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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포르 국립예술대학 Bellfort National University of the Arts | |
Ars Libera 자유로운 예술 | |
약칭 | BNUA · 국예대 |
기원 | 1702년 (왕립 예술원) |
대학 개편 | 1924년 |
운영 | |
유형 | 국립 종합예술대학 |
총장 | 쥘리앙 A. 페로 |
소재지 | 벨포르 특별시 센트럴벨포르 구 |
학생 수 | 3,210명 (2025년) 학부 2,480 · 대학원 730 |
교원 수 | 310명 (2025년) |
구성 | 음악원 · 무용원 · 연극원 · 미술원 · 영상원 · 예술이론원 |
상징색 | ■ 버건디 |
웹사이트 | |
1. 개요 [편집]
벨포르 국립예술대학(Bellfort National University of the Arts, BNUA)은 루이나의 국립 종합예술대학이다. 음악과 무용, 연극, 미술, 영상까지 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를 실기 중심으로 가르치며, 루이나 최고의 예술가를 길러 내는 학교로 꼽힌다. 벨포르 도심의 센트럴벨포르에 있고, 루이나 국가교육법인이 운영한다.
1702년 왕실이 세운 왕립 예술원에서 출발했다. 1885년 왕정이 무너진 뒤 국립예술원이 되었고, 1924년 지금의 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옛 왕궁의 동쪽 별관에서 시작한 학교는 지금도 그 별관을 본관으로 쓰며, 극장가 페트리엇 웨이와 맞닿아 있다.
벨포르 필하모닉 관현악단과 벨포르 국립 오페라 단원의 대다수, 페트리엇 웨이 무대에 서는 배우와 무용수 상당수가 이 학교 출신이다. 교수 가운데에도 이들 단체의 단원과 지휘자를 겸하는 이가 많아, 루이나 공연 예술계는 사실상 이 학교를 중심으로 이어져 있다.
벨포르 국립예술대학의 역사는 검열과 저항의 역사이기도 하다. 왕실의 학교로 출발해 공화국의 학교가 된 뒤에도, 국가보안법과 스틸워터 계획, 군정의 검열이 차례로 이 학교를 겨냥했다. 1980년 10.24 시민혁명 때 학생들이 벨포르 대성당의 성가대석에서 벌인 단식 투쟁은 혁명을 상징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1702년 왕실이 세운 왕립 예술원에서 출발했다. 1885년 왕정이 무너진 뒤 국립예술원이 되었고, 1924년 지금의 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옛 왕궁의 동쪽 별관에서 시작한 학교는 지금도 그 별관을 본관으로 쓰며, 극장가 페트리엇 웨이와 맞닿아 있다.
벨포르 필하모닉 관현악단과 벨포르 국립 오페라 단원의 대다수, 페트리엇 웨이 무대에 서는 배우와 무용수 상당수가 이 학교 출신이다. 교수 가운데에도 이들 단체의 단원과 지휘자를 겸하는 이가 많아, 루이나 공연 예술계는 사실상 이 학교를 중심으로 이어져 있다.
벨포르 국립예술대학의 역사는 검열과 저항의 역사이기도 하다. 왕실의 학교로 출발해 공화국의 학교가 된 뒤에도, 국가보안법과 스틸워터 계획, 군정의 검열이 차례로 이 학교를 겨냥했다. 1980년 10.24 시민혁명 때 학생들이 벨포르 대성당의 성가대석에서 벌인 단식 투쟁은 혁명을 상징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2. 역사 [편집]
2.1. 왕립 예술원 (1702~1885) [편집]
1702년 왕실은 궁정에서 일할 음악가와 화가, 무용수를 기르기 위해 벨포르 왕궁 동쪽 별관에 왕립 예술원을 세웠다. 처음에는 궁정 악단과 왕실 초상화가의 도제 교육 기관에 가까웠으나, 18세기 후반 음악과 회화, 무용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학교로 자리를 잡았다.
왕립 예술원은 왕실의 후원을 받는 만큼 왕실의 검열도 받았다. 왕실과 교회를 풍자한 작품은 공연과 전시가 금지되었고, 이를 어긴 학생은 쫓겨났다. 1882년 루이나 계승전쟁이 일어나자 예술원 학생 상당수가 의회파에 가담해 선전 포스터와 행진곡을 만들었다. 왕실의 학교가 왕정에 맞선 셈이었다.
왕립 예술원은 왕실의 후원을 받는 만큼 왕실의 검열도 받았다. 왕실과 교회를 풍자한 작품은 공연과 전시가 금지되었고, 이를 어긴 학생은 쫓겨났다. 1882년 루이나 계승전쟁이 일어나자 예술원 학생 상당수가 의회파에 가담해 선전 포스터와 행진곡을 만들었다. 왕실의 학교가 왕정에 맞선 셈이었다.
2.2. 국립예술원과 대학 개편 (1885~1949) [편집]
1885년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왕궁은 공공건물이 되었고, 왕립 예술원은 이듬해 국립예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귀족과 부유층의 자녀가 대부분이던 학생 구성도 국가 장학금이 생기면서 크게 달라졌다. 1891년 창단한 벨포르 필하모닉 관현악단은 국립예술원 교수와 졸업생이 주축이었다.
1924년 제2공화국 정부는 국립예술원을 대학으로 개편해 벨포르 국립예술대학이 되었다. 1926년 국기 공모전에서 당선된 루이나 국기 '회색기'의 디자이너 아멜리 로랑도 이 학교 미술과 출신이다.
1924년 제2공화국 정부는 국립예술원을 대학으로 개편해 벨포르 국립예술대학이 되었다. 1926년 국기 공모전에서 당선된 루이나 국기 '회색기'의 디자이너 아멜리 로랑도 이 학교 미술과 출신이다.
2.3. 냉전과 검열 (1949~1978) [편집]
1949년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뒤, 공산주의에 동조한다는 의심을 받은 교수 두 명이 1950년대 초 해직되었다. 냉전이 깊어지면서 사비에트나 소련과 연관된 작품의 공연은 사실상 금지되었고, 러시아 민요를 연주했다는 이유로 학생 연주회가 취소되기도 했다.
1960~1970년대 이 학교는 반전 운동과 진보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1976년 연극원 학생들은 띠에우리엔 대학살의 시가전 18일을 그린 연극 《18일》을 무대에 올리려 했으나, 공연 사흘 전 경찰이 극장을 봉쇄했다. 이 공연은 1981년에야 처음 무대에 올랐다.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의 조사에서는, 이 학교 교수 세 명이 스틸워터 계획의 관찰 대상 명단에 올라 있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1960~1970년대 이 학교는 반전 운동과 진보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1976년 연극원 학생들은 띠에우리엔 대학살의 시가전 18일을 그린 연극 《18일》을 무대에 올리려 했으나, 공연 사흘 전 경찰이 극장을 봉쇄했다. 이 공연은 1981년에야 처음 무대에 올랐다.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의 조사에서는, 이 학교 교수 세 명이 스틸워터 계획의 관찰 대상 명단에 올라 있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2.4. 군정과 10.24 (1978~1980) [편집]
1978년 10.10 군사반란으로 군정이 들어서자 벨포르 국립예술대학은 가장 먼저 통제를 받은 대학 가운데 하나였다. 국가비상위원회는 학교에 군 감독관을 보내 모든 공연과 전시를 사전 심의했고, 교수 11명을 해직했다. 연극원은 반정부 연극을 했다는 이유로 1979년 여섯 달 동안 문을 닫았으며, 항의 시위를 이끈 학생들은 징집되었다.
1980년 10월 10.24 시민혁명 때 이 학교 학생들은 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10월 14일 계엄군이 시위대를 벨포르 대성당으로 몰아넣고 포위했을 때, 성당 안에 갇힌 사람들 가운데 성악과와 기악과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물과 음식이 끊긴 성당의 성가대석에서 단식을 하며 사흘 동안 노래를 이어 갔고, 종탑에서 울려 나온 이 노래는 대성당 항쟁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았다. 10월 26일 시청 광장에 20만 명이 다시 모였을 때 광장의 임시 무대에서 연주한 것도 이 학교 학생들이었다.
1980년 10월 10.24 시민혁명 때 이 학교 학생들은 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10월 14일 계엄군이 시위대를 벨포르 대성당으로 몰아넣고 포위했을 때, 성당 안에 갇힌 사람들 가운데 성악과와 기악과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물과 음식이 끊긴 성당의 성가대석에서 단식을 하며 사흘 동안 노래를 이어 갔고, 종탑에서 울려 나온 이 노래는 대성당 항쟁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았다. 10월 26일 시청 광장에 20만 명이 다시 모였을 때 광장의 임시 무대에서 연주한 것도 이 학교 학생들이었다.
2.5. 헌정 회복 이후 (1980~현재) [편집]
1980년 헌정이 회복된 뒤 해직 교수들은 모두 복직되었고, 군정 때 징집되거나 제적된 학생들도 학교로 돌아왔다. 1989년 공연과 전시의 사전 심의 제도가 폐지되면서, 루이나에서 국가가 예술 작품을 미리 검열하는 일은 사라졌다.
1977년 이후 루이나 국가교육법인이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2000년대에는 영상원이 새로 문을 열었고, 2010년대 들어 디지털 예술과 예술이론 교육이 강화되었다. 학교는 해마다 10월 검열의 역사를 기억하는 '금지된 작품 주간'을 열어, 과거에 공연이나 전시가 금지되었던 작품들을 다시 무대에 올린다.
1977년 이후 루이나 국가교육법인이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2000년대에는 영상원이 새로 문을 열었고, 2010년대 들어 디지털 예술과 예술이론 교육이 강화되었다. 학교는 해마다 10월 검열의 역사를 기억하는 '금지된 작품 주간'을 열어, 과거에 공연이나 전시가 금지되었던 작품들을 다시 무대에 올린다.
3. 상징 [편집]
교표는 리라와 붓, 펼쳐진 날개를 하나로 엮은 모양이다. 리라는 음악을, 붓은 미술을, 날개는 무대 위의 몸과 자유를 뜻한다. 모토인 라틴어 'Ars Libera'(자유로운 예술)는 1886년 국립예술원으로 바뀔 때 정해졌다. 왕실을 위한 예술에서 시민을 위한 예술로 바뀐다는 뜻이었으나, 이후 군정의 검열에 맞선 학생들이 이 모토를 구호로 쓰면서 표현의 자유라는 뜻이 더해졌다. 상징색은 버건디다.
4. 구성 [편집]
원 | 주요 전공 |
음악원 | 기악 · 성악 · 작곡 · 지휘 |
무용원 | 발레 · 현대무용 · 안무 |
연극원 | 연기 · 연출 · 극작 · 무대미술 |
미술원 | 회화 · 조각 · 디자인 · 건축 |
영상원 | 영화 · 애니메이션 · 방송영상 |
예술이론원 | 예술사 · 예술경영 · 비평 |
학교는 단과대학 대신 6개의 '원'으로 나뉜다. 모든 원이 실기 중심으로 가르치며, 학생들은 전공과 관계없이 다른 원의 수업을 들을 수 있어 음악과 무용, 연극을 함께 엮은 공동 작품이 많이 만들어진다. 같은 벨포르에 있는 벨포르 예술디자인대학이 산업 디자인에, 벨포르 연극영화예술대학이 상업 영화와 방송에 강한 것과 달리, 이 학교는 순수 예술과 무대 예술에 무게를 둔다.
5. 입학 [편집]
입학은 실기 중심이다. 그러나 2022년 교육 개혁 이후 루이나의 모든 대학은 대학별 전공적성 평가의 비중을 전체 평가의 40% 이하로 두어야 해, 실기가 사실상 전부인 예술대학으로서는 큰 부담이 되었다. 학교는 원서 접수 전에 실기 자격 심사를 따로 두는 방식으로 이를 피하고 있는데, 이것이 40% 상한을 사실상 무력화한다는 비판을 받으며 교육부와 학교 사이의 오랜 쟁점이 되었다.
학부 신입생은 해마다 620명 안팎이다. 국립대학인 만큼 등록금은 국가가 정한 상한을 따르며, 소득이 낮은 학생에게는 등록금 전액과 악기·재료비가 지원된다.
학부 신입생은 해마다 620명 안팎이다. 국립대학인 만큼 등록금은 국가가 정한 상한을 따르며, 소득이 낮은 학생에게는 등록금 전액과 악기·재료비가 지원된다.
6. 루이나 예술계와의 관계 [편집]
벨포르 국립예술대학은 루이나 공연 예술계의 인력 공급원이다. 벨포르 필하모닉 관현악단과 벨포르 국립 오페라는 단원의 대다수가 이 학교 출신이고, 많은 교수가 이들 단체의 단원과 지휘자를 겸한다. 페트리엇 웨이의 극장 40여 곳에서 공연하는 배우와 무용수 상당수도 이 학교를 거쳤다.
학교가 극장가와 맞닿아 있는 덕분에 학생들은 재학 중에도 페트리엇 웨이의 공연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학교 출신이 아니면 벨포르의 주요 무대에 서기 어렵다는 불만도 있어, 공연 예술계의 인맥이 지나치게 한 학교에 몰려 있다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학교가 극장가와 맞닿아 있는 덕분에 학생들은 재학 중에도 페트리엇 웨이의 공연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학교 출신이 아니면 벨포르의 주요 무대에 서기 어렵다는 불만도 있어, 공연 예술계의 인맥이 지나치게 한 학교에 몰려 있다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7. 평가 [편집]
벨포르 국립예술대학은 루이나 예술 교육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왕실을 위한 예술원에서 시작해 공화국의 예술대학이 된 학교의 역사는, 루이나 예술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과 함께 걸어왔다.
무엇보다 이 학교는 검열과 맞서 온 역사로 기억된다. 왕실의 금지령, 국가보안법 아래의 해직, 스틸워터 계획의 감시, 군정의 사전 심의는 모두 이 학교를 겨냥했고, 학생과 교수들은 그때마다 작품으로 맞섰다. 1980년 대성당의 성가대석에서 이어진 노래는 그 역사의 정점으로 꼽힌다. 오늘날 '금지된 작품 주간'에 오르는 작품들은, 예술의 자유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해마다 다시 보여 준다.
무엇보다 이 학교는 검열과 맞서 온 역사로 기억된다. 왕실의 금지령, 국가보안법 아래의 해직, 스틸워터 계획의 감시, 군정의 사전 심의는 모두 이 학교를 겨냥했고, 학생과 교수들은 그때마다 작품으로 맞섰다. 1980년 대성당의 성가대석에서 이어진 노래는 그 역사의 정점으로 꼽힌다. 오늘날 '금지된 작품 주간'에 오르는 작품들은, 예술의 자유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해마다 다시 보여 준다.
8. 출신 인물 [편집]
벨포르 국립예술대학 출신 인물은 분류:벨포르 국립예술대학 출신 인물을 참고.
- 아멜리 로랑 - 그래픽 디자이너, 루이나 국기 '회색기' 디자이너 (미술과)
- 이리나 S. 볼코바 - 지휘자, 벨포르 필하모닉 관현악단 수석 지휘자 (음악원)
9. 여담 [편집]
- 본관인 옛 왕궁 동쪽 별관에는 1702년 개원 때 쓰던 궁정 연주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지금도 졸업 연주회가 열린다.
- 1980년 대성당 항쟁 때 학생들이 성가대석에서 부른 노래의 악보는 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해마다 10월 14일이면 재학생들이 벨포르 대성당에서 이 노래를 다시 부른다.
- 1976년 공연 직전에 금지된 연극 《18일》은 '금지된 작품 주간'의 단골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