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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 연합왕국 마지막 왕비
아델하이트
Adelheid
출생
1846년 9월 18일
사망
1901년 3월 22일 (향년 54세)
재임기간
1878년 12월 14일 ~ 1882년 4월 17일
1882년 12월 ~ 1885년 2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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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이름
아델하이트 마리 폰 하르슈타트
(Adelheid Marie von Harstadt)
별칭
목수왕의 왕비
마지막 왕비
아버지
어머니
배우자
에드먼드 3세 (1867년 결혼 / 1882년 사망)
자녀
없음
옹립
재판
1885년
반역 (유죄)
종신 국외 추방[4]
능묘
생마르탱 수도원
종교

1. 개요2. 생애
2.1. 하르슈타트의 공녀2.2. 왕태자비와 왕비2.3. 1882년2.4. 옹립의 동기2.5. 전쟁과 몰락2.6. 재판과 추방
3. 평가4. 관련 문서

1. 개요 [편집]

루이나 연합왕국의 마지막 왕비. 에드먼드 3세의 배우자이며, 국왕 사후 가스파르 뮈롱을 왕으로 옹립하려다 루이나 계승전쟁을 촉발한 인물이다.

510년간 이어진 루이나 왕정을 끝낸 사람으로 기록된다. 본인의 의도는 정반대였다. 그는 왕조를 잇기 위해 움직였고, 그 결과로 왕조가 사라졌다.

2. 생애 [편집]

2.1. 하르슈타트의 공녀 [편집]

1846년 대륙의 소공국 하르슈타트에서 태어났다. 하르슈타트 공가는 영토가 작았으나 유럽 각지의 왕실과 촘촘하게 혼맥을 맺고 있었고, 계보에 관한 한 대륙에서 손꼽히는 집안이었다. 이 집안이 보관하던 혼인 기록이 훗날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867년 스물한 살에 루이나 왕태자 에드먼드와 혼인했다. 당시 왕태자는 스물여섯이었고 이미 24년째 왕태자였다.

2.2. 왕태자비와 왕비 [편집]

혼인 후 11년을 왕태자비로 지냈다. 시어머니 아멜리아 1세는 부군을 잃은 뒤 은둔 상태였고, 왕실의 공적 기능은 사실상 멈춰 있었다. 이 시기 아델하이트는 자선 사업과 병원 후원을 맡아 왕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자녀는 생기지 않았다. 혼인 10년이 지나면서 이는 궁정의 공공연한 문제가 되었고, 그에게 책임이 돌아갔다. 왕태자 부부가 이 문제로 다투었다는 기록이 여럿 남아 있다.

1878년 시어머니가 사망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왕비로 지낸 기간은 3년 4개월에 불과했다.

2.3. 1882년 [편집]

1882년 4월 국왕이 낙마 사고로 급사했다. 후사는 없었고 계승 순위는 대륙에 흩어진 린데나우가 분가들로 넘어갔으나, 이들은 루이나와의 관계가 옅었고 의회 안에 지지 기반도 없었다. 논의는 교착되었다.

이 교착 속에서 왕비는 전혀 다른 계보를 꺼내 들었다. 친정이 보관하던 혼인 기록을 뒤져, 1689년 폐위된 제이머스 2세의 후손이 대륙 북부 벨덴에 아직 남아 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그해 겨울 그는 선박 목수 가스파르 뮈롱을 벨포르로 불러들여 「제이머스 3세」로 즉위시킬 것을 요구했다.

2.4. 옹립의 동기 [편집]

왕비의 의도를 두고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권력 기획설이다. 기반도 지지 세력도 없는 인물을 왕위에 앉히면 실권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돌아오리라 계산했다는 것으로, 후대 역사학의 다수설이다. 실제로 그는 옹립 직후부터 뮈롱의 이름으로 문서를 발행했고 전쟁 내내 왕당파의 실질적 결정권자였다.

다른 하나는 왕조 보존설이다. 그가 지키려 한 것은 자신의 지위가 아니라 왕정 그 자체였으며, 린데나우 방계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정통성이 더 오래된 카엘몬트 혈통을 세우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는 해석이다. 자녀를 두지 못해 왕조 단절의 책임을 안고 있던 그의 처지를 근거로 든다.

두 해석은 배타적이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가 의회의 반대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2.5. 전쟁과 몰락 [편집]

1883년 3월 은사슴단이 뮈롱을 국왕으로 선포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왕비는 남부 고지에 머물며 왕당파의 자금과 대외 교섭을 맡았다. 대륙의 친정과 인척 왕실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해군을 장악한 의회파가 해상을 봉쇄한 뒤로는 이 통로마저 막혔다.

1885년 초 남부 고지의 마지막 거점이 함락되자 그는 대륙으로 탈출을 시도하다 항구에서 체포되었다.

2.6. 재판과 추방 [편집]

재판에서 그는 자신의 행위가 반역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왕이 없는 나라에 왕을 세우려 한 것이 어떻게 왕에 대한 반역이 되느냐는 논리였다. 의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왕을 세울 권한이 대표기구에 있는 이상, 그 권한을 사칭한 것 자체가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는 것이었다.

유죄가 선고되었고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외국 왕실 출신이라는 점과 외교적 파장을 고려해 종신 국외 추방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플로렌시아의 생마르탱에 정착했다. 제이머스 2세가 망명 끝에 죽은 그 도시였고, 그가 왕으로 세우려 한 뮈롱의 5대조가 묻힌 곳이었다. 1901년 그곳에서 사망해 같은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평가 [편집]

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가혹하다. 한 사람의 판단 착오로 6만 명이 죽고 510년의 왕정이 끝났다는 서술이 오랫동안 표준이었다.

다만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다른 시각도 제기된다. 1882년의 계승 위기는 그가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것이었고, 국왕에게 후사가 없다는 사실은 15년간 알려져 있었으나 왕실도 의회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한 일은 그 공백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메우려 한 것뿐이며, 만약 의회가 미리 계승 순위를 정해 두었다면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을 시도라는 지적이다.

또 하나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가 붙잡은 그 틈이 1689년에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왕위협약제이머스 2세의 계승권을 명시적으로 박탈하는 대신 왕위가 비었다는 법리를 택했기 때문에, 그 계열의 청구권은 200년 가까이 형식상 살아 있었다. 국왕을 재판하지 않으려 한 1689년의 신중함이 1882년에 대가를 치른 셈이다.

4. 관련 문서 [편집]

[1] 공교롭게도 제이머스 2세가 망명 끝에 사망한 곳과 같은 도시였다. 그가 왕으로 세우려 한 가스파르 뮈롱의 5대조가 묻힌 곳이기도 하다.[2] 공식 직함은 없었다. 가스파르 뮈롱의 이름으로 발행된 문서 대부분이 그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3] 친정 하르슈타트가가 18세기에 카엘몬트 왕조 망명 계열과 혼인한 적이 있어 계보를 추적할 수 있었다.[4]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외국 왕실 출신이라는 점과 외교적 파장을 고려해 감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