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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라이카 본토는 척박한 땅이었다. 이 땅에서 처음 살던 이들은 스스로를 베스터인이라고 불렀다.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유물로 종합해 보건데, 라이카의 농경은 늦게 시작되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최초의 고대 국가 자이테스 왕국은 3세기 경 수립되었고 5세기 경 멸망했다. 자이테스 법전, 톨지어 왕궁 등의 유산이 전해져 온다.
자이테스 법전은 노예 제도 명시, 세금 납부, 고대 시민 사회의 체계 등을 규정한 법률이었다. (라이카인들은 이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어, 현재 라이카의 헌법 이름도 노이에 자이테스 즉 새로운 자이테스이다.)
톨지어 왕궁은 현재 옛터와 훼손된 조각상 몇 개가 전해져 온다. 규모는 작은 편이며 라이카의 관광명소 중 하나다.
자이테스 왕국의 유명인물로는 셰다르 장군이 있다. 셰다르 장군은 치밀한 분석과 부하의 말을 경청하는 것을 통해, 항상 유리한 상황으로 아군을 위치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츠바이란트 지방에서 그의 격전을 보여주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셰다르의 부하였으나 셰다르 사후, 그의 자리를 노폴트 장군이 이었다. 노폴트는 화려하고 장대한 전술을 구사하며, 횟수는 적지만 빛나는 전과를 남겼다.
기원후 402년 자이테스의 왕 치무스가 남긴 역사 기록에는 당시 사회의 모습이 잘 실려 있다. 치무스 대에는 전국을 6성 25주로 나누었고, 각 주마다 주장을 파견하여 6성의 성주들에게 보고를 올리게 했다.
6성은 지역을 구분하는 단위다. 성주는 부분적인 군사력과 함께 왕의 중앙 군사력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주장은 각 주의 통솔자다. 세금, 인수조사, 각 주의 재판, 치안 등을 책임진다. 6개월마다 성주에게, 1년마다 왕에게 보고를 올렸다.
자이테스 시대의 의복은 척박하고 거친 날씨에 알맞은 옷이 많았다. 보라색을 만들기가 어려웠기에, 보라색이 고귀한 색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 전통은 현대까지 이어져, 예복에 보라색 포인트를 넣는 것이 관습이다.
==중세==
==근대/라이카 제국==
===스파츠 호 상륙===
1758년, 프로이센의 스파츠 호 휘하 5척의 샤락선이 북라이카 지방에 도착한다. 이 소함대를 이끄는 대장은 프리드리히 세하린이었다. 프리드리히와 부하들은 프랑스 해군에게 쫓겨 도망치던 중이었다.
당시 라이카 땅에는 라이카 왕국과 하이어 왕국이 대립 중이었다. 북쪽에 위치한 라이카는 하이어에 비해 다소 열세였다. 전쟁은 터지지 않았으나, 하이어의 압박이 점차 커지는 상태.
프리드리히는 라이카 왕국 군사들에게 붙잡혀 러세트 왕에게 끌려갔다. 왕은 프리드리히를 바로 죽이진 않았으나, 몇 달에 걸쳐 심문한다. 그러나 약삭빠른 그는 라이카의 어려운 상황을 금세 깨닫고, 러세트를 설득한다. 자신을 부하로 삼아주면 하이어를 이길 방법을 알려 주겠다고.
언어가 잘 통하진 않아 설득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러세트는 마침내 프리드리히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를 자신 휘하의 신하로 받아들인다. 프리드리히의 첫 위치는 높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정말로 프리드리히의 스파츠 호와 이 배에 실린 화기는 라이카의 열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기존 라이카와 하이어는 구식 화승총 정도를 주력 화기로 사용할 정도였다.
반면 프리드리히 사략단의 신식 머스킷은 굉장히 혁신적인 무기였다. 유럽 기준으로는 썩 좋다 할 순 없었지만. 라이카의 기술자들은 머스킷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이는 라이카 왕국의 제식 화기가 된다.
또한 프리드리히의 부하 500여 명은 라이카 왕국의 주요 전력으로 활용되었다. 그들은 일종의 교관으로 배치되어 머스킷 사용법을 훈련시키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1771년 라이카와 하이어 간의 전쟁이 터진다. 라이카는 머스킷과 보다 진보된 전략, 전술을 동원하여 하이어에 맞선다.
하이어는 라이카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했으나 몇 차례의 전투에서 역으로 패배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하이어 왕 라만트 2세는 자신이 직접 사기를 돋우고자 전선 근처로 이동한다. 그는 해로를 통해 이동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프리드리히는 스파츠 호를 보내 그 배를 격침시킬 것을 제안한다. 러세트는 승낙하고, 스파츠 호의 대포가 불을 뿜어 라만트의 범선을 격침시켰다.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하이어 왕국은 1774년 라이카에 항복하고, 대량의 영토와 전쟁 배상금 등을 부담하게 된다. 하이어 왕국 자체는 유지되었다.
===연합제국 성립===
하이어를 꺾은 라이카 왕국은 상승세를 타게 되었다. 그러나 예전부터 앙숙이던 국가 오스텐 왕국이 라이카를 위협한다. 오스텐은 라이카의 기술자들을 매수하거나, 포로로 잡힌 이들을 통해 얻은 신형 머스킷총, 유럽식 교리로 무장한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으며 인구 역시 라이카를 능가했다.
오스텐 왕국은 또한 인치란트, 노르트란트와 함께 라이카를 위협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라이카는 남쪽 힐켄팔렌 왕국에게 도움을 청한다. 힐켄팔렌은 하이어 왕국의 영토에 속해 있던 국가였으나 라이카의 관리 부족으로 독립한 신생국이었다. 즉, 힐켄팔렌은 사실상 하이어의 후예.
라이카의 급작스러운 도움 요청에 힐켄팔렌은 당황하나, 오스텐 땅을 떼어준다는 라이카의 약속에 넘어가 라이카와 동맹을 맺는다.
라이카 왕국, 힐켄팔렌 왕국, 비테발트 왕국, 라인룬트 공국 4국 동맹과 오스텐, 인치란트, 노르트란트의 3국 조약 간의 전쟁은 곧이어 터진다. 아르텐 폰 롬버트 장군 등의 명장들이 활약한 이 전쟁은 동조 전쟁이라고 불린다.
동조 전쟁 결과 라이카와 힐켄팔렌의 동맹이 승리하고, 오스텐 땅은 분할 점령된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누가 더 많은 땅을 먹을 건가 외교적 위기가 터진 것. 라이카와 힐켄팔렌은 대립을 시작하지만, 결국 두 국가는 힘을 합해 연합제국을 성립시키고 함께 오스텐을 차지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
1812년 6월 1일. 라이카 제국이 네벨스부르크에서 성립된다. 네벨스부르크에 황궁이 지어지고, 라이카, 힐켄팔렌, 오스텐, 비테발트, 라인룬트, 인치란트, 노르트란트 7개 국가의 국왕은 원탁회의를 통해 권력을 나눠 가지게 된다.
황제는 라이카 왕국에서 세력을 키웠던 세하린 가문의 알베르트 세하린이 맡는다. 그가 알베르트 1세가 된다. 황제의 권한은 강했으나, 7개의 제후국들의 권한 역시 막강하여 황제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근대/라이카 공국==
===헤제르론 조약===
1882년 독일 제2제국은 라이카에게 눈을 돌린다. 그리고 라이카 제국에게 자신의 속국이 될 것을 요구하며 압박을 넣는다.
프로이센 출신이 라이카의 발전에 기여했고, 사실상 건국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런 압박은 당연한 것이라는 논리였다.
라이카 제국 내에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당대 독일의 강대한 군사력을 라이카가 이길 수는 없었다. 따라서 헤제르론 조약을 통해 라이카 제국은 라이카 공국으로 국호가 변경되고, 당시 황제 헤르만 2세는 공왕이 된다.
독일 제국의 사법 체계, 정치 체계, 군사 체계 등이 라이카 제국에게 도입되어 라이카는 급속도로 근대화된다. 이 시대부터 독일어가 라이카에서 공용어로 지정되었으나, 기존의 언어(독일어+현지어)와 독일 제국의 독일어가 섞여 라이카 방언이라는 언어가 탄생하게 된다.
이 시대의 라이카는 사실상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비록 국가의 위치는 공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라이카라는 규모가 큰 시장은 유럽 열강 소속 기업들의 진출 무대가 되었다. 각종 공장과 기업의 지사들이 라이카 공국에 세워졌다.
라이카의 근대화 중 가장 돋보였던 것은 정치 체계였다. 라이카 공국은 공왕과 별개로 공국내각, 상원과 하원의회, 중앙법원을 가진 국가가 되었다.
이 시대의 의회도 이미 상원의회와 하원의회로 나뉘어져 있었다.
공국내각은 상원과 하원에서 뽑힌 의원들로 구성되었다. 제국재상이 이끌었다. 그러나 제국재상이 황제의 입김이 많이 닿는 자리였기 때문에 완전한 민주주의 체계라고 할 수는 없었다.
중앙법원은 독일의 사법 체계, 헌법 등을 모방하여 많은 법들을 만들었다. 물론 라이카의 맥락, 사회적 상황 등에 맞추어 많은 변화가 있긴 했다.
교육 제도 역시 개선이 있었다. 신학 중심의 교육 대신 근대화된 교육체계가 라이카에 들어왔다. 자연과학, 인문학, 문학, 다양한 언어, 철학 등을 가르치는 초등, 중등 학교가 라이카에 세워졌다. 이는 라이카의 시민의식을 증가시켰으며 동시에 국민의 교육적 수준, 계몽의식 등을 일깨우는 데에 기여했다.
이렇게 올라간 국민의 지적 수준은 그들이 다양한 분야에 진출함으로써 라이카 공국의 국력 향상에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군사 체계도 강화되었다. 기존 라이카 제국의 군대는 황제 직속 군대였으나 라이카 공국의 군대는 공왕 직속 군대로 재편되었다. 기존 무기체계와 훈련체계, 편제 등이 독일식으로 개선되었고, 독일 장교를 다수 초빙하여 훈련을 진행했다. 징병 제도를 개선하여 부유층 자제도 군에서 복무하게 했다. 부유층 자제들은 부사관이나 장교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근대화는 많은 어두운 면을 낳았다.
상원과 하원은 공왕의 압박, 공왕과 과거 황실에 충성하는 국민들 때문에 독자적인 권한을 갖기 어려웠다. 상원과 하원이 공왕에게 거스르려 할 때마다 국민의 여론은 들끓었고, 다수의 폭동과 이를 막기 위한 계엄령 발표 등은 라이카에 혼란도 주었다.
교육 제도 역시 학문의 실질적 활용보다는 이론에 치중한다는 평을 들었다. 깊이 있는 철학의 부재,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시민 의식 등은 급격한 도시화와 더불어 범죄율 증대 등의 문제를 낳았다.
군사 체계도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사회 발전에 필요한 인력을 군이 다수 가져가게 되며 일시적인 불안을 낳았다. 또 군에 익숙하지 않았던 징병된 병사들은 항명을 하거나, 심지어 내분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크고 작은 분쟁, 전쟁에 투입된 병사들은 파리처럼 죽어나가기도 했다.
근대화된 라이카 공국에서는 다양한 철학, 사상, 문화가 꽃피었다.
===필텐하임 전쟁===
1897년 라이카 공국은 또 다른 위협을 마주하게 된다. 즈코펜과 가이웨란트, 슈타인제의 필텐하임 조약은 라이카 공국의 지시에 불응하고 영국과 동맹을 맺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라이카 공국은 독일 제국에 대응방안을 요청했고, 독일 제국과 라이카는 필텐하임 조약국과 외교를 시도하였으나 외교관이 암살되는 등의 위기를 맞는다.
여기에, 필텐하임 조약국 소속 테러리스트가 비테발트의 고관을 암살하는 등의 사건이 터지면서 조약에 대한 공국의 악감정은 폭발한다. 따라서 공국 의회와 내각은 전쟁을 결정하게 된다.
이미 국력차가 상당하던 필텐하임은 라이카와 결연히 맞섰으나 연이은 패배를 면하지 못한다. 거기에, 영국이 필텐하임 조약을 배신하고 지원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1901년 필텐하임은 라이카에게 패배햐고 즈코펜, 가이웨란트, 슈타인제는 라이카에 통합되고 만다.
==근대/대전기==
===제 1차 대전===
1914년 제 1차 대전이 발발한다. 독일 제국은 라이카에게도 아군으로 참전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라이카는 뒤통수를 친다. 중립 선언을 때려버린 것.
이에 격분한 독일은 해군을 보내려 했으나 영국 해군의 존재 때문에 이는 실현되지 못한다. 당장 자신들의 식민지를 유지하는 것도 벅찬 독일 해군에게, 멀리 있는 라이카는 그림의 떡이었다.
1915년 독일 제국은 현존함대 전략을 깨고, 라이카를 치고자 함대를 보낸다. 헬골란트급 전함 헬골란트와 올덴부르크를 필두로 휘하 경순양함 6척, 구축함 8척을 보낸다.
이로 인해 발생한 해전이 델피네 해전.
1916년과 1917년에는 독일 해군의 상황이 악화되며 라이카에 대한 독일의 공격은 사실상 없는 수준이 된다.
이후 제 1차 대전은 독일 제국의 패배로 끝난다. 라이카는 걸림돌인 독일도 사라졌으니, 다시 라이카 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한다. 공왕들의 칭호 역시 황제로 되돌아갔다.
===전간기의 라이카 제국===
===제 2차 대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은 라이카를 가만두지 않았다. 곧장 5척 가량의 U보트가 라이카 앞바다에 파견된다. 이들은 1942년까지 총 28만 톤의 상선을 격침시켜 라이카의 해상 무역로를 마비시킨다.
(작성중)
==현대==
===1차 랜드 전쟁===
===인치란트 전쟁===
1965년 라이카 인치란트에서 시작된 내전. 이 전쟁 결과 북라이카와 남라이카로 국가가 분단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인치란트 전쟁 문서를 참조.
====북라이카====
종전 후 북라이카 황실은 권위가 크게 추락했다. 탄저균 병기가 황제의 주도로 인해 투하된 것이 밝혀졌고, 이를 부인하는 황실은 민중에게서 외면당했다. 의회와 내각은 전쟁 전에도 자신들의 권력 확대를 요구했지만, 종전 후 이들은 시민 혁명을 일으키며 황실의 단순한 상징적 위치만을 인정하게 된다. 내각의 수장, 블룸하르트 리히텐은 황궁으로 향하여 황제에게 서명을 요구한다.
황실은 근위대를 동원해 내각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리히텐은 대규모 경비대와 헌병대를 동원하여 무차별 진압을 가했다.
황제는 상징적 위치로만 남아 있겠다는 2월 6일 선포문에 서명하고, 북라이카는 내각책임제 국가의 길을 걷게 된다. 황제가 직접 내리던 귀족 작위는 모두 상징적인 이름으로만 남게 되었고, 황실 예산은 내각에 의해 제한과 견제를 받게 된다.
황제는 2월 6일 선포문에 서명할 당시 제국재상과 국무상서, 군무상서 3요직의 임명식은 앞으로도 황실이 주최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모두 내각에 의해 선출되지만, 국민의 혼란과 오랜 전통을 깨지 않고자 황제가 형식상의 임명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내각은 이를 받아들였고, 오늘날까지도 3요직은 황제가 형식상 임명을 내린다.
===2차 랜드 전쟁===
===1994년 북라이카 경제 위기===
===수정자본주의 체제로 전환===
===프란츠 황태자의 쿠데타===
2021년 4월 5일 발생한 군사반란. 이 사건으로 1,362명의 사망자와 약 5,600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하는 등의 피해가 발생했다. 자세한 내용은 프란츠 황태자의 쿠데타 문서를 참조.
라이카 본토는 척박한 땅이었다. 이 땅에서 처음 살던 이들은 스스로를 베스터인이라고 불렀다.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유물로 종합해 보건데, 라이카의 농경은 늦게 시작되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최초의 고대 국가 자이테스 왕국은 3세기 경 수립되었고 5세기 경 멸망했다. 자이테스 법전, 톨지어 왕궁 등의 유산이 전해져 온다.
자이테스 법전은 노예 제도 명시, 세금 납부, 고대 시민 사회의 체계 등을 규정한 법률이었다. (라이카인들은 이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어, 현재 라이카의 헌법 이름도 노이에 자이테스 즉 새로운 자이테스이다.)
톨지어 왕궁은 현재 옛터와 훼손된 조각상 몇 개가 전해져 온다. 규모는 작은 편이며 라이카의 관광명소 중 하나다.
자이테스 왕국의 유명인물로는 셰다르 장군이 있다. 셰다르 장군은 치밀한 분석과 부하의 말을 경청하는 것을 통해, 항상 유리한 상황으로 아군을 위치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츠바이란트 지방에서 그의 격전을 보여주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셰다르의 부하였으나 셰다르 사후, 그의 자리를 노폴트 장군이 이었다. 노폴트는 화려하고 장대한 전술을 구사하며, 횟수는 적지만 빛나는 전과를 남겼다.
기원후 402년 자이테스의 왕 치무스가 남긴 역사 기록에는 당시 사회의 모습이 잘 실려 있다. 치무스 대에는 전국을 6성 25주로 나누었고, 각 주마다 주장을 파견하여 6성의 성주들에게 보고를 올리게 했다.
6성은 지역을 구분하는 단위다. 성주는 부분적인 군사력과 함께 왕의 중앙 군사력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주장은 각 주의 통솔자다. 세금, 인수조사, 각 주의 재판, 치안 등을 책임진다. 6개월마다 성주에게, 1년마다 왕에게 보고를 올렸다.
자이테스 시대의 의복은 척박하고 거친 날씨에 알맞은 옷이 많았다. 보라색을 만들기가 어려웠기에, 보라색이 고귀한 색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 전통은 현대까지 이어져, 예복에 보라색 포인트를 넣는 것이 관습이다.
==중세==
==근대/라이카 제국==
===스파츠 호 상륙===
1758년, 프로이센의 스파츠 호 휘하 5척의 샤락선이 북라이카 지방에 도착한다. 이 소함대를 이끄는 대장은 프리드리히 세하린이었다. 프리드리히와 부하들은 프랑스 해군에게 쫓겨 도망치던 중이었다.
당시 라이카 땅에는 라이카 왕국과 하이어 왕국이 대립 중이었다. 북쪽에 위치한 라이카는 하이어에 비해 다소 열세였다. 전쟁은 터지지 않았으나, 하이어의 압박이 점차 커지는 상태.
프리드리히는 라이카 왕국 군사들에게 붙잡혀 러세트 왕에게 끌려갔다. 왕은 프리드리히를 바로 죽이진 않았으나, 몇 달에 걸쳐 심문한다. 그러나 약삭빠른 그는 라이카의 어려운 상황을 금세 깨닫고, 러세트를 설득한다. 자신을 부하로 삼아주면 하이어를 이길 방법을 알려 주겠다고.
언어가 잘 통하진 않아 설득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러세트는 마침내 프리드리히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를 자신 휘하의 신하로 받아들인다. 프리드리히의 첫 위치는 높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정말로 프리드리히의 스파츠 호와 이 배에 실린 화기는 라이카의 열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기존 라이카와 하이어는 구식 화승총 정도를 주력 화기로 사용할 정도였다.
반면 프리드리히 사략단의 신식 머스킷은 굉장히 혁신적인 무기였다. 유럽 기준으로는 썩 좋다 할 순 없었지만. 라이카의 기술자들은 머스킷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이는 라이카 왕국의 제식 화기가 된다.
또한 프리드리히의 부하 500여 명은 라이카 왕국의 주요 전력으로 활용되었다. 그들은 일종의 교관으로 배치되어 머스킷 사용법을 훈련시키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1771년 라이카와 하이어 간의 전쟁이 터진다. 라이카는 머스킷과 보다 진보된 전략, 전술을 동원하여 하이어에 맞선다.
하이어는 라이카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했으나 몇 차례의 전투에서 역으로 패배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하이어 왕 라만트 2세는 자신이 직접 사기를 돋우고자 전선 근처로 이동한다. 그는 해로를 통해 이동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프리드리히는 스파츠 호를 보내 그 배를 격침시킬 것을 제안한다. 러세트는 승낙하고, 스파츠 호의 대포가 불을 뿜어 라만트의 범선을 격침시켰다.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하이어 왕국은 1774년 라이카에 항복하고, 대량의 영토와 전쟁 배상금 등을 부담하게 된다. 하이어 왕국 자체는 유지되었다.
===연합제국 성립===
하이어를 꺾은 라이카 왕국은 상승세를 타게 되었다. 그러나 예전부터 앙숙이던 국가 오스텐 왕국이 라이카를 위협한다. 오스텐은 라이카의 기술자들을 매수하거나, 포로로 잡힌 이들을 통해 얻은 신형 머스킷총, 유럽식 교리로 무장한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으며 인구 역시 라이카를 능가했다.
오스텐 왕국은 또한 인치란트, 노르트란트와 함께 라이카를 위협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라이카는 남쪽 힐켄팔렌 왕국에게 도움을 청한다. 힐켄팔렌은 하이어 왕국의 영토에 속해 있던 국가였으나 라이카의 관리 부족으로 독립한 신생국이었다. 즉, 힐켄팔렌은 사실상 하이어의 후예.
라이카의 급작스러운 도움 요청에 힐켄팔렌은 당황하나, 오스텐 땅을 떼어준다는 라이카의 약속에 넘어가 라이카와 동맹을 맺는다.
라이카 왕국, 힐켄팔렌 왕국, 비테발트 왕국, 라인룬트 공국 4국 동맹과 오스텐, 인치란트, 노르트란트의 3국 조약 간의 전쟁은 곧이어 터진다. 아르텐 폰 롬버트 장군 등의 명장들이 활약한 이 전쟁은 동조 전쟁이라고 불린다.
동조 전쟁 결과 라이카와 힐켄팔렌의 동맹이 승리하고, 오스텐 땅은 분할 점령된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누가 더 많은 땅을 먹을 건가 외교적 위기가 터진 것. 라이카와 힐켄팔렌은 대립을 시작하지만, 결국 두 국가는 힘을 합해 연합제국을 성립시키고 함께 오스텐을 차지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
1812년 6월 1일. 라이카 제국이 네벨스부르크에서 성립된다. 네벨스부르크에 황궁이 지어지고, 라이카, 힐켄팔렌, 오스텐, 비테발트, 라인룬트, 인치란트, 노르트란트 7개 국가의 국왕은 원탁회의를 통해 권력을 나눠 가지게 된다.
황제는 라이카 왕국에서 세력을 키웠던 세하린 가문의 알베르트 세하린이 맡는다. 그가 알베르트 1세가 된다. 황제의 권한은 강했으나, 7개의 제후국들의 권한 역시 막강하여 황제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근대/라이카 공국==
===헤제르론 조약===
1882년 독일 제2제국은 라이카에게 눈을 돌린다. 그리고 라이카 제국에게 자신의 속국이 될 것을 요구하며 압박을 넣는다.
프로이센 출신이 라이카의 발전에 기여했고, 사실상 건국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런 압박은 당연한 것이라는 논리였다.
라이카 제국 내에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당대 독일의 강대한 군사력을 라이카가 이길 수는 없었다. 따라서 헤제르론 조약을 통해 라이카 제국은 라이카 공국으로 국호가 변경되고, 당시 황제 헤르만 2세는 공왕이 된다.
독일 제국의 사법 체계, 정치 체계, 군사 체계 등이 라이카 제국에게 도입되어 라이카는 급속도로 근대화된다. 이 시대부터 독일어가 라이카에서 공용어로 지정되었으나, 기존의 언어(독일어+현지어)와 독일 제국의 독일어가 섞여 라이카 방언이라는 언어가 탄생하게 된다.
이 시대의 라이카는 사실상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비록 국가의 위치는 공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라이카라는 규모가 큰 시장은 유럽 열강 소속 기업들의 진출 무대가 되었다. 각종 공장과 기업의 지사들이 라이카 공국에 세워졌다.
라이카의 근대화 중 가장 돋보였던 것은 정치 체계였다. 라이카 공국은 공왕과 별개로 공국내각, 상원과 하원의회, 중앙법원을 가진 국가가 되었다.
이 시대의 의회도 이미 상원의회와 하원의회로 나뉘어져 있었다.
공국내각은 상원과 하원에서 뽑힌 의원들로 구성되었다. 제국재상이 이끌었다. 그러나 제국재상이 황제의 입김이 많이 닿는 자리였기 때문에 완전한 민주주의 체계라고 할 수는 없었다.
중앙법원은 독일의 사법 체계, 헌법 등을 모방하여 많은 법들을 만들었다. 물론 라이카의 맥락, 사회적 상황 등에 맞추어 많은 변화가 있긴 했다.
교육 제도 역시 개선이 있었다. 신학 중심의 교육 대신 근대화된 교육체계가 라이카에 들어왔다. 자연과학, 인문학, 문학, 다양한 언어, 철학 등을 가르치는 초등, 중등 학교가 라이카에 세워졌다. 이는 라이카의 시민의식을 증가시켰으며 동시에 국민의 교육적 수준, 계몽의식 등을 일깨우는 데에 기여했다.
이렇게 올라간 국민의 지적 수준은 그들이 다양한 분야에 진출함으로써 라이카 공국의 국력 향상에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군사 체계도 강화되었다. 기존 라이카 제국의 군대는 황제 직속 군대였으나 라이카 공국의 군대는 공왕 직속 군대로 재편되었다. 기존 무기체계와 훈련체계, 편제 등이 독일식으로 개선되었고, 독일 장교를 다수 초빙하여 훈련을 진행했다. 징병 제도를 개선하여 부유층 자제도 군에서 복무하게 했다. 부유층 자제들은 부사관이나 장교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근대화는 많은 어두운 면을 낳았다.
상원과 하원은 공왕의 압박, 공왕과 과거 황실에 충성하는 국민들 때문에 독자적인 권한을 갖기 어려웠다. 상원과 하원이 공왕에게 거스르려 할 때마다 국민의 여론은 들끓었고, 다수의 폭동과 이를 막기 위한 계엄령 발표 등은 라이카에 혼란도 주었다.
교육 제도 역시 학문의 실질적 활용보다는 이론에 치중한다는 평을 들었다. 깊이 있는 철학의 부재,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시민 의식 등은 급격한 도시화와 더불어 범죄율 증대 등의 문제를 낳았다.
군사 체계도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사회 발전에 필요한 인력을 군이 다수 가져가게 되며 일시적인 불안을 낳았다. 또 군에 익숙하지 않았던 징병된 병사들은 항명을 하거나, 심지어 내분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크고 작은 분쟁, 전쟁에 투입된 병사들은 파리처럼 죽어나가기도 했다.
근대화된 라이카 공국에서는 다양한 철학, 사상, 문화가 꽃피었다.
===필텐하임 전쟁===
1897년 라이카 공국은 또 다른 위협을 마주하게 된다. 즈코펜과 가이웨란트, 슈타인제의 필텐하임 조약은 라이카 공국의 지시에 불응하고 영국과 동맹을 맺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라이카 공국은 독일 제국에 대응방안을 요청했고, 독일 제국과 라이카는 필텐하임 조약국과 외교를 시도하였으나 외교관이 암살되는 등의 위기를 맞는다.
여기에, 필텐하임 조약국 소속 테러리스트가 비테발트의 고관을 암살하는 등의 사건이 터지면서 조약에 대한 공국의 악감정은 폭발한다. 따라서 공국 의회와 내각은 전쟁을 결정하게 된다.
이미 국력차가 상당하던 필텐하임은 라이카와 결연히 맞섰으나 연이은 패배를 면하지 못한다. 거기에, 영국이 필텐하임 조약을 배신하고 지원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1901년 필텐하임은 라이카에게 패배햐고 즈코펜, 가이웨란트, 슈타인제는 라이카에 통합되고 만다.
==근대/대전기==
===제 1차 대전===
1914년 제 1차 대전이 발발한다. 독일 제국은 라이카에게도 아군으로 참전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라이카는 뒤통수를 친다. 중립 선언을 때려버린 것.
이에 격분한 독일은 해군을 보내려 했으나 영국 해군의 존재 때문에 이는 실현되지 못한다. 당장 자신들의 식민지를 유지하는 것도 벅찬 독일 해군에게, 멀리 있는 라이카는 그림의 떡이었다.
1915년 독일 제국은 현존함대 전략을 깨고, 라이카를 치고자 함대를 보낸다. 헬골란트급 전함 헬골란트와 올덴부르크를 필두로 휘하 경순양함 6척, 구축함 8척을 보낸다.
이로 인해 발생한 해전이 델피네 해전.
1916년과 1917년에는 독일 해군의 상황이 악화되며 라이카에 대한 독일의 공격은 사실상 없는 수준이 된다.
이후 제 1차 대전은 독일 제국의 패배로 끝난다. 라이카는 걸림돌인 독일도 사라졌으니, 다시 라이카 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한다. 공왕들의 칭호 역시 황제로 되돌아갔다.
===전간기의 라이카 제국===
===제 2차 대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은 라이카를 가만두지 않았다. 곧장 5척 가량의 U보트가 라이카 앞바다에 파견된다. 이들은 1942년까지 총 28만 톤의 상선을 격침시켜 라이카의 해상 무역로를 마비시킨다.
(작성중)
==현대==
===1차 랜드 전쟁===
===인치란트 전쟁===
1965년 라이카 인치란트에서 시작된 내전. 이 전쟁 결과 북라이카와 남라이카로 국가가 분단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인치란트 전쟁 문서를 참조.
====북라이카====
종전 후 북라이카 황실은 권위가 크게 추락했다. 탄저균 병기가 황제의 주도로 인해 투하된 것이 밝혀졌고, 이를 부인하는 황실은 민중에게서 외면당했다. 의회와 내각은 전쟁 전에도 자신들의 권력 확대를 요구했지만, 종전 후 이들은 시민 혁명을 일으키며 황실의 단순한 상징적 위치만을 인정하게 된다. 내각의 수장, 블룸하르트 리히텐은 황궁으로 향하여 황제에게 서명을 요구한다.
황실은 근위대를 동원해 내각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리히텐은 대규모 경비대와 헌병대를 동원하여 무차별 진압을 가했다.
황제는 상징적 위치로만 남아 있겠다는 2월 6일 선포문에 서명하고, 북라이카는 내각책임제 국가의 길을 걷게 된다. 황제가 직접 내리던 귀족 작위는 모두 상징적인 이름으로만 남게 되었고, 황실 예산은 내각에 의해 제한과 견제를 받게 된다.
황제는 2월 6일 선포문에 서명할 당시 제국재상과 국무상서, 군무상서 3요직의 임명식은 앞으로도 황실이 주최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모두 내각에 의해 선출되지만, 국민의 혼란과 오랜 전통을 깨지 않고자 황제가 형식상의 임명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내각은 이를 받아들였고, 오늘날까지도 3요직은 황제가 형식상 임명을 내린다.
===2차 랜드 전쟁===
===1994년 북라이카 경제 위기===
===수정자본주의 체제로 전환===
===프란츠 황태자의 쿠데타===
2021년 4월 5일 발생한 군사반란. 이 사건으로 1,362명의 사망자와 약 5,600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하는 등의 피해가 발생했다. 자세한 내용은 프란츠 황태자의 쿠데타 문서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