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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린포드 조선소 파업
Linford Shipyard Strike
기간
1891년 3월 5일 ~ 1891년 5월 6일
장소
린포드 조선회사 제1·2도크 (린포드)
유형
노동쟁의, 파업, 점거, 군 병력에 의한 진압
원인
도급단가 18% 인하 통보와 교섭 대표 해고
파업측
린포드 조선노동자 연합회 (의장 일라이어스 M. 브래넌)
진압측
루이나 해병대 제3연대 (지휘 고드프리 H. 앤슬로 대령)
린포드 조선회사
머로 경비회사
참가 인원
조선소 노동자 2,700여 명
동조 파업 포함 최대 9,000여 명
진압 인원
해병 1,400여 명, 사설 경비 200여 명
사망
11명 (노동자 10, 해병 1)
부상
140여 명
연행
380여 명 (기소 27명)
결과
파업 실패, 조선소 조업 재개
찰스 P. 위트모어 정권의 결정적 실책으로 평가
1894년 공장법 제정의 계기

1. 개요2. 배경
2.1. 린포드와 위트모어 조선소2.2. 1890년 통화법과 임금 인하2.3. 해군확장 3개년 계획
3. 전개
3.1. 파업 돌입3.2. 대체인력과 사설 경비3.3. 4월 19일 정문 충돌3.4. 린포드 총파업3.5. 해병대 투입 결정3.6. 5월 6일
4. 사상자5. 사건 이후
5.1. 재판5.2. 하원 특별조사위원회5.3. 이해충돌 논란5.4. 1892년 대통령 선거
6. 영향
6.1. 1894년 공장법6.2. 노동운동의 형성6.3. 이후의 린포드 조선소
7. 평가
7.1. 사건의 성격7.2. 위트모어에 대한 평가7.3. 비판
8. 여담9. 관련 문서

1. 개요 [편집]

린포드 조선소 파업(Linford Shipyard Strike)은 1891년 루이나 북부의 조선 도시 린포드에서 일어난 노동쟁의다. 도급단가 인하에 반발한 노동자들이 두 달간 조선소를 점거하자, 찰스 P. 위트모어 정부가 해군확장 계획의 함정 건조를 이유로 해병대를 투입해 무력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11명이 사망했다.

루이나 헌정사에서 정부가 자국 노동자에게 정규군을 투입해 발포한 첫 사례이며, 제1공화국 최대의 국내 유혈 사건으로 기록된다. 진압 당일의 현장 사진이 신문에 게재되면서 여론이 급격히 돌아섰고, 위트모어는 이듬해 선거에서 패배해 루이나 최초의 재선 실패 대통령이 되었다.

사건에는 두 겹의 이해충돌이 있었다. 진압 대상이 된 조선소는 위트모어 본인이 1859년에 세워 18년간 경영한 회사였고, 그의 가문은 대통령 재임 중에도 지분 34%를 보유하고 있었다. 노동자 상당수는 그의 옛 고용인이었다.

이 사건은 루이나 노동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후임 앨버트 스트래튼 정권의 1894년 공장법, 나아가 헤이슬러 정권의 1935년 노동관계법에 이르는 흐름이 모두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가 만든 배로 우리를 겨눈다.
── 일라이어스 M. 브래넌, 1891년 5월 5일 파업위원회 마지막 연설

2. 배경 [편집]

2.1. 린포드와 위트모어 조선소 [편집]

린포드는 루이나 북부 해안의 항구 도시로, 1850년대 이후 왕립해군의 함정 건조와 상선 수리를 맡으며 성장했다. 1891년 당시 인구는 6만 8천 명이었고 그중 3,100명이 조선소에 고용되어 있었다.

위트모어 조선소는 1859년 당시 25세이던 찰스 P. 위트모어가 왕립해군에서 전역한 뒤 부친의 밧줄 공장 자산을 담보로 세운 회사다. 철제 선체 기술을 일찍 도입해 왕정 말기 해군 발주를 잇달아 따냈고, 1870년대에는 루이나 북부 최대 조선소가 되었다.

1877년 위트모어가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회사는 주식회사로 전환해 린포드 조선회사로 개편되었다. 경영은 처남 오거스틴 R. 페어헤이븐이 맡았으나 위트모어 가문의 지분은 그대로 남았고, 현장에서는 여전히 "위트모어네 야드"로 불렸다.

2.2. 1890년 통화법과 임금 인하 [편집]

1890년 위트모어 정권은 통화법을 제정해 금본위제를 확립했다. 왕정기의 고이자 국채를 저리로 차환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통화량이 묶이면서 1890년 하반기부터 물가가 하락했다.

기업들은 물가 하락을 근거로 임금 인하에 나섰다. 린포드 조선회사도 1891년 2월 14일 도급단가를 일괄 18% 낮추겠다고 통보했다. 숙련 리벳공의 일당은 2달러 40센트에서 1달러 97센트로 떨어지는 셈이었다.

노동자들은 회사의 수주가 오히려 늘어난 시점에 임금을 깎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실제로 인하의 원인은 물가가 아니라 수주 계약의 구조에 있었다.

2.3. 해군확장 3개년 계획 [편집]

1890년 10월 위트모어 정권은 해군확장 3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내해와 대서양에 각각 함대를 두는 이원 편성을 목표로, 순양함 12척과 방호함 8척을 3년 안에 건조하는 계획이었다.

린포드 조선회사는 이 중 순양함 4척을 수주했다. 문제는 계약이 총액 고정가였다는 점이다. 철강 가격이 예상보다 오르자 회사의 이익은 급격히 줄었고, 회사는 손실을 임금에서 회수하려 했다.

동시에 이 계약은 훗날 정부가 병력을 투입하는 명분이 된다. 조선소가 멈추면 국가의 함대 계획이 멈춘다는 논리였다.

3. 전개 [편집]

3.1. 파업 돌입 [편집]

2월 28일 노동자 대표 11명이 단가 인하 재고를 요구하며 총지배인 사일러스 T. 크로퍼드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회사는 면담을 거부하고 그날로 대표 11명 전원을 해고했다.

3월 5일 조선소 노동자 3,100명 중 2,700여 명이 작업을 중단했다. 리벳공·판금공·목공 등 직종별 공제조합이 급히 연합체를 구성해 린포드 조선노동자 연합회를 만들고, 리벳공 일라이어스 M. 브래넌(45세)을 파업위원회 의장으로 선출했다.

당시 루이나에는 단체교섭을 보장하는 법이 없었다. 노동조합 자체가 금지되지는 않았으나 파업은 형법상 업무방해와 공모로 처벌될 수 있었고, 회사는 파업 이틀째에 이미 형사 고발장을 제출했다.

요구 사항은 네 가지였다.
요구
회사 답변
도급단가 인하 철회
거부
해고 대표 11명 복직
거부
직종별 대표와의 교섭
거부
산재 사망자 유족 보상
검토

3.2. 대체인력과 사설 경비 [편집]

3월 중순 회사는 벨포르와 남부 항구에서 대체인력을 모집했다. 모집 광고에는 파업 사실이 명시되지 않았고, 실제로 도착한 인원 상당수는 현장에서 상황을 알고 되돌아갔다.

3월 하순 회사가 머로 경비회사 소속 사설 경비 200여 명을 고용했다. 이들은 소총으로 무장하고 조선소 담장 안에 숙영했다. 지역 경찰은 개입을 자제했고, 린포드 시장 토머스 R. 밀턴은 "무장 사설 병력의 시내 반입은 시의 치안 권한을 침해한다"며 회사에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3. 4월 19일 정문 충돌 [편집]

4월 19일 오전 대체인력을 태운 바지선이 강을 통해 제2도크로 접근하자 노동자 수백 명이 부두로 몰려들었다. 투석이 시작되었고, 사설 경비가 발포해 노동자 2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4월 20일 격분한 노동자들이 조선소 전체를 점거했다. 사설 경비 200여 명은 무장해제된 뒤 열차에 태워져 시 밖으로 쫓겨났다. 이날부터 조선소는 파업위원회의 통제 아래 들어갔고, 노동자들은 자체 순찰대를 편성해 설비 손상을 막았다. 진수 직전이던 순양함 「아르덴호」의 선체도 그대로 보존되었다.

3.4. 린포드 총파업 [편집]

4월 25일 부두 하역, 철도 조차장, 제철소 노동자들이 동조 파업에 들어가면서 린포드 시의 산업이 사실상 정지했다. 동조 파업 참가자를 포함한 최대 인원은 9,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시내에는 파업 가족을 위한 급식소가 열렸고, 상인들이 외상 장부를 열어 주었다. 「린포드 머큐리」는 이 시기를 "도시 전체가 한쪽 편을 든 두 주"로 기록했다.

3.5. 해병대 투입 결정 [편집]

5월 2일 국무회의에서 위트모어는 병력 투입을 결정했다. 근거는 그해 초 개정된 국방시설 보호 규정이었다.

국방시설 보호에 관한 칙령 제4조(병력의 사용) 정부 발주 함정이 건조 중인 시설의 점유가 방해되어 그 건조가 지연될 우려가 있는 때에는, 대통령은 해당 시설의 보호를 위하여 병력의 사용을 명할 수 있다.


이 조항은 원래 외국 세력의 방해공작을 상정한 것이었으며, 자국민의 쟁의에 적용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회의에서 내무장관과 린포드 출신 하원의원들이 반대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함대는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3년 계획은 3년밖에 없습니다.
── 1891년 5월 2일 국무회의, 찰스 P. 위트모어

3.6. 5월 6일 [편집]

5월 6일 새벽 4시 루이나 해병대 제3연대 1,400여 명이 고드프리 H. 앤슬로 대령의 지휘 아래 강을 건너 제1도크에 상륙했다. 파업위원회는 전날 밤 병력 이동 정보를 입수하고 여성과 아동을 조선소 밖으로 내보낸 상태였다.

노동자들은 도크 진입로에 강판을 쌓고 비무장 상태로 대치했다. 오전 5시 20분경 앤슬로가 해산 명령을 내렸고, 응하지 않자 발포 명령이 내려졌다. 총격은 약 6분간 계속되었다.

작전은 오전 7시 이전에 종료되었다. 노동자 8명이 현장에서, 2명이 후송 중 사망했고, 해병 1명이 투석에 맞아 사망했다. 부상자는 140여 명, 연행자는 380여 명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조선소 부속 범포공장에서 일하던 16세 노동자 해나 L. 리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미성년 노동자의 사망 사실은 이후 아동 노동 규제 논의의 기폭제가 된다.

5월 7일 「벨포르 이브닝 크로니클」이 현장 사진 세 장을 1면에 실었다. 루이나 신문이 사진으로 국내 유혈 사건을 보도한 첫 사례였고, 파장은 기사보다 사진에서 나왔다. 사진은 며칠 만에 전국의 신문에 전재되었다.

4. 사상자 [편집]

구분
인원
노동자 사망
10 (4월 19일 2명 포함)
해병 사망
1
부상
140여
연행
380여
기소
27

5. 사건 이후 [편집]

5.1. 재판 [편집]

1891년 9월 파업 지도부 27명에 대한 1심 판결이 나왔다. 적용 죄명은 공모, 소요, 국방시설 점거였다. 브래넌은 징역 7년, 파업위원 9명은 징역 3~5년, 나머지는 벌금형을 받았다.

발포 측에 대한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4월 19일 사설 경비의 발포에 대해서만 형사 입건이 있었으나 사수를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불기소되었고, 해병대의 발포는 칙령에 근거한 적법한 직무집행으로 정리되었다.

5.2. 하원 특별조사위원회 [편집]

6월 9일 하원이 자유당 퀸턴 F. 대로우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여당인 공화연합이 다수당이었으므로 위원회의 권한은 제한적이었으나, 청문회 자체가 사건을 계속 공론에 붙이는 역할을 했다.

청문회에서 드러난 사실은 세 가지였다.

* 회사가 요구한 병력 투입 요청서가 국무회의 3일 전에 대통령 비서실에 직접 접수되었다는 점
* 총지배인 크로퍼드가 인하 통보 이전에 이미 대체인력 모집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
* 순양함 계약의 고정가 조항이 회사에 불리하게 체결되었으며, 회사가 그 손실을 임금으로 메우려 했다는 점

5.3. 이해충돌 논란 [편집]

11월 「벨포르 이브닝 크로니클」이 위트모어 가문의 지분 보유를 보도했다. 대통령 본인 명의는 없었으나 형제와 자녀 명의로 린포드 조선회사 발행주식의 34%가 보유되어 있었고, 이는 대통령 재임 중에도 변동이 없었다.

위트모어는 "회사의 경영에 관여한 바 없으며 주식은 가족의 재산"이라고 해명했다. 법적으로 문제 삼을 규정이 없었다는 점은 사실이나, 자기 회사의 파업에 국가 병력을 보낸 대통령이라는 구도는 해명으로 지워지지 않았다.

당시 루이나에는 공직자 재산 등록도 이해충돌 회피 의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5.4. 1892년 대통령 선거 [편집]

1892년 11월 위트모어는 자유당 앨버트 스트래튼에게 패배했다. 득표율은 44.1% 대 53.2%였다.

패배의 직접적 원인은 린포드였다. 위트모어는 통화 안정과 국채 차환, 해군 확장이라는 뚜렷한 성과를 갖고 있었으나, 유권자들은 그 성과보다 사진 세 장을 기억했다. 특히 그의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이던 린포드 제2선거구에서 그는 자신이 하원의원으로 네 번 당선된 지역에서 22%를 얻는 데 그쳤다.

이로써 위트모어는 루이나 헌정사 최초의 재선 실패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퇴임 후 정계를 완전히 떠나 조선업에 복귀했다.

6. 영향 [편집]

6.1. 1894년 공장법 [편집]

스트래튼 정권의 첫 입법이 1894년 공장법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4세 미만의 공장 고용 금지, 16세 미만의 야간 노동 금지
* 1일 최장 노동시간 규정과 주 1일 휴업 의무
* 사업장 안전 기준과 정부 감독관의 임검권 신설
* 산업재해 사망 시 사용자의 보상 책임 명문화

미성년 노동자의 사망이 없었다면 아동 노동 조항이 이 시점에 들어가기 어려웠으리라는 것이 정설이다.

같은 해 스트래튼은 파업 관련 수형자 전원을 사면했다. 브래넌은 3년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6.2. 노동운동의 형성 [편집]

파업은 실패했으나 조직은 남았다. 파업 과정에서 급조된 직종별 연합체가 해산하지 않고 1895년 루이나 노동자평의회로 이어졌으며, 이 조직이 이후 반세기 동안 루이나 노동운동의 중심이 된다.

린포드에서 출발한 계보는 이후의 입법으로 계속 이어진다. 1894년 공장법, 머서 정권의 국민보험, 마스덴 정권의 1920년 보통선거, 그리고 헤이슬러 정권의 1935년 노동관계법이 그것이다. 단체교섭권이 법률상 권리가 되기까지 린포드로부터 44년이 걸렸다.

6.3. 이후의 린포드 조선소 [편집]

린포드 조선회사는 1920년대까지 민간 회사로 남았다가, 1936년 헤이슬러 정권의 항만·기간산업 국유화로 국영 린포드 조선공사가 되었다. 국유화 결정 당시 정부가 내세운 명분 중 하나가 1891년의 전례였다.

7. 평가 [편집]

7.1. 사건의 성격 [편집]

루이나 노동사에서 이 사건은 국가와 자본이 구분되지 않던 시기의 마지막 장면으로 다뤄진다. 대통령이 창업자였고, 발주자가 정부였고, 진압자가 군대였다. 세 역할이 한 사람에게 겹쳐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제1공화국 초기 국가의 성격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7.2. 위트모어에 대한 평가 [편집]

위트모어는 금본위제 확립과 국채 차환, 해군 확장으로 근대 루이나의 재정·군사 기반을 놓은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역대 대통령 평가 조사에서 그의 순위를 끌어내리는 것은 언제나 린포드다.

특히 그가 사건 이후에도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는 점이 평가에 반영된다. 1898년 저서 《산업 루이나》에서 그는 파업을 "국가 계획에 대한 사적 이익의 저항"으로 규정했고, 사망자에 대한 언급은 한 줄도 넣지 않았다.

7.3. 비판 [편집]

* 칙령의 확대 적용 — 외국의 방해공작을 상정한 조항을 자국민의 쟁의에 적용한 것은 명백한 남용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 조항은 1894년 개정으로 적용 대상에서 국내 쟁의가 제외되었다.
* 책임자 불처벌 — 발포에 대해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고, 진압을 지휘한 앤슬로는 이듬해 준장으로 진급했다.
* 사설 무장 경비 — 회사가 200명의 무장 인력을 고용해 시내에 주둔시킨 것이 아무런 법적 제재를 받지 않았다는 점은 이후 사설 경비업 규제의 근거가 되었다.

8. 여담 [편집]

* "린포드 행동"는 표현은 루이나에서 권력이 자기 편의 이익을 위해 공권력을 동원했음을 뜻하는 관용구가 되었다.
* 5월 6일은 루이나 노동절의 기원이다. 현재의 노동절은 5월 6일이며, 이는 국제 노동절과 날짜가 다른 몇 안 되는 사례에 속한다.
* 「벨포르 이브닝 크로니클」의 사진기자 마틴 R. 헤이든은 촬영 직후 필름을 빼앗겼으나, 미리 다른 통에 옮겨 둔 세 장이 남아 보도되었다. 헤이든은 이 일로 사흘간 구금되었다.
* 진수를 앞두고 있던 순양함 「아르덴호」는 점거 기간에도 손상되지 않았고 1892년 예정대로 진수되었다. 파업위원회가 설비 보호 순찰대를 둔 것은 "배에는 죄가 없다"는 이유였다고 전해진다.
* 위트모어는 1907년 린포드에서 사망했다. 장례 행렬이 조선소 앞을 지날 때 야드의 노동자들이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는 오랫동안 지역에서 회자되었다.
* 1891년 현장에 세워진 추모비는 1978년 군정기에 철거되었다가 1988년 같은 자리에 재건되었다.

9. 관련 문서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