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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온 작전
Operation ORION
작전 이튿날 촬영된 카르바즈 저택 외벽
실행 일시
2011년 5월 7일 00시 31분 ~ 01시 11분 (현지 시각)
실행 지역
유고랜드 나크시에 로스탐 부 카르바즈
작전 유형
비밀 공작 / 표적 급습
주관 기관
실행 부대
루이나 해군 특수전단 제1특수작전전대 (24명)
협력
유고랜드 내무부 국가보안국 (표적 미통보)
승인
리처드 엘스워스 (루이나 대통령)
지휘
마거릿 E. 홀든 (국가정보국장)
에드워드 J. 마셜 (합동특수작전사령관)
표적
이브라힘 나쉬디 (작전 부호 「베텔게우스」)
결과
이브라힘 나쉬디 사살
사상
저택 측 사망 5명, 부상 3명
루이나 측 사상자 없음 (헬기 1대 손실)
후속
아이만 알자와히리의 알자미아 승계
유고랜드 의사 와지드 알라위 체포

1. 개요2. 명칭3. 배경
3.1. 토라보라 이후3.2. 무인기 공습과 유고랜드3.3. 수색의 정체
4. 추적
4.1. 전령4.2. 구금·신문 프로그램과 첫 단서4.3. 2010년 통화4.4. 카르바즈 저택4.5. 공동 감시4.6. 예방접종 사업
5. 결정
5.1. 확률 논쟁5.2. 세 가지 선택지5.3. 유고랜드 통보 문제5.4. 승인
6. 전개
6.1. 출격6.2. 헬기 불시착6.3. 저택 진입6.4. 노획과 철수
7. 시신 처리
7.1. 신원 확인7.2. 유족 인도 시도7.3. 수장
8. 발표와 반응
8.1. 대국민 연설8.2. 유고랜드8.3. 알자미아8.4. 국제 반응
9. 노획 자료10. 논쟁
10.1. 강화 신문과 첫 단서10.2. 비무장 사살10.3. 사진 비공개10.4. 예방접종 사업의 대가10.5. 유고랜드의 비호 의혹
11. 영향
11.1. 알자미아11.2. 루이나-고랜드 전쟁11.3. 루이나-유고랜드 관계
12. 대중매체에서13. 여담


1. 개요 [편집]


오리온 작전(Operation ORION)은 2011년 5월 7일 새벽 국가정보국(NIA)의 지휘 아래 루이나 해군 특수전단이 유고랜드 나크시에 로스탐 부의 소도시 카르바즈에 있는 저택을 급습해 알자미아의 창설자이자 지도자 이브라힘 나쉬디를 사살한 비밀 공작이다. 1.19 사건으로부터 10년 3개월 만이었다.

단서는 나쉬디의 전령이었다. 국가정보국은 2000년대 초 구금자 신문에서 처음 이름이 나온 전령 한 명을 수년간 추적해 2010년 여름 카르바즈의 저택을 찾아냈고, 이후 8개월 동안 유고랜드 내무부 국가보안국과 함께 저택을 감시했다. 그러나 루이나는 감시 대상이 나쉬디일 수 있다는 사실과 루이나 특수부대가 직접 저택을 급습한다는 사실을 끝까지 유고랜드에 알리지 않았다. 작전 당일 외곽 도로를 봉쇄한 유고랜드 부대도 이를 일반적인 합동 대테러 단속으로 알고 있었다.

특수전단 대원 24명은 헬리콥터 두 대로 저택에 내려 약 40분 만에 저택을 장악했고, 3층 침실에 있던 나쉬디를 사살했다. 헬기 한 대가 저택 마당에 불시착해 현장에서 폭파되었으나 루이나 측 인명 피해는 없었다. 루이나는 시신을 유족에게 인도하려 했으나 나쉬디 가문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모두 거부하면서, 작전 사흘째인 5월 9일 해군 함정에서 수장되었다.

작전은 루이나 국내에서 1.19 사건 이후 가장 큰 환호를 받았지만 동시에 여러 갈래의 논쟁을 남겼다. 첫 단서가 '강화 신문'으로 얻어졌느냐는 고문 효용 논쟁, 무기를 들지 않은 나쉬디를 사살한 것이 적법했느냐는 논쟁, 시신 사진을 공개하지 않은 결정, 그리고 저택을 확인하기 위해 국가정보국이 벌인 가짜 예방접종 사업이 유고랜드 서부의 백신 불신으로 이어진 문제가 그것이다. 나쉬디가 유고랜드 육군 산악훈련소에서 2km 남짓 떨어진 저택에 5년 넘게 머물 수 있었던 경위, 곧 유고랜드 군정보국 일부의 비호 의혹은 지금까지 규명되지 않았다.

2. 명칭 [편집]


작전명 「오리온」은 합동특수작전사령관 에드워드 J. 마셜 해군 중장이 직접 고른 이름이다. 국가정보국의 비밀 공작은 대개 작전본부의 암호명 등록부에서 기계적으로 이름을 배정받지만, 실행 부대가 해군이었던 이 작전은 합동특수작전사령부가 붙인 이름이 그대로 공식 작전명이 되었다.

마셜은 훗날 회고에서 오리온이 그리스 신화의 사냥꾼이라는 점과, 항해자들이 밤바다에서 방위를 잡을 때 가장 먼저 찾는 별자리라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표적인 나쉬디에게는 오리온자리의 붉은 초거성 이름을 딴 「베텔게우스」라는 부호가 붙었다. 베텔게우스는 언젠가 폭발해 사라질 별로 알려져 있어, 부호가 지나치게 노골적이라는 이유로 국가정보국 쪽에서 교체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작전 계획 단계에서 국가정보국 내부는 이 작전을 저택 소재지의 이름을 따 '카르바즈 건'이라 불렀다. 유고랜드에서는 지금도 작전명 대신 「5월 7일 사건」이라는 표현을 주로 쓴다.

3. 배경 [편집]


상세 내용은 루이나-고랜드 전쟁 문서 참고.

3.1. 토라보라 이후 [편집]


2001년 12월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자 나쉬디와 알자미아 지도부는 고랜드 동부의 토라보라 동굴 요새로 물러났다. 루이나 공군은 12월 12일부터 대규모 폭격을 퍼부었으나 지상 공격은 현지 파슈툰 부족 민병대에 맡겨졌고, 유고랜드 쪽 퇴로를 막기 위한 레인저 대대 투입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쉬디는 12월 중순 산길을 넘어 유고랜드 나크시에 로스탐 부의 산악지대로 빠져나갔다. 루이나 정부가 12월 17일 토라보라 점령을 발표했을 때 그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이후 10년 동안 나쉬디는 서신과 녹음 성명으로만 모습을 드러냈다. 성명은 대개 녹음테이프나 저장 매체에 담겨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언론사에 전달되었고, 국가정보국은 성명의 전달 경로를 거슬러 올라가는 데 거듭 실패했다. 2005년 무렵부터는 나쉬디가 위성 전화나 인터넷을 전혀 쓰지 않고 오직 사람을 통해서만 외부와 연락한다는 판단이 굳어졌다.

3.2. 무인기 공습과 유고랜드 [편집]


나크시에 로스탐 부 서부의 산악지대는 유고랜드 정부의 행정력이 거의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때 넘어온 파슈툰 난민과 그 후손이 사는 이 지역에 알자미아와 탈레반 지도부가 숨어들었고, 2003년에는 알자미아 서부 국경 지부가 설치되었다.

2008년부터 루이나는 유고랜드 정부의 비공개 동의 아래 이 지역에서 무인기 공습을 벌여 알자미아의 중간 간부들을 제거했다. 국가정보국 내부에는 나쉬디도 이 산악지대 어딘가의 동굴이나 부족 마을에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가 산악지대가 아니라 유고랜드 육군 산악훈련소가 있는 평지의 소도시에서 살고 있으리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3.3. 수색의 정체 [편집]


2000년대 후반 나쉬디 추적은 사실상 멈춰 있었다. 국가정보국 대테러센터의 나쉬디 전담반은 2001년 40명에서 2008년 11명으로 줄었고, 정보의 상당 부분은 고랜드 전쟁의 일상적인 표적 정보로 흡수되었다. 2009년 9월 취임한 리처드 엘스워스는 취임 넉 달 뒤 국가정보국장 마거릿 E. 홀든에게 나쉬디 추적을 대테러 정보의 최우선 과제로 되돌리라는 서면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로 전담반은 다시 30명 규모로 늘었다.

4. 추적 [편집]

4.1. 전령 [편집]


추적의 실마리는 '아부 야쿱 알자위'라는 가명을 쓰는 남자였다. 그는 1970년대 말 유고랜드 서부로 넘어온 고랜드 파슈툰 난민 가정에서 태어났고, 1990년대 알자미아의 숙소에서 일하며 나쉬디의 신임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본명은 타리크 사이드 하미드였다.

4.2. 구금·신문 프로그램과 첫 단서 [편집]


1.19 사건 이후 국가정보국은 체포한 알자미아 고위 인사를 해외 비밀 구금시설에 수용하고 신문하는 「고가치 구금자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수면 박탈, 스트레스 자세, 물고문에 해당하는 '강화 신문 기법'이 승인되어 쓰였다. 프로그램은 2002년부터 운영되다가 2009년 엘스워스 취임 직후 대통령령으로 폐지되었다.

알자위라는 가명은 2002~2004년 이 프로그램의 구금자 신문 과정에서 처음 나왔다. 2003년 한 구금자가 나쉬디 주변의 전령 가운데 하나로 이 이름을 댔고, 이듬해 다른 구금자는 강화 신문을 받은 뒤 오히려 그를 "조직을 떠난 하찮은 인물"이라고 진술했다. 국가정보국 분석관들은 핵심 인물이 알자위의 존재를 축소하려 한다는 점에 주목했고, 이것이 그를 계속 추적할 이유가 되었다. 이 단서가 강화 신문으로 얻어진 것인지, 일반 신문과 다른 경로로 얻어진 것인지는 오리온 작전 이후 가장 격렬한 논쟁 가운데 하나가 된다.

4.3. 2010년 통화 [편집]


국가정보국은 2007년 알자위의 본명과 출신 가문을 확인했으나 그의 행방은 찾지 못했다. 돌파구는 2010년 6월 국가안보국이 감청한 한 통의 휴대전화 통화였다. 알자위가 걸프 지역의 옛 동료와 통화하면서 무엇을 하고 지내느냐는 물음에 "예전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답한 것이다. 국가정보국은 이 통화를 그가 여전히 나쉬디 곁에 있다는 정황으로 받아들였다.

알자위는 휴대전화를 켤 때마다 배터리를 분리했다가 저택에서 한 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서만 다시 넣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국가정보국 현지 요원들은 2010년 8월 나시르 알 물크에서 그의 흰색 승합차를 찾아내 미행했고, 차가 카르바즈 외곽의 한 저택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4.4. 카르바즈 저택 [편집]


저택은 카르바즈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주택가 끝자락에 있었고, 유고랜드 육군 산악훈련소 정문에서 2km 남짓 떨어져 있었다. 2005년 지어진 3층 건물로, 대지 면적은 주변 주택의 여덟 배에 달했다. 등기상 소유자는 알자위와 그의 형 압둘 사이드 하미드였다.

저택에는 여러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담장 높이가 4~6m에 달했고 꼭대기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었으며, 3층 발코니에는 높이 2m의 가림벽이 따로 세워져 있었다. 전화선과 인터넷 회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았고, 다른 집들과 달리 쓰레기를 밖에 내놓지 않고 마당에서 태웠다. 두 형제의 신고 소득으로는 이런 저택을 지을 수 없었다.

정찰 위성과 무인기 영상은 3층에 사는 가족이 한 번도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특히 키가 큰 남자 한 명이 매일 마당의 차양 아래를 몇 시간씩 오가는 모습이 반복해서 포착되었는데, 국가정보국은 그를 '산책자'라고 불렀다. 산책자의 얼굴은 끝내 한 번도 정면으로 찍히지 않았다.

4.5. 공동 감시 [편집]


2010년 9월 국가정보국은 유고랜드 내무부 국가보안국에 카르바즈의 한 저택이 "알자미아 전령 거점으로 의심된다"며 공동 감시를 제안했다. 감시 대상의 중요도와 나쉬디의 이름은 알리지 않았다. 군정보국은 처음부터 협력 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사이클론 작전 시절부터 서부 국경지대의 무장세력과 인맥을 이어 온 군정보국에서 정보가 새어 나갈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국가보안국은 저택 맞은편 지역에 감시 거점을 두고 차량 출입과 방문자를 기록했으며, 국가정보국은 이와 별도로 카르바즈 시내에 단독 안가를 두고 망원 촬영과 전파 감시를 했다. 이렇게 8개월 동안 이어진 감시는 두 기관의 공동 감시였지만, 무엇을 감시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은 한쪽뿐이었다.

4.6. 예방접종 사업 [편집]


국가정보국은 저택 안에 나쉬디의 가족이 있다는 물증을 얻기 위해 저택의 아이들에게서 DNA를 확보하려 했다. 이를 위해 나크시에 로스탐 부의 보건 담당 의사 와지드 알라위를 포섭해, 2011년 3월부터 카르바즈 일대에서 B형 간염 예방접종 사업을 벌였다.

사업은 실제 예방접종으로 진행되었으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알라위는 일부러 저택에서 먼 빈민가부터 접종을 시작해 저택 쪽으로 범위를 좁혀 갔고, 4월 하순 간호사 한 명이 저택 정문까지 갔으나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사용한 주사 바늘을 회수해 DNA를 얻는 계획은 결국 실패했다. 이 사업은 작전의 성패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했지만, 작전 이후 그 어떤 결정보다 오래 남는 결과를 낳았다.

5. 결정 [편집]

5.1. 확률 논쟁 [편집]


2011년 3월부터 대통령궁 국가안보회의에서는 다섯 차례의 비공개 회의가 열렸다. 쟁점은 산책자가 나쉬디일 확률이었다. 국가정보국 대테러센터 전담반은 60~80%로 보았고, 국가정보국장 홀든은 회의에서 "70%라고 말하겠다"고 했다. 반면 엘스워스의 지시로 따로 꾸려진 검증반은 같은 자료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한 끝에 40~60%를 제시했다. 검증반은 저택이 알자미아의 다른 고위 인사나 이미 은퇴한 옛 간부의 거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았다.

엘스워스는 4월 28일 마지막 회의에서 "결국 이것은 반반의 문제"라고 정리했다고 전해진다. 2003년 이후 여러 차례 '확실하다'던 정보가 빗나간 경험이 있었던 만큼, 회의의 관심은 확률을 높이는 것보다 확률이 낮더라도 감당할 수 있는 방식을 고르는 데로 옮겨 갔다.

5.2. 세 가지 선택지 [편집]


국가안보회의에 올라온 선택지는 세 가지였다.

* 정밀 폭격: 전략폭격기로 정밀 유도폭탄 30여 발을 투하해 저택과 지하 공간까지 파괴한다. 루이나 인원의 위험은 없으나 주변 주택에 피해가 나고, 시신이 남지 않아 나쉬디였는지 확인할 수 없다.
* 무인기 타격: 산책자가 마당에 나왔을 때 무인기의 소형 정밀 탄약으로 그 한 사람만 타격한다. 피해는 가장 작으나 시험 사격에서 명중률이 기대에 못 미쳤고, 역시 신원 확인이 어렵다.
* 헬기 급습: 특수부대가 저택에 직접 들어가 신원을 확인한다. 확실한 증거를 얻을 수 있으나 루이나 대원들이 유고랜드 영토 안에서 고립되거나 유고랜드군과 교전할 위험이 있다.

국방부는 폭격을, 국가정보국 일부는 무인기 타격을 선호했다. 마셜은 급습안을 지지하면서 대원들이 유고랜드군에 포위될 경우를 대비해 예비 헬기와 증원 병력을 함께 대기시키는 조건을 붙였다. 엘스워스는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방식으로는 설령 성공하더라도 성공을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급습안을 택했다.

5.3. 유고랜드 통보 문제 [편집]


가장 오래 논의된 것은 유고랜드에 무엇을 어디까지 알리느냐였다. 국무부는 사전 통보 없이 동맹국 영토에서 작전을 벌이면 루이나군 주둔과 보급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가정보국은 군정보국을 거쳐 정보가 새어 나갈 경우 나쉬디가 다시 사라질 것이라고 맞섰다.

결론은 절충이었다. 국가보안국에는 작전 당일 밤 "전령 거점에 대한 합동 단속"을 위해 외곽 도로 봉쇄를 요청하고, 표적이 나쉬디라는 사실과 루이나 특수부대가 단독으로 진입한다는 사실은 작전이 끝난 뒤 정부 대 정부 경로로 통보하기로 했다. 유고랜드군 지휘부와 군정보국에는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다. 국무부 법률고문실은 이 방식이 상호방위조약상의 협의 의무에 비추어 "방어 가능하나 편안하지는 않은" 해석이라는 의견서를 냈다.

5.4. 승인 [편집]


엘스워스는 4월 29일 아침 홀든에게 급습을 승인한다고 통보했다. 작전은 국가정보국장의 비밀 공작 권한 아래 수행되었고, 해군 특수전단은 이 기간 동안 국가정보국 지휘 아래 배속되었다. 이렇게 한 것은 작전이 실패할 경우 루이나 정부가 관여를 부인할 수 있는 법적 여지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날씨 때문에 두 차례 연기된 뒤 작전 일시는 5월 7일 새벽으로 확정되었다. 달이 뜨지 않는 그믐 무렵이었다.

6. 전개 [편집]

6.1. 출격 [편집]


5월 6일 23시 02분, 개량형 스텔스 수송 헬리콥터 두 대가 고랜드 동부 잘랄라바드의 루이나군 기지를 이륙했다. 기체에는 해군 특수전단 제1특수작전전대 대원 24명과 아랍어·파슈토어 통역관 1명, 군견 1마리가 나누어 탔다. 18분 뒤 대형 수송 헬리콥터 두 대가 증원 병력과 예비 연료를 싣고 뒤따라 이륙해, 국경을 넘은 뒤 카르바즈 북서쪽 무인 지대에 내려 대기했다.

헬기들은 산악 지형을 따라 저고도로 비행하며 유고랜드 방공 레이더를 피했다. 같은 시각 국가보안국 특수작전대는 "합동 단속" 요청에 따라 카르바즈 외곽의 도로 세 곳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있었다. 이들은 무엇을 단속하는지 듣지 못한 채 차량 통행만 막았다.

6.2. 헬기 불시착 [편집]


00시 31분 첫 번째 헬기가 저택 상공에 도착해 마당 위에서 정지 비행에 들어갔을 때 기체가 갑자기 양력을 잃었다. 높은 담장에 갇힌 마당의 공기가 예상보다 더웠고, 회전익이 일으킨 하강 기류가 담장에 막혀 되돌아온 것이 원인이었다. 조종사는 기체를 담장 위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꼬리 부분을 담장에 걸친 채 마당에 불시착시켰다. 기체는 크게 부서졌으나 탑승자 가운데 다친 사람은 없었다.

대원들은 계획을 수정해 불시착한 헬기에서 곧바로 내려 마당 쪽으로 진입했고, 두 번째 헬기는 계획대로 지붕에 대원을 내리는 대신 저택 바깥 공터에 착륙했다. 벨포르 대통령궁 상황실에서 실시간 영상을 지켜보던 참석자들은 불시착 장면에서 작전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고 훗날 증언했다.

6.3. 저택 진입 [편집]


대원들은 폭약으로 철문과 내부 문들을 차례로 부수며 진입했다. 1층 별채에서 알자위가 문 너머로 총을 쏘아 대원들과 교전했고 사살되었다. 본채 1층에서는 형 압둘 사이드 하미드와 그의 아내가 사살되었다. 하미드는 대원들이 무장 저항으로 판단한 동작을 했으나 손에 무기를 들고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나중에 확인되었다.

2층 계단에서는 나쉬디의 아들 함자 나쉬디가 사살되었다. 대원들은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방 안을 엿보던 키 큰 남자를 보고 사격했고, 남자는 침실 안으로 물러났다. 침실에 진입한 대원들은 나쉬디의 아내 한 명이 다가오자 다리를 쏘아 제압한 뒤, 침대 옆에 서 있던 나쉬디를 가슴과 머리에 총격해 사살했다. 침실 문 옆 선반에는 자동소총과 권총이 놓여 있었으나 나쉬디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베텔게우스, 베텔게우스. 적 교전 중 사망(EKIA)."

00시 52분 현장 지휘관의 무전 (대통령궁 상황실 기록)


이 무전이 상황실에 전해지자 엘스워스는 "우리가 그를 잡았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이 단계의 '베텔게우스'는 현장 대원들의 육안 판단이었고, 국가정보국은 이후 DNA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공식적으로 '추정'이라는 표현을 유지했다.

6.4. 노획과 철수 [편집]


대원들은 나쉬디를 확인한 뒤 남은 시간 동안 저택을 수색해 컴퓨터 5대, 하드디스크 10개, 저장 매체 100여 개, 손으로 쓴 공책과 서류 뭉치를 자루에 담았다. 저택에 있던 여성 4명과 아이 9명은 마당 한쪽에 모아 손을 묶은 채 남겨 두었다. 사망자는 나쉬디, 함자 나쉬디, 알자위, 압둘 사이드 하미드와 그의 아내 등 5명이었고, 나쉬디의 아내 1명을 포함해 3명이 다쳤다.

불시착한 헬기는 대원들이 기체 내부의 기밀 장비와 항법 장치를 떼어 낸 뒤 폭약으로 파괴했다. 기체는 꼬리 부분까지 완전히 불탔다. 대원들은 대기 중이던 대형 수송 헬리콥터 한 대를 저택으로 불러 나누어 탔고, 01시 11분 마지막 헬기가 이륙했다. 작전 시간은 40분이었다.

헬기 폭파 직후 폭발음과 화염을 본 주민들이 거리로 나왔고, 카르바즈 경찰과 산악훈련소 경비 병력이 출동했다. 유고랜드 공군은 01시 20분경 미확인 항공기 침입 보고를 받고 전투기 두 대를 긴급 발진시켰으나, 이때 루이나 헬기들은 이미 국경 근처에 있었다. 국가보안국 특수작전대는 검문소에서 대기하다가 폭발이 일어난 뒤에야 본부에 상황을 문의했다.

7. 시신 처리 [편집]

7.1. 신원 확인 [편집]


나쉬디의 시신은 잘랄라바드 기지로 옮겨져 사진 촬영과 안면 대조를 거쳤고, 키 측정에 쓸 줄자가 없어 키가 비슷한 대원이 시신 옆에 누워 길이를 비교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국가정보국은 2000년대에 확보해 둔 나쉬디 가문 친족의 DNA 표본과 대조해 5월 7일 오후 99.9% 이상 일치한다는 결과를 얻었다. 저택에 남은 나쉬디의 아내 한 명도 유고랜드 당국 조사에서 남편이 사살되었다고 확인했다.

7.2. 유족 인도 시도 [편집]


엘스워스 정부는 처음부터 시신을 육지에 묻지 않기로 하되, 그 전에 유족에게 인도를 제안하기로 했다. 무덤이 성지가 되는 것을 막는 것과 이슬람 장례 관습을 존중하는 것 사이에서, 유족이 인수해 비공개로 처리한다면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5월 7일 저녁 루이나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를 거쳐 나쉬디 가문에 시신 인수 의사를 물었다. 가문은 이튿날 짧은 성명을 내고 "가문은 1995년 이후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시신을 인수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도 자국 영토 안의 매장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루이나는 고랜드 공산 정부와 유고랜드에도 의사를 타진했으나 두 나라 모두 거절했다.

7.3. 수장 [편집]


5월 9일 오후 나쉬디의 시신은 랜드해협 남부 해역에 있던 루이나 해군 항공모함 RNS 레졸루트 함상에서 수장되었다. 시신은 이슬람식으로 씻긴 뒤 흰 천으로 감쌌고, 아랍어 통역 장교가 기도문을 읽었다. 시신은 무게를 단 부대에 담겨 갑판에서 바다로 내려졌다.

사망 후 24시간 안에 매장한다는 관습은 유족 인도 협의로 지켜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슬람권 일부에서는 루이나가 관습을 존중했다고 하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원칙을 어겼다는 비판이 나왔다. 반대로 루이나 국내 일부에서는 테러 조직 지도자의 시신을 유족에게 넘기려 한 시도 자체를 문제 삼았다.

8. 발표와 반응 [편집]

8.1. 대국민 연설 [편집]


5월 7일 밤 엘스워스는 대통령궁에서 대국민 연설을 했다.

"오늘 밤 저는 루이나 국민과 세계에 알립니다. 루이나는 2,891명의 무고한 시민을 살해한 알자미아의 지도자 이브라힘 나쉬디를 사살하는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우리는 1.19의 희생자들에게 정의를 약속했습니다. 오늘 그 정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리처드 엘스워스, 2011년 5월 7일 대국민 연설


연설 직후 벨포르 세계무역센터 터와 대통령궁 앞에 시민들이 모여 밤새 국가를 불렀다. 엘스워스의 국정 지지율은 일주일 만에 9%p 올랐으나 한 달 반 뒤 원래 수준으로 돌아갔다.

8.2. 유고랜드 [편집]


유고랜드 정부는 5월 8일 성명에서 "동맹국의 영토에서 사전 통보 없이 이루어진 일방적 군사 행동"이라며 주권 침해를 항의했다. 국가보안국은 자신들이 요청받은 것은 "전령 거점에 대한 합동 단속"의 외곽 경계였을 뿐 표적이 누구인지, 루이나 부대가 직접 진입한다는 사실은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유고랜드 의회는 5월 14일 양원 합동 회의에서 루이나 무인기 공습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동시에 유고랜드는 나쉬디가 육군 산악훈련소 인근에 5년 넘게 살았다는 사실 때문에 무능 아니면 공모라는 국제적 의심을 받았다. 유고랜드 정부는 비호를 강하게 부인하면서 독립 조사위원회인 「카르바즈 위원회」를 꾸렸다.

두 나라는 3주간의 외교 협의 끝에 5월 28일 공동 발표문을 냈다. 발표문은 이 사태를 "통제되지 않는 국경이 낳은 문제"로 정리하고, 앞으로 대테러 작전에서 정보 공유를 확대한다는 원칙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사전 통보 문제와 비호 의혹은 발표문에서 다루지 않았다.

8.3. 알자미아 [편집]


알자미아는 5월 13일 인터넷 성명으로 나쉬디의 사망을 확인하고 보복을 선언했다. 같은 날 유고랜드 서부에서 탈레반 연계 무장세력이 국경경비대 훈련소를 겨냥한 자폭 공격을 벌여 신병 82명이 숨졌고, 이들은 "나쉬디의 피에 대한 첫 보복"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알자미아 자체의 소행은 아니었다.

6월 알자미아는 공동 창설자 아이만 알자와히리를 새 지도자로 발표했다.

8.4. 국제 반응 [편집]


고랜드 공산 정부는 작전을 환영하면서 "테러 지도자가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며 유고랜드를 겨냥했다. 사비에트는 벨포르 협정 부속 의정서에 따른 대테러 협력의 성과라고 평가하는 짧은 성명을 냈다. NLTO 회원국 대부분은 작전을 지지했으나, 플로렌시아 정부는 생포하지 않고 사살한 경위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다.

9. 노획 자료 [편집]


저택에서 가져온 자료는 국가정보국이 꾸린 합동 분석반이 6주 동안 1차 분석했고, 이후 「카르바즈 문서」로 불리게 되었다. 국가정보국은 2015년과 2017년 두 차례에 걸쳐 일부를 공개했다.

자료가 보여 준 나쉬디는 은둔한 상징적 지도자가 아니라 여전히 조직을 세세하게 관리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각 지부에 보내는 서신에서 자금 배분, 간부 인사, 성명 문구까지 지시했고, 1.19 사건 10주년에 맞춰 루이나 본토의 철도망을 노리는 공격을 검토하라고 적었다. 다만 서신의 상당수는 지시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는 불만으로 채워져 있었고, 분석반은 무인기 공습으로 중간 간부가 잇달아 제거되면서 나쉬디의 지시가 현장에 닿지 못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주목받은 것은 서부 국경 지부에 대한 경고였다. 나쉬디는 2010년 무렵의 서신에서 서부 국경 지부가 시아파와 선거에 참여하는 무슬림까지 배교자로 몰아 공격하는 것이 "조직을 무슬림 대중에게서 고립시킨다"고 비판했고, 지부장 아부 우바이다 알나크시의 이름을 들어 그를 통제하라고 지시했다. 알나크시는 3년 뒤인 2014년 알자미아와 갈라서 다울라 알무하지린을 세운다.

공개된 자료 가운데 유고랜드 군정보국이나 유고랜드 정부 인사와의 연계를 보여 주는 문서는 없었다. 그러나 국가정보국이 전체 자료의 일부만 공개했기 때문에, 비공개분에 그런 내용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10. 논쟁 [편집]

10.1. 강화 신문과 첫 단서 [편집]


작전 직후 고가치 구금자 프로그램을 운영했던 전직 국가정보국 간부들과 보수 정치인들은 알자위의 가명이 강화 신문에서 나왔으며, 2009년 폐지된 프로그램이 결국 나쉬디를 잡게 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프로그램을 폐지한 엘스워스 정부가 그 성과를 누리고 있다는 정치적 공세로 이어졌다.

엘스워스 정부와 의회 정보위원회 다수파는 이를 반박했다. 알자위의 이름을 처음 댄 구금자는 강화 신문을 받기 전 일반 신문에서 이를 진술했고, 강화 신문을 받은 핵심 구금자는 오히려 알자위의 존재를 축소하는 거짓 진술을 했으며, 결정적인 돌파구는 2010년의 감청이었다는 것이다.

2014년 의회 정보위원회는 6년에 걸친 조사 끝에 고가치 구금자 프로그램 보고서를 채택했고, 이듬해 일부 내용을 지운 요약본이 공개되었다. 보고서는 "카르바즈 저택의 확인에 이른 핵심 정보 가운데 강화 신문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던 정보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국가정보국은 같은 날 반박 의견서를 내고 프로그램에서 얻은 정보가 "전체 그림을 맞추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오리온 작전의 성공을 고문의 효용을 둘러싼 논쟁으로 바꾸어 놓았고, 루이나에서는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10.2. 비무장 사살 [편집]


정부는 작전 직후 브리핑에서 나쉬디가 "무기를 들고 저항하다 사살되었다"고 발표했다가, 이틀 뒤 "무장하지 않았으나 투항 의사를 보이지 않고 움직였다"로 정정했다. 아내를 방패로 썼다는 초기 발표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정정되었다. 이 정정은 작전이 처음부터 생포가 아니라 사살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불러왔다.

정부의 공식 입장은 작전이 "투항할 경우 생포하되, 위협이 되면 사살"하는 교전 규칙 아래 수행되었고,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자폭 조끼 착용 가능성까지 고려하면 대원의 판단은 정당했다는 것이다. 반면 일부 국제법 학자와 플로렌시아의 인권 단체들은 무장하지 않은 사람을 그 자리에서 사살한 것은 무력 충돌법상 정당화되기 어렵고, 유고랜드가 교전 당사국이 아닌 이상 법 집행의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2012년 공개된 국가안보회의 회의록 요약본에는 "생포는 현실적인 시나리오로 상정되지 않았다"는 국가정보국 측 발언이 실려 있어 논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정부는 이 발언이 생포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낮다는 평가였다고 설명했다.

10.3. 사진 비공개 [편집]


엘스워스는 5월 10일 시신 사진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머리에 총상을 입은 시신의 사진이 알자미아의 선전 도구가 되고, 해외 주둔 루이나군에 대한 보복을 부를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는 그것을 전리품처럼 흔들어 보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비공개 결정 뒤 나쉬디가 사실은 살아 있다는 생존설, 이미 수년 전에 병사했고 작전은 연출이었다는 조작설, 사살된 인물이 대역이라는 대역설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졌다. 한 보수 성향 시민단체가 정보공개 소송을 냈으나 2013년 벨포르 항소법원은 사진이 국가안보상 비공개 정보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국가정보국은 2016년 수장 장면의 사진 존재 여부도 확인을 거부했다.

10.4. 예방접종 사업의 대가 [편집]


와지드 알라위는 작전 3주 뒤 군정보국에 체포되었다. 그는 국가 반역이 아니라 서부의 무장세력에 의료 지원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고, 2012년 나크시에 로스탐 부 특별법원에서 징역 33년을 선고받았다. 루이나는 그의 석방을 거듭 요구했으나 유고랜드는 사법 절차의 문제라는 입장을 유지했다. 형기는 항소 과정에서 23년으로 줄었고, 그는 2026년 현재까지 수감 중이다.

더 큰 대가는 유고랜드 서부 전체가 치렀다. 예방접종이 정보기관의 위장 수단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나크시에 로스탐 부와 서부 국경지대에서 예방접종 거부가 급증했다. 2012년 서부의 무장세력은 소아마비 예방접종을 "루이나의 첩보 활동"으로 규정하고 접종 금지를 선언했으며, 2012~2015년 접종 요원과 경호 경찰 70여 명이 피살되었다. 한동안 줄어들던 유고랜드의 소아마비 발생은 2014년 다시 크게 늘었다.

2014년 루이나의 공중보건 대학원장 12명이 공동 서한으로 문제를 제기하자, 국가정보국장은 답신에서 앞으로 예방접종 사업을 정보 활동에 이용하지 않고 접종 사업의 유전 물질을 수집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이후 국가정보국 내부 규정에 반영되었다.

10.5. 유고랜드의 비호 의혹 [편집]


나쉬디가 유고랜드 육군 산악훈련소에서 2km 남짓 떨어진 저택에서 5년 넘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작전 직후부터 가장 큰 의문이었다. 사이클론 작전 시절부터 서부 국경지대의 무장세력과 인맥을 이어 온 군정보국의 일부가 그를 비호했다는 의혹이 곧바로 제기되었다.

루이나 의회 정보위원회는 2012년 보고서에서 "비호를 입증할 증거도, 배제할 증거도 확보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유고랜드 카르바즈 위원회의 보고서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2013년 《아르시브》가 입수해 보도한 초안에 따르면 위원회는 공모의 증거를 찾지 못했고 대신 경찰·지방 행정·군정보국의 "집단적 무능과 태만"을 지적했다. 초안에는 군정보국 나크시에 로스탐 지부가 2007년 저택의 이상한 구조를 보고받고도 별다른 조사 없이 기록을 닫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이 대목은 비호 의혹을 해소하기보다 오히려 키웠다.

의혹은 지금까지 규명되지 않았다. 다만 오리온 작전에서 루이나가 군정보국을 처음부터 배제했다는 사실 자체가, 루이나 정부가 당시 군정보국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는 평가가 있다.

11. 영향 [편집]

11.1. 알자미아 [편집]


나쉬디가 개인적으로 쌓은 권위와 걸프 지역의 자금 인맥은 후계자 알자와히리에게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알자미아는 이미 무인기 공습으로 중간 간부층이 무너진 상태였고, 나쉬디의 죽음 이후 지역 지부들의 연합체로 빠르게 분권화되었다. 카르바즈 문서가 보여 준 서부 국경 지부와의 갈등은 2014년 2월 알자와히리의 관계 단절 선언과 6월 다울라 알무하지린 선포로 이어졌다.

알자와히리는 2022년 7월 31일 아바나 남부의 주택가에서 루이나 무인기의 미사일 공격으로 사살되었다. 2026년 현재 알자미아는 후계자를 공식 발표하지 않고 있다.

11.2. 루이나-고랜드 전쟁 [편집]


나쉬디의 죽음은 고랜드 전쟁의 명분 하나를 지웠다. 개전의 직접적 목표였던 알자미아 지도자 제거가 이루어지자, 루이나 국내에서는 남은 전쟁이 무엇을 위한 것이냐는 물음이 커졌다. 엘스워스 정부는 이미 예고한 대로 2011년 7월부터 증파 병력의 철수를 시작했고, 같은 해 10월 《아르시브》의 전쟁 일지 폭로가 겹치면서 여론은 전쟁에서 완전히 돌아섰다. 이후 전쟁은 전투 임무 종료(2014)와 철수(2021)로 이어졌다.

11.3. 루이나-유고랜드 관계 [편집]


공동 발표로 봉합되었지만 작전은 두 나라 관계에 오래 흔적을 남겼다. 유고랜드 의회의 결의에 따라 루이나의 무인기 공습은 2011년 하반기 사전 협의 절차가 강화되어 횟수가 크게 줄었고, 알라위 사건은 매년 양국 정상회담의 의제로 올랐다. 국가보안국과 군정보국의 관계도 나빠졌다. 군정보국은 국가보안국이 루이나의 일방 작전에 이용당했다고 비판했고, 국가보안국은 군정보국이 저택을 4년 전에 알고도 덮었다고 맞섰다.

12. 대중매체에서 [편집]


* 《달 없는 밤》(2012): 작전에 참가한 특수전단 대원이 가명으로 낸 회고록. 국방부의 사전 검토를 거치지 않고 출간되어 저자는 비밀 유지 서약 위반으로 해군의 징계 절차에 회부되었고, 인세 전액을 국가에 귀속하는 데 합의했다. 나쉬디가 3층 계단에서 처음 총격을 받았을 때 이미 치명상을 입었다는 서술로 정부 발표와의 차이가 논란이 되었다.
* 《자정 이후 40분》(2013): 국가정보국 분석관의 10년 추적을 그린 루이나 영화. 강화 신문 장면에서 결정적 단서가 나오는 것처럼 묘사해, 의회 정보위원회 위원들이 제작사에 공개 서한을 보내 "사실과 다르다"고 항의했다. 고문 장면의 묘사가 고문을 정당화하느냐를 두고 개봉 내내 논쟁이 이어졌다.
* 《오리온》(2014): 루이나 방송공사(RBC)의 다큐멘터리. 대통령궁 상황실에 있었던 참석자 11명의 인터뷰로 구성되었다.
* 여러 1인칭 슈팅 게임이 카르바즈 저택을 본뜬 임무를 넣었다. 유고랜드는 2012년 이 가운데 한 게임의 자국 내 판매를 금지했다.

13. 여담 [편집]


* 작전 당일 밤하늘에 오리온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5월의 오리온자리는 해가 진 직후 서쪽 하늘에 잠깐 걸렸다가 지기 때문에, 작전이 시작된 자정 무렵에는 이미 지평선 아래에 있었다.
* 작전에 참가한 군견은 작전 뒤 대통령궁에 초청되었으나 대원들의 신원 보호를 위해 언론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군견의 이름은 지금도 공개되지 않았다.
* 국가정보국 본부 청사가 존 F. 페어팩스 전 대통령의 이름을 따 명명된 것도 같은 2011년이었다. 명명식은 작전 넉 달 뒤인 9월에 열렸고, 엘스워스는 축사에서 작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 불시착한 헬기의 잔해는 유고랜드 당국이 수거해 2011년 6월 루이나에 반환했다. 기체가 완전히 불탄 뒤였기 때문에 반환은 주로 외교적 의미를 가졌다.
* 저택은 2012년 2월 유고랜드 정부가 철거했다. 성지화를 막기 위한 조치였으며, 부지는 이후 공터로 남아 있다가 주민들의 놀이터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