다.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당 이론가 집단과, 혼란을 수습하려는 군 지휘부가 후계를 두고 맞섰고, 1971년과 1972년 두 차례 지도부 숙청이 이어졌다. 권력투쟁은 1973년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1971년에는 국방부장이, 1972년에는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당 이론가 집단의 핵심 인물이 차례로 실각했다. 숙청이 거듭될 때마다 군 지휘관들이 교체되었고, 국경 지대의 부대들도 지휘 공백을 겪었다. 북산 군부는 이 혼란을 침공의 기회로 보았다.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국가 기구를 마비시켰다. 당 중앙의 이론가 집단이 동원한 청년 조직이 각지의 당 위원회와 행정 기관을 장악했고, 지방 관료와 지식인 수십만 명이 '반혁명 분자'로 몰려 하방되거나 투옥되었다. 당과 정부의 관료 조직이 공격 대상이 되면서 행정은 멈췄고, 군만이 유일하게 기능하는 국가 기구로 남았다. 이 혼란은 대외 관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청평은 사비에트와도 자유진영과도 적대하는 고립 상태에 빠졌다. 청평의 대외 무역은 1960년대 후반 크게 줄었고, 군의 장비는 1950년대 사비에트제의 노후화가 진행되는데도 교체되지 못했다. 사비에트와의 결별로 끊긴 부품과 기술은 국내 생산으로 메워야 했지만,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서 방위산업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1969년 3월에는 북산과의 국경에서 히노타니 교전이 벌어졌다. 문화대혁명기의 청평이 외부에 대한 강경 노선으로 내부 결속을 꾀하던 시기였다.
1970년 지도자 려우 즈카이가 죽은 뒤 청평은 극심한 권력투쟁에 빠졌다.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당 이론가 집단과, 혼란을 수습하려는 군 지휘부가 후계를 두고 맞섰고, 1971년과 1972년 두 차례 지도부 숙청이 이어졌다. 권력투쟁은 1973년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1971년에는 국방부장이, 1972년에는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당 이론가 집단의 핵심 인물이 차례로 실각했다. 숙청이 거듭될 때마다 군 지휘관들이 교체되었고, 국경 지대의 부대들도 지휘 공백을 겪었다. 북산 군부는 이 혼란을 침공의 기회로 보았다.
6.3. 동사랜드 [편집]
1963년 사비에트에서 떨어져 나온 동사랜드는 쩐 반 럼 국가평의회 위원장 아래에서 공산국가이면서도 사비에트와 거리를 두는 제3세력 노선을 걸었다. 쩐 반 럼은 1951년 봉기를 이끈 인민적군 지휘관 출신으로, 1963년 독립과 함께 국가평의회 위원장에 올랐다. 그에게 동사랜드의 공산주의는 사비에트에서 빌려 온 것이 아니라 1945년 혁명에서 스스로 얻은 것이었고, 이 자부심이 그의 독자 노선을 뒷받침했다. 동사랜드는 1945년 혁명으로 공산화되었으나 1949년 사비에트에 무력으로 합병되었고, 1951년 봉기를 거쳐 1963년에야 독립을 얻었다. 같은 공산국가라 해도 사비에트는 동사랜드에게 해방자가 아니라 점령자였다.
동사랜드와 사비에트 사이에는 롱 강 국경을 둘러싼 긴장이 남아 있었다. 1963년 독립 때 확정되지 않은 채 남은 롱 강 하류의 국경선은 1960년대 내내 두 나라 국경수비대의 소규모 충돌을 낳았다. 쩐 반 럼 정부는 청평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는데, 동사랜드는 1412년부터 1929년까지 청평의 책봉 왕국이었고 그 기억 역시 동사랜드의 독자 노선을 뒷받침했다.
동사랜드가 가장 깊은 적대감을 품은 상대는 북산이었다. 북산의 보호국 시절 동사랜드의 쌀과 노동력은 북산의 전시 경제에 동원되었고, 그 기억은 1945년 혁명의 직접적인 동력이 되었다. 1929년 북산은 청평을 침공한 뒤 동사랜드의 독립을 승인했지만, 실제로는 동사랜드를 보호국으로 삼았다. 두 나라가 같은 진영에서 싸우게 된 것은 오로지 연합국이라는 공동의 적 때문이었다. 북산이 루이나의 동맹 체제 깊숙이 들어가고 해협 동부의 긴장이 높아지자, 동사랜드는 사비에트에 대한 불신을 접어 두고 같은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동사랜드와 사비에트 사이에는 롱 강 국경을 둘러싼 긴장이 남아 있었다. 1963년 독립 때 확정되지 않은 채 남은 롱 강 하류의 국경선은 1960년대 내내 두 나라 국경수비대의 소규모 충돌을 낳았다. 쩐 반 럼 정부는 청평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는데, 동사랜드는 1412년부터 1929년까지 청평의 책봉 왕국이었고 그 기억 역시 동사랜드의 독자 노선을 뒷받침했다.
동사랜드가 가장 깊은 적대감을 품은 상대는 북산이었다. 북산의 보호국 시절 동사랜드의 쌀과 노동력은 북산의 전시 경제에 동원되었고, 그 기억은 1945년 혁명의 직접적인 동력이 되었다. 1929년 북산은 청평을 침공한 뒤 동사랜드의 독립을 승인했지만, 실제로는 동사랜드를 보호국으로 삼았다. 두 나라가 같은 진영에서 싸우게 된 것은 오로지 연합국이라는 공동의 적 때문이었다. 북산이 루이나의 동맹 체제 깊숙이 들어가고 해협 동부의 긴장이 높아지자, 동사랜드는 사비에트에 대한 불신을 접어 두고 같은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6.4. 해협 북부의 좌파 [편집]
공산진영의 불만이 가장 크게 쌓인 곳은 국가가 아니라 해협 북부의 좌파 운동이었다. 체르드와 라 마베라의 공산당은 1960년대 중반 모두 불법화되어 지하에 있었고, 이들에게 유일한 외부 근거지는 콘스탄티노폴 혁명정부였다. 망명 지도부는 콘스탄티노폴에 머물며 방송과 출판으로 본국의 운동을 이끌었고, 무기와 자금도 이 경로로 들어갔다.
해협 북부의 좌파는 사비에트를 존중하면서도 믿지 않았다. 1차 랜드 전쟁에서 사비에트는 체르드와 라 마베라를 동맹국으로 끌어들였지만, 패전 후 배상의 짐은 두 나라가 졌다. 사비에트는 자국의 군비 재건에 몰두했고, 해협 북부의 혁명 운동에는 말로만 연대를 표했다. 1970년 콘스탄티노폴이 루이나에 점령되어 망명 지도부가 근거지를 잃었을 때 사비에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해협 북부 좌파에게 사비에트가 자신들을 위해 싸우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주었다.
이 불신은 해협 북부의 혁명이 사비에트의 지시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났다는 사실과 이어진다. 체르드의 11월 혁명과 라 마베라의 4월 혁명 어느 쪽에서도 사비에트는 사전에 계획에 관여하지 않았다. 사비에트는 일어난 혁명을 승인했을 뿐이며, 그 승인으로 해협 북부의 혁명을 자신의 진영 안으로 끌어들였다.
해협 북부의 좌파는 사비에트를 존중하면서도 믿지 않았다. 1차 랜드 전쟁에서 사비에트는 체르드와 라 마베라를 동맹국으로 끌어들였지만, 패전 후 배상의 짐은 두 나라가 졌다. 사비에트는 자국의 군비 재건에 몰두했고, 해협 북부의 혁명 운동에는 말로만 연대를 표했다. 1970년 콘스탄티노폴이 루이나에 점령되어 망명 지도부가 근거지를 잃었을 때 사비에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해협 북부 좌파에게 사비에트가 자신들을 위해 싸우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주었다.
이 불신은 해협 북부의 혁명이 사비에트의 지시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났다는 사실과 이어진다. 체르드의 11월 혁명과 라 마베라의 4월 혁명 어느 쪽에서도 사비에트는 사전에 계획에 관여하지 않았다. 사비에트는 일어난 혁명을 승인했을 뿐이며, 그 승인으로 해협 북부의 혁명을 자신의 진영 안으로 끌어들였다.
6.5. 분열된 진영 [편집]
1973년 여름 공산진영은 자유진영보다 더 깊이 분열되어 있었다. 사비에트는 해협 남부의 위성국들을 지키는 데 집중했고, 청평은 사비에트와 결별한 채 내부 권력투쟁에 빠져 있었으며, 동사랜드는 둘 모두와 거리를 두었다. 해협 북부의 혁명가들은 사비에트가 혁명을 외면한다고 믿었다.
이 분열된 진영을 전쟁 속에서 하나로 묶은 것도 상대편이었다. 자유진영이 상대의 혁명을 보고 뭉쳤듯이, 공산진영은 루이나와 그 우방들의 개입을 보고 뭉쳤다. 1974년 5월 사비에트가 해르샤바 조약기구를 창설하고 청평과 동사랜드가 여기에 참여한 것은, 이 시기의 분열을 생각하면 전쟁이 아니었다면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분열된 진영을 전쟁 속에서 하나로 묶은 것도 상대편이었다. 자유진영이 상대의 혁명을 보고 뭉쳤듯이, 공산진영은 루이나와 그 우방들의 개입을 보고 뭉쳤다. 1974년 5월 사비에트가 해르샤바 조약기구를 창설하고 청평과 동사랜드가 여기에 참여한 것은, 이 시기의 분열을 생각하면 전쟁이 아니었다면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었다.
7. 마베라와 체르드의 공산화 [편집]
7.1. 라 마베라 [편집]
7.1.1. 패전과 좌파 연립 정부 [편집]
1차 랜드 전쟁에서 패한 라 마베라에서는 배상 부담과 경제난 속에 좌파 연립 정부가 들어섰다. 전쟁 기간의 해협 봉쇄로 곡물 수출이 끊겼던 농촌은 전후에도 회복되지 못했고, 배상을 위한 증세는 도시 노동자층의 생활을 압박했다. 1963년 총선에서 왕실과 가까운 보수 정당들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대패했고, 사회당과 공산당이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연립 정부는 토지 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했고, 대외적으로는 콘스탄티노폴의 혁명정부와 가까이 지냈다. 이 정부는 콘스탄티노폴의 혁명정부와 교역 협정을 맺고 정치 대표단을 교환하며 왕실과 군부의 경계를 샀다. 군부는 연립 정부가 라 마베라를 콘스탄티노폴의 길로 이끌고 있다고 보았다.
연립 정부는 토지 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했고, 대외적으로는 콘스탄티노폴의 혁명정부와 가까이 지냈다. 이 정부는 콘스탄티노폴의 혁명정부와 교역 협정을 맺고 정치 대표단을 교환하며 왕실과 군부의 경계를 샀다. 군부는 연립 정부가 라 마베라를 콘스탄티노폴의 길로 이끌고 있다고 보았다.
7.1.2. 1966년 쿠데타 [편집]
1966년 군부 쿠데타로 연립 정부는 무너졌다. 2월 9일 새벽 수도 방위사령부와 기갑부대가 트리넬의 정부 청사와 방송국을 장악했고, 쿠데타를 이끈 라파엘 오르투뇨 장군이 국가재건평의회 의장에 올랐다. 상페드로 3세 국왕은 쿠데타를 묵인했고, 군부 정권은 국왕의 이름으로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연립 정부의 각료와 공산당 간부 수백 명이 체포되었고, 토지 개혁은 중단되었으며 국유화된 기업은 원소유주에게 돌아갔다.
군부 정권은 국왕을 정통성의 근거로 내세웠고, 국왕은 군부를 왕정의 수호자로 여겼다. 이 결합은 이후 라 마베라 정치의 구도를 결정했다. 좌파에게 군부와 왕실은 하나의 적이 되었고, 1973년 혁명이 군부 정권뿐 아니라 왕정 자체를 겨누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군부 정권은 국왕을 정통성의 근거로 내세웠고, 국왕은 군부를 왕정의 수호자로 여겼다. 이 결합은 이후 라 마베라 정치의 구도를 결정했다. 좌파에게 군부와 왕실은 하나의 적이 되었고, 1973년 혁명이 군부 정권뿐 아니라 왕정 자체를 겨누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7.1.3. 마베라 인민해방군 [편집]
지하로 들어간 공산당은 1967년 마베라 인민해방군을 조직해 산악지대에서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초기 병력은 수백 명에 불과했고, 무기는 경찰서 습격으로 빼앗거나 콘스탄티노폴 혁명정부를 통해 들여온 것이 전부였다. 사령관은 1963년 연립 정부에서 농업부 차관을 지낸 에밀리오 사르미엔토였다. 그는 군사 경험이 없었으나 북부 산악지대의 농민 조직과 오랜 인연이 있었고, 인민해방군은 처음부터 농민 조직망을 기반으로 세를 넓혔다.
군부의 강경 진압은 오히려 농촌과 노동자층의 지지를 인민해방군 쪽으로 몰아 주었다. 군은 게릴라 활동 지역의 마을을 통째로 소개하고 의심 주민을 연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과 고문이 알려지면서 산악지대 농민들이 대거 인민해방군에 가담했다. 1969년 북부 산악 마을 산타 루시아에서 군이 주민 140여 명을 학살한 사건은 그 전환점이었다. 사건 직후 산타 루시아 일대의 청년 수백 명이 인민해방군에 합류했고, 군부 정권 안에서도 토벌 방식에 대한 이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1970년 루이나의 콘스탄티노폴 점령으로 콘스탄티노폴을 통한 보급로는 끊겼지만, 같은 해 시작된 해협 통제로 경제난이 심해지면서 인민해방군의 세력은 오히려 커졌다. 1970년대 초에는 북부 산악지대 대부분이 인민해방군의 해방구가 되었다.
군부의 강경 진압은 오히려 농촌과 노동자층의 지지를 인민해방군 쪽으로 몰아 주었다. 군은 게릴라 활동 지역의 마을을 통째로 소개하고 의심 주민을 연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과 고문이 알려지면서 산악지대 농민들이 대거 인민해방군에 가담했다. 1969년 북부 산악 마을 산타 루시아에서 군이 주민 140여 명을 학살한 사건은 그 전환점이었다. 사건 직후 산타 루시아 일대의 청년 수백 명이 인민해방군에 합류했고, 군부 정권 안에서도 토벌 방식에 대한 이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1970년 루이나의 콘스탄티노폴 점령으로 콘스탄티노폴을 통한 보급로는 끊겼지만, 같은 해 시작된 해협 통제로 경제난이 심해지면서 인민해방군의 세력은 오히려 커졌다. 1970년대 초에는 북부 산악지대 대부분이 인민해방군의 해방구가 되었다.
7.1.4. 4월 혁명 [편집]
1973년 4월 인민해방군은 군 일부의 반란과 맞물려 수도 트리넬을 점령했다. 반란이 시작된 것은 4월 17일 밤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것은 수도 방위를 맡은 부대의 위관급 장교들이었고, 이들은 군부 정권의 부패와 게릴라 토벌전의 잔혹함에 반발해 인민해방군과 비밀리에 연락을 이어 오고 있었다. 반란군이 수도의 주요 시설을 장악하는 동안 인민해방군 주력이 북부에서 내려왔고, 군부 정권은 사흘 만에 무너졌다.
이 4월 혁명으로 상페드로 3세는 남부로 피신해 왕당파 정부를 세웠다. 수도에서 벌어진 사흘간의 교전으로 양측 군인과 민간인 600여 명이 사망했다. 트리넬의 혁명정부는 마테오 콘티를 총리로 내세웠다. 콘티는 1963년 연립 정부의 각료 출신으로 1966년 쿠데타 이후 망명해 있던 인물이었고, 혁명정부는 그를 내세워 공산당 단독 정권이 아니라 연립 정부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모양새를 갖추려 했다. 실권은 인민해방군 지도부가 쥐고 있었다.
혁명정부는 집권 직후 1963년 연립 정부의 토지 개혁을 부활시키고, 군부 정권 시절의 고위 장교와 관료를 체포했다. 왕실 재산은 몰수되었다. 북부와 수도는 혁명정부가, 남부와 서부 일부는 왕당파가 장악한 채 라 마베라는 두 개의 정부로 갈라졌다.
이 4월 혁명으로 상페드로 3세는 남부로 피신해 왕당파 정부를 세웠다. 수도에서 벌어진 사흘간의 교전으로 양측 군인과 민간인 600여 명이 사망했다. 트리넬의 혁명정부는 마테오 콘티를 총리로 내세웠다. 콘티는 1963년 연립 정부의 각료 출신으로 1966년 쿠데타 이후 망명해 있던 인물이었고, 혁명정부는 그를 내세워 공산당 단독 정권이 아니라 연립 정부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모양새를 갖추려 했다. 실권은 인민해방군 지도부가 쥐고 있었다.
혁명정부는 집권 직후 1963년 연립 정부의 토지 개혁을 부활시키고, 군부 정권 시절의 고위 장교와 관료를 체포했다. 왕실 재산은 몰수되었다. 북부와 수도는 혁명정부가, 남부와 서부 일부는 왕당파가 장악한 채 라 마베라는 두 개의 정부로 갈라졌다.
7.2. 체르드 [편집]
7.2.1. 1960년대의 좌파 탄압 [편집]
체르드에서는 1960년대 중반 정부가 좌파를 강하게 탄압했다. 1차 랜드 전쟁 패전 이후 체르드의 보수 정부는 패전의 혼란 속에서 커진 좌파 운동을 국가 안보의 위협으로 규정했고, 노동조합 지도부와 좌파 정당 간부들을 잇달아 투옥했다. 1965년에는 공산당이 불법화되었다. 패전 이후 체르드의 경제는 배상과 해협 봉쇄의 여파로 장기 침체에 빠져 있었고, 실업률은 1960년대 후반 내내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정부는 경제난의 책임을 좌파의 파업과 선동에 돌렸고, 탄압은 경제가 나빠질수록 강해졌다.
이를 비판한 콘스탄티노폴 혁명정부와의 관계도 크게 나빠졌다. 콘스탄티노폴은 체르드의 좌파 망명자들을 받아들이고 방송으로 체르드 정부를 비난했으며, 체르드 정부는 콘스탄티노폴과의 국경을 사실상 봉쇄했다. 1960년대 후반 두 나라는 단교 직전까지 갔다.
이를 비판한 콘스탄티노폴 혁명정부와의 관계도 크게 나빠졌다. 콘스탄티노폴은 체르드의 좌파 망명자들을 받아들이고 방송으로 체르드 정부를 비난했으며, 체르드 정부는 콘스탄티노폴과의 국경을 사실상 봉쇄했다. 1960년대 후반 두 나라는 단교 직전까지 갔다.
7.2.2. 콘스탄티노폴 점령과 여론의 급변 [편집]
그러나 1970년 콘스탄티노폴이 루이나에 점령되자 체르드의 여론은 급변했다. 바로 이웃에 루이나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그동안 따로 움직이던 반루이나 민족주의와 좌파 운동이 하나로 합쳐졌다. 콘스탄티노폴의 혁명정부를 적대하던 체르드인들도 루이나의 점령을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체르드 정부는 이 여론을 따라가려 했다. 루이나 대사를 소환하고 배상 지급 중단을 선언했으며, 국경 너머 콘스탄티노폴 저항 세력의 활동을 묵인했다. 그러나 좌파를 탄압해 온 정부가 반루이나 민족주의의 대변자가 되기에는 신뢰가 부족했다. 1971~1972년 반루이나 시위는 점차 정부 퇴진 시위로 바뀌었다.
체르드 정부는 이 여론을 따라가려 했다. 루이나 대사를 소환하고 배상 지급 중단을 선언했으며, 국경 너머 콘스탄티노폴 저항 세력의 활동을 묵인했다. 그러나 좌파를 탄압해 온 정부가 반루이나 민족주의의 대변자가 되기에는 신뢰가 부족했다. 1971~1972년 반루이나 시위는 점차 정부 퇴진 시위로 바뀌었다.
7.2.3. 11월 혁명 [편집]
1972년 11월 체르드 전역에서 총파업이 일어났고, 좌파 장교들이 수도 비셰나르의 정부 청사를 장악했다. 총파업은 11월 6일 비셰나르의 철도 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되어 사흘 만에 전국으로 번졌고, 11월 8일 새벽 좌파 장교들이 움직였다. 정부는 진압을 명령했으나 수도의 병력 상당수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 11월 혁명으로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고, 아르만 체르노프가 대통령에 올랐다. 체르노프는 1965년 공산당 불법화 이후 투옥되었다가 1971년 석방된 노동운동가 출신이었다. 비셰나르 철도 노조 위원장을 지낸 그는 수감 생활 동안 좌파 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1971년 석방은 콘스탄티노폴 점령 이후 들끓는 여론을 달래려던 옛 정부의 유화책이었다. 그 유화책으로 풀려난 인물이 이듬해 정부를 무너뜨린 셈이다.
체르노프 정권은 루이나군의 콘스탄티노폴 철수를 요구하며 콘스탄티노폴의 저항 세력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체르드는 이전 정부가 묵인하던 국경 너머의 지원을 국가 정책으로 바꾸었고, 콘스탄티노폴 저항 세력의 지휘부가 비셰나르에 사무소를 열었다. 루이나에게 체르드는 이제 콘스탄티노폴 저항 세력의 후방 기지가 되었다.
혁명정부는 집권 직후 옛 정부의 각료와 고위 장교들을 재판에 넘겼고, 주요 은행과 기간산업을 국유화했다. 사비에트는 11월 10일 혁명정부를 승인했다. 옛 정부 지지자와 혁명을 피하려는 중산층 수만 명이 국경을 넘어 플로렌시아로 향했다.
체르노프 정권은 루이나군의 콘스탄티노폴 철수를 요구하며 콘스탄티노폴의 저항 세력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체르드는 이전 정부가 묵인하던 국경 너머의 지원을 국가 정책으로 바꾸었고, 콘스탄티노폴 저항 세력의 지휘부가 비셰나르에 사무소를 열었다. 루이나에게 체르드는 이제 콘스탄티노폴 저항 세력의 후방 기지가 되었다.
혁명정부는 집권 직후 옛 정부의 각료와 고위 장교들을 재판에 넘겼고, 주요 은행과 기간산업을 국유화했다. 사비에트는 11월 10일 혁명정부를 승인했다. 옛 정부 지지자와 혁명을 피하려는 중산층 수만 명이 국경을 넘어 플로렌시아로 향했다.
7.3. 북부 혁명 정권의 연대 [편집]
1973년 5월 체르드와 라 마베라 혁명정부는 상호원조 조약을 맺었다. 5월 20일 트리넬에서 서명되어 흔히 '트리넬 조약'이라 부른다. 4월 혁명으로부터 한 달 만이었고, 두 나라는 어느 한쪽이 외부의 공격을 받으면 다른 쪽이 군사적으로 원조한다고 약속했다. 체르드는 혁명정부 수립 직후 남부의 왕당파와 대치하던 트리넬에 의용대와 무기를 보냈다. 조약은 두 나라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으로 구성된 공동 군사위원회를 두도록 했고, 체르드 의용대는 7월까지 4,000명 규모로 늘었다.
사비에트는 두 정부를 곧바로 승인하고 군사고문단과 무기를 약속했지만, 루이나가 포르틸락해협을 쥐고 있는 한 바다로 보낼 수 있는 물자는 많지 않았다. 사비에트의 지원은 소수의 고문단과 공중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경무기에 그쳤고, 중장비와 탄약은 해협을 통과하지 못했다. 해협 북부의 두 혁명정부는 처음부터 사비에트와 바다로 갈라진 채 싸워야 했다.
이 지리적 조건은 2차 랜드 전쟁의 북부 전역을 결정했다. 혁명정부들은 내해 안에 갇힌 채 싸웠고, 루이나는 해협을 쥔 채 왕당파와 연합국을 지원할 수 있었다. 사비에트가 해협 북부에 실질적인 힘을 보태려면 루이나의 해상 통제를 깨야 했지만, 비밀 양해는 그 길을 막고 있었다.
사비에트는 두 정부를 곧바로 승인하고 군사고문단과 무기를 약속했지만, 루이나가 포르틸락해협을 쥐고 있는 한 바다로 보낼 수 있는 물자는 많지 않았다. 사비에트의 지원은 소수의 고문단과 공중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경무기에 그쳤고, 중장비와 탄약은 해협을 통과하지 못했다. 해협 북부의 두 혁명정부는 처음부터 사비에트와 바다로 갈라진 채 싸워야 했다.
이 지리적 조건은 2차 랜드 전쟁의 북부 전역을 결정했다. 혁명정부들은 내해 안에 갇힌 채 싸웠고, 루이나는 해협을 쥔 채 왕당파와 연합국을 지원할 수 있었다. 사비에트가 해협 북부에 실질적인 힘을 보태려면 루이나의 해상 통제를 깨야 했지만, 비밀 양해는 그 길을 막고 있었다.
8. 북산과 청평의 지속적인 분쟁 [편집]
8.1. 식민 지배와 독립 [편집]
북산과 청평의 적대는 1929년 북산의 청평 침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평은 이후 20년 동안 북산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1949년 말 총독부를 무너뜨리고 독립을 되찾았다. 식민 지배기의 강제 동원과 토지 수탈은 청평인의 집단 기억에 깊이 새겨졌고, 독립 이후 청평의 국가 정체성은 반북산 민족주의 위에 세워졌다. 청북 해협은 독립 이후에도 두 나라 어민과 해군이 부딪치는 곳이었다. 1950년대에만 어선 나포와 해군 함정 사이의 충돌이 수십 차례 기록되었다.
북산의 입장에서 1949년은 식민지의 상실이었다. 북산의 군부와 보수 세력 일부는 청평 상실을 국가적 굴욕으로 여겼고, 1950년대 이후 북산 정치에서 청평에 대한 강경론은 군부의 영향력을 지탱하는 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북산의 입장에서 1949년은 식민지의 상실이었다. 북산의 군부와 보수 세력 일부는 청평 상실을 국가적 굴욕으로 여겼고, 1950년대 이후 북산 정치에서 청평에 대한 강경론은 군부의 영향력을 지탱하는 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8.2. 하쿠센 조약과 진영 대결 [편집]
이후 두 나라는 국경과 청북 해협을 두고 대립했으며, 1957년 하쿠센 조약으로 북산이 루이나의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두 나라의 대립은 진영 대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같은 시기 청평은 사비에트와 기술 협력 협정을 맺고 있었으므로, 1950년대 말의 청북 대립은 루이나와 사비에트의 대리 대결처럼 보였다.
1960년 청평과 사비에트의 결별은 이 구도를 바꾸었다. 청평은 사비에트의 후원을 잃은 채 루이나의 후원을 받는 북산과 홀로 맞서게 되었다. 북산에게 이는 힘의 균형이 자신에게 기울었다는 뜻이었고, 북산 군부의 청평 강경론은 1960년대 내내 힘을 키웠다. 1966년 1.23 내란 이후 군부가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 이 강경론은 정부 정책에도 반영되기 시작했다. 북산은 1960년대 후반 국방비를 해마다 두 자릿수 비율로 늘렸고, 그 대부분은 청평과의 국경 지대에 배치되었다.
1960년 청평과 사비에트의 결별은 이 구도를 바꾸었다. 청평은 사비에트의 후원을 잃은 채 루이나의 후원을 받는 북산과 홀로 맞서게 되었다. 북산에게 이는 힘의 균형이 자신에게 기울었다는 뜻이었고, 북산 군부의 청평 강경론은 1960년대 내내 힘을 키웠다. 1966년 1.23 내란 이후 군부가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 이 강경론은 정부 정책에도 반영되기 시작했다. 북산은 1960년대 후반 국방비를 해마다 두 자릿수 비율로 늘렸고, 그 대부분은 청평과의 국경 지대에 배치되었다.
8.3. 히노타니 교전 [편집]
1969년 3월 히노타니 교전은 국경 충돌이 언제든 전쟁으로 번질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히노타니는 두 나라의 국경이 확정되지 않은 산악 계곡 지대로, 청평 국경수비대가 이 지역의 북산 측 감시초소를 공격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북산은 포병과 공군을 투입해 반격했고, 열흘간의 교전으로 북산군 38명, 청평군 70여 명이 사망했다.
교전은 양측이 병력을 물리면서 멈췄지만 국경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교전 이후 북산은 국경 지대에 2개 사단을 증강 배치했고, 청평도 국경 지대의 병력을 늘렸다. 북산 군부는 교전에서 청평군의 전투력이 문화대혁명의 혼란으로 크게 떨어져 있음을 확인했다고 판단했다.
교전은 북산 국내 정치에도 흔적을 남겼다. 북산 정부가 긴급조치를 선포한 것은 히노타니 교전 직후였고, 정부는 국경의 위기를 긴급조치의 명분 가운데 하나로 내세웠다. 5.13 부정선거 이후 거세진 반정부 운동을 누르는 데 국경의 위기가 쓰인 셈이다. 그리고 이 긴급조치가 한 달 뒤 북산을 NLTO 창설 회원국에서 빠지게 만들었다.
교전은 양측이 병력을 물리면서 멈췄지만 국경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교전 이후 북산은 국경 지대에 2개 사단을 증강 배치했고, 청평도 국경 지대의 병력을 늘렸다. 북산 군부는 교전에서 청평군의 전투력이 문화대혁명의 혼란으로 크게 떨어져 있음을 확인했다고 판단했다.
교전은 북산 국내 정치에도 흔적을 남겼다. 북산 정부가 긴급조치를 선포한 것은 히노타니 교전 직후였고, 정부는 국경의 위기를 긴급조치의 명분 가운데 하나로 내세웠다. 5.13 부정선거 이후 거세진 반정부 운동을 누르는 데 국경의 위기가 쓰인 셈이다. 그리고 이 긴급조치가 한 달 뒤 북산을 NLTO 창설 회원국에서 빠지게 만들었다.
8.4. 려우 즈카이 사후 [편집]
1970년 려우 즈카이가 죽고 청평이 권력투쟁에 휩싸이자, 북산 군부 안에서는 청평을 칠 기회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청평의 지도부가 분열되어 있고 군이 내부 정치에 휘말려 있는 지금이 1949년에 잃은 것을 되찾을 마지막 기회라는 논리였다.
북산 정부는 처음에 신중했다. 북산의 신중론에는 동사랜드도 변수였다. 북산이 청평을 공격하면 옛 보호국 동사랜드가 청평 편에 설 가능성이 컸고, 1929년 이후의 역사를 공유한 세 나라의 관계는 어느 한쪽의 공격이 곧바로 삼국 분쟁으로 번질 수 있는 구조였다. 긴급조치 아래의 북산 정부는 국내 통제에 집중하고 있었고, 청평과의 전면전은 루이나의 지원 없이는 감당할 수 없었다. 1970~1972년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 점령에 묶여 있었고, 북산의 청평 강경론에 동조할 여유가 없었다.
북산 정부는 처음에 신중했다. 북산의 신중론에는 동사랜드도 변수였다. 북산이 청평을 공격하면 옛 보호국 동사랜드가 청평 편에 설 가능성이 컸고, 1929년 이후의 역사를 공유한 세 나라의 관계는 어느 한쪽의 공격이 곧바로 삼국 분쟁으로 번질 수 있는 구조였다. 긴급조치 아래의 북산 정부는 국내 통제에 집중하고 있었고, 청평과의 전면전은 루이나의 지원 없이는 감당할 수 없었다. 1970~1972년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 점령에 묶여 있었고, 북산의 청평 강경론에 동조할 여유가 없었다.
8.5. 북산 군부의 계산 [편집]
1973년 해협 북부에서 전쟁이 시작되고 루이나가 전쟁에 깊이 개입하자, 북산은 루이나의 지원을 확신하게 되었다. 루이나가 이미 공산진영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상, 북산이 청평을 공격하더라도 루이나는 북산을 외면할 수 없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북산 군부는 1973년 하반기부터 침공 계획을 구체화했다. 계획의 골자는 청평 지도부가 권력투쟁으로 분열된 틈을 타 국경 지대의 청평군 주력을 빠르게 포위하고, 청북 해협의 제해권을 장악해 청평의 해상 보급로를 끊는 것이었다.
북산의 계산에는 NLTO 가입도 포함되어 있었다. 북산은 1974년 5월 9일 NLTO에 가입했는데, 플로렌시아는 가입에 동의하는 대신 북산이 자국 영토 밖에서 벌이는 군사행동은 NLTO의 집단 조치 대상이 아니라는 해석 성명을 붙였다. 북산이 청평을 침공한 것은 그로부터 두 달 반 뒤였다.
북산은 1974년 7월 25일 뇌우 작전으로 청평을 침공했고, 이로써 청북전쟁이 2차 랜드 전쟁의 동부 전역이 되었다.
북산의 계산에는 NLTO 가입도 포함되어 있었다. 북산은 1974년 5월 9일 NLTO에 가입했는데, 플로렌시아는 가입에 동의하는 대신 북산이 자국 영토 밖에서 벌이는 군사행동은 NLTO의 집단 조치 대상이 아니라는 해석 성명을 붙였다. 북산이 청평을 침공한 것은 그로부터 두 달 반 뒤였다.
북산은 1974년 7월 25일 뇌우 작전으로 청평을 침공했고, 이로써 청북전쟁이 2차 랜드 전쟁의 동부 전역이 되었다.
9. 개전 [편집]
9.1. 왕당파의 재집결 [편집]
4월 혁명 이후 남부로 물러난 왕당파는 석 달 동안 병력을 다시 모았다. 4월 혁명 당시 수도 밖에 주둔하던 군 부대 상당수는 혁명에 가담하지 않았고, 이들은 국왕을 따라 남부로 내려가 왕당파 군대의 중심이 되었다. 남부의 지주층과 가톨릭 교회도 왕당파를 지지했다. 상페드로 3세는 남부의 항구도시에 왕당파 정부를 세우고 군부 정권 시절의 일부 각료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러나 1966년 쿠데타를 묵인하고 군부 정권의 탄압에 왕의 이름을 빌려준 국왕에 대한 반감은 남부에서도 적지 않았고, 왕당파 정부는 국왕의 권위보다 반공이라는 명분에 기대어 병력을 모았다.
왕당파 정부는 처음부터 외부의 지원을 필요로 했다. 남부의 병력만으로는 북부와 수도를 장악한 혁명정부를 이길 수 없었다. 왕당파는 루이나와 웨스타시아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 문제로 해협 북부에 또 하나의 전선을 여는 데 망설였고, 해협을 통한 무기 공급과 정보 지원 이상의 개입은 미루었다.
왕당파 정부는 처음부터 외부의 지원을 필요로 했다. 남부의 병력만으로는 북부와 수도를 장악한 혁명정부를 이길 수 없었다. 왕당파는 루이나와 웨스타시아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 문제로 해협 북부에 또 하나의 전선을 여는 데 망설였고, 해협을 통한 무기 공급과 정보 지원 이상의 개입은 미루었다.
9.2. 웨스타시아의 결정 [편집]
웨스타시아의 요크 정권은 숙적 라 마베라의 왕실을 돕는 데 처음에는 망설였다. 라 마베라 왕실은 웨스타시아와의 오랜 국경 분쟁에서 늘 반대편에 섰던 상대였고, 웨스타시아 군부 안에서도 왕실을 위해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는 반대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요크 정권은 국경 너머에 체르드와 손잡은 공산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더 큰 위협으로 판단했다. 1973년 5월 체르드와 라 마베라 혁명정부의 상호원조 조약은 이 판단을 굳혔다. 요크는 6월 왕당파 정부와 비밀 협정을 맺어, 웨스타시아군의 개입 대가로 국경 분쟁 지역에 대한 웨스타시아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 비밀 협정은 전쟁 뒤 왕정이 복귀한 라 마베라에서 큰 논란이 되었는데, 국왕이 왕좌를 되찾기 위해 영토를 내주었다는 비판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웨스타시아에게 이 개입은 반공 전쟁인 동시에 오랜 국경 분쟁을 유리하게 끝낼 기회였다.
그러나 요크 정권은 국경 너머에 체르드와 손잡은 공산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더 큰 위협으로 판단했다. 1973년 5월 체르드와 라 마베라 혁명정부의 상호원조 조약은 이 판단을 굳혔다. 요크는 6월 왕당파 정부와 비밀 협정을 맺어, 웨스타시아군의 개입 대가로 국경 분쟁 지역에 대한 웨스타시아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 비밀 협정은 전쟁 뒤 왕정이 복귀한 라 마베라에서 큰 논란이 되었는데, 국왕이 왕좌를 되찾기 위해 영토를 내주었다는 비판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웨스타시아에게 이 개입은 반공 전쟁인 동시에 오랜 국경 분쟁을 유리하게 끝낼 기회였다.
9.3. 1973년 7월 14일 [편집]
1973년 7월 14일 남부와 서부의 왕당파 군대가 일제히 봉기했고, 같은 날 웨스타시아군이 왕당파 정부의 요청에 따라 국경을 넘었다. 2차 랜드 전쟁의 시작을 이날로 보는 것은 내전이 외국군의 개입으로 국제전이 된 날이기 때문이다. 라 마베라의 내전 자체는 4월 혁명 직후부터 남부에서 산발적인 교전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나, 이를 전쟁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는 소수다. 웨스타시아군은 3개 사단 규모로 국경을 넘어 남부의 왕당파 군대와 합류했고, 왕당파와 웨스타시아 연합군은 북쪽의 트리넬을 향해 진격했다.
혁명정부는 이를 외국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체르드와 사비에트에 지원을 요청했다. 혁명정부의 발표문은 웨스타시아의 개입을 '숙적의 침략'으로, 왕당파를 '외적을 끌어들인 반역자'로 규정했다. 혁명정부는 이 전쟁을 계급 전쟁이 아니라 조국 방어 전쟁으로 내세웠고, 이 규정은 왕정에 비판적이던 중도층까지 혁명정부 쪽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냈다. 체르드는 5월의 상호원조 조약에 따라 즉시 참전을 선언했고, 사비에트는 혁명정부에 대한 지원 확대를 발표했다. 이날이 2차 랜드 전쟁의 시작으로 기록된다.
개전 첫 열흘 동안 왕당파와 웨스타시아 연합군은 남부에서 120킬로미터가량 북진했으나, 트리넬 남쪽의 강을 앞에 두고 혁명정부군과 체르드 의용군의 저지에 막혔다. 혁명정부군은 수도 방위에 병력을 집중했고, 인민해방군의 게릴라 부대는 연합군의 보급선을 따라 후방을 공격했다. 전선은 7월 말 교착되었다. 해협 북부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은 해협 동부에도 즉시 전해졌다. 북산 군부는 이를 루이나가 공산진영과의 전쟁에 들어섰다는 신호로 받아들였고, 청평 지도부는 권력투쟁의 와중에도 국경 지대의 경계 태세를 높였다.
루이나는 개전 엿새 뒤인 7월 20일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왕당파에 대한 지원 확대를 결정했다. 콘스탄티노폴에 이어 해협 북부에 두 번째 전선을 여는 것을 꺼리던 데이븐포트 행정부였지만, 체르드가 참전을 선언한 이상 해협 북부 전체가 공산진영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판단이 우세했다. 플로렌시아는 NLTO 차원의 개입에는 여전히 반대했으나, 체르드 국경 지대의 병력을 증강했다.
사비에트는 혁명정부에 대한 지원 확대를 발표했지만, 포르틸락해협이 막힌 상황에서 실제 지원은 공수와 소수의 고문단에 그쳤다. 사비에트 지도부 안에서는 해협 봉쇄를 깨기 위한 해군 작전도 논의되었으나, 루이나와의 비밀 양해를 깰 위험 때문에 채택되지 않았다. 사비에트는 대신 해협 바깥에서 루이나의 보급선을 압박하는 방법을 찾았고, 이는 1973년 9월 빌베른 코스트파랄라 항 폭격으로 이어졌다.
혁명정부는 이를 외국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체르드와 사비에트에 지원을 요청했다. 혁명정부의 발표문은 웨스타시아의 개입을 '숙적의 침략'으로, 왕당파를 '외적을 끌어들인 반역자'로 규정했다. 혁명정부는 이 전쟁을 계급 전쟁이 아니라 조국 방어 전쟁으로 내세웠고, 이 규정은 왕정에 비판적이던 중도층까지 혁명정부 쪽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냈다. 체르드는 5월의 상호원조 조약에 따라 즉시 참전을 선언했고, 사비에트는 혁명정부에 대한 지원 확대를 발표했다. 이날이 2차 랜드 전쟁의 시작으로 기록된다.
개전 첫 열흘 동안 왕당파와 웨스타시아 연합군은 남부에서 120킬로미터가량 북진했으나, 트리넬 남쪽의 강을 앞에 두고 혁명정부군과 체르드 의용군의 저지에 막혔다. 혁명정부군은 수도 방위에 병력을 집중했고, 인민해방군의 게릴라 부대는 연합군의 보급선을 따라 후방을 공격했다. 전선은 7월 말 교착되었다. 해협 북부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은 해협 동부에도 즉시 전해졌다. 북산 군부는 이를 루이나가 공산진영과의 전쟁에 들어섰다는 신호로 받아들였고, 청평 지도부는 권력투쟁의 와중에도 국경 지대의 경계 태세를 높였다.
루이나는 개전 엿새 뒤인 7월 20일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왕당파에 대한 지원 확대를 결정했다. 콘스탄티노폴에 이어 해협 북부에 두 번째 전선을 여는 것을 꺼리던 데이븐포트 행정부였지만, 체르드가 참전을 선언한 이상 해협 북부 전체가 공산진영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판단이 우세했다. 플로렌시아는 NLTO 차원의 개입에는 여전히 반대했으나, 체르드 국경 지대의 병력을 증강했다.
사비에트는 혁명정부에 대한 지원 확대를 발표했지만, 포르틸락해협이 막힌 상황에서 실제 지원은 공수와 소수의 고문단에 그쳤다. 사비에트 지도부 안에서는 해협 봉쇄를 깨기 위한 해군 작전도 논의되었으나, 루이나와의 비밀 양해를 깰 위험 때문에 채택되지 않았다. 사비에트는 대신 해협 바깥에서 루이나의 보급선을 압박하는 방법을 찾았고, 이는 1973년 9월 빌베른 코스트파랄라 항 폭격으로 이어졌다.
9.4. 개전 이후 [편집]
7월 14일의 개전은 이후 1년 사이 여러 갈래로 확대되었다. 루이나는 왕당파에 대한 지원을 본격화하고 빌베른의 코스트파랄라 항을 보급 거점으로 삼았다. 1973년 9월 사비에트 공군이 이 항구를 폭격하자 NLTO는 창설 이후 처음으로 제5조를 발동했다. 1974년 5월에는 사비에트가 해르샤바 조약기구를 창설했고, 7월에는 북산이 청평을 침공해 동부 전역이 열렸다.
해협 북부의 내전, 해협을 둘러싼 루이나와 해협 북부 혁명정부들의 대결, 해협 동부의 오랜 국경 분쟁은 이렇게 하나의 전쟁으로 묶였다. 그러나 이 셋은 원인도 당사자도 달랐고, 전쟁이 끝날 때에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끝났다.
해협 북부의 내전, 해협을 둘러싼 루이나와 해협 북부 혁명정부들의 대결, 해협 동부의 오랜 국경 분쟁은 이렇게 하나의 전쟁으로 묶였다. 그러나 이 셋은 원인도 당사자도 달랐고, 전쟁이 끝날 때에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끝났다.
10. 배경의 구조 [편집]
2차 랜드 전쟁의 배경은 세 겹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제도의 붕괴다. 오로아 조약은 1차 랜드 전쟁 이후의 질서를 지탱할 유일한 다자 장치였으나, 패전국의 협조를 전제로 한 설계 탓에 1960년대 후반 배상·사찰·해협 조항이 차례로 무너졌다. 둘째는 지리다. 포르틸락해협은 해협 북부의 내해를 바깥 바다와 잇는 유일한 통로였고, 1970년 루이나가 이 해협을 장악하면서 해협 북부의 정치는 해협을 둘러싼 정치가 되었다. 셋째는 진영 내부의 균열이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모두 1973년 이전에는 하나로 움직이지 않았고, 각 진영을 묶은 것은 상대편의 움직임이었다.
전쟁의 책임을 두고는 크게 세 가지 시각이 있다. 루이나 책임론은 1970년 콘스탄티노폴 침공이 해협 북부의 반루이나 정서를 폭발시켜 체르드와 라 마베라의 혁명을 앞당겼다고 본다. 체르드 11월 혁명이 콘스탄티노폴 점령 이후의 여론 변화 없이는 설명되기 어렵다는 점이 근거다. 사비에트 책임론은 사비에트가 오로아 조약의 군비 제한을 우회하며 군비를 재건했고, 1972~1973년 해협 북부의 혁명정부를 즉시 승인함으로써 국지적 혁명을 진영 대결로 끌어올렸다고 본다. 구조론은 어느 한쪽의 결정보다 오로아 체제의 결함과 해협의 지리가 전쟁을 거의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본다.
세 시각 모두 동부 전역의 설명에는 약하다. 북산과 청평의 분쟁은 해협 북부의 사정과 무관하게 1929년부터 이어진 것이었고, 2차 랜드 전쟁은 그 분쟁이 폭발할 계기와 명분을 제공했을 뿐이다. 동부 전역이 해협 북부와 다른 방식으로, 다른 시점에 끝난 것도 이 때문이다.
배경에 대한 연구는 자료 사정에 따라 시기별로 달라졌다. 1970~1980년대의 연구는 주로 루이나와 플로렌시아의 공개 자료에 기댔고, 콘스탄티노폴 침공과 해협 통제의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1991년 사비에트 노동인민당 문서가 일부 공개되면서 사비에트가 해협 북부의 혁명을 사전에 계획하지 않았고 오히려 승인을 두고 정치국이 갈라져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사비에트 책임론은 크게 약해졌다. 반면 루이나의 국가안보회의 기록과 콘스탄티노폴 침공 계획 문서는 지금도 일부만 공개되어 있어, 침공 결정의 경위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전쟁의 책임을 두고는 크게 세 가지 시각이 있다. 루이나 책임론은 1970년 콘스탄티노폴 침공이 해협 북부의 반루이나 정서를 폭발시켜 체르드와 라 마베라의 혁명을 앞당겼다고 본다. 체르드 11월 혁명이 콘스탄티노폴 점령 이후의 여론 변화 없이는 설명되기 어렵다는 점이 근거다. 사비에트 책임론은 사비에트가 오로아 조약의 군비 제한을 우회하며 군비를 재건했고, 1972~1973년 해협 북부의 혁명정부를 즉시 승인함으로써 국지적 혁명을 진영 대결로 끌어올렸다고 본다. 구조론은 어느 한쪽의 결정보다 오로아 체제의 결함과 해협의 지리가 전쟁을 거의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본다.
세 시각 모두 동부 전역의 설명에는 약하다. 북산과 청평의 분쟁은 해협 북부의 사정과 무관하게 1929년부터 이어진 것이었고, 2차 랜드 전쟁은 그 분쟁이 폭발할 계기와 명분을 제공했을 뿐이다. 동부 전역이 해협 북부와 다른 방식으로, 다른 시점에 끝난 것도 이 때문이다.
배경에 대한 연구는 자료 사정에 따라 시기별로 달라졌다. 1970~1980년대의 연구는 주로 루이나와 플로렌시아의 공개 자료에 기댔고, 콘스탄티노폴 침공과 해협 통제의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1991년 사비에트 노동인민당 문서가 일부 공개되면서 사비에트가 해협 북부의 혁명을 사전에 계획하지 않았고 오히려 승인을 두고 정치국이 갈라져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사비에트 책임론은 크게 약해졌다. 반면 루이나의 국가안보회의 기록과 콘스탄티노폴 침공 계획 문서는 지금도 일부만 공개되어 있어, 침공 결정의 경위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