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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2. 개전과 초기 공세 (1958)
2.1. 포르틸락 해전2.2. 체르드 전선2.3. 북동 전선2.4. 남부 전선2.5. 중앙해 해전
3. 교착과 소모전 (1959~1960)
3.1. 체르드 전선의 진지전3.2. 통상파괴전3.3. 콘스탄티노폴 혁명과 해협3.4. 남부 전선의 공방3.5. 사비에트와 청평의 결별
4. 협상국의 반격 (1961~1962)
4.1. 남풍 작전4.2. 추분 공세4.3. 북동 전선의 반격4.4. 동사랜드 봉기4.5. 사비에트의 핵실험
5. 종전 (1963)
5.1. 동맹국의 이탈5.2. 전면 휴전
6. 각주

1. 개요 [편집]

1차 랜드 전쟁의 전개 과정을 다루는 문서.

1차 랜드 전쟁은 크게 네 시기로 나뉜다. 1958년 한 해 동안 동맹국은 지상에서 공세를 펼쳤으나 협상국이 바다를 장악했다. 1959년부터 1960년까지는 전선이 고착된 채 진지전과 통상파괴전이 이어졌다. 1961년부터 1962년까지 협상국이 모든 전선에서 반격에 나섰고, 1963년 동맹국이 차례로 휴전을 요청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2. 개전과 초기 공세 (1958) [편집]

2.1. 포르틸락 해전 [편집]

1958년 3월 14일 체르드 함대는 해협 이북의 내해를 벗어나 중앙 해역으로 나가기 위해 포르틸락해협으로 남하했다. 해협 남쪽 입구에서 기다리던 루이나 함대와 플로렌시아 분견 함대가 이를 맞아 싸웠고, 사흘 동안 이어진 포르틸락 해전에서 체르드 함대는 순양함 여러 척을 잃고 내해로 물러났다. 루이나 해군은 곧바로 해협 입구에 기뢰를 부설하고 초계선을 설치해 해협을 봉쇄했다.

콘스탄티노폴 정부는 개전 직후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도시의 부두 대부분을 쥔 루이나와 플로렌시아의 조차지는 사실상 협상국의 해군 기지로 쓰였고, 적국이 된 체르드의 조차지는 협상국 조차지들에 둘러싸인 채 고립되었다. 해협 체제를 둘러싸고 시작된 전쟁은 이렇게 해협을 협상국의 손에 쥐여 주는 것으로 첫 국면을 열었다.

2.2. 체르드 전선 [편집]

해상에서 밀린 체르드는 지상에서 활로를 찾았다. 3월 하순 체르드군은 두 방향으로 공세를 시작했다. 주공은 서쪽의 플로렌시아 동부 국경을 향했고, 조공은 남쪽의 루이나 북부 국경을 향했다. 플로렌시아의 국경 수비대는 개전 초의 혼란 속에 밀려났고, 주공 방면의 체르드군은 플로렌시아 국경 지대 안쪽으로 수십 km를 진격했다.

그러나 체르드군의 진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5월 플로렌시아는 동원을 마친 예비군을 투입해 국경 지대의 벨레 강을 따라 방어선을 쳤고, 6월 체르드군의 벨레 강 도하 시도는 큰 손실을 내고 실패했다. 남쪽 축의 체르드군도 루이나의 국경 요새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가을이 되자 전선은 벨레 강 선에서 루이나 북부 국경으로 이어지는 선에서 굳어졌다.

2.3. 북동 전선 [편집]

라 마베라 연방군은 개전 직후 웨스타시아 국경을 넘었다. 오토 폰 하르트만 원수가 지휘한 웨스타시아군은 국경 지대를 일부 내주면서도 미리 구축해 둔 방어선에서 라 마베라군을 막아 냈다. 여름이 되자 북동 전선도 국경 부근에서 교착되었다.

2.4. 남부 전선 [편집]

해협 남부에서는 동맹국의 공세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비에트 인민해방군은 동쪽에서, 고랜드군은 서쪽에서 동시에 유고랜드로 밀고 들어갔다. 유고랜드군과 웨스타시아 주둔군은 두 방향의 공세를 감당하지 못했고, 6월까지 동맹국은 해안의 일부를 제외한 유고랜드 국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협상국은 남은 해안 지대를 교두보로 삼아 버텼다. 루이나 해군이 바다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교두보에는 병력과 물자가 계속 들어왔고, 함포 사격은 사비에트군의 공격을 번번이 꺾었다. 이 교두보는 3년 뒤 협상국의 반격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2.5. 중앙해 해전 [편집]

1958년 7월 사비에트 수상 함대는 유고랜드 교두보로 향하는 협상국의 보급선을 끊고, 가능하다면 북쪽의 체르드와 연결하기 위해 중앙 해역으로 출격했다. 루이나 함대는 이를 중앙 해역에서 맞아 싸웠고, 이 중앙해 해전에서 사비에트 함대는 주력함 여러 척을 잃고 퇴각했다.

이후 사비에트 수상 함대는 종전 때까지 항구를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중앙해 해전으로 해협 북부의 체르드·라 마베라와 해협 남부의 사비에트·고랜드를 잇는 바닷길은 완전히 끊겼고, 동맹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서로 갈라진 채 싸워야 했다.

3. 교착과 소모전 (1959~1960) [편집]

3.1. 체르드 전선의 진지전 [편집]

1959년 봄 협상국은 벨레 강 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시도했으나 체르드군의 요새선을 뚫지 못했다. 이후 체르드 전선은 양측이 참호와 콘크리트 요새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진지전으로 바뀌었다. 포격과 돌격이 되풀이되는 동안 전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사상자만 늘어났다.

진지전이 길어질수록 봉쇄의 효과가 드러났다. 체르드는 해협이 막힌 뒤 연료와 탄약, 식량을 중립국 델라웨어를 거치는 육로에 의존해야 했는데, 협상국의 외교적 압력으로 이 통로마저 점점 좁아졌다. 1960년 무렵 체르드군은 포탄을 배급제로 쓸 만큼 물자가 부족했다.

3.2. 통상파괴전 [편집]

수상 함대가 무력화된 사비에트는 1959년부터 잠수함으로 중앙 해역의 협상국 상선을 공격했다. 협상국의 상선 피해는 1959년 가을 정점에 이르렀으나, 협상국은 호송 선단 체계를 도입하고 북산과 빌베른의 항만을 거점으로 대잠 초계기와 호위함을 늘려 대응했다. 1960년 말부터 상선 피해는 눈에 띄게 줄었고, 사비에트 잠수함의 손실은 늘어났다.

3.3. 콘스탄티노폴 혁명과 해협 [편집]

전쟁은 콘스탄티노폴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조차지가 협상국의 해군 기지로 쓰이면서 도시는 사실상 전쟁의 한가운데에 놓였고, 물가 폭등과 외국 군대의 주둔은 1958년 11월 총선으로 일당독재를 굳힌 국민질서당 정권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1959년 3월 13일 신보석운동의 무장대가 봉기해 정권을 무너뜨렸고, 혁명정부는 6월 1일 「조차지 회수령」을 공포해 모든 조차 계약의 무효를 선언했다.

조차지 회수는 협상국의 해협 봉쇄를 뿌리째 흔들었다.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는 혁명정부를 승인하지 않았지만, 조차지의 부두와 연료 기지를 잃은 협상국 함대는 콘스탄티노폴 수역 바깥으로 물러나 바다 위에서 봉쇄를 이어 가야 했다. 사비에트는 곧바로 혁명정부를 승인하고 군사고문 약 180명과 기술자 약 600명을 보냈다.

혁명정부는 전쟁 내내 중립을 유지했으나, 중립국 선적으로 위장한 선박이 콘스탄티노폴을 거쳐 체르드와 라 마베라로 물자를 나르는 일이 잦아졌다. 협상국은 이를 봉쇄 돌파로 간주했고, 1960년 7월 루이나 기업 하트웰 광업이 운영하던 타우로 광산이 국유화되자 루이나는 1961년 콘스탄티노폴에 대한 금수 조치를 단행했다.[1]

3.4. 남부 전선의 공방 [편집]

1959년과 1960년 남부 전선에서는 유고랜드 해안의 협상국 교두보를 둘러싼 공방이 이어졌다. 사비에트군은 여러 차례 교두보를 공격했으나 협상국의 함포 사격과 해상 증원을 이겨 내지 못했다. 점령지에서는 동맹국 점령군에 맞선 유고랜드 주민들의 저항이 이어졌고, 점령군은 보복으로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

3.5. 사비에트와 청평의 결별 [편집]

전쟁 초기 청평은 청소합작 협정에 따른 차관 상환의 일환으로 사비에트에 곡물과 원자재를 보냈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으로 청평 경제가 흔들리고 차관 상환이 늦어지자, 사비에트는 1959년부터 원조를 단계적으로 줄였고 1960년에는 기술자 대부분을 철수시켰다. 청평의 곡물이 끊기면서 사비에트의 전쟁 경제는 소련의 원조에 더 크게 기대게 되었다.

4. 협상국의 반격 (1961~1962) [편집]

4.1. 남풍 작전 [편집]

1961년 4월 루이나·플로렌시아·빌베른 연합군은 유고랜드 해안에 대규모 상륙을 감행했다. 남풍 작전으로 불린 이 작전에서 연합군은 사비에트군 전선의 후방 해안에 상륙하는 동시에 기존 교두보에서도 돌파를 시작해 동맹국 점령군을 양쪽에서 압박했다. 보급이 약했던 고랜드군의 서쪽 전선이 먼저 무너졌다.

1962년 초까지 협상국은 유고랜드 국토 대부분을 되찾았고, 사비에트군과 고랜드군은 전쟁 전 국경선까지 밀려났다. 3년 넘게 이어진 점령에서 벗어난 유고랜드는 웨스타시아의 괴뢰국 체제로 돌아갔다.

4.2. 추분 공세 [편집]

1961년 9월 플로렌시아군이 주도하고 루이나 북부군이 가세한 추분 공세가 시작되었다.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체르드군의 요새선은 몇 주에 걸친 공방 끝에 무너졌고, 협상국은 벨레 강 동쪽의 국경 지대를 되찾은 데 이어 전선을 체르드 영내로 밀어 올렸다.

1962년 내내 협상국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체르드는 봉쇄로 인한 식량난과 잇단 패전으로 국내 정세가 급격히 불안해졌고, 연말 무렵 협상국군은 체르드의 주요 공업 지대에 접근했다.

4.3. 북동 전선의 반격 [편집]

1962년 봄 하르트만 원수가 이끄는 웨스타시아군이 북동 전선에서 반격에 나섰다. 봉쇄로 지친 라 마베라군은 버티지 못하고 국경 밖으로 밀려났다. 웨스타시아는 국경을 넘어 라 마베라 영내로 진격하기를 원했으나, 협상국 최고전쟁회의는 전선이 지나치게 넓어지는 것을 우려해 이를 제지했다.

4.4. 동사랜드 봉기 [편집]

1961년부터 청평이 국경 산악로를 통해 동사랜드 인민적군에 소총과 박격포를 보내기 시작하자, 잦아들던 동사랜드의 항전이 다시 격화되었다. 협상국 역시 1960년 무렵부터 빌베른을 거치는 해상 경로로 인민적군에 무전기와 의약품, 자금을 몰래 보내고 있었다. 인민적군은 1961~1962년 건기 공세로 자치공화국 북부의 군 소재지 여러 곳을 점령했다.

동사랜드 봉기로 사비에트는 남부 전선에 투입해야 할 병력을 동부로 돌려야 했다. 청평과의 국경 긴장, 전쟁과 우주경쟁에 따른 재정 부담이 겹치면서 사비에트 지도부는 동사랜드를 붙들어 두는 비용이 이득을 넘어섰다고 판단했고, 1962년 11월 인민적군과 정전에 합의했다.

4.5. 사비에트의 핵실험 [편집]

1962년 10월 28일 사비에트는 자국 내륙 상공 290km에서 고고도 핵실험을 실시했다. 협상국은 이를 사비에트 본토로 진격할 경우 핵무기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경고로 받아들였다. 협상국 최고전쟁회의는 남부 전선에서 전쟁 전 국경을 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고, 확전을 가장 경계한 나라는 루이나였다.

궤도 위의 핵폭발이 위성과 통신에 미치는 영향이 드러나자 사비에트와 루이나 모두 위기감을 느꼈다. 이 경험은 전쟁이 끝난 뒤 사비에트가 1964년 3월 대기권과 우주 공간의 핵실험을 금지하는 조약에 가입하고, 1965년 벨포르와 크라슬리스크를 잇는 직통선이 개설되는 배경이 되었다.

5. 종전 (1963) [편집]

5.1. 동맹국의 이탈 [편집]

1963년 3월 사비에트는 크라슬리스크 조약으로 동사랜드 자치공화국의 연방 탈퇴를 승인했다. 같은 해 사비에트에는 흉작이 들어 곡물을 수입해야 할 처지가 되었고, 전쟁을 이어 갈 여력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해협 북부에서는 체르드가 먼저 무너졌다. 협상국군이 공업 지대까지 밀고 들어오고 도시마다 식량 부족에 항의하는 시위가 이어지자, 체르드 정부는 1963년 5월 협상국에 단독 휴전을 요청했다. 해협 북부에서 홀로 남은 라 마베라도 6월 휴전에 합의했다.

5.2. 전면 휴전 [편집]

상세 내용은 오로아 조약 문서 참고.


북부의 동맹국이 이탈하자 사비에트와 고랜드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1963년 8월 20일 두 나라가 협상국과 휴전에 합의하면서 모든 전선에서 포성이 멎었다. 9월 16일 중립국 델라웨어의 헨셀슈타인 식민정부 수도인 오로아에서 강화 회의가 열렸고, 11월 30일 오로아 조약이 서명되면서 5년 8개월에 걸친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6. 각주 [편집]

[1] 콘스탄티노폴의 혁명과 조차지 회수 과정은 콘스탄티노폴/역사 문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