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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취지 [편집]
공정노동법(公正勞動法, Fair Labor Act, FLA)은 루이나의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던 20세기 후반, 노동 현장에서 빈번히 발생하던 과도한 손해배상 청구와 가압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당시 루이나는 랜드해협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경제 성장을 이루어내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열악한 노동 환경과 부당한 법적 처벌 구조가 존재했다. 대기업이나 재벌 그룹은 파업과 쟁의 행위를 ‘경영상 피해’로 간주하며 수백억 달러에 이르는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법원은 이를 기계적으로 인용하여 노동조합 재정에 치명타를 입혔다. 그 결과 다수의 노동조합이 존립 기반을 상실하거나 사실상 해산에 내몰렸으며, 노동자들의 단체행동권은 헌법상 보장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무력화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공정노동법은 이러한 왜곡된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 노동자의 정당한 쟁의 행위에 대해 사용자 측이 무분별하게 손해배상이나 가압류를 청구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을 핵심 취지로 한다. 특히 이 법은 “정당한 노조 활동은 민사상 불법행위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명문화하여, 쟁의행위에 따른 법적 책임을 최소화하고 노동조합이 자주성과 독립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단순히 노사 간 분쟁 해결 차원을 넘어, 노동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사회적 대등성을 구현하는 기초 제도로 자리 잡았다.
또한 입법 취지에는 사회적 연대와 책임 분담이라는 사상이 깊이 깔려 있다. 루이나 사회는 과거 군사정권과 대기업 중심의 성장 전략 속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희생시켜 왔고, 그 결과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공정노동법은 이러한 역사적 반성 위에 제정된 법으로, “노동 없는 성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합의를 제도화했다. 특히, 법은 단체행동을 이유로 한 개인 노동자에 대한 과도한 민사책임 부과를 금지함으로써, 노동자 개인의 생존권과 가정의 생활권을 지켜내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입법 과정에서 루이나 의회는 다음과 같은 논리들을 강조했다.
*헌법적 보장 실현: 헌법 제9조에서 보장하는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이 민사책임 남용으로 사실상 박탈되는 현실을 시정한다.
*노사 관계의 균형 회복: 경제력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용자와 개별 노동자·노조 간의 불균형을 시정하여 실질적인 협상 가능성을 마련한다.
*사회적 대화 기반 조성: 강제적 배상 청구 대신 노사정 간 협의와 사회적 대타협을 제도적으로 유도한다.
*경제 발전의 지속 가능성 확보: 갈등의 법정화·장기화를 줄이고, 노동 현장의 안정을 통해 생산성을 제고한다.
특히 1980년대 후반 루이나에서 발생한 대규모 파업 사건과, 그 이후 수천 명의 노동자가 개인 파산으로 내몰린 비극적 사례는 공정노동법 제정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언론과 시민사회는 당시 이를 “노동자의 입을 막는 족쇄”라고 비판하며, 법률 제정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이러한 사회적 압력이 국회를 움직였고, 마침내 1985년 5월 12일 공정노동법이 제정·공포되기에 이르렀다.
공정노동법은 이러한 왜곡된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 노동자의 정당한 쟁의 행위에 대해 사용자 측이 무분별하게 손해배상이나 가압류를 청구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을 핵심 취지로 한다. 특히 이 법은 “정당한 노조 활동은 민사상 불법행위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명문화하여, 쟁의행위에 따른 법적 책임을 최소화하고 노동조합이 자주성과 독립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단순히 노사 간 분쟁 해결 차원을 넘어, 노동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사회적 대등성을 구현하는 기초 제도로 자리 잡았다.
또한 입법 취지에는 사회적 연대와 책임 분담이라는 사상이 깊이 깔려 있다. 루이나 사회는 과거 군사정권과 대기업 중심의 성장 전략 속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희생시켜 왔고, 그 결과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공정노동법은 이러한 역사적 반성 위에 제정된 법으로, “노동 없는 성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합의를 제도화했다. 특히, 법은 단체행동을 이유로 한 개인 노동자에 대한 과도한 민사책임 부과를 금지함으로써, 노동자 개인의 생존권과 가정의 생활권을 지켜내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입법 과정에서 루이나 의회는 다음과 같은 논리들을 강조했다.
*헌법적 보장 실현: 헌법 제9조에서 보장하는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이 민사책임 남용으로 사실상 박탈되는 현실을 시정한다.
*노사 관계의 균형 회복: 경제력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용자와 개별 노동자·노조 간의 불균형을 시정하여 실질적인 협상 가능성을 마련한다.
*사회적 대화 기반 조성: 강제적 배상 청구 대신 노사정 간 협의와 사회적 대타협을 제도적으로 유도한다.
*경제 발전의 지속 가능성 확보: 갈등의 법정화·장기화를 줄이고, 노동 현장의 안정을 통해 생산성을 제고한다.
특히 1980년대 후반 루이나에서 발생한 대규모 파업 사건과, 그 이후 수천 명의 노동자가 개인 파산으로 내몰린 비극적 사례는 공정노동법 제정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언론과 시민사회는 당시 이를 “노동자의 입을 막는 족쇄”라고 비판하며, 법률 제정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이러한 사회적 압력이 국회를 움직였고, 마침내 1985년 5월 12일 공정노동법이 제정·공포되기에 이르렀다.
3. 역사 [편집]
3.1. 1980년대 [편집]
1980년대에 들어 루이나의 산업화가 정점을 향해 치닫던 시기, 노동 현장은 극심한 갈등으로 요동쳤다. 거대 기업들은 노동조합의 파업이나 쟁의행위를 헌법적 권리로 인정하기보다는 경영상 피해로 환산해 막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이를 기계적으로 받아들였다. 1981년 오보레 제철소 파업은 그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회사가 주장한 피해액은 8억 달러에 달했고, 노조 간부들과 조합원들은 개인 재산까지 압류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 사건은 루이나 사회 전체에 충격을 던졌으며, 의회 내 일부 진보 성향 의원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공정노동법’이라는 새로운 법안을 발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수 의석을 차지한 보수정당은 “국가 경쟁력 약화”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상임위 단계에서 법안을 철저히 묵살했고, 재계는 대규모 로비와 압박으로 입법 논의를 봉쇄하였다. 여기에 보수 언론은 “공정노동법은 사실상 무제한 파업 면허장”이라는 왜곡된 프레임을 만들어내며, 사회적 지지를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1985년 들어 전국적인 파업 물결이 다시금 루이나 사회를 흔들었다. 운수·철강·항만 부문에서 동시에 파업이 발생하자,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목소리를 높였고 진보 성향 의원들은 공정노동법 제정안을 다시 상정했다. 이번에는 “정당한 쟁의행위는 민사상 불법행위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핵심 조항이 명문화되었으나, 기업집단은 즉각 반발하며 투자 철수와 대규모 해고를 경고했다. 보수정당은 이러한 논리를 전폭 수용하며 입법을 가로막았고, 보수 언론은 연일 “경제를 마비시키는 악법”이라는 논조를 쏟아냈다. 법안은 본회의 표결에조차 상정되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1989년 크레테 자동차 파업 사태는 공정노동법 제정 논의에 다시 불을 붙였다. 회사는 파업에 참여한 3천여 명의 노동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간부들의 집과 재산이 압류되었다. 이 사건은 대규모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고, 의회에서도 다시 공정노동법 발의가 시도되었다. 그러나 보수정당은 이번에도 강력히 반발했고, 재계는 조직적으로 의원들을 압박했다. 특히 보수 언론은 파업 현장을 “폭력과 무질서의 소굴”로 묘사하며, 법안 자체를 사회 불안의 원인으로 포장했다. 결과적으로 법안은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1985년 들어 전국적인 파업 물결이 다시금 루이나 사회를 흔들었다. 운수·철강·항만 부문에서 동시에 파업이 발생하자,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목소리를 높였고 진보 성향 의원들은 공정노동법 제정안을 다시 상정했다. 이번에는 “정당한 쟁의행위는 민사상 불법행위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핵심 조항이 명문화되었으나, 기업집단은 즉각 반발하며 투자 철수와 대규모 해고를 경고했다. 보수정당은 이러한 논리를 전폭 수용하며 입법을 가로막았고, 보수 언론은 연일 “경제를 마비시키는 악법”이라는 논조를 쏟아냈다. 법안은 본회의 표결에조차 상정되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1989년 크레테 자동차 파업 사태는 공정노동법 제정 논의에 다시 불을 붙였다. 회사는 파업에 참여한 3천여 명의 노동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간부들의 집과 재산이 압류되었다. 이 사건은 대규모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고, 의회에서도 다시 공정노동법 발의가 시도되었다. 그러나 보수정당은 이번에도 강력히 반발했고, 재계는 조직적으로 의원들을 압박했다. 특히 보수 언론은 파업 현장을 “폭력과 무질서의 소굴”로 묘사하며, 법안 자체를 사회 불안의 원인으로 포장했다. 결과적으로 법안은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3.2. 1990년대 [편집]
1990년대의 공정노동법 논의는 출발부터 거대한 저항을 만났다. 1980년대 내내 누적된 초대형 손해배상 소송과 가압류의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여론이 무르익었지만, 1990~1994년 사이 의회에 상정된 모든 법안은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하거나, 본회의 직전 ‘일괄 보류’ 처리로 좌초되었다. 핵심은 조직화된 반대였다. 재계는 루이나 사용자연합회와 대기업 공익재단, 사설 로펌, 정책 싱크탱크를 하나의 전선으로 묶어 “경제를 살리려면 파업의 비용을 높여야 한다”는 구호를 전국 광고와 기고문, 여론조사로 반복 주입했다. 몇몇 신문과 방송은 사설과 해설 프로그램을 통해 공정노동법을 “무제한 파업 면허장”으로 규정했고, 광고주 압박을 동원해 비판적 논조를 봉쇄했다. 의회 안에서는 보수정당이 ‘기업 활동 위축’을 명분으로 상임위 안건조정위 가동, 법사위장 직권보류, 회기 말 ‘계류 폐기’라는 3단 콤보를 고착화했다.
이 시기 가장 치밀했던 방해는 특정 대기업 집단이 주도한 ‘프로젝트 앵커’로 알려져 있다. 재계 내부 문건에 따르면[1] 프로젝트 앵커는 ①노동현장 분쟁을 형사사건화해 노조의 도덕성을 흔들고, ②노조 재정의 자금세탁·횡령 의혹을 반복 제기하며, ③친(親)기업 성향의 시민단체와 싱크탱크를 앞세워 ‘피해액 산정 모델’(손해액 과대계상)을 표준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담았다. 실제로 1992년부터 주요 도시에선 ‘파업으로 인한 국민 피해액 시계’ 같은 퍼포먼스가 등장했고, 저녁 뉴스는 매일같이 ‘국부(國富) 유출 카운터’를 화면 하단에 띄웠다. 법률가 단체와 신학계, 보건의료계 등이 공동 성명을 내어 “과장되고 조작된 숫자”라고 비판했지만, 거대 언론의 프레이밍은 완강했다.
정치권 압박은 노골적이었다. 보수정당의 원내지도부는 ‘투자 철수’와 ‘신용등급 강등’ 가능성을 들며 중도 성향 의원들을 개별 접촉했고, 상임위 청문회에는 기업 쪽 경제전문가들이 대거 증인으로 채택되어 쟁의행위의 사회적 비용만을 과장했다. 특히 1993년 하반기에는 공정노동법을 공동발의하려던 여야 초당적 모임이 연달아 깨졌다. 회의장 앞까지 언론 카메라가 몰리고, 자리 배치표까지 생중계되다시피 하는 분위기에서, 중도 보수 의원들은 “의원회관 사무실까지 항의 전화가 이어진다”며 서명을 철회했다.
긴장감은 1994년에 폭발했다. 2월, 벨포르 항만노조가 합법 파업을 선언하자 사측은 곧장 노조비·상조회 금고에 대하여 자산 가압류를 신청했고, 법원은 사흘 만에 인용 결정을 내렸다. 노조는 구호 자금조차 묶여 병가·산재 조합원 지원이 중단되었고, 이 참담한 장면은 노동계뿐 아니라 종교계와 의사협회, 변호사회까지 거리로 나오게 했다. 5월에는 시민 112만 명이 ‘민사상 손배 남용 금지’ 청원 서명을 의회에 제출했다. 같은 달, 공정노동법을 맡은 하원 노동위원회는 야간 회의를 열어 ‘정당한 쟁의행위의 민사상 위법성 조각’, ‘연대책임 금지(개별 조합원·간부의 개인재산 책임 배제)’, ‘파업 관련 선(先)가압류 금지 및 손해액 산정의 입증책임 전환’ 등 핵심 조항을 포함한 수정안을 의결해 법사위로 넘겼다. 그러나 법사위는 회기 종료 하루 전, 위원장 직권으로 안건을 보류시켰다. 그날 저녁 주요 뉴스는 일제히 “의회, 파업 면허 악법 제동”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 와중에 정치적 폭력까지 개입했다. 1994년 6월, 공정노동법을 주도하던 하원의원 Clara Benton이 지역구 사무소에서 괴한의 피격으로 중상을 입었고, 수개월 치료 끝에 가까스로 의정 활동에 복귀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초당파 모임의 핵심 중재자였던 상원의원 Ethan Marlowe가 심야 귀가 중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수사당국은 “음주 역주행 차량에 의한 단순사고”라고 발표했지만, 벨포르 경찰청 내부 문서 일부가 언론에 유출되면서 “브레이크 라인 절단 의혹”이 제기되었다[2]. 두 사건은 의회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다수 의원이 신변 경호를 요청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바로 그 공포가 역으로 전선(戰線)을 정리했다. 1994년 겨울, 노동계·시민사회·종교계·학계가 ‘공정노동을 위한 시민연대’를 결성하고, “폭력과 로비가 아닌 법과 토론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100일간의 비폭력 농성을 의사당 앞에서 시작했다. 의사당 둘레를 잇는 ‘사슬 없는 인간띠’는 겨울 내내 끊기지 않았고, 야간엔 간호사·의사·법률가 자원봉사자들이 텐트촌을 지켰다. 보수언론의 카메라조차, 새벽마다 도시락을 나르는 항만노조 어머니회, 하교 후 숙제를 들고 나와 촛불을 켜는 고교생들의 얼굴을 외면하기 어려워했다. 그 무렵부터 중도권 여론이 서서히 이동했다.
결정적 전환은 1995년 봄, 의회 운영규칙 개정으로 가능해졌다. 3월 21일, 의회는 신속처리안건(우선심사안건) 지정 요건을 완화하는 운영규칙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다음 날 하원 노동위원회는 공정노동법을 즉시 신속안건으로 지정했다. 법사위는 더 이상 ‘무기한 보류’로 시간을 끌 수 없게 되었고, 4월 10일 법사위 전체회의에 상정된 법안은 입증책임 전환, 선가압류 금지, 연대책임 금지, 필수공익사업의 최소유지의무 명문화(응급의료·소방·전력·수돗물 등)의 절충 패키지를 유지한 채 가결됐다. 보수정당은 필리버스터로 맞섰지만, 4월 말 하원에서 토론종결 동의가 가결되며 5월 2일 표결에 부쳐졌다. 표결 결과는 하원 217–198 통과. 뒤이어 상원은 6월 9일 수정가결 67–33으로 문턱을 넘겼고, 6월 23일 양원 합동조정위원회가 최종 조문을 확정했다.
마침내 1995년 6월 30일, 공정노동법은 양원 최종표결을 통과했다. 법률은 ①정당한 쟁의행위의 민사상 위법성 조각, ②사용자의 손해배상 청구에 대한 엄격한 인과관계·상당인과 요건과 입증책임 전환, ③노조 및 조합원 개인에 대한 선(先)가압류·가처분 금지, ④지휘·배후설에 근거한 무차별적 연대책임 금지, ⑤쟁의행위 중 대체인력 무분별 투입 제한과 최소유지업무 기준을 골자로 했고, 피해액 산정의 독립 감정제와 노사정 조정위원회를 제도화했다. 대통령 재가와 공포는 7월 7일 이루어졌으며, 부칙에 따라 동년 10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공포 직후 재계는 “투자 위축”을 경고했지만, 시장은 급락하지도, 해외자본이 일제히 이탈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무리한 손배·가압류 분쟁이 줄면서 현장의 교섭 구조가 안정되었고, 필수공익사업의 최소유지의무가 명확해져 장기 파업의 사회적 비용도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1995년의 입법은 폭력과 로비, 왜곡된 숫자와 공포 마케팅이 아니라, 시민의 연대와 토론, 제도 설계의 정교함으로 사회적 대등성을 복구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공정노동법은 그해 가을, 의사당 앞 텐트촌에 마지막으로 걸린 현수막의 문장—“파업의 비용을 줄이자는 게 아니다. 불의의 이익을 금지하자는 것이다.”—을 법전에 새겨 넣으며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이 시기 가장 치밀했던 방해는 특정 대기업 집단이 주도한 ‘프로젝트 앵커’로 알려져 있다. 재계 내부 문건에 따르면[1] 프로젝트 앵커는 ①노동현장 분쟁을 형사사건화해 노조의 도덕성을 흔들고, ②노조 재정의 자금세탁·횡령 의혹을 반복 제기하며, ③친(親)기업 성향의 시민단체와 싱크탱크를 앞세워 ‘피해액 산정 모델’(손해액 과대계상)을 표준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담았다. 실제로 1992년부터 주요 도시에선 ‘파업으로 인한 국민 피해액 시계’ 같은 퍼포먼스가 등장했고, 저녁 뉴스는 매일같이 ‘국부(國富) 유출 카운터’를 화면 하단에 띄웠다. 법률가 단체와 신학계, 보건의료계 등이 공동 성명을 내어 “과장되고 조작된 숫자”라고 비판했지만, 거대 언론의 프레이밍은 완강했다.
정치권 압박은 노골적이었다. 보수정당의 원내지도부는 ‘투자 철수’와 ‘신용등급 강등’ 가능성을 들며 중도 성향 의원들을 개별 접촉했고, 상임위 청문회에는 기업 쪽 경제전문가들이 대거 증인으로 채택되어 쟁의행위의 사회적 비용만을 과장했다. 특히 1993년 하반기에는 공정노동법을 공동발의하려던 여야 초당적 모임이 연달아 깨졌다. 회의장 앞까지 언론 카메라가 몰리고, 자리 배치표까지 생중계되다시피 하는 분위기에서, 중도 보수 의원들은 “의원회관 사무실까지 항의 전화가 이어진다”며 서명을 철회했다.
긴장감은 1994년에 폭발했다. 2월, 벨포르 항만노조가 합법 파업을 선언하자 사측은 곧장 노조비·상조회 금고에 대하여 자산 가압류를 신청했고, 법원은 사흘 만에 인용 결정을 내렸다. 노조는 구호 자금조차 묶여 병가·산재 조합원 지원이 중단되었고, 이 참담한 장면은 노동계뿐 아니라 종교계와 의사협회, 변호사회까지 거리로 나오게 했다. 5월에는 시민 112만 명이 ‘민사상 손배 남용 금지’ 청원 서명을 의회에 제출했다. 같은 달, 공정노동법을 맡은 하원 노동위원회는 야간 회의를 열어 ‘정당한 쟁의행위의 민사상 위법성 조각’, ‘연대책임 금지(개별 조합원·간부의 개인재산 책임 배제)’, ‘파업 관련 선(先)가압류 금지 및 손해액 산정의 입증책임 전환’ 등 핵심 조항을 포함한 수정안을 의결해 법사위로 넘겼다. 그러나 법사위는 회기 종료 하루 전, 위원장 직권으로 안건을 보류시켰다. 그날 저녁 주요 뉴스는 일제히 “의회, 파업 면허 악법 제동”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 와중에 정치적 폭력까지 개입했다. 1994년 6월, 공정노동법을 주도하던 하원의원 Clara Benton이 지역구 사무소에서 괴한의 피격으로 중상을 입었고, 수개월 치료 끝에 가까스로 의정 활동에 복귀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초당파 모임의 핵심 중재자였던 상원의원 Ethan Marlowe가 심야 귀가 중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수사당국은 “음주 역주행 차량에 의한 단순사고”라고 발표했지만, 벨포르 경찰청 내부 문서 일부가 언론에 유출되면서 “브레이크 라인 절단 의혹”이 제기되었다[2]. 두 사건은 의회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다수 의원이 신변 경호를 요청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바로 그 공포가 역으로 전선(戰線)을 정리했다. 1994년 겨울, 노동계·시민사회·종교계·학계가 ‘공정노동을 위한 시민연대’를 결성하고, “폭력과 로비가 아닌 법과 토론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100일간의 비폭력 농성을 의사당 앞에서 시작했다. 의사당 둘레를 잇는 ‘사슬 없는 인간띠’는 겨울 내내 끊기지 않았고, 야간엔 간호사·의사·법률가 자원봉사자들이 텐트촌을 지켰다. 보수언론의 카메라조차, 새벽마다 도시락을 나르는 항만노조 어머니회, 하교 후 숙제를 들고 나와 촛불을 켜는 고교생들의 얼굴을 외면하기 어려워했다. 그 무렵부터 중도권 여론이 서서히 이동했다.
결정적 전환은 1995년 봄, 의회 운영규칙 개정으로 가능해졌다. 3월 21일, 의회는 신속처리안건(우선심사안건) 지정 요건을 완화하는 운영규칙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다음 날 하원 노동위원회는 공정노동법을 즉시 신속안건으로 지정했다. 법사위는 더 이상 ‘무기한 보류’로 시간을 끌 수 없게 되었고, 4월 10일 법사위 전체회의에 상정된 법안은 입증책임 전환, 선가압류 금지, 연대책임 금지, 필수공익사업의 최소유지의무 명문화(응급의료·소방·전력·수돗물 등)의 절충 패키지를 유지한 채 가결됐다. 보수정당은 필리버스터로 맞섰지만, 4월 말 하원에서 토론종결 동의가 가결되며 5월 2일 표결에 부쳐졌다. 표결 결과는 하원 217–198 통과. 뒤이어 상원은 6월 9일 수정가결 67–33으로 문턱을 넘겼고, 6월 23일 양원 합동조정위원회가 최종 조문을 확정했다.
마침내 1995년 6월 30일, 공정노동법은 양원 최종표결을 통과했다. 법률은 ①정당한 쟁의행위의 민사상 위법성 조각, ②사용자의 손해배상 청구에 대한 엄격한 인과관계·상당인과 요건과 입증책임 전환, ③노조 및 조합원 개인에 대한 선(先)가압류·가처분 금지, ④지휘·배후설에 근거한 무차별적 연대책임 금지, ⑤쟁의행위 중 대체인력 무분별 투입 제한과 최소유지업무 기준을 골자로 했고, 피해액 산정의 독립 감정제와 노사정 조정위원회를 제도화했다. 대통령 재가와 공포는 7월 7일 이루어졌으며, 부칙에 따라 동년 10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공포 직후 재계는 “투자 위축”을 경고했지만, 시장은 급락하지도, 해외자본이 일제히 이탈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무리한 손배·가압류 분쟁이 줄면서 현장의 교섭 구조가 안정되었고, 필수공익사업의 최소유지의무가 명확해져 장기 파업의 사회적 비용도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1995년의 입법은 폭력과 로비, 왜곡된 숫자와 공포 마케팅이 아니라, 시민의 연대와 토론, 제도 설계의 정교함으로 사회적 대등성을 복구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공정노동법은 그해 가을, 의사당 앞 텐트촌에 마지막으로 걸린 현수막의 문장—“파업의 비용을 줄이자는 게 아니다. 불의의 이익을 금지하자는 것이다.”—을 법전에 새겨 넣으며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