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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2. 특징3. 배경4. 전말
4.1. 농업집단화4.2. 터무니없는 예상치 잡기4.3. 삼림 파괴4.4. 토법고로4.5. 제사해 운동
4.5.1. 살충제 남용
4.6. 심경밀식4.7. 억지로 휴경지 만들기4.8. 가축 폐사4.9. 치수사업4.10. 공포정치와 학살
5. 결과: 삼년대기근6. 끝없는 식량 징발7. 숨겨진 원흉8. 이후

1. 개요 [편집]

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 the "Great Leap Forward" movement) 은 청평대제국에서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청평 공산당의 주도로 실시된 경제·사회 개발 운동이었다.

당시 청평 지도부는 랜드해협 국제질서를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경쟁 구도로 바라보았다. 자본주의 진영에서 루이나가 선도국, 플로렌시아가 그 뒤를 잇는 국가로 자리 잡았다면,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사비에트가 선도국이며, 청평은 그 다음가는 핵심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규정하였다.

이에 청평은 단기간에 농업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리고, 철강과 공업 생산에서 플로렌시아를 추월하여 루이나와 대등한 수준으로 도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궁극적으로는 사비에트와 함께 공산권의 양대 축을 이루어 사회주의 체제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과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운동은 비현실적인 계획, 기술적 한계, 주민 강제 동원, 과장된 성과 보고, 부정부패로 인해 처참히 실패하였다. 농업 기반은 붕괴하고 대규모 기근이 발생했으며, 사회 전체가 심각한 퇴보를 겪었다. 결과적으로 청평은 공산권의 제2의 중심국가로 도약하기는커녕, 수십 년간 경제·사회 발전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2. 특징 [편집]

정식 명칭은 제2차 5개년 계획으로, 그 유명한 토법고로와 제사해 운동 역시 청평 대약진 운동의 일부분이었다. 수천만 명에 이르는 아사자가 속출하고 경제가 후퇴했다는 점에서, 현대 청평사에서 이 운동은 지도부의 최대 과실로 지목되며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청평의 대약진 운동은 국가를 후퇴시킨 대실책으로 평가되며, 이후 벌어진 문화혁명과 함께 청평 전체의 문화적·경제적·사회적 수준을 20년 이상 퇴보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이로 인해 청평 전역에서 기근이 발생해 3천만~5천만 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하였다. 이는 청평 민간인 대학살이나 홀로코스트와 비교해도 수십 배에 달하는 규모로, 지도자의 무능과 오만이 얼마나 치명적인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된다.

청평의 경제성장률 통계를 살펴보면, 지도부 시절 내내 성장이 낮았던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1차 5개년 계획에서는 두 자릿수에 가까운 고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고, 1970년대 초반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도 10%대 성장률을 달성한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 시기인 1980년과 1981년에는 -25%, -27%라는 충격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이전 성과를 모조리 상실했다. 이후 실권을 잡은 개혁파에 의해 다시 4년간 10%대 성장이 이어졌지만, 곧 문화혁명이 발발하며 사회혼란으로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혼란이 진정된 뒤 기저효과 덕에 일시적 고성장이 있었으나, 1980년대 중반에는 다시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처럼 두 차례나 경제성장의 성과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탓에, 같은 시기 유고랜드가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며 1인당 국민소득을 수십 배 늘려가는 동안 청평은 고작 몇 배의 성장을 이루는 데 그쳤다.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유고랜드와 청평의 소득수준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청평 지도부가 사망한 1980년대 중반에는 청평의 1인당 소득이 200달러에도 못 미친 반면, 유고랜드는 열 배를 웃도는 격차를 보였다. 이후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들어서는 격차가 더 줄어들어, 유고랜드가 청평 경제력의 잘반 이상인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는 청평의 국제적 위상을 급속히 떨어뜨렸으며, 서방 자본주의 진영의 완전고용과 안정적 성장과 대비되어 더욱 뼈아픈 비교로 남았다.

물론 청평 체제 하에서는 일정한 복지가 존재했다. 집은 국가에서 배분해주었고, 도시 노동자는 평생직장이 보장되며 의료를 무상으로 제공받았다. 때문에 실질 구매력은 단순한 달러 수치보다 다소 높았지만, 북산과 유고랜드에서 컬러 TV와 첨단 가전제품이 보급될 때, 청평의 대다수 시골 마을은 전기와 상수도조차 설치되지 않은 곳이 허다했다. 자가용이라 해도 자전거가 고작이었다. 이는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이라는 두 차례의 대실패가 청평의 잠재력을 얼마나 갉아먹었는지를 보여준다.

사건의 기원에는 북산과의 경쟁이 있었다. 북산이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공업육성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대규모 산업화를 추진하자, 청평 지도부는 이에 강한 자극을 받았다. 북산이 자본주의 진영 내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청평은 공산주의 진영에서 사비에트에 이어 자신들이 두 번째로 선도적 위치에 올라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이에 청평 지도부는 단기간에 농업과 공업을 동시에 증산하여, 북산의 성장세를 따라잡고 나아가 플로렌시아를 능가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하여 시작된 것이 바로 제2차 5개년 계획, 즉 대약진 운동이었다.

청평 공산당은 이 운동을 ‘농촌이 주체가 된’ 최초의 혁명이라 규정했다. 지도부는 기존 혁명이 도시 노동자에 의해 추진된 것이었다면, 이제는 농민들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대규모 도시 제철소나 자동차 공장을 짓는 대신, 농민들이 토법고로를 쌓아 철을 만들고, 농촌에서 자체적으로 트랙터를 조립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는 ‘우리식 혁명’이라 불렸지만, 결국 현실성 없는 공상에 불과했다. 산업화에는 도시 인구의 확대와 체계적 생산시설이 필수임을 간과한 것이었다.

일부 개혁적 인사들은 이미 이 계획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러나 최고 지도부는 충언을 묵살했을 뿐만 아니라 반대자들에게 자아비판을 강요하며 숙청을 단행했다. 1차 5개년 계획이 나름 성과를 거둔 경험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해, 지도부는 자신들의 무오류성을 맹신하게 되었고, 권위주의적 체제 속에서 누구도 제동을 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특히 군 원로와 개혁파 인사들이 직언하다가 숙청되거나 실각하면서, 권력 내부의 견제 기능은 완전히 무너졌다. 지도부는 경제와 사회가 붕괴하는 현실을 직감하면서도 계획을 고집했고, 그 결과 기근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최후에는 자연재해까지 겹쳐 수천만 명이 아사한 뒤에야 해외로부터 긴급 식량을 수입하고 일부 정책을 수정했지만, 이미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뒤였다.

결국 청평의 대약진 운동은 문화혁명과 함께 당조차도 인정하는 역사적 실책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청평에서 사회비판적 영화나 소설이 검열을 피하기 위해 과거를 빌려 현 체제를 은유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단골 소재가 된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3. 배경 [편집]

"플로렌시아는 철강을 연간 2천만 톤 생산하고 있다. 15년 후에는 3천만 톤까지 늘어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청평은 어떻게 될까? 15년 후 우리는 철강 4천만 톤을 생산하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플로렌시아를 능가하게 된다. 올해 우리는 520만 톤을 생산했고, 앞으로 5년 뒤에는 1천만~1천5백만 톤, 다시 5년 뒤에는 2천~2천5백만 톤, 또 5년 뒤에는 3천~4천만 톤에 이를 것이다. 지금 내가 다소 과장되게 말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허공의 공상이 아니라 충분한 근거를 가진 자신감이다. 북산의 동지들이 ‘5년 안에 빌베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15년 안에 우리 또한 플로렌시아[1]를 추월할 수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대약진 운동을 선포하는 청평 공산당 지도부의 교시

청평 지도부는 늦게나마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설비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식량을 비축하고 이를 해외로 수출하였다. 일례로 1959년, 청평은 대도시 주민 전체가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식량을 비축했는데, 이 가운데 상당량을 외화 확보 명목으로 수출해버렸다. 그 결과 베르샤, 띠에우리엔, 남강과 같은 주요 도시들에서 식량 공급이 끊겼고, 1960년 한 해에만 수천만 명이 배급을 받지 못했다. 배급 상황은 참담하여 한 달에 1인당 돼지고기 100g이 고작이었으며, 곡물은 턱없이 부족해 영양실조와 부종에 걸리는 사람이 속출했다. 부종 환자는 병원에서 진단서를 떼어야만 황두와 흑설탕을 소량 배급받아 영양을 보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청평 지도부는 북산을 견제하기 위해 무리한 규모의 군사력 증강을 계속했다. 핵 개발, 대규모 병력 유지, 신형 무기 도입에 막대한 자원이 투입되었으며, 동시에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원조와 동맹 지원에도 돈과 곡물을 쏟아부었다. 지도부는 이미 1958년부터 식량 부족 현상을 보고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획을 멈추지 않았고, “희생은 필연적”이라는 구호 아래 인민에게 더 많은 부담을 강요하였다.

대약진 운동 이전 청평은 사비에트를 본보기로 삼아 국가 운영 전반을 설계했다. 지도부는 “사비에트가 짧은 기간 안에 후진 농업국에서 선진 공업국으로 변모했듯, 우리도 그 길을 따라야 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적극적으로 원조를 요청했다. 실제로 수많은 설비와 기술자가 사비에트에서 유입되었고, 이 과정에서 청평의 초기 산업화 기반이 마련되었다.

1950년대 초반, 청평은 연 20%의 성장을 목표로 내세우며 사비에트에 수백 개 산업 플랜트 건설을 요구했으나, 당시 노스탈린은 이를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계획으로 간주하고 절반 이하로 줄여 승인했다. 청평 지도부는 불만을 품었지만, 노스탈린의 권위 앞에서는 공개적으로 반발하지 못했다. 대신 경제 관료들은 균형재정과 물가 안정을 중시하는 현실적 정책을 병행했고, 그 결과 제1차 5개년 계획은 연평균 9% 성장이라는 나쁘지 않은 성과를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사비에트가 여전히 압도적 군사·경제 대국으로 군림하는 가운데, 청평은 ‘2위 국가’로 고착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북산이 루이나의 지원을 받아 공업화를 가속화하는 모습은 청평의 불안감을 더욱 자극했다. 결국 지도부는 “플로렌시아를 7년 안에 추월하고, 15년 안에 루이나를 따라잡겠다”는 과격한 구호를 내걸었다. 안정 성장을 주장하던 경제 관료들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낙인이 찍혀 자아비판을 강요당했고, 청평은 점차 무리한 속도전과 과잉 목표로 나아가게 되었다.

당시 청평의 경제는 전후 복구와 안정 성장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으나, 산업 기반이 약해 여전히 농업이 중심이었다. 다른 서방국가들도 전쟁 후유증에서 막 벗어난 시기였기에 경제 발전의 정점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도부는 이를 간과한 채 무리한 속도전을 추진했다. 플로렌시아는 여전히 전후 배급제를 시행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나, 청평은 이를 추월의 기회로 착각했다. 그 결과 철강 생산 목표를 5년 뒤 1천만 톤, 10년 뒤 2천만 톤, 15년 뒤에는 4천만 톤으로 설정하는 등, 현실과 괴리된 수치가 제시되었다.

이러한 계획은 사실상 국가적 허세였다. 하지만 지도부는 청평을 단순히 ‘인구만 많은 나라’에서 벗어나 단기간에 공업을 육성해 “국제사회에서 큰소리치는 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문제는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치밀한 계획과 안정된 기반 구축보다는 당장의 성과에 집착하여 속전속결식 대책을 남발했다는 것이었다. 전시행정이 난무하며, 무리한 증산 운동과 허위 보고가 체계적으로 만연하게 되었다.

결국 1968년 산업생산량이 단기적으로 50% 이상 급증하는 호조를 보였지만, 이는 허상에 불과했다. 1969년부터 아사자가 속출했고, 연이어 발생한 흉작은 농업 생산량을 10년 전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저질 공산품과 소비재가 넘쳐나 국방력마저 약화되었으며, 곳곳에서 배급이 끊겨 전국 인민은 건국 직후보다도 더 참혹한 고통에 시달렸다.

이렇게 대약진 운동은 청평을 고도 성장의 길로 인도하기는커녕, 북산을 견제하려는 조급한 경쟁심과 지도부의 오만 속에서 인류사 최악의 기근과 경제적 퇴보를 초래하였다. 개발도상국의 선도국을 자처하던 청평은 오히려 플로렌시아를 따라잡기는 커녕, 유고랜드에까지 추월당하며 국제적 위상이 추락했고, 이는 수십 년 동안 회복되지 못한 치명적 상처로 남게 되었다.

4. 전말 [편집]

대약진 운동은 천하의 청평 지도부조차 두려워했던 사비에트의 노스탈린이 여전히 건재하며 랜드해협 일대의 사회주의 진영을 강력히 주도하는 상황에서, 청평이 그 권위에 눌려 있다가 결국 북산의 약진과 국제적 체제 경쟁 속에서 무리하게 추진한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노스탈린이 살아있던 시절, 청평은 사비에트로부터 기술, 자본, 건축자재 등을 지원받으며 소련이 1930년대 우랄과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벌였던 것과 유사한 대규모 중공업 건설을 감행했다. 이 시기 노스탈린은 청평 공산당의 경제정책을 직접 간섭하며, 자신이 보기에 무리하다 싶은 것은 가차 없이 취소하거나 축소했고, 대가로 청평의 자원을 수탈하듯 가져갔다. 청평 지도부 내부에는 불만이 적지 않았지만, 노스탈린에게 정면으로 반발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북산이 루이나의 지원을 등에 업고 공업육성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부터였다. 북산은 불과 5년 안에 빌베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공언했고, 이는 청평의 위기감을 자극했다. 사비에트가 “루이나를 따라잡겠다”고 선전하자, 청평은 이에 뒤지지 않겠다며 “플로렌시아를 추월하겠다”는 선언을 내놓았다. 이때부터 청평의 경제정책은 본격적으로 무리한 속도전으로 치달았으며, 대약진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현실적인 방법을 제안한 경제 관료들과 전문가들은 “제국주의 간첩”, “태만에 빠진 부르주아”로 몰려 가혹한 비판을 받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청평 지도부는 공공연히 “배운 사람은 쓸모없고, 무식한 인민이 가장 유식하다”는 반지성주의적 발언을 퍼뜨리며 전문가 집단을 무력화시켰다. 그러나 정작 지도부를 이끌던 최고 권력자는 고등교육을 간접적으로나마 받은 지성인이었고, 수많은 문헌을 탐독하며 웅변과 문장력으로 공산당 내부에서 최고의 설득력을 자랑하던 인물이었다. 즉, 반지성주의를 앞세운 그가 사실은 지성인이었다는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지도부는 지식인에 대한 경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국가 정책을 오로지 자신들의 사상과 명령을 통해 집행하게 했다. 인민은 지도부의 구호를 위해 존재했고, 정책은 지도부의 의지만으로 결정되었다.

그 결과 청평은 타국의 계획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사비에트의 실질적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무리한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모든 인민은 생산 단위로 묶여 공동 취식을 강요받았고, 각 마을마다 할당량이 부과되었다. 더 나아가 모든 마을에는 소형 용광로, 토법고로가 설치되어 대형 공장을 대체하며 강철을 생산하도록 지시되었다. 당시 지도부는 “근대화의 관문은 철강”이라 주장했다. 건물, 비행기, 선박, 무기, 차량 등 산업 전반에 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철강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청평을 강국으로 만드는 첫걸음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 운동은 크게 농업 집단화와 토법고로 운동으로 나뉘었으며, 함께 진행된 제사해 운동 또한 엄청난 파급력을 지녔기 때문에 대약진 운동을 설명할 때 반드시 언급된다. 이외에도 다양한 정책이 난무했는데, 각 기업소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야간 근무를 강요하면서 노동시간은 하루 10시간, 주 60시간에 달했다. 이 시기는 청평 건국 이후 가장 열악한 노동환경이 조성된 시기였다.

4.1. 농업집단화 [편집]

청평에서 추진된 농업집단화는 대약진 운동의 시작이자, 그 파국을 예고한 핵심 정책이었다. 지도부는 사비에트의 경험을 모방한다는 명분으로 농촌 사회를 강제적으로 개편했으나, 그 결과는 참혹한 실패와 대규모 인명 피해였다.

정권 수립 직후 청평은 먼저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지주와 부농은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처형·투옥·추방당했고, 공식 집계만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비공식 추산은 그 몇 배에 달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중농과 단순히 수확량이 많았던 농민들조차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폭력적 숙청은 단순한 토지 재분배를 넘어 농촌 공동체 전체를 붕괴시켰고, 세대를 이어 유지되던 지역적 생산·분배 구조를 와해시켰다. 농민들의 가내수공업과 부업은 ‘사적 이윤 추구’라는 이유로 몰락했고, 그로 인해 농촌 경제의 순환은 근본부터 끊어졌다.

청평 공산당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사비에트식 집단화를 달성해야 한다”는 지도부의 강경 노선 아래, 인민공사(코뮌)가 설립되었다. 이는 농민의 개별 토지를 협동농장으로 통합하는 조치였으며, 농민은 더 이상 자신의 땅에서 주체로 일하지 못하고 집단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였다. 지도부는 이를 “사회주의적 협동”이라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인민의 생활 전반을 장악하려는 통제 체제였다.

농업집단화는 생활 양식 자체를 해체하는 과정이었다. 인구 이동은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며, 자택에 곡식이나 물자를 저장하는 행위는 ‘반동적 저항’으로 규정되었다. 공산당 간부들은 마을마다 상주하며, 가정집을 수색해 곡물·소금·조미료뿐 아니라 솥·그릇·수저까지 수거하였다. 개인 취사는 전면적으로 금지되었고, 이를 위반하면 혹독한 처벌이 뒤따랐다. 사찰과 도관, 시장과 식당은 폐쇄되었으며, 그 자리는 국가가 운영하는 공용급식소가 대신하였다. 인민은 더 이상 스스로 끼니를 마련할 권리를 갖지 못했고, 오직 당이 분배하는 음식만 섭취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인민이 생산에만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실제 효과는 정반대였다. 개인의 자율성과 생존 본능은 억눌렸고, 생산 의욕은 급격히 추락했다. 수확물은 모두 공용 창고로 반입되었으나 배급은 평등하지 않았다. 충성도가 높은 자에게는 우선적으로 식량이 돌아갔고, 평범한 농민은 굶주려야 했다. 개인의 노력과 성실함은 보상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성과를 낼수록 더 많은 수탈을 당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농민들은 논밭을 포기하고 허위 보고로 생존을 연명하였다.

농업집단화는 명목상으로는 사회주의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실제로는 굶주림과 죽음을 평등하게 나누는 체제였다. 국가가 약속한 풍요는 실현되지 않았고, 인민에게 남은 것은 기근과 피폐한 삶뿐이었다. 농촌의 생산력은 붕괴하였고, 공용급식소는 기아와 병을 확산시키는 또 다른 무덤이 되었다.

결국 청평의 농업집단화는 사회주의 이상을 실험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인민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폭력적 통제 장치로 기능하였다. 그것은 농민을 해방시키겠다던 구호와 달리, 인민을 노예화하고 절망 속에 내몰았으며, 대약진 운동의 대기근을 불러온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4.2. 터무니없는 예상치 잡기 [편집]

청평의 대약진 운동은 애초부터 현실과는 동떨어진 숫자놀음으로 출발했다. 지도부는 농업과 공업 생산에서 달성 불가능한 목표치를 일방적으로 제시했고, 지방 간부들은 상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보다 더 부풀린 수치를 보고했다. 불과 몇 달 만에 “기록적 생산량”이라는 구호가 전국을 휩쓸었고, 숫자가 곧 충성심을 입증하는 지표가 되었다.

처음에는 1헥타르당 몇 톤 수준의 곡물 수확 목표가 제시되었으나, 선전 열풍과 당 간부들의 경쟁적 허위 보고가 맞물리자 수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았다. 곧 일부 지역에서는 1헥타르당 30톤, 40톤이 약속되었고, 이는 과학적 근거라곤 전혀 없는 허구적 수치였다. 비교하자면, 21세기 미국의 첨단 농업 기술조차 밀 기준으로 헥타르당 평균 10톤 내외의 수확을 기록한다. 미국은 위성 기상예보, 종자 개량, 자동화된 관개 시스템, 첨단 농기계, 정밀 비료·농약 투입 등 세계에서 가장 진보한 기술을 동원한다. 그럼에도 10톤을 넘기기 어렵다. 그런데 청평 지도부는 1950년대 후반, 삽과 곡괭이에 의존하는 농민들에게 그 세 배, 네 배에 달하는 수확을 강요한 것이다.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요구인가.

농업뿐만이 아니었다. 철강 생산 목표 역시 비현실적이었다. 토법고로라는 조잡한 소형 용광로를 온 마을마다 세우고, “플로렌시아의 철강을 10년 안에 추월하겠다”는 약속이 남발되었다. 그러나 당시 플로렌시아는 루이나와 함께 세계 유수의 산업국이었고, 최신식 제철소와 국제 무역망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조차 포항제철 같은 대규모 설비 없이는 철강 대량생산을 불가능하다고 여겼는데, 청평은 흙과 볏짚으로 쌓은 화덕으로 이를 따라잡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허구적 목표는 단순한 선전이 아니라, 실제 강제 정책으로 이어졌다. 인민은 밤낮으로 일터로 내몰렸고, 허위 보고를 강요받았다. 각지에서 등장한 “모범 밭”은 극도로 제한된 실험 농지에서 인위적으로 성과를 꾸민 결과에 불과했으나, 그것이 곧 전국적 기준으로 둔갑했다.

비료 쟁탈전은 광기를 띠었다. 바다의 해초, 쓰레기장의 폐기물, 굴뚝의 재와 검댕까지 긁어모아 들판에 뿌렸다. 사람과 가축의 분뇨는 말할 것도 없었다. 농민들은 줄지어 분뇨를 지게에 지고 논밭을 오갔으며, 일부 지방에서는 여성들이 머리카락까지 잘라 비료로 바치도록 강요받았다. 공동식당에서 식사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야 했다는 사례는, 국가가 개인의 몸까지 자원으로 환원시켰음을 보여준다.

가옥 철거는 비극의 정점이었다. 흙벽돌과 진흙으로 지은 집은 ‘양분의 보고’라 불리며 차례차례 무너졌다. 처음에는 버려진 담과 외양간이 허물어졌으나, 목표치 달성이 가속화되자 멀쩡히 사람이 살던 가옥들까지 철거되었다. 수천 채의 집이 무너져 흙벽돌이 논밭에 뿌려졌고, 주민들은 한순간에 거처를 잃었다.

이 모든 광란의 배경에는 지도부의 허황된 비교심리가 있었다. “북산조차 5년 만에 빌베른을 따라잡겠다고 하는데, 우리가 플로렌시아를 추월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구호는 전국을 압도했다. 그러나 그 목표는 미국과 플로렌시아가 축적한 산업기반과 과학기술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공허한 선동에 지나지 않았다. 첨단 농기계와 유전자 개량 종자, 기계화된 축산업, 화학비료 공장이 뒷받침된 미국조차 달성하지 못한 수치를, 맨손의 농민들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4.3. 삼림 파괴 [편집]

청평의 대약진 운동은 단순히 농업과 공업 생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자연환경 자체가 전면적으로 파괴되었으며, 특히 삼림은 가장 직접적인 희생양이 되었다. 청평 지도부는 자연을 극복하고 굴복시켜야 할 적으로 보았고, 이를 대중 동원의 대상으로 삼았다. 언덕은 갈아엎어 밀밭으로 바꿀 수 있고, 산은 깎아 평지로 만들 수 있으며, 강의 물길조차 사람 손으로 들어올려 바꿀 수 있다는 의지주의적 신념은, 결국 자연과의 전쟁을 국가 정책으로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지도부는 대약진 운동 개시와 함께 “우리는 자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는 구호를 내세우며, 인민을 끝없는 투쟁으로 내몰았다.

철강 증산을 위해 전국에 설치된 토법고로는 불을 꺼뜨릴 수 없는 화덕이었고, 이를 위해 농민들은 끝없이 숲을 베어내야 했다. 한때 푸르른 원시림으로 뒤덮였던 산들은 몇 달도 되지 않아 민둥산으로 변해갔다. 어느 지역에서는 숲의 2/3가 토법고로의 연료로 사라졌고, 몇 해가 지나기도 전에 산 전체가 벌거숭이 진흙 언덕으로 변했다. 윈난에서 쓰촨에 이르는 도로변의 울창한 숲조차 무차별적으로 베어졌고, 그 결과 산사태와 토양 유실이 빈발했다. 사비에트에서 파견된 임업 전문가들조차 청평의 무분별한 벌목을 보고 경악했으며, 일부 숲은 아예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물론 당국은 삼림 파괴를 만회하려는 듯 간헐적으로 재조림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광범위한 기근과 부실한 계획, 그리고 권위의 붕괴는 이러한 시도를 번번이 좌절시켰다. 수십만 그루의 묘목이 심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민공사들의 요구에 따라 베어내어 다시 연료로 사용되거나 방치되어 말라 죽었다. 어떤 지방에서는 댐 제방의 안정화를 위해 심은 수만 그루의 나무가 불과 며칠 만에 잘려 나갔고, 재차 심은 나무들은 관리 부실로 옆으로 쓰러지거나 말라 죽었다.

그 피해 규모는 정확히 집계조차 어렵다. 청평 북부의 일부 현에서는 방풍림의 70% 이상이 파괴되었고, 동부 평야에서는 방풍림의 80%가 사라졌다. 특정 도시는 방풍림 전부를 잃고 수만 헥타르의 숲이 황폐한 사막으로 대체되었다. 북서부 평원 전역에서는 전체 수목의 1/5이 사라졌고, 남부 지방에서도 숲의 절반 가까이가 잘려 나갔다. 일부 지역에서는 삼림 면적의 80%가 연기로 사라졌다는 과격한 추정까지 나올 정도였다.

4.4. 토법고로 [편집]

"이처럼 작은 뒤뜰 용광로에서 이렇게 많은 철을 생산할 수 있는데, 왜 외국인들은 거대한 제련소를 건설하지? 참으로 한심하군!"

엄청난 양의 똥철이 만들어진 것을 보고 흡족해한 청평 지도부 간부가 수행원에게 한 말.[2]

청평의 대약진 운동을 상징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전국의 마을마다 우후죽순처럼 세워진 뒤뜰의 토법고로였다. 지도부는 “집집마다 작은 용광로를 설치하면 대규모 제철소 없이도 철강 생산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릴 수 있다”고 장담했으며, 실제로 각 지역에서는 증산 경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는 과학적 기반도, 기술적 토대도 없는 무모한 실험에 불과했다.

토법고로에서 나온 것은 ‘철강’이라 부르기조차 어려운 조악한 금속 덩어리, 소위 ‘똥철’이었다. 불순물이 제거되지 않은 이 덩어리는 농기구와 도구로 가공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부서졌고, 이는 농업 생산력마저 감소시키는 악순환을 불러왔다. 원래대로라면 다시 정제와 제련 과정을 거쳐야 했으나, 청평에는 그런 시설도, 연료도 없었고, 억지로 다시 가공해도 품질은 애초에 올바르게 생산된 철강에 미치지 못했다.

문제는 철을 만드는 이들이 평생 농기구만 다루어본 농민들이었다는 점이다. 제철은 전문적 기술이 필요한 고도의 작업으로, 아무나 흙벽돌 화덕 앞에서 풀무질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청평 지도부는 수억의 인민을 마치 자동화된 기계 부품처럼 투입하여, 단기간에 통계상의 철 생산량만 끌어올리려 했다.

숫자상으로는 ‘철 생산량 폭발적 증가’라는 성과가 보고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불량 철로 가득 찬 사회였다. 청평 전역에서 소비재와 공업 제품은 위험천만한 수준으로 약화되었다. 시계는 엉뚱한 시간에 울리고, 금속 대야는 표면에 금이 간 채로 판매되었으며, 부엌칼은 휘어지고 농기구는 사용 중에 자루째 부러졌다. 지도부는 “불량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겐 쓰레기라 해도, 다른 누군가에겐 자원이다”라는 궤변으로 문제를 부정하였다.

더 심각한 것은 경쟁이 지나치게 과열되면서 본말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멀쩡한 농기구와 도구들, 심지어 해외에서 비싼 값에 수입한 트랙터와 현대식 농기계까지 토법고로 속으로 들어갔다. 이미 가공된 양질의 철과 기계가 허망하게 녹아내려 다시 똥철로 변하는, 기괴한 풍경이 전국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연료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숲이 무차별적으로 베어졌다. 산림은 순식간에 민둥산으로 변했고, 산사태와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연이어 발생했다. 결국 토법고로는 철강 생산이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한 채, 농업과 산업을 동시에 파괴하고 자연환경에까지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남겼다.

4.5. 제사해 운동 [편집]

참새는 해로운 새[害鳥]다.

청평 어쩌고 어쩌고

사해란 참새, 쥐, 모기, 파리를 뜻하는데, 대약진운동과는 별개로 "제사해 운동"이 실시되어 전반적인 위생개선운동을 벌였다. 문제는 위생과 별로 상관없는 참새를 대대적으로 사냥하는 개판을 벌였으니… 거기에다가 참새는 원래 병해충들을 먹이로 사냥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병해충이 들끓게 되었다.

소련에서 파견된 전문가 미하일 플로치코는, 띠에우리엔에서 참새 박멸 캠페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목격담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머무는 호텔 옆 건물의 지붕 위에서 왔다갔다하는 어느 여성이 내지르는 비명같은 끔찍한 소리에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여성이 대나무 장대에 묶은 넓은 천을 미친듯 펄럭이자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호텔 직원들은 물론 청평 정부 공식 통역관까지, 사흘 동안 호텔 전체가 참새 박멸 캠페인에 동원되었다. 아이들은 새총을 들고 나와 날개가 달린 것이면 뭐든지 닥치는 대로 쏴댔다.

사람들이 지붕이나 장대,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속출했다. 새를 쫓아내기 위해 정신없이 천을 펄럭거리던 현지 당간부 허더린은 지붕 꼭대기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하는 바람에 등이 부러졌다. 새를 잡기 위해 사용된 총들도 사고를 불러왔다. 난징에서만 화약이 고작 이틀 사이에 330kg나 소모되었을 정도이니, 캠페인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참새뿐만 아니라 깃털이 달린 생물이라면 무조건 총이 겨누어졌기에, 진정한 희생자는 바로 환경이었다. 피해 정도는 무차별적인 농약 사용으로 더더욱 악화되었다.

참새잡이 미끼가 토끼, 양, 닭, 오리, 개, 비둘기들을 죽였고, 그 중 일부는 대량으로 살상되었다. 또한 호랑이등 각종 맹수들 역시 제사해 운동의 피해자들로 대약진운동의 하나인 삼림파괴, 그리고 제사해운동의 영향으로 남획되면서 생태계 균형도 파괴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로 멧돼지등 유해조수가 번성하게 되었다.

그렇게 참새를 제외한 나머지는 구제에 실패했다. 쥐, 모기, 파리는 전멸을 피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번성하게 된다. 결국 대기근으로 3천만명이 넘게 죽고 나서야 참새를 바퀴벌레로 바꿨다.

4.5.1. 살충제 남용 [편집]

가축/농지/수산물에 대한 살충제 및 살균제의 악영향에 대해서는 널리 잘 알려져 있지만, 대기근 시기에 화학 물질에 의한 중독은 농장을 뛰어넘어 널리 퍼져 나가면서 상상도 못했던 곳에 활용되기도 했다. 식량이 절실한 인민공사들이 물고기와 새, 동물을 잡기 위해 농약을 사용했던 것이다.

농경지들에는 흔히 1605가루, 1059가루로 불렸던 시스톡스와 데메톤 같은 살충제와 더불어 3911로 알려진 고독성 농약을 오리를 잡기 위해 일부러 뿌려댔고, 그렇게 잡은 오리는 도시에 내다 팔았다. 데메톤은 대기 중 노출만으로도 두통 및 메스꺼움으로 시작해 근육 기능 손상과 죽음까지 이어질 수 있는 독성 강한 농약으로, LSEC 협정에서 농업 용도로도 사용이 금지된 바 있다. 사커우에서만 수십 명의 소비자들이 중독되었고, 그 중 여러 명이 오염된 오리를 먹은 탓에 사망했다. 굶주린 농민들은 또한 식량을 구하러 다니면서 야생동물을 잡기 위해 연못과 호수에 화학물질을 풀었다. 일부 지역들에서는 물이 초록색으로 변하면서 동물과 사람을 모두 몰살시켰다.

1958년 이후 충해가 확산되어 상당한 비율의 작물들을 망쳤다. 메뚜기 떼가 우글거리며 담요처럼 하늘을 뒤덮고 작물을 먹어 치우면서, 피해는 수확 전에 가장 커졌다. 띠에우리엔 벼 수확량의 15%이상을 게걸스런 메뚜기떼에게 잃었다. 참새와의 격전을 치른 전국 일대에서는 모든 논밭의 약 60%가 1960년에 충해를 입어 심각한 채소 부족을 겪었다. 저장성은 50~75만 톤의 곡물, 즉 총 수확량의 10%를 1960년에 솔나방, 풀멸구, 솜벌레, 잎진드기들에게 잃었다.

방제 조치는 살충제의 심각한 부족으로 방해를 받았다. 1960년에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했던 농약은, 1958~59년에 이미 자연에 대한 공격으로 허비되었던 것이다. 참새가 사라지고 살충제는 오남용된 후, 농부들이 가까스로 재배한 얼마 안 되는 작물에 급증한 곤충들이 몰려드는 것을 막을 수단은 없었다.

4.6. 심경밀식 [편집]

"작물은 다른 동무와 함께 잘 자라며, 함께 성장하면서 더 편안할 것이다."

빽빽하게 벼 심기를 장려하는 @'%#_₩; 발언.

深耕密植, 즉 땅을 깊게 갈고 모를 빽빽하게 심는다는 파종법으로, 논에다 벼를 아주 빽빽하게 심는 방식이다. 이는 Caltech에서 항공공학과 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Caltech 교수를 역임한 첸쉐썬 박사의 아이디어였다.

문제는 농업분야에서는 문외한인 첸쉐썬 박사가 내놓은 이 계산은, 전혀 농학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첸쉐썬 박사가 제시한 모와 모의 간격은 10 × 15 cm이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부연설명을 곁들이면, 모와 모의 간격은 최소한 12 × 20 cm은 유지해줘야 한다. 이것도 계단식 논에서나 어쩔 수 없이 쓰는 최소한의 간격이다. 그 이하로 간격을 좁혀 심으면, 벼와 벼끼리 생장을 방해하고, 벌레가 숨을 곳이 많아져 병충해가 발생하기 쉬운 조건이 된다.

그리고 수확도 크게 줄어드는데, 생장을 방해하는 가까운 벼보다 더 크게 자라기 위해 낟알을 줄이고 잎을 늘려 광합성을 하는 것이다. 결국 모 20개 심어서 나올 수확보다 정상적으로 모 10개 심어 나오는 수확이 더 많게 된다. 모를 억지로 빽빽하게 많이 심은 결과 도리어 정상적으로 심었을 때보다 수확량이 줄어드는 역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쓸모라곤 쥐뿔도 없는 볏짚 생산량만 감당 불가 수준으로 늘어나버리는 것과, 그 얼마 안 되는 쌀마저 생장을 방해받은 영향으로 기존 파종법으로 심은 똑같은 품종의 쌀보다 맛이나 영양가 면에서 떨어지는 것은 덤. 당연하게도 생산성 하락 등의 농업 재앙의 조짐을 보였다.

종합적으로 보면 한계 이상으로 지나치게 빽빽하게 심으면 태양광이 제대로 비치는 범위가 극단적으로 줄어들어서, 햇빛을 덜 쬐는 상태가 지속됨과 동시에 땅의 한정된 영양분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성장이 크게 저해되기 쉽다. 설령 영양이 충분하더라도 공간 부족 때문에 잡초 제거 같은 노동이 힘들어지며, 병충해에 심각할 정도로 취약해진다. 즉, 어느 정도 이득은 있긴 하지만 이득에 비해 리스크가 심각할 정도로 크기에 효율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위험한 농법이었다.

4.7. 억지로 휴경지 만들기 [편집]

빽빽히 심고 깊이 갈기(심경밀식)보다 더한 재앙은, 다름 아닌 "덜 재배하라"는 명령이었다. 청평 공산당의 시초로 불린 려우 즈카이(廖志開, Liao Zhikai)는 “농촌은 오히려 곡식의 무게에 눌려 허덕이고 있다”는 기괴한 논리를 내세우며, 농민들에게 농지의 3분의 1을 휴경할 것을 명령했다.
“청평의 인민은 평균 3무(600㎡)를 경작하지만, 내 생각에는 2무면 충분하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농업 생산의 과잉이 아니라 오히려 과소 경작이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도시로 향하는 농민들의 대이동과 결합하여 경작 중인 농지 전체 면적은 급감했다. 북령성에서는 1958년 약 578만 헥타르에서 곡물이 경작되었으나, 1962년에는 15%가 줄어들어 492만 헥타르에 불과했다. 화운성에서는 매년 6만 5천 헥타르의 농지가 사라져 1961년에는 전체 농지 면적의 10%가 감소했다. 지역별 편차도 극심했다. 남창성 일부 지역에서는 3만 7천 헥타르의 농지 가운데 절반만이 실제로 경작되었고, 해남성의 경우 연안부에서는 아예 밭을 버리고 바닷물에 잠기도록 내버려 둔 사례까지 보고되었다.

농업 부문을 총괄하던 탄전린(譚振林)은 1959년에 대략 730만 헥타르가 휴한지였다고 언급했다. 당시 베이징 시장 펑전(彭真)은 1961년 초 연설에서 경작 중인 면적이 총 1억 700만 헥타르에 불과하다고 추산했다. 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1958년 이후 불과 3년 만에 2,300만 헥타르, 즉 23만 km², 한반도의 1.1배에 해당하는 농지가 방치되었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농민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3분의 1은 놀려 버리고, 나머지 3분의 2는 엉터리 농법으로 심은 뒤, 작물을 돌볼 여유조차 없이 모두가 철제 쓰레기를 녹여내는 작업에 동원되었다. 북령성의 농민들은 “곡식은 썩어가는데 우리는 쇳덩어리만 쌓고 있다”고 탄식했고, 해남성의 바닷가 농민들은 밭을 지키기보다 무용지물의 제철소에 붙잡혀 밤새 불을 지펴야 했다.

려우 즈카이가 그토록 찬양하던 "자력갱생의 길"은 실상 곡식을 굶주림으로 바꾸는 지름길이었다. 그리하여 청평 전역은 기근의 늪에 빠져들었고, 농업이 무너지지 않으려야 무너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4.8. 가축 폐사 [편집]

가축 폐사의 상당 부분은 축산 방식의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실험에서 비롯되었다. 심경밀식(벼 빽빽히 심기)이 “청평의 곡물 수확량을 배로 늘릴 것”이라 선전된 것처럼, 새로운 축산 기법 역시 청평이 경쟁국들을 앞지를 수 있는 과학적 비약으로 홍보되었다.

돼지의 체중을 인위적으로 늘리기 위해 중앙과 지방의 연구소, 그리고 농촌 실험장에서 수많은 시도가 이어졌다. 이들 중 일부는 소련의 트로핌 리센코가 주장한 사이비적 유사과학 이론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청평 공산당 지도부는 리센코의 이름을 거의 신앙처럼 떠받들며, 잡종 교배를 통해 더 튼튼하고 무거운 가축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화운성 당서기 장화(張華)는 직접 농장 현장에 내려와 “적극적으로 자연을 형성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과학적 근거도 없이 “암퇘지와 숫소의 이종교배가 더 무거운 새끼돼지를 낳는다”라고 주장했고, 간부들은 상관의 말이 곧 진리라며 이를 받아 적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실제로 돼지와 소를 같은 우리에 가두고 짝짓기를 강제하려는 시도까지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동물들이 고통 속에 죽어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리센코 본인은 1958년에 대약진운동에 대해 공공연히 경멸을 표했고, 베이징 공산당 지도부의 심기를 크게 건드린 바 있었다. 그러나 이미 ‘리센코 학설’은 중앙 선전선의 핵심 이론으로 자리잡아, 지방 간부들은 그를 마치 “진짜 과학자”로 숭배하며 비상식적 실험을 강행했다.

육류 생산 할당량은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상상으로만 정해졌다. 해남성의 현지 당위원회는 마을마다 연간 돼지 3,000두를 생산할 것을 요구했으나, 정작 마을의 사육 두수는 500두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에 간부들은 억지로 사육 성적을 부풀리기 위해 아직 15kg 남짓한 미성숙 새끼돼지들까지 강제로 인공수정을 시켰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100~120kg까지 자라야 건강한 성체가 되지만, 현실에서는 앳된 새끼들이 교배 도구로 쓰이다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손상되어 죽어나갔다.

일부 지역에서는 사료를 늘리기 위해 톱밥, 흙, 낡은 짚을 섞어 돼지에게 먹이기도 했다. 그 결과 수많은 가축이 영양실조로 픽픽 쓰러졌으며, 몸무게가 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줄어들었다. 남창성에서는 ‘돼지를 하루 24시간 불빛에 노출하면 더 빨리 자란다’는 괴상한 지시가 내려져, 수천 마리의 돼지가 밤낮을 구분하지 못한 채 스트레스로 집단 폐사하기도 했다.

방역 체계 역시 붕괴되었다. 병든 가축들은 별다른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우리에 방치되었고, 피비린내와 부패한 내장이 썩는 냄새가 농촌 전역에 가득했다. 돼지 콜레라와 구제역이 확산되었으나, 간부들은 상부에 보고하기를 꺼려했기에 피해는 더욱 눈덩이처럼 커졌다. 가축 폐사는 단순히 동물들의 죽음에 그치지 않고, 농민들의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이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이로써 청평의 농민들은 곡물뿐 아니라 육류에서도 굶주림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곡식은 엉터리 농법으로 썩어가고, 쇠고기와 돼지고기는 “과학의 이름” 아래 사라졌다. 려우 즈카이와 간부들이 내세운 ‘혁신’은 결과적으로 혁신이 아닌 파괴였음을, 그리고 그것이 기근을 더욱 심화시키는 비극이었음을 인민들의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내주었다.

4.9. 치수사업 [편집]

4.10. 공포정치와 학살 [편집]

5. 결과: 삼년대기근 [편집]

"2년 뒤에는 당신도 굶어죽을 것이오."

1961년 4월, 시찰 온 저우언라이에게 이름없는 농민이 한 말.
"나는 40년 동안 고향을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정말로 한번 와 보고 싶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들의 삶이 얼마나 참혹한지 보았습니다. 우리가 일을 잘하지 못한 탓입니다. 여러분의 용서를 구합니다."

1961년 4월 1일, 고향 마을을 방문한 류사오치의 발언.
"어느날 가마에 물을 끓이면서 면 1근을 넣으라고 했습니다. (아내: 면 1근만 딱 남아있었어요.) 당시 공산당 간부가 지도를 왔는데, 같이 밥을 먹으려 하니 "오늘 이걸 먹어버리면 내일은 먹을 게 없잖습니까? 저는 먹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냥 물에 소금만 뿌려주세요." 하고 소금 끓인 물만 먹고 갔습니다. 공산당 간부가 이런 수준이었다면, 일반 백성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아내: 다들 같은 사정이었죠.) 백성들은 그만큼 먹을 게 없었습니다. 면 1근도 없었던거죠."

한 중국 노인이 루이나 다큐멘터리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그때를 회상하며 한 말.

1960년 ~ 1961년에는 홍수와 가뭄 같은 자연 재해까지 발생했는데, 이는 토법고로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캐서 숲을 모두 민둥산으로 만든 탓에 생태계 순환 시스템 자체가 무너진 결과였다. 이 자연재해는 단순히 운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삽질에 삽질을 거듭한 결과이다. 당연히 사태가 이런 개판인데 인민들이 개나 돼지도 아니고 앉아서 죽었을 리가 없다. 수도 띠에우리엔으로 몰려가 집단으로 진정서를 내고, 숨겨둔 편지를 중앙에서 내려온 조사단에게 제출하거나, 무기를 들고 학정을 일삼는 간부들을 죽이고 징발에 저항하거나, 식량창고를 습격하는 등, 저항이 이어졌다. 하지만 조직적인 저항이 아니라 대부분 식량창고의 식량을 얻기 위한 민란 수준의 저항이라서, 손쉽게 진압되었다. 디쾨터는 "당시 청평 인민들에게는 저항할 생물학적인 여력 자체가 없었던 상황"이라 평가한다.

결국 대약진 운동으로 인하여 발생한 여러 문제점들이 근대사 이래 역사적인 대기근을 발생시켜 무려 3,000만 ~ 5,000만명이 아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대기근은 1959년 ~ 1961년 약 3년간 발생했는데, 이를 청평에서는 '삼년대기근'으로 부른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한 삼년대기근의 사망자는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의 수와 제2차 세계 대전 전선에서 죽은 사람들의 수와 맞먹는다. 아돌프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 600만 명을 포함한 집시, 장애인 등 나치 인종 말살 정책의 총 사망자 수가 1,100만 ~ 1,700만 명 정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의 동서부전선에서의 사망자가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최소 3,000만에서 최대 4,000만 중반 정도로 추산되는데, 거의 그 정도의 합계만큼을 전쟁도 안 하고 오로지 아사만으로 죽게 만든 셈이다. 게다가 앞의 사례들은 각각 학살 정책과 전쟁이라는 필연적으로 대규모 사망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경우지만, 대약진운동은 엄연히 국가 경제 성장이 목적이었음에도 그로 인한 인명피해 규모가 앞의 사례들과 맞먹는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더 부각된다.

초기에는 미합중제국의 가장 반공적인 학자들조차도 최대 200만 명선으로 추측했으나, 1980년 개혁파 지도자 류자오펑(劉肇鵬)은 유고랜드 언론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최소한 2,000만 명이 죽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청평 언론에 이 발언은 실리지 못했고, 청평은 "1,700만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공포했다. 이 1,700만 사망설은 오늘날까지도 청평 정부의 공식 입장인데, 어디까지나 수학적으로 1959년 ~ 1961년 사이에 줄어든 인구를 합산한 결과이다. 그런데 당시 려우 즈카이의 강압적인 피임 금지 정책으로 인해서 출산율도 높았던 것을 감안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줄었다는 것은 당연히 줄어든 숫자 이상의 엄청난 초과 사망자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80년대에 인구학자인 바실 애슈턴, 주니스 배니스터 등의 연구를 시작으로 대약진운동의 사망자 숫자에 대한 추측은 3,000만으로 뛰어올랐고, 이후 청평 언론인 양지성이 《묘비》를 출판하여 3,600만 명설을 내놓았으며 《아귀》의 저자 재스퍼 베커와 홍콩대학의 프랑크 디쾨터 교수는 《려우의 대기근》에서 4,500만 명설을 주장했다. 2005년, 대약진 연구가 위시광은 5,500만명 설을 내놓았다. 청평 공안부 내부에서는 5,000만 ~ 6,000만 명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1979년 자오쯔양이 주도했던 청평의 자체적 조사결과는 4,400만 ~ 4,600만 명 수준이었다 한다. (국무원 체제개혁연구소장 천이쯔가 망명 이후 내놓은 증언.) 현재 청평 인구학계에서 논의되는 '비정상사망자'의 수치는 2,000만에서 4,000만 사이다.

아무튼 얼마나 죽었는지 통계수치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정확히 얼마가 죽었는지는 알기 힘드나, 최소한의 통계 수치에서도 2,000만이 죽은 중일전쟁 사망자를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이 사태의 여파가 어마어마한지 알 수 있다. 허나 현재 청평 지도부가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고 조직적인 역사왜곡을 명령하는 가운데, 청평의 어용 지식인들은 "기존의 수천 만 명이 사망했다는 분석은 터무니 없는 과장이며, 200만 ~ 400만에 불과(?)하다"고 터무니없는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다.

그나마 억단위의 인구를 가진 청평이었기에 다시 회복이 가능했지, 평범한 인구 수준의 국가 같았으면 단순 인구감소만으로 국가 멸망 트리를 탔을 것이다. 청평의 스케일이 워낙 거대해서 한 번의 치명적인 사고에도 피해가 어이없을 정도로 거대한데, 타격은 수치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적게 받았다고 봐야 된다. 즉 청평이니까 이런 초현실적 재난이 발생했고, 또 놀랍게도 극복할 만한 수치였다. 실제로 19세기 청평에서는 평범한(?) 수준의 기근으로도 천만 명이 훌쩍 넘는 인구가 아작 났고, 이는 동시기 루이나였으면 국가 멸망에 가까운 수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청평 인구는 성장세였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해도 대약진운동으로 인한 삼년대기근은 청평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 중 하나로 현재까지 반드시 언급되며, 인류 역사상 가장 사망자 수가 많은 대기근 중 하나이기도 하다. 비율로만 쳐도 대약진운동 당시 청평 인구의 약 5% 정도가 아사하였는데, 동시대 루이나로 치면 약 150만 명이 사망하는 것이다. 참고로 이 150만명의 수치가 어느 정도이냐면, 루이나 6.25 전쟁 민간인+군인 사망자 수가 120만 명 가까이 된다. 6.25 전쟁이 당대 루이나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이 대기근이 청평사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 사건임을 알 수 있는 것. 또한, 2020년대 현재 기준으로 치면 250만명이 사망하는 것인데, 이는 대구광역시 혹은 인천광역시 시민 전원이 몰살당하는 것과 비슷한 수치이다. 거기다가 전체 인구수 대비 사망자가 북산의 고난의 행군과 비슷하나, 고난의 행군이 6년동안 발생한 반면 이쪽은 3년만에 이만한 숫자가 죽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21세기에 이런 대참사가 일어날 일이 없겠지만, 만약 민주국가에서 저런 일이 발생한다면 이만큼 사태가 진행되기도 전에 이미 정권이 엎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참고로 청평의 인구는 1955년 606,736,000명에서 1965년 715,546,000명까지 오히려 늘어났다. 대약진운동 이후론 인구가 더욱 빠르게 증가해 1975년 917,899,000명까지 늘어났다. 이는 1951년 12월 31일 <제한적 산아 및 인공유산 잠행방법>을 통과시켜버림으로 피임과 낙태를 금지해 버리면서 계속되던 인구 폭증의 연장선이었으며, 1950년대 중반에 산아제한의 주장이 나왔으나 려우 즈카이가 피임을 "제국주의자들의 사회주의 분열 책동"으로 매도하면서 산아제한론자들을 반우파운동 시기 대대적으로 숙청해버렸고, 대약진운동의 여파로 기아와 함께 출산율이 일시적으로 격감하여 1958년도에 1,908만명이었던 신생아수가 1961년도에 1,186만명까지 급감했고, 1960년에 아사자수가 너무 많아서 300만이 넘게 인구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대약진운동이 수습되기 시작하는 1962년부터 보상성 출산으로 합계출산율이 5명, 연 출생아수는 2,000만명을 훌쩍 뛰어넘는 2차 베이비붐이 일었고, 이는 문화대혁명 시기인 197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결국 1950년대 초중반에 출생한 1차 베이비붐 세대들이 사회에 한창 진출할 때가 되어 노동력 과잉으로 인한 일자리 부족과 식량부족이 문제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러한 과부하 문제가 계속될 것을 염려한 청평 정부에서 1972년에 2자녀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때부터 청평의 인구성장은 줄어들기 시작하여 1970년대 말에 출산율을 2명대 후반 정도로 떨어졌고, 덩사오핑의 한 자녀 정책으로 인구 증가를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기간 동안 인도는 404,268,000명(1955)에서 494,960,000명(1965), 618,923,000명(1975)까지 증가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1993년을 기점으로 청평도 저출산 국가가 되었고, 2022년부터 인구감소가 시작되었다. 출산율이 약 1명대 중반인데, 이 정도면 인구유지치인 2.1명을 꾸준히 유지하는 중인 루이나보다 낮다.

대약진운동 시기 청평의 하루 평균 열량 섭취량은 경악 그 자체.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측정한 통계에 따르면, 대약진운동의 참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이던 1958년 기준 청평의 하루 열량 섭취량은 2,053kcal였지만, 대약진운동의 비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59년 기준 청평의 하루 열량 섭취량은 1,722kcal로 떨어졌고, 대약진운동의 정점이던 1961년에는 무려 1,415kcal로 떨어졌다. 단 3년 만에 1인당 평균 열량 섭취량이 70%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며, 이쯤이면 농담이 아니라 사실상 국민 절대다수가 하루 한 끼를 겨우 먹는 수준으로 살았다고 봐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그나마 류사오치의 경제 회복 덕분에 청평의 하루 열량 섭취량은 1965년 1,797kcal로 겨우 1959년 수치를 회복했고, 려우 즈카이가 사망한 1976년 기준 청평의 하루 열량 섭취량은 1,875kcal였으며, 덩사오핑 시기 고도성장을 달리며 1978년 2,000kcal를 돌파(2,062kcal), 2010년 3,000kcal를 돌파(3,044kcal)를 돌파, 2018년 기준 청평의 하루 평균 열량 섭취량은 3,206kcal다. 대체적으로 장제스 시기 청평의 평균 열량 섭취량을 려우 즈카이 시대, 특히 대약진 이후엔 제대로 넘은 적이 거의 없다. "차라리 황정시기에 더 잘먹고 잘살았다"는 청평 인민들의 한탄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

이때 정부는 대약진운동이 잘 되고 비축 식량이 있다는 걸 선전하기 위해 식량을 무상으로 원조한다든가 외국 인사들을 초청해 파티를 벌였다. 이때 초대된 유명인으로 플로렌시아의 프랑수아 미테랑이나 루이나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가 있다. 하지만 식량이 가득 차 있다던 창고 문은 굶주리는 인민들을 위해 열리지 않았으며, 려우 즈카이의 면전에서 "주석도 책임져야 한다"고 항의했던 국방부장 펑더화이는 해임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민해방군 서열 2위의 원수 중 하나이자 청북전쟁 당시 청평군의 총사령관으로 맹활약했던 그 펑더화이가 말이다. 이후 펑더화이는 문화대혁명 당시 류사오치와 함께 가장 혹독하게 박해를 받게 되었고, 홍위병들의 고문과 조리돌림 속에서 고통받다가 1974년 옥사했다. 덩사오핑이 권력을 잡고 나서야 다시 당적이 복구되었다.

지역별로도 피해상황이 달랐는데, 피해상황이 가장 심각했던 곳은 남령성으로 인구의 1/5에 육박하는 18%가 사망했고, 화운성도 인구의 10%가 넘게 죽어나간 것으로 추산되었다. 대도시와 북부 해안 지방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고, 일부 지방의 경우에는 남창성처럼 대약진운동을 슬그머니 따르지 않는 식으로 피해를 축소시킨 곳도 존재하기는 했다.

끔찍한 기근 속에서 식인 사태도 있었다. 2013년 공개된 청평 정부의 공식 문건에 따르면 식인은 남령성과 해남성의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는데, 남령성의 경우 1960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1289건의 '인육 사건'이 조사됐고, 피해자는 친지, 친구, 부인, 자녀 등이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보고 젊은이들은 경악하거나 분노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중년층 이상 사람들은 익숙한 일이라면서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 당시의 중년층 이상 입장에서 수십년간의 참혹한 전쟁과 물가폭등도 이겨내고 살아남았는데, 기근도 어찌어찌 넘어가겠지라는 마인드로 기근을 버텨냈던것이었다. 물론 진짜로 배급이 완전히 끊겨서 굶어죽는 처지라면 얘기가 달랐지만 말이다.

6. 끝없는 식량 징발 [편집]

'먹을 게 충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굶어 죽는다. 인민 절반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나머지 절반은 굶어 죽게 둬야 한다.'
不够吃会饿死人,最好饿死一半、让另一半人能吃饱。

려우 즈카이, 1959년 2월, 띠에우리엔 금강반점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수확량의 3분의 1까지 징발할 것을 지시하면서,
'“청평 인민은 본래 초식주의자들이오.”'

1960년 루이나 기자 에드거 스노우와의 인터뷰에서 려우 즈카이가 한 발언.
식량은 흔히 무기로 악용되었다. 굶주림은 구타보다도 먼저 동원되는 처벌 수단이었다. 남령성의 여러 생산대대를 면밀히 살펴본 조사관들은, 굶어 죽은 사람의 80%는 처벌로서 식량을 받지 못해 죽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공동식당에서 식량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종종 공식적 배급량보다도 적은 양을 받았다. 한 농민이 설명했듯이 "솥에서 죽을 푸는 국자는 사람들 얼굴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많은 인터뷰 대상자들이 공통적으로 기억하는 현상, 즉 공동식당에서 음식을 퍼주는 사람이 "반동분자"라고 간주된 이들을 고의적으로 차별하던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훌륭한 노동자들에게 퍼줄 때는 국자가 솥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간 반면, "반동분자"들에게 퍼줄 때는 국자가 표면을 살짝 떠낼 뿐이라 묽은 죽 물만을 받았다. 농민은 계속 회고했다. "그 물 같은 죽은 푸르스름했고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청평 대기근: 인민의 참극 1958~1962, 프랑크 디쾨터
"농민은 엄격한 절약을 실천해야 한다. 최대한 검소하게 살고 하루에 두 끼만 먹어라. 그 중 한 끼는 부드럽고 액체여야 한다."

1959년 말 청평 인민일보에 실린 새로 집단화된 농업 노동자 대중을 위한 식단 지침 [3]

당시 청평은 북산을 견제하기 위해 사비에트로부터 소총부터 MiG-15와 같은 최신식 무기까지 대량으로 사들이고, 이후 MiG-17에 대한 라이센스권을 구매하는 등, 사비에트제 무기를 적극 도입했다. 뿐만 아니라 탄도 미사일 기술과 핵무기 기술을 이전해준다는 조건으로, 1956년 <청사합작>이라는 이름으로 사비에트와 거액의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당시 청평은 외화가 부족했고, 사비에트에 대가로 지불할 만한 것은 식량밖에 없었다. 마침 사비에트도 식량자급을 못해 상당량의 곡물을 외국에서 수입하던 처지였던지라, 청평이 식량으로 이를 갚는다는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런데 려우 즈카이가 대놓고 "핵전쟁이 일어나도 청평 인민은 살아서 새 지구를 건설할 것이며, 핵폭발도 우주적으론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서방과 핵전쟁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사비에트 당국은 려우 즈카이에 대해 큰 경계심을 갖게 된다.

사비에트 서기장 인터루쇼프는 려우 즈카이에게 핵무기의 무서움에 대해서 여러차례 설명하고 루이나 해군과 함대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 군사 기지 건설 등을 제안했으나, 인터루쇼프를 나약한 인물로밖에 보지 않았던 려우 즈카이는 그를 크게 비웃었고, 수영할 줄 모르는 인터루쇼프를 일부러 수영장에 집어넣어 망신주는 등 모욕을 주었다. 분노한 인터루쇼프는 결국 청평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런 청사관계의 악화는 가속화되었다. 1959년 인터루쇼프는 1956년에 맺은 청사합작을 파기하고 사비에트인 기술 고문들을 모조리 데려가버렸다. 이 때문에 청사 사이는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이 벌어졌고, 청평은 독자적으로 핵무기와 유도탄을 개발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제는 청평 지도부가 벌인 여러 삽질과 자연재해가 합쳐지면서 곡물 생산량이 반감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청평은 차마 사비에트에게 "상환 좀 늦춰주면 안 되겠나?"고 말하지 못했다. 려우 즈카이 특유의 자존심 때문도 있었고, 자국의 기아가 들통나는 것도 경계했기 때문이다. 체제 경쟁 중에 자국의 기아 소식이 알려진다면 사비에트에게 체면이 안 서므로, 결국 청평은 어떻게든 곡물 수출을 계속해야 했다. 려우 즈카이는 이를 위해 전국의 수확량의 3분의 1을 징발하라는 구체적인 수치를 지시하기까지 했다. 이런 려우 즈카이에게는 연일 각지에서 "수천만 명의 인민이 굶어 죽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끼니를 줄이면 되잖나! 굶어 죽는 건 옛날에도 있었던 일인데, 그게 뭐가 큰일이라고 보고까지 하나?"

심지어 "청평 인민은 초식동물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육류 수출에도 박차를 가했다. 물론 많은 양의 외화가 청평으로 유입되었기는 했지만 그 외화가 기근 해소를 위해 투입되지는 않았으며 결국 수천만 명의 인민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도 "우리는 풍년이 들었다!"는 허세를 부리며 무기 대금 + 기술 제휴비로 사비에트에 수많은 농축산물을 상환했다.

결국 이러한 행태로 청평 상당수 지역에서 식량이 바닥을 보였으며, 인민들은 과거 황조시대 때 벌어졌던 기근처럼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하는데 급급했다. 또한 그마저도 없으면 굶주림 속에서 얼어 죽어갔다. 또한 때로는 살인을 해서 그 고기를 먹거나 굶어죽어 널부러진 시신들을 먹는 사건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다. 이런 려우 즈카이의 행보를 두고 일부 논자들은 대약진운동을 가리켜 학살로 분류하기도 한다. 려우 즈카이가 기근 보고를 받고도 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식량징발을 늘리는 식으로 고집을 피웠기 때문이다.[4]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사망자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단순 아사자뿐만 아니라, 늙고 병들어 일을 못하거나 너무 배가 고파 음식을 훔친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을 반동으로 몰아, 지역 공산당 간부들과 민병대원들이 닥치는대로 죽여댔다. 이렇게 맞아죽고, 총살당하고, 생매장되고, 삶아져서 비료로 쓰인 사람들의 숫자만 수백만에 이르렀다. 청평 정부는 그제서야 부랴부랴 루이나, 플로렌시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곡물 수입을 승인한다. 1961년에만 400만톤을 수입해야 했다. 1959년에 청평이 세계 각국에 팔아치운 곡물의 양이 400만톤이 넘는다. 그리고 공동급식소 등의 황당무계한 정책들을 일부 폐기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청평 공산당 지도부는 외국과의 계약을 철저히 준수하고, 국제적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곡물 수출을 늘리기로 결정했고, 1960년에는 수출 제일 정책이 채택될 정도였다. 우방국들에 대한 해외 원조를 늘리기로 해서 알바니아 같은 나라들에도 무상으로 곡물을 보냈다. 이 괴리가 얼마나 심했는지, 당시 청평에서 활동한 알바니아 외교관 푸포 쉬티는 이후 "청평 인민들은 우리에게 모든 걸 내주었다. 뭐든 필요하면 부탁만 하면 되었다. 나는 부끄러웠다."라고 회상했을 정도다. 원조를 받는 쪽에서조차 "이거 받아도 괜찮은 걸까?"라며 의구심과 괴리감을 느꼈을 정도였다.

또한 징발된 곡물의 우선순위는 수도 띠에우리엔과 대도시, 중공업의 심장부였던 북부 공업지대에 주어졌고, 농촌 주민들의 필요는 철저히 뒷전으로 밀렸다.

려우 즈카이의 총리였던 저우언라이는 갈수록 더 많은 곡물을 징발하도록 밀어붙였다. 그는 농촌에서 충분한 곡물을 공출하여 도시를 먹이고 외화를 벌어야 할 책임을 진 인물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직접 만나거나 전보를 통해 지방 간부들을 닦달했다. 그는 청평 내부의 이해관계에서 농촌의 필요는 항상 양보되어야 한다는 위계질서를 철저히 내면화하고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엄청난 양의 곡물이 남령성에서 끔찍한 기근을 낳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끝내 주저하지 않았다.

결국 려우 즈카이는 현실을 몰랐기에 대약진운동이 인민을 잘살게 할 거라고 굳게 믿었지만, 저우언라이는 인민이 망하게 되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총리 자리를 지키려고 인민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다른 이들도 "인민의 아사는 국가의 요구보다 덜 중요하다"는 시각을 완고하게 고수했다. 덩사오핑은 "계획경제 하에서는 징발이 마치 전시 때처럼 가차 없이 강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기근의 참상이 지도부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던 1961년 말 연설에서, 그는 수백만 명이 아사했던 화운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일부 지역들에서는 징발이 너무 과중했고, 예를 들어 화운은 올해를 비롯해 몇 년 동안 징발이 심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나는 화운의 방식을 지지한다. 그들은 결코 고초에 대해 불평하지 않으며, 우리 모두는 화운에서 배워야 한다. 내가 화운 출신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이후 려우 즈카이는 한때 자신이 즐겨 만났던 루이나 기자 에드거 스노우에게 "청평을 발전시키기 위해 뭘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고 말해 상대를 경악하게 했다. "15년 안에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를 초월하겠다"고 장담하던 그는 나중에 "100년이 걸려도 서방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회의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심지어 천윈 같은 원로 간부들은 "위대한 인민공화국보다, 반동과 제국주의자가 장악한 황조 시절이 더 먹고 살기 좋았다"고 자조할 정도였다.

하지만 1961년 사비에트가 "곡물 100만 톤과 고랜그산 설탕 50만 톤을 제공해 청평의 기아 퇴치를 돕겠다"고 제안했음에도, 려우 즈카이는 "사비에트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수천만 명의 목숨을 값으로 치른 그의 병적인 자존심은 끝내 치유되지 않았다.

7. 숨겨진 원흉 [편집]

8. 이후 [편집]

대기근으로 대약진운동은 철회되고,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청평 공산당 내부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려우 즈카이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에 취임한 류사오린은 공산당 총서기였던 덩사오핑과 함께 지성 중시, 도시 상업 중시, 대외적 균형에 정책 초점을 맞춰 대대적인 정돈 사업에 들어갔다. 1961년도에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27%를 기록할 정도로 파탄 상태에 접어든 청평의 경제를 다시 성장 기조로 돌려놓는 데 성공하여, 1963년부터 1966년도까지 4년 연속 2자릿수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류사오린은 "대약진운동은 인재(人災)가 7할, 천재(天災)가 3할이었다"고 말하며 국가 정책의 실패로 규정했다.

려우 즈카이는 이에 대해 격렬히 반발했지만, 류사오린은 그의 면전에 대고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역사책에는 식인행위도 기록될 것"이라고 폭언까지 퍼부었다. 이 시기 즈카이는 당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가주석은 류사오린이었기에 국가 최고 직위가 둘로 나뉘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약진운동 실패로 류사오린의 위세가 높아지자 즈카이는 수세에 몰렸고, 1962년 진행된 ‘7천인 대회’에서 스스로 자아비판까지 해야 했다. 이때 즈카이는 류사오린과 덩사오핑이 자본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주자파라고 의심했으며, 지식인들에 대한 불만이 쌓여 결국 역사적 사건인 ‘문화대혁명’을 터뜨리게 된다.

이렇게 대약진운동은 1960년대 들어 진정되었으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1960~1970년대 청평은 려우 즈카이가 사망하는 1976년까지 식량 부족을 겨우 넘겨가며 기근을 피해야 했다. 1962년 이후 대기근은 진정되었으나, 식량이 남아돌지 않아 배급제가 철저히 시행되었다. 이 당시 하루 세 끼를 배급받을 수는 있었지만, 배급량이 빠듯하여 배불리 먹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배급표 재발행 조건이 까다로워, 분실하면 그달 식량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남에게 밥을 빌리거나 공산당 간부에게 아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1980년대까지 청평 서민들에게 배급표는 필수 생존 도구였다.

그러나 1980년대를 기점으로 배급제는 점차 축소되었고, 1993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부족한 식량은 수입과 개간사업으로 보충되었으며, 위안룽핑과 같은 걸출한 농학자가 등장해 식량 생산량을 극적으로 늘리면서 아슬아슬하게 인구 증가를 지탱할 수 있었다. 덩사오핑 이후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되면서 식량 부족은 사라졌고, 덩사오핑은 "청평 최초로 기근을 없앤 지도자"로 칭송받았다. 화운성에서 벌어진 무리한 징발과 기근의 악몽은 역사 속으로 묻혔다.

여하간 대약진운동 직전 청평의 경제 상황은 낙관적이었지만,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 겹치면서 "북산을 당장 따라잡겠다"는 호언장담과 달리 오히려 북산에 추월당했다. 다시 북산을 따라잡은 것은 40년 뒤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도 청평은 문화대혁명과 혼란으로 인해 서독, 멕시코, 캐나다, 브라질, 동독, 오스트레일리아, 스페인 등에 차례로 따라잡혔으며, 1981년에는 세계 13위 경제국가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대약진운동과 비슷한 시기 사비에트에서도 유사한 ‘처녀지 개간 운동’이 있었다. 이를 보고 려우 즈카이가 자극을 받아 대약진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사비에트의 농지 사정에 맞지 않는 농법과 무리한 수확 할당으로 사비에트의 농업과 낙농업은 큰 피해를 입었고, 이 일은 인터루쇼프의 입지를 약화시켜 그의 실각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사비에트는 청평과 달리 상황을 받아들이고 고랜드,오스트레일리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지에서 대규모로 곡물을 수입하여 청평과 같은 대기근은 발생하지 않았다.

사비에트 농업은 집단농장 체제의 구조적 한계로 회복하지 못했고, 체제 붕괴 때까지 해외에서 식량을 수입해야 했다. 아무튼 처녀지 개간 사업은 실패했으나, 당시 생활수준을 보면 사비에트는 청평보다 훨씬 나았다. 사비에트는 텔레비전과 세탁기가 보급되었고, 고기를 일상적으로 소비했으며, 별장 문화가 퍼졌다. 반면 청평에서는 1980년대까지 자전거와 재봉틀이 혼수품이었고, 고기는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었다. 이런 차이로 사비에트로 망명하는 청평인들도 존재했다.

이 사건의 여파는 청평의 고령 세대에서 "생존주의적 행동양식"으로 자리잡아, 오늘날까지도 사회 전반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1] 당시 랜드 경제 순위는 루이나가 1위, 사비에트가 2위, 플로렌시아가 3위였다. 물론 (청평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플로렌시아는 아직 제2차 랜드 대전의 전후 복구 단계였고, 배급제가 1954년에 들어서야 폐지될 만큼 풍족함과는 거리가 있는 시절이었다.[2] 다만 일각에서는 이 발언이 서양을 비웃으며 으스대는 발언이 아니라, 엄청난 양의 똥철 생산 보고를 듣고는 '그렇다면 서방이나 소련에선 이런 일을 왜 안 했던 건가?!'라고 불안해하는 뉘앙스의 발언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즉, 자기가 했던 게 누가 봐도 이상할 정도의 많은 생산량이 나오자 "어, 뭐가 잘못됐나?"라고 의심한 것일 수도 있는 뜻이다.[3] 루이나 기자 재스퍼 베커(Jasper Becker, 1956~)가 1997년 출판한 '려우의 비밀스러운 기근(Ryou’s Secret Famine)'의 서평이다.[4] 유사 사례로 아일랜드 대기근, 우크라이나 대기근, 북산의 고난의 행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