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상위 문서는 제정 사랜드 문서 참고.


1. 개요2. 농업
2.1. 관개와 수리권2.2. 작물과 지역2.3. 영지와 자드루가2.4. 국가 농노와 차르 직영지2.5. 흉년
3. 농노제의 경제
3.1. 부역과 공납3.2. 출가 농노3.3. 해방 논쟁
4. 국가 주도 산업화
4.1. 서부 전쟁의 충격4.2. 국영 병기창 칙령 (1859)4.3. 배속 농노4.4. 철도4.5. 방직 공업
5. 재정과 금융
5.1. 조세5.2. 루이나 차관5.3. 통화와 은행
6. 무역7. 전시 경제와 붕괴 (1914~1917)8. 평가

1. 개요 [편집]

제정 사랜드의 경제를 다루는 문서. 제정의 경제는 1,206년 동안 평원의 관개 농업에 기대었고, 그 농업은 땅과 함께 물을 쥔 영주와 영지에 묶인 농노로 움직였다. 19세기 후반 서부 전쟁의 패배 뒤 국가가 주도한 군수·철도 중심의 산업화가 시작되었지만, 농노제는 1918년까지 폐지되지 않았다. 그 결과 제정 말기의 경제는 크라슬리스크와 인터그라드의 근대적인 병기창·제철소·방직공장이 농노제 농촌의 바다 위에 섬처럼 떠 있는 모습이었다.

2. 농업 [편집]

2.1. 관개와 수리권 [편집]

반건조 기후의 사랜드 평원에서 비에만 기대는 농사는 불안정했다. 연 강수량이 300~500mm에 그쳐 몇 해에 한 번씩 가뭄이 들었고, 안정적인 수확은 강물을 끌어들이는 관개 농지에서만 가능했다. 고대 사랜드 제국이 수리 문명이었던 것도, 분열기의 영주들이 서로 물길을 막아 싸운 것도 이 때문이었다.

712년 인터르스키 1세의 수문법은 평원의 모든 수문과 수로를 차르의 것으로 선언하고, 이를 충성하는 귀족들에게 봉토로 나누어 주었다. 이후 1,200년 동안 평원의 수문과 수로는 대부분 영주의 손에 있었다. 농노는 영주의 수로에서 물을 받는 대가로 '수세(水稅)'를 냈고, 수문을 여는 날과 시간, 물을 나누는 순서는 영주의 관리인이 정했다. 마을 단위로 수문을 함께 관리하는 '수문 공동체'가 물을 나누는 세부 순서를 정했지만, 수문의 열쇠는 언제나 영주에게 있었다.

영주 수리권은 제정 경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다. 러시아의 지주가 땅을 쥐었다면 사랜드의 영주는 땅과 물을 함께 쥐었고, 물이 없으면 땅은 쓸모가 없었다. 연구자들은 제정의 농노제가 러시아보다 반세기 넘게 오래 살아남은 가장 큰 이유를 이 수리권에서 찾는다.

2.2. 작물과 지역 [편집]

지역
주요 생산물
평원 중부·서부
밀, 보리, 사탕무
평원 남부
면화, 포도
동부 저지대
쌀
북부 고원
양모, 과수, 구리·철
카스탄 산지
목재, 석탄, 가축
남부 해안
소금, 어업

제정의 주곡은 밀이었다. 평원 중부와 서부의 관개 농지에서 나는 밀은 국내 소비를 채우고도 남아 19세기 후반 제정의 최대 수출품이 되었다. 평원 남부의 관개 농지에서는 19세기 중엽부터 면화 재배가 크게 늘었는데, 인터그라드 방직공장의 원료였다. 롱 강 서안의 동부 저지대에서는 대월계 동부민이 몬순 강우에 기대어 쌀을 길렀고, 북부 고원은 양모와 과수, 그리고 광물의 산지였다.

2.3. 영지와 자드루가 [편집]

평원의 농지는 영주의 직영지와 농노에게 나누어 준 분여지로 나뉘었다. 농노는 분여지를 경작해 먹고살면서, 일주일에 사나흘은 영주의 직영지에서 부역했다. 분여지는 개인이 아니라 확대가족 공동체인 '자드루가'에 주어졌고, 영주도 부역과 공납을 자드루가 단위로 매겼다. 자드루가는 수십 명의 친족이 땅과 가축, 농기구를 함께 소유하고 함께 일하는 단위로, 흉년에는 서로를 떠받치는 안전망이었다.

2.4. 국가 농노와 차르 직영지 [편집]

농노의 약 3분의 1은 국유지와 차르 직영지에 딸린 국가 농노였다. 차르 직영지는 궁내부가 관리하는 제정 최대의 영지로, 평원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국가 농노는 영주 농노보다 처지가 나아 부역 대신 정해진 공납을 냈고, 마을 자치와 소규모 재산 소유가 허용되었다. 19세기 후반 국가 주도 산업화의 노동력은 주로 이 국가 농노에서 나왔다.

2.5. 흉년 [편집]

반건조 평원의 농업은 가뭄에 취약했다. 몇 해에 한 번씩 흉년이 들었고, 큰 흉년은 기근으로 이어졌다. 1601~1603년의 3년 연속 흉년은 혼란기의 내란을 더욱 참혹하게 만들었고, 1891년 흉년 때는 평원 남부와 중부에서 수십만 명이 굶주렸다. 1891년 정부의 늑장 대응은 지식인들의 거센 비판을 불렀고, 정확한 통계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1902년 첫 인구조사로 이어졌다. 1916년의 흉작은 전시의 철도 마비와 겹치며 장미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3. 농노제의 경제 [편집]

3.1. 부역과 공납 [편집]

영주가 농노에게서 거두는 방식은 두 가지였다. 비옥한 관개 영지에서는 농노가 영주의 직영지에서 일하는 부역이, 척박한 영지나 도시 근교에서는 농노가 해마다 정해진 돈이나 현물을 바치는 공납이 주였다. 여기에 영주의 수로를 쓰는 수세와 국가에 내는 인두세가 더해졌다. 귀족과 성직자는 인두세를 면제받았으므로, 국가 직접세의 대부분은 농노와 도시 평민의 몫이었다.

3.2. 출가 농노 [편집]

공납을 내는 농노는 영주의 허가증을 받아 도시로 일하러 나갈 수 있었다. 이들을 '출가 농노'라 불렀다. 출가 농노는 도시의 공장이나 부두, 공사장에서 일해 번 돈으로 영주에게 공납을 바쳤고, 영주가 부르면 언제든 영지로 돌아가야 했다. 19세기 후반 인터그라드와 크라슬리스크의 공장 노동자 상당수가 이런 출가 농노였는데, 이들은 법적으로는 농노이면서 실제로는 도시 노동자인 이중의 존재였다. 인터그라드 방직공장의 여공 대부분도 출가 농노 출신이었다.

출가 농노 제도는 영주에게도 이익이었다. 도시의 임금이 오르면 영주는 공납을 올렸고, 출가 농노가 많은 영지는 부역 영지보다 더 많은 현금을 벌었다. 이 때문에 영주들은 공장의 확대를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농노제의 폐지에는 끝까지 반대할 수 있었다.

3.3. 해방 논쟁 [편집]

19세기 내내 농노 해방은 여러 차례 논의되었지만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다. 1810년대 알렉산다르 1세의 국가 농노 단계적 해방 구상은 통치평의회의 반대로 묻혔고, 1866년 페타르 3세가 마련한 해방 칙령안은 1867년 통치평의회에서 부결되었다. 1913년 사보르 하원이 상정한 농노 해방 법안은 차르의 하원 해산으로 폐기되었다.

해방이 번번이 좌절된 데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수리권이었다. 해방된 농노에게 땅을 나누어 준다 해도 수로와 수문이 영주의 것으로 남는 한 그 땅은 쓸모가 없었고, 수리권까지 나누려면 영지 전체를 해체해야 했다. 둘째는 귀족 부채였다. 1885년 세워진 귀족 토지은행은 영지와 그에 딸린 농노를 담보로 귀족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1900년 무렵에는 영주 농노의 약 70%가 이 은행에 담보로 잡혀 있었다. 농노를 해방하면 담보가 사라지고 은행이 무너지며, 은행에 돈을 맡긴 국가 재정까지 흔들릴 것이었다. 농노는 영주의 노동력이면서 동시에 제정 금융의 담보물이었던 것이다.

4. 국가 주도 산업화 [편집]

4.1. 서부 전쟁의 충격 [편집]

1854~1856년 서부 전쟁의 패배는 제정 경제의 전환점이었다. 농노 징집병들은 구식 머스킷으로 라 마베라군의 강선 소총과 맞섰고, 철도가 없어 증원군과 보급품이 몇 달씩 걸려 전선에 닿았다. 1856년 벨라 강 조약으로 국경 지대를 잃자, 페타르 3세는 군대를 바꾸려면 먼저 무기와 철도를 스스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농노 해방 없이 민간 산업이 자랄 수는 없었으므로, 국가가 직접 공장을 세우고 국가 농노를 일꾼으로 쓰는 길을 택했다.

4.2. 국영 병기창 칙령 (1859) [편집]

1859년 페타르 3세는 국영 병기창 칙령을 내려 스베틀라 강 중류의 곡물 시장 도시 크라슬리스크에 국영 병기창을 세웠다. 크라슬리스크가 선택된 것은 북쪽 고원 가장자리의 철광과 동남쪽 카스탄 산지의 석탄 사이에 있고, 스베틀라 강을 따라 남부 항구 자톤으로 물자를 나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병기창은 소총과 대포를 만드는 공장에서 출발해 제철소, 기관차 공장, 화약 공장으로 넓어졌고, 1914년에는 노동자 9만여 명을 거느린 제정 최대의 공업 단지가 되었다.

병기창과 함께 1861년 크라슬리스크 공과학교가 세워져 기술자를 길러 냈다. 초기에는 루이나와 러시아에서 초빙한 기술자들이 공장을 설계하고 운영했으나, 1880년대부터는 공과학교 출신 사랜드인 기술자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4.3. 배속 농노 [편집]

국영 공장의 노동력은 국가 농노를 공장에 묶어 두는 '배속 농노' 제도로 채웠다. 정부는 크라슬리스크 주변 현의 국가 농노 마을에서 인원을 할당해 병기창과 광산, 철도 공사에 보냈고, 배속된 농노는 공장을 떠날 수 없었으며 임금 대신 숙소와 배급을 받았다. 1880년대 배속 농노는 30만 명이 넘었다.

배속 농노 제도는 값싼 노동력을 대량으로 공급했지만, 노동자들의 숙련도와 의욕은 낮았다. 1880년대 후반부터 병기창은 숙련공을 확보하기 위해 출가 농노와 도시민을 임금 노동자로 고용하기 시작했고, 1914년 무렵 크라슬리스크 공업 단지 노동자의 절반 정도가 임금 노동자였다. 배속 농노와 임금 노동자가 같은 작업장에서 다른 처우를 받는 구조는 노동 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4.4. 철도 [편집]

연도
철도 총연장
1870
410km
1880
3,200km
1890
8,900km
1900
15,600km
1914
22,100km

1868년 인터그라드와 인크론슈타트를 잇는 첫 철도가 개통되었다. 이후 철도는 국가가 직접 건설하고 운영하는 국유 철도로 넓어졌다. 1889년 개통된 크라슬리스크~자톤 '곡물 철도'는 평원 중부의 밀을 남부 항구로 실어 나르는 수출의 대동맥이 되었고, 1890년대에는 고원 가장자리의 광산을 잇는 고원선과 동부 롱 강 서안까지 가는 동부선이 놓였다. 철도는 군사 목적으로 설계되어 서부 국경 방향 노선이 특히 촘촘했는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서부 전선으로 병력을 보내는 데 쓰였다.

4.5. 방직 공업 [편집]

군수와 철도가 국가의 산업이었다면, 방직은 민간의 산업이었다. 1870년대부터 인터그라드 외곽에는 평원 남부의 면화를 원료로 쓰는 방직공장이 들어섰는데, 상당수가 루이나 자본과 합작한 공장이었다. 방직공장은 출가 농노 여성을 대거 고용해 제정에서 가장 많은 여성 노동자를 거느린 산업이 되었으며, 임금은 가장 낮았다. 1917년 3월 장미 혁명을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방직공장의 여공들이었다.

5. 재정과 금융 [편집]

5.1. 조세 [편집]

제정의 세입은 농노와 도시 평민이 내는 인두세, 관세, 그리고 주류 전매 수입이 중심이었다. 1892년 니콜라 3세가 도입한 주류 전매는 곧 국가 세입의 4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커졌다. 귀족과 성직자는 인두세를 면제받았으며, 영주가 농노에게서 거두는 부역·공납·수세는 국가가 아니라 영주의 수입이었다. 국가가 평원 농업의 부를 직접 거두지 못하는 구조는 산업화 자금을 해외 차관에 기대게 만든 근본 원인이었다.

5.2. 루이나 차관 [편집]

국가 주도 산업화의 자금은 곡물 수출 대금과 해외 차관에서 나왔다. 가장 큰 채권국은 우호적인 교역 상대였던 루이나였다.
연도
금액(USD)
용도
1872
4,000만
철도
1889
1억 1,000만
곡물 철도
1906
2억 3,000만
재정 보전

1906년 차관은 1905~1906년 소요의 진압과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한 것으로, 루이나 의회 안에서도 전제정을 돕는다는 비판이 일었다. 1914년 기준 제정의 대외 채무 가운데 약 3분의 2가 루이나에 대한 것이었다. 1917년 임시정부는 제정의 대외 채무를 승계했고, 이 채무는 사랜드 공화국 내내 재정의 큰 짐이 되었다.

5.3. 통화와 은행 [편집]

제정의 통화는 디나르였다. 1863년 국립 은행인 제국은행이 세워져 디나르 지폐를 발행했고, 1897년 재무대신 알렉사 반코비치의 주도로 금본위제가 도입되어 디나르는 금과 교환되는 통화가 되었다. 금본위제는 루이나 차관을 들여오기 위한 신용의 담보였지만, 1914년 개전과 함께 금 태환이 정지되었다.

1885년에는 귀족들에게 영지를 담보로 저리 대출을 해 주는 귀족 토지은행이 세워졌다. 이 은행은 몰락하는 귀족 가문들을 떠받쳤지만, 동시에 영지와 농노를 금융의 담보로 묶어 농노 해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농민을 위한 은행은 끝까지 세워지지 않았다.

6. 무역 [편집]

수출품
비율(1913)
곡물
54%
면화·양모
14%
구리·광물
11%
소금
6%
기타
15%

제정은 곡물을 팔고 기계를 샀다. 1913년 수출의 절반 이상이 곡물이었고, 대부분이 크라슬리스크~자톤 곡물 철도를 따라 남부 항구 자톤에서 실려 나갔다. 수입품은 기계와 철도 차량, 무기, 그리고 귀족들을 위한 사치품이 중심이었다. 최대 교역 상대는 루이나였고, 러시아 제국과 빌베른, 청평이 그 뒤를 이었다.

해외 이권도 무역의 거점이었다. 1862년 조차한 청평 남부의 푹하이는 청평 남부로 면직물과 무기를 파는 창구였고, 1881년 얻은 콘스탄티노폴 조계는 랜드해협 서부 교역의 중계지였다. 두 이권 모두 1919년 임시정부가 반환했다.

7. 전시 경제와 붕괴 (1914~1917) [편집]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제정은 약 480만 명을 동원했다. 병사의 대부분이 농노였으므로 동원은 곧 농촌 노동력의 유출이었고, 영주들은 부역할 사람을 잃었다. 곡물 생산은 1913년에 비해 1915년 18%, 1916년 31% 줄었다.

철도는 서부 전선으로 병력과 탄약을 나르는 데 매달렸고, 평원의 곡물을 도시로 실어 나를 차량은 모자랐다. 정부는 전비를 대려고 디나르 지폐를 찍어 냈으며, 1916년 말 디나르의 구매력은 개전 때의 3분의 1로 떨어졌다. 1916년 흉작이 겹치자 인터그라드를 비롯한 대도시의 빵 배급이 끊기다시피 했다. 1917년 1월 인터그라드의 빵 배급량은 개전 전의 절반 아래로 줄었고, 두 달 뒤 방직공장 여공들의 빵 시위가 장미 혁명으로 번졌다.

8. 평가 [편집]

제정의 경제는 흔히 '병기창과 농노제의 공존'으로 요약된다. 국가는 크라슬리스크에 근대적인 병기창과 제철소를 세우고 2만 km가 넘는 철도를 깔았지만, 그 노동력은 공장에 묶인 배속 농노와 영주에게 공납을 바치는 출가 농노였다. 근대 산업이 농노제를 무너뜨리기는커녕 농노제 위에서 자랐고, 농노는 노동력이면서 금융의 담보물이었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이를 '봉건적 착취 위에 세운 군사 공업'으로 규정했고, 노스탈린 시대의 5개년 계획은 바로 이 크라슬리스크 공업 단지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1990년대 이후의 연구는 제정의 산업화가 비록 농노제를 넘지 못했지만, 크라슬리스크의 공업 기반과 공과학교 출신 기술자층, 국유 철도망을 남겨 사비에트 공업화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반면 농노제를 유지한 채 국가가 산업화를 이끈 방식이 결국 1916년 식량 공급의 붕괴로 이어져 제정을 무너뜨렸다는 점도 함께 지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