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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 카엘몬트 왕조 제2대 국왕
카렐 1세
Karel Ⅰ
출생
1595년 11월 8일
사망
1647년 2월 9일 (향년 51세)[1]
루이나 왕국 벨포르 벨포르 의사당 앞 광장
재위기간
1626년 3월 27일 ~ 1647년 2월 9일
재임기간
1612년 8월 3일 ~ 1626년 3월 27일
1626년 3월 27일 ~ 1647년 2월 9일
1626년 3월 27일 ~ 1647년 2월 9일
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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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이름
카렐 제이머스 드 카엘몬트
(Karel James de Caelmont)
별칭
순교왕 (the Martyr)[2]
마지막 절대왕
아버지
어머니
형제
배우자
자녀
즉위 경위
부왕 제이머스 1세의 사망
재판
1647년 1월 20일 ~ 2월 6일
특별 고등법원[4]
죄목
반역 (유죄)
처형
1647년 2월 9일
벨포르 의사당 앞 광장
대관식
1626년 6월 2일
벨포르 벨포르 대성당
능묘
벨포르 대성당 왕실 묘소[5]
종교
루이나 교회 (고교회파)
군사 경력
복무
1642년 ~ 1647년
최종 지위
국왕 겸 총사령관
주요 전투
대관식 공식 초상화

1. 개요2. 생애3. 루이나 내전4. 재판과 처형
4.1. 특별 고등법원4.2. 처형
5. 사후6. 평가7. 여담8. 관련 문서

1. 개요 [편집]

루이나 왕국의 제14대 국왕이자 카엘몬트 왕조의 두 번째 군주. 루이나 역사상 재판을 거쳐 처형된 유일한 국왕이며, 그의 죽음으로 왕정이 12년간 중단되고 호국공 체제가 들어섰다.

왕권이 신으로부터 직접 온다는 신념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그 신념 때문에 왕관과 목숨을 모두 잃었다. 동시에 그 신념의 패배가 루이나 헌정사의 방향을 결정했다. 국왕이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걷을 수 없다는 원칙, 국왕이 상비군을 마음대로 둘 수 없다는 원칙은 모두 그와 의회의 충돌 과정에서 형성되어 1689년 왕위협약에 성문화되었다.

2. 생애 [편집]

3. 루이나 내전 [편집]

4. 재판과 처형 [편집]

4.1. 특별 고등법원 [편집]

의회 안에서도 국왕을 재판한다는 결정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온건파 의원들이 대거 배제된 뒤에야 특별 고등법원 설치가 가결되었다.

재판은 1647년 1월 20일에 시작되었다. 카렐 1세는 법원의 관할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왕을 재판할 권한은 지상의 어떤 법정에도 없으며, 따라서 자신은 피고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세 차례에 걸쳐 답변을 요구받았으나 모두 거부했고, 끝내 변론하지 않았다.

2월 6일 법원은 반역죄로 유죄를 선고했다.

4.2. 처형 [편집]

1647년 2월 9일, 벨포르 의사당 앞 광장에서 처형이 집행되었다. 1372년 알드리크 1세가 추대를 받아 왕관을 쓴 바로 그 광장이었다.

그날 아침 국왕은 셔츠를 두 벌 겹쳐 입었다. 추위에 떠는 모습이 두려움으로 보일까 우려해서였다고 전한다. 처형대에서 그는 짧게 발언했다. 자신은 신민의 자유를 위해 죽지만 그 자유가 통치에 참여할 권리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취지였다.

처형 직후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서 신음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는 기록이 여러 편 남아 있다.

5. 사후 [편집]

처형 3주 뒤 시몬 하드윅벨포르 의회의 추대로 초대 호국공에 올랐다. 왕정은 12년간 중단되었다.

유해는 카엘몬트 성 예배당에 비공개로 안장되었다. 1659년 왕정복고 이후 카렐 2세가 이를 벨포르 대성당 왕실 묘소로 이장했다.

왕정복고 이후 왕당파는 그를 순교왕이라 불렀고, 루이나 교회 고교회파는 한동안 2월 9일을 기념일로 지켰다. 이 호칭과 기념일은 19세기까지 살아남아 루이나 계승전쟁 당시 은사슴단의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

6. 평가 [편집]

개인으로서의 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일치한다. 검소하고 신실했으며 예술을 후원했고 사생활에 흠이 없었다. 문제는 그가 왕이었다는 데 있었다.

그는 타협을 신념의 배신으로 여겼다. 왕권이 신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것을 조금이라도 양보하는 일은 신에 대한 불충이 된다. 이 논리는 내적으로 일관되었으나, 그 일관성 때문에 그는 물러설 수 있는 모든 지점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루이나 의회주의는 그의 패배 위에 세워졌다. 그가 굽히지 않았기에 갈등은 원칙의 문제로 끝까지 갔고, 그 결과 국왕의 과세권과 상비군 유지권에 대한 제약이 관행이 아니라 법으로 확정되었다. 1689년 왕위협약의 조항들은 대부분 그와 의회가 다투었던 쟁점의 목록과 겹친다.

그가 법정에서 끝내 인정하지 않았던 명제, 곧 왕을 심판할 권한이 대표기구에 있다는 주장은 238년 뒤 다른 형태로 되돌아왔다. 1885년 벨포르 의회는 국왕을 재판하는 대신, 1372년에 왕관을 준 것이 자신들이므로 거두어들일 수도 있다는 논리로 왕위 자체를 폐지했다. 그 결의가 통과된 의사당은 그가 처형된 광장에 면해 있다.

7. 여담 [편집]

  • 루이나 국왕 가운데 키가 가장 작았다고 전한다.
  • 말을 심하게 더듬었으며, 공식 석상에서 발언을 최소화하는 습관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 그가 수집한 회화와 조각은 호국공 체제에서 대부분 매각되었다. 카렐 2세가 일부를 되사들였으나 상당수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 1642년 이후 어떤 루이나 국왕도 의사당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 관례는 왕정이 폐지된 뒤에도 형태를 바꾸어 남아, 오늘날 루이나 대통령은 의회의 초청 없이 의사당에 출입하지 않는다.

8. 관련 문서 [편집]

[1] 루이나 역사상 재판을 거쳐 처형된 유일한 국왕이다. 코르윈 2세의 경우는 전장에서 포로가 된 뒤 승자가 즉결 처단한 사례로 구분된다.[2] 왕정복고 이후 왕당파가 쓰던 호칭으로, 루이나 교회 고교회파는 한동안 그의 처형일을 기념일로 지켰다.[3] 플로렌시아 왕녀이자 가톨릭 신자. 왕비가 궁정에서 공공연히 미사를 올린 것은 재위 내내 의회와 개혁파의 의심을 샀고, 루이나 내전의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4] 국왕을 재판할 권한이 어디에도 없다는 이유로 카렐 1세는 법원의 관할권 자체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고, 변론도 거부했다.[5] 처형 직후에는 카엘몬트 성 예배당에 비공개로 안장되었고, 1659년 왕정복고 이후 카렐 2세가 왕실 묘소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