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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랜드 공화국군 Војска Саландске Републике Armed Forces of the Republic of Saland | |
존속 기간 | 1917년 ~ 1949년 |
전신 | |
최고사령관 | 대통령 (1934~1944 국가재건위원회 의장) |
구성 | 육군, 해군, 공군 (1925~) |
병역 | 21세 이상 남성 징병제 |
병력 | 평시 약 45만 명 (1928) 동원 약 210만 명 (1941~1945) |
사령부 | |
주요 전쟁 | |
1. 개요 [편집]
사랜드 공화국의 군대. 1917년 장미 혁명 뒤 사랜드 제국군을 이어받은 임시정부의 군대에서 출발해, 1920년 헌법으로 육군과 해군, 1925년 독립한 공군을 갖춘 공화국군이 되었다. 농노제 폐지로 영지별 할당 징병이 사라지면서 사랜드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남성이 병역을 지는 보편 징병제가 도입되었다.
공화국군의 32년은 정치에 휘말린 역사였다. 1919년 영지를 점거한 농민들을 해산하는 데 동원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체르나 고지 전선 출신의 젊은 장교들, 이른바 '체르나 세대'는 1934년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국을 무너뜨렸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추축국 편에서 라 마베라와 루이나 원정군에 맞서다 무너졌고, 1944년 정변으로 둘로 갈라졌으며, 1946년부터 1949년까지의 내전에서 인민군에게 패해 사라졌다.
공화국군의 32년은 정치에 휘말린 역사였다. 1919년 영지를 점거한 농민들을 해산하는 데 동원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체르나 고지 전선 출신의 젊은 장교들, 이른바 '체르나 세대'는 1934년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국을 무너뜨렸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추축국 편에서 라 마베라와 루이나 원정군에 맞서다 무너졌고, 1944년 정변으로 둘로 갈라졌으며, 1946년부터 1949년까지의 내전에서 인민군에게 패해 사라졌다.
2. 역사 [편집]
2.1. 임시정부의 군대 (1917~1920) [편집]
1917년 3월 장미 혁명 뒤 제국군은 그대로 임시정부의 군대가 되었다. 그러나 군의 권위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인터그라드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군의 명령이 평의회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고 선언했고, 많은 부대에서 병사위원회가 장교의 명령을 거부했다. 1917년 4월 임시정부는 차르의 친위대였던 그리핀 근위대를 해산했다.
임시정부는 전쟁을 계속하기로 했다. 1917년 7월 서부 전선에서 벌인 '자유의 공세'는 혁명으로 자유를 얻은 병사들이 더 잘 싸울 것이라는 기대 속에 시작되었지만, 열흘 만에 무너졌다. 이후 탈영병이 급증했으며, 1918년 11월 라 마베라가 휴전을 청할 때까지 서부 전선은 겨우 유지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군은 안으로 향했다. 1918년 가을부터 평원 곳곳에서 농민들이 영지를 점거하자, 1919년 봄 임시정부는 군을 동원해 점거를 해산했다. 영주 대신 땅을 요구한 농민들을 군이 포위하고 체포하는 장면은, 혁명 뒤에도 군대가 지주의 편이라는 인식을 농민들 사이에 심었다. 1919년 동원 해제로 군은 전시의 수백만 명에서 수십만 명 규모로 줄었다.
임시정부는 전쟁을 계속하기로 했다. 1917년 7월 서부 전선에서 벌인 '자유의 공세'는 혁명으로 자유를 얻은 병사들이 더 잘 싸울 것이라는 기대 속에 시작되었지만, 열흘 만에 무너졌다. 이후 탈영병이 급증했으며, 1918년 11월 라 마베라가 휴전을 청할 때까지 서부 전선은 겨우 유지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군은 안으로 향했다. 1918년 가을부터 평원 곳곳에서 농민들이 영지를 점거하자, 1919년 봄 임시정부는 군을 동원해 점거를 해산했다. 영주 대신 땅을 요구한 농민들을 군이 포위하고 체포하는 장면은, 혁명 뒤에도 군대가 지주의 편이라는 인식을 농민들 사이에 심었다. 1919년 동원 해제로 군은 전시의 수백만 명에서 수십만 명 규모로 줄었다.
2.2. 공화국군의 창설 (1920~1930) [편집]
1920년 헌법은 대통령을 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정하고 선전포고에 국민의회의 동의를 요구했다. 1921년 병역법은 21세 이상의 모든 남성이 육군 2년, 해군 3년을 복무하는 보편 징병제를 도입했다. 귀족과 성직자, 부유한 상인의 병역 면제가 사라졌고, 제정 시기 변경민으로 병역을 면제받던 고원인과 타르타르인도 징병 대상이 되었다. 카스탄 산지 자유민이 씨족 단위로 기병을 내던 산지 기병대 제도는 폐지되었다.
헌법과 병역법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원칙으로 정했다. 그러나 장교단은 그대로였다. 공화국군의 고위 장교는 대부분 제정 시기 귀족 출신이었고, 중견 장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진급한 젊은 장교들이었다. 공화국 정부는 예산을 아끼려고 군을 줄였는데, 1928년 평시 병력은 약 45만 명으로 제정 말기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1925년에는 육군 항공대가 독립해 공군이 되었다.
헌법과 병역법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원칙으로 정했다. 그러나 장교단은 그대로였다. 공화국군의 고위 장교는 대부분 제정 시기 귀족 출신이었고, 중견 장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진급한 젊은 장교들이었다. 공화국 정부는 예산을 아끼려고 군을 줄였는데, 1928년 평시 병력은 약 45만 명으로 제정 말기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1925년에는 육군 항공대가 독립해 공군이 되었다.
2.3. 체르나 세대 [편집]
1916년 체르나 고지 소모전에서 살아남은 젊은 장교들은 1920년대 공화국군의 중견 장교가 되었다. 이들은 농노 출신 병사들과 함께 참호를 지킨 경험을 바탕으로 귀족 출신 고위 장교들을 경멸했고, 동시에 전선에서 피 흘리는 동안 후방의 정치가들이 전쟁을 망쳤다고 믿었다. 1920년대 내내 이어진 내각 교체와 군 예산 삭감은 이들의 정치 불신을 키웠다.
1930년 체르나 세대의 퇴역 장교들은 극우 반공 운동인 재건 전선을 만들었다. 재건 전선은 의회 정치를 '체르나의 배신'이라 부르며, 공산주의를 막을 강한 국가를 요구했다. 현역 장교들 사이에도 재건 전선에 공감하는 비밀 모임이 생겼는데, 그 중심에 있던 사람이 체르나 고지 전선의 대대장 출신으로 1932년 육군 참모차장에 오른 드라고슬라프 M. 페트코비치였다.
1930년 체르나 세대의 퇴역 장교들은 극우 반공 운동인 재건 전선을 만들었다. 재건 전선은 의회 정치를 '체르나의 배신'이라 부르며, 공산주의를 막을 강한 국가를 요구했다. 현역 장교들 사이에도 재건 전선에 공감하는 비밀 모임이 생겼는데, 그 중심에 있던 사람이 체르나 고지 전선의 대대장 출신으로 1932년 육군 참모차장에 오른 드라고슬라프 M. 페트코비치였다.
2.4. 1934년 쿠데타 [편집]
1934년 5월 9일 새벽 페트코비치는 크라슬리스크 수비대와 근교의 2개 사단을 동원해 정부 청사와 국민의회, 방송국을 점령했다. 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한 고위 장교 몇 명이 저항했지만 곧 체포되었고, 쿠데타는 하루 만에 끝났다. 공화국군의 대부분은 쿠데타에 가담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이후 10년 동안 군은 국가재건위원회의 기둥이 되었다.
2.5. 군부 정권의 군대 (1934~1941) [편집]
국가재건위원회는 군을 빠르게 키웠다. 1937년 국가방위법은 복무 기간을 3년으로 늘렸고, 1939년에는 국가 예산의 38%가 군비에 쓰였다. 1938년 독일과의 청산 협정으로 사랜드는 곡물과 광물을 주고 독일제 대포와 전차, 항공기를 들여왔다. 1941년까지 육군은 36개 사단으로, 공군은 항공기 약 600대로 늘어났다.
군은 안에서도 쓰였다. 1935년 카스탄어 출판 금지에 반발해 동남부 산지에서 무장 저항이 일어나자, 군은 1935년부터 1936년까지 산지 마을들을 포위하고 저항 세력을 소탕했다. 이 소탕전에서 마을이 불타고 주민이 강제 이주되었으며, 산지로 숨어든 공산당 활동가와 카스탄 저항 세력이 손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군은 안에서도 쓰였다. 1935년 카스탄어 출판 금지에 반발해 동남부 산지에서 무장 저항이 일어나자, 군은 1935년부터 1936년까지 산지 마을들을 포위하고 저항 세력을 소탕했다. 이 소탕전에서 마을이 불타고 주민이 강제 이주되었으며, 산지로 숨어든 공산당 활동가와 카스탄 저항 세력이 손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2.6. 제2차 세계 대전 (1941~1945) [편집]
2.6.1. 서부 전선 [편집]
1941년 6월 공화국군은 벨라 강을 건너 라 마베라를 침공했다. 국가재건위원회는 이를 1856년 서부 전쟁에서 잃은 땅을 되찾는 실지 회복 전쟁이라 불렀다. 초기 공세는 독일제 전차와 항공기를 앞세워 벨라 강 서안을 넘어 라 마베라 깊숙이 들어갔다.
1942년 봄 루이나 원정군이 서부 전선에 도착하면서 전세가 바뀌었다. 1942년 4월 브르다르 고지 전투에서 공화국군은 루이나·라 마베라 연합군에 막혀 공세를 멈추었다. 브르다르 고지는 1855년 서부 전쟁에서 제국군이 패한 곳이어서, 사랜드에서는 '같은 고지에서 두 번 졌다'는 말이 돌았다. 이후 1년 넘게 전선은 벨라 강 서안의 구릉지에서 굳었다.
1943년 9월 루이나·라 마베라 연합군이 벨라 강을 건너 반격에 나섰다. 연료와 탄약이 바닥난 공화국군은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고, 1944년 여름까지 연합군은 옛 수도 인크론슈타트를 비롯한 평원 서부를 장악했다. 1943년 4월에는 루이나 해군과 공군이 남부 항구 자톤을 공습해 공화국 해군의 주력이 항구 안에서 침몰했다.
1942년 봄 루이나 원정군이 서부 전선에 도착하면서 전세가 바뀌었다. 1942년 4월 브르다르 고지 전투에서 공화국군은 루이나·라 마베라 연합군에 막혀 공세를 멈추었다. 브르다르 고지는 1855년 서부 전쟁에서 제국군이 패한 곳이어서, 사랜드에서는 '같은 고지에서 두 번 졌다'는 말이 돌았다. 이후 1년 넘게 전선은 벨라 강 서안의 구릉지에서 굳었다.
1943년 9월 루이나·라 마베라 연합군이 벨라 강을 건너 반격에 나섰다. 연료와 탄약이 바닥난 공화국군은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고, 1944년 여름까지 연합군은 옛 수도 인크론슈타트를 비롯한 평원 서부를 장악했다. 1943년 4월에는 루이나 해군과 공군이 남부 항구 자톤을 공습해 공화국 해군의 주력이 항구 안에서 침몰했다.
2.6.2. 후방의 소탕전 [편집]
참전 직후 사랜드 공산당이 결성한 인민군은 고원 가장자리와 동남부 카스탄 산지에 해방구를 세우고 철도와 보급로를 공격했다. 공화국군은 서부 전선에 병력을 보내는 한편 후방에서 인민군 소탕전을 벌였다. 1942년부터 1943년까지의 '산지 정리 작전'에서 군은 인민군을 도운 혐의를 받은 산지 마을들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소탕전은 오히려 산지 주민들을 인민군 쪽으로 밀어냈고, 인민군은 전쟁 동안 수십만 명으로 불어났다.
2.6.3. 1944년 정변과 분열 [편집]
1944년 가을 전황이 절망적으로 기울자, 군부 온건파는 페트코비치를 제거하고 연합국과 휴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0월 17일 국가재건위원회 위원이자 육군 참모총장이던 오그녠 D. 라스토비치 장군이 크라슬리스크에서 페트코비치를 체포했다. 그러나 평원 남부의 친페트코비치 부대와 그곳에 남은 추축국군은 정변을 인정하지 않았고, 동남부와 고원 가장자리는 인민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1944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공화국군은 둘로 갈라져 서로 싸웠고, 국토는 세 갈래로 찢겼다.
1945년 5월 휴전이 발효되었을 때 공화국군의 군인 사망자는 약 120만 명에 이르렀다.
1945년 5월 휴전이 발효되었을 때 공화국군의 군인 사망자는 약 120만 명에 이르렀다.
2.7. 과도정부군 (1945~1949) [편집]
휴전 뒤 연합국 관리위원회는 공화국군을 해체하지 않고 과도정부의 군대로 재편하도록 했다. 라스토비치가 국방장관이 되었고, 친페트코비치 부대의 장교들도 상당수가 처벌 없이 복귀했다. 과도정부군은 약 70만 명으로, 병력과 중화기에서 인민군을 크게 앞섰다.
그러나 과도정부군은 내전에서 무너졌다. 징집된 농민 병사들은 땅을 약속하는 인민군 쪽으로 대거 탈영했고, 지휘부는 군부 정권 출신 장교들의 파벌로 갈라져 있었다. 1946년 여름 과도정부군은 철도와 도시를 따라 반격해 인민군을 산지로 밀어냈지만, 농촌을 장악하지 못했다. 1947년 가을부터 인민군이 도시 사이의 철도와 교량을 끊어 수비대를 하나씩 고립시키자, 고립된 부대들이 차례로 항복했다. 과도정부의 헌병대와 일부 부대는 인민군 협력 혐의를 받은 마을을 불태웠는데,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이를 '백색 테러'로 기록한다.
1949년 봄 크라슬리스크가, 8월에는 3주의 포위 끝에 인터그라드가 함락되면서 공화국군은 사라졌다. 라스토비치를 비롯한 일부 장교와 병사들은 해외로 망명했다. 승리한 인민군은 1950년 사비에트 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과도정부군은 내전에서 무너졌다. 징집된 농민 병사들은 땅을 약속하는 인민군 쪽으로 대거 탈영했고, 지휘부는 군부 정권 출신 장교들의 파벌로 갈라져 있었다. 1946년 여름 과도정부군은 철도와 도시를 따라 반격해 인민군을 산지로 밀어냈지만, 농촌을 장악하지 못했다. 1947년 가을부터 인민군이 도시 사이의 철도와 교량을 끊어 수비대를 하나씩 고립시키자, 고립된 부대들이 차례로 항복했다. 과도정부의 헌병대와 일부 부대는 인민군 협력 혐의를 받은 마을을 불태웠는데,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이를 '백색 테러'로 기록한다.
1949년 봄 크라슬리스크가, 8월에는 3주의 포위 끝에 인터그라드가 함락되면서 공화국군은 사라졌다. 라스토비치를 비롯한 일부 장교와 병사들은 해외로 망명했다. 승리한 인민군은 1950년 사비에트 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되었다.
3. 편제 [편집]
3.1. 육군 [편집]
1928년 평시 육군은 보병 18개 사단과 기병 4개 사단 규모였다. 군부 정권 아래에서 1941년 보병 30개 사단, 기병 2개 사단, 기계화 4개 사단의 36개 사단으로 늘어났다. 국토는 크라슬리스크·인터그라드·인크론슈타트·자톤·고원·동부의 6개 군구로 나뉘었다. 주력 소총은 크라슬리스크 공업 공사의 1924년식 소총이었고, 1938년 이후에는 독일제 야포와 전차가 들어왔다.
3.2. 해군 [편집]
해군은 남부 항구 자톤을 본거지로 한 남부 함대가 전부였다. 1919년 청평 남부의 푹하이 조차지를 반환하면서 해외 기지도 사라졌다. 1941년 기준 해군은 순양함 3척, 구축함 12척, 잠수함 8척, 소형 함정 40여 척을 보유했으나, 1943년 4월 루이나의 자톤 공습으로 주력 대부분을 잃었다.
3.3. 공군 [편집]
1925년 육군 항공대에서 독립했다. 1920년대에는 루이나에서 들여온 항공기 약 150대로 정찰과 연락을 맡았고, 1938년 이후 독일·이탈리아제 전투기와 폭격기를 들여와 1941년 항공기 약 600대 규모가 되었다. 1943년 이후 루이나 공군에 밀려 제공권을 잃었다.
4. 병역 제도 [편집]
시기 | 육군 복무 |
1921~1937 | 2년 |
1937~1941 | 3년 |
1941~1945 | 전시 무기한 |
1945~1949 | 2년 |
1921년 병역법은 21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게 병역 의무를 지웠다. 제정 시기와 달리 영주가 병사를 고르지 않았고, 신분에 따른 면제도 사라졌다. 다만 대학생과 일부 전문직은 복무를 미룰 수 있었다. 장교는 크라슬리스크 사관학교에서 길렀으며, 1920년대에는 평민 출신 장교의 비율이 빠르게 늘었다. 1937년 국가방위법은 복무 기간을 3년으로 늘리고 학교에 군사 교련을 도입했다.
5. 주요 지휘관 [편집]
이름 | 주요 경력 |
1934년 쿠데타, 국가재건위원회 의장 | |
오그녠 D. 라스토비치 | 1944년 정변, 과도정부 국방장관 |
리스토 J. 바예비치 | 서부 전선 사령관(1941~1943) |
블라고예 N. 다비도비치 | 공군 사령관(1936~1944) |
6. 평가 [편집]
공화국군은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결국 공화국을 무너뜨렸다. 보편 징병제는 농노가 영주를 대신해 싸우던 제국군의 구조를 깨뜨린 진보였으나, 장교단을 바꾸지 못한 탓에 군은 공화국의 정치에서 끝내 중립을 지키지 못했다. 체르나 세대 장교들이 일으킨 1934년 쿠데타는 군이 정치의 심판을 자처한 첫 사례였고, 1944년 정변은 군이 스스로 만든 정권을 스스로 끝낸 두 번째 사례였다.
내전에서의 패배는 무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과도정부군은 병력과 중화기에서 인민군을 앞섰지만, 땅을 약속하지 못하는 군대는 땅을 약속하는 군대를 이길 수 없었다. 연구자들은 과도정부군 징집병들의 대규모 탈영을 공화국의 토지 문제가 군사적으로 터져 나온 결과로 본다.
내전에서의 패배는 무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과도정부군은 병력과 중화기에서 인민군을 앞섰지만, 땅을 약속하지 못하는 군대는 땅을 약속하는 군대를 이길 수 없었다. 연구자들은 과도정부군 징집병들의 대규모 탈영을 공화국의 토지 문제가 군사적으로 터져 나온 결과로 본다.
7. 여담 [편집]
- 공화국군 장교들 사이에서 '체르나 세대'는 자부심의 이름이었지만, 1934년 이후 공화파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쿠데타 세력을 가리키는 멸칭이 되었다.
- 1942년 브르다르 고지 전투에서 공화국군을 막은 루이나 원정군의 지휘관은, 87년 전 같은 고지에서 제국군이 패한 사실을 알고 사령부를 1855년 라 마베라군이 사령부를 두었던 같은 마을에 세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