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는 제정 사랜드 문서 참고.
1. 개요 [편집]
제정 사랜드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711년 인크론슈타트 공작 인터르스키 1세가 평원을 통일하고 차르를 칭한 때부터 1917년 3월 16일 장미 혁명으로 마지막 차르 라자르 2세가 퇴위할 때까지 1,206년을 다룬다. 이 기간에 네 왕조가 제위를 이었고, 그 사이에 32년의 몽골 점령기와 14년의 혼란기가 끼어 있다.
시대 | 기간 | 차르 수 |
711~1259 | 21명 | |
몽골 점령기 | 1259~1291 | - |
1291~1597 | 13명 | |
혼란기 | 1597~1611 | - |
1611~1762 | 6명 | |
1762~1917 | 6명 |
2. 배경 [편집]
상세 내용은 사비에트/역사 문서 참고.
평원의 역사는 북부 고원의 고랜드 문명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4세기 초 저지대 도시들이 고원에 대한 공납을 거부하며 일으킨 분수 전쟁 끝에 저지대는 '아랫땅', 곧 사랜드라는 이름으로 떨어져 나왔고, 기원전 3세기 통합된 고대 사랜드 제국은 기원전 2세기 동방의 청평까지 정복했다. 그러나 3세기 로마의 침략으로 제국은 급격히 무너졌다.
이후 약 400년 동안 평원은 옛 총독과 지방 귀족, 수리 시설을 장악한 호족들이 저마다 성채를 세운 분열기를 겪었다. 상류의 영주가 물길을 막아 하류를 압박하는 '분수'가 정치의 일상적인 무기가 되었고, 535년·670년·721년의 거듭된 역병은 수리 시설을 유지할 인력마저 앗아 갔다. 6~7세기에는 서북쪽에서 슬라브계 집단이 대거 이주해 들어와 버려진 땅을 차지하고 옛 사랜드인과 섞였는데, 이들이 훗날 제정의 지배 민족인 사랜드인의 뿌리다. 옛 사랜드어는 동남부 산지의 카스탄족에게만 남았다.
3. 인크론슈타트 왕조 (711~1259) [편집]
3.1. 건국 [편집]
7세기 말 평원 서부의 베레스 강 상류에는 슬라브계 귀족이 다스리는 인크론슈타트 공국이 있었다. 691년 정교회 세례를 받은 공작 인터르스키는 서부의 소영주들을 차례로 굴복시킨 뒤, 700년대 들어 평원 중부의 호족 연합인 '스베틀라 강 연맹'과 10년 가까이 싸웠다. 709년 스베틀라 강 중류의 결전에서 연맹군을 무너뜨린 인터르스키는 711년 인크론슈타트에서 인크론슈타트 대주교의 손으로 관을 받고 '전사랜드의 차르'를 칭했다. 고대 제국이 무너진 지 400여 년 만에 평원에 다시 하나의 군주가 선 것이다.
인터르스키 1세의 정통성은 고대 제국의 계승에 걸려 있었다. 그는 고대 제국의 수리 관청이 인장에 새기던 그리핀을 자신의 문장 위에 얹었고, 712년 '수문법'을 반포해 평원의 모든 수문과 수로가 차르에게 속한다고 선언했다. 차르는 이 수문들을 충성하는 귀족들에게 봉토로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이 이후 1,200년 동안 이어진 영주 수리권의 시작이었다. 영주가 땅과 함께 물을 쥐는 제정 사랜드 특유의 지배 구조는 건국과 동시에 태어난 셈이다.
인터르스키 1세의 정통성은 고대 제국의 계승에 걸려 있었다. 그는 고대 제국의 수리 관청이 인장에 새기던 그리핀을 자신의 문장 위에 얹었고, 712년 '수문법'을 반포해 평원의 모든 수문과 수로가 차르에게 속한다고 선언했다. 차르는 이 수문들을 충성하는 귀족들에게 봉토로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이 이후 1,200년 동안 이어진 영주 수리권의 시작이었다. 영주가 땅과 함께 물을 쥐는 제정 사랜드 특유의 지배 구조는 건국과 동시에 태어난 셈이다.
3.2. 동방 원정과 사무탁호 전쟁 [편집]
인터르스키 2세(742~779)는 옛 제국의 동방 영역을 되찾겠다며 동쪽으로 원정을 거듭했다. 동부 저지대의 제방 연합들은 몬순기의 범람을 막는 큰 제방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마을 연합이었는데, 차르의 군대가 제방을 끊겠다고 위협하자 8세기 중엽까지 차례로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동방 원정은 동부 저지대의 사무탁호에서 빌베른 공화국과 부딪혔다. 789년 블라디슬라프 1세(779~801)는 사무탁호 일대의 영유권을 두고 빌베른과 전쟁을 벌였으나, 몬순이 시작된 늪지에서 차르의 중기병이 진창에 빠지면서 크게 패했다. '사무탁 늪 전투'로 불리는 이 패배는 제정이 처음으로 겪은 대외 전쟁의 패배였다.
그러나 동방 원정은 동부 저지대의 사무탁호에서 빌베른 공화국과 부딪혔다. 789년 블라디슬라프 1세(779~801)는 사무탁호 일대의 영유권을 두고 빌베른과 전쟁을 벌였으나, 몬순이 시작된 늪지에서 차르의 중기병이 진창에 빠지면서 크게 패했다. '사무탁 늪 전투'로 불리는 이 패배는 제정이 처음으로 겪은 대외 전쟁의 패배였다.
3.3. 300년 국경 분쟁 [편집]
789년 이후 약 300년 동안 제정과 빌베른은 사무탁호를 두고 국경 분쟁을 되풀이했다. 사무탁호는 매년 몬순이 올 때마다 물길과 지형이 바뀌는 늪지였기 때문에, 강화 때 그은 국경선은 이듬해면 늪 한가운데로 사라지거나 엉뚱한 마을을 가로질렀다. 양쪽은 새로 드러난 땅을 서로 자기 것이라 주장했고, 크고 작은 충돌이 거의 매 세대마다 일어났다.
분쟁은 라자르 1세(1077~1105) 때인 1089년 사무탁 협정으로 끝났다. 협정은 늪지 대부분을 빌베른령으로 인정하고, 오늘날 동사랜드의 수도 부근을 기준으로 국경을 정했다. 협정을 끝까지 반대한 귀족들은 차르를 '늪을 판 자'라고 비난했고, 이후 차르의 칭호에는 '사무탁의 상속자'라는 구절이 들어가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내세웠다.
분쟁은 라자르 1세(1077~1105) 때인 1089년 사무탁 협정으로 끝났다. 협정은 늪지 대부분을 빌베른령으로 인정하고, 오늘날 동사랜드의 수도 부근을 기준으로 국경을 정했다. 협정을 끝까지 반대한 귀족들은 차르를 '늪을 판 자'라고 비난했고, 이후 차르의 칭호에는 '사무탁의 상속자'라는 구절이 들어가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내세웠다.
3.4. 중세의 전성기 [편집]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는 인크론슈타트 왕조의 전성기였다. 미하일로 1세(963~997)는 관습법을 정리한 《미하일로 법전》을 반포해 영주와 농민, 수문 공동체 사이의 물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를 정했다. 평원의 관개 농지가 다시 넓어지면서 인구가 늘었고, 빌베른과의 국경 분쟁이 끝난 뒤로는 빌베른 상인들과의 교역도 활발해졌다. 두샨 1세(1160~1189)는 1172년 인크론슈타트에 성모안식 대성당을 완공했는데, 이후 이 대성당은 1917년까지 모든 차르의 대관식이 열리는 곳이 되었다.
이 시기 차르의 권력은 대귀족 '벨리카시'와 고위 성직자가 모이는 신분 회의 사보르의 견제를 받았다. 사보르는 전쟁과 세금, 제위 계승을 논의했고, 차르가 사보르를 무시하고 전쟁을 벌였다가 귀족들의 협력을 얻지 못해 실패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이 시기 차르의 권력은 대귀족 '벨리카시'와 고위 성직자가 모이는 신분 회의 사보르의 견제를 받았다. 사보르는 전쟁과 세금, 제위 계승을 논의했고, 차르가 사보르를 무시하고 전쟁을 벌였다가 귀족들의 협력을 얻지 못해 실패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3.5. 몽골의 침입 [편집]
13세기 중엽 몽골이 동쪽에서 밀려왔다. 1243년 첫 침입은 동부 저지대를 휩쓸었고, 1251년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원정은 동쪽 절반을 초토화했다. 몽골군은 수문을 열어 마을을 물에 잠기게 하고 제방을 끊어 농지를 늪으로 만들었다. 수백 년 동안 쌓아 올린 동부의 수리 체계는 불과 몇 년 만에 무너졌다.
1259년 몽골군은 수도 인크론슈타트를 포위했다. 마지막 차르 블라디슬라프 4세(1251~1259)는 성벽 위에서 전사했고, 성모안식 대성당으로 피신한 궁정 사람들은 대성당과 함께 불탔다. 548년 동안 이어진 인크론슈타트 왕조는 이렇게 끝났다.
1259년 몽골군은 수도 인크론슈타트를 포위했다. 마지막 차르 블라디슬라프 4세(1251~1259)는 성벽 위에서 전사했고, 성모안식 대성당으로 피신한 궁정 사람들은 대성당과 함께 불탔다. 548년 동안 이어진 인크론슈타트 왕조는 이렇게 끝났다.
4. 몽골 점령기 (1259~1291) [편집]
인크론슈타트가 함락된 뒤 서부 평원은 32년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몽골은 인크론슈타트에 감독관을 두고 귀족들에게서 공납을 거두었으며, 공납을 바치는 귀족에게는 영지를 그대로 다스리게 했다. 많은 귀족이 몽골에 협력했지만, 일부는 서부 변경의 삼림 지대로 물러나 저항을 이어 갔다.
같은 시기 원은 비어 버린 동부 저지대에 고려인·화북 한인·열도인·대월인 포로와 징발민을 강제로 옮겨 둔전을 열었다. 이주민들은 무너진 제방을 다시 쌓고 논을 되살렸으며, 이들이 훗날 북산과 동사랜드의 모체가 되었다. 동부의 인구 구성은 이때 완전히 바뀌었고, 이후 제정은 동부를 다시는 온전히 되찾지 못했다.
1280년대 원의 관심이 동부와 해협 동쪽으로 쏠리면서 서부의 몽골 지배는 느슨해졌다. 1291년 서부 변경 삼림 지대의 영주 스테판 즐라토미르는 저항 귀족들을 모아 베레스 강 여울에서 몽골 수비군을 격파하고 인크론슈타트를 되찾았다. 제정의 공식 역사는 이 32년을 '공위기'로 부르며, 이 기간을 몽골에 대한 저항의 역사로 서술했다.
같은 시기 원은 비어 버린 동부 저지대에 고려인·화북 한인·열도인·대월인 포로와 징발민을 강제로 옮겨 둔전을 열었다. 이주민들은 무너진 제방을 다시 쌓고 논을 되살렸으며, 이들이 훗날 북산과 동사랜드의 모체가 되었다. 동부의 인구 구성은 이때 완전히 바뀌었고, 이후 제정은 동부를 다시는 온전히 되찾지 못했다.
1280년대 원의 관심이 동부와 해협 동쪽으로 쏠리면서 서부의 몽골 지배는 느슨해졌다. 1291년 서부 변경 삼림 지대의 영주 스테판 즐라토미르는 저항 귀족들을 모아 베레스 강 여울에서 몽골 수비군을 격파하고 인크론슈타트를 되찾았다. 제정의 공식 역사는 이 32년을 '공위기'로 부르며, 이 기간을 몽골에 대한 저항의 역사로 서술했다.
5. 즐라토미로비치 왕조 (1291~1597) [편집]
5.1. 수복 [편집]
인크론슈타트를 되찾은 스테판 즐라토미르는 1291년 불탄 성모안식 대성당의 폐허에서 스테판 1세(1291~1316)로 즉위했다. 그는 몽골 침입 때 살아남은 인크론슈타트 왕가의 공주와 결혼해 정통성을 이었고, 대성당을 다시 지었다. 몽골에 협력한 귀족들의 영지 일부를 몰수해 저항 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때 생겨난 새 귀족 가문들이 이후 300년 동안 즐라토미로비치 왕조의 기둥이 되었다.
5.2. 화산과 역병 [편집]
스테판 2세(1316~1337)는 동부 저지대를 되찾기 위해 1320년 원정에 나섰으나, 이듬해 1321년 몬타나 화산이 대분화하면서 원정은 재앙으로 끝났다. 화산재가 평원을 덮어 두 해 동안 흉년이 이어졌고, 동부로 나간 군대는 굶주림 속에 돌아와야 했다. 1349년에는 흑사병이 평원을 덮쳐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가 죽었다. 화산과 역병이 겹치면서 동부에 대한 제정의 지배는 완전히 끊겼다.
흑사병 직전인 1346년, 우로시 1세(1337~1355)는 인크론슈타트 대주교좌를 총대주교좌로 높였다. 사랜드 정교회가 독자적인 총대주교를 갖게 된 이 일은 즐라토미로비치 왕조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힌다.
흑사병 직전인 1346년, 우로시 1세(1337~1355)는 인크론슈타트 대주교좌를 총대주교좌로 높였다. 사랜드 정교회가 독자적인 총대주교를 갖게 된 이 일은 즐라토미로비치 왕조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힌다.
5.3. 농노제의 싹 [편집]
흑사병으로 일손이 귀해지자 농민들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영지를 옮겨 다니기 시작했다. 영주들은 사보르를 통해 농민의 이동을 막아 달라고 요구했고, 1366년 드라구틴 1세(1355~1378)는 '수문 닫는 날 규정'을 내렸다. 농민은 가을에 수문을 닫는 날부터 2주 동안만 영지를 옮길 수 있고, 그것도 영주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아야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 규정은 이후 300년에 걸쳐 차츰 강화되어 1652년 대법전의 농노제로 이어졌다.
5.4. 동부의 상실 [편집]
5.5. 사보르의 시대 [편집]
15~16세기는 사보르의 시대였다. 화산과 역병, 동부의 상실로 차르의 권위가 약해진 반면, 귀족들은 사보르를 정기적으로 소집해 세금과 전쟁을 결정했다. 마르코 1세(1480~1503)는 화약 무기를 들여와 차르 직속의 총병대를 만들었고, 스테판 4세(1503~1531)는 고원 가장자리에서 고랜드와 여러 차례 싸웠지만, 어느 차르도 사보르의 동의 없이 큰일을 벌이지는 못했다.
1591년 우로시 3세(1578~1597)의 외아들 드미트리가 아홉 살의 나이로 인크론슈타트 궁에서 갑자기 죽었다. 공식 사인은 열병이었지만 대귀족 가운데 누군가가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병약했던 우로시 3세는 1597년 다른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고, 306년 동안 이어진 즐라토미로비치 왕조가 끊겼다.
1591년 우로시 3세(1578~1597)의 외아들 드미트리가 아홉 살의 나이로 인크론슈타트 궁에서 갑자기 죽었다. 공식 사인은 열병이었지만 대귀족 가운데 누군가가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병약했던 우로시 3세는 1597년 다른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고, 306년 동안 이어진 즐라토미로비치 왕조가 끊겼다.
6. 혼란기 (1597~1611) [편집]
우로시 3세가 죽자 대귀족 회의는 브라니코비치 가문의 밀로시 브라니코비치를 섭정으로 세웠다. 그러나 다른 대귀족 가문들이 섭정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평원은 귀족들의 사병이 서로 싸우는 내란에 빠졌다. 1601년부터 1603년까지 세 해 연속 흉년이 들어 평원 인구의 상당수가 굶어 죽었고, 굶주린 농민들이 무리를 지어 영지를 습격했다.
1604년에는 1591년에 죽은 드미트리가 사실은 살아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서부 국경에 나타났다. '가짜 드미트리'로 불리는 이 인물은 라 마베라의 지원을 받아 인크론슈타트로 진군했고, 1606년 실제로 인크론슈타트에 들어가 1년 동안 차르를 자칭했다. 그가 귀족들에게 살해된 뒤에도 두 명의 참칭자가 더 나타났고, 고원 사람들은 혼란을 틈타 평원 북부를 약탈했다.
1611년 내란에 지친 귀족과 성직자들은 인크론슈타트에서 사보르를 열어,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17세의 서부 귀족 보그단 스베토자레비치를 차르로 추대했다. 14년의 혼란기는 이렇게 끝났다.
1604년에는 1591년에 죽은 드미트리가 사실은 살아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서부 국경에 나타났다. '가짜 드미트리'로 불리는 이 인물은 라 마베라의 지원을 받아 인크론슈타트로 진군했고, 1606년 실제로 인크론슈타트에 들어가 1년 동안 차르를 자칭했다. 그가 귀족들에게 살해된 뒤에도 두 명의 참칭자가 더 나타났고, 고원 사람들은 혼란을 틈타 평원 북부를 약탈했다.
1611년 내란에 지친 귀족과 성직자들은 인크론슈타트에서 사보르를 열어,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17세의 서부 귀족 보그단 스베토자레비치를 차르로 추대했다. 14년의 혼란기는 이렇게 끝났다.
7. 스베토자레비치 왕조 (1611~1762) [편집]
7.1. 보그단 1세와 남꽝 원정 [편집]
보그단 1세(1611~1639)는 혼란기에 무너진 질서를 되살리는 데 치세 전반을 바쳤다. 귀족들의 사병을 해산시키는 대신 그들의 영지와 수리권을 확인해 주었고, 참칭자를 지원한 라 마베라와는 1617년 강화를 맺었다.
내정이 안정되자 보그단 1세는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1622년 그는 남꽝 왕국을 침공해 롱 강을 넘었으나, 1624년 남꽝의 종주국 청평이 원군을 보내면서 전세가 뒤집혔다. 3년의 소모전 끝에 1627년 양측은 롱 강을 경계로 강화했다. 이 선은 이후 300년 넘게 유지되어 오늘날 사비에트와 동사랜드의 국경이 되었다.
내정이 안정되자 보그단 1세는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1622년 그는 남꽝 왕국을 침공해 롱 강을 넘었으나, 1624년 남꽝의 종주국 청평이 원군을 보내면서 전세가 뒤집혔다. 3년의 소모전 끝에 1627년 양측은 롱 강을 경계로 강화했다. 이 선은 이후 300년 넘게 유지되어 오늘날 사비에트와 동사랜드의 국경이 되었다.
7.2. 대법전과 농노제 [편집]
밀로시 1세(1639~1671)의 치세에 제정은 전제정과 농노제라는 두 기둥을 세웠다. 1652년 밀로시 1세는 사보르를 소집해 《대법전》을 승인받았다. 대법전은 '수문 닫는 날'의 이동 기간을 완전히 없애 농민을 영원히 영주와 토지에 묶었고, 도망한 농노를 기한 없이 추적해 되돌려 보내도록 했다. 영주는 영지 안 농노에 대한 재판·경찰·징세권을 법으로 보장받았다.
그 대가로 귀족들은 사보르의 권한을 내려놓았다. 대법전을 승인한 1652년의 사보르는 이후 255년 동안 다시 소집되지 않았고, 차르는 영지 밖의 모든 일을 혼자 결정하게 되었다. 귀족은 영지 안을, 차르는 영지 밖을 가지는 이 거래가 제정 후기 정치의 뼈대가 되었다. 대법전은 교회 재산과 성직자 임명도 차르의 감독 아래 두어, 총대주교가 이끄는 성무원은 사실상 국가 기관이 되었다.
그 대가로 귀족들은 사보르의 권한을 내려놓았다. 대법전을 승인한 1652년의 사보르는 이후 255년 동안 다시 소집되지 않았고, 차르는 영지 밖의 모든 일을 혼자 결정하게 되었다. 귀족은 영지 안을, 차르는 영지 밖을 가지는 이 거래가 제정 후기 정치의 뼈대가 되었다. 대법전은 교회 재산과 성직자 임명도 차르의 감독 아래 두어, 총대주교가 이끄는 성무원은 사실상 국가 기관이 되었다.
7.3. 인터그라드 천도 [편집]
1661년 밀로시 1세는 950년 동안 수도였던 인크론슈타트를 떠나 서부 해안에 새로 지은 도시로 수도를 옮겼다. 새 수도는 건국자의 이름을 따 인터그라드라 불렸다. 천도의 명분은 바다로 열린 수도를 갖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혼란기 내내 인크론슈타트를 근거지로 삼았던 옛 대귀족 가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뜻이 컸다. 다만 차르의 대관식만은 계속 인크론슈타트의 성모안식 대성당에서 열었다.
대법전과 천도는 농민들의 반발을 불렀다. 1668년 평원 남부에서 도망 농노 출신 라도사브 페리치가 이끈 반란이 일어나 3년 동안 평원 남부를 휩쓸었다. 반란군은 영주의 저택을 불태우고 수문을 부수어 물을 마을로 돌렸으나, 1671년 진압되었고 페리치는 인터그라드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대법전과 천도는 농민들의 반발을 불렀다. 1668년 평원 남부에서 도망 농노 출신 라도사브 페리치가 이끈 반란이 일어나 3년 동안 평원 남부를 휩쓸었다. 반란군은 영주의 저택을 불태우고 수문을 부수어 물을 마을로 돌렸으나, 1671년 진압되었고 페리치는 인터그라드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7.4. 18세기 전반 [편집]
보그단 2세(1671~1689)는 고원 가장자리를 따라 요새를 줄지어 쌓은 '고원선'을 완성해 고원 사람들의 약탈을 막았다. 그 뒤를 이은 니콜라 1세(1689~1725)는 제정의 군대와 관료제를 정비한 개혁 군주였다. 그는 1712년 영지마다 병사를 할당해 징집하는 상비군 제도를 만들고, 1721년 차르를 호위하는 그리핀 근위대를 창설했으며, 1724년 관등령으로 모든 관직을 12개 관등으로 정리했다. 남부 해안의 자톤에는 처음으로 해군 조선소를 세웠다.
밀로시 2세(1725~1741)의 치세인 1731년, 자주·금·백의 삼색기가 상선기로 지정되었다. 밀로시 2세는 1735년부터 1739년까지 고원을 병합하려는 전쟁을 벌였지만 고원선 밖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니콜라 2세(1741~1762)는 1756년 인터그라드 제국대학을 세웠으나, 정사보다 사냥과 연회에 빠져 궁정의 신망을 잃었다.
밀로시 2세(1725~1741)의 치세인 1731년, 자주·금·백의 삼색기가 상선기로 지정되었다. 밀로시 2세는 1735년부터 1739년까지 고원을 병합하려는 전쟁을 벌였지만 고원선 밖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니콜라 2세(1741~1762)는 1756년 인터그라드 제국대학을 세웠으나, 정사보다 사냥과 연회에 빠져 궁정의 신망을 잃었다.
7.5. 1762년 궁정 정변 [편집]
1762년 6월 그리핀 근위대 장교들이 차르 니콜라 2세를 체포하고, 그의 아내인 벨로슬라비치 공작가 출신의 옐레나를 여제로 추대했다. 정변은 하룻밤 사이에 끝났고, 니콜라 2세는 인크론슈타트 근교의 수도원에 유폐되었다가 이듬해 그곳에서 죽었다. 사인은 공식적으로 병사였다. 151년 동안 이어진 스베토자레비치 왕조는 이렇게 끝나고, 제정의 마지막 왕조인 벨로슬라비치 왕조가 시작되었다.
8. 벨로슬라비치 왕조 (1762~1917) [편집]
8.1. 옐레나 1세와 고원 병합 [편집]
여제 옐레나 1세(1762~1796)는 34년 동안 다스리며 제정을 최대 판도로 이끌었다. 즉위 이듬해인 1763년 그녀는 최고 행정·사법 기구인 통치평의회를 설치하고, 1762년 칙령으로 자주 바탕에 금색 그리핀을 넣은 정부기를 정했다. 1765년에는 '귀족 헌장'을 반포해 귀족의 국가 복무 의무를 없애고 영지와 농노에 대한 권리를 다시 확인했다. 정변으로 즉위한 여제에게 귀족의 지지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귀족 헌장은 농노들의 분노를 샀다. 1773년 평원 남부에서 도망 농노 출신 마르코 크루니치가 자신이 죽은 니콜라 2세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은 2년 동안 평원 남부와 중부를 휩쓸었다. 크루니치의 반란군은 정복한 영지마다 수문을 열어 물을 농민에게 돌려주었는데, '물을 돌려준 차르'라는 소문은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오랫동안 평원에 떠돌았다. 반란은 1775년 진압되었고, 크루니치는 인터그라드에서 처형되었다.
옐레나 1세의 가장 큰 업적은 고원 병합이었다. 1781년 그녀는 고원의 철광과 구리를 노리고 고원 전쟁을 일으켰다. 3년 동안 고원선 밖의 산악 요새들을 하나씩 함락한 제정군은 1784년 고원의 중심인 아바나 요새를 포위 끝에 함락했고, 같은 해 맺은 병합 조약으로 고원 전체가 제정의 직할 영토가 되었다. 조약은 고원인의 이슬람 신앙과 법정, 부족 원로 회의를 인정했다. 이 승리를 기념해 궁정 시인 바실리예 데스포토비치가 쓴 〈일어나라, 그리핀이여!〉는 이후 반세기 동안 사실상의 국가로 불렸다.
옐레나 1세의 궁정은 프랑스어를 쓰고 서방의 계몽사상을 읽었지만, 여제는 계몽사상의 이상을 농노제에까지 적용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치세는 귀족 문화의 황금기이자 농노제의 정점이었다.
귀족 헌장은 농노들의 분노를 샀다. 1773년 평원 남부에서 도망 농노 출신 마르코 크루니치가 자신이 죽은 니콜라 2세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은 2년 동안 평원 남부와 중부를 휩쓸었다. 크루니치의 반란군은 정복한 영지마다 수문을 열어 물을 농민에게 돌려주었는데, '물을 돌려준 차르'라는 소문은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오랫동안 평원에 떠돌았다. 반란은 1775년 진압되었고, 크루니치는 인터그라드에서 처형되었다.
옐레나 1세의 가장 큰 업적은 고원 병합이었다. 1781년 그녀는 고원의 철광과 구리를 노리고 고원 전쟁을 일으켰다. 3년 동안 고원선 밖의 산악 요새들을 하나씩 함락한 제정군은 1784년 고원의 중심인 아바나 요새를 포위 끝에 함락했고, 같은 해 맺은 병합 조약으로 고원 전체가 제정의 직할 영토가 되었다. 조약은 고원인의 이슬람 신앙과 법정, 부족 원로 회의를 인정했다. 이 승리를 기념해 궁정 시인 바실리예 데스포토비치가 쓴 〈일어나라, 그리핀이여!〉는 이후 반세기 동안 사실상의 국가로 불렸다.
옐레나 1세의 궁정은 프랑스어를 쓰고 서방의 계몽사상을 읽었지만, 여제는 계몽사상의 이상을 농노제에까지 적용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치세는 귀족 문화의 황금기이자 농노제의 정점이었다.
8.2. 알렉산다르 1세 [편집]
알렉산다르 1세(1796~1825)의 즉위는 개혁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1801년 병사의 복무 기간을 종신에서 25년으로 줄이고, 1806년 교육부를 세웠으며, 1818년 사바 크르스티치의 《사랜드어 문법》 간행을 후원해 사랜드어 문어를 표준화했다. 1810년대에는 측근들과 함께 국가 농노부터 단계적으로 해방하는 구상을 논의했지만, 통치평의회의 반대에 부딪히자 1820년대 들어 개혁에서 손을 놓고 신앙에 몰두했다.
알렉산다르 1세가 후사 없이 죽은 1825년 12월, 그리핀 근위대의 젊은 장교들은 새 차르 미하일로 2세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고 인터그라드 궁전 광장에서 헌법 제정과 농노 해방을 요구했다. '12월 장교 봉기'로 불리는 이 사건은 하루 만에 포격으로 진압되었고, 주모자 다섯 명이 처형되었다. 이들은 제정 최초의 공화주의 운동으로 기억되며, 19세기 내내 자유주의자들의 상징이 되었다.
알렉산다르 1세가 후사 없이 죽은 1825년 12월, 그리핀 근위대의 젊은 장교들은 새 차르 미하일로 2세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고 인터그라드 궁전 광장에서 헌법 제정과 농노 해방을 요구했다. '12월 장교 봉기'로 불리는 이 사건은 하루 만에 포격으로 진압되었고, 주모자 다섯 명이 처형되었다. 이들은 제정 최초의 공화주의 운동으로 기억되며, 19세기 내내 자유주의자들의 상징이 되었다.
8.3. 미하일로 2세 [편집]
12월 장교 봉기로 즉위한 미하일로 2세(1825~1855)는 30년 동안 철저한 반동 정치를 폈다. 그는 1826년 내무부에 검열국과 정치 경찰을 두었고, 대학 강의를 감시했으며, 농노제를 '평원의 자연스러운 질서'라 공언했다. 동시에 그는 고대 제국의 계승을 내세운 민족주의 낭만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끌어올렸다. 역사가 일라리온 루바르다의 《사랜드 민족사》를 국가가 후원했고, 1841년 요반 라도비치 작사·드라구틴 마르코비치 작곡의 〈차르를 위한 기도〉를 공식 국가로 정했다.
1848년 유럽 혁명의 소식이 전해지자 인터그라드 제국대학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으나 사흘 만에 진압되었다. 미하일로 2세의 치세 말기인 1854년, 벨라 강의 국경 분쟁이 라 마베라와의 전쟁으로 번졌다.
1848년 유럽 혁명의 소식이 전해지자 인터그라드 제국대학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으나 사흘 만에 진압되었다. 미하일로 2세의 치세 말기인 1854년, 벨라 강의 국경 분쟁이 라 마베라와의 전쟁으로 번졌다.
8.4. 서부 전쟁과 페타르 3세의 개혁 [편집]
1854년부터 1856년까지의 서부 전쟁은 제정 군대의 낙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농노 징집병들은 구식 머스킷으로 라 마베라군의 강선 소총과 맞섰고, 철도가 없어 증원군은 몇 달씩 걸어서 전선에 도착했다. 미하일로 2세가 전쟁 중인 1855년 죽고, 즉위한 페타르 3세(1855~1881)는 1856년 벨라 강 조약으로 강화하며 벨라 강 서안의 일부를 라 마베라에 넘겨주었다.
패배는 페타르 3세를 개혁으로 몰아갔다. 1858년 그는 국장과 국기를 정비하는 문장 개혁을 단행해 대형·중형·소형 국장과 차르기를 정했고, 1859년 국영 병기창 칙령을 내려 크라슬리스크에 국영 병기창을 세웠다. 병기창과 광산, 철도에는 국가 농노를 배속해 일하게 했다. 1861년에는 크라슬리스크 공과학교를 세웠고, 1862년에는 해군을 보내 청평 남부의 항구 푹하이를 99년 기한으로 조차했다. 1868년 인터그라드와 인크론슈타트를 잇는 첫 철도가 개통되었고, 1872년에는 루이나 은행단에게서 첫 차관을 들여와 철도 건설을 넓혔다.
그러나 페타르 3세의 개혁은 농노제 앞에서 멈추었다. 1866년 그는 국가 농노와 영주 농노를 단계적으로 해방하는 칙령안을 마련해 통치평의회에 올렸지만, 대귀족 평의원들은 이듬해 1867년 이를 압도적으로 부결했다. 땅만이 아니라 물까지 쥔 영주들에게 해방은 영지의 붕괴를 뜻했다. 차르는 칙령을 강행하지 않고 철회했고, 이후 개혁은 군대와 산업에만 머물렀다. 1872년 소설가 밀로반 디미치가 수문을 쥔 영주에게 물을 빼앗긴 농노 가족의 몰락을 그린 《물길》을 펴내자 정부는 석 달 만에 이를 금서로 만들고 디미치를 고원으로 유배했다.
해방이 좌절되자 지식인 청년들은 지하로 들어갔다. 1870년대 인민주의 지하 조직 '평원의 의지'가 결성되어 농촌 계몽과 테러를 병행했고, 1881년 3월 페타르 3세는 인터그라드 운하 다리 위에서 이 조직이 던진 폭탄에 맞아 숨졌다.
패배는 페타르 3세를 개혁으로 몰아갔다. 1858년 그는 국장과 국기를 정비하는 문장 개혁을 단행해 대형·중형·소형 국장과 차르기를 정했고, 1859년 국영 병기창 칙령을 내려 크라슬리스크에 국영 병기창을 세웠다. 병기창과 광산, 철도에는 국가 농노를 배속해 일하게 했다. 1861년에는 크라슬리스크 공과학교를 세웠고, 1862년에는 해군을 보내 청평 남부의 항구 푹하이를 99년 기한으로 조차했다. 1868년 인터그라드와 인크론슈타트를 잇는 첫 철도가 개통되었고, 1872년에는 루이나 은행단에게서 첫 차관을 들여와 철도 건설을 넓혔다.
그러나 페타르 3세의 개혁은 농노제 앞에서 멈추었다. 1866년 그는 국가 농노와 영주 농노를 단계적으로 해방하는 칙령안을 마련해 통치평의회에 올렸지만, 대귀족 평의원들은 이듬해 1867년 이를 압도적으로 부결했다. 땅만이 아니라 물까지 쥔 영주들에게 해방은 영지의 붕괴를 뜻했다. 차르는 칙령을 강행하지 않고 철회했고, 이후 개혁은 군대와 산업에만 머물렀다. 1872년 소설가 밀로반 디미치가 수문을 쥔 영주에게 물을 빼앗긴 농노 가족의 몰락을 그린 《물길》을 펴내자 정부는 석 달 만에 이를 금서로 만들고 디미치를 고원으로 유배했다.
해방이 좌절되자 지식인 청년들은 지하로 들어갔다. 1870년대 인민주의 지하 조직 '평원의 의지'가 결성되어 농촌 계몽과 테러를 병행했고, 1881년 3월 페타르 3세는 인터그라드 운하 다리 위에서 이 조직이 던진 폭탄에 맞아 숨졌다.
8.5. 니콜라 3세 [편집]
아버지가 암살되는 것을 지켜본 니콜라 3세(1881~1894)는 개혁의 흔적을 지우는 데 치세를 바쳤다. 정치 경찰이 강화되고 대학 자치가 폐지되었으며, '평원의 의지'는 대대적인 검거로 무너졌다. 대외적으로는 같은 1881년 빌베른 공화정이 무너진 뒤 외국 조차지가 난립하던 콘스탄티노폴에 조계를 얻었다.
니콜라 3세는 반동 정치를 폈지만 국가 주도 산업화만은 멈추지 않았다. 1889년 두 번째 루이나 차관으로 크라슬리스크와 남부 항구 자톤을 잇는 곡물 철도가 놓였고, 크라슬리스크는 병기창과 제철소, 기관차 공장이 들어선 제정 최대의 공업 도시로 자랐다. 1891년 평원에 큰 흉년이 들어 수십만 명이 굶주렸을 때 정부의 늑장 대응은 지식인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니콜라 3세는 반동 정치를 폈지만 국가 주도 산업화만은 멈추지 않았다. 1889년 두 번째 루이나 차관으로 크라슬리스크와 남부 항구 자톤을 잇는 곡물 철도가 놓였고, 크라슬리스크는 병기창과 제철소, 기관차 공장이 들어선 제정 최대의 공업 도시로 자랐다. 1891년 평원에 큰 흉년이 들어 수십만 명이 굶주렸을 때 정부의 늑장 대응은 지식인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8.6. 라자르 2세와 형식적 입헌 [편집]
1894년 즉위한 라자르 2세(1894~1917)는 제정의 마지막 차르였다. 그의 대관식이 열린 날 인크론슈타트의 고대 수문이 녹슬어 열리지 않았다는 일화는 훗날 제정의 운명을 예고한 장면으로 자주 인용되었다. 1897년 재무대신 알렉사 반코비치의 주도로 금본위제가 도입되었고, 1901년 처음으로 전국 인구조사가 명해졌다.
20세기 초 공장 지대에서는 노동 운동이 자라났다. 1902년 가을 인터그라드 철도 공작창 파업은 노동자 공제회가 주도한 첫 대규모 파업이었고, 훗날 사비에트의 초대 서기장이 되는 이오시프 노스탈린도 이 파업을 이끈 혐의로 수배되어 러시아로 달아났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소식이 전해지자 인터그라드에 총파업이 일어나고 평원 곳곳에서 농민들이 영지 수문을 부수는 봉기가 번졌다.
라자르 2세는 1906년 말까지 봉기를 군대로 진압한 뒤, 1907년 《국가기본법》을 공포했다. 국가기본법은 사보르를 양원제 의회로 되살리고, 결사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인정하며, 총리가 이끄는 대신회의를 상설 기구로 만들었다. 그러나 법률은 차르의 재가 없이는 효력이 없었고, 차르는 사보르를 언제든 해산할 수 있었으며,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영주 농노에게는 선거권조차 없었다. 사보르는 1907년, 1910년, 1913년 세 번 소집되었다가 세 번 모두 해산되었다. 1913년 하원이 농노 해방 법안을 상정하자 라자르 2세는 개원 4개월 만에 하원을 해산하고 다음 선거를 무기한 미루었다.
20세기 초 공장 지대에서는 노동 운동이 자라났다. 1902년 가을 인터그라드 철도 공작창 파업은 노동자 공제회가 주도한 첫 대규모 파업이었고, 훗날 사비에트의 초대 서기장이 되는 이오시프 노스탈린도 이 파업을 이끈 혐의로 수배되어 러시아로 달아났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소식이 전해지자 인터그라드에 총파업이 일어나고 평원 곳곳에서 농민들이 영지 수문을 부수는 봉기가 번졌다.
라자르 2세는 1906년 말까지 봉기를 군대로 진압한 뒤, 1907년 《국가기본법》을 공포했다. 국가기본법은 사보르를 양원제 의회로 되살리고, 결사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인정하며, 총리가 이끄는 대신회의를 상설 기구로 만들었다. 그러나 법률은 차르의 재가 없이는 효력이 없었고, 차르는 사보르를 언제든 해산할 수 있었으며,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영주 농노에게는 선거권조차 없었다. 사보르는 1907년, 1910년, 1913년 세 번 소집되었다가 세 번 모두 해산되었다. 1913년 하원이 농노 해방 법안을 상정하자 라자르 2세는 개원 4개월 만에 하원을 해산하고 다음 선거를 무기한 미루었다.
8.7. 제1차 세계 대전 [편집]
상세 내용은 사랜드 제국군 문서 참고.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제정 사랜드는 동맹국 러시아 제국과 함께 협상국 편으로 참전했다. 차르와 궁정은 전쟁을 제정의 위신을 되살릴 기회로 여겼다. 1914년 10월 서쪽 이웃 라 마베라가 동맹국 편에 서자, 제정은 11월 라 마베라에 선전포고하고 서부 전쟁에서 잃은 벨라 강 서안을 되찾겠다며 공세에 나섰다.
초기 공세는 벨라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으나, 1914년 12월 벨라 강 전투 이후 전선은 참호전으로 굳었다. 1915년 여름 라 마베라의 반격으로 전선은 옛 수도 인크론슈타트에서 80km 떨어진 곳까지 밀려왔고, 1915년 9월 라자르 2세는 총사령관을 해임하고 스스로 총사령관에 올라 전선 사령부로 떠났다. 이후 패전의 책임은 곧바로 차르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농노 출신 징집병과 낡은 보급 체계로 치른 소모전은 재앙이었다. 1916년까지 전사·실종자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고, 철도가 군수 수송에 매달리면서 도시의 식량 사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1916년 흉작으로 인터그라드를 비롯한 대도시의 빵 배급이 끊기다시피 했고, 공장 노동자와 병사 가족 사이에서 전쟁 반대와 차르 퇴위 요구가 공공연해졌다.
8.8. 장미 혁명 [편집]
상세 내용은 장미 혁명 문서 참고.
1917년 3월 12일 인터그라드의 방직공장 여공들이 빵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시위대는 가슴에 붉은 장미를 달았는데, 이는 본래 인터그라드 노동자 공제회가 장례와 파업 때 쓰던 표식이었다. 시위는 사흘 만에 도시 전체로 번졌고, 3월 15일 진압 명령을 받은 수비대 일부가 발포를 거부하고 시위대에 합류했다. 전선 사령부에 있던 라자르 2세는 수도로 돌아오지 못한 채 3월 16일 퇴위 조서에 서명했고, 711년 이래 1,206년 동안 이어진 제정 사랜드는 막을 내렸다. 같은 달 러시아에서도 2월 혁명으로 차르가 물러났다.
혁명 뒤 공화파 정치인과 자유주의 지식인, 도시 노동자 조직이 임시정부를 세웠고, 임시정부는 1918년 농노제를 폐지했다. 1920년 사랜드 공화국이 정식으로 출범하면서 제정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9. 역사 인식 [편집]
제정 사랜드의 역사는 그것을 서술하는 쪽에 따라 전혀 다르게 그려져 왔다.
제정 스스로의 공식 역사는 루바르다의 《사랜드 민족사》로 대표되는 계승론이었다. 고대 사랜드 제국에서 제정까지를 끊김 없는 하나의 역사로 보고, 몽골 점령기와 혼란기는 외적과 반역자에 맞선 시련으로, 농노제는 평원의 자연스러운 질서로 서술했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정반대였다. 1949년 이후 '제정'은 농노제와 전제정의 동의어가 되었고, 1,206년의 역사는 영주가 물과 땅을 쥐고 농노를 착취한 역사로 요약되었다. 이오시프 노스탈린의 '미완의 혁명'론은 1917년 장미 혁명을 제정의 붕괴로, 1949년 붉은 혁명을 영주 지배의 완전한 종식으로 규정했다. 라도사브 페리치와 마르코 크루니치의 반란은 '농민 혁명의 선구'로, 12월 장교 봉기와 '평원의 의지'는 '혁명 전통의 계보'로 기려졌다.
1990년대 재편기 이후 사비에트 학계에서는 이 두 서술을 모두 넘어서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영주 수리권이라는 제도에 주목해, 제정의 농노제가 러시아보다 반세기 넘게 오래 살아남은 이유를 차르나 귀족 개인의 반동이 아니라 반건조 평원에서 물을 독점한 지배 구조에서 찾는 연구가 주목받고 있다. 한편 해협 북부와 루이나의 사비에트 망명자 사회는 제정 말기를 형식적이나마 입헌으로 나아가던 시기로 보고, 제1차 세계 대전이 없었다면 제정이 점진적으로 개혁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펴 왔다.
제정 스스로의 공식 역사는 루바르다의 《사랜드 민족사》로 대표되는 계승론이었다. 고대 사랜드 제국에서 제정까지를 끊김 없는 하나의 역사로 보고, 몽골 점령기와 혼란기는 외적과 반역자에 맞선 시련으로, 농노제는 평원의 자연스러운 질서로 서술했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정반대였다. 1949년 이후 '제정'은 농노제와 전제정의 동의어가 되었고, 1,206년의 역사는 영주가 물과 땅을 쥐고 농노를 착취한 역사로 요약되었다. 이오시프 노스탈린의 '미완의 혁명'론은 1917년 장미 혁명을 제정의 붕괴로, 1949년 붉은 혁명을 영주 지배의 완전한 종식으로 규정했다. 라도사브 페리치와 마르코 크루니치의 반란은 '농민 혁명의 선구'로, 12월 장교 봉기와 '평원의 의지'는 '혁명 전통의 계보'로 기려졌다.
1990년대 재편기 이후 사비에트 학계에서는 이 두 서술을 모두 넘어서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영주 수리권이라는 제도에 주목해, 제정의 농노제가 러시아보다 반세기 넘게 오래 살아남은 이유를 차르나 귀족 개인의 반동이 아니라 반건조 평원에서 물을 독점한 지배 구조에서 찾는 연구가 주목받고 있다. 한편 해협 북부와 루이나의 사비에트 망명자 사회는 제정 말기를 형식적이나마 입헌으로 나아가던 시기로 보고, 제1차 세계 대전이 없었다면 제정이 점진적으로 개혁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