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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 역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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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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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잭슨
1977–1978 · 실각
군정 · 비헌정기
비달 파브르
국가비상위원회 위원장 (1978) · 암살
국가비상위원회
과도 군정 (1978–1980)
제4공화국 · 제5공화국
제25대
제2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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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983 · 제4공화국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
1983–1989 · 제5공화국
제6공화국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테디 해밀턴
1989–1993
제31대
제32대
제33대
제34대
리처드 콜턴
2017–2021
제35·36대
제37대
미정
2029–
테디 해밀턴
Teddy Hamilton|Тедди Хамильтон
파일:테디해밀턴.png
본명
테디 어그레이 해밀턴
Teddy Agrey Hamilton
출생
1938년 9월 17일
루이나 벨포르
사망
1993년 8월 2일 (향년 54세)
루이나 크레테 (자살)
국적
신체
186cm, 91kg, 혈액형 B형
종교
무교
직업
정치인, 군인, 검사
소속 정당
학력
벨포르 제3고등학교 (졸업)
루이나 공군사관학교 (졸업)
루이나 국립대학교 (법학과 / 학사)
병역
루이나 공군 제88전투비행단 (대위 전역)
대통령 재임
제27대 루이나 대통령
(1989년 9월 1일 ~ 1993년 4월 12일)
탄핵 파면 · 재임 3년 224일
전임자
후임자
린드 B. 랭스턴 (권한대행 경유)
서명
정치 성향
안보국가주의, 법질서주의, 반의회주의, 권위통치론
대표 저서
《공화국의 검》(1985)
《하늘과 정의》(1992)
주요 정책 성과
- 1990년 검찰청법 개정, 검찰권 독립화 조치 단행
- 공군 전력 재편 및 제2방공사령부 창설
- 1991년 반역죄 처벌 강화법 제정 (반역죄에 한해 사형 부활)
- 국가안전기획부 신설
- 4.13 유혈진압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중단
주요 경력
- 루이나 공군 전투조종사 (1961~1968)
- 벨포르 지방검찰청 검사 (1973~1981)
- 중앙검찰청 공안부장 (1981~1986)
- 루이나 중앙검찰청 검사장 (1986~1988)
- 루이나 민주공화당 부총재 (1988~1989)
- 루이나 제27대 대통령 (1989~1993)
기타 이력
- 제6공화국 초대 대통령
- 1.10 민주화 선언 이후 처음 치러진 직선에서 야권 분열로 득표율 36.2%로 당선
- 당내 후보로 내정되어 있던 토머스 J. 윈필드를 경선에서 꺾고 출마권을 확보
- 강경한 안보통치로 '하늘의 검'이라 불림
- 1991년 반역죄 처벌 강화법으로 1963년 헨리 모리슨이 폐지한 사형이 28년 만에 부활
-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에 이어 사형이 선고된 두 번째 전직 대통령이자 최초의 탄핵 대통령
- 국립묘지 안장이 거부되어 가족장으로 치러짐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성장2.2. 공군 시절2.3. 법조계 입문2.4. 검사 시절
2.4.1. 벨포르 지방검찰청2.4.2. 합동수사본부 파견2.4.3. 중앙검찰청 공안부장2.4.4. 중앙검찰청 검사장
2.5. 정계 입문과 1989년 대통령 선거
3. 대통령 재임
3.1. 취임과 국정 기조3.2. 검찰 개편3.3. 안보 정책3.4. 국가안전기획부 신설3.5. 반역죄 처벌 강화법과 사형 부활3.6. 4.13 진상조사위원회 중단3.7. 1992년 총선과 고립3.8. 스카른 간첩단 사건
4. 탄핵
4.1. 3.4 계엄 시도4.2. 탄핵소추4.3. 헌법재판소 결정
5. 파면 이후
5.1. 구속과 재판5.2. 사망5.3. 장례와 예우
6. 평가
6.1. 비판6.2. 옹호론6.3. 여론
7. 기록8. 정치 성향9. 어록10. 저서11. 가족12. 여담13. 관련 문서

1. 개요 [편집]

루이나의 제27대 대통령.

제6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자, 루이나 헌정사상 유일하게 탄핵으로 파면된 대통령이다. 공군 전투조종사에서 검사로, 다시 대통령이 된 이례적인 경력의 소유자로, 재임 중 강경한 안보통치를 펴 하늘의 검이라 불렸다.

1.10 민주화 선언 이후 처음 치러진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 분열을 틈타 36.2%의 득표로 당선되었으나, 검찰과 신설 정보기관을 사유화하고 1991년 반역죄 처벌 강화법으로 사형제를 부활시키는 등 권위주의 통치로 회귀했다. 1993년 3월 비상계엄 선포를 시도했다가 군의 불응으로 무산되자 의회의 탄핵소추를 받았고, 같은 해 4월 12일 헌법재판소에서 파면되었다. 이후 내란수괴죄 등으로 기소되어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선고 6일 뒤 크레테구치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질서 없는 자유는 폭동의 다른 이름입니다."

1989년 9월 1일, 제27대 대통령 취임사

2. 생애 [편집]

2.1. 출생과 성장 [편집]

1938년 9월 17일 벨포르 남부 헤이즐브룩의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라이오넬 A. 해밀턴은 루이나 공군 정비부사관이었고, 어머니 이디스 해밀턴은 벨포르 시립병원 세탁실에서 일했다. 위로 누나 도로시가 있었다.

본명의 '테디'는 시어도어(Theodore)의 애칭이 아니라 그 자체로 호적에 오른 이름이다. 아버지가 애칭으로 부르던 것을 출생신고 때 그대로 적었다는 것이 가족의 설명이다. 미들네임 '어그레이(Agrey)'는 외조부의 이름에서 따왔다.

아버지는 1944년 전시 근무 중 사망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해밀턴은 유자녀 원호 대상으로 학비를 지원받아 벨포르 제3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훗날 그 자신은 국립묘지 안장이 거부되어, 부자가 같은 묘역에 묻히지 못하게 된 것을 두고 여러 차례 언급이 있었다.

2.2. 공군 시절 [편집]

1957년 루이나 공군사관학교 제12기로 입교해 1961년 소위로 임관, 곧바로 전투조종 병과를 택했다. 임관 직후 제88전투비행단에 배속되어 전역할 때까지 같은 부대에서 복무했다.

1966년 북방 공역에서 벌어진 영공 침범 사건 당시 요격 편대의 요격기 조종사로 출격해 무공훈장을 받았다. 총 비행시간은 2,140시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1968년 3월 야간 훈련 비행 중 비상탈출 과정에서 척추를 다쳐 비행 부적합 판정을 받았고, 같은 해 대위로 전역했다. 조종석을 떠난 뒤의 진로로 법조계를 택한 것에 대해 그는 훗날 "하늘에서 지킨 것을 땅에서도 지키고 싶었다"고 썼다.

2.3. 법조계 입문 [편집]

전역 직후인 1968년 가을 루이나 국립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만 30세의 늦은 입학이었다. 재학 중이던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1972년 졸업 후 사법연수 과정을 마쳐 1973년 검사로 임용되었다.

2.4. 검사 시절 [편집]

2.4.1. 벨포르 지방검찰청 [편집]

1973년 벨포르 지방검찰청에 임용되어 형사부를 거쳐 공안부로 옮겼다. 조서를 직접 손으로 다시 쓰고 피의자를 밤새 앉혀 두는 조사 방식으로 '얼음 검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2.4.2. 합동수사본부 파견 [편집]

1978년 10.10 군사반란 이후 국가비상위원회가 설치한 합동수사본부에 파견검사로 차출되어 1979년까지 시국사건 수사를 담당했다. 이 시기의 활동 내역은 1980년대 내내 공개되지 않았고, 1993년 탄핵 국면에서야 일부 문서가 공개되었다. 파견 기간 중 그가 직접 처리한 사건은 47건으로 확인된다.

훗날 그가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 정권에서 초고속으로 승진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이 시기의 이력이 꼽힌다. 반대로 벨포르의 봄 관련 인사들이 그를 끝까지 신뢰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2.4.3. 중앙검찰청 공안부장 [편집]

1981년 중앙검찰청 공안부장으로 승진했다. 1983년 벨포르 폭동4.13 유혈진압 이후의 사법처리를 총괄해, 관련자 1,900여 명을 기소하고 이 중 다수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1] 이 처리 실적이 그를 정권의 핵심 인사로 올려놓았다.

2.4.4. 중앙검찰청 검사장 [편집]

1986년 중앙검찰청 검사장에 임명되었다. 1987년 12.23 방침 발표 이후 전국으로 번진 시위 사건을 대량으로 처리했으나, 1988년 1.10 민주화 선언 직후에는 같은 손으로 구속자 석방 실무를 지휘해야 했다. 이 경험이 그의 반의회주의 성향을 굳혔다는 분석이 있다.

2.5. 정계 입문과 1989년 대통령 선거 [편집]

1988년 12월 민주연합민주공화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재창당하자, 해밀턴은 검사장직을 사퇴하고 부총재로 영입되었다. 베인브리지는 명예총재로 물러나면서 사무총장 출신 토머스 J. 윈필드를 후보로 내정했으나, 1989년 3월 전당대회 경선에서 해밀턴이 대의원 1,204표를 얻어 1,098표의 윈필드를 꺾고 후보 자리를 차지했다.

1989년 7월 13일 치러진 선거는 제6공화국 헌법에 따른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였다. 야권은 온건파와 재야 세력이 단일화에 실패해 두 명의 후보를 냈고, 해밀턴은 36.2%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후보
정당
득표율
테디 해밀턴
민주공화당
36.2%
에이머스 W. 홀리스터
국민민주당
29.1%
오언 R. 페인
신정치회의
27.3%
매리언 L. 그린쇼
사회민주당
5.4%
기타
-
2.0%

투표율은 89.4%였다. 야권 두 후보의 합산 득표는 56.4%로, 단일화 실패가 결과를 갈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3. 대통령 재임 [편집]

3.1. 취임과 국정 기조 [편집]

1989년 9월 1일 취임했다. 취임사에서 "질서 없는 자유는 폭동의 다른 이름"이라고 선언하며 법질서 확립과 안보 강화를 국정의 두 축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의회는 1988년 총선에서 구성된 여소야대 상태였다. 하원 300석 중 민주공화당은 118석에 그쳤고, 해밀턴은 임기 내내 단 한 번도 의회 다수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 조건이 그의 통치 방식을 의회 우회 쪽으로 몰아갔다.

3.2. 검찰 개편 [편집]

1990년 3월 검찰청법을 개정해 법무부 장관의 구체적 사건 수사지휘권을 폐지했다. 명목은 검찰권 독립이었으나, 동시에 검찰총장 임명에 대한 의회 동의 절차를 삭제하고 대통령의 직접 임면권을 명문화해 실질적으로는 대통령이 검찰을 직할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검찰총장에는 공안부장 시절의 직속 부하였던 하워드 M. 렌들이 임명되었고, 중앙검찰청 공안부 인력은 2년 만에 두 배로 늘었다. 이 개정은 1994년 랭스턴 정부에서 다시 뒤집혔다.

3.3. 안보 정책 [편집]

공군 출신 대통령답게 국방 예산에서 공군 비중을 크게 늘렸다. 1990년 10월 수도권과 남부 공역을 나누어 담당하는 제2방공사령부를 창설하고, 노후 요격기를 교체하는 전력 재편 사업을 추진했다.

이 정책은 그의 재임 중 유일하게 초당적 지지를 받았고, 오늘날까지도 그를 옹호하는 거의 유일한 근거로 인용된다. 다만 제2방공사령부가 1993년 계엄 시도 당시 출동 명령을 받은 부대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창설 의도 자체를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3.4. 국가안전기획부 신설 [편집]

1991년 3월 대통령 직속 정보기관인 국가안전기획부를 신설했다. 국내 보안정보 수집과 대공수사를 총괄하는 기구로, 1980년 베인브리지가 해체한 국가보안청의 사실상 부활이라는 비판이 즉각 제기되었다.

초대 부장에는 합동수사본부 시절 인연이 있던 콘래드 V. 슈라이버가 임명되었다. 안기부는 창설 2년 만에 정원 4,200명 규모로 팽창했으며, 의회의 예산 심사를 받지 않는 특수활동비 비중이 전체 예산의 절반을 넘었다. 이 기관은 이후 랭스턴 정부에서 대공수사권이 광역수사국으로 이관되며 축소되었고, 잔여 기능이 분산되면서 해체되었다.

3.5. 반역죄 처벌 강화법과 사형 부활 [편집]

1991년 6월, 여당 단독으로 반역죄 처벌 강화법을 처리했다. 내란·외환 등 반역 범죄에 한해 법정형의 상한을 사형으로 되돌리는 법으로, 1963년 헨리 모리슨 정부가 사형을 폐지한 지 28년 만의 부활이었다.

반역죄 처벌 강화법

제3조(형의 가중) ① 형법 제87조 내지 제90조의 죄를 범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제7조(특별재판절차) ① 이 법에 규정된 죄의 제1심은 대통령이 지정하는 지방법원 합의부의 전속관할로 한다.
② 제1항의 사건에 대하여는 변론을 병합하거나 심리를 비공개로 할 수 있다.


야당은 표결에 불참했고, 법조계와 종교계가 일제히 반대 성명을 냈다. 해밀턴은 서명식에서 "국가를 무너뜨리려는 자에게 국가가 관용을 베풀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이 법은 2년 뒤 그 자신에게 적용되었다.

3.6. 4.13 진상조사위원회 중단 [편집]

1988년 6월 의회 결의로 설치된 4.13 유혈진압 진상조사위원회는 1990년 2월 사실상 활동을 멈췄다. 정부가 군 작전 문서 일체를 국가기밀로 분류해 제출을 거부했고, 이어 위원회 운영 예산이 90% 삭감되었기 때문이다.

해밀턴 본인이 1983년 진압 이후 사법처리를 총괄한 당사자였다는 점에서, 이 조치는 이해충돌을 넘어 증거 인멸 시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위원회는 1993년 랭스턴 정부에서 재가동되었다.

3.7. 1992년 총선과 고립 [편집]

1992년 4월 총선에서 민주공화당은 하원 300석 중 94석으로 주저앉았다. 국민민주당·신정치회의·사회민주당이 합쳐 190석을 넘겼고, 야권은 곧바로 안기부 특수활동비에 대한 국정조사를 예고했다.

같은 해 해밀턴은 재임 중 저서 《하늘과 정의》를 출간했다. 통치 철학을 정리한 이 책에서 그는 의회를 "다수의 이름을 빌린 무책임"이라고 규정했고, 이 표현은 야권을 자극해 정국을 더욱 얼어붙게 만들었다.

3.8. 스카른 간첩단 사건 [편집]

1991년 11월, 국가안전기획부는 스카른 조선소 노동조합 간부 등 11명을 적성국 공작망으로 발표했다. 반역죄 처벌 강화법이 적용된 첫 사건이었다.

재판은 같은 법 제7조의 특별재판절차에 따라 비공개로 진행되어 이례적으로 빠르게 끝났고, 1992년 8월 대법원에서 주범으로 지목된 에드윈 T. 로크와 하비 L. 콜슨에게 사형이 확정되었다. 두 사람은 1992년 12월 18일 형이 집행되었다. 루이나에서 29년 만에 집행된 사형이었다.

이듬해 1993년 1월, 안기부 대공수사국 전 수사관 글렌 M. 오델이 양심선언을 통해 사건 전체가 조작되었음을 폭로했다. 자백은 고문으로 받아냈고 물증인 무전기는 수사관이 직접 구입해 넣은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보도가 이어지면서 여론이 급격히 돌아섰고, 2월 의회가 국정조사에 착수했으나 해밀턴은 국가기밀을 이유로 자료 제출을 전면 거부했다.

이 사건은 1996년 재심에서 관련자 전원 무죄가 선고되었다. 사형이 집행된 두 사람에 대한 사후 무죄 선고는 루이나 사법사상 최초였다.

4. 탄핵 [편집]

4.1. 3.4 계엄 시도 [편집]

1993년 3월 4일 새벽, 해밀턴은 국무회의 의결 없이 전국 비상계엄 선포를 지시했다. 명분은 "국가 전복 세력의 조직적 준동"이었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 오스왈드 M. 페리시가 서명을 거부했고, 합동참모의장 델버트 R. 캐즈웰 대장 역시 명령 수령 자체를 거부했다. 대통령이 지휘계통을 건너뛰어 수도방위사령부와 제2방공사령부에 직접 하달한 출동 명령도 두 부대 지휘관이 모두 불응했다. 계엄은 선포되지 못한 채 그날 오전 중에 무산되었다.

같은 날 오후 페리시 장관이 사임하면서 전말이 언론에 공개되었고, 여당 내에서도 이탈이 시작되었다.

4.2. 탄핵소추 [편집]

3월 12일 야 3당이 공동으로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소추 사유는 네 가지였다.
  • 헌법상 요건을 갖추지 못한 비상계엄 선포 시도 및 병력 출동 명령
  • 국가안전기획부를 동원한 야당 정치인 사찰과 매수
  • 스카른 간첩단 사건의 조작 인지·묵인 및 사형 집행 강행
  • 의회 국정조사 방해와 헌법기관 무력화 시도

3월 18일 하원 본회의에서 표결이 이루어졌다.
재적
찬성
반대
기권·무효
300
241
48
11

여당 내에서도 60명 이상이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분석되었다.

4.3. 헌법재판소 결정 [편집]

1993년 4월 12일, 루이나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9인 전원일치로 파면을 결정했다.

피청구인은 헌법이 정한 요건과 절차를 갖추지 아니한 채 군 병력의 출동을 명령함으로써,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군통수권을 헌정질서 자체를 향해 사용하였다. 이는 대통령의 헌법수호 의무를 정면으로 위반한 것으로서, 그 위반의 중대성은 국민이 선거를 통하여 부여한 신임을 박탈함이 정당화될 정도에 이른다.

- 1993헌나1 결정 요지


재임 3년 224일 만이었다. 이후 대통령 권한은 국무총리 벤저민 R. 아이브스가 대행했고, 잔여 임기가 5개월도 남지 않아 보궐선거 없이 예정대로 7월 정기 대선이 치러졌다.

5. 파면 이후 [편집]

5.1. 구속과 재판 [편집]

파면 다음 날인 4월 13일 검찰에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진상조사위원회를 무력화한 그가 진압 10주기 바로 그날 수사 대상이 된 것을 두고 여러 논평이 나왔다.

4월 20일 구속, 4월 27일 내란수괴·직권남용·불법체포감금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재판은 반역죄 처벌 강화법 제7조의 특별재판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해밀턴 자신이 만든 신속 절차가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7월 27일 벨포르지방법원은 병력 출동 명령이 실제로 하달된 이상 내란의 실행에 착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며 유죄를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그가 1991년 부활시킨 형이었다.

5.2. 사망 [편집]

1993년 8월 2일, 항소심을 준비하던 중 크레테구치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54세.

짧은 유서가 발견되었으며, 유족의 동의를 얻어 공개된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가 만든 법에 따라 심판받았다. 그것으로 족하다."


피고인 사망으로 형사재판은 공소기각되었고, 사형 판결은 확정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법적으로는 어떤 죄도 확정받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5.3. 장례와 예우 [편집]

정부는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른 예우가 파면과 실형 선고로 이미 상실되었다고 판단해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했다. 장례는 국가 의전 없이 가족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벨포르 근교 엘름허스트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전사한 아버지가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것과 대비되어, 이 결정은 당시 언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장면 중 하나가 되었다.

6. 평가 [편집]

6.1. 비판 [편집]

민주화 이후 첫 직선 대통령이면서도 권위주의 통치로 회귀했다는 점에서 루이나 현대사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인물 중 하나다. 특히 다음 세 가지가 반복적으로 지적된다.
  • 사법과 정보기관의 사유화: 검찰청법 개정과 안기부 신설로 통치 수단을 인사권 아래 묶었다.
  • 무고한 시민에 대한 사형 집행: 스카른 간첩단 사건은 재심에서 전원 무죄가 확정되었다.
  • 군을 동원한 헌정질서 파괴 시도: 군의 거부로 미수에 그쳤을 뿐 의도는 명확했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판단이다.

그가 사형제를 부활시키지 않았다면 스카른 사건 피해자들이 처형되지 않았을 것이고, 동시에 그 자신도 사형을 선고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이 시기를 다룰 때 거의 빠짐없이 언급된다.

6.2. 옹호론 [편집]

공군 전력 재편과 제2방공사령부 창설은 오늘까지도 실질적 성과로 인정된다. 일부 보수 진영과 예비역 단체는 냉전이 계속되는 안보 환경에서 그의 강경 노선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하며, 확정판결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사법적 평가가 미완이라고 본다.

다만 이런 옹호론도 스카른 간첩단 사건까지 변호하는 경우는 드물다.

6.3. 여론 [편집]

2020년 벨포르 자유대학 사회조사연구소의 역대 대통령 호감도 조사에서 최하위를 기록했다. 리처드 잭슨, 비달 파브르보다도 낮은 수치였다.

7. 기록 [편집]

기록
내용
최초
탄핵으로 파면된 대통령
최초
공군사관학교 출신 대통령
두 번째
사형을 선고받은 전직 대통령[2]
유일
재임 중 사형제를 부활시키고 그 형을 선고받은 대통령
최단
제6공화국 대통령 중 최단 재임 (3년 224일)

8. 정치 성향 [편집]

안보국가주의법질서주의를 결합한 노선을 폈다. 국가의 존립을 모든 가치에 앞세우고, 그 수단으로 형벌권의 강화를 택한 것이 특징이다.

동시에 뚜렷한 반의회주의 성향을 보였다. 그는 의회를 심의기관이 아니라 행정을 지연시키는 장애물로 보았으며, 《하늘과 정의》에서 대통령제를 "위임받은 단일 의지"로 규정했다. 여소야대 상황이 임기 내내 이어지면서 이 성향은 점점 극단화되었고, 결국 계엄 시도로 귀결되었다.

경제 정책에서는 특별한 색채가 없었고, 베인브리지 정부의 기조를 대체로 이어받았다.

9. 어록 [편집]

질서 없는 자유는 폭동의 다른 이름입니다.
1989년 9월 1일, 취임사
국가를 무너뜨리려는 자에게 국가가 관용을 베풀 이유는 없습니다.
1991년 6월, 반역죄 처벌 강화법 서명식
다수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책임은 언제나 한 사람이 집니다.
1992년, 《하늘과 정의》
나는 법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법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1993년 5월, 검찰 조사 중

10. 저서 [편집]

제목
연도
비고
공화국의 검
1985
공안부장 재직 중 출간
하늘과 정의
1992
재임 중 출간, 사후 절판

11. 가족 [편집]

관계
이름
비고
아버지
라이오넬 A. 해밀턴
공군 부사관, 1944년 사망
어머니
이디스 해밀턴
누나
도로시 해밀턴
배우자
헬렌 해밀턴
1966년 결혼, 2011년 사망
장남
로버트 A. 해밀턴
변호사
장녀
앨리스 해밀턴

배우자 헬렌은 1993년 이후 일체의 공개 활동을 하지 않았다. 장남 로버트는 2005년 아버지에 대한 재심 청구를 검토했으나, 공소기각으로 확정판결이 없어 재심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산되었다.

12. 여담 [편집]

  • 별명 '하늘의 검'은 1991년 한 여당 의원이 국정감사장에서 쓴 표현에서 나왔다. 본인은 이 별명을 마음에 들어 해 직접 인용하기도 했으나, 파면 이후에는 조롱조로 쓰이게 되었다.
  •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고, 조종사 시절 습관대로 매일 04시 30분에 기상했다.
  • 관저 집무실에 자신이 몰던 요격기 모형을 놓아두었다. 파면 당일 이 모형을 직접 챙겨 나온 사진이 남아 있다.
  • 재임 중 공군 비행복 차림으로 부대를 시찰하는 일이 잦아, 문민 통제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받았다.
  • 서명에 조종사 시절 콜사인에서 딴 사선 문양이 들어간다.
  • 그가 서명에 사용하던 만년필은 반역죄 처벌 강화법 서명식에서 쓴 것과 같은 것으로, 현재 유족이 보관 중이다.
  • 벨포르 시내에 있던 그의 흉상은 1993년 8월 시의회 의결로 철거되었다.

13. 관련 문서 [편집]

[1] 당시 루이나는 1963년 헨리 모리슨 정부의 형법 개정으로 사형이 폐지된 상태였으므로 사형 구형은 불가능했다.[2] 첫 번째는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로, 1979년 국가비상위원회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벨포르의 봄 때 석방되었다. 베인브리지는 1995년 베인브리지 내란 재판에서 다시 사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