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는 제정 사랜드 문서 참고.
사랜드 제국군 Царска саландска војска Imperial Salandian Army | |
존속 기간 | 1712년 ~ 1917년 (상비군 기준) |
최고사령관 | |
소관 | 전쟁부, 해군부 |
구성 | 육군, 해군, 항공대 (1912~) |
병력 | 평시 약 160만 명 (1914) 동원 약 480만 명 (1914~1917) |
사령부 | |
후신 | |
1. 개요 [편집]
제정 사랜드의 군대. 차르를 최고사령관으로 하는 육군과 해군, 1912년 창설된 항공대로 이루어졌다. 중세에는 귀족의 중기병과 영지에서 불러 모은 농민병이 군대의 전부였으나, 1712년 니콜라 1세가 영지마다 병사를 할당해 징집하는 상비군 제도를 만들면서 근대적인 상비군이 되었다. 이 문서는 주로 1712년 이후의 상비군을 다루되, 그 이전의 군사사도 간략히 서술한다.
제국군의 역사는 제정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장교는 귀족이, 병사는 농노가 채웠고, 병사를 고르는 것은 영주였다. 1784년 고원 병합에서 정점에 올랐던 제국군은 1854~1856년 서부 전쟁에서 라 마베라에 패하며 낙후를 드러냈고, 페타르 3세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귀족 장교와 농노 병사라는 구조를 끝내 바꾸지 못한 채 제1차 세계 대전을 맞았다. 1917년 3월 인터그라드 수비대가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제국군은 제정을 지키는 대신 무너뜨리는 쪽에 섰다.
제국군의 역사는 제정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장교는 귀족이, 병사는 농노가 채웠고, 병사를 고르는 것은 영주였다. 1784년 고원 병합에서 정점에 올랐던 제국군은 1854~1856년 서부 전쟁에서 라 마베라에 패하며 낙후를 드러냈고, 페타르 3세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귀족 장교와 농노 병사라는 구조를 끝내 바꾸지 못한 채 제1차 세계 대전을 맞았다. 1917년 3월 인터그라드 수비대가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제국군은 제정을 지키는 대신 무너뜨리는 쪽에 섰다.
2. 역사 [편집]
2.1. 중세의 군대 [편집]
인크론슈타트 왕조와 즐라토미로비치 왕조의 군대는 차르와 대귀족들이 각자 거느린 병력을 전쟁 때마다 모으는 방식이었다. 핵심은 귀족과 그 가신들로 이루어진 중기병이었고, 영지에서 불러 모은 농민들이 창병과 궁병을 이루었다. 789년 사무탁호 전쟁에서 이 중기병이 몬순기의 늪지에 빠져 빌베른군에 대패한 일은, 평원의 기병 전술이 저습지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교훈으로 오래 기억되었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은 중기병 중심의 군대가 기동력 있는 기마 궁수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 주었다. 1291년 스테판 1세가 인크론슈타트를 되찾을 때 주력이 된 것은 서부 변경 삼림 지대의 경기병과 보병이었다. 1480년대 마르코 1세는 화약 무기를 들여와 차르 직속의 총병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귀족의 사병에 기대지 않는 차르 직속 군대의 시작이었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은 중기병 중심의 군대가 기동력 있는 기마 궁수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 주었다. 1291년 스테판 1세가 인크론슈타트를 되찾을 때 주력이 된 것은 서부 변경 삼림 지대의 경기병과 보병이었다. 1480년대 마르코 1세는 화약 무기를 들여와 차르 직속의 총병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귀족의 사병에 기대지 않는 차르 직속 군대의 시작이었다.
2.2. 상비군의 탄생 [편집]
혼란기의 내란은 귀족들의 사병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 주었다. 스베토자레비치 왕조는 귀족 사병을 해산시키는 대신 차르의 군대를 키우는 길을 택했고, 1712년 니콜라 1세는 영지마다 농노 인구에 비례해 병사를 할당하는 징병 제도를 만들었다. 할당된 인원을 고르는 것은 영주였으며, 복무는 종신이었다. 영주들은 대개 말썽꾼이나 일손이 덜 아쉬운 농노를 골라 보냈고, 징집된 농노는 다시 마을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징집을 장례처럼 여겼다.
니콜라 1세는 1721년 차르를 호위하는 그리핀 근위대를 창설했고, 1724년 관등령으로 무관의 계급을 정리해 7등관 이상의 장교에게 세습 귀족의 지위를 주었다. 남부 해안의 자톤에는 처음으로 해군 조선소를 세웠다. 이 무렵 고원 가장자리에는 보그단 2세 때 완성된 요새선인 '고원선'이 있었는데, 상비군의 상당수가 이 고원선의 수비에 배치되었다.
니콜라 1세는 1721년 차르를 호위하는 그리핀 근위대를 창설했고, 1724년 관등령으로 무관의 계급을 정리해 7등관 이상의 장교에게 세습 귀족의 지위를 주었다. 남부 해안의 자톤에는 처음으로 해군 조선소를 세웠다. 이 무렵 고원 가장자리에는 보그단 2세 때 완성된 요새선인 '고원선'이 있었는데, 상비군의 상당수가 이 고원선의 수비에 배치되었다.
2.3. 고원 전쟁과 전성기 [편집]
18세기 제국군의 숙원은 북부 고원의 병합이었다. 1735년부터 1739년까지 밀로시 2세의 첫 고원 전쟁은 고원선 밖의 산악 요새를 하나도 함락하지 못한 채 끝났다. 고원의 기병들은 평원의 보병이 따라올 수 없는 산길로 움직였고, 보급선은 번번이 끊겼다.
1781년 여제 옐레나 1세가 다시 일으킨 고원 전쟁은 달랐다. 총사령관 보이보다 보이슬라프 크랄리치(1734~1801)는 산악 요새를 정면으로 치는 대신, 고원 가장자리를 따라 도로와 보급 기지를 먼저 닦고 요새를 하나씩 고립시켜 함락하는 전술을 썼다. 3년 동안 고원선 밖의 요새 19곳을 차례로 함락한 제국군은 1784년 고원의 중심인 아바나 요새를 4개월의 포위 끝에 함락했고, 고원 전체가 제정의 직할 영토가 되었다. 고원 병합은 제국군의 정점이었으며, 이를 기념한 노래 〈일어나라, 그리핀이여!〉는 이후 반세기 동안 사실상의 국가로 불렸다.
1781년 여제 옐레나 1세가 다시 일으킨 고원 전쟁은 달랐다. 총사령관 보이보다 보이슬라프 크랄리치(1734~1801)는 산악 요새를 정면으로 치는 대신, 고원 가장자리를 따라 도로와 보급 기지를 먼저 닦고 요새를 하나씩 고립시켜 함락하는 전술을 썼다. 3년 동안 고원선 밖의 요새 19곳을 차례로 함락한 제국군은 1784년 고원의 중심인 아바나 요새를 4개월의 포위 끝에 함락했고, 고원 전체가 제정의 직할 영토가 되었다. 고원 병합은 제국군의 정점이었으며, 이를 기념한 노래 〈일어나라, 그리핀이여!〉는 이후 반세기 동안 사실상의 국가로 불렸다.
2.4. 내부 진압 [편집]
제국군의 또 다른 임무는 안에서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1668~1671년 라도사브 페리치의 반란과 1773~1775년 마르코 크루니치의 반란은 모두 제국군이 진압했다. 1825년 12월에는 제국군의 정예인 그리핀 근위대의 젊은 장교들이 헌법과 농노 해방을 요구하며 봉기했다가 같은 근위대의 포격으로 진압되었다. 1905~1906년 평원 곳곳에서 농민들이 영지 수문을 부수는 봉기가 번졌을 때도 제국군은 마을을 포위해 봉기를 진압했다. 농노 출신 병사가 농노를 진압하는 이 일들은 병사들의 사기를 갉아먹었다.
2.5. 서부 전쟁의 패배 (1854~1856) [편집]
1854년 서부 국경 벨라 강의 분쟁이 라 마베라와의 전쟁으로 번졌다. 서부 전쟁은 제국군의 낙후를 낱낱이 드러냈다. 라 마베라군은 강선 소총과 철도로 움직였지만, 제국군의 농노 병사들은 구식 머스킷을 들고 있었고 증원군은 몇 달씩 걸어서 전선에 닿았다. 1855년 브르다르 고지 전투에서 제국군은 사상자 3만여 명을 내고 패했고, 1856년 벨라 강 조약으로 벨라 강 서안의 일부를 넘겨주었다.
2.6. 페타르 3세의 군제 개혁 [편집]
서부 전쟁의 패배는 페타르 3세의 군제 개혁으로 이어졌다. 1859년 국영 병기창 칙령으로 크라슬리스크에 병기창을 세워 소총과 대포를 국산화했고, 같은 해 복무 기간을 25년에서 15년으로 줄였다. 1863년에는 참모본부를 설치하고 사관학교를 개편해, 귀족이라도 시험을 통과해야 장교가 될 수 있게 했다. 1868년 개통된 첫 철도를 시작으로 서부 국경 방향의 철도가 군사 목적으로 촘촘히 놓였다.
개혁의 성과는 해외 원정에서 먼저 드러났다. 1862년 제독 마테야 A. 바키치가 이끈 남부 함대는 청평 남부의 항구 푹하이를 점령해 99년 조차를 얻어 냈고, 1881년에는 콘스탄티노폴에 원정대를 보내 조계를 확보했다. 1888년 복무 기간은 다시 10년으로 줄었다.
그러나 개혁은 병사가 누구인가라는 문제 앞에서 멈추었다. 병사를 고르는 것은 여전히 영주였고, 병사의 대부분은 글을 읽지 못하는 농노였다. 1867년 농노 해방 칙령안이 부결되면서, 보편적 징병제와 예비군 제도를 도입하려던 참모본부의 구상도 함께 묻혔다. 장교는 귀족, 병사는 농노라는 구조는 1917년까지 바뀌지 않았다.
개혁의 성과는 해외 원정에서 먼저 드러났다. 1862년 제독 마테야 A. 바키치가 이끈 남부 함대는 청평 남부의 항구 푹하이를 점령해 99년 조차를 얻어 냈고, 1881년에는 콘스탄티노폴에 원정대를 보내 조계를 확보했다. 1888년 복무 기간은 다시 10년으로 줄었다.
그러나 개혁은 병사가 누구인가라는 문제 앞에서 멈추었다. 병사를 고르는 것은 여전히 영주였고, 병사의 대부분은 글을 읽지 못하는 농노였다. 1867년 농노 해방 칙령안이 부결되면서, 보편적 징병제와 예비군 제도를 도입하려던 참모본부의 구상도 함께 묻혔다. 장교는 귀족, 병사는 농노라는 구조는 1917년까지 바뀌지 않았다.
2.7. 제1차 세계 대전 [편집]
2.7.1. 개전 [편집]
2.7.2. 벨라 강 전투 (1914) [편집]
11월 공세 초기에 제국군은 벨라 강을 건너 서안의 옛 영토 일부를 되찾았다. 그러나 1914년 12월 벨라 강 서안 구릉지에서 라 마베라군의 기관총 진지에 막히면서 공세는 멈추었다. 3주 동안 이어진 벨라 강 전투에서 제국군은 사상자 14만여 명을 냈고, 이후 서부 전선은 벨라 강을 따라 참호전으로 굳었다.
2.7.3. 1915년 여름 반격 [편집]
1915년 6월 라 마베라군은 동맹국의 지원을 받아 반격에 나섰다. 포탄이 모자랐던 제국군은 하루 몇 발로 포격을 제한해야 했고, 라 마베라군은 벨라 강을 넘어 7월 말 옛 수도 인크론슈타트에서 80km 떨어진 곳까지 밀고 들어왔다. 인크론슈타트의 성모안식 대성당에서 차르의 대관식 예복과 수문 열쇠가 인터그라드로 옮겨지는 등 옛 수도는 한때 피란 준비에 들어갔다. 제국군은 8월 베레스 강 상류에서 겨우 전선을 지켜 냈다.
1915년 9월 라자르 2세는 대공 미하일로를 해임하고 스스로 총사령관에 올라 전선 사령부로 떠났다. 차르가 직접 군을 지휘하면 사기가 오를 것이라는 계산이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후 모든 패전의 책임이 곧바로 차르에게 돌아갔고, 차르가 비운 수도의 정치는 대신들의 다툼 속에 표류했다.
1915년 9월 라자르 2세는 대공 미하일로를 해임하고 스스로 총사령관에 올라 전선 사령부로 떠났다. 차르가 직접 군을 지휘하면 사기가 오를 것이라는 계산이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후 모든 패전의 책임이 곧바로 차르에게 돌아갔고, 차르가 비운 수도의 정치는 대신들의 다툼 속에 표류했다.
2.7.4. 체르나 고지 소모전 (1916) [편집]
1916년 제국군은 서부 전선 사령관 보이슬라프 T. 라도사블례비치의 지휘 아래 체르나 고지를 되찾기 위해 다섯 차례 공세를 벌였다. 공세는 모두 실패했고, 다섯 달 동안 제국군 사상자는 30만 명이 넘었다. 1916년 말까지 제국군의 전사·실종자는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이 무렵 훗날 1934년 쿠데타를 일으키는 드라고슬라프 M. 페트코비치도 체르나 고지 전선의 젊은 대대장이었다.
전선 뒤에서는 더 큰 위기가 자라고 있었다. 철도는 탄약과 병력 수송에 매달려 곡물을 나를 차량이 모자랐고, 농노 병사의 집에서는 일손이 없어 밭이 묵었다. 병사들은 고향의 가족이 굶주린다는 편지를 받았고, 1916년 겨울부터 탈영이 급증했다.
전선 뒤에서는 더 큰 위기가 자라고 있었다. 철도는 탄약과 병력 수송에 매달려 곡물을 나를 차량이 모자랐고, 농노 병사의 집에서는 일손이 없어 밭이 묵었다. 병사들은 고향의 가족이 굶주린다는 편지를 받았고, 1916년 겨울부터 탈영이 급증했다.
2.7.5. 붕괴 [편집]
1917년 3월 12일 인터그라드에서 방직공장 여공들의 빵 시위가 시작되었다. 수도 수비대의 병사들은 대부분 전선에 나가 본 적 없는 신병이거나 부상에서 회복 중인 병사들이었고, 그 가족들도 같은 빵 배급 줄에 서 있었다. 3월 15일 진압 명령을 받은 수비대의 몇 개 연대가 발포를 거부하고 시위대에 합류했으며, 일부는 장교를 체포했다. 전선 사령부의 라자르 2세가 수도로 보내려던 증원 부대는 철도 노동자들이 열차 운행을 멈추면서 도착하지 못했다. 3월 16일 라자르 2세는 전선 사령부에서 퇴위 조서에 서명했다.
1917년 3월까지 제국군의 전사자는 약 62만 명, 부상자는 약 140만 명, 포로와 실종자는 약 38만 명에 이르렀다.
1917년 3월까지 제국군의 전사자는 약 62만 명, 부상자는 약 140만 명, 포로와 실종자는 약 38만 명에 이르렀다.
2.8. 해체 [편집]
장미 혁명 뒤 제국군은 임시정부의 군대가 되었다. 임시정부는 전쟁을 계속했고, 군대는 1918년 11월 동맹국의 패배와 함께 라 마베라가 휴전을 청할 때까지 서부 전선을 지켰다. 그리핀 근위대는 1917년 4월 해산되었고, 장교단의 일부는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했지만 상당수는 군을 떠났다. 1920년 사랜드 공화국 헌법이 공포되면서 제국군은 사랜드 공화국군으로 재편되었다.
3. 편제 [편집]
3.1. 육군 [편집]
1914년 기준 육군은 평시 기준 보병 48개 사단과 기병 14개 사단, 독립 포병 여단과 공병대로 이루어졌다. 국토는 인터그라드·인크론슈타트·크라슬리스크·자톤·고원·동부의 6개 군구로 나뉘었고, 이 가운데 라 마베라와 맞닿은 인터그라드·인크론슈타트 군구에 병력의 절반 가까이가 배치되었다.
보병은 크라슬리스크 병기창에서 만든 1891년식 소총을 썼고, 포병은 1902년 이후 루이나의 설계를 바탕으로 국산화한 야포를 주력으로 했다. 개전 당시 기관총은 대대당 2정 꼴에 불과해, 라 마베라군에 비해 크게 모자랐다.
보병은 크라슬리스크 병기창에서 만든 1891년식 소총을 썼고, 포병은 1902년 이후 루이나의 설계를 바탕으로 국산화한 야포를 주력으로 했다. 개전 당시 기관총은 대대당 2정 꼴에 불과해, 라 마베라군에 비해 크게 모자랐다.
3.2. 그리핀 근위대 [편집]
1721년 니콜라 1세가 창설한 차르 직속의 근위 부대. 이름은 차르의 문장인 그리핀에서 땄다. 처음에는 차르를 호위하는 연대 둘로 시작했으나, 19세기에는 보병·기병·포병을 갖춘 사단 규모로 커졌다. 장교는 대귀족 가문의 자제들로 채워졌으며, 1762년 궁정 정변과 1825년 12월 장교 봉기가 모두 이 근위대에서 일어났다. 근위대는 대부분 인터그라드에 주둔했고, 1917년 장미 혁명 때 수도에 남아 있던 근위대 예비 대대 일부도 시위대에 합류했다. 1917년 4월 임시정부에 의해 해산되었다.
3.3. 산지 기병대 [편집]
농노제를 겪지 않은 카스탄 산지 자유민의 기병 부대. 산지 자유민은 인두세와 농노제를 면제받는 대신 씨족 단위로 기병을 내어 국경을 지킬 의무를 졌다. 산지 기병대는 험한 지형에서 싸우는 데 능해 고원 전쟁과 서부 전쟁에서 정예로 꼽혔으며, 고유의 복장과 카스탄어 구령을 유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12개 연대가 서부 전선에 투입되었다.
3.4. 고원 기병 연대 [편집]
1784년 병합된 고원의 부족들로 구성된 기병 연대. 고원인은 변경민으로서 병역을 면제받았지만, 지원자들로 이루어진 고원 기병 연대는 높은 급료와 명예 때문에 늘 지원자가 넘쳤다. 연대 안에서는 이슬람 예배와 고원식 복장이 허용되었다.
3.5. 해군 [편집]
해군은 육군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주력은 남부 해안의 자톤에 본거지를 둔 남부 함대였고, 1862년 이후에는 청평 남부의 푹하이에 분견대를 두었다. 1914년 기준 해군은 순양함 6척, 구축함 18척, 포함과 수뢰정 30여 척, 잠수함 4척을 보유했으며, 전함은 1척뿐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남부 함대는 라 마베라 해군과 몇 차례 소규모 교전을 벌였을 뿐, 대부분의 시간을 자톤 항의 방어와 수송 호위에 썼다.
3.6. 항공대 [편집]
1912년 공병대 소속의 항공반으로 창설되었다. 처음에는 루이나에서 사들인 정찰기 12대로 시작했고, 1916년에는 비행기 약 180대를 운용했다. 주로 정찰과 포병 관측에 쓰였으며, 크라슬리스크 병기창에 1915년 항공기 조립 공장이 세워졌다.
4. 병역 제도 [편집]
시기 | 복무 기간 |
1712~1801 | 종신 |
1801~1859 | 25년 |
1859~1888 | 15년 |
1888~1917 | 10년 |
제국군의 병사는 영지별 할당 징병으로 모았다. 정부가 영지마다 농노 인구에 비례해 인원을 할당하면, 영주가 그 인원을 골라 보냈다. 국가 농노 마을에서는 마을 자치가, 도시에서는 길드와 시 참사회가 인원을 정했다. 귀족과 성직자, 1등·2등 길드 상인은 병역을 면제받았고, 변경민인 고원인·타르타르인·대월계 동부민도 별도의 공납을 내는 대신 면제되었다. 카스탄 산지 자유민은 할당 징병 대신 씨족 단위의 기병 복무를 졌다.
장교는 사관학교를 나온 귀족이 대부분이었다. 1863년 이후 평민도 시험을 통과하면 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농노는 끝까지 장교가 될 수 없었다. 최고 계급인 원수는 사랜드어로 '보이보다'(војвода)라 불렀다.
5. 주요 전쟁 [편집]
6. 평가 [편집]
제국군은 1,200년의 대부분 동안 평원 안에서는 강했고 평원 밖에서는 약했다. 반란을 진압하고 고원을 병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789년의 빌베른, 13세기의 몽골, 1620년대의 청평, 1850년대와 1910년대의 라 마베라 앞에서는 번번이 무너졌다. 연구자들은 그 원인을 농노제에서 찾는다. 영주가 고른 농노 병사는 싸울 이유가 없었고, 농노 해방 없이는 보편적 징병과 예비군 제도도 불가능했다. 서부 전쟁 뒤의 개혁이 무기와 철도는 바꾸었지만 병사를 바꾸지는 못했다는 것이 제국군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평가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제국군을 '농노를 농노로 진압한 군대'로 규정했지만, 1917년 3월 수비대가 시위대에 합류한 순간만큼은 '병사들이 인민의 편에 선 날'로 기렸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제국군을 '농노를 농노로 진압한 군대'로 규정했지만, 1917년 3월 수비대가 시위대에 합류한 순간만큼은 '병사들이 인민의 편에 선 날'로 기렸다.
7. 여담 [편집]
- 원수를 뜻하는 '보이보다'는 본래 중세 사랜드어에서 전쟁 때 군대를 이끄는 대귀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 그리핀 근위대의 군기에는 금색 그리핀과 함께 1784년 아바나 요새 함락을 기념하는 수가 놓여 있었다. 이 군기는 1917년 근위대 해산 때 임시정부가 거두어들였다.
- 1934년 쿠데타를 일으킨 페트코비치를 비롯해, 사랜드 공화국의 군부 지도자 상당수가 체르나 고지 전선의 하급 장교 출신이었다. 그래서 공화국 시대에는 이들을 '체르나 세대'라 부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