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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명칭3. 배경
3.1. 전후 좌파의 성장3.2. 통제 수단의 한계3.3. 안보 기구의 인식
4. 입안
4.1. 국방부 검토4.2. 배제된 안4.3. 국가안보회의 승인4.4. 정치적 책임의 소재
5. 실행 체계
5.1. 제4과5.2. 공화국의 방패5.3. 자금5.4. 훈련5.5. 위장 명의
6. 위장 테러
6.1. 개관6.2. 1959년 벨포르 중앙우체국6.3. 1961년 톨루즈 노동절 집회6.4. 1963년 콜마르 국영방송 송신소6.5. 1964년 롱비치 항만노조 회관6.6. 1966년 아르덴역6.7. 1968년 벨포르 하원의원 자택
7. 수사의 유도
7.1. 첩보의 생산과 전달7.2. 1967년 검거7.3. 오르티스 사망7.4. 재판7.5. 단일 배후 가설의 배제
8. 효과
8.1. 여론8.2. 입법8.3. 선거8.4. 노동운동8.5. 효과의 귀속 문제
9. 계획의 파탄
9.1. 방패의 자립9.2. 통제 이탈9.3. 회수 작전9.4. 계획의 종료
10. 은폐와 규명
10.1. 기록 관리10.2. 1991년 조사위원회10.3. 1996년 소송10.4. 1998년 재심10.5. 2004년 이후10.6. 규명되지 않은 부분
11. 국제적 맥락
11.1. 유사 사례11.2. 대외 관여 의혹
12. 평가
12.1. 목표를 둘러싼 논쟁12.2. 인과의 범위12.3. 책임의 소재12.4. 제도적 귀결
13. 관련 문서


1. 개요 [편집]

제방 계획(堤防計劃)은 1957년 국가안보회의가 승인하여 국방부 특무처 제4과가 집행한 비밀 공작이다. 정부가 좌파를 직접 탄압하는 대신 민간 극우 조직을 양성하고, 그 조직으로 하여금 극좌의 범행으로 위장한 테러를 실행하게 하며, 이를 통해 좌익의 위협을 국민에게 각인시켜 공산주의의 정치적 기반을 제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계획의 실행 조직은 1958년 3월 결성된 공화국의 방패였다. 방패는 등록된 반공 사회단체로 공개 활동을 병행하는 한편, 별도의 행동조직을 통해 1959년부터 1968년까지 여섯 건의 위장 테러를 집행했다. 사망자는 합계 32명이며, 이 가운데 19명이 1966년 아르덴역 폭발에서 발생했다. 여섯 건 모두 극좌 조직의 소행으로 발표되었고, 수사는 특무처가 제공한 첩보가 지목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계획은 표면적 목표를 달성했다. 1966년 조사에서 국내 공산주의 세력을 최대 안보 위협으로 꼽은 응답은 78%였고, 1960년 반체제활동규제법 개정으로 좌파 단체의 등록·해산 요건이 강화되었으며, 1968년 선거에서 좌파 정당의 의석은 이전 선거의 절반 이하로 줄었다. 1967년에는 혁명적 노동자동맹 관계자 23명이 검거되어 11명이 아르덴역 사건의 실행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계획은 두 가지 결과를 함께 남겼다. 하나는 국가가 자금과 훈련을 제공한 무장 조직이 통제를 벗어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고하게 처벌받은 좌파 조직이 실제 무장조직으로 재편된 것이다. 1970년 회수 작전으로 시작된 국가와 방패의 충돌, 그리고 1971년 재편된 혁명적 노동자동맹의 무장투쟁은 검은 10년의 직접적 출발점이 되었다.

제방 계획의 존재가 공적으로 확인된 범위는 지금도 제한적이다.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가 작성한 비공개 부속서는 공개되지 않았고, 1998년 아르덴역 사건 재심에서 유죄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실행 주체는 판결문에서도 특정되지 않았다. 계획과 관련하여 형사 책임이 인정된 사람은 현재까지 한 명도 없다.

2. 명칭 [편집]

제방은 밀려오는 물을 막는 구조물을 가리킨다. 1957년 국방부가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한 문건에 이 표현이 등장하며, 공산주의의 침투를 물의 유입에, 이를 차단하는 조치를 제방에 비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건의 정식 명칭은 확인되지 않았고, 국가안보회의 의결 기록에는 안건 번호와 안건명만 남아 있다.

특무처 내부에서는 이 계획을 별도의 암호명으로 부르지 않고 제4과의 업무로만 지칭했다. 제방이라는 표현이 외부에 알려진 것은 1981년 조사위원회 부속서를 통해서이며, 그 이전의 언론 보도와 정치적 논쟁에서는 이 명칭이 사용된 적이 없다. 따라서 이 명칭은 계획의 실행 당시가 아니라 사후에 정착한 것이다.

계획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으로 제57-정9호 안건, 국방부 반공 민간망 계획 등이 사용되기도 하나 통용되는 것은 제방 계획이다.

3. 배경 [편집]

3.1. 전후 좌파의 성장 [편집]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에 걸쳐 소련에서 약 200만 명이 루이나로 이주했다. 이주민 다수는 공업 도시와 항만 배후 지역에 정착해 산업 노동력의 상당 부분을 이루었고, 노동조합과 좌파 정당의 새로운 지지 기반이 되었다. 같은 시기 1949년 청평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냉전의 대치선이 루이나의 인접 지역에 직접 형성되었다.

전후 재건기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1916년 빈덴브루크 철도 총파업 이후 확립된 노동운동의 조직 기반이 전후 산업 확장과 맞물리면서, 1950년대 중반 주요 공업 도시의 조직률은 60%를 넘어섰다. 좌파 정당은 1953년과 1957년 선거에서 연속으로 의석을 늘렸고, 일부 도시에서는 시정을 장악했다.

정부와 보수 진영, 특히 안보 기구는 이 흐름을 선거 결과가 아니라 침투의 결과로 해석했다. 이주민 사회의 조직망과 노동조합이 대외 세력의 국내 거점으로 기능한다는 인식이 국방부와 국가정보국의 정세 판단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인식이 실제 침투 활동의 규모에 부합했는지는 이후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당시 확인된 국외 연계 사건의 수는 이 판단이 전제한 규모에 미치지 못했다.

3.2. 통제 수단의 한계 [편집]

정부가 좌파를 직접 통제할 법적 수단은 제한되어 있었다. 헌법상 결사와 정치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좌파 정당은 합법 정당이었으며, 노동조합의 쟁의권도 법률로 인정되어 있었다. 1949년 제정된 헌법이 제2공화국기의 권위주의적 관행에 대한 반성 위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정치적 결사를 행정적으로 해산하는 절차는 매우 엄격했다.

1954년과 1956년 두 차례 좌파 단체의 활동을 제한하는 법안이 제출되었으나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부결의 이유는 좌파 정당의 반대만이 아니었다. 여당 내 법률가 집단과 중도 정당이 이러한 입법이 헌법재판에서 유지되기 어렵고, 정치적 반대 세력을 행정 처분으로 배제하는 선례를 만든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직접 탄압이 역효과를 낳는다는 판단도 있었다. 1955년 콜마르 조선소 파업에 경찰이 투입된 뒤 해당 지역의 좌파 정당 득표율이 오히려 상승한 사례가 국방부 내부 자료에 인용되어 있다. 탄압은 탄압받는 쪽의 정당성을 키운다는 인식이 여기서 나왔고, 이것이 제방 계획의 논리적 출발점이 되었다.

3.3. 안보 기구의 인식 [편집]

특무처는 1935년 설치 이래 국내 대상 작전의 선례를 축적하고 있었다. 1950년부터 1957년까지 특무처는 이주민 사회와 노동운동의 좌파 지도부를 감시하고 선별적으로 제거했으며, 제거는 통상의 범죄나 사고로 위장되었다. 1953년 법무부에 광역범죄조사과가 설치된 뒤에도 특무처의 존재는 법무부에 통보되지 않았으므로, 이 작전들은 수사기관이 배후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통상 사건으로 처리되었다.

이 방식의 한계는 규모였다. 개별 인물을 제거하는 것으로는 조직 자체를 축소시킬 수 없었고, 제거된 인물의 자리는 곧 채워졌다. 1956년 특무처가 국방부에 제출한 보고서는 지난 6년간의 국내 작전이 좌파의 조직 역량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표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이 이 보고서에서 처음 제시되었다.

4. 입안 [편집]

4.1. 국방부 검토 [편집]

1957년 상반기 국방부는 국내 공산주의 대응 방안을 재검토했다. 검토를 주도한 것은 제4대 특무처장 에밀 P. 라코스트로 알려져 있다. 라코스트는 1955년 취임 이후 국내 작전의 실효성 문제를 반복적으로 제기했고, 그 대안으로 여론 형성을 목표로 하는 공작을 구상했다.

검토의 핵심 전제는 세 가지였다. 첫째, 정부가 좌파를 탄압하면 탄압 자체가 좌파의 정당성이 되므로 정부는 전면에 나설 수 없다. 둘째, 좌파의 정치적 기반을 제거하려면 유권자가 좌파를 위험한 세력으로 인식해야 한다. 셋째, 그러한 인식은 좌파가 스스로 폭력 집단임을 증명하는 형태로만 확실하게 형성된다.

이 세 전제로부터 결론이 도출되었다. 좌파가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면 그 형태를 만들어야 하며, 만드는 주체는 정부와 무관해 보이는 민간 조직이어야 한다. 조직은 국가가 만들되 국가와의 연결은 남기지 않고, 조직이 극좌의 이름으로 테러를 실행하면 여론과 수사기관이 좌파를 향하게 된다.

4.2. 배제된 안 [편집]

검토 과정에서 제시되었다가 채택되지 않은 안이 여럿 있었다. 1981년 조사위원회 부속서는 그 가운데 세 가지를 기록하고 있다.

첫째는 민항기 사고를 조작해 공산권의 소행으로 발표하는 안이었다. 둘째는 국외 공관에 대한 습격을 조작하는 안이었다. 셋째는 좌파 정당 지도부의 개인 비위를 조작해 언론에 유출하는 안이었다.

부속서에 기록된 배제 사유는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실무적 판단이다. 첫째와 둘째 안은 조작이 발각될 경우의 국제적 파장이 감당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셋째 안은 효과가 개인에 한정되어 조직 전체에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국내에서 자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안이 채택되고 국외 관련 안이 배제된 것은 발각 위험의 크기에 따른 것이었으며, 피해자의 국적이나 규모는 판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 기록은 계획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으로 자주 인용된다. 채택된 안이 검토된 여러 안 가운데 가장 온건한 것이었다는 점, 그리고 배제의 기준이 도덕이 아니라 위험 관리였다는 점을 함께 보여주기 때문이다.

4.3. 국가안보회의 승인 [편집]

1957년 11월 국가안보회의는 국방부가 제출한 계획을 안건 제57-정9호로 승인했다. 의결 기록에는 안건 번호와 안건명, 의결 사실만 기재되어 있고 심의 내용과 발언은 남아 있지 않다. 참석자 명단도 기록되지 않았다.

승인의 범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승인된 문건이 반공 민간망의 구축과 국가 비상시의 후방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 국가안보회의가 승인한 것은 조직의 육성이지 위장 테러의 실행이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반면 문건에 좌파에 대한 책임 전가가 명시되어 있었다면 승인의 범위에 테러가 포함된다.

부속서는 이 쟁점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문건 원본이 확인되지 않았고, 국방부가 제출한 것은 요약본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부속서는 계획 전체에 대한 정치적 승인과 개별 사건의 실행 명령은 별개의 계통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후자의 지휘 계통은 특무처 내부에서 완결되었다고 기록했다.

4.4. 정치적 책임의 소재 [편집]

당시 대통령은 로런스 D. 페닝턴이었다. 페닝턴이 계획의 실체를 보고받았는지에 관한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무처에 전달된 지시문은 국방부장관 명의였고,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에게 어느 범위까지 보고했는지를 확인할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계획은 페닝턴 행정부에서 시작되어 헨리 모리슨, 조지 레이먼드, 아서 W. 그랜트 행정부까지 이어졌다. 정권이 세 차례 교체되는 동안 계획이 중단되거나 재승인 절차를 거친 기록은 없다. 이는 계획이 특정 정권의 정책이 아니라 안보 기구의 상시 업무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해석된다.

정권 교체 시 후임 대통령에게 계획이 인계되었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특무처의 기록은 국방부 문서고와 분리 보관되었고 종결보고서는 사본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인계가 이루어졌다면 구두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5. 실행 체계 [편집]

5.1. 제4과 [편집]

1958년 1월 특무처에 제방 계획을 전담하는 제4과가 신설되었다. 설치 당시 인원은 20명 안팎이었으며 1966년에는 40명을 넘었다. 제4과의 업무는 방패에 대한 자금 지급과 훈련 제공, 위장 테러의 표적·시기·명의 지정, 그리고 수사 방향을 유도하기 위한 첩보의 생산과 전달이었다.

제4과는 방패와 직접 접촉하지 않았다. 접촉선은 방패 총재 게오르기 A. 스트렐니코프 한 명으로 한정되었고, 지시는 구두로 전달되어 문서로 남지 않았다. 이 구조는 조직 내부에서 배후를 아는 인원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유출이 발생하더라도 물증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0년 회수 작전이 결정되면서 제4과는 폐지되어 제2과에 흡수되었다. 방패를 양성했던 제4과 요원 다수가 방패를 제거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5.2. 공화국의 방패 [편집]

공화국의 방패는 1958년 3월 9일 벨포르에서 제대군인 친목단체의 형식으로 창립되었다. 창립 인원 400명은 제대군인회와 이주민 사회의 반공 단체에서 모집되었으며, 창립 장소·시기·초청 인원은 모두 제4과가 지정했다.

표면상 창립자 스트렐니코프는 전 육군 소령으로, 대전기 점령지에서 저항 활동을 한 경력으로 제대군인 사회에서 신망이 있었고 부상으로 예편한 뒤 별다른 사회적 지위가 없었다. 제4과가 그를 선정한 것은 이 두 조건 때문이었다. 창립 시점에 방패 내부에서 배후를 아는 사람은 그를 포함해 3명이었고, 조직이 소멸할 때까지 그 수는 스무 명을 넘지 않았다.

조직의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다수가 진심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배후를 아는 인원이 늘어날수록 유출 위험이 커지므로, 회원 대부분이 배후를 모르는 편이 안전하다는 판단이었다. 이 원칙에 따라 방패는 진짜 신념을 가진 수만 명과 그들을 모르게 조종하는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이중 구조가 되었다.

조직은 등록 사회단체로서 반공 집회, 참전·재향군인 행사, 청년 교육, 상이군인 지원과 수해 구호를 공개적으로 수행했다. 이 활동들은 실제로 이루어졌고 자금도 실제로 지출되었다. 제4과는 이러한 공개 활동이 조직의 사회적 신뢰를 유지하는 데 위장 테러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5.3. 자금 [편집]

1958년부터 1965년까지 방패의 운영비 전액은 특무처 제5과의 자체 조달 자금에서 지급되었다. 특무처는 훈령으로 설치된 조직이어서 자체 예산 항목을 갖지 않았고, 국방부 기밀예산의 전용은 기획관리실의 승인을 요했으므로 국방부 내부에서도 소수만 아는 계획의 자금을 이 경로로 조달할 수 없었다.

제5과는 고랜드 거점에서 확보한 아편을 군 수송 경로로 반출하고 국외 시장에서 판매해 자금을 세탁했다. 1960년대 이 사업의 연간 수입은 1,000만~1,500만 달러로 추정된다. 방패에 대한 지급은 조직이 설립한 경비 용역 회사에 대한 용역비 형식으로 이루어져 회계상 정상적인 영업 수입으로 처리되었다.

이 구조에 따라 방패는 창립부터 마약 자금으로 운영된 셈이 되었으나 이를 아는 인원은 없었다. 1967년 방패가 이 아편 경로의 국내 유통 부분을 장악하면서 자금을 대던 쪽과 받던 쪽의 관계가 역전되었고, 이것이 통제 이탈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5.4. 훈련 [편집]

행동대원 교육은 특무처 훈련소가 있는 노스클리프 산악 훈련장에서 이루어졌다. 교육 내용은 사격, 폭발물 취급, 시가전, 감시와 미행, 그리고 성명서 작성과 증거 조작을 포함한 위장 기법이었으며, 특무처 요원 교범을 축약한 것이었다. 1958년부터 1969년까지 수료 인원은 약 1,100명이다.

수료자에게 훈련장의 소재는 고지되지 않았다. 이동은 야간에 차량으로 이루어졌고 훈련장은 민간 사격 클럽의 시설로 소개되었다. 1970년대 검거된 행동대원들이 훈련 이력을 진술하고도 훈련장을 특정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며, 진술은 신빙성 부족을 이유로 수사 기록에서 배제되었다.

무장은 조달의 문제가 아니었다. 루이나는 총기 소지가 합법이므로 행동대원은 각자의 명의로 반자동 소총과 권총을 구입했고, 이를 자동 사격이 가능하도록 개조하는 방법이 제5과 교범으로 정리되어 각 지부에 배포되었다. 폭발물은 지부별 제조조가 사제로 제작했다. 정부가 무기를 공급한 흔적이 남지 않도록 설계된 이 방식은 훈련 수료자를 통해 민간에 확산되어, 이후 루이나 무장 시위 문화의 기술적 기반이 되었다.

5.5. 위장 명의 [편집]

위장 테러에는 두 종류의 명의가 사용되었다.

10월 행동단은 실체가 없는 조직이다. 성명서와 표식을 제4과가 제작해 유포했으며, 조직원도 사무실도 존재하지 않았다. 1959년과 1963년 두 사건에 사용되었다. 실체 없는 명의는 수사가 진전될 여지가 없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동시에 처벌할 대상도 없으므로 여론 형성 이상의 효과를 내지 못했다.

혁명적 노동자동맹은 실재하던 소규모 극좌 조직이다. 1959년 콜마르에서 결성되어 유인물 발행과 현장 조직화를 수행했고, 최성기에도 200명을 넘지 않았으며 무장 활동의 전력이 없었다. 1964년부터 위장 명의로 사용되었다.

제4과가 명의를 실체 없는 조직에서 실재 조직으로 바꾼 것은 수사와 여론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기에 효과적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동맹이 선정된 이유는 규모가 작아 대응 능력이 없고, 이미 좌파 조직으로 알려져 있으며, 산업 도시에 기반이 있어 노동 현장의 폭력이라는 서사에 부합한다는 것이었다. 이 전환으로 계획은 여론 형성을 넘어 실제 인신 구속을 만들어 내는 단계로 이행했다.

6. 위장 테러 [편집]

6.1. 개관 [편집]

1959년부터 1968년까지 제4과가 지정하고 방패 행동대가 집행한 위장 테러는 여섯 건이다. 사망자는 합계 32명이며 행동대원의 손실은 없다.
날짜
사건
위장 명의
사망
1959. 10. 12.
벨포르 중앙우체국 폭발
10월 행동단
3명
1961. 5. 1.
톨루즈 노동절 집회 총격
극좌 내부 항쟁
7명
1963. 8. 3.
콜마르 국영방송 송신소 폭파
10월 행동단
0명
1964. 11. 9.
롱비치 항만노조 회관 방화
혁명적 노동자동맹
2명
1966. 3. 17.
혁명적 노동자동맹
19명
1968. 6. 20.
벨포르 하원의원 자택 총격
혁명적 노동자동맹
1명

행동대는 자신이 실행하는 사건이 극좌의 소행으로 발표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조직 내부에서는 이를 좌파의 실체를 국민에게 알리기 위한 정당한 수단으로 설명했고, 상당수 행동대원이 이 설명을 받아들였다.

6.2. 1959년 벨포르 중앙우체국 [편집]

1959년 10월 12일 심야 벨포르 중앙우체국에 설치된 폭발물이 터져 숙직 직원 3명이 사망했다. 계획 착수 이후 첫 실행이었으며, 제4과는 이 사건을 통해 방패의 실행 능력과 위장 명의의 작동을 검증했다.

표적으로 우체국이 선정된 이유는 국가 기능을 상징하면서도 경비가 없고 심야에 인원이 적다는 것이었다. 사망자 3명은 예상보다 많은 수치였으며, 부속서는 제4과가 무인 상태를 전제하고 시각을 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건 직후 10월 행동단 명의의 성명이 언론사에 배포되었다. 수사는 좌파 조직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나 실체 없는 조직을 추적할 수 없어 미제로 종결되었다.

6.3. 1961년 톨루즈 노동절 집회 [편집]

1961년 5월 1일 톨루즈의 노동절 집회에서 대열 내부에 있던 방패 행동대원이 발포해 7명이 사망했다. 여섯 건 가운데 위장 명의를 사용하지 않은 유일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설계 의도는 좌파가 외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서로를 살해하는 집단이라는 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성명은 발표되지 않았고, 사건은 집회에 참가한 좌파 조직 간의 노선 충돌로 보도되었다. 실제로 당시 집회에는 노선을 달리하는 복수의 조직이 참여하고 있었으며, 사건 이후 이들 사이의 상호 불신이 심화되었다.

노동절이 선택된 것은 이 날이 빈덴브루크 철도 총파업을 기념해 제정된 국가 공휴일이자 노동운동의 상징적 기념일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부속서는 이 선택이 상징성을 노린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6.4. 1963년 콜마르 국영방송 송신소 [편집]

1963년 8월 3일 콜마르의 국영방송 송신소가 폭파되어 해당 지역의 방송이 나흘간 중단되었다. 사망자는 없었다.

국가 기간시설이 좌익 테러의 표적이 되었다는 상징성 때문에 언론의 반향이 컸다. 사망자가 없었음에도 이 사건이 여론에 미친 영향은 앞선 우체국 사건보다 컸으며, 부속서는 이를 근거로 제4과가 이후 인명 피해보다 시설과 상징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표적 선정 기준을 조정했다고 기록했다. 다만 이 기준은 1966년 아르덴역 사건에서 지켜지지 않았다.

6.5. 1964년 롱비치 항만노조 회관 [편집]

1964년 11월 9일 롱비치의 항만노조 회관에 방화가 발생해 2명이 사망했다. 위장 명의가 실재 조직인 혁명적 노동자동맹으로 바뀐 첫 사건이다.

행동대는 현장에 동맹의 표식과 문건을 남겼다. 동시에 제4과는 동맹 조직원의 소재와 동선에 관한 첩보를 국방부를 경유해 법무부 광역범죄조사과에 제공하기 시작했다. 수사는 동맹 관련자를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나 이 시점에는 기소에 이르지 못했다.

표적이 노동조합 시설이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좌파 내부의 갈등이라는 1961년의 서사를 반복하는 동시에, 노동운동 자체를 폭력의 무대로 제시하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분석된다. 사건 이후 항만 지역의 노조 활동이 위축되었고, 이 공백은 방패가 수주한 노조 파괴 용역이 확대되는 조건이 되었다.

6.6. 1966년 아르덴역 [편집]

1966년 3월 17일 오전 출근 시간대 벨포르 지하철 아르덴역 승강장에 설치된 사제폭탄이 폭발해 19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했다. 제방 계획 관련 사건 가운데 사망자가 가장 많으며, 계획 전체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앞선 다섯 건과 성격이 달랐다. 표적이 시설이나 특정 집단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였고, 시각이 인원이 가장 많은 때로 지정되었다. 부속서는 이 표적 지정의 승인 계통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4과 내부에서 결정되었는지 상위 계통의 지시가 있었는지, 사망자 규모가 예상된 것인지 여부가 모두 규명되지 않았다.

혁명적 노동자동맹의 표식과 문건이 현장에 남겨졌고, 제4과는 사건 이전부터 축적해 온 동맹 조직원의 첩보를 광역범죄조사과에 제공했다. 사건 직후 실시된 조사에서 국내 공산주의 세력을 최대 안보 위협으로 꼽은 응답은 78%였다. 계획의 목표였던 여론 형성은 이 사건으로 사실상 완결되었다.

동시에 이 사건은 계획의 성격을 돌이킬 수 없이 바꾸었다. 자국민 19명의 사망을 대가로 얻은 여론이라는 사실이 이후 계획에 대한 모든 평가의 기준이 되었으며, 1998년 재심과 그 이후의 논쟁도 이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6.7. 1968년 벨포르 하원의원 자택 [편집]

1968년 6월 20일 여당 소속 하원의원의 자택이 총격을 받아 의원의 보좌관 1명이 사망했다. 위장 테러의 표적으로 우파 정치인이 지정된 유일한 사례이며 계획의 마지막 실행이다.

표적 지정의 배경은 확인되지 않았다. 좌익의 위협이 우파 정치인에게까지 미친다는 인상을 만들어 선거를 앞두고 반공 여론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는 분석이 유력하나, 부속서는 이 사건의 지정 근거에 관한 자료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이 무렵 방패는 이미 제4과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1967년부터 조직은 지정 없이 좌파 인사를 습격하고 있었고, 자금도 독립한 상태였다. 이 사건이 제4과의 지정에 따른 것인지 방패의 독자 판단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으나, 부속서는 지정에 따른 것으로 분류했다.

7. 수사의 유도 [편집]

7.1. 첩보의 생산과 전달 [편집]

제방 계획에서 위장 테러의 실행만큼 중요했던 것은 수사를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작업이었다. 현장에 남긴 표식과 문건만으로는 기소에 이르지 못하며, 수사기관이 특정 인물을 향하도록 하려면 그 인물에 관한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제4과는 1964년부터 혁명적 노동자동맹 조직원의 소재, 이동 경로, 접촉 인물, 회합 장소에 관한 자료를 축적했다. 이 자료는 실제 감시를 통해 수집된 것이므로 그 자체로는 사실이었다. 조작은 자료의 내용이 아니라 자료가 전달되는 맥락에 있었다. 사건 발생 후 이 자료가 익명의 제보나 출처 불명의 첩보 형식으로 수사기관에 전달되면, 사실인 정보가 사건과의 연관성을 입증하는 근거처럼 기능했다.

전달은 국방부를 경유했다. 국방부 정보협력관 명의로 법무부에 제공되는 형식이었고, 광역범죄조사과는 이 첩보의 원출처를 조회할 권한이 없었다. 부속서는 이 경로를 담당한 국방부 인원으로 정보협력관 레오 F. 뒤크로를 지목했으나, 그가 첩보의 성격을 알고 있었는지 단순 전달자였는지는 판단하지 않았다. 뒤크로는 1979년 사망했다.

이 방식의 효과는 컸다. 수사관의 입장에서는 신뢰할 만한 출처에서 나온 구체적 정보였고, 정보의 내용이 실제로 확인되었으므로 첩보의 신빙성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사후에 문제가 된 것은 정보가 틀렸다는 점이 아니라 그 정보가 왜 그 시점에 제공되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7.2. 1967년 검거 [편집]

1967년 광역범죄조사과는 축적된 첩보를 근거로 혁명적 노동자동맹 관계자 23명을 검거했다. 검거는 2월과 3월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아르덴역 사건 발생으로부터 약 11개월 뒤였다.

검거의 법적 근거는 충분하지 않았다. 물증은 현장에 남겨진 표식과 문건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인물 관계에 관한 진술과 첩보였다. 그럼에도 검거가 가능했던 것은 사건의 규모와 여론의 압력 때문이었다. 아르덴역 사건 이후 1년 가까이 수사가 진전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사기관은 결과를 제시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조사는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자백과 진술이 확보되었다. 이후 재심에서 이 자백의 임의성이 쟁점이 되었으며, 재심 법원은 조사 과정의 기록이 불완전해 임의성을 확인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7.3. 오르티스 사망 [편집]

검거된 23명과 별도로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된 인물 가운데 한 명이 조사 중 사망했다. 벨포르 지역 철도 정비공이자 동맹의 조합원이었던 뱅상 P. 오르티스로, 1967년 3월 소환되어 사흘째 조사를 받던 중 광역범죄조사과 청사 4층 창문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수사기관은 이를 자살로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오르티스는 조사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조사가 사흘째 계속되던 심야였다는 점, 추락 지점이 창문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는 점, 사망 당시 실내에 있던 조사관의 수와 신원에 관한 진술이 서로 엇갈렸다는 점이 사건 직후부터 문제로 제기되었다.

오르티스는 아르덴역 사건과 무관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기소된 11명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좌파 진영과 노동조합에서 국가폭력의 상징적 사건으로 다루어졌고, 매년 추모 집회가 열렸다. 사건에 대한 재조사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두 차례 요구되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사인은 현재까지 자살로 남아 있다.

부속서는 오르티스 사망에 관해 별도의 판단을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소환이 제4과가 제공한 첩보에 근거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7.4. 재판 [편집]

검거된 23명 가운데 11명이 아르덴역 사건의 실행범으로 기소되었고, 나머지 12명은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다. 재판은 1967년 하반기부터 1968년까지 진행되어 11명 전원에게 유죄가 확정되었다. 형량은 무기징역 3명을 포함해 모두 15년 이상이었다.

유죄 판단의 핵심 근거는 세 가지였다. 현장에서 발견된 동맹의 표식과 문건, 피고인들의 자백, 그리고 출처가 특정되지 않은 첩보였다. 변호인단은 첩보의 출처를 밝힐 것을 요구했으나 법원은 국가안보를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고, 좌파 정당과 일부 법조인이 절차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아르덴역 사건의 규모와 그로 인해 형성된 여론의 상황에서 이러한 문제 제기는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 유죄 확정 이후 좌파 진영 내부에서도 동맹과의 관계를 정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7.5. 단일 배후 가설의 배제 [편집]

1966년 광역범죄조사과 내부에서 여섯 사건의 유형적 유사성을 근거로 단일 배후를 의심한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작성자는 수사관 자크 L. 브뤼네였다.

보고서가 지적한 유사성은 세 가지였다. 표적 선정이 정치적 효과를 정밀하게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 현장에 남겨진 증거가 지나치게 일관되고 명확하다는 점, 그리고 여섯 사건 모두에서 실행자가 완전히 이탈해 목격자나 물리적 흔적이 남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보고서는 이 정도의 실행 능력을 갖춘 조직이 그 밖의 활동에서는 전혀 포착되지 않는다는 것이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채택되지 않았다. 국방부가 제공한 첩보와 배치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브뤼네는 이듬해 지방으로 전보되었으며 이후 수사 업무에서 배제되었다. 그는 1994년 사망했고, 1996년 소송 과정에서 이 보고서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사후에 재평가되었다.

이 보고서는 제방 계획이 완전한 은폐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제기된 의심이 제도적으로 배제된 결과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된다.

8. 효과 [편집]

8.1. 여론 [편집]

계획의 목표였던 여론 형성은 달성되었다. 1966년 아르덴역 사건 직후 실시된 조사에서 국내 공산주의 세력을 국가안보의 최대 위협으로 꼽은 응답은 78%였다. 같은 문항에 대한 1958년 조사의 응답은 31%였다.

여론의 변화는 공산주의 자체에 대한 인식을 넘어 좌파 전반에 대한 태도로 확산되었다. 1968년 조사에서 좌파 정당이 폭력 조직과 관계가 있다고 본 응답은 44%였고, 노동조합의 활동이 사회 질서를 위협한다고 본 응답은 51%였다. 이러한 인식은 개별 사건의 실행자가 좌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뒤에도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다만 여론 변화의 전부를 제방 계획에 귀속시킬 수는 없다. 같은 시기 청평의 공산화, 국제 정세의 긴장, 국내의 실제 좌파 급진화 경향이 함께 작용했다. 부속서도 계획의 기여도를 정량화하지 않았다.

8.2. 입법 [편집]

1960년 반체제활동규제법 개정으로 좌파 단체의 등록과 해산에 관한 요건이 강화되었다. 개정의 직접적 계기는 1959년 우체국 사건이었으며, 법안 심의 과정에서 이 사건이 반복적으로 인용되었다.

개정법은 정치적 목적의 폭력을 표방하거나 그러한 조직과 연계된 단체의 등록을 취소할 수 있도록 했고, 등록이 취소된 단체의 활동을 처벌 대상으로 삼았다. 1961년부터 1968년까지 이 조항으로 등록이 취소된 단체는 34개이며, 이 가운데 실제 폭력 사건과 관련이 확인된 단체는 없었다.

1954년과 1956년 두 차례 부결되었던 유사한 입법이 1960년에는 통과되었다는 점이 계획의 효과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법안의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달라진 것은 여론이었다.

8.3. 선거 [편집]

1968년 선거에서 좌파 정당의 의석은 이전 선거의 절반 이하로 줄었다. 득표율은 1964년 31.2%에서 1968년 22.7%로 하락했으며, 의석 점유율은 더 큰 폭으로 감소했다.

다만 이 결과를 계획의 성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등록 취소로 일부 단체의 선거 활동이 제한되었고, 선거제도의 의석 배분 방식이 소수 정당에 불리했으며, 좌파 내부의 노선 분열로 표가 분산되었다. 세 요인 가운데 첫째는 계획의 결과이나 둘째와 셋째는 그렇지 않다.

1968년 이후 좌파 정당의 득표율은 서서히 회복되어 1974년 24.3%, 1978년 26.1%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의석 점유율이 득표율에 미치지 못하는 구조가 고착되어 있었고, 제도 정치를 통한 갈등 해소의 통로가 좁아진 상태가 검은 10년의 조건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8.4. 노동운동 [편집]

노동조합 조직률은 1958년을 정점으로 1970년까지 하락했다. 주요 공업 도시의 조직률은 이 기간 60%대에서 40%대로 떨어졌다.

하락의 요인은 복합적이다. 계획의 직접적 결과로는 1964년 롱비치 사건 이후 항만 지역의 조합 활동이 위축된 것, 그리고 좌파 단체와 연계된 노조 간부가 등록 취소와 수사의 대상이 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산업 구조의 변화와 고용 형태의 다변화도 함께 작용했다.

계획이 노동운동에 미친 더 큰 영향은 조직률이 아니라 위치였다. 노동조합이 폭력과 연결되어 인식되면서 교섭에서의 사회적 정당성이 약화되었고, 이 인식은 방패가 노조 파괴 용역을 수주해 파업 현장에 개입할 때 그 개입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8.5. 효과의 귀속 문제 [편집]

제방 계획의 효과를 평가할 때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귀속의 범위다. 여론 변화, 입법, 선거 결과, 노동운동의 위축은 모두 계획이 목표로 삼은 것이었고 실제로 발생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계획과 무관한 여러 요인이 같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계획의 효과를 최대로 보는 해석은 여섯 사건이 없었다면 1960년 입법과 1968년 선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최소로 보는 해석은 냉전기 서방 국가 대부분에서 유사한 우경화가 진행되었으며 루이나의 궤적이 특별히 다르지 않다고 본다.

부속서는 이 문제에 대해 판단하지 않았다. 다만 계획의 입안자들이 스스로 효과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기록되어 있다. 1967년 제4과가 작성한 내부 평가는 계획이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이 평가를 근거로 계획의 축소가 검토되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9. 계획의 파탄 [편집]

9.1. 방패의 자립 [편집]

1963년부터 방패는 기업으로부터 노동조합 파괴 용역을 수주하기 시작했다. 제4과는 이를 승인했다. 조직이 자체 수입을 갖는 편이 자금 지원의 흔적을 줄인다는 판단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방패가 특무처에서 독립하는 통로가 되었다.

1965년을 전후해 방패가 설립한 경비 용역 회사가 실제 영업으로 수익을 내기 시작하면서 특무처 자금 없이도 운영이 가능해졌다. 1967년에는 특무처 제5과가 운영하던 아편 반입 경로의 국내 유통 부분을 장악했다. 계획의 자금원이 계획의 실행 조직에게 넘어간 것이다.

자금이 독립하자 표적도 독립했다. 1967년 이후 방패는 제4과의 지정 없이 좌파 인사를 습격하기 시작했고, 1969년에는 대학 교수 1명과 노조 간부 3명이 승인 없이 살해되었다.

9.2. 통제 이탈 [편집]

1969년 방패는 정치 세력화를 시도했다. 스트렐니코프는 조직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의 창당을 준비했고, 현역 군인 회원을 통해 군 내부에 조직을 두었으며, 지부장 일부는 배후를 아는 것이 자신의 보호 수단이라고 판단해 특무처 요원의 신원을 독자적으로 파악했다.

계획의 설계에서 이러한 사태는 상정되지 않았다. 조직이 배후를 모르는 다수와 아는 소수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유출 방지에는 효과적이었으나, 아는 소수가 그 지식을 협상 수단으로 사용할 가능성에는 대비가 없었다. 접촉선을 총재 한 명으로 한정한 구조도 그가 조직을 장악한 뒤에는 오히려 특무처의 통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1969년 12월 톨루즈 지부장이 방패와 정부의 관계를 언론에 제보하려 한다는 첩보가 제4과에 접수되었다. 이 시점에 문제는 좌파의 통제에서 비밀 공작의 노출 방지로 이동했다.

9.3. 회수 작전 [편집]

1970년 2월 국가안보회의는 방패 지도부를 표적으로 지정했다. 특무처 내부에서 이 작전은 회수 작전이라 불렸다.

공개 수사를 통한 처리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방패를 수사하면 조직에 자금과 훈련을 제공한 국가기관까지 조사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같은 해 8월 특무처는 롱비치 항만 창고에서 열린 지도부 회의를 습격해 스트렐니코프를 포함한 9명을 사살했고, 사건은 아편 유통을 둘러싼 범죄조직 간 충돌로 위장되었다.

지도부 제거는 조직을 해체하지 못했다. 14개 지부와 3,200명의 무장 행동대가 남아 있었고, 이들은 특무처가 직접 훈련시킨 인원이었다. 이후 6년간 특무처는 자신이 만든 조직과 교전했으며, 이 충돌이 검은 10년의 첫 국면을 이루었다.

9.4. 계획의 종료 [편집]

제4과는 1970년 폐지되어 제2과에 흡수되었다. 위장 테러는 1968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실행되지 않았으며, 제방 계획은 공식적인 종료 절차 없이 중단되었다.

종료를 결정한 문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계획의 승인이 국가안보회의 의결로 이루어졌으므로 종료도 같은 절차를 거쳐야 했으나 그러한 의결 기록은 없다. 부속서는 계획이 종료된 것이 아니라 실행 조직의 소멸로 인해 사실상 정지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특무처는 1977년 폐지되었고 인력과 기록은 후신 조직으로 이관되었다. 제방 계획의 기록도 이때 함께 이관되었으며, 대통령령 제7712호 제7조에 따라 국가기록관리법상 이관·공개 대상에서 제외되어 현재까지 접근이 불가능하다.

10. 은폐와 규명 [편집]

10.1. 기록 관리 [편집]

제방 계획의 은폐는 사후의 조치가 아니라 설계의 일부였다. 특무처 설치 훈령 제5조는 기록을 국방부 문서고와 분리해 보관하고 처장이 지정하는 자 외에는 열람할 수 없도록 정했으며, 제4과의 지시는 구두로 전달되어 문서로 남지 않았다. 방패에 대한 자금 지급은 경비 용역 회사의 정상 영업 수입으로 처리되었고, 훈련장의 소재는 수료자에게도 고지되지 않았다.

이 구조에서 계획을 입증할 수 있는 물리적 자료는 제4과 자체의 내부 기록뿐이었다. 이 기록은 1977년 특무처 폐지와 함께 후신 조직으로 이관되었고, 대통령령 제7712호 제7조에 따라 이관·공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보존 기한 규정도 적용되지 않으므로 폐기 여부는 후신 조직이 자체적으로 결정하며, 기록이 현재 존재하는지조차 외부에서 확인할 수 없다.

10.2. 1991년 조사위원회 [편집]

1980년 헌정 회복 후 설치된 정보기관 조사위원회는 군정기 국가정보국광역수사국의 국내 사찰을 조사했다. 위원회의 설치 근거상 조사 대상은 정보공동체 등재 기관으로 한정되었으므로, 1977년 이미 폐지된 특무처와 정보공동체에 등재되지 않은 후신 조직은 어느 쪽도 조사 대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위원회는 국방부 법무관실의 진술과 국방부 예산·인사 자료를 근거로 특무처와 제방 계획에 관한 부속서를 작성했다. 미공개 부속서 제3권으로 분류된 이 문건은 위원회 보고서 본문에 반영되지 않았고 공개되지도 않았다.

부속서의 성격에 관해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이 문건은 계획의 전모를 규명한 보고서가 아니라, 접근 가능한 제한된 자료와 진술을 정리한 것이다. 위원회는 계획의 승인 범위, 아르덴역 사건의 표적 지정 계통, 개별 사건의 실행 명령에 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고 명시했다. 이후의 서술에서 부속서가 계획의 실체를 확정한 문건처럼 인용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정확하지 않다.

10.3. 1996년 소송 [편집]

1996년 아르덴역 사건 유족회는 국방부를 상대로 관련 자료의 공개를 청구했다. 국방부는 해당 조직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회신했다.

이 회신의 의미가 소송의 쟁점이 되었다. 기록이 애초에 작성되지 않았다는 뜻인지, 작성되었으나 폐기되었다는 뜻인지, 다른 기관으로 이관되어 국방부가 보유하지 않는다는 뜻인지가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이 가운데 어느 것인지 밝히지 않았고, 국방조직법 제49조 제4항을 근거로 조직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의무가 없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소송 과정에서 1981년 부속서의 존재가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1966년 브뤼네 보고서를 비롯해 당시 수사기관 내부에서 제기되었던 문제 제기의 기록이 확인되었다. 청구는 기각되었으나 이 두 가지 확인은 이후 재심의 계기가 되었다.

10.4. 1998년 재심 [편집]

1998년 아르덴역 사건 재심에서 유죄가 확정되었던 11명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재심 법원은 유죄의 핵심 근거였던 첩보의 출처가 확인되지 않으며, 자백의 임의성을 확인할 수 있는 조사 기록이 불완전하다고 판단했다.

재심 판결이 확인한 것과 확인하지 않은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판결은 기존 피고인들의 유죄를 유지할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을 뿐, 실제 폭발을 지시하거나 실행한 주체를 특정하지 않았다. 판결문에 공화국의 방패나 특무처는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판결은 제방 계획의 존재를 사법적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다.

재심으로 무죄가 확정된 11명 가운데 4명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복역 기간은 최장 26년이었으며, 형사보상은 이루어졌으나 국가의 책임을 전제로 한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0.5. 2004년 이후 [편집]

2004년 유족회가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는 각하되었다. 법원은 원고가 행위 주체를 특정하지 못했다고 판단했으며, 이는 1983년 「하버트 대 국방부」 판결을 선례로 한 것이다. 국방부는 응소했으나 국방조직법 제49조 제4항에 따라 해당 조직의 존재를 확인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부속서의 공개와 관련 기록의 이관 여부 확인을 요구하는 청구가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2011년에는 부속서의 부분 공개를 요구하는 정보공개 청구가 있었으나 국가안보를 이유로 거부되었고, 행정소송에서도 거부 처분이 유지되었다.

현재 제방 계획에 관해 공적으로 확정된 사실은 제한적이다. 아르덴역 사건의 기존 유죄 판결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 1981년 부속서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1966년 수사기관 내부에서 단일 배후 가설이 제기되었다가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계획의 승인 주체, 개별 사건의 지시 계통, 여섯 사건 각각의 실행자에 관해서는 사법적·공적으로 확정된 것이 없다.

10.6. 규명되지 않은 부분 [편집]

가장 큰 공백은 지휘 계통이다. 국가안보회의가 승인한 것이 조직의 육성인지 위장 테러의 실행까지인지, 개별 사건의 표적을 누가 지정했는지, 아르덴역 사건처럼 사망자가 다수 예상되는 표적의 승인이 제4과 내부에서 완결되었는지 상위 계통을 거쳤는지가 모두 확인되지 않았다.

정치적 인지의 범위도 규명되지 않았다. 계획은 네 개 행정부에 걸쳐 지속되었으나 각 대통령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에 관한 자료가 없다. 국방부장관의 인지 범위도 마찬가지다.

수사 방해의 성격도 불분명하다. 국방부를 경유한 첩보 제공이 조직적 방해였는지 통상적인 기관 간 협조였는지, 1966년 브뤼네 보고서의 배제가 지시에 따른 것인지 실무적 판단이었는지가 확인되지 않았다. 관련자 다수가 이미 사망했다.

오르티스의 사망,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살해된 특무처 요원 6명의 사건, 그리고 여섯 사건 각각의 실행에 참여한 행동대원의 신원도 규명되지 않았다.

11. 국제적 맥락 [편집]

11.1. 유사 사례 [편집]

냉전기 여러 국가에서 좌파의 정치적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비공개 안보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북랜드해협조약기구(NLTO) 회원국 다수가 유사시를 대비한 잔류망을 구축했으며, 그 일부가 국내 정치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여러 나라에서 제기되었다.

다만 제방 계획을 이러한 사례와 동일하게 다루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잔류망의 본래 목적은 점령 상황에서의 저항 조직 유지였고, 국내 정치 개입은 그로부터의 일탈로 설명된다. 반면 제방 계획은 처음부터 국내 여론의 형성을 목적으로 입안되었으며, 위장 테러가 부수적 일탈이 아니라 계획의 핵심 수단이었다.

또한 루이나는 냉전기 서방 진영의 주요 국가였으므로 외부의 지시나 지원을 받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계획의 입안과 실행이 전적으로 국내 기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 사례는 종속국의 대리 공작과 성격이 다르다.

11.2. 대외 관여 의혹 [편집]

동맹국 정보기관이 계획을 인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다. 특무처의 국외 활동은 국가정보국과 별도의 계통으로 이루어졌고 동맹국과의 정보 교류 창구는 국가정보국이었으므로, 계획이 정보 교류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반대 방향의 의혹, 즉 루이나가 이 방식을 다른 나라에 전수했는가에 대한 논의가 있다. 북산에서 1960년대에 운용된 반공 민간 조직의 구성 방식이 방패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으며, 당시 북산에 상주하던 루이나 군사고문단의 관여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특무처 제3과가 북산 군부를 상시 감시하고 있었다는 점도 이 의혹의 근거로 인용된다.

이 의혹은 확인되지 않았다. 북산 측 자료가 공개되지 않았고, 루이나 측 자료도 접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직 구성의 유사성만으로는 전수 관계를 입증할 수 없으며, 같은 시기 여러 나라에서 유사한 형태의 반공 민간 조직이 독자적으로 형성되었다는 반론도 있다.

12. 평가 [편집]

12.1. 목표를 둘러싼 논쟁 [편집]

제방 계획의 목표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대립한다.

첫째는 체제 보전론이다. 계획의 목표는 기존 헌정 질서 안에서 좌파의 정치적 기반을 축소하는 것이었으며, 헌정 중단이나 권위주의 체제의 수립은 목표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근거는 계획이 선거와 입법이라는 제도적 경로를 통해 효과를 거두려 했다는 점, 그리고 실제로 1960년 입법과 1968년 선거를 목표 달성의 지표로 삼았다는 점이다. 1972년 결성된 질서회복단이 의회 정치 자체의 붕괴를 목표로 삼았던 것과 대비된다.

둘째는 비상사태 조성론이다. 여섯 사건 가운데 아르덴역 사건의 성격이 앞선 사건들과 뚜렷이 다르다는 점, 즉 표적이 불특정 다수이고 시각이 인원이 가장 많은 때로 지정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점에 계획의 목표가 여론 형성을 넘어 국가 비상조치를 정당화할 수준의 충격으로 이동했다는 해석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아르덴역 사건은 계획의 정점이 아니라 계획의 성격 변화를 보여주는 사건이 된다.

부속서가 아르덴역 사건의 표적 지정 계통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논쟁은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다만 사건 이후 실제로 비상조치가 취해지지 않았고 계획이 두 해 뒤 사실상 정지했다는 점은 첫째 해석에 유리한 정황으로 인용된다.

12.2. 인과의 범위 [편집]

제방 계획이 검은 10년의 원인이라는 서술은 널리 받아들여지나, 인과의 범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계획의 인과를 넓게 보는 해석은 세 갈래의 폭력이 모두 계획으로 소급된다고 본다. 방패는 계획이 만든 조직이고, 혁명적 노동자동맹의 무장화는 계획이 만든 오심의 결과이며, 성 니콜라 형제단은 계획의 자금원이 남긴 유통망을 물려받아 성장했다는 것이다.

좁게 보는 해석은 규모의 불균형을 지적한다. 위장 테러는 여섯 건이었고 사망자는 32명이었으며 누명을 쓴 인원은 11명이었다. 이 규모가 10년간 835명이 사망한 폭력의 원인이라기에는 작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재편된 혁명적 노동자동맹의 대원 다수가 원 동맹과 무관한 신규 인원이었다는 점, 프롤레타리아 행동대의 대원 다수가 정치적 동기 없는 일반 수형자였고 아르덴역 수형자 본인들은 조직을 거부했다는 점, 10월 전선은 계획과 무관하게 파병 반대 운동에서 출현했다는 점이 제시된다.

양쪽을 조정하는 입장은 사건의 장기적 영향이 사상자 수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계획이 남긴 것은 사건 그 자체보다 국가가 사건을 만들어 사람을 가둘 수 있다는 사실이었고, 이 사실이 제도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는 방식은 규모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 입장에서도 계획이 이후 모든 폭력의 충분조건이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12.3. 책임의 소재 [편집]

제방 계획과 관련하여 형사 책임이 인정된 사람은 현재까지 없다. 관련자 다수가 사망했고, 계획의 지휘 계통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관련 기록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임의 소재를 검토할 때 구분해야 할 층위는 넷이다. 계획을 승인한 정치적 책임, 계획을 입안하고 집행한 기관의 책임, 개별 사건을 실행한 자의 책임, 그리고 수사를 유도하거나 그 유도를 인지하고도 방치한 책임이다. 이 가운데 마지막 층위는 국방부와 법무부의 여러 기관에 걸쳐 있으며, 각 기관이 어느 범위까지 알고 있었는지가 확인되지 않았다.

한편 방패의 일반 회원 4만여 명은 조직이 국가 기관의 도구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들 대부분은 합법 단체에 가입해 회비를 내고 집회에 참석했으며, 상당수는 위장 테러의 존재조차 몰랐다. 계획의 설계가 애초에 이러한 다수를 전제로 한 것이었으므로, 이들의 지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별도의 문제로 남아 있다. 조직 자체가 공식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은 적이 없으므로 어떤 법적·행정적 정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12.4. 제도적 귀결 [편집]

제방 계획이 제도에 남긴 직접적 귀결은 1981년 정보기관 감독 제도의 도입이다. 조사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의회 정보위원회의 감독 권한과 정보감찰관 제도가 마련되었고, 이는 국가의 안보 활동도 검증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감독은 정보공동체 등재 기관에만 미친다. 제방 계획을 실행한 특무처는 등재된 적이 없었고, 그 후신 조직도 등재되어 있지 않다. 계획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 즉 어떤 법률에도 이름이 기재되지 않고 어떤 감독도 받지 않는 조직이 존재할 수 있다는 조건은 제거되지 않았다.

이 점은 제방 계획에 대한 평가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된다. 계획의 결과로 감독 제도가 만들어졌으나, 그 감독은 계획을 실행한 종류의 조직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1977년 신설된 국방조직법 제49조는 오히려 그러한 조직의 존재를 법률로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작용했으며, 같은 조 제5항은 국가정보기관의 감독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명시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13. 관련 문서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