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분류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루이나/역사

1. 개요2. 중세: 수도원과 두 개의 언어
2.1. 수도원의 학문2.2. 빌베른 유학과 보편 논쟁2.3. 벨포르 대학의 설립
3. 근세 초: 인쇄와 인문주의
3.1. 인쇄술의 도입3.2. 인문주의자들
4. 17세기: 팸플릿과 학회
4.1. 내전과 팸플릿의 폭발4.2. 홉스와 대학4.3. 왕립 자연철학회
5. 18세기: 계몽의 공론장
5.1. 출판 허가제의 폐지5.2. 비국교도 학원5.3. 살롱과 커피하우스5.4. 대사전 편찬5.5. 증언의 정치
6. 19세기: 언어, 대학, 대중
6.1. 루이나어의 표준화6.2. 대학 개혁6.3. 루이나 인문예술대학6.4. 제국과 지식6.5. 노동자의 학교와 대중 신문6.6. 공화국의 대학
7. 20세기 전반: 망명자와 전문가
7.1. 망명 지식인7.2. 노동 언론과 노동자 교육7.3. 벨포르 학파7.4. 전문가 국가7.5. 전쟁과 과학
8. 냉전기: 국가와 지식
8.1. 과학의 국가 동원8.2. 충성 심사8.3. 감시받는 언론8.4. 대학의 팽창과 학생운동8.5. 전쟁과 기자8.6. 검은 10년과 지식인8.7. 군정과 지식
9. 민주화 이후: 진실의 제도화
9.1. 지식인의 책임 논쟁9.2. 통제와 해방9.3. 기록과 증언9.4. 탐사 저널리즘
10. 현대
10.1. 대학과 입시10.2. 지식의 기밀화10.3. 공론장의 재편
11. 주요 기관

1. 개요 [편집]

루이나의 지성사를 다루는 문서. 지식이 만들어지고 퍼지는 제도(대학·학회·출판·언론·도서관·검열)의 변화와, 각 시대 지식인 집단과 그들이 벌인 논쟁을 함께 서술한다. 개별 철학자의 학설은 루이나/역사/철학사, 과학기술의 발전은 루이나/과학 기술 문서에서 다룬다.

루이나 지성사의 첫째 특징은 오랫동안 학문의 언어와 생활의 언어가 달랐다는 점이다. 중세에는 라틴어와 빌베른어가 학문을, 루이나어가 생활을 맡았다. 루이나어가 학문의 언어가 된 것은 17세기였고, 20세기에는 러시아 망명자들과 함께 키릴 문자가 들어와 루이나어는 두 가지 문자로 쓰이게 되었다.

둘째 특징은 지식의 제도가 거의 언제나 국가와 긴장 관계에 있었다는 점이다. 중세의 단죄, 근세의 출판 허가제, 냉전기의 충성 심사와 언론인 사찰, 군정의 언론 통폐합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지식인들은 비국교도 학원, 지하 출판, 망명 매체, 탐사 저널리즘 같은 우회로를 만들어 냈다.

셋째 특징은 국방이 연구를 이끈 나라라는 점이다. 근세의 조선과 항해술에서 냉전기의 핵과 우주 개발까지 루이나의 최상급 연구는 대부분 국가 안보와 맞물려 성장했다. 그래서 학문의 자유와 기밀 연구 사이의 경계는 루이나 대학사의 가장 오래된 쟁점이 되었다.

2. 중세: 수도원과 두 개의 언어 [편집]

2.1. 수도원의 학문 [편집]

빌베른 지배기 루이나의 학문은 수도원과 대성당 학교에 모여 있었다. 수도원 필사실은 성서와 교부 문헌, 라틴 고전을 베끼고 보존하는 곳이자 루이나 땅에서 유일하게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학문의 언어는 라틴어였고, 행정과 상층 사회의 언어는 빌베른어였다.

9세기 수도사 브렌단 마크 콜이 엮은 라틴어-루이나어 대역 용어집 『두 혀의 책』은 이 시기 루이나 학문의 처지를 보여 주는 자료다. 철학 용어의 상당수가 옮길 말을 찾지 못해 빈칸으로 남은 이 책은, 루이나어가 아직 학문을 담을 그릇이 아니었다는 증거이자 그 그릇을 만들려는 첫 시도로 평가된다.

2.2. 빌베른 유학과 보편 논쟁 [편집]

12세기 이후 루이나의 젊은 성직자들은 빌베른의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빌베른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이들은 대륙의 스콜라 철학과 함께 보편 논쟁을 들여왔고, 실재론자 아드리아누스 사르비우스와 유명론자 페르구스 오드런의 대립은 루이나 땅에서 벌어진 첫 학문 논쟁이 되었다.

이 논쟁은 학문이 국가와 교회의 감시를 받는다는 사실도 드러냈다. 1302년 빌베른 대주교는 오드런의 명제 19개를 단죄했고, 그의 저작은 수백 년 동안 수도원 서고에 묻혔다. 단죄는 빌베른의 교회 권력이 루이나의 학문을 통제한다는 상징이 되었고, 훗날 왕국 성립 이후 루이나 자체의 학문 기관을 세워야 한다는 요구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었다.

14세기에는 신비가 에일리스 니 카흐린이 루이나어로 『빛나는 어둠의 노래』를 썼다. 학문적 논증이 아닌 신비 체험의 기록이었지만, 루이나어로 쓰인 최초의 사변적 문헌이라는 점에서 루이나어 문어 형성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2.3. 벨포르 대학의 설립 [편집]

1372년 벨포르 추대회의로 루이나 왕국이 성립한 뒤, 빌베른 유학에 의존하던 학문을 국내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15세기 알드리크 왕조의 국왕은 칙허를 내려 벨포르의 대성당 학교를 벨포르 대학으로 승격시켰다. 신학·법학·의학·교양 네 학부로 출발한 벨포르 대학은 루이나 최초의 대학이며, 오늘날 루이나 국립대학교의 전신이다.

벨포르 대학은 설립 초기부터 이중의 사명을 안고 있었다. 하나는 빌베른 대학들과 대등한 학문 수준을 갖추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 왕국에 필요한 성직자와 법률가, 관리를 길러 내는 것이었다. 강의 언어는 여전히 라틴어였지만, 대학은 루이나 출신 학자들이 국내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첫 공간이 되었다.

3. 근세 초: 인쇄와 인문주의 [편집]

3.1. 인쇄술의 도입 [편집]

15세기 말 벨포르에 첫 인쇄소가 들어섰다. 초기 인쇄물은 라틴어 기도서와 법령집이 대부분이었으나, 16세기 들어 루이나어로 된 역서(曆書)와 항해 안내서, 법률 해설서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쇄술은 지식을 수도원과 대학 바깥으로 꺼내 상인과 선원, 도시 장인들의 손에 쥐여 주었다.

발레리안 왕조가 바다로 나아가면서 실용 지식의 비중은 더 커졌다. 1531년 세워진 왕립 조선소는 조선 기술자와 수학자, 천문 관측자를 한데 모았고, 해도 제작과 항해술은 대학의 신학이나 법학 못지않은 위신을 얻었다. 대학 밖에서 성장한 이 실용 지식인 집단은 이후 근세 과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3.2. 인문주의자들 [편집]

16세기 인문주의자들은 스콜라 철학의 라틴어 대신 고전 그리스어와 루이나어에 주목했다. 윌리엄 그레이브스는 플라톤의 『국가』를 루이나어로 옮기기 시작했고, 그의 번역 작업을 계기로 고전을 루이나어로 옮기는 일이 하나의 학문적 사명으로 자리 잡았다.

인문주의는 대학과 충돌했다. 벨포르 대학의 신학부와 교양학부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과 삼단논법을 중심으로 가르쳤고, 인문주의자들은 이를 낡고 공허한 말장난이라 공격했다. 대학 밖의 궁정과 귀족 가문, 상인 후원자들이 인문주의자들의 새로운 활동 무대가 되었다. 회의주의자 이자크 몰랭과 실험 철학의 에드워드 렌도 대학이 아닌 궁정과 후원자들의 세계에서 활동했다.

4. 17세기: 팸플릿과 학회 [편집]

4.1. 내전과 팸플릿의 폭발 [편집]

1647년 루이나 내전이 일어나자 왕실의 출판 허가제가 사실상 무너졌다. 왕당파와 의회파, 평등파와 공화주의자가 저마다 팸플릿과 소식지를 쏟아 냈고, 1640년대 말 벨포르에서만 한 해 수천 종의 인쇄물이 나왔다. 정치적 논쟁이 학자들의 라틴어 논문이 아니라 루이나어 팸플릿으로 벌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 팸플릿 문화 속에서 루이나어는 논증의 언어로 단련되었다. 1651년 토머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을 루이나어로 쓴 것은 이 흐름의 정점이었다. 『리바이어던』 이후 루이나어로 철학과 정치학을 쓰는 것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게 되었다.

1659년 왕정이 복고되면서 출판 허가제가 다시 시행되었다. 정치 서적은 인쇄 전에 허가를 받아야 했고, 홉스의 정치 저작도 국내 출판이 막혀 빌베른에서 인쇄되어 역수입되었다.

4.2. 홉스와 대학 [편집]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대학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대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허한 말과 교회 권력을 옹호하는 교리를 가르쳐 사람들의 머릿속에 반란의 씨앗을 심었다는 것이다. 그는 대학이 주권자의 감독 아래 올바른 정치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벨포르 대학은 이 비판에 강하게 반발했지만, 대학 교육 과정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지적 자체는 널리 공유되었다. 대학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그리고 국가는 대학에 어디까지 간섭할 수 있는가라는 홉스의 질문은 이후 루이나 대학 개혁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4.3. 왕립 자연철학회 [편집]

왕정 복고 직후인 1660년대, 국왕의 후원으로 왕립 자연철학회가 세워졌다. 천문학자와 수학자, 의사, 조선 기술자들이 모여 실험을 함께 보고 결과를 검증하는 이 학회는 대학 밖에서 자란 실용 지식인과 대학의 새 세대 학자들을 처음으로 한자리에 묶었다. 학회는 정기 간행물을 내 회원들의 실험 보고를 실었고, 이는 루이나 최초의 학술지가 되었다.

학회는 정치와 종교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내전의 상처가 생생하던 시기에, 사실과 실험을 중심으로 한 중립적 토론 공간을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이 원칙은 학회가 왕정 아래에서 살아남은 비결이었지만, 동시에 학문과 정치를 분리하는 루이나 과학계의 오랜 습관이 되었다.

홉스는 끝내 학회 회원이 되지 못했다. 그는 실험이 아니라 정의에서 출발하는 연역만이 확실한 학문이라 보았고, 공기 펌프 같은 실험 장치로 자연을 알 수 있다는 학회의 방법론을 비웃었다. 수학자 너새니얼 셰리던과 벌인 원적 문제 논쟁에서 홉스가 패한 것도 학회 내 그의 평판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렸다. 학회에서 배제된 홉스와 학회의 주류 사이의 대립은 '연역이냐 실험이냐'라는 근세 루이나 학문의 가장 큰 논쟁이었다.

5. 18세기: 계몽의 공론장 [편집]

5.1. 출판 허가제의 폐지 [편집]

1689년 왕위협약 이후 의회가 국정의 중심이 되면서 출판 사전 허가제는 1690년대에 폐지되었다. 출판물은 인쇄 뒤에 명예훼손이나 선동죄로 처벌받을 수는 있었지만, 인쇄 전에 허가를 받을 필요는 없어졌다. 이후 벨포르에는 일간 신문과 주간 평론지, 정기 간행물이 빠르게 늘었다.

5.2. 비국교도 학원 [편집]

국교회 신자만 학위를 받을 수 있었던 벨포르 대학은 비국교도에게 닫혀 있었다. 비국교도 공동체는 자신들의 학교를 세웠고, 18세기 중반 하버스턴에 세워진 하버스턴 학원은 그 대표였다.

비국교도 학원들은 대학보다 훨씬 실용적이고 개방적이었다. 라틴어가 아니라 루이나어로 가르쳤고, 신학과 고전 외에 자연철학, 수학, 현대어, 상업과 회계를 가르쳤다. 종교적 관용을 주장한 에이브러햄 니스벳이 이 학원에서 가르쳤으며, 산업화 초기의 기술자와 기업가 상당수가 비국교도 학원 출신이었다. 하버스턴 학원은 훗날 루이나 인문예술대학의 모체가 된다.

5.3. 살롱과 커피하우스 [편집]

18세기 중반 벨포르의 살롱과 커피하우스는 계몽의 공론장이었다. 이자벨 드 로슈몽(1721~1789)이 주재한 살롱은 장바티스트 르노블, 마리안 델로름, 클로드 바르텔르미 같은 철학자들이 원고를 미리 낭독하고 비판을 주고받는 곳이었다. 로슈몽 살롱은 여성이 대학 밖에서 지적 토론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공간이기도 했다.

커피하우스는 더 넓은 계층의 공론장이었다. 상인과 선원, 법률가, 인쇄업자가 신문을 돌려 읽으며 해외 무역과 의회 소식을 논했고, 특정 커피하우스는 특정 업종이나 정파의 모임 장소로 굳어졌다. 해운 보험과 주식 거래의 상당 부분도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

5.4. 대사전 편찬 [편집]

1751년부터 1772년까지 편찬된 『학문과 기예 대사전』은 18세기 루이나 계몽의 기념비다. 편집 책임자 조제프 앙리 가르니에(1713~1784)는 신학과 철학부터 조선, 직조, 인쇄 같은 기술까지 모든 지식을 루이나어로 정리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100명이 넘는 필자가 참여했다.

대사전은 지식의 위계를 뒤집었다. 장인의 기술을 신학과 같은 무게로 다루고, 항목들 사이의 상호 참조를 통해 기존 권위를 은근히 비판했다. 바르텔르미가 쓴 유물론적 항목들이 문제가 되어 대사전은 한때 판매가 금지되었고, 편찬은 3년간 중단되었다. 대사전을 둘러싼 금지와 해금의 공방은 사전 허가제가 사라진 뒤에도 국가가 사후 처벌로 출판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5.5. 증언의 정치 [편집]

18세기 말 노예무역 폐지 운동은 루이나 시민사회가 지식을 정치적 무기로 쓰는 방식을 바꿨다. 샬럿 웨일스는 노예선 선원과 생존자를 직접 찾아가 증언을 받아 적었고, 이를 『바다 건너의 증언』으로 펴냈다. 추상적인 도덕 논증 대신 확인 가능한 증언과 수치로 여론을 움직이는 이 방식은 이후 루이나 탐사 저널리즘과 시민운동의 원형이 되었다.

같은 시기 대륙의 혁명은 국가의 출판 통제를 다시 강화시켰다. 급진파 대니얼 레이번이 1794년 선동죄로 투옥된 것을 비롯해, 1790년대에는 정치 서적을 낸 인쇄업자와 저자들이 잇달아 재판에 넘겨졌다.

6. 19세기: 언어, 대학, 대중 [편집]

6.1. 루이나어의 표준화 [편집]

19세기 전반 루이나어는 지역마다 철자와 어형이 크게 달랐다. 문헌학자 오언 카다른은 『루이나어 문법』(1838)에서 표준 철자와 문법을 정리했고, 이 책은 학교와 관청, 신문의 표준이 되었다. 카다른은 중세 문헌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단죄 이후 잊혔던 오드런의 저작과 브렌단의 『두 혀의 책』을 재발견하기도 했다.

표준화 과정에서 '말의 순수성 논쟁'이 벌어졌다. 언어 순화론자들은 빌베른 지배의 흔적인 빌베른어 차용어를 걷어내고 켈트 고유어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다른은 이에 반대했다. 루이나어는 켈트 기층 위에 라틴어와 빌베른어가 켜켜이 쌓인 '지층'이며, 차용어를 걷어내는 것은 그 말을 쓴 사람들의 역사를 지우는 일이라는 것이다. 논쟁은 카다른의 승리로 끝났고, 오늘날 루이나어 어휘의 상당 부분은 빌베른어에서 온 말로 남아 있다.

6.2. 대학 개혁 [편집]

19세기 중반 벨포르 대학은 시대에 뒤처진 성직자 양성소라는 비판을 받았다. 1850년대부터 학장 윌리엄 해스컴(1812~1889)이 이끈 개혁으로 대학은 가르치는 곳에서 연구하는 곳으로 바뀌어 갔다. 실험실과 세미나가 도입되었고, 자연과학과 근대 역사학, 문헌학이 독립된 학과로 자리 잡았다.

개혁의 정점은 1871년의 종교 시험 폐지였다. 국교회 신자만 학위를 받을 수 있게 한 규정이 사라지면서 비국교도와 가톨릭 신자, 유대인에게 대학 문이 열렸다. 이 개혁을 둘러싸고 대학은 국교회의 기관인가 국민의 기관인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6.3. 루이나 인문예술대학 [편집]

1868년 하버스턴 학원은 정식 대학 인가를 받아 루이나 인문예술대학이 되었다. 초대 학장 엘리너 브룩스(1822~1901)는 여성에게 학위 과정을 연 루이나 최초의 대학을 만들었다. 비국교도 학원의 전통을 이어 소규모 강의와 토론 수업을 중심으로 인문학과 예술을 가르쳤고, 대형 연구 대학과 다른 교양 교육의 모델이 되었다.

인문예술대학은 19세기 후반 여성 지식인의 산실이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 이디스 레인을 비롯해 여성운동과 교육운동, 사회 조사 운동을 이끈 인물 상당수가 이 대학 출신이었다.

6.4. 제국과 지식 [편집]

해양 제국의 확장은 지식의 지형도 바꿨다. 루이나 오리엔탈 컴퍼니와 해군은 해외 영토의 지리와 자원, 언어, 풍습을 조사했고, 그 성과는 대학의 지리학과 민족지학, 식물학을 키웠다. 벨포르의 박물관과 식물원에는 식민지에서 가져온 유물과 표본이 쌓였다.

이 지식은 처음부터 지배의 도구이기도 했다. 식민지 행정관을 길러 내는 강좌가 대학에 개설되었고, 민족지 조사는 통치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과 구별되지 않았다. 20세기 초 에스더 메이필드가 재정 통계로 제국의 손익을 계산해 반제국주의 논거를 세운 것은, 제국이 만든 지식의 방법으로 제국을 비판한 사례로 꼽힌다. 식민지 유물의 반환 문제는 지금도 루이나 박물관계의 쟁점으로 남아 있다.

6.5. 노동자의 학교와 대중 신문 [편집]

1878년 벨포르에 야간 노동자 학교가 세워졌다. 낮에 일하는 노동자들이 밤에 읽기와 산수, 역사와 경제를 배우는 곳이었고, 대륙의 사회주의 문헌이 루이나어로 읽힌 첫 공간이기도 했다. 이 건물은 1927년 노동당이 사들여 벨포르 노동회관이 되었다.

1885년에는 대중 일간지 《르 나시오날》이 창간되었다. 값싼 윤전 인쇄와 철도 배송망, 높아진 문해율이 맞물리면서 신문은 소수 엘리트의 매체에서 대중 매체로 바뀌었다. 《르 나시오날》은 이후 140년 동안 루이나 최대 부수의 신문 자리를 지켰다.

6.6. 공화국의 대학 [편집]

1885년 공화국 수립 이후 새 국가는 자신의 엘리트를 길러 낼 기관을 필요로 했다. 1886년 공화국의 법관과 고위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벨포르 사법대학이 세워졌다. 초대 학장은 계승전쟁 당시 의회파의 이론가였던 조제프 랑글루아였다. 사법대학은 이후 루이나 법조계와 고위 관료 사회를 사실상 독점하는 엘리트 학교가 되었고, 그 폐쇄성은 20세기 내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887년에는 「국립대학교법」이 제정되어 벨포르 대학이 루이나 국립대학교로 개편되었다. 왕실 칙허로 세워진 대학이 공화국의 국립대학이 된 것이다. 국립대학교는 이후 거의 모든 학문을 아우르는 루이나 최고의 종합대학으로 성장했다.

7. 20세기 전반: 망명자와 전문가 [편집]

7.1. 망명 지식인 [편집]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망명자들이 대거 루이나로 들어왔다. 이들 가운데에는 과학자와 기술자, 철학자, 작가가 많았고, 망명 과학자들은 물리학과 수학, 화학 분야에서 루이나 학계의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 러시아어로 쓰인 과학 문헌이 대학에서 널리 읽히게 되었고, 과학기술 인재 이민에 적극적인 루이나의 전통이 이때 시작되었다.

인문 분야에서는 종교철학자 세르게이 베르흐네프와 현상학자 안나 쿠즈미나가 새 학풍을 열었다. 백군 장교 가족 출신의 소설가 베라 N. 솔로비요바는 빈민과 노동자의 현실을 고발하는 리얼리즘 소설로 루이나 문학의 대표 작가가 되었다. 망명 공동체는 러시아어 주간지 《베스트니크》를 비롯한 매체를 꾸렸고, 이들과 함께 들어온 키릴 문자는 결국 루이나어를 표기하는 두 번째 문자로 자리 잡았다.

망명 지식인과 토착 지식인의 관계가 늘 원만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 교수직을 둘러싼 경쟁과 망명자들의 강경한 반공주의는 마찰을 낳았고, 1920~1930년대에는 '루이나 학문이 러시아화된다'는 반발도 있었다.

7.2. 노동 언론과 노동자 교육 [편집]

노동운동은 자신의 매체를 가졌다. 1913년 창간된 철도 노동조합의 주간지 《철도노동자》는 위원장 몽고메리 K. 번즈가 직접 사설을 썼고, 1916년 초 발행 부수가 6만 부에 달했다. 같은 해 창간된 《라 부아》는 이후 사회민주당 계열의 대표 매체로 자라 오늘날까지 진보 언론의 중심에 있다. 노동조합과 노동당은 강좌와 독서 모임, 순회 강연으로 노동자 교육을 조직했고, 이는 대학 밖에서 성장한 또 하나의 지식인 집단을 만들어 냈다.

7.3. 벨포르 학파 [편집]

1920년대 국립대학교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모인 토론 모임은 '벨포르 학파'로 불렸다. 학파는 형이상학을 무의미한 말로 비판하고 과학의 언어로 모든 지식을 통일하자는 과학적 세계관 운동을 펼쳤다. 대중 강연과 해설서 출판으로 과학적 사고를 대중에게 알리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학파는 2차 세계대전기에 흩어졌다. 구성원 상당수가 전시 연구에 동원되었고, 전후에는 각자의 전공 분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학파가 남긴 분석적 방법은 전후 루이나 철학계의 주류가 되었다.

7.4. 전문가 국가 [편집]

대공황은 정책 지식인이라는 새로운 집단을 만들었다. 헤이슬러 정부는 경제학자와 통계학자, 사회 조사 연구자들을 정부로 불러들였고, 주택 실태와 빈곤, 실업에 관한 대규모 조사가 정책의 근거가 되었다. 경제학자 앨버트 크레인이 이 시기 정책 지식인의 대표다. 정부의 결정이 숫자와 조사 보고서로 정당화되는 방식은 이때 루이나 행정의 기본이 되었다.

7.5. 전쟁과 과학 [편집]

2차 세계대전기 정부는 전시과학연구개발국을 세워 대학과 기업의 과학자들을 전쟁 연구에 동원했다. 1932년부터 국립대학교 물리학 교수였던 로런스 D. 페닝턴이 레이더와 근접신관 개발을 이끌었고, 페니실린 대량 생산과 암호 해독용 계산기도 이 시기의 성과였다.

종전 뒤에는 이 동원 체제를 평시에도 이어 갈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연구를 국가가 정한 목표에 맞출 것인가, 과학자의 호기심에 맡길 것인가가 쟁점이었다. 5년 가까운 논쟁 끝에 1950년 「국립과학재단법」이 통과되었고, '답이 아니라 물음에 투자한다'는 원칙을 내건 국립과학재단이 세워졌다.

8. 냉전기: 국가와 지식 [편집]

8.1. 과학의 국가 동원 [편집]

냉전은 루이나 과학을 국가 사업으로 만들었다. 1949년 원자력연구소가 세워져 페닝턴이 초대 소장을 맡았고, 루이나는 1958년 첫 핵실험에 성공했다. 그러나 1950년대 말 사비에트가 먼저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자, 과학 인재 부족이 국가 안보의 문제로 떠올랐다.

과학자 출신인 페닝턴 대통령은 1958년 과학기술성과 항공우주국을 세우고, 1959년 국가가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대는 연구 중심 이공계 대학 RIST를 벨포르 아르디아에 열었다. 이후 국립대학교와 RIST는 루이나 학계의 두 정점이 되었고, 루이나는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배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8.2. 충성 심사 [편집]

1949년 국가보안법 제정 이후 대학과 학교는 사상 검증의 대상이 되었다. 1950년대에는 교원 임용과 재임용에 충성 심사가 도입되었고, 공산당과 관련된 단체에 가입했던 전력이나 강의 내용이 문제가 된 교원들이 해직되었다. 1954년 국립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클로드 아르센(1911~1988)이 노동운동사 강의를 이유로 해직된 아르센 사건은 학문의 자유 논쟁에 불을 붙였다.

충성 심사는 해직 자체보다 자기 검열이라는 더 넓은 효과를 남겼다. 노동, 식민지, 공산주의를 다루는 연구는 위험한 주제로 여겨졌고, 사회과학계는 한 세대 동안 계량적이고 기술적인 연구로 물러났다.

8.3. 감시받는 언론 [편집]

1959년부터 1980년까지 국방부 특무처와 그 후신 조직은 진보·비판 언론인을 장기 사찰하고 압박하는 스틸워터 계획을 운영했다. 21년 동안 1,062명이 감시 명단에 올랐고, 그 가운데 9명이 사고나 자살, 강도 사건으로 처리된 채 숨졌다. 1964년 러시아어 주간지 편집인 마르타 K. 오시포바, 1966년 아르덴역 사건 기록을 취재하던 파스칼 E. 르노, 1968년 국영방송 PD 뱅상 L. 아르디가 그 희생자였다. 소설가 솔로비요바도 감시 명단에 올라 있었다.

세무조사, 예비군 반복 소집, 공공임대주택 갱신 심사, 여권 발급 지연 같은 압박은 하나하나가 합법적인 행정 절차였기에, 피해자들은 자신이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이 시기 루이나 언론계에 퍼진 자기 검열의 문화는 스틸워터의 존재가 드러나기 전부터 이미 하나의 체제가 되어 있었다.

8.4. 대학의 팽창과 학생운동 [편집]

1960년대 대학 진학률이 크게 오르면서 대학은 소수 엘리트의 공간에서 대중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늘어난 학생들은 낡은 교육 과정과 권위적 학사 운영, 그리고 대학과 전쟁의 관계에 문제를 제기했다. 학생운동의 이론가 마르크 베르티에는 『징집된 대학』(1969)에서 대학이 전쟁 동원 체계의 일부라고 비판했다.

1975년 띠에우리엔 대학살이 알려지면서 대학가의 반전 운동은 절정에 이르렀다. 1976년 봄 RIST의 학생과 교원 수천 명은 학교가 무기 연구를 하고 있다며 본관을 점거했다. 이 사태 끝에 RIST는 '캠퍼스 안에서는 결과를 공개할 수 없는 연구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채택했다. 그러나 기밀 연구는 캠퍼스 밖의 별도 법인으로 옮겨졌을 뿐이라는 비판도 함께 받았다.

8.5. 전쟁과 기자 [편집]

1975년 띠에우리엔 학살을 처음 보도한 것은 루이나 통신 종군기자 이브 L. 카롱이었다. 그는 정부 발표에서 빠진 부분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고, 이 기사는 참전 여론을 무너뜨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같은 팀 사진기자 뤼도비크 A. 페뇨가 가져온 현장 필름은 끝내 게재되지 못했고, 페뇨는 1976년 자살로 처리된 채 숨졌다. 카롱은 1976년 통신사를 떠나 국외에 머물다 1984년 회고록을 펴냈다.

8.6. 검은 10년과 지식인 [편집]

1970년대 정치 폭력 속에서 지식인들은 무장 투쟁에 대한 책임 문제와 마주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레옹 테시에의 『공포의 생산』(1968)은 무장 조직들이 교본처럼 인용하는 책이 되었고, 테시에는 자신의 이론을 근거로 한 폭력에 끝까지 반대해야 했다. 지식인의 글이 폭력의 정당화로 쓰일 때 저자는 어디까지 책임지는가라는 물음은 이 시기 지식인 사회의 가장 무거운 논쟁이었다.

'검은 10년'이라는 이름 자체도 지식인의 작품이다. 이 말은 1979년 시사주간지 《코망테르》에 실린 한 기고문에서 처음 쓰였다.

8.7. 군정과 지식 [편집]

1978년 10.10 군사반란 이후 군정은 지식의 제도를 직접 장악했다. 일간지 34종이 14종으로 통폐합되었고, 방송은 국영으로 흡수되었으며, 루이나 통신은 다른 통신사들을 흡수해 유일한 통신사가 되었다. 대학에는 군 감독관이 파견되었고, 반전 운동을 이끈 학생들 일부가 징집되거나 제적되었다.

언론과 대학이 묶이자 지식은 지하로 내려갔다. 인권 변호사 앙드레 퐁텐의 『저항의 권리』(1979)처럼 비밀리에 복사되어 돌던 문건들이 저항의 언어를 만들었다. 1980년 10.24 시민혁명 때 학생들은 거리로 나섰고, 헌정이 회복된 뒤 제적생들은 모두 복적되었다.

9. 민주화 이후: 진실의 제도화 [편집]

9.1. 지식인의 책임 논쟁 [편집]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가 제방 계획과 스틸워터 계획의 일부를 밝혀내면서, 지식인 사회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법철학자 가스통 브레몽은 그의 비상사태 법리가 안보 국가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는 비판 속에서 조사위원회 출석을 거부한 채 1981년 사망했다.

1985년 언론인 폴 마르티노(1932~2010)는 『그때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에서 냉전기와 군정기 지식인들의 침묵과 협력을 기록했다. 그는 국가의 공작에 이론을 제공한 학자, 보도 지침을 따른 언론인, 동료의 해직에 침묵한 교수들의 사례를 실명으로 다뤄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 '침묵한 지식인' 논쟁은 미셸 다르시의 책임론과 맞물리며 1980년대 지식인 사회를 갈라놓았다.

9.2. 통제와 해방 [편집]

1980년대 베인브리지 정부 아래에서 언론은 언론기본법의 통제를 받았다. 1984년 카롱의 회고록과 1987년 영화 《11월의 거리》처럼 검은 10년과 전쟁을 다룬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정부 비판의 공간은 여전히 좁았다.

1989년 언론기본법이 폐지되고 루이나 통신이 독립하면서 언론은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1978년 통폐합에서 살아남은 소수 매체가 시장을 장악한 과점 구조는 그대로 남았다. 오늘날 루이나 언론의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이 경제 정책보다 제방 계획과 스틸워터, 군정에 대한 태도라는 점은 이 시기에 형성된 지형이다.

9.3. 기록과 증언 [편집]

민주화 이후 지성사의 중심 과제는 기록을 되찾는 일이었다. 1980년 소각을 면한 스틸워터 개인철 77권, 정보기관 조사위원회의 비공개 부속서, 3.29 당일 의회 속기록 같은 기록들이 국립기록원에 모였다. 1990년대 국립기록원장을 지낸 실비 랑동(1948~)은 '기록은 국가가 아니라 시민의 것'이라는 원칙을 내걸고 공공기록 공개 제도를 정비했다.

그러나 기록 공개에는 한계가 있었다. 1993년 스틸워터의 실무 책임자가 압박과 처리 공작을 증언했으나 뒷받침할 문서를 내놓지 못해 신빙성 논란이 일었고, 2011년 제방 계획 부속서의 부분 공개 청구는 거부되었다. 증언은 있으나 문서가 없고, 문서는 있으나 공개되지 않는 상황이 루이나 과거사 연구의 조건으로 남았다.

9.4. 탐사 저널리즘 [편집]

언론 과점과 기록의 한계 속에서 탐사 저널리즘이 새로운 지식 생산의 축으로 떠올랐다. 2014년에는 루이나 구축함과 청평 함정의 충돌 사고에서 해군이 은폐한 사실이 탐사 보도로 드러났다. 2011년 창간된 비영리 탐사보도 매체 《아르시브》는 2020년 코발 게이트를 폭로하며 대표적 탐사 매체로 자리 잡았다. 18세기 웨일스가 증언을 모아 노예무역을 고발한 방식이 200여 년 뒤 디지털 공간에서 되살아난 셈이다.

10. 현대 [편집]

10.1. 대학과 입시 [편집]

2022년 교육 개혁으로 대학 입시의 학력평가가 대학수학자격시험으로 바뀌었다. 시험 점수만으로 신입생을 가려 뽑던 방식에서 여러 요소를 함께 보는 종합형 전형으로 옮겨 가면서, 대학 입시가 계층 이동의 통로인가 계층 재생산의 장치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벌어졌다.

10.2. 지식의 기밀화 [편집]

21세기 루이나 지성사의 새 쟁점은 최상급 연구가 점점 더 기밀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국립대학교 연구원과 국립 저온물리연구소가 개발에 참여한 국가 전략 인공지능, 그리고 RIST 출신 연구자들이 관여하는 국가정찰국의 비공개 사업은 학문 공동체의 검증 바깥에 있다.

심리철학자 사무엘 레비츠키가 제기한 '계산과 판단의 구분'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국가의 결정에 영향을 주는 지식이 공개 토론과 동료 검증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학문인가 기밀인가? 1660년대 왕립 자연철학회가 세운 '공개 검증'의 원칙과 냉전기 이래의 국방 연구 전통이 다시 충돌하고 있다.

10.3. 공론장의 재편 [편집]

인터넷 매체의 성장은 1989년 이후의 언론 과점에 균열을 냈지만, 동시에 극단 매체가 영향력을 넓히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한편 유고랜드 출신 이주민 공동체의 성장으로 한국어·아랍어 매체가 늘어나면서, 러시아어 매체가 그랬듯 이주 공동체의 언어가 루이나 공론장의 일부가 되어 가고 있다.

11. 주요 기관 [편집]

기관
설립
비고
벨포르 대학
15세기
루이나 최초의 대학
왕립 조선소
1531년
왕립 자연철학회
1660년대
하버스턴 학원
18세기 중반
비국교도 학원
루이나 인문예술대학
1868년
하버스턴 학원 승격
야간 노동자 학교
1878년
《르 나시오날》
1885년
벨포르 사법대학
1886년
루이나 국립대학교
1887년
벨포르 대학 개편
《라 부아》
1916년
루이나 국립과학재단
1950년
RIST
1959년
《아르시브》
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