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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2.13 군사반란 十二十三軍事叛亂 Coup of December Thirteen | |
![]() 벨포르 시청을 장악한 반란군 | |
일시 | |
1949년 12월 13일(76주년) ~ 12월 14일 | |
장소 | |
벨포르 시 | |
원인 | |
군부의 정권 찬탈 기도 | |
교전군 | |
진압군 | 반란군 |
루이나 임시정부 루이나 국군 | 군부(친 비달파) |
결과 | |
반란군 진압 실패, 비달의 군권 장악 | |
영향 | |
피해 | |
사망자 30명 부상자 최소 48명 | 사망자 13명 부상자 최소 20명 |
1. 개요 [편집]
12.13 군사반란은 1949년 12월 13일 루이나 벨포르 시에서 발생한 군부 주도의 정권 탈취 사건이다. 반란군은 친비달파 장교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루이나 국군 내 일부 부대가 이에 동조하여 벨포르 시청과 주요 정부 기관을 신속히 점거했다. 당시 루이나 임시정부는 반란 소식을 접하고 진압을 시도했으나, 지휘 체계 혼란과 일부 부대의 이탈로 인해 방어에 실패했다. 결국 12월 14일, 임시정부는 붕괴되었고 반란군은 루이나의 실질적인 통치권과 군권을 장악하였다.
12.13 군사반란은 이후 루이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바꿨으며, 국민 저항운동인 12.23 민주시위와 장기적으로는 10.24 시민혁명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2.13 군사반란은 이후 루이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바꿨으며, 국민 저항운동인 12.23 민주시위와 장기적으로는 10.24 시민혁명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2. 가담자 목록 [편집]
3. 배경 [편집]
1949년 8월 27일 오전 4시, 루이나 초대 대통령 조지 레이먼드가 암살되었다는 비보가 전해지자, 국방부 회의실에서는 각료들이 서둘러 비상조치에 돌입했다.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청장이었던 시몬 하워드는 "조지 레이먼드 대통령이 서거했고, 범인은 정보국장 루크 맥스웰이다"라고 알리며,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국가원수직이 비어 있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헌법 규정에 따라 국무총리 리처드 에반스가 루이나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결국 리처드 에반스는 대통령 권한대행 직을 수락했고, 곧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루이나 육군참모총장 에드워드 스펜서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정국을 함께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리처드 에반스는 권한대행 수락 직후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부터 서부 해안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계엄법 제9조에 따라 전국이 아닌 부분 계엄일 경우 군 통제권이 국방장관에게 넘어간다는 규정을 간과한 조치였다. 에반스는 정치에 휘말리는 것을 꺼려 정치적 부담을 피하려 했지만, 그로 인해 실질적 권력은 계엄사령부로 넘어가게 되었고,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군보안사령부 사령관 비달 파브르가 점점 권력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마이클 러틀리지는 비달 파브르와 개인적 친분이 깊었기에, 후일 계엄사령관 에드워드 스펜서와 비달 간의 권력투쟁이 벌어질 때 비달을 적극적으로 감싸게 된다.
한편 에반스는 원칙론자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 했기에, 계엄사령부의 운영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모든 군사 보고를 국방장관을 통해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이로 인해 비달 파브르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수사와 정보기관을 장악할 기회를 얻었고, 군부 내 실질적인 실력자가 되어갔다.
그 당시 루이나 육군은 비밀 사조직인 "노던 소사이어티"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비달 파브르와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었고, 주요 부대와 요직들을 하나둘 차지하고 있었다. 9보병사단은 비달의 절친인 토머스 브래너가 사단장으로 있었으며, 특수전사령부는 사령관만 찰스 밀턴일 뿐, 여단장들은 모두 노던 소사이어티 출신인 헨리 파이크, 빌리 셔먼, 아이작 루이스로 포진해 있었다. 수도경비사령부 역시 사령관은 로버트 맥켄지였지만, 실질적 권한은 참모장 노먼 하트에게 있었고, 그는 친비달 인사로 분류되었다.
그 사이 대통령 경호를 맡던 경호실장 루이스 고든과 정보국장 루크 맥스웰이 동시에 무력화되면서, 사실상 정보 활동을 담당할 기관은 군보안사령부 하나만 남게 되었다. 비달 파브르는 이 상황을 이용해 검찰, 경찰, 중앙정보부, 군검찰까지 사실상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8월 28일, 비달은 수사를 명목으로 중앙정보부 부국장 제럴드 퀸, 검찰총장 사이먼 콜, 치안본부장 애런 블레어를 소환해, 협조하지 않으면 체포할 수 있다고 압박했다. 이에 이들 기관 수장들은 비달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이후 비달은 정부 각 부처 차관들까지 호출하여 사실상 '실질 대통령'처럼 군림하기 시작했다.
비달은 수사 중 대통령 비서실장 벤자민 크로포드의 집에서 거액의 수표 뭉치(약 9억 루이나 달러 상당)를 발견했다. 이 중 6억을 대통령 유족인 소피 레이먼드에게 전달하고, 5000만을 마이클 러틀리지에게 넘겼으며, 마지막 2억을 합참의장이자 계엄사령관인에드워드 스펜서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스펜서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비달의 월권을 질타했다.
에드워드 스펜서는 이러한 비달의 독주를 제어하고자 군 인사 개편을 계획했다. 특히 수도경비사령관에는 강직한 인물로 평가받던 다니엘 모건 소장을 임명해 노던 소사이어티의 움직임을 억제하려 했다. 또한 비달을 북부 국경방어사령관으로 좌천시키려는 계획도 비밀리에 추진했다.
그러나 국방차관 피터 맥그로를 통해 이 계획이 노던 소사이어티 쪽으로 새어 나갔고, 이미 군 내부 요직을 장악하고 있던 노던 소사이어티는 스펜서의 움직임을 빠르게 포착했다. 이로 인해 루이나는 머지않아 군부 내 심각한 충돌과 대규모 군사반란을 맞이하게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리처드 에반스는 권한대행 수락 직후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부터 서부 해안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계엄법 제9조에 따라 전국이 아닌 부분 계엄일 경우 군 통제권이 국방장관에게 넘어간다는 규정을 간과한 조치였다. 에반스는 정치에 휘말리는 것을 꺼려 정치적 부담을 피하려 했지만, 그로 인해 실질적 권력은 계엄사령부로 넘어가게 되었고,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군보안사령부 사령관 비달 파브르가 점점 권력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마이클 러틀리지는 비달 파브르와 개인적 친분이 깊었기에, 후일 계엄사령관 에드워드 스펜서와 비달 간의 권력투쟁이 벌어질 때 비달을 적극적으로 감싸게 된다.
한편 에반스는 원칙론자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 했기에, 계엄사령부의 운영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모든 군사 보고를 국방장관을 통해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이로 인해 비달 파브르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수사와 정보기관을 장악할 기회를 얻었고, 군부 내 실질적인 실력자가 되어갔다.
그 당시 루이나 육군은 비밀 사조직인 "노던 소사이어티"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비달 파브르와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었고, 주요 부대와 요직들을 하나둘 차지하고 있었다. 9보병사단은 비달의 절친인 토머스 브래너가 사단장으로 있었으며, 특수전사령부는 사령관만 찰스 밀턴일 뿐, 여단장들은 모두 노던 소사이어티 출신인 헨리 파이크, 빌리 셔먼, 아이작 루이스로 포진해 있었다. 수도경비사령부 역시 사령관은 로버트 맥켄지였지만, 실질적 권한은 참모장 노먼 하트에게 있었고, 그는 친비달 인사로 분류되었다.
그 사이 대통령 경호를 맡던 경호실장 루이스 고든과 정보국장 루크 맥스웰이 동시에 무력화되면서, 사실상 정보 활동을 담당할 기관은 군보안사령부 하나만 남게 되었다. 비달 파브르는 이 상황을 이용해 검찰, 경찰, 중앙정보부, 군검찰까지 사실상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8월 28일, 비달은 수사를 명목으로 중앙정보부 부국장 제럴드 퀸, 검찰총장 사이먼 콜, 치안본부장 애런 블레어를 소환해, 협조하지 않으면 체포할 수 있다고 압박했다. 이에 이들 기관 수장들은 비달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이후 비달은 정부 각 부처 차관들까지 호출하여 사실상 '실질 대통령'처럼 군림하기 시작했다.
비달은 수사 중 대통령 비서실장 벤자민 크로포드의 집에서 거액의 수표 뭉치(약 9억 루이나 달러 상당)를 발견했다. 이 중 6억을 대통령 유족인 소피 레이먼드에게 전달하고, 5000만을 마이클 러틀리지에게 넘겼으며, 마지막 2억을 합참의장이자 계엄사령관인에드워드 스펜서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스펜서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비달의 월권을 질타했다.
에드워드 스펜서는 이러한 비달의 독주를 제어하고자 군 인사 개편을 계획했다. 특히 수도경비사령관에는 강직한 인물로 평가받던 다니엘 모건 소장을 임명해 노던 소사이어티의 움직임을 억제하려 했다. 또한 비달을 북부 국경방어사령관으로 좌천시키려는 계획도 비밀리에 추진했다.
그러나 국방차관 피터 맥그로를 통해 이 계획이 노던 소사이어티 쪽으로 새어 나갔고, 이미 군 내부 요직을 장악하고 있던 노던 소사이어티는 스펜서의 움직임을 빠르게 포착했다. 이로 인해 루이나는 머지않아 군부 내 심각한 충돌과 대규모 군사반란을 맞이하게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3.1. 계엄사령관 체포 계획 [편집]
결코 좌시할 생각이 없었던 비달 파브르와 노던 소사이어티는 에드워드 스펜서 총장이 자신들을 숙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선수를 치기로 결심했다. 비달은 10.27 사건 당시 스펜서가 조지 레이먼드 대통령 시해범인 루크 맥스웰과 모종의 연관이 있었다는 의혹을 퍼뜨리면서, 스펜서를 강제 제거하고 군부의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하려 했다.
비달은 노던 소사이어티 간부들과 긴밀히 회의를 거쳐, 1949년 12월 13일을 기해 수도권의 핵심 부대를 움직여 작전을 개시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의 표면적 명분은 "조지 레이먼드 암살 사건과 관련해 에드워드 스펜서를 조사하기 위한 긴급조치"였다. 당시 군부와 정부는 이미 합동수사본부를 통해 스펜서에 대해 '혐의 없음'을 공식 발표한 상태였지만, 비달은 일방적으로 "새로운 수사 결과, 스펜서가 루크 맥스웰과 사전 접촉했던 정황이 포착됐다"고 주장하며 강제 체포를 시도했다.
설령 반란군 주장대로 스펜서의 혐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가 아무리 대통령의 사망으로 인한 비상계엄 하라고 한들, 혐의자를 합동수사본부로 소환하여 조사하려면 당시의 법률에 의하더라도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임의 동행에 의하는 것이 원칙이고, 강제로 연행하려면 검찰관이 청구하여 관할관이 발부한 구속영장이 있어야 했다. 만에 하나 긴급한 사유로 사후영장을 받는다고 해도 검찰관의 정식 지휘를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당시 반란군 측은 절차를 거쳐 관할관의 영장을 발부받기는커녕 검찰관의 긴급구속 지휘를 받지도 못한 상태였고, 계엄사령관은 자신들의 상관이므로 군 지휘 체계에 따른 명령에 의해 출석을 강제할 수도 없었다. 결국 반란군은 무장한 헌병대 병력으로 공관촌을 점거하고 보안사령부 대령을 위시한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이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진입해 에드워드 스펜서에 대한 강제 연행을 시도하면서 계엄사령관의 상관인 대통령의 사후재가를 동시에 받아 자신들의 불법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비달은 노던 소사이어티 간부들과 긴밀히 회의를 거쳐, 1949년 12월 13일을 기해 수도권의 핵심 부대를 움직여 작전을 개시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의 표면적 명분은 "조지 레이먼드 암살 사건과 관련해 에드워드 스펜서를 조사하기 위한 긴급조치"였다. 당시 군부와 정부는 이미 합동수사본부를 통해 스펜서에 대해 '혐의 없음'을 공식 발표한 상태였지만, 비달은 일방적으로 "새로운 수사 결과, 스펜서가 루크 맥스웰과 사전 접촉했던 정황이 포착됐다"고 주장하며 강제 체포를 시도했다.
설령 반란군 주장대로 스펜서의 혐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가 아무리 대통령의 사망으로 인한 비상계엄 하라고 한들, 혐의자를 합동수사본부로 소환하여 조사하려면 당시의 법률에 의하더라도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임의 동행에 의하는 것이 원칙이고, 강제로 연행하려면 검찰관이 청구하여 관할관이 발부한 구속영장이 있어야 했다. 만에 하나 긴급한 사유로 사후영장을 받는다고 해도 검찰관의 정식 지휘를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당시 반란군 측은 절차를 거쳐 관할관의 영장을 발부받기는커녕 검찰관의 긴급구속 지휘를 받지도 못한 상태였고, 계엄사령관은 자신들의 상관이므로 군 지휘 체계에 따른 명령에 의해 출석을 강제할 수도 없었다. 결국 반란군은 무장한 헌병대 병력으로 공관촌을 점거하고 보안사령부 대령을 위시한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이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진입해 에드워드 스펜서에 대한 강제 연행을 시도하면서 계엄사령관의 상관인 대통령의 사후재가를 동시에 받아 자신들의 불법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3.2. 작전 개시 [편집]
1949년 12월 12일 저녁, 비달 파브르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노던 소사이어티 소속 주요 장교들은 각자 준비를 마친 후 벨포르 남부 요새 인근에 위치한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 막사에 집결하였다. 당시 제30경비단과 제33경비단은 수도 방위의 핵심 전력으로, 수경사 소속이기는 했으나 사령관조차 무장 출입을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독립성이 강한 부대였기 때문에 은밀히 병력을 모으기에 적합했다. 이 날의 작전명은 ‘생일집 잔치’였다. 본래 계획은 군보안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과 수경사 헌병대를 동원하여 육군참모총장 에드워드 스펜서의 공관에서 그를 강제로 연행한 뒤 합동수사본부로 압송하고, 동시에 비달 파브르가 대통령 권한대행 리처드 에반스에게 직접 찾아가 ‘추가 혐의 수사’를 위한 체포 재가를 받아 이 작전을 합법화하는 것이었다.
합동수사본부의 실무를 총괄하던 군보안사 인사처장 헨리 파이크 대령은 수사관들과 33헌병대를 이끌고 스펜서 참모총장 공관으로 향했다. 명목상 이유는 ‘조지 레이먼드 대통령 암살 사건과 관련된 추가 진술 조사’였다. 그러나 공관에 진입한 반란군은 스펜서에게 “이미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졌다”며 거짓을 고했고, 스펜서 측 참모가 대통령 승인 여부를 전화로 확인하려 하자 곧바로 총격을 가해 제압하였다. 이어서 외부에서 대기 중이던 30경비단 병력이 공관 창문을 깨고 돌입하여 무장 점거를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계엄사령관이자 자신들의 상관인 스펜서 장군의 뺨에 총구를 들이대며 강제로 승용차에 태워 합동수사본부로 납치하는 초법적 만행을 저질렀다.
이 작전의 핵심은 스펜서 연행과 동시에 대통령 권한대행 리처드 에반스의 재가를 얻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원래 계획과 달리 흘러갔다. 에반스는 비달의 진술만으로는 결코 스펜서 체포를 승인할 수 없으며, 국방장관 마이클 러틀리지와 협의를 거친 후에야 검토할 수 있다고 버텼다. 이로 인해 반란군은 합법적 명분 확보에 실패했으며, 이미 무력을 동원하여 스펜서를 연행한 상황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의 정치적 재가를 확보하지 못한 채 사실상 ‘완전한 군사반란’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마이클 러틀리지 국방장관은 당시 스펜서 공관 인근에 있었으나 총성이 울리자 가족을 데리고 인근 대학 캠퍼스로 피신하였다. 이후 그는 군부의 이상 상황을 직감하고 예하 부대에 자의적인 행동을 삼가도록 명령하는 한편, 합동방위 체제 하에 있던 연합사 지휘부에도 야전부대 이동 권한을 요청하여 쿠데타 저지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상황을 명확히 알 수 없었던 연합사령관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반란군이 국방부 청사까지 장악하면서 러틀리지는 체포되었다.
한편, 긴박했던 스펜서 연행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12월 12일 밤, 파이크 대령이 지휘하는 합수부 수사관들은 군보안사 소속 차량 2대에 분승하여 벨포르 외곽의 참모총장 공관으로 출발했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33헌병대 병력은 마이크로버스를 이용해 뒤따랐다. 합수부 수사관들은 ‘급히 보고드릴 사항이 있다’며 미리 연락해 방문 약속을 잡아둔 상태였고, 이로 인해 공관 정문을 무리 없이 통과하여 관저로 진입할 수 있었다. 곧이어 33헌병대 차량도 정문에 도착했는데, 헌병들이 경비를 서던 해병대 경비병들에게 “교대 명령을 받았다”고 속이며 접근했다. 해병대 경비병들이 상부에 확인하려 하자 헌병들은 기습적으로 그들을 무장 해제 및 포박하여 초소 내부에 감금시켰고, 정문을 완전히 장악한 후 주변에 경계선을 형성하였다.
한편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과 함께 참모총장 공관 안으로 들어간 헨리 파이크 대령과 노먼 하트 참모장은, 에드워드 스펜서 총장에게 “조지 레이먼드 대통령 암살 사건과 관련된 추가 진술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며 군보안사 합수부로의 동행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스펜서 총장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파이크 대령은 “임의 동행을 거부한다면 강제로라도 연행할 수 있는 대통령 권한대행의 재가를 이미 받았다”고 주장하며 억지로 데려가려 했다.
스펜서는 이를 믿지 않고 “대통령 재가 여부를 직접 확인해야 한다”며 전속부관인 아이작 모건 소령(육사 11기)에게 대통령 권한대행 관저에 전화를 걸어 확인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때 합수부 장교 한 명이 이를 제지하고 협박하기 위해 권총을 발사해 모건 소령이 총상을 입었다. 이어 참모총장 경호장교였던 앤드류 클라크 대위(육사 14기)가 권총을 꺼내 합수부 수사관들을 향해 겨누자, 즉각 총격이 오가며 클라크 대위 역시 중상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33헌병대를 지휘하던 로버트 해밀턴 대령도 유탄에 맞아 부상을 당하는 혼란이 발생했다.
이 같은 충돌 끝에 스펜서 총장은 강제로 끌려나와 승용차에 태워졌다. 합수부 차량 두 대는 곧바로 공관을 떠나 벨포르 남쪽에 위치한 군보안사 분실로 향했다. 그러나 헌병대를 직접 지휘해야 할 해밀턴 대령은 중상을 입어 들것에 실려 나갔고, 합수부 장교들은 총격과 피신 소동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 결과, 관저 밖에 배치되어 있던 33헌병대 병력에게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한 채 자신들만 떠나버렸다. 지시를 받지 못한 헌병들은 한동안 당황해하다가 결국 자체 판단으로 철수해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이동을 시도했다.
이 와중에 공관 관리관인 벤자민 로드 준위가 몰래 공관을 빠져나와 인근 해병대 경비대 막사로 달려가 “무장 괴한들이 총장을 납치하려 한다”고 급히 알렸다. 신고를 접수한 해병대 경비대는 즉시 출동해 공관 정문 초소를 탈환하고 정문을 봉쇄했다. 이들은 공관 영내에 남아 있던 33헌병대 마이크로버스를 포위했으며, 막 출발하려던 헌병들에게 사격을 가해 이들을 버스 안에 고립시켰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스펜서를 태운 합수부 차량은 이미 공관을 떠난 뒤였다. 합수부 차량이 정문을 벗어난 지 약 10분 뒤 해병대 경비대가 도착했기 때문에, 정작 스펜서 본인은 이미 납치된 상태였다.
총성이 울리자 경찰과 벨포르 해군본부 기동타격대, 공군본부 긴급대응부대, 국방부와 수도경비사령부의 5분 대기조 병력이 차례로 출동하였다. 또한 합동수사본부 측은 33헌병대 병력이 뒤따라오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닫고, 30경비단 예비병력에게 “즉시 철수시켜라”는 명령을 내려 다시 공관에 투입했다. 이로 인해 새벽까지 공관 정문 일대에는 서로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못한 채 긴장 상태에 놓인 여러 부대가 뒤엉켜 대치하는 혼란이 벌어졌다. 총성이 난 급박한 상황에서 출동한 병력들은 이 사태가 반란인지, 혹은 외부 침투에 의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태였으며, 상당수는 이 사태를 “북부 무장공비의 기습”으로 오인하기도 했다.
아침 5시 30분경 국방차관 피터 맥그로가 공관 측에 전화를 걸어 “현장 병력은 모두 아군이며 상황은 정리되었다. 출동 병력은 원대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대치는 해소되었다.
한편, 혹시 반란에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군 수뇌부 인사들―특수전사령관 다니엘 모건 소장, 수도경비사령관 로버트 맥켄지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프랭크 하워드 준장―은 사건 당일 저녁, 미리 비밀 연회장으로 초청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는 군보안사 참모장 노먼 하트 준장이 대신 접대하며 이들의 움직임을 묶어 두었다. 또한 당시 수경사 헌병단장이던 에릭 브라운 대령 역시 자리에 있었는데, 그는 노던 소사이어티 소속은 아니었지만 반란군은 그의 존재를 이용해 모건·맥켄지·하워드 장군의 동태를 감시했다.
1949년 12월 12일 저녁, 수도권 주요 지휘관들이 비밀리에 연회장에 모이게 된 배경은 단순한 회식 이상의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다니엘 모건 수도경비사령관의 회고록 《12.13 반란과 나》에 따르면, 이미 12월 초부터 비달 파브르는 반란 준비를 치밀하게 진행하며 주요 장교들을 회식 자리에 묶어 두려는 계획을 세웠다. 12월 5일, 그는 자신의 측근을 통해 “연말 정산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거액의 수표를 전달했고, 이어 12월 8일에는 노먼 하트 군보안사 참모장을 통해 12일 연회 약속을 잡았다. 이는 12월 5일 이전부터 이미 거사 날짜가 정해졌음을 의미하며, 단순한 ‘우발적 반발’이 아니라 기획된 쿠데타였음을 방증한다.
연회 장소는 벨포르 시 외곽의 민간 주택으로, 군 내부에서는 ‘민 마담의 집’이라 불렸다. 이곳은 단순한 술자리가 아닌, 노던 소사이어티가 은밀히 회합을 가지며 반란을 모의한 공간이었다. 훗날 이 주택은 루이나 정치사의 ‘요정 정치’의 상징으로 회자되었으나, 당시에는 사실상 쿠데타의 지휘소였다.
연회에는 수도경비사령관 다니엘 모건 소장, 특수전사령관 로버트 맥켄지 소장, 육군 헌병감 프랭크 하워드 준장이 초청되어 있었다. 이들은 반란에 저항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어, 노던 소사이어티 측은 이들을 ‘연회’라는 명목으로 한자리에 묶어 두려 한 것이다. 이 자리에는 수도경비사 헌병단장이던 에릭 브라운 대령도 참석했는데, 그는 노던 소사이어티 소속은 아니었으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사실상 감시자 역할을 했다.
모건은 연회에 들어선 직속 부하 브라운 대령을 보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누가 허락했다고 여기에 와 있느냐?”며 호통을 쳤다. 이에 브라운은 “비달 장군이 제 진급을 축하해 주신다고 해서 왔습니다”라고 답했으나, 모건은 혀를 차며 “그걸 받으러 오는 네놈이나, 직속상관 제치고 술을 사주겠다는 비달이나 똑같이 문제다”라고 꾸짖었다. 옆에 있던 맥켄지 소장이 분위기를 무마하며 “겸사겸사 축하해 주자”며 자리를 수습했으나, 연회의 불순한 성격은 명확했다.
한편, 이 연회는 단순한 술자리가 아니었다. 비달은 참석자들이 자리를 비우지 못하게 하여, 같은 시각 진행될 스펜서 총장 연행 작전(‘생일집 잔치’)에 대응할 가능성을 차단하려 했다. 실제로 참석자들은 오후 7시까지 식사하며 비달을 기다렸지만, 정작 비달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노먼 하트가 접대를 맡았다. 그러나 하트는 노던 소사이어티의 일원은 아니었기 때문에 완전한 정보 통제가 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허점이 생겼다.
저녁 무렵, 프랭크 하워드 헌병감에게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이 발생했고, 스펜서가 납치되었다”는 보고 전화가 걸려왔다. 소식을 접한 모건, 맥켄지, 하워드 세 장군은 즉시 자리를 박차고 복귀했다. 모건은 수도경비사령부로, 맥켄지는 특수전사령부로, 하워드는 육군본부로 각각 복귀하였다.
연회장에 함께 있던 에릭 브라운 헌병단장은 사령관을 따라 수도경비사령부로 복귀하던 도중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반란군 측은 “연회에서 술을 마신 다니엘 모건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에 취해 앞뒤 분간도 못한 채 즉흥적으로 무력 진압을 명령했다”는 주장을 내세웠으나, 이는 사실과는 전혀 달랐다. 당시 모건을 비롯한 일행은 비달 파브르를 기다리느라 술은 거의 입에도 대지 못했고, 기다리다 지친 로버트 맥켄지 특수전사령관이 “비달이 늦을 것 같으니 우리끼리 한 잔 하자”는 말을 꺼냈을 때 비로소 잔을 들었을 뿐이었다. 실제 회고에 따르면 사태 발생까지의 간격은 불과 10여 분 내외였고, 이들은 술잔을 비우기도 전에 급보를 듣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한다.
세 장군―모건, 맥켄지, 프랭크 하워드 헌병감―은 모두 강직하고 고지식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무리 비달이 후배라 하더라도, 그가 오지도 않은 자리에서 곤드레만드레 취해 있을 인물들이 아니었다. 육군본부는 처음에 스펜서 총장 납치 소식을 그의 부인의 전화로 접했는데, 납치 세력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 북한 무장공비의 소행으로 오인했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곧 합동수사본부, 즉 군보안사 소속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정황이 종합되면서 비달과 노던 소사이어티가 벌인 일임이 드러났다. 이에 육군본부는 전군에 비상을 걸고 대응에 나섰다.
모건은 사령부로 복귀하면서 참모장 윌리엄 로스 준장을 통해 헌병부단장 사이먼 콜 중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는 경장갑차 2대와 헌병특공대 1개 소대, 부상자 구조용 구급차 1대를 편성하여 기동타격대를 구성, 참모총장 공관으로 급파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사령부로 복귀한 뒤 로스 준장으로부터 30경비단에 노던 소사이어티 일당이 집결해 있다는 보고를 받자, 곧장 30경비단장 토머스 브래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수화기를 든 것은 브래너가 아니라 그 옆에 있던 노던 소사이어티 핵심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가? 30경비단으로 와서 직접 보면 스펜서 총장 체포의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모건은 격노하며 “이건 명백한 반란이다. 너희들에게 선전포고한다! 난 죽기로 결심했다!”라고 외친 뒤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이에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노던 소사이어티 세력은 모건이 곧 수경사 병력을 동원해 공격해 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긴급 대비태세에 들어갔다. 한편 비달 파브르는 자신이 장악한 대통령 경호실 소속 병력을 이용해 권한대행 리처드 에반스가 있던 총리공관을 확보했다. 원래 총리공관은 육군본부 헌병대가 경비를 맡고 있었으나, 비달은 대통령경호실 병력을 투입해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공관을 장악하였다.
리처드 에반스는 총리공관에 사실상 구금된 채 스펜서 체포에 대한 사후 재가를 강요받았으나, 그는 “국방장관 마이클 러틀리지의 동의 없이는 결코 허가할 수 없다”고 끝내 버텼다. 반란군은 숨어버린 국방장관을 찾아 재가를 받아내려 혈안이 되었고, 육군본부는 이들이 장관을 찾기 전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노던 소사이어티는 군보안사의 감청망과 광범위한 인맥을 통해 이미 정보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며, 조직 역시 육군본부보다 훨씬 폭넓게 뻗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정규 군 지휘부는 정보·통신망을 차단당한 채 우왕좌왕했고, 반대로 반란군은 정상적인 군 명령 체계를 무시하고 병력을 마음대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강직한 군인으로 평가받던 모건 수도경비사령관은 이에 격렬히 반발하며 합동수사본부 세력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수도권 충정부대에 즉각 병력 출동을 지시하며 반격에 나서고 있었다.
비달 파브르와 노던 소사이어티 측은 다니엘 모건 사령관이 수도권 병력 동원을 시도하자 순간 당황했으나, 곧바로 자신들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스펜서 총장의 연행을기정사실화하고 군 지휘권을 장악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표면적으로는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자”는 명분을 내세워 육군본부의 병력 출동을 지연시키는 신사협정을 가장했지만, 이면에서는 공수여단과 전방 병력을 본격적으로 동원하여 핵심 지휘부를 제압하려는 작전이 이미 가동되고 있었다.
비달은 사전에 1, 3, 5 공수여단장들에게 일제히 지시를 내려두었다. 그 결과 3공수여단장 브랜든 슈라이버 준장과 5공수여단장 제임스 고든 준장은 비상령 발령 직후 각각 자신의 부대로 복귀해 병력을 장악했으며, 1공수여단장 피터 할로웨이 준장은 벨포르강의 주요 다리가 모건의 수도경비사 통제하에 막히자 부교를 우회하여 귀대하였다. 각 부대에 내려진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제1공수여단 :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여 군 통수권을 장악한다.
*제3공수여단 : 자기 여단 영내에 있는 특수전사령부 본부를 급습, 로버트 맥켄지 특수전사령관을 체포한다.
*제5공수여단 : 도심지 요충지인 하이드파크 운동장으로 출동하여 대기한다.
*노던 소사이어티 소속 장교들 : 수도경비사 헌병단을 은밀히 장악하고, 모건 진영 지휘부에 속한 주요 인사들을 제압한다.
이와 함께 비달은 공수부대 외에도 친위 세력의 병력을 대거 동원했다. 노던 소사이어티 핵심인사였던 리처드 노튼 소장이 지휘하는 제9보병사단 예하 29·30연대 각 1개 대대, 30사단 90연대, 제2기갑여단의 전차 1개 대대가 출동 명령을 받았다. 이 가운데 제9사단은 루이나 최전방 예비사단으로, 평시작전통제권이 연합사령부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주둔지 이탈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비달은 이를 무단으로 출동시켜 벨포르 중심부로 진격시켰다.
합동수사본부의 실무를 총괄하던 군보안사 인사처장 헨리 파이크 대령은 수사관들과 33헌병대를 이끌고 스펜서 참모총장 공관으로 향했다. 명목상 이유는 ‘조지 레이먼드 대통령 암살 사건과 관련된 추가 진술 조사’였다. 그러나 공관에 진입한 반란군은 스펜서에게 “이미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졌다”며 거짓을 고했고, 스펜서 측 참모가 대통령 승인 여부를 전화로 확인하려 하자 곧바로 총격을 가해 제압하였다. 이어서 외부에서 대기 중이던 30경비단 병력이 공관 창문을 깨고 돌입하여 무장 점거를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계엄사령관이자 자신들의 상관인 스펜서 장군의 뺨에 총구를 들이대며 강제로 승용차에 태워 합동수사본부로 납치하는 초법적 만행을 저질렀다.
이 작전의 핵심은 스펜서 연행과 동시에 대통령 권한대행 리처드 에반스의 재가를 얻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원래 계획과 달리 흘러갔다. 에반스는 비달의 진술만으로는 결코 스펜서 체포를 승인할 수 없으며, 국방장관 마이클 러틀리지와 협의를 거친 후에야 검토할 수 있다고 버텼다. 이로 인해 반란군은 합법적 명분 확보에 실패했으며, 이미 무력을 동원하여 스펜서를 연행한 상황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의 정치적 재가를 확보하지 못한 채 사실상 ‘완전한 군사반란’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마이클 러틀리지 국방장관은 당시 스펜서 공관 인근에 있었으나 총성이 울리자 가족을 데리고 인근 대학 캠퍼스로 피신하였다. 이후 그는 군부의 이상 상황을 직감하고 예하 부대에 자의적인 행동을 삼가도록 명령하는 한편, 합동방위 체제 하에 있던 연합사 지휘부에도 야전부대 이동 권한을 요청하여 쿠데타 저지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상황을 명확히 알 수 없었던 연합사령관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반란군이 국방부 청사까지 장악하면서 러틀리지는 체포되었다.
한편, 긴박했던 스펜서 연행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12월 12일 밤, 파이크 대령이 지휘하는 합수부 수사관들은 군보안사 소속 차량 2대에 분승하여 벨포르 외곽의 참모총장 공관으로 출발했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33헌병대 병력은 마이크로버스를 이용해 뒤따랐다. 합수부 수사관들은 ‘급히 보고드릴 사항이 있다’며 미리 연락해 방문 약속을 잡아둔 상태였고, 이로 인해 공관 정문을 무리 없이 통과하여 관저로 진입할 수 있었다. 곧이어 33헌병대 차량도 정문에 도착했는데, 헌병들이 경비를 서던 해병대 경비병들에게 “교대 명령을 받았다”고 속이며 접근했다. 해병대 경비병들이 상부에 확인하려 하자 헌병들은 기습적으로 그들을 무장 해제 및 포박하여 초소 내부에 감금시켰고, 정문을 완전히 장악한 후 주변에 경계선을 형성하였다.
한편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과 함께 참모총장 공관 안으로 들어간 헨리 파이크 대령과 노먼 하트 참모장은, 에드워드 스펜서 총장에게 “조지 레이먼드 대통령 암살 사건과 관련된 추가 진술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며 군보안사 합수부로의 동행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스펜서 총장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파이크 대령은 “임의 동행을 거부한다면 강제로라도 연행할 수 있는 대통령 권한대행의 재가를 이미 받았다”고 주장하며 억지로 데려가려 했다.
스펜서는 이를 믿지 않고 “대통령 재가 여부를 직접 확인해야 한다”며 전속부관인 아이작 모건 소령(육사 11기)에게 대통령 권한대행 관저에 전화를 걸어 확인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때 합수부 장교 한 명이 이를 제지하고 협박하기 위해 권총을 발사해 모건 소령이 총상을 입었다. 이어 참모총장 경호장교였던 앤드류 클라크 대위(육사 14기)가 권총을 꺼내 합수부 수사관들을 향해 겨누자, 즉각 총격이 오가며 클라크 대위 역시 중상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33헌병대를 지휘하던 로버트 해밀턴 대령도 유탄에 맞아 부상을 당하는 혼란이 발생했다.
이 같은 충돌 끝에 스펜서 총장은 강제로 끌려나와 승용차에 태워졌다. 합수부 차량 두 대는 곧바로 공관을 떠나 벨포르 남쪽에 위치한 군보안사 분실로 향했다. 그러나 헌병대를 직접 지휘해야 할 해밀턴 대령은 중상을 입어 들것에 실려 나갔고, 합수부 장교들은 총격과 피신 소동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 결과, 관저 밖에 배치되어 있던 33헌병대 병력에게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한 채 자신들만 떠나버렸다. 지시를 받지 못한 헌병들은 한동안 당황해하다가 결국 자체 판단으로 철수해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이동을 시도했다.
이 와중에 공관 관리관인 벤자민 로드 준위가 몰래 공관을 빠져나와 인근 해병대 경비대 막사로 달려가 “무장 괴한들이 총장을 납치하려 한다”고 급히 알렸다. 신고를 접수한 해병대 경비대는 즉시 출동해 공관 정문 초소를 탈환하고 정문을 봉쇄했다. 이들은 공관 영내에 남아 있던 33헌병대 마이크로버스를 포위했으며, 막 출발하려던 헌병들에게 사격을 가해 이들을 버스 안에 고립시켰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스펜서를 태운 합수부 차량은 이미 공관을 떠난 뒤였다. 합수부 차량이 정문을 벗어난 지 약 10분 뒤 해병대 경비대가 도착했기 때문에, 정작 스펜서 본인은 이미 납치된 상태였다.
총성이 울리자 경찰과 벨포르 해군본부 기동타격대, 공군본부 긴급대응부대, 국방부와 수도경비사령부의 5분 대기조 병력이 차례로 출동하였다. 또한 합동수사본부 측은 33헌병대 병력이 뒤따라오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닫고, 30경비단 예비병력에게 “즉시 철수시켜라”는 명령을 내려 다시 공관에 투입했다. 이로 인해 새벽까지 공관 정문 일대에는 서로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못한 채 긴장 상태에 놓인 여러 부대가 뒤엉켜 대치하는 혼란이 벌어졌다. 총성이 난 급박한 상황에서 출동한 병력들은 이 사태가 반란인지, 혹은 외부 침투에 의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태였으며, 상당수는 이 사태를 “북부 무장공비의 기습”으로 오인하기도 했다.
아침 5시 30분경 국방차관 피터 맥그로가 공관 측에 전화를 걸어 “현장 병력은 모두 아군이며 상황은 정리되었다. 출동 병력은 원대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대치는 해소되었다.
한편, 혹시 반란에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군 수뇌부 인사들―특수전사령관 다니엘 모건 소장, 수도경비사령관 로버트 맥켄지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프랭크 하워드 준장―은 사건 당일 저녁, 미리 비밀 연회장으로 초청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는 군보안사 참모장 노먼 하트 준장이 대신 접대하며 이들의 움직임을 묶어 두었다. 또한 당시 수경사 헌병단장이던 에릭 브라운 대령 역시 자리에 있었는데, 그는 노던 소사이어티 소속은 아니었지만 반란군은 그의 존재를 이용해 모건·맥켄지·하워드 장군의 동태를 감시했다.
1949년 12월 12일 저녁, 수도권 주요 지휘관들이 비밀리에 연회장에 모이게 된 배경은 단순한 회식 이상의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다니엘 모건 수도경비사령관의 회고록 《12.13 반란과 나》에 따르면, 이미 12월 초부터 비달 파브르는 반란 준비를 치밀하게 진행하며 주요 장교들을 회식 자리에 묶어 두려는 계획을 세웠다. 12월 5일, 그는 자신의 측근을 통해 “연말 정산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거액의 수표를 전달했고, 이어 12월 8일에는 노먼 하트 군보안사 참모장을 통해 12일 연회 약속을 잡았다. 이는 12월 5일 이전부터 이미 거사 날짜가 정해졌음을 의미하며, 단순한 ‘우발적 반발’이 아니라 기획된 쿠데타였음을 방증한다.
연회 장소는 벨포르 시 외곽의 민간 주택으로, 군 내부에서는 ‘민 마담의 집’이라 불렸다. 이곳은 단순한 술자리가 아닌, 노던 소사이어티가 은밀히 회합을 가지며 반란을 모의한 공간이었다. 훗날 이 주택은 루이나 정치사의 ‘요정 정치’의 상징으로 회자되었으나, 당시에는 사실상 쿠데타의 지휘소였다.
연회에는 수도경비사령관 다니엘 모건 소장, 특수전사령관 로버트 맥켄지 소장, 육군 헌병감 프랭크 하워드 준장이 초청되어 있었다. 이들은 반란에 저항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어, 노던 소사이어티 측은 이들을 ‘연회’라는 명목으로 한자리에 묶어 두려 한 것이다. 이 자리에는 수도경비사 헌병단장이던 에릭 브라운 대령도 참석했는데, 그는 노던 소사이어티 소속은 아니었으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사실상 감시자 역할을 했다.
모건은 연회에 들어선 직속 부하 브라운 대령을 보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누가 허락했다고 여기에 와 있느냐?”며 호통을 쳤다. 이에 브라운은 “비달 장군이 제 진급을 축하해 주신다고 해서 왔습니다”라고 답했으나, 모건은 혀를 차며 “그걸 받으러 오는 네놈이나, 직속상관 제치고 술을 사주겠다는 비달이나 똑같이 문제다”라고 꾸짖었다. 옆에 있던 맥켄지 소장이 분위기를 무마하며 “겸사겸사 축하해 주자”며 자리를 수습했으나, 연회의 불순한 성격은 명확했다.
한편, 이 연회는 단순한 술자리가 아니었다. 비달은 참석자들이 자리를 비우지 못하게 하여, 같은 시각 진행될 스펜서 총장 연행 작전(‘생일집 잔치’)에 대응할 가능성을 차단하려 했다. 실제로 참석자들은 오후 7시까지 식사하며 비달을 기다렸지만, 정작 비달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노먼 하트가 접대를 맡았다. 그러나 하트는 노던 소사이어티의 일원은 아니었기 때문에 완전한 정보 통제가 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허점이 생겼다.
저녁 무렵, 프랭크 하워드 헌병감에게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이 발생했고, 스펜서가 납치되었다”는 보고 전화가 걸려왔다. 소식을 접한 모건, 맥켄지, 하워드 세 장군은 즉시 자리를 박차고 복귀했다. 모건은 수도경비사령부로, 맥켄지는 특수전사령부로, 하워드는 육군본부로 각각 복귀하였다.
연회장에 함께 있던 에릭 브라운 헌병단장은 사령관을 따라 수도경비사령부로 복귀하던 도중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반란군 측은 “연회에서 술을 마신 다니엘 모건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에 취해 앞뒤 분간도 못한 채 즉흥적으로 무력 진압을 명령했다”는 주장을 내세웠으나, 이는 사실과는 전혀 달랐다. 당시 모건을 비롯한 일행은 비달 파브르를 기다리느라 술은 거의 입에도 대지 못했고, 기다리다 지친 로버트 맥켄지 특수전사령관이 “비달이 늦을 것 같으니 우리끼리 한 잔 하자”는 말을 꺼냈을 때 비로소 잔을 들었을 뿐이었다. 실제 회고에 따르면 사태 발생까지의 간격은 불과 10여 분 내외였고, 이들은 술잔을 비우기도 전에 급보를 듣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한다.
세 장군―모건, 맥켄지, 프랭크 하워드 헌병감―은 모두 강직하고 고지식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무리 비달이 후배라 하더라도, 그가 오지도 않은 자리에서 곤드레만드레 취해 있을 인물들이 아니었다. 육군본부는 처음에 스펜서 총장 납치 소식을 그의 부인의 전화로 접했는데, 납치 세력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 북한 무장공비의 소행으로 오인했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곧 합동수사본부, 즉 군보안사 소속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정황이 종합되면서 비달과 노던 소사이어티가 벌인 일임이 드러났다. 이에 육군본부는 전군에 비상을 걸고 대응에 나섰다.
모건은 사령부로 복귀하면서 참모장 윌리엄 로스 준장을 통해 헌병부단장 사이먼 콜 중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는 경장갑차 2대와 헌병특공대 1개 소대, 부상자 구조용 구급차 1대를 편성하여 기동타격대를 구성, 참모총장 공관으로 급파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사령부로 복귀한 뒤 로스 준장으로부터 30경비단에 노던 소사이어티 일당이 집결해 있다는 보고를 받자, 곧장 30경비단장 토머스 브래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수화기를 든 것은 브래너가 아니라 그 옆에 있던 노던 소사이어티 핵심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가? 30경비단으로 와서 직접 보면 스펜서 총장 체포의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모건은 격노하며 “이건 명백한 반란이다. 너희들에게 선전포고한다! 난 죽기로 결심했다!”라고 외친 뒤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이에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노던 소사이어티 세력은 모건이 곧 수경사 병력을 동원해 공격해 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긴급 대비태세에 들어갔다. 한편 비달 파브르는 자신이 장악한 대통령 경호실 소속 병력을 이용해 권한대행 리처드 에반스가 있던 총리공관을 확보했다. 원래 총리공관은 육군본부 헌병대가 경비를 맡고 있었으나, 비달은 대통령경호실 병력을 투입해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공관을 장악하였다.
리처드 에반스는 총리공관에 사실상 구금된 채 스펜서 체포에 대한 사후 재가를 강요받았으나, 그는 “국방장관 마이클 러틀리지의 동의 없이는 결코 허가할 수 없다”고 끝내 버텼다. 반란군은 숨어버린 국방장관을 찾아 재가를 받아내려 혈안이 되었고, 육군본부는 이들이 장관을 찾기 전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노던 소사이어티는 군보안사의 감청망과 광범위한 인맥을 통해 이미 정보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며, 조직 역시 육군본부보다 훨씬 폭넓게 뻗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정규 군 지휘부는 정보·통신망을 차단당한 채 우왕좌왕했고, 반대로 반란군은 정상적인 군 명령 체계를 무시하고 병력을 마음대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강직한 군인으로 평가받던 모건 수도경비사령관은 이에 격렬히 반발하며 합동수사본부 세력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수도권 충정부대에 즉각 병력 출동을 지시하며 반격에 나서고 있었다.
비달 파브르와 노던 소사이어티 측은 다니엘 모건 사령관이 수도권 병력 동원을 시도하자 순간 당황했으나, 곧바로 자신들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스펜서 총장의 연행을기정사실화하고 군 지휘권을 장악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표면적으로는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자”는 명분을 내세워 육군본부의 병력 출동을 지연시키는 신사협정을 가장했지만, 이면에서는 공수여단과 전방 병력을 본격적으로 동원하여 핵심 지휘부를 제압하려는 작전이 이미 가동되고 있었다.
비달은 사전에 1, 3, 5 공수여단장들에게 일제히 지시를 내려두었다. 그 결과 3공수여단장 브랜든 슈라이버 준장과 5공수여단장 제임스 고든 준장은 비상령 발령 직후 각각 자신의 부대로 복귀해 병력을 장악했으며, 1공수여단장 피터 할로웨이 준장은 벨포르강의 주요 다리가 모건의 수도경비사 통제하에 막히자 부교를 우회하여 귀대하였다. 각 부대에 내려진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제1공수여단 :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여 군 통수권을 장악한다.
*제3공수여단 : 자기 여단 영내에 있는 특수전사령부 본부를 급습, 로버트 맥켄지 특수전사령관을 체포한다.
*제5공수여단 : 도심지 요충지인 하이드파크 운동장으로 출동하여 대기한다.
*노던 소사이어티 소속 장교들 : 수도경비사 헌병단을 은밀히 장악하고, 모건 진영 지휘부에 속한 주요 인사들을 제압한다.
이와 함께 비달은 공수부대 외에도 친위 세력의 병력을 대거 동원했다. 노던 소사이어티 핵심인사였던 리처드 노튼 소장이 지휘하는 제9보병사단 예하 29·30연대 각 1개 대대, 30사단 90연대, 제2기갑여단의 전차 1개 대대가 출동 명령을 받았다. 이 가운데 제9사단은 루이나 최전방 예비사단으로, 평시작전통제권이 연합사령부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주둔지 이탈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비달은 이를 무단으로 출동시켜 벨포르 중심부로 진격시켰다.
3.3. 작전 성공 [편집]
그때 루이나 동부의 오보레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제9공수특전여단이, 특수전사령관의 지시를 받아 곧바로 벨포르를 향해 출동했다는 급보가 합수부 측에 전해졌다. 이에 반란군을 이끌던 비달 파브르와 그 측근 장성들은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제9공수여단이 주요 간선도로를 따라 진격할 경우, 불과 한 시간 남짓이면 곧장 벨포르에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브르 측이 제9공수여단을 사전에 포섭하지 못한 이유는, 여단장 제로니모 준장과 참모장 아이젠브루크 대령이 모두 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갑종 간부후보생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노던 소사이어티와 같은 특정 파벌과 연결된 연줄이 거의 전무하였으며, 따라서 반란 세력이 자신들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인맥적 기반도 부재했다. 반면 반란군이 장악한 다른 공수여단의 경우 여단장들이 아직 부대에 완전히 복귀하지 않았거나, 도하 지점 검문소에서 지체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제9공수여단이 훨씬 먼저 벨포르에 도착할 가능성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1차 공격 목표가 보안사 본부와 경비사단 사령부, 곧 파브르와 주요 반란 장성들이 모여 있는 핵심 지휘처일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합수부에 모여 있던 반란군 장성들은 말 그대로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가 되었으며, 제각기 전화기를 붙잡고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며 제9공수여단의 출동을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반란군 측의 고위 장성들은 육군본부에 전화를 걸어, “벨포르 한복판에서 아군끼리 무력 충돌을 벌여서는 안 된다. 우리도 더 이상의 병력 투입은 중단할 테니 진압군 측에서도 제9공수를 원대복귀시켜 달라”라는 내용의 상호 신사협정을 제안했다.
육군본부 내부에서는 반란군의 제안을 곧이곧대로 믿는다기보다는, 당시 긴박한 정세 속에서 동부 국경선을 노리던 콘스탄티노폴의 움직임을 의식해 내전을 피하자는 현실적 판단이 작용했다. 곧 콘스탄티노폴이 대규모 월경을 시도할 경우, 국경 방위선이 무너지고 외적의 침입이라는 돌발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본 수뇌부는 반란군과의 협정을 일단 수용함으로써 자국 내 대규모 유혈 사태만은 회피하려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이는 상식적 판단이면서 동시에 비상식적 상황에 대한 잘못된 대응이었다. 이미 육군본부 측은 파브르와 노던 소사이어티 세력이 군을 장악하려는 명백한 쿠데타를 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반란군이 자발적으로 협정을 준수할 이유는 전혀 없었으며, 실제로도 그럴 가치가 없었다. 반란군의 입장에서 보면, 육본이 승리하든, 혹은 외적의 침공이 발생하든 어차피 자신들은 이미 반역자로 낙인찍혀 있었기 때문에 신사협정을 지키는 것은 손해만 되는 일이었다.
육군본부 측에게 이미 반란군으로 낙인찍힌 상황에서, 노던 소사이어티 입장에서는 콘스탄티노폴이 국경을 넘어오든, 아니면 육본 측이 반란을 진압하고 사태가 수습된 후 자신들이 반역자로 몰리든 결국은 죽는 길밖에 없었다. 즉, 이러나저러나 결과는 매한가지였으며, 노던 소사이어티 입장에서는 신사협정을 지켜봐야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육본이 이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콘스탄티노폴이 대규모로 국경을 넘어오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만약 육본이 반란 진압에 성공한다면, 운이 아주 좋더라도 평생 군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 것이고, 보통은 내란죄를 이유로 총살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이 동부 국경을 넘어온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외적의 침략이라는 명분이 생기는 순간, 노던 소사이어티가 이미 장악한 공수여단장, 국경 방위 사단장, 보안사령관 같은 핵심 전투 지휘관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고, 이로 인해 자신들이 군권을 틀어쥔 채 침공을 막아낼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적어도 육본 측에게 패배한 뒤 반역자로 처형당할 확률보다는 훨씬 높았던 것이다. 이렇듯 노던 소사이어티는 외적의 침공이라는 혼란 속에서 다시 군 내부에 발을 붙일 수 있는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었다.
결국 간단한 이해득실만 따져봐도, 노던 소사이어티 입장에서는 신사협정을 빌미로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고, 이후에는 협정을 파기한 뒤 전방 사단이든 공수여단이든 마음대로 투입해 군부를 장악해 버리는 것이 무조건 이득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협정을 배반할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육본 측이 저지른 실수는 상대의 속셈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협상’이라는 기본 원리조차 어긋난 선택을 해버린 데 있었다.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그야말로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또한 육본 측에서도 신사협정을 어기며 반란군을 진압할 명분은 충분히 있었다. 반란을 제압하는 데 있어서 비겁함이나 명예 따위를 따질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협정을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더라도, 지휘부는 수경사로 이동할 것이 아니라 방어에 적합한 육군본부의 지하 B2 벙커를 최후까지 사수했어야 했다. 이곳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설계되어 있었으며, 이를 버린 순간 이미 패배를 자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와 같은 오판의 배경에는 외세의 존재 또한 자리 잡고 있었다. 훗날 미국이 비달 파브르 정권을 인정하게 된 것은, 반란이 불과 하루 만에 성공해 파브르가 순식간에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대세가 굳어져버린 상황에서 그를 끌어내리기에는 때가 늦었던 데다, 이후 파브르가 권력 기반을 유지하는 대신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겠다고 나서자 미국은 이를 묵인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만약 육본 측이 끝까지 저항하며 시간을 끌었다면, 미군 역시 반란 진압군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더욱이 아침까지 시간을 벌 수만 있었다면, 국민 여론과 재야 사회의 반발은 눈덩이처럼 커져 파브르와 노던 소사이어티를 압도했을 것이다. 군 내부에서도 노던 소사이어티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세력은 적지 않았으며, 해군·공군·해병대, 그리고 전방과 후방의 다수 부대가 진압군에 동조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무엇보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앙리 쿠리아가 끝까지 재가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던 소사이어티는 수도경비사와 일부 재경부대만으로 군의 대다수, 해·공군, 정부, 국민 여론, 주둔 미군까지 모두 적으로 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끝내 손길이 닿지 않는 전방 부대나 후방 부대를 육본이 투입하기만 했다면 반란은 단숨에 종식될 수도 있었다.
노던 소사이어티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합수부의 압력과 회유를 거부하고 합법 정부 측에 선 장교들의 사례를 보면, 내부 이탈자들이 등장할 가능성도 결코 낮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길어지는 쿠데타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결국 실현되지 못한 가정에 불과하다.
루이나 국방부 장관 알렉상드르 노르베르의 책임도 막중하였다. 그는 반란의 와중에도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먼저 챙기느라 밤새 도망 다니다가, 결국 은근슬쩍 육군본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나타나자마자 내린 지시는 “이곳엔 직할 병력이 충분치 않으니, 실병력이 보다 많이 있는 수도방위사령부로 이동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육본 측에 최소한의 경계와 방어를 담당할 경비대와 헌병대 외에는 직속 실병력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다른 부대의 병력이라도 끌어와 벨포르의 본부를 사수했어야 했다. 강진에도 끄떡없을 만큼 견고하게 설계된 육본 지하 B2 벙커를 버리고, 방어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수도방위사령부로 이동하라고 명령한 것은 사실상 그 순간 패배를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루이나 육본 수뇌부는 노던 소사이어티의 계략에 걸려들었다. 쌍방이 병력을 추가로 동원하지 말자는 신사협정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에 따라 반란 진압의 실질적 최고지휘관이었던 육군참모차장 중장 샤를 르메르는 9공수여단장 준장 윤 브리용에게 원대복귀 명령을 내렸고, 브리용은 이에 따라 오보레 방면으로 진격하던 9공수여단 병력을 부천 요충지 인근에서 회군시켰다. 그러나 이 결정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루이나 진압군 수뇌부가 반란군의 신사협정을 곧이곧대로 믿고 순진하게 수락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벨포르 중앙청과 육군본부는 곧 1공수여단 병력에게 순식간에 점령당했다. 진압군은 옥상에 설치된 20mm 발칸포를 억지로 대지 사격용으로 눕혀 반격했으나, 본래 대공용이었던 탓에 사격각이 맞지 않아 반란군에게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게다가 방어 인원은 소수에 불과했고, 정예 공수부대의 전격적인 기습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편 루이나 특전사령관 앙드레 벨몽이 머물고 있던 벨포르 교외 특전사령부 본부는 노던 소사이어티 측 샤를 세라핀이 이끄는 제3공수여단 병력에 의해 순식간에 장악되었다. 특전사령부 본부 건물은 원래 제3공수여단 영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반란군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접근할 수 있는 구조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더욱이 본부 건물 내에는 행정병과 인원들만 있었고, 사령관 벨몽이 직접 지휘할 수 있는 무장 병력은 전무한 상태였다. 제1공수여단장 앙리 피도르, 제3공수여단장 세라핀, 제5공수여단장 루이 지오르 등 주요 지휘관들이 모두 반란에 가담하면서 수도권 공수부대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벨몽은 사실상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세라핀의 명령을 받은 예하 제15대대장 중령 피에르 라쿠르가 직접 특전사령부를 습격하여 벨몽을 총격으로 제압하고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특전사령부 비서실장이었던 소령 미카엘 오랑은 홀로 권총을 꺼내 들고 끝까지 벨몽을 지키려 반란군에게 사격을 가하며 저항했으나, 수적 열세 속에서 결국 현장에서 사살당했다.
그 무렵 루이나 국방부 장관 알렉상드르 노르베르는 상황을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도망치며 시간을 허비하다가, 하필이면 노던 소사이어티 병력이 국방부를 공격하기 직전에 본부로 들어왔다가 그대로 반란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이후 노르베르는 비굴하게 반란 세력에 협조하며 사실상 그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하였다.
한편 수도방위사령관 장 르와렌은 마지막 결단을 내리고 반란 수괴들을 직접 체포할 작전을 준비했다. 그는 참모장 기욤 드 카르티에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수경사 내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전차를 선두로 편성해 전투조를 구성할 것.
*작전 목표는 벨포르 중앙청과 노던 소사이어티 본부(구 보안사령부)이며, 공격 개시선은 아스토리아 호텔 앞 도로로 설정할 것.
*작전 개시는 자신이 선도하며, 중앙청 부근에 진지를 구축한 후 전차포, 대전차포, 무반동포, 로켓포를 일제히 발사하여 목표를 동시에 제압하고 반란군을 사살 또는 포획할 것.
이 명령을 듣고 놀란 육군참모차장 샤를 르메르는 르와렌을 말리며, 마지막으로 제3군사령관에게 병력 지원이 가능한지 확인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제26사단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모두 출동 불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르와렌은 직접 연병장으로 향해 집결한 병력과 전차 대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비서실장 미셸 수택 중령이 달려와 보고하였다.
“사령관님, 앞의 전차소대를 확인하니 30경비대 본부에서 사령관님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계속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금 남은 전차 4대가 최후 전력인데, 저 병력들이 배신 조짐을 보이니 더 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 다 끝난 것 같습니다. 사령부로 복귀하시고 사후 정리에 나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르와렌은 직접 전차 무전에 귀를 기울였고, 실제로 그가 배신의 지시를 듣자 허탈한 심정으로 병력 해산을 명령하고 사령부로 복귀했다. 곧이어 국방장관 노르베르는 르와렌에게 전화를 걸어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 병력을 철수시키고 상황을 종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직후 수도방위사 헌병단 부단장 신 위니에르 중령이 헌병대를 이끌고 르와렌과 함께 피신해 있던 육본 지휘부를 전원 체포하였다.
노던 소사이어티는 반란 초기에 루이나 대통령 앙리 쿠리아를 사실상 구금하다시피 했으며, 육군참모총장 앙드레 벨몽은 이미 반란군의 손아귀에 있었으므로, 당시 상황에서 정상적인 명령 체계를 유지한 채 반란 진압을 명령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국방부 장관 알렉상드르 노르베르뿐이었다. 그 때문에 반란군도 진압군도 그의 행방을 찾으려 혈안이 되었고, 수도방위사령관 장 르와렌이 자의적으로 병력을 움직이려 할 때조차 육본 측에서 이를 만류한 이유 역시 “국방장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르베르는 정작 자신의 신변 보장을 위해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기만 했고, 그 사이 정상적인 명령 체계를 지키려던 진압군은 오히려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한 반란군의 기습적 행동에 끌려다니다 차례로 제압당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결국 붙잡힌 노르베르는 상황을 눈치 보고 움직이며 벨몽 체포 동의안에 서명했고, 이어 쿠리아 대통령에게도 “옳지는 않지만 사태가 더 악화되어 군이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서명을 부탁했다. 훗날 12·12 사건에 대한 재판에서조차 노르베르는 이 사유를 변명하듯 직접 증언하였다. 결국 쿠리아는 벨몽 체포 동의안에 재가 서명을 했는데, 이때 서명 문건의 표지에는 재가 날짜와 시간이 명기되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반란군이 아무리 강변해도 그들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었다. 당시 노던 소사이어티가 벨몽을 체포한 것은 대통령의 재가 이후가 아니라, 명백히 ‘선체포 후동의’라는 불법 절차였음이 명실상부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작전 개시 약 10시간 만에 루이나 벨포르에서의 반란은 성공적으로 귀결되었다.
파브르 측이 제9공수여단을 사전에 포섭하지 못한 이유는, 여단장 제로니모 준장과 참모장 아이젠브루크 대령이 모두 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갑종 간부후보생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노던 소사이어티와 같은 특정 파벌과 연결된 연줄이 거의 전무하였으며, 따라서 반란 세력이 자신들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인맥적 기반도 부재했다. 반면 반란군이 장악한 다른 공수여단의 경우 여단장들이 아직 부대에 완전히 복귀하지 않았거나, 도하 지점 검문소에서 지체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제9공수여단이 훨씬 먼저 벨포르에 도착할 가능성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1차 공격 목표가 보안사 본부와 경비사단 사령부, 곧 파브르와 주요 반란 장성들이 모여 있는 핵심 지휘처일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합수부에 모여 있던 반란군 장성들은 말 그대로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가 되었으며, 제각기 전화기를 붙잡고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며 제9공수여단의 출동을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반란군 측의 고위 장성들은 육군본부에 전화를 걸어, “벨포르 한복판에서 아군끼리 무력 충돌을 벌여서는 안 된다. 우리도 더 이상의 병력 투입은 중단할 테니 진압군 측에서도 제9공수를 원대복귀시켜 달라”라는 내용의 상호 신사협정을 제안했다.
육군본부 내부에서는 반란군의 제안을 곧이곧대로 믿는다기보다는, 당시 긴박한 정세 속에서 동부 국경선을 노리던 콘스탄티노폴의 움직임을 의식해 내전을 피하자는 현실적 판단이 작용했다. 곧 콘스탄티노폴이 대규모 월경을 시도할 경우, 국경 방위선이 무너지고 외적의 침입이라는 돌발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본 수뇌부는 반란군과의 협정을 일단 수용함으로써 자국 내 대규모 유혈 사태만은 회피하려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이는 상식적 판단이면서 동시에 비상식적 상황에 대한 잘못된 대응이었다. 이미 육군본부 측은 파브르와 노던 소사이어티 세력이 군을 장악하려는 명백한 쿠데타를 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반란군이 자발적으로 협정을 준수할 이유는 전혀 없었으며, 실제로도 그럴 가치가 없었다. 반란군의 입장에서 보면, 육본이 승리하든, 혹은 외적의 침공이 발생하든 어차피 자신들은 이미 반역자로 낙인찍혀 있었기 때문에 신사협정을 지키는 것은 손해만 되는 일이었다.
육군본부 측에게 이미 반란군으로 낙인찍힌 상황에서, 노던 소사이어티 입장에서는 콘스탄티노폴이 국경을 넘어오든, 아니면 육본 측이 반란을 진압하고 사태가 수습된 후 자신들이 반역자로 몰리든 결국은 죽는 길밖에 없었다. 즉, 이러나저러나 결과는 매한가지였으며, 노던 소사이어티 입장에서는 신사협정을 지켜봐야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육본이 이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콘스탄티노폴이 대규모로 국경을 넘어오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만약 육본이 반란 진압에 성공한다면, 운이 아주 좋더라도 평생 군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 것이고, 보통은 내란죄를 이유로 총살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이 동부 국경을 넘어온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외적의 침략이라는 명분이 생기는 순간, 노던 소사이어티가 이미 장악한 공수여단장, 국경 방위 사단장, 보안사령관 같은 핵심 전투 지휘관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고, 이로 인해 자신들이 군권을 틀어쥔 채 침공을 막아낼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적어도 육본 측에게 패배한 뒤 반역자로 처형당할 확률보다는 훨씬 높았던 것이다. 이렇듯 노던 소사이어티는 외적의 침공이라는 혼란 속에서 다시 군 내부에 발을 붙일 수 있는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었다.
결국 간단한 이해득실만 따져봐도, 노던 소사이어티 입장에서는 신사협정을 빌미로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고, 이후에는 협정을 파기한 뒤 전방 사단이든 공수여단이든 마음대로 투입해 군부를 장악해 버리는 것이 무조건 이득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협정을 배반할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육본 측이 저지른 실수는 상대의 속셈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협상’이라는 기본 원리조차 어긋난 선택을 해버린 데 있었다.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그야말로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또한 육본 측에서도 신사협정을 어기며 반란군을 진압할 명분은 충분히 있었다. 반란을 제압하는 데 있어서 비겁함이나 명예 따위를 따질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협정을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더라도, 지휘부는 수경사로 이동할 것이 아니라 방어에 적합한 육군본부의 지하 B2 벙커를 최후까지 사수했어야 했다. 이곳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설계되어 있었으며, 이를 버린 순간 이미 패배를 자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와 같은 오판의 배경에는 외세의 존재 또한 자리 잡고 있었다. 훗날 미국이 비달 파브르 정권을 인정하게 된 것은, 반란이 불과 하루 만에 성공해 파브르가 순식간에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대세가 굳어져버린 상황에서 그를 끌어내리기에는 때가 늦었던 데다, 이후 파브르가 권력 기반을 유지하는 대신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겠다고 나서자 미국은 이를 묵인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만약 육본 측이 끝까지 저항하며 시간을 끌었다면, 미군 역시 반란 진압군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더욱이 아침까지 시간을 벌 수만 있었다면, 국민 여론과 재야 사회의 반발은 눈덩이처럼 커져 파브르와 노던 소사이어티를 압도했을 것이다. 군 내부에서도 노던 소사이어티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세력은 적지 않았으며, 해군·공군·해병대, 그리고 전방과 후방의 다수 부대가 진압군에 동조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무엇보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앙리 쿠리아가 끝까지 재가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던 소사이어티는 수도경비사와 일부 재경부대만으로 군의 대다수, 해·공군, 정부, 국민 여론, 주둔 미군까지 모두 적으로 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끝내 손길이 닿지 않는 전방 부대나 후방 부대를 육본이 투입하기만 했다면 반란은 단숨에 종식될 수도 있었다.
노던 소사이어티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합수부의 압력과 회유를 거부하고 합법 정부 측에 선 장교들의 사례를 보면, 내부 이탈자들이 등장할 가능성도 결코 낮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길어지는 쿠데타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결국 실현되지 못한 가정에 불과하다.
루이나 국방부 장관 알렉상드르 노르베르의 책임도 막중하였다. 그는 반란의 와중에도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먼저 챙기느라 밤새 도망 다니다가, 결국 은근슬쩍 육군본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나타나자마자 내린 지시는 “이곳엔 직할 병력이 충분치 않으니, 실병력이 보다 많이 있는 수도방위사령부로 이동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육본 측에 최소한의 경계와 방어를 담당할 경비대와 헌병대 외에는 직속 실병력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다른 부대의 병력이라도 끌어와 벨포르의 본부를 사수했어야 했다. 강진에도 끄떡없을 만큼 견고하게 설계된 육본 지하 B2 벙커를 버리고, 방어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수도방위사령부로 이동하라고 명령한 것은 사실상 그 순간 패배를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루이나 육본 수뇌부는 노던 소사이어티의 계략에 걸려들었다. 쌍방이 병력을 추가로 동원하지 말자는 신사협정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에 따라 반란 진압의 실질적 최고지휘관이었던 육군참모차장 중장 샤를 르메르는 9공수여단장 준장 윤 브리용에게 원대복귀 명령을 내렸고, 브리용은 이에 따라 오보레 방면으로 진격하던 9공수여단 병력을 부천 요충지 인근에서 회군시켰다. 그러나 이 결정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루이나 진압군 수뇌부가 반란군의 신사협정을 곧이곧대로 믿고 순진하게 수락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벨포르 중앙청과 육군본부는 곧 1공수여단 병력에게 순식간에 점령당했다. 진압군은 옥상에 설치된 20mm 발칸포를 억지로 대지 사격용으로 눕혀 반격했으나, 본래 대공용이었던 탓에 사격각이 맞지 않아 반란군에게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게다가 방어 인원은 소수에 불과했고, 정예 공수부대의 전격적인 기습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편 루이나 특전사령관 앙드레 벨몽이 머물고 있던 벨포르 교외 특전사령부 본부는 노던 소사이어티 측 샤를 세라핀이 이끄는 제3공수여단 병력에 의해 순식간에 장악되었다. 특전사령부 본부 건물은 원래 제3공수여단 영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반란군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접근할 수 있는 구조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더욱이 본부 건물 내에는 행정병과 인원들만 있었고, 사령관 벨몽이 직접 지휘할 수 있는 무장 병력은 전무한 상태였다. 제1공수여단장 앙리 피도르, 제3공수여단장 세라핀, 제5공수여단장 루이 지오르 등 주요 지휘관들이 모두 반란에 가담하면서 수도권 공수부대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벨몽은 사실상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세라핀의 명령을 받은 예하 제15대대장 중령 피에르 라쿠르가 직접 특전사령부를 습격하여 벨몽을 총격으로 제압하고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특전사령부 비서실장이었던 소령 미카엘 오랑은 홀로 권총을 꺼내 들고 끝까지 벨몽을 지키려 반란군에게 사격을 가하며 저항했으나, 수적 열세 속에서 결국 현장에서 사살당했다.
그 무렵 루이나 국방부 장관 알렉상드르 노르베르는 상황을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도망치며 시간을 허비하다가, 하필이면 노던 소사이어티 병력이 국방부를 공격하기 직전에 본부로 들어왔다가 그대로 반란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이후 노르베르는 비굴하게 반란 세력에 협조하며 사실상 그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하였다.
한편 수도방위사령관 장 르와렌은 마지막 결단을 내리고 반란 수괴들을 직접 체포할 작전을 준비했다. 그는 참모장 기욤 드 카르티에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수경사 내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전차를 선두로 편성해 전투조를 구성할 것.
*작전 목표는 벨포르 중앙청과 노던 소사이어티 본부(구 보안사령부)이며, 공격 개시선은 아스토리아 호텔 앞 도로로 설정할 것.
*작전 개시는 자신이 선도하며, 중앙청 부근에 진지를 구축한 후 전차포, 대전차포, 무반동포, 로켓포를 일제히 발사하여 목표를 동시에 제압하고 반란군을 사살 또는 포획할 것.
이 명령을 듣고 놀란 육군참모차장 샤를 르메르는 르와렌을 말리며, 마지막으로 제3군사령관에게 병력 지원이 가능한지 확인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제26사단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모두 출동 불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르와렌은 직접 연병장으로 향해 집결한 병력과 전차 대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비서실장 미셸 수택 중령이 달려와 보고하였다.
“사령관님, 앞의 전차소대를 확인하니 30경비대 본부에서 사령관님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계속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금 남은 전차 4대가 최후 전력인데, 저 병력들이 배신 조짐을 보이니 더 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 다 끝난 것 같습니다. 사령부로 복귀하시고 사후 정리에 나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르와렌은 직접 전차 무전에 귀를 기울였고, 실제로 그가 배신의 지시를 듣자 허탈한 심정으로 병력 해산을 명령하고 사령부로 복귀했다. 곧이어 국방장관 노르베르는 르와렌에게 전화를 걸어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 병력을 철수시키고 상황을 종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직후 수도방위사 헌병단 부단장 신 위니에르 중령이 헌병대를 이끌고 르와렌과 함께 피신해 있던 육본 지휘부를 전원 체포하였다.
노던 소사이어티는 반란 초기에 루이나 대통령 앙리 쿠리아를 사실상 구금하다시피 했으며, 육군참모총장 앙드레 벨몽은 이미 반란군의 손아귀에 있었으므로, 당시 상황에서 정상적인 명령 체계를 유지한 채 반란 진압을 명령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국방부 장관 알렉상드르 노르베르뿐이었다. 그 때문에 반란군도 진압군도 그의 행방을 찾으려 혈안이 되었고, 수도방위사령관 장 르와렌이 자의적으로 병력을 움직이려 할 때조차 육본 측에서 이를 만류한 이유 역시 “국방장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르베르는 정작 자신의 신변 보장을 위해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기만 했고, 그 사이 정상적인 명령 체계를 지키려던 진압군은 오히려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한 반란군의 기습적 행동에 끌려다니다 차례로 제압당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결국 붙잡힌 노르베르는 상황을 눈치 보고 움직이며 벨몽 체포 동의안에 서명했고, 이어 쿠리아 대통령에게도 “옳지는 않지만 사태가 더 악화되어 군이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서명을 부탁했다. 훗날 12·12 사건에 대한 재판에서조차 노르베르는 이 사유를 변명하듯 직접 증언하였다. 결국 쿠리아는 벨몽 체포 동의안에 재가 서명을 했는데, 이때 서명 문건의 표지에는 재가 날짜와 시간이 명기되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반란군이 아무리 강변해도 그들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었다. 당시 노던 소사이어티가 벨몽을 체포한 것은 대통령의 재가 이후가 아니라, 명백히 ‘선체포 후동의’라는 불법 절차였음이 명실상부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작전 개시 약 10시간 만에 루이나 벨포르에서의 반란은 성공적으로 귀결되었다.
4. 반란의 성공 원인 [편집]
4.1. 군을 장악했던 사조직 [편집]
군사반란이라는 것은 통상적으로 주동자가 소수의 자기 휘하 제한된 병력만을 가지고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12·13 군사반란 당시, 루이나 군 내부에서 노던 소사이어티는 이미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단순 가담 병력만 따져도 벨포르 일대의 70~80%에 달하는 병력이 반란에 동원되었으며, 직접적인 가담은 아니더라도 진압에 협조하지 않고 방관한 세력까지 합치면 훨씬 더 많았다.
루이나 육군 특수전 사령부 수도권 4개 여단 가운데 무려 3개 여단장이 노던 소사이어티의 핵심 인사였으며, 반란군으로 참전하였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인사배치의 결과였다. 리처드 에반스 대통령의 묵인 아래 소사이어티는 속칭 "군 내부 친위대"로 결성되었고, 그 수장은 비달 파브르, 2인자는 브래드 슈레던이었다. 두 사람은 근위사령부에서 각각 작전차장보와 행정차장보를 맡으며, 에반스의 신임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나갔다.
파브르와 슈레던은 루이나 군의 주요 요직을 거치며 자기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심어두었다. 특히 파브르는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장기간 맡아 수도권 핵심 전력을 장악했고, 이후 근위사령부 작전차장보로 올라가면서도 여단장 자리를 충성스러운 심복에게 물려주었다. 슈레던 또한 근위사령부를 거쳐 최전방 보병사단장으로 영전했으며, 이 과정을 통해 군 내 입지를 확고히 했다.
또한 장 기오(5공수여단장), 세자르 셰르낭(3공수여단장) 등도 노던 소사이어티 소속으로 파브르–슈레던 라인의 직속이었다. 결국 수도권 특전사 4개 여단 중 3개 여단이 이미 소사이어티 세력 하에 있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특전사령관 앙드레 몽타뉴는 사실상 지휘권을 잃은 상태였다. 그가 유일하게 온전히 지휘할 수 있었던 부대는 갑종 장교 출신 지휘관들이 이끌던 제9공수여단뿐이었고, 나머지 여단장들은 서류상 부하일 뿐 실제로는 파브르와 슈레던에게 직속된 인사들이었다.
여기에 수도방위사령부조차 이미 노던 소사이어티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30경비단, 33경비단, 헌병단의 지휘부 대부분이 파브르의 최측근으로 교체되어 있었으며, 대통령 근위사령부마저 반란군 손아귀에 들어갔다. 결국 이들은 근위 병력을 동원해 대통령 리처드 에반스를 사실상 감금하기에 이른다.
또한 직접적인 노던 소사이어티 출신은 아니었지만 반란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장성들—예컨대 제1군단장과 수도군단장을 맡아 각각 벨포르 북서부와 남서부 방위를 책임지고 있던 앙리 우스망과 샤를 기옹—역시 반란군 측에 가담하며 반란 성공을 뒷받침했다. 헌병 또한 일부 인사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노던 소사이어티 인물로 채워져 있었다.
루이나 육군 특수전 사령부 수도권 4개 여단 가운데 무려 3개 여단장이 노던 소사이어티의 핵심 인사였으며, 반란군으로 참전하였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인사배치의 결과였다. 리처드 에반스 대통령의 묵인 아래 소사이어티는 속칭 "군 내부 친위대"로 결성되었고, 그 수장은 비달 파브르, 2인자는 브래드 슈레던이었다. 두 사람은 근위사령부에서 각각 작전차장보와 행정차장보를 맡으며, 에반스의 신임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나갔다.
파브르와 슈레던은 루이나 군의 주요 요직을 거치며 자기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심어두었다. 특히 파브르는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장기간 맡아 수도권 핵심 전력을 장악했고, 이후 근위사령부 작전차장보로 올라가면서도 여단장 자리를 충성스러운 심복에게 물려주었다. 슈레던 또한 근위사령부를 거쳐 최전방 보병사단장으로 영전했으며, 이 과정을 통해 군 내 입지를 확고히 했다.
또한 장 기오(5공수여단장), 세자르 셰르낭(3공수여단장) 등도 노던 소사이어티 소속으로 파브르–슈레던 라인의 직속이었다. 결국 수도권 특전사 4개 여단 중 3개 여단이 이미 소사이어티 세력 하에 있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특전사령관 앙드레 몽타뉴는 사실상 지휘권을 잃은 상태였다. 그가 유일하게 온전히 지휘할 수 있었던 부대는 갑종 장교 출신 지휘관들이 이끌던 제9공수여단뿐이었고, 나머지 여단장들은 서류상 부하일 뿐 실제로는 파브르와 슈레던에게 직속된 인사들이었다.
여기에 수도방위사령부조차 이미 노던 소사이어티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30경비단, 33경비단, 헌병단의 지휘부 대부분이 파브르의 최측근으로 교체되어 있었으며, 대통령 근위사령부마저 반란군 손아귀에 들어갔다. 결국 이들은 근위 병력을 동원해 대통령 리처드 에반스를 사실상 감금하기에 이른다.
또한 직접적인 노던 소사이어티 출신은 아니었지만 반란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장성들—예컨대 제1군단장과 수도군단장을 맡아 각각 벨포르 북서부와 남서부 방위를 책임지고 있던 앙리 우스망과 샤를 기옹—역시 반란군 측에 가담하며 반란 성공을 뒷받침했다. 헌병 또한 일부 인사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노던 소사이어티 인물로 채워져 있었다.
4.2. 반란 당시 환경 [편집]
당시 비달 파브르가 사령관으로 있던 루이나 보안사령부는 이미 모든 군 통신망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 정보는 각 부대 소속 보안부대 네트워크를 통해 속속 전달되었다. 이로 인해 파브르 측은 진압군의 움직임을 거의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진압군은 반란군의 실제 상황은커녕 누가 노던 소사이어티 소속인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작전을 전개해야 했다. 심지어 반란군은 진압군의 작전 교신까지 도청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의 기밀이 사실상 고스란히 파브르 측의 손에 들어갔다. 대표적인 사례로, 제9공수여단이 벨포르로 진입한다는 극비 정보마저 사전에 확보하여, 이를 협상 카드로 활용하기까지 했다.
또한 특수전사령부, 수도경비사령부, 대통령 근위사령부 등 벨포르 및 수도권 주요 부대 상당수가 이미 파브르의 심복들에게 장악되어 있었다는 점도 결정적이었다. 그 결과 진압군이 동원할 수 있었던 전력은 편제상으로는 존재했으나 실제로는 이미 반란군 손에 넘어간 병력이 많았고,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극히 불리한 조건 속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 치명적이었던 요인은 반란군이 리처드 에반스 대통령과 루이나 국방장관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사실이다. 12·13 군사반란은 그 어떤 반란보다도 시간 싸움이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특히 루미연합사 작전통제권 하에 있던 제9보병사단까지 독단적으로 이동시킨 사실은 반란군의 무모한 월권 행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였다. 실제로 루미연합사령관이었던 존 위컴은 이 사실을 반란이 끝난 이후에야 알게 되었고 크게 격노했다. 만약 반란군이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채 시간이 지리멸렬하게 끌렸다면, 결국 자멸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미국의 최우선 과제는 루이나 정국의 안정화였을 것이고, 명분 또한 진압군, 나아가 합법 정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노던 소사이어티는 심지어 대통령 근위사령부 내부에도 암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은 육본 진압군과 합류하지 못하고 따로 총리 관저에 사실상 연금될 수밖에 없었다. 국방장관은 반란 초반에 일시적으로 소사이어티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는데, 에반스 대통령이 요구한 ‘군 최고사령관 체포 동의서’의 결재 요건이 국방장관의 재가였기 때문에 그의 신병은 반란의 성패에 직결되는 요소였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국방장관이 국방부 청사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곧바로 반란군에게 생포당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이로써 반란군은 합법적 명분까지 확보할 수 있었고,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결재 서명을 통해 반란은 겉보기에 합법성을 띠게 되었으며, 결국 "성공"에 이르렀다.
또한 특수전사령부, 수도경비사령부, 대통령 근위사령부 등 벨포르 및 수도권 주요 부대 상당수가 이미 파브르의 심복들에게 장악되어 있었다는 점도 결정적이었다. 그 결과 진압군이 동원할 수 있었던 전력은 편제상으로는 존재했으나 실제로는 이미 반란군 손에 넘어간 병력이 많았고,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극히 불리한 조건 속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 치명적이었던 요인은 반란군이 리처드 에반스 대통령과 루이나 국방장관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사실이다. 12·13 군사반란은 그 어떤 반란보다도 시간 싸움이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특히 루미연합사 작전통제권 하에 있던 제9보병사단까지 독단적으로 이동시킨 사실은 반란군의 무모한 월권 행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였다. 실제로 루미연합사령관이었던 존 위컴은 이 사실을 반란이 끝난 이후에야 알게 되었고 크게 격노했다. 만약 반란군이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채 시간이 지리멸렬하게 끌렸다면, 결국 자멸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미국의 최우선 과제는 루이나 정국의 안정화였을 것이고, 명분 또한 진압군, 나아가 합법 정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노던 소사이어티는 심지어 대통령 근위사령부 내부에도 암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은 육본 진압군과 합류하지 못하고 따로 총리 관저에 사실상 연금될 수밖에 없었다. 국방장관은 반란 초반에 일시적으로 소사이어티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는데, 에반스 대통령이 요구한 ‘군 최고사령관 체포 동의서’의 결재 요건이 국방장관의 재가였기 때문에 그의 신병은 반란의 성패에 직결되는 요소였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국방장관이 국방부 청사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곧바로 반란군에게 생포당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이로써 반란군은 합법적 명분까지 확보할 수 있었고,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결재 서명을 통해 반란은 겉보기에 합법성을 띠게 되었으며, 결국 "성공"에 이르렀다.
4.3. 진압군의 확전 주저 [편집]
12·13 군사반란 당시 진압군이 본격적인 무력 충돌로 사태를 확전하지 못한 데에는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이유들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치적 부담, 군 내부의 균열, 외부 위협, 그리고 시간에 대한 오판이 겹쳐 작용한 결과였다.
첫째,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부담이었다. 당시 루이나는 리처드 에반스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합법 정부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으나, 대통령 자신이 이미 노던 소사이어티 측에 사실상 연금 상태로 묶여 있었다. 진압군 지도부는 대통령이 자유롭게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무력 진압을 강행할 경우, 훗날 자신들이 “반란을 진압한 합법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정부 승인 없이 군 내부에서 또 다른 반란을 일으킨 집단”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정치적 두려움에 시달렸다. 특히 국방장관까지 파브르 측에 의해 생포된 뒤에는, 명령 체계상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뒷받침할 문서적·제도적 근거조차 부재하게 되었다.
둘째, 군 내부의 균열은 치명적이었다. 루이나군의 수도권 전력 상당수가 이미 노던 소사이어티 인맥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으며, 이는 곧 진압군이 전개할 수 있는 병력의 절대적 열세로 이어졌다. 표면적으로는 편제상 수만 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그 중 상당수는 여단장·연대장 등 지휘관들이 소사이어티와 내통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신뢰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진압군이 만약 무리하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면, 전선에서 반란군과 교전하기는커녕 내부 배신으로 전열이 무너질 위험이 컸다. 실제로 수경사 예하 부대가 전차 공격을 준비하던 순간조차, 일부 기갑 부대에서 이미 “사령관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내려오고 있었다는 점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셋째, 외부 위협도 무시할 수 없었다. 동부 국경에서는 콘스탄티노폴과의 긴장이 상존하고 있었는데, 반란군 진압을 위해 수도권의 주력 병력을 모두 투입한다면 국경 방어에 공백이 생길 수 있었다. 진압군 수뇌부는 혹여 이 틈을 타 콘스탄티노폴이 월경을 시도한다면 국가 전체가 돌이킬 수 없는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따라서 “내부 반란을 신속히 진압해야 한다”는 당위와 동시에 “국경 방위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모순된 명제가 병존하면서, 적극적인 전면 충돌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넷째, 시간에 대한 오판도 주저의 이유였다. 당시 많은 진압군 간부들은 반란군의 돌출 행동이 단기간 내에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는 안일한 판단을 가지고 있었다. 리처드 에반스 대통령이 끝내 재가를 거부하거나, 주둔 미군을 포함한 루미연합사가 빠르게 개입한다면 파브르 측의 반란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따라서 굳이 대규모 유혈 충돌을 일으켜 “군 내부에서 국군끼리 전쟁을 벌이는 참극”을 만들기보다는, 시간을 벌고 상황을 관리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결과적으로 반란군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결정적 실책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여론과 정통성 문제도 존재했다. 당시 루이나 사회는 이미 군부의 정치 개입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수도권 도심 한복판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극도로 우려했다. 진압군 지도부는 혹여 전차와 포병을 투입하여 보안사령부나 수도 주요 시설을 공격한다면, 군의 명분은커녕 국민 여론까지 등을 돌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수경사령관을 비롯한 강경파의 무력 진압 주장은 참모회의 단계에서 거듭 제동이 걸렸고, 결국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저와 망설임이 반복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들이 겹쳐, 진압군은 끝내 전면전을 피하고 제한적 대응만을 반복하다가 결국 반란군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결과적으로는 “내전 방지”라는 명분을 지키려다, 반란군에게 합법적 권력까지 내주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첫째,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부담이었다. 당시 루이나는 리처드 에반스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합법 정부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으나, 대통령 자신이 이미 노던 소사이어티 측에 사실상 연금 상태로 묶여 있었다. 진압군 지도부는 대통령이 자유롭게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무력 진압을 강행할 경우, 훗날 자신들이 “반란을 진압한 합법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정부 승인 없이 군 내부에서 또 다른 반란을 일으킨 집단”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정치적 두려움에 시달렸다. 특히 국방장관까지 파브르 측에 의해 생포된 뒤에는, 명령 체계상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뒷받침할 문서적·제도적 근거조차 부재하게 되었다.
둘째, 군 내부의 균열은 치명적이었다. 루이나군의 수도권 전력 상당수가 이미 노던 소사이어티 인맥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으며, 이는 곧 진압군이 전개할 수 있는 병력의 절대적 열세로 이어졌다. 표면적으로는 편제상 수만 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그 중 상당수는 여단장·연대장 등 지휘관들이 소사이어티와 내통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신뢰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진압군이 만약 무리하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면, 전선에서 반란군과 교전하기는커녕 내부 배신으로 전열이 무너질 위험이 컸다. 실제로 수경사 예하 부대가 전차 공격을 준비하던 순간조차, 일부 기갑 부대에서 이미 “사령관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내려오고 있었다는 점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셋째, 외부 위협도 무시할 수 없었다. 동부 국경에서는 콘스탄티노폴과의 긴장이 상존하고 있었는데, 반란군 진압을 위해 수도권의 주력 병력을 모두 투입한다면 국경 방어에 공백이 생길 수 있었다. 진압군 수뇌부는 혹여 이 틈을 타 콘스탄티노폴이 월경을 시도한다면 국가 전체가 돌이킬 수 없는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따라서 “내부 반란을 신속히 진압해야 한다”는 당위와 동시에 “국경 방위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모순된 명제가 병존하면서, 적극적인 전면 충돌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넷째, 시간에 대한 오판도 주저의 이유였다. 당시 많은 진압군 간부들은 반란군의 돌출 행동이 단기간 내에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는 안일한 판단을 가지고 있었다. 리처드 에반스 대통령이 끝내 재가를 거부하거나, 주둔 미군을 포함한 루미연합사가 빠르게 개입한다면 파브르 측의 반란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따라서 굳이 대규모 유혈 충돌을 일으켜 “군 내부에서 국군끼리 전쟁을 벌이는 참극”을 만들기보다는, 시간을 벌고 상황을 관리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결과적으로 반란군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결정적 실책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여론과 정통성 문제도 존재했다. 당시 루이나 사회는 이미 군부의 정치 개입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수도권 도심 한복판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극도로 우려했다. 진압군 지도부는 혹여 전차와 포병을 투입하여 보안사령부나 수도 주요 시설을 공격한다면, 군의 명분은커녕 국민 여론까지 등을 돌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수경사령관을 비롯한 강경파의 무력 진압 주장은 참모회의 단계에서 거듭 제동이 걸렸고, 결국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저와 망설임이 반복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들이 겹쳐, 진압군은 끝내 전면전을 피하고 제한적 대응만을 반복하다가 결국 반란군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결과적으로는 “내전 방지”라는 명분을 지키려다, 반란군에게 합법적 권력까지 내주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5. 사후 결과 [편집]
5.1. 진압군 측 주요 인사들에 대한 처리 [편집]
12·13 군사반란이 반란군의 승리로 귀결된 이후, 루이나 군부 내 진압군 세력은 신속하고 체계적인 숙청과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반란군 수뇌부는 단순히 지휘권을 장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향후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진압 의지를 보였던 고위 장성 및 참모들을 철저히 배제하거나 처단하였다.
반란 이후 가장 먼저 단행된 조치는 진압군 측 핵심 지휘관들의 강제 전역이었다. 수도경비사령관 에반 블레이크, 합참 차장 앤드루 로웰, 특전사령관 레오 포터 등은 모두 “지휘권 상실” 및 “정치적 불안 조성”을 이유로 즉각 전역 처분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식적인 군사재판 절차는 형식적으로만 진행되었고, 사실상 반란군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문책안”에 따른 인사조치였다. 이들의 이름은 군 인사기록부에서 삭제되거나 강등된 계급으로 기재되어, 공식적으로는 명예도 권한도 남지 않은 상태로 군문을 떠나야 했다.
보다 강하게 저항했던 인물들은 단순 전역이 아니라 구금의 길을 걸었다. 진압작전을 강행하려 했던 블레이크, 로웰, 그리고 국방부에서 끝까지 항거 의지를 드러냈던 작전참모부장 오웬 손 등은 보안사 분실로 이송되어 장기간 조사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10·26 사건 연루 혐의”나 “내란 방조 혐의”와 같은 명분이 덧씌워졌으며, 일부는 정식 재판 없이 군사법정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몇몇은 종신형이나 장기 복역형을 받고 정치적 생명을 완전히 잃었으며, 이후 일반 사회로 방출된 뒤에도 지속적인 감시와 차별을 피하지 못했다.
반란군은 특히 영향력이 크거나 민간 사회와의 연계가 깊었던 장교들에 대해서는 암살 혹은 의문사를 택했다. 대표적으로, 특전사령부 비서실장이었던 리처드 김 소령은 “무장저항 중 전사”로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반란군에 의해 사살된 것이 정황상 드러났다. 또 일부 장성들은 전역 이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나 병사(病死)로 기록되었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조직적인 제거로 보는 시각이 많다.
공식적인 처벌 이외에도, 반란군은 정치적 고립을 통해 진압군 인사들을 무력화시켰다. 이들의 가족은 사회적 낙인 속에서 공직 진출이나 군 관련 기관 근무가 사실상 불가능해졌으며, 일부는 해외 이주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군은 “내란을 방조한 장성”이라는 낙인을 찍어, 민간 정치권조차 이들을 옹호하거나 기용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반란군은 진압군 측 인사 몇 명을 공식적으로 처형하거나 공개 군사재판에 세움으로써 군 내부에 본보기를 남겼다. 이때 내린 형량은 대부분 과도할 정도로 가혹했으며, 이는 반란군 세력이 “정상적 명령 체계를 거부하는 자는 끝까지 처단된다”는 메시지를 심어 군 전체를 위축시키려는 목적이었다.
반란 이후 가장 먼저 단행된 조치는 진압군 측 핵심 지휘관들의 강제 전역이었다. 수도경비사령관 에반 블레이크, 합참 차장 앤드루 로웰, 특전사령관 레오 포터 등은 모두 “지휘권 상실” 및 “정치적 불안 조성”을 이유로 즉각 전역 처분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식적인 군사재판 절차는 형식적으로만 진행되었고, 사실상 반란군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문책안”에 따른 인사조치였다. 이들의 이름은 군 인사기록부에서 삭제되거나 강등된 계급으로 기재되어, 공식적으로는 명예도 권한도 남지 않은 상태로 군문을 떠나야 했다.
보다 강하게 저항했던 인물들은 단순 전역이 아니라 구금의 길을 걸었다. 진압작전을 강행하려 했던 블레이크, 로웰, 그리고 국방부에서 끝까지 항거 의지를 드러냈던 작전참모부장 오웬 손 등은 보안사 분실로 이송되어 장기간 조사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10·26 사건 연루 혐의”나 “내란 방조 혐의”와 같은 명분이 덧씌워졌으며, 일부는 정식 재판 없이 군사법정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몇몇은 종신형이나 장기 복역형을 받고 정치적 생명을 완전히 잃었으며, 이후 일반 사회로 방출된 뒤에도 지속적인 감시와 차별을 피하지 못했다.
반란군은 특히 영향력이 크거나 민간 사회와의 연계가 깊었던 장교들에 대해서는 암살 혹은 의문사를 택했다. 대표적으로, 특전사령부 비서실장이었던 리처드 김 소령은 “무장저항 중 전사”로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반란군에 의해 사살된 것이 정황상 드러났다. 또 일부 장성들은 전역 이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나 병사(病死)로 기록되었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조직적인 제거로 보는 시각이 많다.
공식적인 처벌 이외에도, 반란군은 정치적 고립을 통해 진압군 인사들을 무력화시켰다. 이들의 가족은 사회적 낙인 속에서 공직 진출이나 군 관련 기관 근무가 사실상 불가능해졌으며, 일부는 해외 이주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군은 “내란을 방조한 장성”이라는 낙인을 찍어, 민간 정치권조차 이들을 옹호하거나 기용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반란군은 진압군 측 인사 몇 명을 공식적으로 처형하거나 공개 군사재판에 세움으로써 군 내부에 본보기를 남겼다. 이때 내린 형량은 대부분 과도할 정도로 가혹했으며, 이는 반란군 세력이 “정상적 명령 체계를 거부하는 자는 끝까지 처단된다”는 메시지를 심어 군 전체를 위축시키려는 목적이었다.
5.2. 정권을 장악한 반란군 [편집]
12·13 군사반란이 일단락된 직후, 루이나의 권력 중심은 완전히 반란군, 즉 비달 파브르를 중심으로 한 노던 소사이어티 계열의 손에 들어갔다. 이들은 단순히 군 내부의 지휘권만이 아니라, 국가 최고 통치 권한까지 단계적으로 흡수하며 정권을 장악하였다.
반란의 직접적 성과는 곧바로 군 지휘권 장악으로 이어졌다. 참모총장 에드워드 스펜서의 체포로 인해 정규 지휘계통은 사실상 마비되었고, 육본·국방부·특전사·수경사령부 등 주요 부대가 반란군의 통제하에 놓였다. 반란군은 이를 기점으로 각 부대에 자신들의 심복 인사들을 임시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기존의 정규 지휘관들은 구금·전역·격하 조치를 통해 권한을 박탈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소한의 형식적 절차조차 무시되었으며, 군 내부에 남아 있던 진압 성향 인사들은 더 이상 반발할 힘을 가지지 못했다.
당시 루이나 대통령은 리처드 에반스 권한대행 체제였으나, 그는 반란 초반부터 경호실 병력에 의해 사실상 감금 상태에 있었다. 반란군은 이를 이용하여 대통령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봉쇄하고, 자신들의 요구 사항에 동의하도록 강요하였다. 특히 스펜서 체포 재가 문제와 관련해 대통령의 “재가” 서명을 받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반란군의 행동이 최소한의 ‘합법성’을 갖춘 것처럼 위장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반란군은 군사작전뿐 아니라 정치적 정당성까지 확보하는 데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국방부 장관은 반란군에 의해 신병이 확보된 뒤, 사실상 꼭두각시로 전락하였다. 그는 이후 반란군의 지시에 따라 진압군의 병력 동원을 억제하거나 “상황을 자제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진압 의지를 보이던 장성들을 고립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내각 내 다른 인사들 역시 반란군의 압력 하에 침묵하거나 협조할 수밖에 없었고, 루이나의 문민 정부는 단 하룻밤 사이에 실질적 기능을 상실하였다.
반란 성공 직후, 비달 파브르와 토머스 브래너 등 반란 주도 세력은 신속하게 정치권과 관료 조직에 손을 뻗쳤다. 의회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던 보수 성향 의원들은 처음에는 반발했으나, 군의 실질적 권력이 반란군에게 넘어갔다는 현실을 인지한 후 곧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협조하기 시작하였다. 주요 관료들 역시 강제 전출·사임 압력을 받아, 반란군이 추천한 인물들로 교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행정권과 입법권마저 사실상 군부의 장악 아래 놓이게 되었다.
반란군은 정권 장악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반대 세력의 철저한 제거에 나섰다. 반란 직후 ‘스펜서 계열’로 분류된 장성 및 관료들은 군사법정에서 “내란 선동 혐의”나 “군의 정치적 중립 훼손” 같은 죄목으로 기소되어 구속·전역 처분을 받았다. 이들 중 일부는 장기간 복역하였으며, 일부는 해외로 망명하였다.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던 언론인, 교수, 시민사회 인사들 역시 보안사와 경찰의 감시와 검열 속에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반란군은 자신들의 통치를 단순한 ‘쿠데타 성공’에 그치지 않고, 체제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우선 군 내부에서 노던 소사이어티 출신 인사들의 요직 임명을 통해 인사권을 장악하였으며, 동시에 반란군을 “국가 비상사태에 대응한 구국세력”으로 미화하는 공식 발표를 내놓았다. 이후 국가비상회의를 설치하여 행정·입법 기능을 대체하게 하였고, 반란 수괴 비달 파브르는 실질적 권력자로 부상하였다.
정권 장악의 마지막 단계는 국제사회의 묵인으로 완성되었다. 미국과 주변국들은 루이나의 정치적 불안정을 우려하며, 초기에는 반란을 비판했으나 곧 “질서 회복”과 “공산 세력 확산 방지”를 명분으로 사실상 새로운 군사 정권을 승인하였다. 이로써 반란군은 국제적 고립을 피하고, 대외 원조와 군사 지원을 계속 확보하면서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반란의 직접적 성과는 곧바로 군 지휘권 장악으로 이어졌다. 참모총장 에드워드 스펜서의 체포로 인해 정규 지휘계통은 사실상 마비되었고, 육본·국방부·특전사·수경사령부 등 주요 부대가 반란군의 통제하에 놓였다. 반란군은 이를 기점으로 각 부대에 자신들의 심복 인사들을 임시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기존의 정규 지휘관들은 구금·전역·격하 조치를 통해 권한을 박탈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소한의 형식적 절차조차 무시되었으며, 군 내부에 남아 있던 진압 성향 인사들은 더 이상 반발할 힘을 가지지 못했다.
당시 루이나 대통령은 리처드 에반스 권한대행 체제였으나, 그는 반란 초반부터 경호실 병력에 의해 사실상 감금 상태에 있었다. 반란군은 이를 이용하여 대통령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봉쇄하고, 자신들의 요구 사항에 동의하도록 강요하였다. 특히 스펜서 체포 재가 문제와 관련해 대통령의 “재가” 서명을 받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반란군의 행동이 최소한의 ‘합법성’을 갖춘 것처럼 위장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반란군은 군사작전뿐 아니라 정치적 정당성까지 확보하는 데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국방부 장관은 반란군에 의해 신병이 확보된 뒤, 사실상 꼭두각시로 전락하였다. 그는 이후 반란군의 지시에 따라 진압군의 병력 동원을 억제하거나 “상황을 자제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진압 의지를 보이던 장성들을 고립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내각 내 다른 인사들 역시 반란군의 압력 하에 침묵하거나 협조할 수밖에 없었고, 루이나의 문민 정부는 단 하룻밤 사이에 실질적 기능을 상실하였다.
반란 성공 직후, 비달 파브르와 토머스 브래너 등 반란 주도 세력은 신속하게 정치권과 관료 조직에 손을 뻗쳤다. 의회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던 보수 성향 의원들은 처음에는 반발했으나, 군의 실질적 권력이 반란군에게 넘어갔다는 현실을 인지한 후 곧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협조하기 시작하였다. 주요 관료들 역시 강제 전출·사임 압력을 받아, 반란군이 추천한 인물들로 교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행정권과 입법권마저 사실상 군부의 장악 아래 놓이게 되었다.
반란군은 정권 장악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반대 세력의 철저한 제거에 나섰다. 반란 직후 ‘스펜서 계열’로 분류된 장성 및 관료들은 군사법정에서 “내란 선동 혐의”나 “군의 정치적 중립 훼손” 같은 죄목으로 기소되어 구속·전역 처분을 받았다. 이들 중 일부는 장기간 복역하였으며, 일부는 해외로 망명하였다.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던 언론인, 교수, 시민사회 인사들 역시 보안사와 경찰의 감시와 검열 속에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반란군은 자신들의 통치를 단순한 ‘쿠데타 성공’에 그치지 않고, 체제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우선 군 내부에서 노던 소사이어티 출신 인사들의 요직 임명을 통해 인사권을 장악하였으며, 동시에 반란군을 “국가 비상사태에 대응한 구국세력”으로 미화하는 공식 발표를 내놓았다. 이후 국가비상회의를 설치하여 행정·입법 기능을 대체하게 하였고, 반란 수괴 비달 파브르는 실질적 권력자로 부상하였다.
정권 장악의 마지막 단계는 국제사회의 묵인으로 완성되었다. 미국과 주변국들은 루이나의 정치적 불안정을 우려하며, 초기에는 반란을 비판했으나 곧 “질서 회복”과 “공산 세력 확산 방지”를 명분으로 사실상 새로운 군사 정권을 승인하였다. 이로써 반란군은 국제적 고립을 피하고, 대외 원조와 군사 지원을 계속 확보하면서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6. 재판 [편집]
6.1. 사면 [편집]
7. 평가 [편집]
10.24 시민혁명 당시, 분노한 시민들이 무장 투쟁을 통해 계엄군을 몰아내고 대통령실로 쳐들어가 비달 파브르를 사살했다. 이 사건은 루이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으며, 국가의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시민들의 강력한 의지와 투쟁을 상징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비달 파브르는 국가를 혼란에 빠뜨린 내란의 주범으로 지목되었고, 그의 행동은 국가 질서의 근본적인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시민들은 그의 행위에 분노하며 무장 투쟁을 벌였고, 결국 계엄군을 몰아낸 후 대통령실로 침입해 비달 파브르를 벨포르 시청 광장 앞으로 끌고 나온 후, 성기와 귀를 잘라내고, 머리를 삭발한 후 비달 파브르의 가족을 사살하고 시민혁명의 주동자들은 자신들이 작성한 선고문을 읽은 후, 비달 파브르를 총살했다.
비달 파브르의 사망은 법적으로는 즉각적인 처벌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가 처벌받기 전에 이미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민주정부가 구성된 이후, 법원은 그의 내란죄와 국가적 범죄에 대한 사후 재판을 진행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비달 파브르의 사망은 법적으로는 즉각적인 처벌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가 처벌받기 전에 이미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민주정부가 구성된 이후, 법원은 그의 내란죄와 국가적 범죄에 대한 사후 재판을 진행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7.1. 내란행위에 대한 승인여부 (부정) [편집]
대법원뿐만 아니라 헌법재판소도 12·13 군사반란과 그에 따른 집권에 대해서 주권자인 국민의 일반의지(General will)에 따른 사후적 승인을 부정한다.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대법원 196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판시사항】
[1]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경우의 가벌성 여부(적극)【판결요지】
[1] [다수의견] 우리 나라는 제헌헌법의 제정을 통하여 국민주권주의, 자유민주주의, 국민의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등을 국가의 근본이념 및 기본원리로 하는 헌법질서를 수립한 이래 여러 차례에 걸친 헌법개정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한결같이 위 헌법질서를 그대로 유지하여 오고 있는 터이므로,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폭력으로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의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그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우리 나라의 헌법질서 아래에서는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 따라서 그 군사반란과 내란행위는 처벌의 대상이 된다.
위 판결문에서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라는 것은 선거 또는 투표를 뜻한다. 루이나는 대의제민주주의(간접민주주의) 국가로서 선거 또는 투표가 아닌 폭력에 의한 불법적인 집권을 원칙적으로 부정한다.
헌법재판소 1965. 12. 15. 선고 95헌마221·233·297(병합) 전원재판부〔취하〕 불기소처분취소라. 피의자 비달 파브르가 임시비상입법기구 등을 통한 간접선거에 의하여 두 차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나 제5공화국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에 의하여 통과된 것은 그것이 비록 형식적으로는 당시의 헌법과 법률의 규정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 진상이 은폐되고 계엄령 하의 강압적인 분위기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거나 국민의 의사를 정확히 반영할 수 없었던 대의기관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어서 이를 가리켜 국민이 자유롭게 그들의 주권적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상태에서 피의자들의 이 사건 내란행위에 대하여 승인을 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정상적으로 투표가 진행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비달 파브르 측은 이 사건 내란행위에 의하여 창출된 제5공화국의 질서가 국민의 저항으로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국민의 의사에 따른 새로운 헌법질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그 진상이 정확히 규명되지 아니한 채 국민의 상대적인 다수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로써 이 사건 내란행위에 대하여 국민의 승인이 있은 것으로 볼 수도 없다.
7.2. 통치행위에 대한 사법심사 가능성 (긍정) [편집]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판시사항】
[14] 비상계엄의 선포나 확대행위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는지 여부(한정 적극)【판결요지】
[14] 대통령의 비상계엄의 선포나 확대 행위는 고도의 정치적·군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행위라 할 것이므로, 그것이 누구에게도 일견하여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되는 것으로서 명백하게 인정될 수 있는 등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그러하지 아니한 이상 그 계엄선포의 요건 구비 여부나 선포의 당·부당을 판단할 권한이 사법부에는 없다고 할 것이나, 비상계엄의 선포나 확대가 국헌문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행하여진 경우에는 법원은 그 자체가 범죄행위에 해당하는지의 여부에 관하여 심사할 수 있다.
8. 형사재판 판결문으로 바라본 12·13 군사반란 당시 상황 [편집]
가. 피고인 비달 파브르, 브래드 슈레던, 헨리 파이크, 빌리 셔먼, 아이작 루이스, 노먼 하트, 피터 맥그로, 줄리안 크로스, 펠릭스 하르트만, 레오나르도 이스턴은 공모하여 다음과 같은 행위를 하였다.
(1) (에드워드 스펜서 육군참모총장의 체포)
1949.10.26. 중앙정보국장 루크 멕스웰에 의하여 조지 레이먼드 대통령이 암살된 세칭 ‘10·26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이튿날 루이나 전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비상계엄하에서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을 겸임하게 된 국군보안사령관 육군소장 피고인 비달 파브르는, 1949.12.13. 저녁 벨포르 소재 보안사 사무실에서 당시 보안사 인사처장 겸 합수부 조정국장이던 피고인 펠릭스 하르트만에게 무장 병력을 편성시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에드워드 스펜서를 강제 연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비달 파브르와 브래드 슈레던은 이 과정에서 총기의 사용과 유혈사태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도 이를 용인하였다. 에드워드 스펜서 총장을 체포하는 행위는 루이나 대통령 리처드 에반스의 재가를 받지 않았고, 국방장관의 승인이나 군사법원의 구속영장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하르트만은 수십 명의 무장 병력을 인솔하여 스펜서 총장의 벨포르 관저를 포위하고, “대통령의 승인이 있었다”라는 허위 사실을 고지한 뒤 총장의 신병을 확보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행부관 헨리 팔머 소령과 경호장교 로버트 스털링 대위가 총상을 입고 중태에 빠졌으며, 다수의 부관들이 강제로 무장 해제되었다.
(2) (대통령에 대한 강압)
피고인 비달 파브르는 곧이어 국무총리공관에 있던 리처드 에반스 대통령에게 스펜서 총장의 연행에 대한 재가를 요구하였다. 에반스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자, 파브르는 대통령 경호실 내부에 포섭해 둔 노던 소사이어티 인맥을 동원해 경호 인력을 무장 해제시키고 총리공관을 포위, 사실상 대통령을 연금하였다. 이로써 대통령의 자유로운 의사표시는 사실상 봉쇄되었다.
(3) (구출병력의 차단)
한편 육본과 합참에서는 스펜서 총장의 불법 연행에 반발하여 9공수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의 출동을 준비하였으나, 피고인 토머스 브래너·루크 하퍼 등은 각 군단장과 여단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출동을 자제하라”는 압박과 회유를 가했다. 이로써 진압병력의 상당수는 현장에서 발을 묶였으며, 사실상 반란군에게 시간과 공간을 내주게 되었다.
(4) (군 요직 장악)
12월 13일 00:00경, 제1공수여단장 조슈아 브룩스 준장은 파브르의 명령에 따라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벨포르의 육군본부와 국방부 청사를 점령하였다. 이어 제3공수여단장 에단 콜맨은 특전사령부를 기습하여 레오 포터 특전사령관을 체포하고, 비서실장 리처드 김 소령을 사살하였다. 같은 시각 제5공수여단 루카스 매디슨 준장은 삼각지 일대를, 제9사단장 토머스 브래너 소장은 중앙청을 각각 점령하였다.
(5) (수경사령관의 체포)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장 제이든 루이스 대령은 사령관 에반 블레이크 소장을 비롯한 육본 지휘부를 무력으로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합참본부장 오웬 손 장군이 총상을 입고 위독에 빠졌다.
나. (사전계획 등)
피고인 비달 파브르와 브래드 슈레던은 이미 12월 초부터 체포 계획을 은밀히 논의하고, 12월 7일 보안사 회의실에서 구체적 연행일자를 ‘12월 12일 밤’으로 확정하였다. 또한 특전사령관·수경사령관 등 진압 가능성이 있는 주요 지휘관들을 미리 연희동 연회석상에 초청해 부대를 떠나도록 만들어, 반란 개시 시점에서 사실상 지휘 공백을 조성하였다.
다. (지휘부의 운영)
피고인 파브르와 슈레던은 반란군 지휘부를 벨포르 수경사 제30경비단 단장실에 설치하고, 주요 인사들을 집결시켰다. 또한 보안사 상황실을 통제하여 군 통신망을 도청·차단하고, 진압군의 작전 명령을 사전에 파악·무력화하였다.
라. (법적 판단)
위 인정된 행위들은 살인, 살인미수, 불법체포, 불법감금 등의 개별 범죄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피고인들이 사전에 공모하여 군사반란을 일으킨 행위로 포괄된다. 피고인 비달 파브르는 반란의 수괴로서, 브래드 슈레던·토머스 브래너·루크 하퍼 등은 반란의 모의참여자, 에단 콜맨·루카스 매디슨 등은 반란의 지휘자, 알렉스 맥켄지·네이선 리드 등은 반란의 살상자로 각각 인정된다.
(하략)
(1) (에드워드 스펜서 육군참모총장의 체포)
1949.10.26. 중앙정보국장 루크 멕스웰에 의하여 조지 레이먼드 대통령이 암살된 세칭 ‘10·26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이튿날 루이나 전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비상계엄하에서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을 겸임하게 된 국군보안사령관 육군소장 피고인 비달 파브르는, 1949.12.13. 저녁 벨포르 소재 보안사 사무실에서 당시 보안사 인사처장 겸 합수부 조정국장이던 피고인 펠릭스 하르트만에게 무장 병력을 편성시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에드워드 스펜서를 강제 연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비달 파브르와 브래드 슈레던은 이 과정에서 총기의 사용과 유혈사태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도 이를 용인하였다. 에드워드 스펜서 총장을 체포하는 행위는 루이나 대통령 리처드 에반스의 재가를 받지 않았고, 국방장관의 승인이나 군사법원의 구속영장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하르트만은 수십 명의 무장 병력을 인솔하여 스펜서 총장의 벨포르 관저를 포위하고, “대통령의 승인이 있었다”라는 허위 사실을 고지한 뒤 총장의 신병을 확보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행부관 헨리 팔머 소령과 경호장교 로버트 스털링 대위가 총상을 입고 중태에 빠졌으며, 다수의 부관들이 강제로 무장 해제되었다.
(2) (대통령에 대한 강압)
피고인 비달 파브르는 곧이어 국무총리공관에 있던 리처드 에반스 대통령에게 스펜서 총장의 연행에 대한 재가를 요구하였다. 에반스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자, 파브르는 대통령 경호실 내부에 포섭해 둔 노던 소사이어티 인맥을 동원해 경호 인력을 무장 해제시키고 총리공관을 포위, 사실상 대통령을 연금하였다. 이로써 대통령의 자유로운 의사표시는 사실상 봉쇄되었다.
(3) (구출병력의 차단)
한편 육본과 합참에서는 스펜서 총장의 불법 연행에 반발하여 9공수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의 출동을 준비하였으나, 피고인 토머스 브래너·루크 하퍼 등은 각 군단장과 여단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출동을 자제하라”는 압박과 회유를 가했다. 이로써 진압병력의 상당수는 현장에서 발을 묶였으며, 사실상 반란군에게 시간과 공간을 내주게 되었다.
(4) (군 요직 장악)
12월 13일 00:00경, 제1공수여단장 조슈아 브룩스 준장은 파브르의 명령에 따라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벨포르의 육군본부와 국방부 청사를 점령하였다. 이어 제3공수여단장 에단 콜맨은 특전사령부를 기습하여 레오 포터 특전사령관을 체포하고, 비서실장 리처드 김 소령을 사살하였다. 같은 시각 제5공수여단 루카스 매디슨 준장은 삼각지 일대를, 제9사단장 토머스 브래너 소장은 중앙청을 각각 점령하였다.
(5) (수경사령관의 체포)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장 제이든 루이스 대령은 사령관 에반 블레이크 소장을 비롯한 육본 지휘부를 무력으로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합참본부장 오웬 손 장군이 총상을 입고 위독에 빠졌다.
나. (사전계획 등)
피고인 비달 파브르와 브래드 슈레던은 이미 12월 초부터 체포 계획을 은밀히 논의하고, 12월 7일 보안사 회의실에서 구체적 연행일자를 ‘12월 12일 밤’으로 확정하였다. 또한 특전사령관·수경사령관 등 진압 가능성이 있는 주요 지휘관들을 미리 연희동 연회석상에 초청해 부대를 떠나도록 만들어, 반란 개시 시점에서 사실상 지휘 공백을 조성하였다.
다. (지휘부의 운영)
피고인 파브르와 슈레던은 반란군 지휘부를 벨포르 수경사 제30경비단 단장실에 설치하고, 주요 인사들을 집결시켰다. 또한 보안사 상황실을 통제하여 군 통신망을 도청·차단하고, 진압군의 작전 명령을 사전에 파악·무력화하였다.
라. (법적 판단)
위 인정된 행위들은 살인, 살인미수, 불법체포, 불법감금 등의 개별 범죄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피고인들이 사전에 공모하여 군사반란을 일으킨 행위로 포괄된다. 피고인 비달 파브르는 반란의 수괴로서, 브래드 슈레던·토머스 브래너·루크 하퍼 등은 반란의 모의참여자, 에단 콜맨·루카스 매디슨 등은 반란의 지휘자, 알렉스 맥켄지·네이선 리드 등은 반란의 살상자로 각각 인정된다.
(하략)
9. 중앙대법원 결정문으로 바라본 군사반란 당시 상황 [편집]
중앙대법원 1965. 12. 15. 선고 95헌마221·233·297(병합) 전원재판부〔취하〕 (불기소처분취소)
(상략)
(1) 비상계엄 전국확대 전의 시국상황
(가) 정치·사회·학원 등의 동향
1949.10.26. 조지 레이먼드 대통령의 사망으로 당시 헌법규정에 따라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된 청구외 리처드 에반스 국무총리는 10.27. 04:00를 기하여 세인트 바룬 시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나, 그것은 합리적, 법리적 결정에 의한것이다.
그런데, 피의자 비달 파브르가 군내의 추종세력을 규합하여 1949.12.13. 군사반란을 일으켜서 청구외 에드워드 스펜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군내 반대세력을 제거한 뒤, 그의 추종세력을 군요직에 중용시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1980.4.14.에는 그 스스로 중앙정보부장서리직까지 겸임하자, 국민들 사이에는 민주화와 정치발전에 대한 비관론이 더욱 우세해졌다.
(하략)
(1) 비상계엄 전국확대 전의 시국상황
(가) 정치·사회·학원 등의 동향
1949.10.26. 조지 레이먼드 대통령의 사망으로 당시 헌법규정에 따라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된 청구외 리처드 에반스 국무총리는 10.27. 04:00를 기하여 세인트 바룬 시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나, 그것은 합리적, 법리적 결정에 의한것이다.
그런데, 피의자 비달 파브르가 군내의 추종세력을 규합하여 1949.12.13. 군사반란을 일으켜서 청구외 에드워드 스펜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군내 반대세력을 제거한 뒤, 그의 추종세력을 군요직에 중용시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1980.4.14.에는 그 스스로 중앙정보부장서리직까지 겸임하자, 국민들 사이에는 민주화와 정치발전에 대한 비관론이 더욱 우세해졌다.
(하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