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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고랜드 대통령 |
대통령 관저 비공식 초상화[3] |
1. 개요 [편집]
유고랜드의 제 12대 대통령.
2. 약력 [편집]
* 2003. 2. 이래령초등학교 졸업 (5회)
* 2009.2. 시디벨아베스 국제학교 졸업 (11회)
* 2013. 2. 시디벨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졸업 (09학번)
* 2013.12. ~ 2014.1. 캣닙의힘 초대 당대표
* 2014.3. ~ 2016.3. 아인테무센트시장(초선 / 민선 6기 / 캣닙의힘)[4]
* 2014. 5. ~ 2018. 1. 캣닙의힘 사무총장
* 2016. 3.~ 2018. 6. 아인테무센트시장(재선 / 민선 7기 / 캣닙의힘)[5]
* 2018. 7. 1. ~ 2018. 10. 1. 제 12대 대통령 선거 캣닙의힘 경선 후보 (경선 1위)
* 2018. 10. 2.~ 2019. 1. 31. 제 12대 대통령 선거 캣닙의힘 대선 후보 (대선 1위)
* 2019. 2. 1. ~ 현재 유고랜드 제 12대 대통령
* 2009.2. 시디벨아베스 국제학교 졸업 (11회)
* 2013. 2. 시디벨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졸업 (09학번)
* 2013.12. ~ 2014.1. 캣닙의힘 초대 당대표
* 2014.3. ~ 2016.3. 아인테무센트시장(초선 / 민선 6기 / 캣닙의힘)[4]
* 2014. 5. ~ 2018. 1. 캣닙의힘 사무총장
* 2016. 3.~ 2018. 6. 아인테무센트시장(재선 / 민선 7기 / 캣닙의힘)[5]
* 2018. 7. 1. ~ 2018. 10. 1. 제 12대 대통령 선거 캣닙의힘 경선 후보 (경선 1위)
* 2018. 10. 2.~ 2019. 1. 31. 제 12대 대통령 선거 캣닙의힘 대선 후보 (대선 1위)
* 2019. 2. 1. ~ 현재 유고랜드 제 12대 대통령
3. 일생 [편집]
3.1. 유년기 [편집]
1990년 8월 4일 반다르아베스부 라스알카얀정(現 시디벨아베스시 반다르아베스구 진해지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조선공산당의 고위 당원이었으며, 1946년 조선공산당이 남로당으로 통합되었을 무렵 유고랜드로 이주하였다. 아마도 남로당에서 세력 다툼을 하던 도중 패배해 밀려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 또한 할아버지의 가치관을 따라 유고랜드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꽤 높은 직위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 윤슬은 초등학교 교사인 동시에 유고랜드 공산당 당원이었다. 처음엔 그의 어머니 서금자(고양이 본인에겐 외할머니)가 공산당 입당에 극구 반대하였으나, 입당하고 고위직이 되면 교사로써 버는 돈의 두배를 벌 수 있다는 말에 마지못해 허락했다. 다만 결혼과 출산으로 높은 직위까지 올라가진 못했고 권리당원 수준으로 유고랜드 공산당 당원 시절을 마쳤다.
그가 태어날 당시에는 그럭저럭 유복한 집안이었다. 당시만 해도 땅값이 유고랜드에서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인 라스알카얀에서 살고 있었으며, 집에는 넓은 마당도 딸려 있었다고.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유고랜드 내에서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정서가 퍼짐에 따라 신변에 큰 위협이 생긴 부모가 그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고랜드로 도주했다. 이 이후로 현재까지도 그의 부모의 행방은 불분명하다.
이후 그는 시디벨 동춘지구의 외할머니 댁에서 지냈다. 그의 부모와 달리 외할머니는 폐지를 주워 하루 벌고 하루 먹고 사는 수준의 저소득층이었으며, 약 10평 정도의 좁은 집에서 지냈다. 식사라곤 간장밥과 김이 전부였으며, 이 또한 두 끼도 못 먹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기반 시설도 굉장히 좋지 못했는데, 지금 동춘지구는 동춘문화마을이라 해서 전기도 잘 연결되고 수도관도 잘 깔려져 있지만 당시엔 험한 산세로 인해 전기와 수도가 자주 끊어지기 일쑤였다. 겨울엔 눈만 오면 길이 미끄러워져서 집 밖에서 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6]
1997년 이래령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생활도 그리 순탄치는 못했다. 당시만 해도 체벌 규정이 활발했던 터라 매일같이 숙제를 해오지 않은 그를 선생님들이 자주 때렸다 하며, 이 때문에 학교에 가기 싫어져 4학년때까지 학교를 자주 빼먹고는 했었다. 다만 학교 생활기록부에 따르면 성격은 활발한 편이었으며, 친구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다고 적혀져 있어 대인 관계가 나쁘진 않았던 모양. 5학년때부터는 정신을 차리고 학교를 제대로 나오기 시작했으며, 결석 일수도 많이 줄어들었다.
이때까지도 집안 사정이 나아지지 못해 학교를 마치고 나면 할머니와 함께 폐지와 빈 병 등을 주우러 가야 했다. 그런 손녀가 안타까웠던 외할머니는 연탄 배달, 전단지 배포 등도 해보았으나 허리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몇달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결국 수중의 돈은 점점 떨어져 갔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다만 그의 자서전에서는 그런 외할머니를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전부'라고 표현하는 등 긍정적으로 생각했다는 구절이 상당하다. 외할머니밖에 의지할 가족이 없었던 데다가 가난했어도 외할머니가 남 부럽지 않게 잘 챙겨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자서전 《재밌는 잡담(아마도)》에서도 가난했던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잘 대해준 외할머니에게 최대한 보답하기 위해 초등학교 졸업 후 공장 취직도 고민하고는 하였다.
2002년, 중학교 입학도 불확실해진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학교 시험 문제를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푸는 모습을 보고 공부에 대한 특출난 재능을 알아본 담임이 그에게 국제학교 입학을 제안한 것. 당시 국제학교의 위상은 웬만한 사립학교 저리가라였으며, 입학생 대부분이 국내외 명문대로 진학하는 그야말로 영재들의 모임이었다. 처음에는 생계의 어려움으로 인해 거절했으나, 학비 지원 및 대학 입학 시 등록금 전액을 지원해주겠다는 교장의 말에 결국 진학을 결정하게 되었다.
2003년 3월 시디벨아베스국제학교에 입학했다. 학비 전액 지원이라는 파격적인 혜택을 받았지만, 그와 달리 대부분의 학생들은 유력 가문 출신이거나 부유층 집안 자제들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입학 초기부터 심한 위화감을 느꼈다고 한다.
특히 낡은 교복과 헐린 구두, 도시락조차 제대로 챙겨오지 못하는 생활은 또래 학생들의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점심시간마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해 구석에서 혼자 물만 마시거나, 급식 줄에서 다른 아이들의 눈치를 보는 일이 잦았다. 이 과정에서 몇몇 학생들은 그의 사정을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춘지구 판자촌 출신"이라며 집단 따돌림을 가하기도 했다. 교실 뒷자리에서 지우개를 던지거나 신발을 숨기는 일은 일상이었고, 심지어는 화장실로 끌려가 폭행을 당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를 계기로 오히려 강한 정신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그는 "내가 당한 조롱은 내 의지와 머리를 단련하는 불꽃이었다"고 회상하며, 이 시기가 자기 자신을 단단하게 만든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적었다.
다만 이 시절에도 완전히 고립되지는 않았다. 몇몇 교사들은 그가 보여준 학업적 재능과 성실함을 높이 평가했고, 일부 또래 학생들 역시 그의 진심 어린 태도와 재치 있는 성격에 마음을 열었다. 그는 따돌림 속에서도 소수의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며, 배움에 집중하는 길을 택했다. 오히려 학업에 매진하면서 성적은 학교 상위권을 유지했고, 이로 인해 교내 장학금과 생활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2009년 국제학교 고교과정을 졸업할 무렵, 그는 졸업생 대표로 연단에 서서 연설까지 맡았을 만큼 누구보다 당당한 모습으로 학교를 떠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국제학교 시절은 눈물과 분노, 그리고 성장과 결심이 뒤섞인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국제학교 졸업 이후 시디벨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에 진학했다. 이곳에서도 생활고는 여전했지만, 철학을 통해 스스로의 사상적 기초를 다지며 훗날 정치에 뛰어들 기반을 마련해 나갔다.
그의 할아버지는 조선공산당의 고위 당원이었으며, 1946년 조선공산당이 남로당으로 통합되었을 무렵 유고랜드로 이주하였다. 아마도 남로당에서 세력 다툼을 하던 도중 패배해 밀려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 또한 할아버지의 가치관을 따라 유고랜드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꽤 높은 직위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 윤슬은 초등학교 교사인 동시에 유고랜드 공산당 당원이었다. 처음엔 그의 어머니 서금자(고양이 본인에겐 외할머니)가 공산당 입당에 극구 반대하였으나, 입당하고 고위직이 되면 교사로써 버는 돈의 두배를 벌 수 있다는 말에 마지못해 허락했다. 다만 결혼과 출산으로 높은 직위까지 올라가진 못했고 권리당원 수준으로 유고랜드 공산당 당원 시절을 마쳤다.
그가 태어날 당시에는 그럭저럭 유복한 집안이었다. 당시만 해도 땅값이 유고랜드에서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인 라스알카얀에서 살고 있었으며, 집에는 넓은 마당도 딸려 있었다고.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유고랜드 내에서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정서가 퍼짐에 따라 신변에 큰 위협이 생긴 부모가 그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고랜드로 도주했다. 이 이후로 현재까지도 그의 부모의 행방은 불분명하다.
이후 그는 시디벨 동춘지구의 외할머니 댁에서 지냈다. 그의 부모와 달리 외할머니는 폐지를 주워 하루 벌고 하루 먹고 사는 수준의 저소득층이었으며, 약 10평 정도의 좁은 집에서 지냈다. 식사라곤 간장밥과 김이 전부였으며, 이 또한 두 끼도 못 먹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기반 시설도 굉장히 좋지 못했는데, 지금 동춘지구는 동춘문화마을이라 해서 전기도 잘 연결되고 수도관도 잘 깔려져 있지만 당시엔 험한 산세로 인해 전기와 수도가 자주 끊어지기 일쑤였다. 겨울엔 눈만 오면 길이 미끄러워져서 집 밖에서 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6]
1997년 이래령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생활도 그리 순탄치는 못했다. 당시만 해도 체벌 규정이 활발했던 터라 매일같이 숙제를 해오지 않은 그를 선생님들이 자주 때렸다 하며, 이 때문에 학교에 가기 싫어져 4학년때까지 학교를 자주 빼먹고는 했었다. 다만 학교 생활기록부에 따르면 성격은 활발한 편이었으며, 친구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다고 적혀져 있어 대인 관계가 나쁘진 않았던 모양. 5학년때부터는 정신을 차리고 학교를 제대로 나오기 시작했으며, 결석 일수도 많이 줄어들었다.
이때까지도 집안 사정이 나아지지 못해 학교를 마치고 나면 할머니와 함께 폐지와 빈 병 등을 주우러 가야 했다. 그런 손녀가 안타까웠던 외할머니는 연탄 배달, 전단지 배포 등도 해보았으나 허리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몇달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결국 수중의 돈은 점점 떨어져 갔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다만 그의 자서전에서는 그런 외할머니를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전부'라고 표현하는 등 긍정적으로 생각했다는 구절이 상당하다. 외할머니밖에 의지할 가족이 없었던 데다가 가난했어도 외할머니가 남 부럽지 않게 잘 챙겨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자서전 《재밌는 잡담(아마도)》에서도 가난했던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잘 대해준 외할머니에게 최대한 보답하기 위해 초등학교 졸업 후 공장 취직도 고민하고는 하였다.
2002년, 중학교 입학도 불확실해진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학교 시험 문제를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푸는 모습을 보고 공부에 대한 특출난 재능을 알아본 담임이 그에게 국제학교 입학을 제안한 것. 당시 국제학교의 위상은 웬만한 사립학교 저리가라였으며, 입학생 대부분이 국내외 명문대로 진학하는 그야말로 영재들의 모임이었다. 처음에는 생계의 어려움으로 인해 거절했으나, 학비 지원 및 대학 입학 시 등록금 전액을 지원해주겠다는 교장의 말에 결국 진학을 결정하게 되었다.
2003년 3월 시디벨아베스국제학교에 입학했다. 학비 전액 지원이라는 파격적인 혜택을 받았지만, 그와 달리 대부분의 학생들은 유력 가문 출신이거나 부유층 집안 자제들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입학 초기부터 심한 위화감을 느꼈다고 한다.
특히 낡은 교복과 헐린 구두, 도시락조차 제대로 챙겨오지 못하는 생활은 또래 학생들의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점심시간마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해 구석에서 혼자 물만 마시거나, 급식 줄에서 다른 아이들의 눈치를 보는 일이 잦았다. 이 과정에서 몇몇 학생들은 그의 사정을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춘지구 판자촌 출신"이라며 집단 따돌림을 가하기도 했다. 교실 뒷자리에서 지우개를 던지거나 신발을 숨기는 일은 일상이었고, 심지어는 화장실로 끌려가 폭행을 당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를 계기로 오히려 강한 정신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그는 "내가 당한 조롱은 내 의지와 머리를 단련하는 불꽃이었다"고 회상하며, 이 시기가 자기 자신을 단단하게 만든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적었다.
다만 이 시절에도 완전히 고립되지는 않았다. 몇몇 교사들은 그가 보여준 학업적 재능과 성실함을 높이 평가했고, 일부 또래 학생들 역시 그의 진심 어린 태도와 재치 있는 성격에 마음을 열었다. 그는 따돌림 속에서도 소수의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며, 배움에 집중하는 길을 택했다. 오히려 학업에 매진하면서 성적은 학교 상위권을 유지했고, 이로 인해 교내 장학금과 생활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2009년 국제학교 고교과정을 졸업할 무렵, 그는 졸업생 대표로 연단에 서서 연설까지 맡았을 만큼 누구보다 당당한 모습으로 학교를 떠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국제학교 시절은 눈물과 분노, 그리고 성장과 결심이 뒤섞인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국제학교 졸업 이후 시디벨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에 진학했다. 이곳에서도 생활고는 여전했지만, 철학을 통해 스스로의 사상적 기초를 다지며 훗날 정치에 뛰어들 기반을 마련해 나갔다.
3.2. 정치 입문 [편집]
시디벨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한 그는, 가난과 따돌림의 경험을 극복하면서 한층 더 학문에 몰두했다. 철학 전공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심은 단순히 추상적 사유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와 국가의 운용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읽으며 “질서와 공동체의 안정”을 중시하는 사고를 키웠고, 에드먼드 버크의 저작에서는 급진적 개혁보다 점진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보수주의적 신념을 받아들였다. 또한 공산주의 이념이 유고랜드 사회를 어지럽히던 경험과 맞물려 강한 반(反)공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 시절의 학생 사회는 대체로 진보 성향이 강했다. 사회주의 정당 합법화, 국유화 확대, 반미 시위 등이 활발했으나 그는 이 흐름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았다. 토론 자리에서는 진보 성향 학생들의 주장에 반론을 제시하며 “정치적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나중에 자서전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나는 다수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았다. 다만 그 속에서 다른 길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적었다.
이 무렵 그는 자연스럽게 정치학과 학생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정치학과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보수 성향을 띄고 있었으며, 그는 그들과 어울려 토론하며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철학과에서 배운 이론적 토대와 정치학과 학생들의 현실 정치 감각이 결합되면서, 그는 단순한 ‘철학도’가 아니라 점차 ‘정치 지망생’으로 성장해 갔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 옆 카페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는데, 주제는 대개 “유고랜드가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였다.
장학금을 받았다 해도 생활고는 여전히 그를 짓눌렀다. 낮에는 도서관 사서 보조, 밤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했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 그는 ‘노동자’라는 존재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전까진 가난과 노동을 단순히 ‘자신이 극복해야 할 조건’ 정도로 여겼지만, 실제로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들의 삶이 어떤 희생과 절박함으로 버텨지고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면서도 한 달 수입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동료들을 보며, 그는 '노동이야말로 사회의 근간'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다만 그는 여기서 진보 성향 학생들과는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당시 학생 운동권은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체제 전복’을 외쳤지만, 그가 본 현실은 달랐다. 현장의 노동자들은 거창한 이념보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살아내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었다. 시위에 참여하기보다는 한 시간 더 일해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중요했고, 급진적 구호는 오히려 그들의 삶을 더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대학 시절의 학생 사회는 대체로 진보 성향이 강했다. 사회주의 정당 합법화, 국유화 확대, 반미 시위 등이 활발했으나 그는 이 흐름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았다. 토론 자리에서는 진보 성향 학생들의 주장에 반론을 제시하며 “정치적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나중에 자서전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나는 다수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았다. 다만 그 속에서 다른 길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적었다.
이 무렵 그는 자연스럽게 정치학과 학생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정치학과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보수 성향을 띄고 있었으며, 그는 그들과 어울려 토론하며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철학과에서 배운 이론적 토대와 정치학과 학생들의 현실 정치 감각이 결합되면서, 그는 단순한 ‘철학도’가 아니라 점차 ‘정치 지망생’으로 성장해 갔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 옆 카페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는데, 주제는 대개 “유고랜드가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였다.
장학금을 받았다 해도 생활고는 여전히 그를 짓눌렀다. 낮에는 도서관 사서 보조, 밤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했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 그는 ‘노동자’라는 존재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전까진 가난과 노동을 단순히 ‘자신이 극복해야 할 조건’ 정도로 여겼지만, 실제로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들의 삶이 어떤 희생과 절박함으로 버텨지고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면서도 한 달 수입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동료들을 보며, 그는 '노동이야말로 사회의 근간'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다만 그는 여기서 진보 성향 학생들과는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당시 학생 운동권은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체제 전복’을 외쳤지만, 그가 본 현실은 달랐다. 현장의 노동자들은 거창한 이념보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살아내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었다. 시위에 참여하기보다는 한 시간 더 일해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중요했고, 급진적 구호는 오히려 그들의 삶을 더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내 주변의 학생들은 이론 속에서 세상을 바꾸려 했지만, 나는 노동 현장에서 그 이론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았다. 이상은 언제나 눈부셨으나, 현실 앞에서는 힘을 잃었다. 그래서 나는 이상보다는 현실을, 급진보다는 점진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 경험은 그의 보수적 정치관 형성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노동을 ‘정치적 도구’로만 보는 태도를 거부하고, 오히려 노동 그 자체의 존엄성과 그 노동이 지탱하는 가정, 지역 공동체,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2013년 2월, 그는 철학과를 졸업하며 〈전통과 자유 – 유고랜드 보수의 철학적 기초〉 라는 논문을 제출했다. 이때 적은 논문은 학문적 연구일 뿐만 아니라, 장차 보수 정치 무대에서 활동할 그의 방향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선언문과도 같았다.
시디벨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본격적으로 정치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했다. 졸업 논문에서 이미 ‘유고랜드 보수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제시했던 그는, 학문을 넘어 현실 정치에서 자신의 생각을 구현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당시 유고랜드 보수 진영은 분열과 세대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기존의 보수 정당들은 기득권화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고, 청년층과 서민층을 대변할 새로운 보수 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는 이런 공백 속에서 뜻을 같이하는 정치학과 동문들과 함께 신당 창당을 추진했다. 이 신당이 바로 후일 유고랜드 보수 정치를 대표하게 되는 캣닙의힘이었다.
창당 초기 그는 20대 청년이라는 점 때문에 주목을 크게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뛰어난 연설력과 분명한 철학,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난에서 시작해 학문과 현실을 동시에 경험한 청년’이라는 스토리는 대중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기자회견장에서 “유고랜드 보수는 더 이상 기득권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삶과 노동을 지키는 보수로 거듭나야 한다”고 외쳤다. 이 발언은 당시 보수 진영 내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2013년 12월, 창당 대회에서 그는 초대 당대표에 선출되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오히려 젊음이 장점으로 작용했다. 기존 정치인들이 보여주지 못한 ‘세대 교체’와 ‘보수의 혁신’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단기간에 전국적인 주목을 받으며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그의 대표 취임 이후, 캣닙의힘은 빠르게 세를 넓혀갔다. 기존 보수층은 물론이고, 급진적 학생운동에 실망한 일부 중도층 청년들도 그의 주장에 공감하며 지지를 보냈다. 특히 그는 당의 노선을 '전통과 공동체, 그리고 서민의 삶을 지키는 보수'라고 규정하면서, 단순히 반공·반진보만을 외치는 세력이 아니라 실질적 대안을 제시하는 정당으로 당을 이끌고자 했다.
2014년, 기존 제1야당이자 대형 보수정당이었으나 세력이 크게 기울어가던 통합당과의 합당이 추진되었다. 당시 통합당은 지도부 내 갈등과 잇따른 비리 사건으로 사실상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는데, 젊은 기세로 급부상한 캣닙의힘이 통합당의 잔존 세력을 흡수하는 형식으로 합당이 성사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정치권에서 ‘보수의 세대교체를 완성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그는 더 이상 가난한 청년 철학도가 아니라, 차세대 보수 정치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과 1년 뒤, 그의 이름은 지방정치 무대에서 다시 한 번 크게 울려 퍼지게 된다.
3.3. 아인테무센트의 영웅 [편집]
2014년 3월, 그는 생애 첫 선거에 나섰다. 아인테무센트 시장 보궐선거였다. 최병한 전 시장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공석이 된 자리에, 당내에서는 통합당 시절부터 오랫동안 활동해 온 중진들이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캣닙의힘 지도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선택을 내렸다. 바로 갓 스물넷을 넘긴 청년 당대표를 후보로 공천한 것이다.
정치 경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인물을 시장 후보로 내세운 결정은 일각에서 무모하다는 비판을 불러왔지만, 젊은 리더십을 전면에 내세워 쇠락한 도시를 바꾸겠다는 전략은 시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선거 초반 그의 지지율은 10%대에 불과했다. 상대 후보들은 대통령 보좌관, 하원의장 출신 등 지역 기반이 탄탄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확성기를 들고 시장, 골목, 공장 앞을 누비며 직접 시민을 만났다. 매일같이 손에 굳은살이 배도록 악수했고, 눈을 맞추며 시민들의 고충을 들었다.
특히 그는 유세 과정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숨김없이 고백했다.
정치 경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인물을 시장 후보로 내세운 결정은 일각에서 무모하다는 비판을 불러왔지만, 젊은 리더십을 전면에 내세워 쇠락한 도시를 바꾸겠다는 전략은 시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선거 초반 그의 지지율은 10%대에 불과했다. 상대 후보들은 대통령 보좌관, 하원의장 출신 등 지역 기반이 탄탄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확성기를 들고 시장, 골목, 공장 앞을 누비며 직접 시민을 만났다. 매일같이 손에 굳은살이 배도록 악수했고, 눈을 맞추며 시민들의 고충을 들었다.
특히 그는 유세 과정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숨김없이 고백했다.
가난 때문에 하루 한 끼도 못 먹고 지낸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배고픔 속에서 희망을 배웠습니다. 여러분과 같은 서민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누구보다 서민들의 고충을 해결할 수 있는, 저 고양이에게 한 표를 행사해 주십시오.
이 진솔한 연설은 서민층의 마음을 파고들었고, 언론은 그를 ‘거리의 청년 후보’라 불렀다.
선거 막판, 그는 주거 인프라 재건과 일자리 창출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특히 방치된 공업단지를 새롭게 개발해 기업을 유치하겠다는 계획은 쇠락한 아인테무센트 경제에 활로를 찾고자 하던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국 개표 결과, 그는 기성 정치인들을 누르고 당선에 성공했다. 유고랜드 역사상 최연소 기초자치단체장이었다.
지역 언론은 이를 두고 “무명의 청년이 낡은 정치 문법을 무너뜨렸다”고 평가했으며, 중앙 언론도 그를 “보수 정치의 세대교체 아이콘”으로 주목했다.
당선 직후 그는 행정 방식을 전면 쇄신했다. 매주 시장과의 대화를 열어 주민들이 직접 찾아와 불편을 호소하도록 했고, 회의실 대신 길거리와 공사 현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했다. 전임 시장들이 청사 안에서 보고서만 받던 것과는 전혀 다른 행보였다.
그는 도심 재개발, 낙후된 상하수도 교체, 학교 및 보건소 확충, 노후 건물 안전 점검 같은 기초적이지만 절실한 과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했다. 재정이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를 수차례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고, 때로는 직접 수도에 위치한 기업들을 방문해 투자 유치를 설득하기도 했다.
가장 상징적인 업적은 아인테무센트 산업단지 조성이었다. 버려진 땅으로 방치되어 있던 공업 부지를 매입해 정비하고, 세제 혜택과 인프라 지원을 약속하며 중소기업들을 불러들였다. 불과 2년 만에 수십 개 기업이 들어왔고, 청년 고용률은 급격히 높아졌다. 한때 ‘쇠락한 도시’라 불리던 아인테무센트는 서서히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주거 안정과 도시 재생을 추진했다. 오래된 주택을 철거하고 공공임대와 분양주택을 혼합한 대규모 주거단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의 구상은 단순한 재개발이 아니라, 교육·문화시설까지 갖춘 삶의 터전을 조성하겠다는 비전이었다.
그는 가장 먼저 아인테무센트 주거단지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수십 년간 방치된 재개발 구역을 정비하고, 중앙정부와 협상해 주거 안정 지원금을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서민의 집은 투기 수단이 아니라 삶의 기반'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불과 3년 만에 첫 번째 주거단지가 완공되었고, 시민들은 반지하와 쪽방에서 벗어나 깨끗한 아파트로 이주할 수 있었다. 단지 내에는 초등학교, 도서관, 보건소가 함께 들어섰으며, 커뮤니티 센터와 공원까지 조성되어 유고랜드에거 가장 살기 좋은 도시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시민들은 그를 일 잘하는 시장, 나아가 아인테무센트의 영웅이라 불렀다. 특히 불과 20대 중반의 청년이 앞이 보이지 않던 재개발을 성사시킨 점은 지역 주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인기는 곧 전국적으로 번졌다. 언론은 매주 그의 시정 성과를 다루었고, 정치 평론가들은 '20대 청년 정치인이 지역을 변화시킨 드문 사례'라며 극찬했다. 2016년 지방선거에서 그는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으며, 이때 이미 중앙 정치권에서는 그를 차세대 대권 주자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재선 임기 중반, 더 큰 무대를 향한 도전을 준비하게 된다. 이 결정은 곧 유고랜드 정치사의 전환점이 된다.
3.4. 위대한 도전 [편집]
2016년 재선 시장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그는, 이미 중앙 정치권에서도 차세대 유력 정치인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아인테무센트에서 이룬 주거단지 재건과 도시 재생, 시민과 직접 소통하며 성과를 내는 방식은 전국적인 모델로 평가받았다.
그는 곧바로 더 큰 무대, 대통령 선거를 목표로 삼았다. 2018년으로 예정된 제12대 대통령 선거는 보수 진영 내부에서도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그는 자신이 젊고 새로운 이미지를 내세워 보수 진영의 중심에 설 수 있다고 판단했다.
2017년 말부터 그는 중앙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 당내 주요 인사들과 연쇄 면담을 갖고, 지지 기반 확대와 정책 구상을 다듬었다.
그는 기존 보수 정치인들이 내세우던 ‘안보·경제 위주’ 정책에 더해, 서민 주거 안정, 청년층 일자리, 지역 균형 발전을 핵심 공약으로 강조했다. 특히 아인테무센트에서 증명된 실행력을 바탕으로 말이 아닌 실천으로 정책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웠다.
2018년 7월 1일, 공식적으로 제12대 대통령 선거 캣닢의힘 경선 후보로 등록했다. 초기 여론조사에서는 기존 정치권 인사들에게 다소 밀리는 양상이었지만, 그는 강점을 극대화해 그것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직접 유세와 지역 순회를 돌며 전국 주요 도시와 지방을 돌며 시민들과 대화했고, SNS와 젊은층 공략을 위해 온라인 플랫폼을 적극 활용하여 젊은층과 소통했다. 또한 정책과 실적을 강조해 아인테무센트에서 성과를 낸 실천형 정치인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그 결과 경선에서 그는 57.9%, 1위를 기록하며 당 내 최종 후보로 선출되었다.
2018년 10월 2일, 그는 공식적으로 캣닢의힘 대선 후보가 되었다. 아인테무센트 시장으로서 이미 전국적 주목을 받은 그는, 단순히 지방에서 검증된 정치인이 아니라, 젊고 실행력 있는 보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전국에 각인시킬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당시 정치 상황은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같은 해 초, 자유인민연합의 지도자 와하브나 압둘 쿠리소가 장기 집권과 부정부패 논란으로 계엄령을 선포했다가 국민과 군부의 압박으로 결국 하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은 보수 진영과 국민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고, 기존 정당에 대한 불신과 혼란을 증폭시켰다. 시민들은 안정적이면서도 새로운 리더십을 갈망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대통령 선거 유세에 결정적 호재로 작용했다.
그는 전국 주요 도시와 농촌, 대학가를 순회하며 시민들과 직접 만나 의견을 청취했다. 단순히 연설만 하는 방식이 아니라, 손을 맞잡고 눈을 바라보며 소통했다. 농촌에서는 “농업과 지방 경제를 살리는 보수적 정책”을 강조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정책안에 반영했다. 도시와 대학 캠퍼스에서는 청년층과 밀접하게 소통하며 주거 안정, 일자리, 교육 문제를 직접 논의했다. 주택단지와 상가에서는 재개발과 복지, 소상공인 지원 등 현실적 문제를 중심으로 공약을 설명했다.
SNS와 온라인 플랫폼도 적극 활용했다. 당시 젊은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토론과 질의응답을 통해 청년층과의 접점을 늘렸다. 그의 솔직하고 현실적인 언어는 젊은 유권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그는 대선에서 다음과 같은 공약을 내세웠다.
그는 곧바로 더 큰 무대, 대통령 선거를 목표로 삼았다. 2018년으로 예정된 제12대 대통령 선거는 보수 진영 내부에서도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그는 자신이 젊고 새로운 이미지를 내세워 보수 진영의 중심에 설 수 있다고 판단했다.
2017년 말부터 그는 중앙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 당내 주요 인사들과 연쇄 면담을 갖고, 지지 기반 확대와 정책 구상을 다듬었다.
그는 기존 보수 정치인들이 내세우던 ‘안보·경제 위주’ 정책에 더해, 서민 주거 안정, 청년층 일자리, 지역 균형 발전을 핵심 공약으로 강조했다. 특히 아인테무센트에서 증명된 실행력을 바탕으로 말이 아닌 실천으로 정책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웠다.
2018년 7월 1일, 공식적으로 제12대 대통령 선거 캣닢의힘 경선 후보로 등록했다. 초기 여론조사에서는 기존 정치권 인사들에게 다소 밀리는 양상이었지만, 그는 강점을 극대화해 그것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직접 유세와 지역 순회를 돌며 전국 주요 도시와 지방을 돌며 시민들과 대화했고, SNS와 젊은층 공략을 위해 온라인 플랫폼을 적극 활용하여 젊은층과 소통했다. 또한 정책과 실적을 강조해 아인테무센트에서 성과를 낸 실천형 정치인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그 결과 경선에서 그는 57.9%, 1위를 기록하며 당 내 최종 후보로 선출되었다.
2018년 10월 2일, 그는 공식적으로 캣닢의힘 대선 후보가 되었다. 아인테무센트 시장으로서 이미 전국적 주목을 받은 그는, 단순히 지방에서 검증된 정치인이 아니라, 젊고 실행력 있는 보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전국에 각인시킬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당시 정치 상황은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같은 해 초, 자유인민연합의 지도자 와하브나 압둘 쿠리소가 장기 집권과 부정부패 논란으로 계엄령을 선포했다가 국민과 군부의 압박으로 결국 하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은 보수 진영과 국민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고, 기존 정당에 대한 불신과 혼란을 증폭시켰다. 시민들은 안정적이면서도 새로운 리더십을 갈망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대통령 선거 유세에 결정적 호재로 작용했다.
그는 전국 주요 도시와 농촌, 대학가를 순회하며 시민들과 직접 만나 의견을 청취했다. 단순히 연설만 하는 방식이 아니라, 손을 맞잡고 눈을 바라보며 소통했다. 농촌에서는 “농업과 지방 경제를 살리는 보수적 정책”을 강조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정책안에 반영했다. 도시와 대학 캠퍼스에서는 청년층과 밀접하게 소통하며 주거 안정, 일자리, 교육 문제를 직접 논의했다. 주택단지와 상가에서는 재개발과 복지, 소상공인 지원 등 현실적 문제를 중심으로 공약을 설명했다.
SNS와 온라인 플랫폼도 적극 활용했다. 당시 젊은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토론과 질의응답을 통해 청년층과의 접점을 늘렸다. 그의 솔직하고 현실적인 언어는 젊은 유권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그는 대선에서 다음과 같은 공약을 내세웠다.
주거 안정과 복지 공약: 중앙정부 차원의 주거 지원 및 공공임대 확대
경제 실용주의: 산업과 노동 현장을 직접 살펴보고 청년층 일자리 창출 강조
보수 혁신 이미지: 기득권 정치와 차별화된 ‘젊은 보수’ 이미지 강조
그의 공약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실현 가능한 계획을 바탕으로 설계되었다. 주거 안정과 복지 확대, 공공임대주택 확대, 주거 취약계층 지원과 도시 재생을 통한 삶의 질 향상을 약속했다. 경제 실용주의를 강조하며 산업과 노동 현장을 직접 살피고 청년 일자리와 소상공인 지원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동시에 기존 기득권 정치와 차별화된 젊고 투명한 이미지를 내세우며 실천형 정책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아인테무센트에서 직접 증명한 성과를 강조하며 말이 아닌 행동을 전면에 내세웠다. 시민들은 그의 발언과 행동에서 실천과 진심을 느꼈고, 이는 자유인민연합 사태 이후 높아진 정치 불신 속에서도 큰 신뢰를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거 기간 동안 언론은 연일 그의 움직임과 유세 현장을 다뤘다. 기존 정치 관행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그의 모습은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거리의 청년 시장, 보수의 새 얼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자유인민연합 측 후보 최원람를 높은 격차로 앞서기 시작했다.
유권자들은 특히 그의 서민과 청년 중심 공약에 주목했다. 기존 보수층과 중도층은 물론, 진보 성향 청년들 일부까지 그의 실천력과 솔직함에 끌리며 지지를 보냈다. 선거 막판에는 그의 지지세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단순한 지방 출신 후보를 넘어 전국적 정치 현상으로 부상했다.
2019년 2월 1일, 개표 결과 70.8%의 지지율을 얻으며 그는 29세의 나이로 유고랜드 제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역대 최연소 대통령이자, 아인테무센트 시장 출신으로 단기간에 전국적 주목을 받은 정치인으로 기록되었다.
제 12대 대통령 취임 선서 |
2월 2일 진행된 취임식에서 그는 국민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오늘부터 대통령으로서, 모든 국민의 삶이 존중받고 안전하게 보장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하겠습니다.
* 이후 대통령으로써 행보에 관한 내용은 고양이 정부를 참고할 것.
3.5. 개헌, 그리고 연임 [편집]
4. 고양이 정부 [편집]
5. 논란 및 사건사고 [편집]
6. 평가 [편집]
7. 여담 [편집]
8. 각종 타이틀 [편집]
9. 소속 정당 [편집]
소속 | 기간 | 비고 |
2013 - 현재 | 창당[7] |
10. 어록 [편집]
반갑습니다.일종의 트레이드마크. 보통 연설문의 첫마디로써 자주 애용한다. 다만 급하고 엄중한 상황일때는 쓰지 않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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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은 뿌리가 뽑히면 다시 자라지 못하지만 줄기만 잘리면 다시 자라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여러분, 아직 자유 유고랜드의 뿌리는 뽑히지 않았습니다. 맹세하겠습니다. 국가의 대표로써, 그리고 국민의 대변인으로써, 또한 평범한 시민으로써 이 한 몸 바쳐 나는 유고랜드의 국민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국가를 만들겠습니다.2018년 6월 30일, 제12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
11. 저술 활동 [편집]
《낙서》, 2014년 8월 23일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어!!!!!!》, 2015년 11월 9일
《대충 건방진 강아지가 나오는 책》, 2015년 12월 19일
《마침표》, 2016년 8월 30일
《재밌는 잡담(아마도)》, 2020년 6월 17일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어!!!!!!》, 2015년 11월 9일
《대충 건방진 강아지가 나오는 책》, 2015년 12월 19일
《마침표》, 2016년 8월 30일
《재밌는 잡담(아마도)》, 2020년 6월 17일
12. 방송 출연 [편집]
13. 둘러보기 [편집]
[1] 유고랜드 독립 후 출생한 최초의 대통령이다.[2] 유고랜드 국가원수 중 최장기 집권.[3] 2024년 1월 1기 정부가 끝날 때 쯤 그려진 그림. 공식 초상화는 관례에 따라 임기가 끝난 뒤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4] 2013년 2월 재보궐선거에서 최병한 전 시장의 사망으로 인해 공석이 된 아인테무센트시장 출마 후 당선.[5] 제 12회 대통령 선거를 위한 조기 사퇴.[6] 현재의 인프라는 대부분 동춘문화마을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2010년대에 깔린 것이다.[7] 2013년 12월 10일 자신의 대학교 동기들과 캣닙의힘을 창당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