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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랜드 차르국 Саландско Царство Tsardom of Saland | |||
국기 (1907-1917)[1] | 대형 국장 | ||
정부기 (1762-1907) | 소형 국장 | ||
Богъ чува Саландъ![* "보그 추바 살란드!"로 읽는다. 1919년 철자 개정 이후의 표기는 'Бог чува Саланд!'이다.] 하느님께서 사랜드를 지키시노라! | |||
상징 | |||
국가 | Молитва за Цара 차르를 위한 기도 | ||
위치 | |||
711년 ~ 1917년 3월 16일 | |||
칭제 이전 | 멸망 이후 | ||
역사 | |||
지리 | |||
인문 환경 | |||
정치 | |||
경제 | |||
통화 | |||
언어별 명칭 |
1. 개요 [편집]
제정 사랜드(帝政-, 사랜드어: Саландско Царство 살란드스코 차르스트보), 정식 국호 사랜드 차르국은 711년 인크론슈타트 공작 인터르스키 1세가 남랜드 평원을 통일하고 차르를 칭한 때부터 1917년 장미 혁명으로 군주정이 무너질 때까지 1,206년 동안 존속한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네 왕조가 차례로 제위를 이었지만 차르 칭호와 '사랜드'라는 국체는 끝까지 유지되었다. 말기의 판도는 오늘날 사비에트 전역과 북부 고원의 고랜드를 아울렀다.
'사랜드'는 고랜드 시대에 고원 아래 저지대를 일컫던 '아랫땅'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인터르스키 1세는 3세기 로마의 침략으로 무너진 고대 사랜드 제국의 계승을 내세워 차르를 칭했으나, 두 나라 사이에는 400여 년의 분열기와 6~7세기 슬라브인의 대이주가 끼어 있어 혈통으로도 언어로도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제정의 지배층은 옛 사랜드인과 섞인 남슬라브계였고, 옛 사랜드어는 동남부 산지의 카스탄족에게만 남았다. '제정 사랜드'라는 이름은 이 나라를 고대 사랜드 제국, 1917년 이후의 사랜드 공화국, 1949년 이후의 사비에트와 구분하기 위해 쓰인다. '차르 사랜드'라는 표현도 가끔 쓰인다.
제정 초기의 차르들은 옛 제국의 동방 영역을 되찾으려 동쪽으로 원정해 8세기 중엽까지 동부 저지대의 제방 연합들로부터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789년 사무탁호를 둘러싼 빌베른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로는 약 300년 동안 이 늪지대를 두고 국경 분쟁을 되풀이했다. 13세기 중엽 몽골의 침입은 제정을 뿌리째 흔들었다. 1259년 수도 인크론슈타트가 함락되며 인크론슈타트 왕조가 끊겼고, 원은 비어 버린 동부에 고려인·화북 한인·열도인·대월인을 강제로 옮겨 훗날 북산과 동사랜드의 모체를 만들었다. 1291년 서부 변경의 영주 스테판 즐라토미르가 인크론슈타트를 되찾아 즐라토미로비치 왕조를 열었지만, 1321년 몬타나 화산 대분화와 1349년 흑사병이 겹치며 동부 저지대는 제정의 손을 완전히 떠났다.
1597년 즐라토미로비치 왕조가 후사 없이 끊기자 제위를 둘러싼 내란, 이른바 '혼란기'가 14년 동안 이어졌고, 1611년 귀족 회의가 추대한 보그단 1세가 스베토자레비치 왕조를 열었다. 보그단 1세는 1620년대 동쪽의 남꽝 왕국을 침공했으나 청평의 원군에 막혀 1627년 롱 강을 경계로 강화했고, 이 선은 오늘날 사비에트와 동사랜드의 국경으로 남았다. 동방 진출이 막히자 제정은 안으로 눈을 돌렸다. 1652년 반포된 대법전은 농민을 토지와 영주에게 묶는 농노제를 법으로 굳혔고, 1661년에는 건국자의 이름을 딴 서부의 신도시 인터그라드로 수도를 옮겼다. 1762년 궁정 정변으로 즉위한 여제 옐레나 1세는 벨로슬라비치 왕조를 열었고, 고대부터 이어진 고원 가장자리의 국경 분쟁 끝에 1784년 고랜드를 병합해 직할 현으로 편입하며 제정의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근세 사랜드는 끝까지 농노제에 기반한 농업 제국이었다. 19세기에 페타르 3세를 비롯한 몇몇 차르가 농노 해방과 근대화를 시도했지만 토지와 농노를 쥔 귀족층의 반발에 번번이 좌초했고, 제정은 농노제와 전제정을 그대로 안은 채 20세기를 맞았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인터그라드에 총파업이 번지고 평원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마지막 차르 라자르 2세는 1907년 《국가기본법》을 공포하고 양원제 의회 사보르를 열었다. 하지만 차르가 의회를 수시로 해산하면서 입헌정은 형식에 그쳤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제정 사랜드는 러시아 제국과 함께 협상국 편으로 참전했다. 차르와 궁정은 이 전쟁을 제정의 위신을 되살릴 기회로 여겼지만, 농노 출신 징집병과 낡은 보급 체계로 치른 소모전은 재앙이었다. 1916년 흉작으로 인터그라드를 비롯한 대도시의 빵 배급이 끊겼고, 1917년 3월 인터그라드 방직공장 여공들이 붉은 장미를 가슴에 달고 거리로 나섰다. 진압 명령을 받은 수비대 일부가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3월 16일 라자르 2세가 퇴위했고, 711년 이래 1,206년 동안 이어진 제정은 막을 내렸다. 뒤이은 임시정부는 1918년 농노제를 폐지하고 1920년 사랜드 공화국을 정식으로 출범시켰지만, 공화국은 끝내 토지 문제를 매듭짓지 못했고 1949년 붉은 혁명을 거쳐 사비에트로 이어졌다.
'사랜드'는 고랜드 시대에 고원 아래 저지대를 일컫던 '아랫땅'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인터르스키 1세는 3세기 로마의 침략으로 무너진 고대 사랜드 제국의 계승을 내세워 차르를 칭했으나, 두 나라 사이에는 400여 년의 분열기와 6~7세기 슬라브인의 대이주가 끼어 있어 혈통으로도 언어로도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제정의 지배층은 옛 사랜드인과 섞인 남슬라브계였고, 옛 사랜드어는 동남부 산지의 카스탄족에게만 남았다. '제정 사랜드'라는 이름은 이 나라를 고대 사랜드 제국, 1917년 이후의 사랜드 공화국, 1949년 이후의 사비에트와 구분하기 위해 쓰인다. '차르 사랜드'라는 표현도 가끔 쓰인다.
제정 초기의 차르들은 옛 제국의 동방 영역을 되찾으려 동쪽으로 원정해 8세기 중엽까지 동부 저지대의 제방 연합들로부터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789년 사무탁호를 둘러싼 빌베른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로는 약 300년 동안 이 늪지대를 두고 국경 분쟁을 되풀이했다. 13세기 중엽 몽골의 침입은 제정을 뿌리째 흔들었다. 1259년 수도 인크론슈타트가 함락되며 인크론슈타트 왕조가 끊겼고, 원은 비어 버린 동부에 고려인·화북 한인·열도인·대월인을 강제로 옮겨 훗날 북산과 동사랜드의 모체를 만들었다. 1291년 서부 변경의 영주 스테판 즐라토미르가 인크론슈타트를 되찾아 즐라토미로비치 왕조를 열었지만, 1321년 몬타나 화산 대분화와 1349년 흑사병이 겹치며 동부 저지대는 제정의 손을 완전히 떠났다.
1597년 즐라토미로비치 왕조가 후사 없이 끊기자 제위를 둘러싼 내란, 이른바 '혼란기'가 14년 동안 이어졌고, 1611년 귀족 회의가 추대한 보그단 1세가 스베토자레비치 왕조를 열었다. 보그단 1세는 1620년대 동쪽의 남꽝 왕국을 침공했으나 청평의 원군에 막혀 1627년 롱 강을 경계로 강화했고, 이 선은 오늘날 사비에트와 동사랜드의 국경으로 남았다. 동방 진출이 막히자 제정은 안으로 눈을 돌렸다. 1652년 반포된 대법전은 농민을 토지와 영주에게 묶는 농노제를 법으로 굳혔고, 1661년에는 건국자의 이름을 딴 서부의 신도시 인터그라드로 수도를 옮겼다. 1762년 궁정 정변으로 즉위한 여제 옐레나 1세는 벨로슬라비치 왕조를 열었고, 고대부터 이어진 고원 가장자리의 국경 분쟁 끝에 1784년 고랜드를 병합해 직할 현으로 편입하며 제정의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근세 사랜드는 끝까지 농노제에 기반한 농업 제국이었다. 19세기에 페타르 3세를 비롯한 몇몇 차르가 농노 해방과 근대화를 시도했지만 토지와 농노를 쥔 귀족층의 반발에 번번이 좌초했고, 제정은 농노제와 전제정을 그대로 안은 채 20세기를 맞았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인터그라드에 총파업이 번지고 평원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마지막 차르 라자르 2세는 1907년 《국가기본법》을 공포하고 양원제 의회 사보르를 열었다. 하지만 차르가 의회를 수시로 해산하면서 입헌정은 형식에 그쳤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제정 사랜드는 러시아 제국과 함께 협상국 편으로 참전했다. 차르와 궁정은 이 전쟁을 제정의 위신을 되살릴 기회로 여겼지만, 농노 출신 징집병과 낡은 보급 체계로 치른 소모전은 재앙이었다. 1916년 흉작으로 인터그라드를 비롯한 대도시의 빵 배급이 끊겼고, 1917년 3월 인터그라드 방직공장 여공들이 붉은 장미를 가슴에 달고 거리로 나섰다. 진압 명령을 받은 수비대 일부가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3월 16일 라자르 2세가 퇴위했고, 711년 이래 1,206년 동안 이어진 제정은 막을 내렸다. 뒤이은 임시정부는 1918년 농노제를 폐지하고 1920년 사랜드 공화국을 정식으로 출범시켰지만, 공화국은 끝내 토지 문제를 매듭짓지 못했고 1949년 붉은 혁명을 거쳐 사비에트로 이어졌다.
2. 상징 [편집]
2.1. 국기 [편집]
제정 사랜드 국기 | 차르기 | |
1762~1907 | 1907~1917 | 1858~1917 |
제정 사랜드 말기의 국기는 위에서부터 자주·금·백의 가로 삼색기였다. 자주는 고대 사랜드 제국에서 이어받았다고 여겨진 차르의 권위를, 금은 하느님과 정교 신앙을, 백은 평원의 백성을 뜻했다.
자주·금·백 삼색기는 1731년 스베토자레비치 왕조가 상선기로 지정하면서 처음 공식 기록에 나타났다. 이후 상인과 도시민 사이에 널리 퍼져 사실상 '백성의 기'로 자리잡았지만, 정부 기관과 군대는 1762년 옐레나 1세의 칙령으로 정해진 정부기, 곧 자주 바탕에 금색 그리핀을 넣은 깃발만 쓸 수 있었다. 차르의 깃발과 백성의 깃발이 따로 걸리는 이 이중 체제는 145년 동안 이어지다가, 1907년 《국가기본법》이 삼색기를 유일한 국기로 정하면서 끝났다. 정부는 이를 입헌정의 상징으로 선전했지만, 같은 법이 차르의 전제권을 거의 그대로 남겨 두었기 때문에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깃발만 입헌을 했다"고 비꼬았다.
차르기는 금색 바탕에 자주색 그리핀을 넣은 깃발로, 1858년 페타르 3세의 문장 개혁 때 정해졌다. 차르가 머무는 궁전과 차르가 탄 함선, 차르의 행차에만 게양했다.
2.2. 국장 [편집]
제정 사랜드 국장 | |
대형 국장 | |
중형 국장 | |
소형 국장 | |
제정 사랜드의 국장은 대형·중형·소형 세 가지였다. 1858년 페타르 3세의 문장 개혁 때 가장 화려하고 복잡한 대형 국장이 정해졌고, 이듬해 이를 간략화한 중형과 소형 국장이 차례로 나왔다.
국장의 중심은 자주색 방패 안에 앞발을 들고 일어선 금색 그리핀이다. 그리핀은 머리에 사랜드 차르관을 쓰고 오른 앞발에는 홀을, 왼 앞발에는 수문 열쇠를 쥐고 있다. 그리핀은 본래 고대 사랜드 제국의 수리 관청이 인장에 새기던 수호수로, 물길과 곳간을 지키는 짐승이었다. 인터르스키 1세가 고대 제국의 계승을 내세우며 이 짐승을 가문 문장 위에 얹은 뒤로, 네 왕조가 바뀌는 동안에도 그리핀만은 한 번도 문장에서 빠지지 않았다. 왼발의 수문 열쇠는 평원의 물길을 다스리는 자가 곧 평원의 주인이라는, 분수 전쟁 이래의 오랜 관념을 담은 것이다. 그리핀의 가슴에 박힌 작은 방패는 인크론슈타트 공작가의 문장으로, 자주 바탕에 은빛 성탑이 그려져 있다.
방패 위에는 인터르스키 1세의 것으로 전해지는 투구가 얹혀 있고, 방패 양옆으로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이 서 있다. 그 뒤를 흰 담비 털을 댄 자주색 망토가 덮으며, 망토 위에는 사랜드 차르관이 놓이고 망토 띠에는 표어 'Богъ чува Саландъ(하느님께서 사랜드를 지키시노라)'가 적혀 있다. 아래에서부터는 금빛 밀 이삭과 참나무 가지가 문장을 감싸고, 그 위에 인크론슈타트·인터그라드·평원 중부·서부 변경·북서 삼림·남부 해안·카스탄 산지·고원현 여덟 지방의 문장이 얹혀 있다. 대형 국장에는 이미 잃은 동부 저지대의 문장도 권리 주장의 뜻으로 함께 들어갔는데, 이 때문에 남꽝 왕국과 청평이 외교 경로로 항의한 일도 있었다.
제정 사랜드 역대 국장 | ||
~711 (인크론슈타트 공국) | 711~1259 | 1291~1597 |
1611~1762 | 1762~1858 | 1858~1917 |
2.3. 국가 [편집]
2.3.1. 일어나라, 그리핀이여! [편집]
〈일어나라, 그리핀이여!(Устани, грифоне!, 1784–1841)〉 |
1841년까지 불린 비공식 국가이다. 궁정 시인 바실리예 데스포토비치(Василије Деспотовић, 1741년 ~ 1809년)가 작사하고 마르코 일리치(Марко Илић, 1752년 ~ 1820년)가 작곡했다. 1784년 옐레나 1세의 군대가 고원의 아바나 요새를 함락하고 고원 병합을 마무리한 것을 기념해 지은 노래로, 이듬해 대관 기념일 연회에서 처음 불린 뒤 궁정 행사와 열병식에서 사실상의 국가로 쓰였다. 후렴에서 여제를 '사랜드의 어머니'로 찬양하는 탓에 남성 차르가 즉위한 뒤로는 후렴 가사를 바꿔 부르는 일이 잦았다.
- 가사 [펼치기ㆍ접기]
- 절사랜드어번역1Устани, грифоне златни,
Рашири крила надъ висомъ!
Пали су зидови горски,
Саландъ стои надъ брдомъ.일어나라, 황금빛 그리핀이여,
고지 위로 날개를 펼쳐라!
산의 성벽이 무너졌으니,
사랜드가 언덕 위에 섰도다.후렴Слава теби, Царице наша!
Слава, мати Саланда!영광을, 우리의 여제시여!
영광을, 사랜드의 어머니시여!2Видите, равнице широке,
Видите, воде бистре:
Одъ висова до мора
Едно срдце, една вѣра!보라, 드넓은 평원이여,
보라, 맑은 물길이여.
고지에서 바다까지
한마음, 한 믿음이로다!
2.3.2. 차르를 위한 기도 [편집]
〈차르를 위한 기도(Молитва за Цара, 1841–1917)〉 |
1841년 차르 미하일로 2세의 칙령으로 공식 국가가 되어 1917년 제정이 무너질 때까지 불렸다. 시인 요반 라도비치(Јован Радовић, 1798년 ~ 1866년)가 작사했고 궁정 악장 드라구틴 마르코비치(Драгутин Марковић, 1803년 ~ 1874년)가 작곡했다. 1907년 《국가기본법》은 이 곡을 국가로 명시했다.
장미 혁명 첫날 거리로 나선 여공들 가운데 상당수도 이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고 전한다. 사흘 뒤 같은 거리에서는 같은 곡조에 '차르' 대신 '빵'을 넣은 개사곡이 불렸다.
- 가사 [펼치기ㆍ접기]
- 절사랜드어독음번역1Боже вѣчни, Цара чувай!
Моћнога, праведнога,
Царуй намъ на славу!
Боже, Цара чувай!보제 베치니, 차라 추바이!
모치노가, 프라베드노가,
차루이 남 나 슬라부!
보제, 차라 추바이!영원하신 하느님, 차르를 지키소서!
강하시고 의로우신 분을,
우리의 영광을 위해 다스리소서!
하느님, 차르를 지키소서!2Царуй на страхъ душманима,
Царе православни!
Боже, Цара чувай,
Саландъ благослови!차루이 나 스트라흐 두슈마니마,
차레 프라보슬라브니!
보제, 차라 추바이,
살란드 블라고슬로비!원수들이 떨도록 다스리소서,
정교의 차르시여!
하느님, 차르를 지키소서,
사랜드를 축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