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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ocratic Union of Ruina
Демократический союз Руины
한국어 명칭
민주연합
약칭
민련 (DU)
창당일
1979년 9월 3일
해산일
1988년 6월 27일[1]
전신
벨포르의 봄 시민대책회의
후신
중앙당사
이념
창당기:
자유민주주의
헌정주의
반군정
----
집권기:
권위주의적 보수주의
개발주의
국가주의
반공주의
정치적 스펙트럼
중도 → 우파 ~ 극우
총재
부총재
배출 대통령
1명 (제25·26대)
역대 최다 의석
하원 178석 (1980년)
당색
남색 (#1b2f5e)
주홍색 (#c0392b)
당원 수
2,340,000명 (1987년 발표 기준)[2]
상징
횃불

1. 개요2. 상징
2.1. 횃불2.2. 당색
3. 성향4. 역사
4.1. 창당 (1979)4.2. 제4공화국 (1980~1983)4.3. 4.13과 제5공화국 (1983~1987)4.4. 12.23 방침과 해산 (1987~1988)4.5. 해산 이후
5. 지지 기반6. 역대 선거 결과
6.1. 총선6.2. 대통령 선거
7. 평가8. 여담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1. 개요 [편집]

민주연합(Democratic Union of Ruina, 약칭 DU)은 1979년부터 1988년까지 존속한 루이나의 정당이다. 제4공화국제5공화국의 여당이었으며,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가 창당해 해산까지 총재를 맡았다.

1978년 10.10 군사반란과 군정을 겪은 뒤 헌정 회복을 요구하던 민주화 세력이 세운 정당이었다. 창당 강령의 첫 조항은 군의 정치 개입 근절이었고, 초기 지도부 상당수는 벨포르의 봄 시민대책회의와 제헌의회에서 활동한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1980년 베인브리지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 당의 성격은 급격히 바뀌었다. 1981년 대통령 연임 제한 철폐 개헌으로 제2차 헌정위기를 자초했고, 1983년 벨포르 폭동4.13 유혈진압 이후 수립된 제5공화국에서는 6년 단임 간선제를 뒷받침하는 관제 여당으로 기능했다. 언론기본법과 학원안정법이 모두 이 당의 주도로 처리되었다.

1987년 12.23 방침으로 촉발된 전국적 시위와 이듬해 1.10 민주화 선언 이후, 여권은 이 당의 이름으로는 직선제 선거를 치를 수 없다고 판단했다. 1988년 6월 27일 민주연합은 해산했고 같은 세력이 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존속 기간은 8년 9개월이다.

2. 상징 [편집]

2.1. 횃불 [편집]

민주연합의 표장은 횃불이었다. 벨포르의 봄 당시 야간 집회에서 시민들이 들었던 횃불에서 따온 것으로, 창당대회에서 "군정의 밤을 끝낸 불"이라는 설명과 함께 채택되었다.

창당 당시부터 이 도안은 자유당의 등불과 지나치게 닮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야당인 재건 자유당 측은 "남의 등을 빼앗아 불을 키운 것"이라고 조롱했고, 민주연합은 등불이 개인의 도구인 반면 횃불은 광장의 물건이라는 논리로 대응했다.

집권 후반으로 갈수록 이 표장은 당이 가장 곤란해하는 자산이 되었다. 1983년 4.13 유혈진압 이후 시위 현장에서 시위대가 같은 횃불을 들고 당사 앞에 서는 장면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1988년 민주공화당 창당 시 횃불은 계승되지 않았다.

2.2. 당색 [편집]

남색(#1b2f5e)과 주홍색(#c0392b)을 썼다. 국기의 색 조합을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창당 세력이 스스로를 특정 계급이나 이념이 아닌 국가 그 자체의 대표로 규정하려 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3. 성향 [편집]

민주연합의 이념은 창당기와 집권기가 완전히 다르다. 루이나 정당사에서 이만큼 짧은 기간에 성격이 뒤바뀐 사례는 없다.

창당기의 강령은 군의 정치 개입 근절, 계엄 해제, 정치범 석방, 대통령 직선제였다. 이 시기의 민주연합은 군정 종식을 요구한 모든 세력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연합체였고, 재야와 학생운동, 종교계, 구 사회민주당 인사까지 참여했다.

집권 이후 당의 언어는 안정과 성장으로 옮겨갔다. 1981년 개헌 국면에서 민주연합은 "헌정 회복은 완료되었으며 이제 필요한 것은 연속성"이라는 논리를 폈고, 이 논리가 연임 제한 철폐를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 창당 강령의 직선제 조항은 1983년 제5공화국 헌법에서 간선제로 대체되면서 사실상 폐기되었다.

경제 정책에서는 개발주의를 택했다. 중화학공업 투자와 항만·고속도로 확충, 수출 지원을 국가가 직접 배분하는 방식이었고, 이 과정에서 대기업과 당의 유착 구조가 형성되었다. 냉전 정세를 배경으로 반공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국가보안법 적용 범위를 크게 넓힌 것도 이 시기다.

4. 역사 [편집]

4.1. 창당 (1979) [편집]

1978년 10월 10.10 군사반란으로 리처드 잭슨 대통령이 축출되고 모든 정당이 강제 해산되었다. 비달 파브르가 두 달 만에 12.6 사태로 암살된 뒤에도 국가비상위원회 체제가 이어졌으나, 1979년 벨포르의 봄으로 헌정 회복 요구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는 시민대책회의 공동의장과 제헌의회 의장을 맡으며 이 국면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 1979년 9월 3일 그를 총재로 하는 민주연합이 창당되었고, 이듬해 정당법 제정으로 정당 활동이 전면 재개되었다.

창당 당시 민주연합은 야당이 아니라 민주화 진영 전체의 정당으로 인식되었다. 재건 자유당과 국민민주당이 별도로 등록한 것은 그해 말이었다.

4.2. 제4공화국 (1980~1983) [편집]

1980년 3월 1일 베인브리지가 제25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제4공화국이 출범했다. 같은 해 총선에서 민주연합은 하원 178석을 얻어 단독 과반을 확보했다.

집권 첫해까지 당의 노선은 창당 강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계엄이 해제되고 정치범 상당수가 석방되었으며, 군 인사에 대한 문민 통제가 제도화되었다.

전환점은 1981년이었다. 민주연합은 대통령 연임 제한 조항을 철폐하는 개헌안을 발의했고, 야당과 시민사회가 이를 장기집권 기도로 규정하면서 제2차 헌정위기가 시작되었다. 개헌은 관철되었으나 당은 창당의 명분을 잃었고, 이 시점부터 재야 세력이 대거 이탈했다.

4.3. 4.13과 제5공화국 (1983~1987) [편집]

1983년 벨포르 폭동이 일어났다. 개헌 반대 시위가 도시 봉기로 번진 사건이었고, 정부는 4.13 유혈진압으로 이를 정리했다.

진압 직후 수립된 제5공화국 헌법은 대통령 6년 단임 간선제를 규정했다. 대통령선거인단이 사실상 여당의 통제 아래 있었으므로 이 제도는 정권 연장 장치나 다름없었고, 베인브리지는 같은 해 제26대 대통령으로 다시 취임했다.

이 시기 민주연합이 처리한 주요 법률은 언론기본법과 학원안정법이다. 전자는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 권한을 행정부에 부여했고, 후자는 대학 내 집회를 사전 허가 대상으로 삼았다. 여기에 노동조합의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이 신설되면서, 언론·대학·노동조합이라는 세 축이 동시에 통제 아래 놓였다.

1984년 총선에서 민주연합은 168석으로 과반을 유지했다. 다만 득표율은 4년 전보다 크게 떨어졌고, 도시권에서는 야당에 밀리기 시작했다.

4.4. 12.23 방침과 해산 (1987~1988) [편집]

1987년 12월 23일 베인브리지는 현행 헌법의 유지를 선언하는 이른바 12.23 방침을 발표했다. 직선제 개헌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한 이 선언은 즉각 전국적 시위를 촉발했다.

시위는 이듬해까지 이어졌고, 1988년 1월 10일 여권은 직선제 개헌과 정치범 석방을 수용하는 1.10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의 실무를 주도한 인물은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테디 해밀턴이었다.

직선제가 확정되자 여권 내부에서는 민주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판단이 굳어졌다. 1988년 6월 27일 임시 전당대회에서 해산이 의결되었고, 같은 날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형식은 해산이었으나 실질은 개명이었으며, 소속 의원 대다수와 지구당 조직이 그대로 이동했다.

베인브리지는 민주공화당 총재직도 이어받았으나, 1989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는 나서지 않았다. 부총재였던 토머스 J. 윈필드가 후보로 내정되었다가 경선에서 해밀턴에게 패배했고, 해밀턴이 1989년 7월 30일 대선에서 36.2%로 당선되었다.

4.5. 해산 이후 [편집]

1993년 린드 B. 랭스턴 정부에서 4.13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민주연합 집권기에 대한 사법적 청산이 시작되었다. 베인브리지는 같은 해 기소되어 1995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이듬해 22년으로 감형되었다.

민주공화당은 창당 이래 민주연합과의 관계에 대해 일관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조직과 인력의 연속성은 부인할 수 없으나, 4.13에 대한 책임은 특정 개인의 것이라는 태도가 유지되고 있다.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민주공화당이 창당 100년 이상의 계보를 주장하지 못하는 이유이며, 2021년 개혁당 분당의 배경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5. 지지 기반 [편집]

민주연합의 지지 기반은 집권 기간 내내 농촌과 중소도시였다. 개발 예산의 배분권을 쥔 여당이라는 점이 지역 유지와 농민 조직을 결속시키는 핵심 수단이었으며, 콜마르 내륙과 나보레 서부에서는 야당이 후보조차 내지 못한 선거구가 적지 않았다.

반면 벨포르와 롱비치, 윈덴브뤼크 등 대도시와 산업도시에서는 1984년 이후 사실상 소수당이었다. 특히 대학이 있는 선거구에서는 학원안정법 이후 지지가 급락했다.

공무원과 국영기업 직원의 사실상 의무 가입으로 당원 수는 1987년 234만 명에 이르렀다. 해산 직후 민주공화당으로 승계된 실제 활동 당원은 그 10분의 1 수준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역대 선거 결과 [편집]

6.1. 총선 [편집]

연도
득표율
하원
지위
1980
42.7%
178석
여당
1984
35.1%
168석
여당

6.2. 대통령 선거 [편집]

연도
후보
방식
결과
1980
직선
당선
1983
간선
당선

7. 평가 [편집]

민주연합에 대한 평가는 창당의 명분과 집권의 실제 사이의 간극에 집중된다.

이 당은 군정을 끝내기 위해 만들어졌고, 실제로 계엄 해제와 문민 통제 제도화를 이뤄냈다. 1979년 시점에서 민주연합은 민주화 진영 전체를 대표하는 조직이었고, 창당 강령의 직선제 조항은 당시 어느 정당보다 앞선 것이었다.

그러나 집권 3년 차에 그 강령을 스스로 폐기했다. 연임 제한 철폐 개헌, 4.13 유혈진압, 간선제 도입, 언론·대학·노동조합에 대한 동시 통제는 모두 민주연합이 반대하겠다고 선언했던 통치 방식이었다. 루이나 정치학에서 이 당은 "민주화가 만들어낸 정당이 민주화를 죽인 사례"로 정리된다.

가장 자주 인용되는 지적은 이 당이 남긴 구조적 유산이다. 민주연합은 우파 정당의 계보를 1978년에서 한 번 끊어놓았다. 공화연합이 강제 해산된 자리를 이 당이 채웠으나 그 승계를 주장하지 않았고, 후신인 민주공화당 역시 민주연합과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채 출발했다. 오늘날 루이나 우파가 자신의 역사를 하나의 줄기로 설명하지 못하는 상태는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8. 여담 [편집]

  • 중앙당사가 있던 헌정로의 건물은 현재 감사원 별관으로 쓰인다. 도로명은 제헌의회가 이 거리에서 열린 데서 유래했다.
  • 당가는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었다. 1988년 해산 이후 공식적으로 폐기되었으며, 오늘날 민주공화당 행사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 창당 발기인 217명 가운데 1988년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한 인물은 89명뿐이다. 나머지는 대부분 1981년과 1983년에 이탈했으며, 일부는 이후 야당에서 활동했다.
  • 존속 기간 8년 9개월은 루이나 정당사에서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 가운데 가장 짧다.

9. 관련 문서 [편집]

10. 둘러보기 [편집]

[1] 해산이 아니라 신설 합당에 가깝다. 조직과 인력 대부분이 민주공화당으로 승계되었다.[2] 공무원·국영기업 직원의 사실상 의무 가입으로 부풀려진 수치라는 것이 정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