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는 사랜드 공화국 문서 참고.
1. 개요 [편집]
시기 | 기간 |
임시정부 | 1917.3~1920.7 |
의회 공화정 | 1920.7~1934.5 |
군부 정권 | 1934.5~1944.10 |
과도정부 | 1944.10~1949.10 |
공화국의 32년은 1918년 해방 포고가 남긴 하나의 문제, 곧 '물은 마을에, 땅은 지주에'라는 반쪽 해방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를 둘러싼 역사였다. 의회는 이 문제를 법률로 풀지 못했고, 군부는 이를 힘으로 덮었으며, 결국 내전이 총으로 끝냈다.
2. 장미 혁명과 임시정부 (1917~1920) [편집]
2.1. 장미 혁명 [편집]
2.2. 이중 권력 [편집]
혁명 직후 인터그라드에는 두 개의 권력이 들어섰다. 하나는 1913년 해산된 사보르 하원의 공화파·자유주의 의원들이 세운 임시정부로, 공화파의 밀란 S. 보이노비치가 수반을 맡았다. 다른 하나는 공장과 수비대에서 뽑힌 대표들로 이루어진 '인터그라드 노동자·병사 평의회'였다. 평의회는 임시정부를 인정하면서도 군의 명령은 평의회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고 선언했고, 1917년 한 해 동안 두 권력은 전쟁과 토지 문제를 두고 끊임없이 부딪혔다. 훗날 사비에트라는 국호에 '평의회'를 뜻하는 소비에트가 들어간 것은,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가 이 1917년의 평의회를 자신의 기원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1917년 4월 흰 세로띠와 하늘색·붉은색 가로띠의 새 국기를 내걸었고, 정치범을 석방했으며, 사회당을 합법화했다. 러시아 혁명 운동에 몸담았던 사랜드 혁명가들이 이 무렵 줄지어 귀국했는데, 1917년 5월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풀려나 돌아온 이오시프 노스탈린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임시정부는 1917년 4월 흰 세로띠와 하늘색·붉은색 가로띠의 새 국기를 내걸었고, 정치범을 석방했으며, 사회당을 합법화했다. 러시아 혁명 운동에 몸담았던 사랜드 혁명가들이 이 무렵 줄지어 귀국했는데, 1917년 5월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풀려나 돌아온 이오시프 노스탈린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2.3. 전쟁의 계속 [편집]
임시정부는 협상국과의 약속을 지켜 제1차 세계 대전을 계속하기로 했다. 1917년 7월 임시정부는 서부 전선에서 라 마베라를 상대로 '자유의 공세'를 벌였는데, 혁명으로 자유를 얻은 병사들이 더 잘 싸울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공세는 열흘 만에 무너졌다. 공세의 실패 뒤 탈영병이 급증했고, 평의회와 사회당 좌파는 즉시 강화를 요구했다.
1918년 11월 동맹국의 패배로 라 마베라가 휴전을 청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사랜드는 형식상 승전국이 되었지만, 수백만의 인명과 경제를 대가로 치른 승리는 새 정부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서부 전쟁에서 잃은 벨라 강 서안도 되찾지 못했다.
1918년 11월 동맹국의 패배로 라 마베라가 휴전을 청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사랜드는 형식상 승전국이 되었지만, 수백만의 인명과 경제를 대가로 치른 승리는 새 정부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서부 전쟁에서 잃은 벨라 강 서안도 되찾지 못했다.
2.4. 해방 포고 (1918) [편집]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임시정부는 농노제를 더 미룰 수 없었다. 1917년 여름부터 평원 곳곳에서 농노들이 영주의 부역을 거부했고, 전선에서 탈영한 병사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영주의 저택을 습격했다. 1918년 4월 22일 임시정부는 해방 포고를 발표했다.
해방 포고는 세 가지를 담았다. 첫째, 모든 농노를 조건 없이 해방하고 영주의 재판·경찰·징세권을 폐지했다. 둘째, 21세 이상 남녀의 보통선거를 선포했다. 셋째, 영주가 쥐고 있던 수문과 수로를 마을의 수문 공동체에 넘겨주었다. 수리권을 마을에 준 것은 혁명의 열기 속에서 농민들이 이미 수문을 점거하고 있던 현실을 추인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포고는 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토지 문제는 제헌의회가 결정한다는 한 줄이 전부였다.
4월 22일은 이후 '수문의 날'로 불렸고, 마을마다 수문을 열고 축제를 벌이는 공휴일이 되었다.
해방 포고는 세 가지를 담았다. 첫째, 모든 농노를 조건 없이 해방하고 영주의 재판·경찰·징세권을 폐지했다. 둘째, 21세 이상 남녀의 보통선거를 선포했다. 셋째, 영주가 쥐고 있던 수문과 수로를 마을의 수문 공동체에 넘겨주었다. 수리권을 마을에 준 것은 혁명의 열기 속에서 농민들이 이미 수문을 점거하고 있던 현실을 추인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포고는 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토지 문제는 제헌의회가 결정한다는 한 줄이 전부였다.
4월 22일은 이후 '수문의 날'로 불렸고, 마을마다 수문을 열고 축제를 벌이는 공휴일이 되었다.
2.5. 영지 점거와 진압 (1918~1919) [편집]
해방 포고가 땅을 나누지 않자, 전선에서 돌아온 병사들과 땅을 요구하는 농민들은 스스로 영지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1918년 가을부터 1919년 봄까지 평원 중부와 남부에서 수천 개의 영지가 점거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점거한 땅을 마을 단위로 나누어 갖기도 했다. 평원은 무정부 상태에 가까워졌다.
1919년 봄 임시정부는 군을 동원해 점거를 해산했다. 보이노비치는 '땅은 법으로 나누어야지 총으로 나눌 수 없다'고 했지만, 군이 마을을 포위하고 점거 지도자들을 체포하는 장면은 농민들에게 제정의 진압과 다를 바 없었다. 토지 개혁은 제헌의회로 미뤄졌고, 이 결정은 이후 30년 동안 공화국을 짓누른 토지 문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1919년 봄 임시정부는 군을 동원해 점거를 해산했다. 보이노비치는 '땅은 법으로 나누어야지 총으로 나눌 수 없다'고 했지만, 군이 마을을 포위하고 점거 지도자들을 체포하는 장면은 농민들에게 제정의 진압과 다를 바 없었다. 토지 개혁은 제헌의회로 미뤄졌고, 이 결정은 이후 30년 동안 공화국을 짓누른 토지 문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2.6. 제헌의회와 1920년 헌법 [편집]
1919년 임시정부는 철자 개정으로 사랜드어의 새 표기법을 확정하고, 청평 남부의 푹하이 조차지와 콘스탄티노폴 조계를 반환했다. 1920년 2월 제헌의회 선거가 치러졌는데, 공화민주당이 118석으로 제1당이 되었지만 국민보수당 104석, 농민당 86석, 사회당 61석으로 어느 정당도 과반을 얻지 못했다.
제헌의회는 1920년 6월 헌법을 공포했다. 헌법은 바이마르식 이원집정부제와 양원제 의회, 단일 국가 원칙을 채택했지만, 지주 출신 의원들의 반대로 토지 조항은 '법률로 정한다'는 한 줄로 남았다. 1920년 7월 첫 대통령 선거에서 보이노비치가 당선되면서 사랜드 공화국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제헌의회는 1920년 6월 헌법을 공포했다. 헌법은 바이마르식 이원집정부제와 양원제 의회, 단일 국가 원칙을 채택했지만, 지주 출신 의원들의 반대로 토지 조항은 '법률로 정한다'는 한 줄로 남았다. 1920년 7월 첫 대통령 선거에서 보이노비치가 당선되면서 사랜드 공화국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3. 의회 공화정 (1920~1934) [편집]
3.1. 보이노비치 시대 (1920~1927) [편집]
보이노비치의 7년은 연립 내각의 잦은 교체로 시작되었다. 첫 총리인 공화민주당의 두샨 P. 랄레비치는 공화민주당과 농민당의 연립 내각을 이끌었지만, 토지 법안을 두고 두 당이 갈라서며 1년 반 만에 물러났다. 1921년 사회당 급진파가 떨어져 나가 사랜드 공산당을 창당했고, 1922년 노스탈린이 서기장에 올랐다.
1921년 행정구역법은 제정의 총독부를 폐지하고 고원과 카스탄 산지를 일반 현으로 나누었다. 고원의 이슬람 법정과 부족 원로 회의도 폐지되자,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아바나를 비롯한 고원 곳곳에서 시위와 납세 거부가 이어졌고 공화국은 이를 군대로 진압했다. 1923년에는 수도를 인터그라드에서 크라슬리스크로 옮겼다.
평원에서는 물과 땅의 싸움이 이어졌다. 수문을 쥔 마을들은 소작 조건이 나쁜 지주의 땅으로 가는 수문을 닫는 '물 파업'을 벌였고, 지주들은 소작농을 쫓아내고 땅을 놀리는 '땅 봉쇄'로 맞섰다. 1921년부터 1926년까지 내무부가 집계한 물 파업만 2,300건이 넘었다. 지주들은 루이나에서 들여온 디젤 양수기로 자기 땅에 우물을 파기 시작했고, '양수기 지주'는 1920년대 평원의 새로운 풍경이 되었다.
1924년 선거에서 사회당이 88석으로 약진하자, 사회당의 토도르 K. 파블로비치가 농민당과 손잡고 사랜드 최초의 좌파 내각을 세웠다. 파블로비치 내각은 일정 규모 이상의 지주 땅을 유상으로 사들여 소작농에게 나누는 토지 개혁법을 국민의회에서 통과시켰지만, 1925년 3월 지주와 옛 관료가 장악한 원로원이 이를 부결했다. 국민의회가 재의결에 필요한 3분의 2를 모으지 못하면서 법안은 폐기되었고, 파블로비치 내각도 그해 12월 무너졌다. 이것이 공화국이 토지 개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이었다.
1921년 행정구역법은 제정의 총독부를 폐지하고 고원과 카스탄 산지를 일반 현으로 나누었다. 고원의 이슬람 법정과 부족 원로 회의도 폐지되자,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아바나를 비롯한 고원 곳곳에서 시위와 납세 거부가 이어졌고 공화국은 이를 군대로 진압했다. 1923년에는 수도를 인터그라드에서 크라슬리스크로 옮겼다.
평원에서는 물과 땅의 싸움이 이어졌다. 수문을 쥔 마을들은 소작 조건이 나쁜 지주의 땅으로 가는 수문을 닫는 '물 파업'을 벌였고, 지주들은 소작농을 쫓아내고 땅을 놀리는 '땅 봉쇄'로 맞섰다. 1921년부터 1926년까지 내무부가 집계한 물 파업만 2,300건이 넘었다. 지주들은 루이나에서 들여온 디젤 양수기로 자기 땅에 우물을 파기 시작했고, '양수기 지주'는 1920년대 평원의 새로운 풍경이 되었다.
1924년 선거에서 사회당이 88석으로 약진하자, 사회당의 토도르 K. 파블로비치가 농민당과 손잡고 사랜드 최초의 좌파 내각을 세웠다. 파블로비치 내각은 일정 규모 이상의 지주 땅을 유상으로 사들여 소작농에게 나누는 토지 개혁법을 국민의회에서 통과시켰지만, 1925년 3월 지주와 옛 관료가 장악한 원로원이 이를 부결했다. 국민의회가 재의결에 필요한 3분의 2를 모으지 못하면서 법안은 폐기되었고, 파블로비치 내각도 그해 12월 무너졌다. 이것이 공화국이 토지 개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이었다.
3.2. 짧은 호황 (1925~1929) [편집]
1925년 루이나와 맺은 채무 조정 협정으로 제정 채무의 상환 기간이 늘어나자, 루이나 자본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터그라드의 방직공장이 늘고 평원의 양수기 사업이 활기를 띠면서, 1928년 공업 생산은 1913년의 132%에 이르렀다. 크라슬리스크에는 모더니즘 양식의 정부 청사 지구가 들어섰고, 도시에는 영화관과 카페, 재즈 클럽이 넘쳐났다. 1920년대 후반은 공화국의 아방가르드 문화가 절정에 이른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호황은 도시의 것이었다. 소작농의 처지는 거의 나아지지 않았고, 양수기 지주들이 지하수를 퍼 올리면서 일부 마을의 우물이 말랐다. 192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국민보수당의 지원을 받은 니콜라 T. 스타노예비치가 재선에 도전한 보이노비치를 꺾었다.
그러나 호황은 도시의 것이었다. 소작농의 처지는 거의 나아지지 않았고, 양수기 지주들이 지하수를 퍼 올리면서 일부 마을의 우물이 말랐다. 192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국민보수당의 지원을 받은 니콜라 T. 스타노예비치가 재선에 도전한 보이노비치를 꺾었다.
3.3. 대공황 (1929~1932) [편집]
1929년 대공황은 수출에 기대던 공화국 경제를 무너뜨렸다. 곡물 가격이 폭락해 1932년에는 1928년의 38%로 떨어졌고, 소작료를 낼 수 없게 된 소작농들이 땅을 잃었다. 공장은 문을 닫았으며, 1931년 인터그라드와 크라슬리스크의 실업률은 30%를 넘었다.
1931년 1월 총리가 된 국민보수당의 스테판 R. 일리치는 긴축 예산으로 위기에 맞섰지만, 공무원 봉급과 실업 수당을 깎은 긴축은 도시의 분노를 키웠다. 1932년 평원 곳곳에서 소작 폭동이 일어나 지주의 양수기와 창고가 불탔고, 크라슬리스크 공업 지대에서는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했다. 같은 해 7월 공화국은 제정 채무의 상환을 일방적으로 유예했다.
1932년 선거는 공화국 정치의 붕괴를 보여 주었다. 공산당이 61석으로 크게 늘었고, 퇴역 장교들의 극우 운동인 재건 전선이 38석으로 처음 의회에 들어왔다. 중도의 공화민주당은 41석으로 무너졌다. 어떤 연립으로도 과반을 만들 수 없게 되자, 스타노예비치 대통령은 헌법 제52조의 긴급명령으로 예산을 집행하고 의회의 신임과 관계없이 총리를 임명하는 '대통령 내각'을 시작했다.
1931년 1월 총리가 된 국민보수당의 스테판 R. 일리치는 긴축 예산으로 위기에 맞섰지만, 공무원 봉급과 실업 수당을 깎은 긴축은 도시의 분노를 키웠다. 1932년 평원 곳곳에서 소작 폭동이 일어나 지주의 양수기와 창고가 불탔고, 크라슬리스크 공업 지대에서는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했다. 같은 해 7월 공화국은 제정 채무의 상환을 일방적으로 유예했다.
1932년 선거는 공화국 정치의 붕괴를 보여 주었다. 공산당이 61석으로 크게 늘었고, 퇴역 장교들의 극우 운동인 재건 전선이 38석으로 처음 의회에 들어왔다. 중도의 공화민주당은 41석으로 무너졌다. 어떤 연립으로도 과반을 만들 수 없게 되자, 스타노예비치 대통령은 헌법 제52조의 긴급명령으로 예산을 집행하고 의회의 신임과 관계없이 총리를 임명하는 '대통령 내각'을 시작했다.
3.4. 마지막 2년 (1932~1934) [편집]
1932년부터 1934년까지 대통령 내각 아래에서 공화국은 사실상 의회 없이 통치되었다. 거리에서는 공산당의 노동자 자위대와 재건 전선의 퇴역 장교 행동대가 충돌했고, 1933년 한 해에만 정치 폭력으로 400명 넘게 죽었다. 지주와 기업가, 장교단 사이에서는 의회 정치가 혁명을 막지 못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1934년 5월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공산당과 사회당이 공동 후보를 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5월 9일 새벽, 육군 참모차장 드라고슬라프 M. 페트코비치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크라슬리스크의 정부 청사와 국민의회, 방송국을 점령했다.
1934년 5월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공산당과 사회당이 공동 후보를 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5월 9일 새벽, 육군 참모차장 드라고슬라프 M. 페트코비치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크라슬리스크의 정부 청사와 국민의회, 방송국을 점령했다.
4. 군부 정권 (1934~1944) [편집]
상세 내용은 국가재건위원회 문서 참고.
4.1. 쿠데타 [편집]
1934년 5월 9일 쿠데타는 하루 만에 끝났다. 페트코비치는 라디오 연설에서 '공화국을 공산주의로부터 구하기 위한 국가 재건'을 선언하고 국가재건위원회를 세웠다. 위원회는 의회를 해산하고 1920년 헌법의 효력을 '정지'했지만, 헌법을 폐지하지는 않았다. 임기 만료를 앞둔 스타노예비치 대통령은 위원회의 요구에 따라 자리를 지키며 위원회의 포고에 서명했고, 대통령 선거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쿠데타 직후 위원회는 공산당과 사회당을 불법화하고 노동조합을 해산했다. 수천 명의 활동가가 고원의 볼라 수용소를 비롯한 수용소로 보내졌고, 노스탈린은 체포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했다.
쿠데타 직후 위원회는 공산당과 사회당을 불법화하고 노동조합을 해산했다. 수천 명의 활동가가 고원의 볼라 수용소를 비롯한 수용소로 보내졌고, 노스탈린은 체포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했다.
4.2. 국가 재건 [편집]
위원회는 이탈리아의 조합주의를 본떠 1935년 직능조합법으로 노사를 일곱 개의 국가 지정 직능 조합에 묶었다. 공공사업과 군비 확장으로 실업을 흡수했으며, 1937년에는 스베틀라 댐 공사를 시작했다. 지주의 땅은 그대로 두었고, 소작료 인하는 약속에 그쳤다. 1936년 수리관리법은 수문 공동체의 수문을 국가 수리청 관리로 옮겼는데, 수리청은 지주의 땅에 물을 우선 배분했다. 1918년 해방 포고의 유일한 실질적 성과였던 마을의 수리권이 이렇게 사라졌다.
위원회는 국기에서 붉은 띠를 지우고, 국장과 국가를 바꾸었다. 1935년 출판법은 카스탄어 출판을 금지했으며, 동남부 산지의 카스탄족 저항은 군대로 진압되었다. 산지로 숨어든 공산당 활동가와 카스탄 저항 세력은 이 무렵부터 손을 잡기 시작했다.
위원회는 국기에서 붉은 띠를 지우고, 국장과 국가를 바꾸었다. 1935년 출판법은 카스탄어 출판을 금지했으며, 동남부 산지의 카스탄족 저항은 군대로 진압되었다. 산지로 숨어든 공산당 활동가와 카스탄 저항 세력은 이 무렵부터 손을 잡기 시작했다.
4.3. 추축국 가담 [편집]
반공을 국시로 내건 위원회는 1930년대 후반 독일·이탈리아와 가까워졌다. 1937년 반코민테른 협정에 가입했고, 1938년 독일과 곡물·광물을 무기와 교환하는 청산 협정을 맺었다. 같은 해 스타노예비치 대통령이 죽자 위원회는 은퇴한 판사 고이코 R. 바소비치를 후임 대통령으로 지명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뒤 한동안 중립을 지키던 위원회는 1941년 3월 3국 동맹 조약에 가입했다.
4.4. 제2차 세계 대전 [편집]
1941년 6월 사랜드군은 벨라 강을 건너 라 마베라를 침공했다. 위원회는 이를 1856년 서부 전쟁에서 잃은 땅을 되찾는 '실지 회복 전쟁'이라 불렀다. 초기 공세는 벨라 강 서안을 넘어 라 마베라 깊숙이 들어갔지만, 1942년 봄 루이나 원정군이 서부 전선에 도착하면서 멈추었다.
참전 직후 사랜드 공산당은 무장 조직인 인민군을 결성했고, 1941년 가을 노스탈린이 비밀리에 귀국해 동남부 카스탄 산지에서 인민군을 이끌었다. 인민군은 고원 가장자리와 동남부 산지에 해방구를 세우고 추축국의 철도와 보급로를 공격했으며, 해방구에서는 지주의 땅을 몰수해 소작농에게 나누어 주었다. 평원의 곡물과 광물이 추축국의 전쟁 물자로 실려 나가는 동안, 해방구는 '땅은 경작하는 자에게'라는 구호와 함께 넓어졌다.
1943년 9월 루이나·라 마베라 연합군이 벨라 강을 건너 반격하면서 사랜드는 전장이 되었다. 1944년 여름까지 연합군은 인크론슈타트를 비롯한 평원 서부를 장악했고, 인민군 해방구는 평원 쪽으로 넓어졌다.
참전 직후 사랜드 공산당은 무장 조직인 인민군을 결성했고, 1941년 가을 노스탈린이 비밀리에 귀국해 동남부 카스탄 산지에서 인민군을 이끌었다. 인민군은 고원 가장자리와 동남부 산지에 해방구를 세우고 추축국의 철도와 보급로를 공격했으며, 해방구에서는 지주의 땅을 몰수해 소작농에게 나누어 주었다. 평원의 곡물과 광물이 추축국의 전쟁 물자로 실려 나가는 동안, 해방구는 '땅은 경작하는 자에게'라는 구호와 함께 넓어졌다.
1943년 9월 루이나·라 마베라 연합군이 벨라 강을 건너 반격하면서 사랜드는 전장이 되었다. 1944년 여름까지 연합군은 인크론슈타트를 비롯한 평원 서부를 장악했고, 인민군 해방구는 평원 쪽으로 넓어졌다.
4.5. 1944년 10월 정변 [편집]
1944년 10월 17일 군부 온건파 장군 오그녠 D. 라스토비치가 크라슬리스크에서 페트코비치를 체포하고 연합국과 휴전 교섭에 나섰다. 바소비치 대통령은 사임했고 국가재건위원회는 해체되었다. 그러나 정변은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 평원 남부에 남은 추축국군과 친페트코비치 부대는 정변을 인정하지 않았고, 동남부와 고원 가장자리는 인민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1944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국토는 과도 군부, 친페트코비치 세력, 인민군의 세 갈래로 찢겼다.
1945년 5월 휴전이 발효되었을 때 평원의 도시와 철도는 대부분 파괴되어 있었다. 전쟁 사망자는 군인 약 120만 명과 민간인 약 180만 명을 합쳐 약 300만 명으로 추산된다.
1945년 5월 휴전이 발효되었을 때 평원의 도시와 철도는 대부분 파괴되어 있었다. 전쟁 사망자는 군인 약 120만 명과 민간인 약 180만 명을 합쳐 약 300만 명으로 추산된다.
5. 과도정부 (1945~1949) [편집]
5.1. 연합국 관리위원회 [편집]
휴전 뒤 사랜드는 루이나를 비롯한 연합국의 관리위원회 감독 아래 놓였다. 관리위원회는 1920년 헌법에 따른 과도정부의 구성을 요구했고, 1945년 6월 국민보수당의 원로 정치인 스테판 R. 일리치가 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과도정부를 세웠다. 일리치는 1931년 긴축 내각을 이끈 전 총리로, 군부 정권 시기에는 공직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연합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5.2. 일리치의 과도정부 [편집]
과도정부는 1920년 헌법과 공화국의 국기·국장·국가를 되살렸다. 1945년 가을부터 전범 재판이 열려 페트코비치와 국가재건위원회 위원 4명이 사형을 선고받았고, 페트코비치는 1946년 1월 처형되었다. 그러나 전범 처벌은 소수 지도부에 그쳤고, 행정과 군의 요직은 여전히 군부 정권 시절의 관료와 장교들이 차지했다. 1944년 정변을 이끈 라스토비치는 과도정부의 국방장관이 되었다.
5.3. 해방구 문제 [편집]
과도정부가 마주한 가장 큰 문제는 인민군의 해방구였다. 인민군은 전쟁 동안 수십만 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해방구에서 이미 지주의 땅을 몰수해 소작농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과도정부는 인민군의 무장 해제와 해방구 토지의 원소유자 반환을 요구했고, 노스탈린은 둘 다 거부했다. 1945년 겨울부터 평원 곳곳에서 땅을 되찾으려는 지주의 사병과 땅을 지키려는 농민 무장대가 충돌했다.
5.4. 1946년 3월 총선 [편집]
1946년 3월 과도정부는 국민의회 총선을 실시했다. 인민군 해방구는 선거에서 제외되었고, 선거 기간 내내 투표함 바꿔치기와 유권자 협박이 횡행했다. 국민보수당을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 측 '국민 연합'이 400석 가운데 268석을 얻어 압승했지만, 선거의 정당성을 인정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통령 선거는 치안을 이유로 다시 연기되었다.
5.5. 붉은 혁명 [편집]
상세 내용은 붉은 혁명 문서 참고.
1946년 4월 12일 인민군은 과도정부를 '파시스트 잔당의 정권'으로 규정하고 총공세에 나섰다. 내전 초기에는 과도정부군이 병력과 중화기의 우위로 인민군을 산지로 밀어냈지만, 과도정부군은 도시와 철도만 지켰을 뿐 농촌을 장악하지 못했다. 땅을 약속하는 인민군 쪽으로 징집병들이 대거 탈영했고, 1947년 4월 띠엔화 협정으로 동사랜드가 인민군의 후방 기지가 되었다. 연합국은 추축국 편에서 싸운 군부 출신이 주축인 과도정부를 돕지 않았다.
1948년 인민군은 평원의 곡창 지대를 장악했고, 1949년 봄 수도 크라슬리스크가 함락되었다. 과도정부는 옛 제정의 수도 인터그라드로 물러났으나, 8월 3주간의 포위 끝에 인터그라드도 함락되었다. 일리치와 라스토비치를 비롯한 과도정부 지도부는 해외로 망명했다. 1949년 10월 7일 노스탈린은 크라슬리스크에서 사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수립을 선포했고, 사랜드 공화국은 32년 만에 막을 내렸다.
6. 역사 인식 [편집]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공화국을 '미완의 혁명' 시기로 규정한다. 노스탈린의 이론에 따르면 장미 혁명은 차르를 몰아냈지만 지주의 땅을 건드리지 못한 부르주아 혁명이었고, 공화국은 지주와 자본가와 장교들이 혁명을 가로챈 시대였다. 1918년 해방 포고가 수문을 마을에 넘겨준 일조차, 공식 역사에서는 땅을 주지 않기 위해 물을 내준 지주들의 술책으로 서술되었다.
반면 1949년 해외로 빠져나간 망명자들에게 공화국은 '잃어버린 사랜드'였다. 망명자 사회는 1920년대를 사랜드가 처음으로 누린 자유와 민주주의의 시대로 기억했고, 공화국의 삼색기는 수십 년 동안 망명자 사회의 상징이었다. 다만 망명자 사회의 주축이 국민보수당과 군부 출신이었던 탓에, 이들의 기억 속에서 토지 문제와 군부 정권은 흔히 지워졌다.
1990년대 재편기 이후 사비에트 학계에서는 두 서술을 모두 넘어서려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1918년 수문 공동체 이양과 1936년 수리관리법에 주목해, 공화국의 실패를 의회 정치의 무능이 아니라 '물과 땅이 나뉜 해방'이라는 구조의 문제로 보는 연구가 주목받는다. 1924~1925년 파블로비치 내각의 토지 개혁법이 원로원에서 부결되지 않았다면 공화국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반면 1949년 해외로 빠져나간 망명자들에게 공화국은 '잃어버린 사랜드'였다. 망명자 사회는 1920년대를 사랜드가 처음으로 누린 자유와 민주주의의 시대로 기억했고, 공화국의 삼색기는 수십 년 동안 망명자 사회의 상징이었다. 다만 망명자 사회의 주축이 국민보수당과 군부 출신이었던 탓에, 이들의 기억 속에서 토지 문제와 군부 정권은 흔히 지워졌다.
1990년대 재편기 이후 사비에트 학계에서는 두 서술을 모두 넘어서려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1918년 수문 공동체 이양과 1936년 수리관리법에 주목해, 공화국의 실패를 의회 정치의 무능이 아니라 '물과 땅이 나뉜 해방'이라는 구조의 문제로 보는 연구가 주목받는다. 1924~1925년 파블로비치 내각의 토지 개혁법이 원로원에서 부결되지 않았다면 공화국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