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나의 체르드 침공 Ruinan Invasion of Cherd | |
기간 | 1974년 4월 ~ 1976년 9월 |
장소 | 체르드 전역, 콘스탄티노폴 접경 |
상위 전쟁 | |
연합국 | |
체르드 | |
지휘관 | 연합국 토머스 데이븐포트 루이나 대통령, 에드몽 R. 라포르트 원정군 사령관, 자크 르몽 플로렌시아 총리 체르드 아르만 체르노프 대통령, 그리고리 소콜로프 국방장관 |
결과 | 연합국의 승리 체르노프 정권 붕괴, 비셰나르 조약으로 체르드 중립화 |
1. 개요 [편집]
루이나의 체르드 침공(Ruinan Invasion of Cherd)은 2차 랜드 전쟁 중인 1974년 4월 루이나가 체르드의 공산 정권을 상대로 시작한 침공 작전과 그 뒤의 전쟁을 말한다. 작전명은 북문 작전(Operation NORTH GATE)이었으며, 1974년 5월부터 플로렌시아가 합류했다.
전쟁은 2년 가까이 이어진 끝에 1976년 3월 수도 비셰나르가 함락되면서 사실상 끝났다. 체르노프 정권은 무너졌고, 새로 들어선 임시정부는 같은 해 9월 비셰나르 조약으로 중립을 선언했다. 이 전쟁으로 체르드는 1차 랜드 전쟁 이후 이어진 반루이나 노선을 버리고 해협 북부의 중립국이 되었다.
전쟁은 2년 가까이 이어진 끝에 1976년 3월 수도 비셰나르가 함락되면서 사실상 끝났다. 체르노프 정권은 무너졌고, 새로 들어선 임시정부는 같은 해 9월 비셰나르 조약으로 중립을 선언했다. 이 전쟁으로 체르드는 1차 랜드 전쟁 이후 이어진 반루이나 노선을 버리고 해협 북부의 중립국이 되었다.
2. 배경 [편집]
체르드는 1972년 11월 혁명으로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뒤 루이나와 정면으로 맞섰다. 아르만 체르노프 대통령은 1970년부터 이어진 루이나군의 콘스탄티노폴 점령을 '제국주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즉각 철수를 요구했으며, 콘스탄티노폴의 무장 저항 세력에 국경 너머로 무기와 은신처를 제공했다.
1973년 7월 마베라 내전이 시작되자 체르드는 8월부터 라 마베라 혁명정부에 의용군을 보냈다. 루이나는 체르드가 해협 북부 공산 세력의 후방 기지가 되었다고 판단했지만, 체르드와의 직접 전쟁은 콘스탄티노폴 점령에 더해 또 하나의 전선을 여는 일이었기 때문에 데이븐포트 행정부는 한동안 결정을 미루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74년 3월 체르드 포병이 콘스탄티노폴 외곽의 루이나군 기지를 포격한 사건이었다. 이 포격으로 루이나 병사 수십 명이 숨지자 루이나 여론은 들끓었고, 체르노프 정권은 포격이 국경 지대의 우발적 교전이었다고 해명했으나 사과는 거부했다.
1973년 7월 마베라 내전이 시작되자 체르드는 8월부터 라 마베라 혁명정부에 의용군을 보냈다. 루이나는 체르드가 해협 북부 공산 세력의 후방 기지가 되었다고 판단했지만, 체르드와의 직접 전쟁은 콘스탄티노폴 점령에 더해 또 하나의 전선을 여는 일이었기 때문에 데이븐포트 행정부는 한동안 결정을 미루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74년 3월 체르드 포병이 콘스탄티노폴 외곽의 루이나군 기지를 포격한 사건이었다. 이 포격으로 루이나 병사 수십 명이 숨지자 루이나 여론은 들끓었고, 체르노프 정권은 포격이 국경 지대의 우발적 교전이었다고 해명했으나 사과는 거부했다.
3. 개전 결정 [편집]
1974년 4월 토머스 데이븐포트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콘스탄티노폴의 루이나군을 지키기 위해 체르드의 공격 능력을 제거하겠다고 밝혔고, 의회는 군사 행동을 승인했다. 정부는 이 전쟁을 체르드 정복이 아니라 '한정된 목표의 작전'이라고 설명했다.
사비에트는 침공을 강하게 비난했지만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 1963년 루이나와 사비에트가 주고받은 비밀 양해는 두 나라의 본토만을 대상으로 했으므로 체르드는 그 바깥에 있었고, 해협이 막힌 상황에서 사비에트가 체르드에 보낼 수 있는 것은 군사고문과 소량의 무기뿐이었다.
사비에트는 침공을 강하게 비난했지만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 1963년 루이나와 사비에트가 주고받은 비밀 양해는 두 나라의 본토만을 대상으로 했으므로 체르드는 그 바깥에 있었고, 해협이 막힌 상황에서 사비에트가 체르드에 보낼 수 있는 것은 군사고문과 소량의 무기뿐이었다.
4. 전개 [편집]
4.1. 북문 작전 (1974) [편집]
1974년 4월 루이나군은 남쪽 국경과 콘스탄티노폴 방면의 두 갈래로 체르드에 진입했다. 원정군 사령관 에드몽 R. 라포르트 대장은 기갑 부대로 국경 방어선을 빠르게 돌파한 뒤 비셰나르로 향하는 주요 도로를 장악하는 작전을 세웠고, 첫 몇 주 동안 루이나군은 예상보다 빠르게 진격했다.
5월에는 플로렌시아군이 서쪽 국경에서 체르드로 진입했다. 1차 랜드 전쟁 때 체르드군에 국경 지대를 빼앗겼던 플로렌시아에게 이 참전은 오래된 빚을 갚는 일이기도 했다. 두 방향의 압박 속에 체르드 정규군은 국경 지대를 내주고 남부 산악지대와 도시로 물러났다.
5월에는 플로렌시아군이 서쪽 국경에서 체르드로 진입했다. 1차 랜드 전쟁 때 체르드군에 국경 지대를 빼앗겼던 플로렌시아에게 이 참전은 오래된 빚을 갚는 일이기도 했다. 두 방향의 압박 속에 체르드 정규군은 국경 지대를 내주고 남부 산악지대와 도시로 물러났다.
4.2. 산악전과 소모전 (1974~1975) [편집]
초기의 빠른 진격은 남부 산악지대에서 멈추었다. 1974년 8월 카멘 고개 전투에서 루이나군은 산악 진지를 지키던 체르드군과 민병대에 막혀 큰 손실을 입었고, 이후 전선은 산악 고개와 계곡을 하나씩 빼앗는 소모전으로 바뀌었다.
체르드 정부는 점령지에서 민병대와 유격대를 조직해 연합군의 보급로를 공격했다. 연합군은 점령지 치안에 점점 더 많은 병력을 묶어 두어야 했고, 루이나 국내에서는 '한정된 목표의 작전'이 끝없는 점령으로 바뀌고 있다는 비판이 커졌다.
1975년 가을 루이나가 청북전쟁에 직접 참전하면서 루이나의 병력과 예산의 우선순위는 동부로 넘어갔다. 체르드 전선의 루이나군은 증원을 받지 못한 채 겨울을 났고, 이 시기 전선의 부담은 상당 부분 플로렌시아군이 떠안았다.
체르드 정부는 점령지에서 민병대와 유격대를 조직해 연합군의 보급로를 공격했다. 연합군은 점령지 치안에 점점 더 많은 병력을 묶어 두어야 했고, 루이나 국내에서는 '한정된 목표의 작전'이 끝없는 점령으로 바뀌고 있다는 비판이 커졌다.
1975년 가을 루이나가 청북전쟁에 직접 참전하면서 루이나의 병력과 예산의 우선순위는 동부로 넘어갔다. 체르드 전선의 루이나군은 증원을 받지 못한 채 겨울을 났고, 이 시기 전선의 부담은 상당 부분 플로렌시아군이 떠안았다.
4.3. 비셰나르 함락 (1976) [편집]
1976년 1월 연합군은 산악지대를 돌파해 비셰나르를 포위했다. 두 달에 걸친 포위전 동안 도시는 포격과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식량과 연료가 끊긴 시민들 사이에서 정권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3월 비셰나르가 함락되면서 체르노프 정권은 무너졌다. 체르노프와 그리고리 소콜로프 국방장관을 비롯한 지도부는 사비에트로 망명했고, 수도에 남은 온건파 정치인들이 니콜라이 셰스타코프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세웠다.
3월 비셰나르가 함락되면서 체르노프 정권은 무너졌다. 체르노프와 그리고리 소콜로프 국방장관을 비롯한 지도부는 사비에트로 망명했고, 수도에 남은 온건파 정치인들이 니콜라이 셰스타코프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세웠다.
5. 점령과 중립화 [편집]
임시정부는 1976년 5월 연합국과 휴전에 합의했고, 같은 해 9월 루이나·플로렌시아와 비셰나르 조약을 맺었다. 조약에 따라 체르드는 중립을 선언하고 외국 군대의 주둔과 NLTO·해르샤바 조약기구 같은 진영 동맹 가입을 포기했으며, 콘스탄티노폴의 무장 세력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다. 공산당은 불법화되었다.
연합군은 조약에 따라 단계적으로 철수했고, 루이나군의 철수는 1977년 말 마무리되었다. 체르드는 이후 의원내각제 공화국으로 정치 체제를 다시 세웠으며, 시스타니아·델라웨어와 함께 해협 북부의 중립국 지대를 이루게 되었다.
연합군은 조약에 따라 단계적으로 철수했고, 루이나군의 철수는 1977년 말 마무리되었다. 체르드는 이후 의원내각제 공화국으로 정치 체제를 다시 세웠으며, 시스타니아·델라웨어와 함께 해협 북부의 중립국 지대를 이루게 되었다.
6. 루이나 국내의 반응 [편집]
개전 직후 루이나 여론은 침공을 대체로 지지했다. 콘스탄티노폴에서 숨진 병사들에 대한 분노가 컸고, 체르드가 라 마베라에 의용군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도 침공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남녀를 모두 징집하는 루이나에서 체르드 산악지대의 사상자 소식은 곧 거의 모든 가정의 문제가 되었고, 이 시기는 국내에서 검은 10년의 무장 폭력이 정점으로 치닫던 때와 겹쳤다. 1975년 청북전쟁 참전과 띠에우리엔 대학살 이후 반전 여론은 체르드 전선으로까지 번졌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남녀를 모두 징집하는 루이나에서 체르드 산악지대의 사상자 소식은 곧 거의 모든 가정의 문제가 되었고, 이 시기는 국내에서 검은 10년의 무장 폭력이 정점으로 치닫던 때와 겹쳤다. 1975년 청북전쟁 참전과 띠에우리엔 대학살 이후 반전 여론은 체르드 전선으로까지 번졌다.
7. 평가 [편집]
루이나의 체르드 침공은 군사적으로는 목표를 이룬 전쟁이었다. 체르노프 정권은 무너졌고, 체르드는 루이나에 적대적인 공산 국가에서 중립국으로 바뀌었다. 해협 북부에서 루이나에 맞설 수 있는 나라는 더 이상 남지 않았다.
그러나 '한정된 목표의 작전'이 2년 반에 걸친 전쟁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콘스탄티노폴 점령과 청북전쟁 참전이 겹치면서 루이나의 군사력과 사회가 한계까지 몰렸다는 점에서 비판도 적지 않다. 이 전쟁의 부담은 1970년대 후반 루이나 정치의 혼란을 키운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한정된 목표의 작전'이 2년 반에 걸친 전쟁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콘스탄티노폴 점령과 청북전쟁 참전이 겹치면서 루이나의 군사력과 사회가 한계까지 몰렸다는 점에서 비판도 적지 않다. 이 전쟁의 부담은 1970년대 후반 루이나 정치의 혼란을 키운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