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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2. 배경
2.1. 1925년 감독 체제의 전환2.2. 캐슬리 그룹의 형성
3. 조작의 구조
3.1. 1단계: 자산 재평가3.2. 2단계: 계열 간 가공 매출3.3. 3단계: 유상증자3.4. 4단계: 통정매매와 자전거래3.5. 5단계: 예금의 전용3.6. 6단계: 위조 담보증권3.7. 6월 명부
4. 관련 인물5. 전개
5.1. 1927년5.2. 1928년5.3. 1929년 이후
6. 특별검사 수사
6.1. 특별검사법6.2. 수사 방식6.3. 기소의 한계
7. 재판
7.1. 1심
7.1.1. 판결문
7.2. 항소심7.3. 상고심
8. 정치적 파장
8.1. 프레스콧 정권8.2. 사회민주당의 창당8.3. 의원 불기소 논란
9. 제도 개혁10. 평가
10.1. 사건의 성격10.2. 법의 공백10.3. 비판
11. 여담12. 관련 문서

1. 개요 [편집]

벨포르 증권 스캔들(Belfort Securities Scandal)은 1927년 루이나에서 캐슬리 합동투자를 정점으로 하는 캐슬리 그룹이 3층 지주회사 구조와 조작된 회계장부, 계열 은행의 예금, 위조 담보증권을 동원해 주가를 인위적으로 부양하다 붕괴한 사건이자, 그 과정에서 현직 관료와 의원 141명이 액면가로 신주를 배정받은 사실이 드러난 정경유착 사건이다.

1925년 하워드 S. 프레스콧 정권이 증권거래 감독 권한을 정부에서 거래소 자율규제위원회로 넘긴 뒤 2년 만에 터졌으며, 붕괴 당시 캐슬리 그룹의 시가총액은 벨포르 증권거래소 전체의 9%에 달했다. 확인된 투자자 손실은 3억 8천만 루이나 달러, 피해자는 14만 3천여 명으로 집계되었다.

러더퍼트 J. 헤이슬러가 특별검사로 14개월간 수사해 은행가 23명과 현직 재무차관을 포함한 관료 9명을 기소했으나, 당시 루이나 형법과 증권 관계 법령에는 시세조종과 내부자거래를 처벌하는 조문 자체가 없었다. 이 때문에 재판은 문서위조와 사기, 수뢰 혐의로만 진행되었고 상당수가 무죄로 풀려났다. 1930년 대법원은 통정매매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죄로 만드는 일은 의회의 몫"이라며 무죄를 확정했고, 이 판결이 같은 해 증권감독위원회 신설과 1931년 은행법 제정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프레스콧 정권과 공화연합의 몰락, 사회민주당의 창당, 그리고 특별검사 헤이슬러의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 루이나 현대사에서 하나의 경제사건이 정권 교체로 직결된 첫 사례다.

2. 배경 [편집]

2.1. 1925년 감독 체제의 전환 [편집]

1925년 9월 취임한 프레스콧은 전임 정권의 규제를 "시장의 자생력을 갉아먹는 간섭"으로 규정했다. 같은 해 12월 개정된 증권거래감독법은 재무부 증권감독관실을 폐지하고, 상장 심사·공시 감독·거래 감시 권한을 벨포르 증권거래소가 자체 구성한 자율규제위원회로 이관했다.

문제는 이 위원회의 구성이었다. 위원 11명 중 7명이 상장기업 임원 또는 회원 증권사 대표였고, 위원장은 거래소 이사장이 겸임했다. 감독 대상이 감독 기구를 구성하는 구조였으며, 1926년과 1927년 두 해 동안 위원회가 개시한 조사는 총 3건, 그중 제재로 이어진 것은 0건이었다.

같은 시기 프레스콧은 금본위제 복귀와 감세로 시중 자금을 풀었고, 벨포르 증권거래소 지수는 1925년 말부터 1927년 7월까지 2.7배 올랐다. 당대에는 이 시기를 "황금의 사 년"이라 불렀다.

2.2. 캐슬리 그룹의 형성 [편집]

에드윈 T. 캐슬리는 에일스포드 출신의 전기기사였다. 1908년 파산 직전의 소규모 발전소 두 곳을 헐값에 인수한 것이 출발점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기 군수 특수로 급성장했다. 1920년대 들어 그는 인수 자체보다 인수를 위한 회사를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1926년 완성된 구조는 다음과 같다.
회사
역할
최상위
캐슬리 합동투자
지배지분 보유, 상장
중간
합동공익사업
사업회사 지분 보유
사업
북부전력합동, 에일 방직, 대륙해운, 벨포르 시가전차
실제 영업
자금
루이나 연합투자신탁
소액 수익증권 판매

각 층에서 의결권 있는 보통주를 51%씩만 쥐면 되므로, 캐슬리 개인이 최상위 지주회사 지분의 20%만 보유하고도 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었다. 특별검사 수사 결과 캐슬리가 그룹 자산에 대해 실제로 부담한 자기자본 비율은 4.7%로 산정되었다.

3. 조작의 구조 [편집]

특별검사 공소장은 조작을 여섯 단계로 나누어 적시했다. 각 단계는 독립된 범행이 아니라, 앞 단계에서 만들어진 허구를 뒷 단계가 떠받치는 연쇄 구조였다.

3.1. 1단계: 자산 재평가 [편집]

1926년 3월, 북부전력합동은 보유 발전설비와 송전선로를 재평가해 장부가액을 4,100만 달러에서 1억 1,800만 달러로 올렸다. 근거는 "장래 40년간의 예상 수익을 현재가치로 환산한 금액"이었다.

재평가를 맡은 감정법인 세 곳은 모두 합동공익사업이 수수료 외에 별도 자문료를 지급한 곳이었으며, 그중 한 곳은 캐슬리의 처남이 지분 절반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루이나 상법에는 자산 재평가의 기준도, 감정인의 독립성 요건도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3.2. 2단계: 계열 간 가공 매출 [편집]

부풀린 자산을 근거로 사업회사들은 서로에게 설비와 용역을 팔았다. 북부전력합동이 벨포르 시가전차에 전력을 공급하고, 시가전차가 대륙해운에 차량을 임대하고, 대륙해운이 다시 북부전력합동에 석탄을 운송하는 식이었다.

그룹 전체로 보면 현금은 한 푼도 밖에서 들어오지 않았으나, 각 사의 손익계산서에는 매출이 잡혔다. 1926년 그룹 합산 매출 2억 4,600만 달러 중 1억 3,200만 달러(53.7%)가 계열 간 거래였고, 연결 재무제표 작성 의무가 없었으므로 이 중복은 어디에도 상계되지 않았다.

3.3. 3단계: 유상증자 [편집]

장부상 자산과 매출이 늘어나자 캐슬리 합동투자는 1926년과 1927년에 걸쳐 네 차례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조달한 자금 총액은 9,700만 달러였고, 그 대부분은 다시 계열사 주식을 사들이는 데 쓰였다. 계열사 주식을 사면 계열사 주가가 오르고, 계열사 주가가 오르면 지주회사 자산이 늘고, 자산이 늘면 다시 증자가 가능해지는 순환이었다.

3.4. 4단계: 통정매매와 자전거래 [편집]

주가를 떠받치기 위해 그룹은 임직원·친인척·거래처 명의로 개설한 차명계좌 82개를 운용했다. 미리 시각과 가격을 정해 한쪽이 팔면 다른 쪽이 받는 통정매매, 같은 실질 소유자의 계좌끼리 주고받는 가장매매가 반복되었다.

특별검사 회계분석반이 거래소 원장을 전수 대조한 결과, 1926년 1월부터 1927년 6월까지 캐슬리 합동투자 주식의 총 거래량 중 37.4%가 이들 계좌 사이의 거래였다. 특정 일자에는 그 비율이 71%에 달했다.

거래소 자율규제위원회는 이 패턴을 1926년 9월 자체 감시망으로 이미 포착했으나, 위원장이 "정상적 유동성 공급"으로 판단해 안건을 상정하지 않았다.

3.5. 5단계: 예금의 전용 [편집]

자금줄은 계열 은행이었다. 벨포르 상업은행은 예금을 재원으로 루이나 연합투자신탁에 대출했고, 연합투자신탁은 그 돈으로 캐슬리 그룹 주식을 매입했다. 예금자가 맡긴 돈이 예금자도 모르는 사이 그룹 주가를 떠받친 셈이다.

붕괴 시점에 벨포르 상업은행의 총여신 중 31%가 캐슬리 계열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은행법에는 동일인 여신한도 규정이 없었다.

이 은행은 프레스콧이 1902년부터 1913년까지 이사로 재직한 곳이었고, 이 사실은 스캔들 내내 정치적 공격의 소재가 되었다. 다만 특별검사는 프레스콧 본인의 관여를 입증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

3.6. 6단계: 위조 담보증권 [편집]

1927년 봄, 증자만으로는 만기 도래하는 차입금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캐슬리 합동투자 재무부는 북부전력합동 명의의 사채권을 위조하기 시작했다. 실제 발행되지 않은 액면 2,400만 달러 상당의 증서가 인쇄되어 지방은행 아홉 곳에 담보로 제공되었다.

이 위조가 사건 전체를 무너뜨린 도화선이 되며, 동시에 재판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유죄를 이끌어낸 혐의가 된다.

3.7. 6월 명부 [편집]

가장 큰 정치적 파괴력을 가진 것은 조작 수법이 아니라 한 권의 장부였다. 1926년 6월, 캐슬리 합동투자는 증자 물량 일부를 공모에서 제외하고 액면가 20달러에 특정인들에게 직접 배정했다. 상장 첫날 이 주식의 종가는 96달러였다.

배정 명단에 오른 인원은 141명이었다.
구분
인원
현직 의원
23
고위 관료
31
언론인
12
법조인
9
기타
66

최다 배정자는 재무차관 하비 L. 던모어로 1만 2천 주였다. 배정부 표지에 적힌 날짜를 따 언론이 「6월 명부」라 불렀고, 이 표현은 이후 루이나에서 부패 연루자 명단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4. 관련 인물 [편집]

* 에드윈 T. 캐슬리 — 캐슬리 합동투자 총수. 별명 "벨포르의 마술사". 사건의 주범.
* 새뮤얼 R. 페인터 — 캐슬리 합동투자 재무담당 상무. 이중장부의 실무 총괄자였으나 수사 초기에 협조로 돌아섰다.
* 토비어스 렌 — 그룹 회계과장. 1927년 5월 6일 벨포르 항 인근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사고사로 종결했으나, 그가 2년간 실제 수치를 기록해 둔 개인 수첩(「렌 노트」)이 뒤늦게 특별검사에게 제출되면서 사건의 핵심 증거가 되었다.
* 아널드 M. 그레이스턴 — 벨포르 상업은행 총재. 예금 전용의 최종 결재자.
* 월터 F. 그레인저 — 벨포르 증권거래소 이사장 겸 자율규제위원회 위원장. 조사 무마 의혹.
* 하비 L. 던모어 — 재무차관. 6월 명부 최다 배정자.
* 시릴 A. 웨더비 — 재무장관. 정치적 책임을 지고 사임.
* 로런스 P. 키넌 — 법무장관. 초기 수사 축소 지시 의혹.
* 머시아 L. 홀트 — 자유당 하원의원. 하원 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특별검사법을 발의했다. 이듬해 자유당 노동파의 분당에 참여해 사회민주당 창당 발기인이 된다.
* 이언 D. 벌리 — 북부저축은행 벨포르 지점 지배인. 위조 담보증권을 처음 발견해 신고했다.
* 러더퍼트 J. 헤이슬러 — 특별검사. 전 벨포르 지방검찰청 검사, 전 국립대 법학과 교수.

5. 전개 [편집]

5.1. 1927년 [편집]

* 3월 12일 — 북부전력합동이 1926 회계연도 결산을 발표. 순이익 1,9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62% 증가. 캐슬리 합동투자 주가가 사상 최고인 214달러를 기록한다.
* 5월 6일 — 회계과장 토비어스 렌이 시신으로 발견. 그룹은 "과로에 따른 사고"라고 발표했다.
* 5월 하순 — 만기 차입금 상환 압박이 커지면서 위조 사채권 발행이 본격화된다.
* 6월 17일 — 북부저축은행 벨포르 지점이 담보로 잡은 북부전력합동 사채권의 일련번호가 발행 기록과 맞지 않는 것을 발견. 지배인 벌리가 거래소와 재무부에 동시에 신고한다.
* 6월 21일 — 재무부가 "확인 중"이라는 짧은 성명만 내놓는다. 소문이 시장에 퍼지며 캐슬리 합동투자 주가가 하루 만에 38% 하락한다.
* 6월 24일 — 거래소가 캐슬리 계열 5개 종목의 거래를 정지. 같은 날 오후 벨포르 상업은행에서 인출 사태가 시작된다.
* 6월 27일 — 캐슬리 합동투자가 지급 정지를 선언. 그룹이 사실상 붕괴한다.
* 7월 2일 — 벨포르 지방검찰청이 수사에 착수하나, 배당된 검사는 2명이었다.
* 7월 11일 — 하원이 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 위원장에 자유당 머시아 L. 홀트 의원이 선출된다.
* 7월 19일 — 특위 청문회에 출석한 거래소 이사장 그레인저가 "자율규제는 실패하지 않았고, 실패한 것은 한 회사"라고 진술해 여론이 악화된다.
* 7월 28일 — 특별검사법이 하원을 통과. 상원은 8일 뒤 이를 가결했다.
* 8월 1일 — 헤이슬러가 특별검사로 임명된다. 그는 임명 직후 회계사·검사 34명으로 구성된 수사팀을 꾸렸다.
* 9월 9일 — 캐슬리 합동투자 본사 금고 압수수색에서 「1926년 6월 배정부」가 발견된다.
* 10월 3일 — 「벨포르 이브닝 크로니클」이 6월 명부의 존재를 특종 보도. 정부 우호지 「루이나 헤럴드」는 이를 "출처 불명의 사본"으로 축소 보도했다가 사흘 뒤 정정한다.
* 11월 14일 — 렌의 유족이 「렌 노트」를 특별검사에게 제출. 이중장부의 실제 수치와 통정매매 지시 일자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었다.
* 12월 20일 — 재무차관 던모어 사임. 이틀 뒤 재무장관 웨더비도 사임한다.

5.2. 1928년 [편집]

* 2월 6일 — 1차 기소. 캐슬리, 페인터 등 그룹 임원 11명이 사문서위조 및 행사, 사기 혐의로 기소된다.
* 3월 하순 — 재무담당 상무 페인터가 진술을 뒤집고 수사에 협조하기 시작한다. 그의 진술로 차명계좌 82개의 실질 소유 관계가 특정되었다.
* 4월 17일 — 2차 기소. 벨포르 상업은행 총재 그레이스턴을 비롯한 은행가 23명이 업무상 배임 혐의로 기소된다.
* 4월 하순 — 자유당 노동파가 분당해 사회민주당을 창당한다. 홀트 의원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 6월 5일 — 3차 기소. 6월 명부 관련자 중 던모어를 포함한 관료 9명이 수뢰 혐의로 기소된다. 의원 23명은 당시 면책 범위를 둘러싼 해석 논란으로 기소되지 않았고, 이는 두고두고 비판을 받았다.
* 7월 3일 — 특별검사가 거래소 이사장 그레인저를 직무유기로 기소하려 했으나, 당시 자율규제위원회에는 조사 개시 의무를 규정한 조문이 없어 무산된다.
* 9월 30일 — 헤이슬러가 특별검사직에서 사임. 최종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하고, 그 내용을 정리한 저서 《부패의 회계》를 출간한다. 초판 2만 부가 열흘 만에 소진되었다.
* 10월 9일 — 사회민주당 전당대회가 헤이슬러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한다.
* 11월 6일 — 대통령 선거. 헤이슬러가 51.4%를 얻어 프레스콧을 꺾는다.

5.3. 1929년 이후 [편집]

* 1929년 2월 18일 — 1심 판결.
* 1929년 9월 1일 — 헤이슬러 취임.
* 1929년 11월대공황 발발. 캐슬리 그룹의 붕괴가 공황의 전조였다는 재평가가 시작된다.
* 1929년 12월 10일 — 항소심 판결. 공황 직후 나온 감형 판결에 여론이 격앙된다.
* 1930년 6월 24일 — 대법원 상고 기각으로 확정.
* 1930년 10월 — 증권거래법 제정, 증권감독위원회 신설.
* 1931년 — 은행법 개정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겸영이 금지된다.

6. 특별검사 수사 [편집]

6.1. 특별검사법 [편집]

루이나 헌정사 최초의 특별검사 제도였다. 법무장관 키넌이 수사를 축소하려 한다는 의혹이 특위 청문회에서 제기된 것이 입법의 직접적 계기였다.

벨포르 증권거래 관련 부정사건의 조사를 위한 특별검사 임명에 관한 법률(1927)

제1조(임명) 하원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발의와 양원 각 과반의 의결로 특별검사 1인을 임명한다.

제2조(직무범위) 특별검사는 1925년 1월 1일 이후 벨포르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법인의 증권 발행·유통 및 그에 관련된 공무원의 직무에 관한 일체의 범죄 혐의를 수사하고, 공소를 제기·유지한다.

제3조(독립) 특별검사는 법무장관의 지휘·감독을 받지 아니한다. 법무장관은 특별검사의 직무에 관하여 어떠한 지시도 할 수 없으며, 특별검사를 해임할 수 없다.

제6조(기간) 특별검사의 임기는 임명일부터 1년으로 한다. 다만 하원의 의결로 6개월의 범위에서 한 차례 연장할 수 있다.

6.2. 수사 방식 [편집]

헤이슬러의 수사는 진술이 아니라 기록에서 출발했다. 그는 회계사 19명을 수사팀에 정식 배치하고, 거래소 매매원장 전량과 계열사 원장을 대조하는 방식을 택했다. 통정매매 비율 37.4%라는 수치는 이 전수 대조에서 나온 것으로, 루이나 수사기관이 시세조종을 통계적으로 입증한 첫 사례였다.
우리는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어떤 숫자가 다른 숫자와 맞지 않는지를 물었다. 사람은 알리바이를 만들 수 있지만 원장은 두 번 적히지 않는다.
── 1928년 최종 보고서 서문

수사팀은 압수한 장부를 촬영해 사본을 별도 보관했는데, 이는 원본 훼손 시도가 실제로 두 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관행은 이후 루이나 검찰의 표준 절차가 되었다.

6.3. 기소의 한계 [편집]

수사를 마친 헤이슬러가 직면한 문제는 증거가 아니라 적용할 법조였다. 당시 루이나 법령상 다음 행위는 어느 것도 처벌 규정이 없었다.

* 통정매매·가장매매를 통한 시세조종
*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매매
* 자산 재평가를 통한 장부 부풀리기
* 계열 간 가공 매출의 손익 계상
* 특정인에 대한 액면가 신주 배정

따라서 기소는 형법상 사기, 사문서위조 및 행사, 업무상 배임, 수뢰 등 일반 형법 조문으로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헤이슬러는 최종 보고서에서 이 점을 명시하며 독립 감독기구의 설치를 권고했고, 이 권고가 2년 뒤 증권감독위원회로 실현된다.

7. 재판 [편집]

7.1. 1심 [편집]

1929년 2월 18일, 벨포르 지방법원.
피고인
혐의
선고
에드윈 T. 캐슬리
문서위조·사기
징역 14년
새뮤얼 R. 페인터
문서위조·사기
징역 6년
아널드 M. 그레이스턴
업무상 배임
징역 5년
하비 L. 던모어
수뢰
징역 3년
은행가 23명
업무상 배임
유죄 9명, 무죄 14명
관료 9명
수뢰
유죄 3명, 무죄 6명

재판부는 위조 사채권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한 유죄를 인정했으나, 시세조종에 관해서는 "행위의 반사회성은 인정되나 이를 처벌하는 법률이 없다"고 판시했다. 무죄가 난 은행가 14명의 논리는 대체로 동일했다. 계열사에 대한 대출은 이사회 결의를 거쳤고, 당시 동일인 여신한도 규정이 없었으므로 임무 위배로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7.1.1. 판결문 [편집]

루이나 벨포르 지방법원 판결

사건 1928년 형합 제41호 사기,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행사, 업무상배임, 수뢰
(병합) 1928년 형합 제52호 업무상배임
(병합) 1928년 형합 제67호 수뢰

사건명 세칭 「벨포르 증권 사건」

피고인
피고인 1. 에드윈 T. 캐슬리 (54세, 캐슬리 합동투자 회장)
피고인 2. 클레먼트 A. 보즈워스 (49세, 합동공익사업 사장)
피고인 3. 오언 P. 래드클리프 (51세, 북부전력합동 사장)
피고인 4. 새뮤얼 R. 페인터 (43세, 캐슬리 합동투자 재무담당 상무)
피고인 5. 시어도어 M. 헐리 (46세, 캐슬리 합동투자 총무이사)
피고인 6. 배질 K. 노스코트 (39세, 루이나 연합투자신탁 대표)
피고인 7. 필립 S. 로더미어 (57세, 벨포르감정 대표)
피고인 8. 대니얼 E. 트루로 (44세, 트루로 인쇄소 대표)
피고인 9. 마이클 R. 판쇼 (41세, 캐슬리 합동투자 법무담당)
피고인 10 내지 11은 별지 피고인목록 기재와 같다.
피고인 12. 아널드 M. 그레이스턴 (61세, 벨포르 상업은행 총재)
피고인 13. 로버트 T. 밀번 (52세, 동 은행 전무)
피고인 14. 세드릭 L. 워딩턴 (48세, 동 은행 여신담당 이사)
피고인 15 내지 34는 별지 피고인목록 기재와 같다.
피고인 35. 하비 L. 던모어 (50세, 전 재무차관)
피고인 36. 에드거 N. 프리처드 (55세, 전 재무부 국고국장)
피고인 37 내지 43은 별지 피고인목록 기재와 같다.

검사 특별검사 러더퍼트 J. 헤이슬러, 특별검사보 외 11인
변호인 별지 변호인목록 기재와 같다
판결선고 1929년 2월 18일



주 문

1. 피고인 1을 징역 14년 및 벌금 300만 달러에, 피고인 2를 징역 8년에, 피고인 3을 징역 7년에, 피고인 4를 징역 6년에, 피고인 5를 징역 5년에, 피고인 6을 징역 6년에, 피고인 7을 징역 4년에, 피고인 8을 징역 3년에, 피고인 9를 징역 4년에, 피고인 10 및 11을 각 징역 3년에 처한다.

2. 피고인 12를 징역 5년에, 피고인 13을 징역 3년에, 피고인 14를 징역 3년에, 피고인 15 내지 20을 각 징역 2년에 처한다.

3. 피고인 35를 징역 3년에, 피고인 36을 징역 2년에, 피고인 37을 징역 1년 6월에 처한다.

4. 피고인 1로부터 금 1,120만 달러를, 피고인 35로부터 금 111만 달러를, 피고인 36으로부터 금 42만 달러를 각 추징한다.

5. 피고인 21 내지 34에 대한 업무상배임의 점, 피고인 38 내지 43에 대한 수뢰의 점은 각 무죄.

6. 이 판결 확정 전 구금일수 중 각 피고인에 대하여 별지 산입표 기재 일수를 각 본형에 산입한다.

7. 압수된 증 제1호 내지 제412호(캐슬리 합동투자 원장 및 부속명세, 차명계좌 개설서류, 위조 사채권 원판 및 인쇄물, 1926년 6월 배정부, 고 토비어스 렌의 수기 기록 3권)는 이를 몰수한다.

8. 피고인 1에 대하여 위 벌금 상당액의 가납을 명한다.



이 유

제1. 공소사실의 요지

특별검사는, 피고인들이 1925년 12월경부터 1927년 6월경까지 사이에, 캐슬리 합동투자를 정점으로 하는 3층의 지주구조를 이용하여 ①계열회사의 자산을 근거 없이 재평가하고 ②계열 상호간의 가공거래로 매출을 부풀리며 ③차명계좌 82개를 동원하여 주식의 시세를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④계열 은행의 예금을 계열 투자신탁에 대출하게 하여 그 자금으로 자기 그룹 주식을 매수하게 하며 ⑤발행되지 아니한 사채권 액면 합계 2,400만 달러 상당을 위조하여 담보로 제공하고 ⑥신주를 액면가로 공무원 등 141인에게 배정하여 그 직무상 편의를 구하였다는 것이다.

제2. 인정되는 사실

이 법정은 압수된 원장 원본, 거래소 매매원장 전량에 대한 대조결과, 고 토비어스 렌이 남긴 수기 기록, 피고인 4의 법정 진술 및 증인 47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다음 사실을 인정한다.

1. 지배구조 피고인 1은 캐슬리 합동투자 발행주식의 20.3%를 보유하였을 뿐이나, 3층으로 겹쳐진 지주구조를 통하여 총자산 6억 2천만 달러 상당의 기업집단 전부를 지배하였다. 그가 실제로 부담한 자기자본의 비율은 총자산의 4.7%에 지나지 아니한다.

2. 자산재평가 1926년 3월경 북부전력합동의 설비 장부가액이 4,100만 달러에서 1억 1,800만 달러로 증액되었다. 평가를 담당한 감정법인 3사는 모두 계열회사로부터 별도의 자문료를 받았고, 그중 1사는 피고인 1의 인척이 지분 2분의 1을 보유한 회사이다. 증액분 7,700만 달러에는 아무런 실물의 취득이 없다.

3. 가공매출 1926 회계연도 그룹 합산 매출 2억 4,600만 달러 중 1억 3,200만 달러가 계열 상호간의 거래이다. 이는 그룹 외부로부터 유입된 현금이 아니며, 같은 자산이 계열회사의 손익계산서에 최대 4회까지 중복 계상되었다.

4. 시세조종 1926년 1월경부터 1927년 6월경까지 캐슬리 합동투자 주식 총거래량의 37.4%가 피고인들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계좌 상호간의 거래이다. 1927년 3월 12일에는 그 비율이 71.2%에 이르렀다. 매도와 매수의 시각·수량·가격이 사전에 지정되었음은 고 토비어스 렌의 기록에 일자별로 적혀 있다.

5. 예금의 전용 벨포르 상업은행은 예금을 재원으로 루이나 연합투자신탁에 대출하였고, 그 자금은 전액 계열 주식의 매수에 사용되었다. 붕괴 당시 이 은행 총여신의 31%가 단일 기업집단에 집중되어 있었다.

6. 사채권의 위조 1927년 4월경부터 6월경까지, 발행된 사실이 없는 북부전력합동 명의 사채권 액면 합계 2,400만 달러 상당이 인쇄되어 지방은행 9개소에 담보로 제공되었다. 원판은 피고인 8의 인쇄소에서 압수되었다.

7. 신주의 배정 1926년 6월경 신주 일부가 공모에서 제외되어 액면 20달러로 141인에게 배정되었다. 상장 첫날의 종가는 96달러이다. 배정부는 피고인 1의 집무실 금고에서 압수되었다.

제3. 유죄로 인정되는 부분

1. 사채권 위조 및 행사 발행되지 아니한 채권을 인쇄하여 담보로 제공한 행위는 사문서위조 및 동행사에 해당한다. 피고인 1, 4, 8, 9의 공모는 렌의 기록과 피고인 4의 진술에 의하여 명백하다. 변호인은 "장차 발행할 예정이었으므로 위조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나,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타인의 재산을 얻는 행위를 예정이라는 말로 가릴 수는 없다.

2. 사기 피고인 1 내지 11이 재평가와 가공매출로 조작한 재무제표를 첨부하여 유상증자 및 수익증권을 청약받은 행위는 기망에 의한 재물의 편취에 해당한다. 편취액은 9,700만 달러로 인정된다.

3. 업무상배임 피고인 12 내지 20은 예금자의 재산을 관리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회수 가능성을 심사하지 아니한 채 계열회사에 여신을 집중시켜 은행에 손해를 가하였다. 특히 피고인 12는 1927년 4월 이후 계열의 지급능력에 의문이 있음을 보고받고도 대출을 계속 실행하였다.

4. 수뢰 피고인 35, 36, 37이 액면가로 신주를 배정받은 것은, 그 배정 시기가 각자의 소관 업무에 관한 결재 시점과 근접하고, 배정 수량이 직급의 순서와 일치하며, 배정 사실이 어느 공적 장부에도 기재되지 아니한 점에 비추어 직무에 관한 대가로 인정된다.

제4. 무죄로 판단하는 부분

1. 시세조종의 점 특별검사는 피고인들의 통정매매 및 가장매매를 사기의 실행행위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사기죄는 특정한 상대방에 대한 기망과 그에 따른 처분행위를 요건으로 한다. 시장 전체를 상대로 시세를 꾸미는 행위는 그 성질상 상대방을 특정할 수 없고, 현행 형법과 증권 관계 법령 어디에도 이를 처벌하는 규정이 없다.

이 법정은 피고인들이 시세를 꾸민 사실 자체는 넉넉히 인정한다. 다만 형벌은 법률이 미리 금지한 행위에 대하여만 과할 수 있다. 이 점에 관하여는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다.

2. 피고인 21 내지 34에 대한 업무상배임의 점 이들이 실행한 여신은 각 은행의 이사회 결의를 거쳤고, 현행 은행법에는 동일인에 대한 여신한도의 규정이 없다. 임무의 위배를 인정할 법령상 기준이 존재하지 아니한다.

3. 피고인 38 내지 43에 대한 수뢰의 점 배정 사실은 인정되나, 각자의 직무와 대가관계에 있다는 점에 관한 증명이 부족하다.

4. 다만 이 법정은, 위 무죄가 피고인들의 결백을 선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 둔다. 무죄란 이 법정이 형벌을 과할 근거를 찾지 못하였다는 뜻일 뿐, 피고인들이 한 일이 정당하였다는 뜻이 아니다. 법이 미치지 못한 자리에서 법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받았다고 여기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이 판결을 잘못 읽은 것이다.

제5. 법령의 적용
형법 제210조(사기), 제231조(사문서위조), 제234조(위조사문서행사), 제356조(업무상배임), 제129조(수뢰), 제37조(경합범), 제38조(경합범 가중), 제48조(몰수), 제134조(추징)


제6. 양형의 이유

피해자는 14만 3천여 인이다. 그중 다수는 평생의 노임을 수익증권 한 장으로 바꾼 사람들이며, 파산 배당으로 돌려받게 될 금액은 액면의 8.4%에 지나지 아니한다.

피고인들은 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단 한 번도 그들을 언급하지 아니하였다. 변론의 전부가 "그 행위는 금지되어 있지 아니하였다"는 한 문장의 변주였다. 이 법정은 그 주장의 법률적 타당성 일부를 위 제4항에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이 형을 감경할 사유는 되지 못한다.

피고인 4는 수사 중 스스로 진술을 바꾸어 이중장부의 구조를 밝혔고, 그 진술이 없었더라면 차명계좌 82개의 실질 귀속은 밝혀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점을 참작한다.

피고인 1은 끝까지 자신이 만든 구조가 "불법이 아니라 시대를 앞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법정은 그 주장을 들었고, 그것이 이 사건에서 가장 무거운 정상이라고 판단한다.

제7. 이 법정이 덧붙이는 말

이 법정은 판결에 필요한 범위를 넘어 말하지 아니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는 그 원칙을 지키지 아니하기로 한다. 이 사건의 절반이 무죄로 끝나는 이상, 무죄의 이유가 곧 정당함의 증명으로 읽히는 것을 막을 방법이 판결문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피고인들이 한 일은 사업이 아니었다. 그들은 발전소를 짓지 아니하였고 배를 띄우지 아니하였으며 한 사람의 일자리도 만들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만든 것은 오직 서류였다. 있지도 않은 자산을 있다고 적은 서류, 오가지도 않은 거래를 오갔다고 적은 서류, 발행되지도 않은 채권을 발행되었다고 적은 서류. 그 종이의 무게로 6억 달러의 기업집단이 서 있었고, 그 종이가 찢어지자 14만 3천 인의 생활이 함께 찢어졌다.

그들의 재주는 만드는 데 있지 아니하고 오직 빈틈을 찾는 데 있었다. 감정인의 자격을 정한 법이 없음을 알고 감정인을 샀다. 연결 재무제표를 요구하는 법이 없음을 알고 같은 돈을 네 번 세었다. 통정매매를 벌하는 법이 없음을 알고 자기 돈으로 자기 주식을 사고팔아 값을 꾸몄다. 여신한도를 정한 법이 없음을 알고 남의 예금을 자기 주가에 쏟아부었다. 감독기관이 스스로를 감독하도록 되어 있음을 알고 그 감독기관에 이사를 앉혔다. 그리고 그 모든 빈틈을 지켜 줄 사람들의 이름을 장부에 적고 액면가로 주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것은 부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제도의 공백을 정확히 측량하고, 그 공백의 크기에 맞추어 범행을 설계한 것이다. 법이 없는 자리를 찾아내는 데 그토록 정밀하였던 자들이, 그 자리에 무엇이 없는지를 몰랐을 리 없다. 그들은 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골랐다.

이 법정은 이 사건의 피고인들을 천민자본주의가 낳은 가장 역겨운 산물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아니한다. 자본은 위험을 지고 무엇을 만드는 데 그 정당성이 있다. 피고인들은 위험을 지지 아니하였다. 위험은 예금자와 청약자에게 넘기고 이익만을 취하였으며, 그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공직을 매수하였다. 총자산의 4.7%만을 걸고 6억 달러를 부린 사람에게 기업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그것은 사업이 아니라 타인의 돈을 담보로 한 도박이며, 잃어도 자기가 잃지 않는 도박이다.

법률의 부재는 피고인들에게 형벌을 면할 자격을 주었을 뿐, 명예를 회복할 자격을 준 것이 아니다. 이 법정이 처벌하지 못한 행위에 대하여, 이 법정은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었음을 판결문에 남긴다. 형이 시효로 사라진 뒤에도 이 기록은 남을 것이다.

끝으로 이 법정은 입법부에 고한다. 오늘 무죄로 선고된 행위들은 죄가 아니어서 무죄가 된 것이 아니라, 죄로 만들어 두지 아니하였기에 무죄가 된 것이다. 이 법정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이다. 시세를 꾸미는 일, 남의 예금으로 제 주식을 사는 일, 없는 자산을 있다고 적는 일을 죄로 만드는 것은 의회의 몫이며,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동안 오늘과 같은 판결은 반복될 것이다. 그때에도 이 법정은 같은 이유로 같은 무죄를 선고하여야 할 것이며, 그 책임은 법정에 있지 아니하다.

제8. 결론

이상의 이유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1929년 2월 18일

루이나 벨포르 지방법원 제3형사부
재판장 판사 오스먼드 R. 헤이워드
판사 클라라 M. 벤덜
판사 니컬러스 P. 애커턴

7.2. 항소심 [편집]

1929년 12월 10일. 대공황이 시작된 지 한 달 뒤였다.
피고인
1심
항소심
캐슬리
징역 14년
징역 11년
페인터
징역 6년
징역 3년
그레이스턴
징역 5년
징역 3년
던모어
징역 3년
무죄

던모어의 무죄가 특히 논란이 되었다. 항소심은 신주 배정이 그의 직무와 대가관계에 있다는 점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배정을 받은 시점과 그가 관여한 정책 결정 사이에 직접적 인과가 특정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공황으로 예금과 일자리를 잃기 시작한 시민들에게 이 판결은 "장부를 위조한 자만 감옥에 가고 그 장부로 이익을 본 자는 풀려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판결 다음 날 벨포르 법원 앞에 모인 군중은 3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7.3. 상고심 [편집]

1930년 6월 24일, 루이나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해 항소심을 확정했다. 판결문의 다음 대목은 루이나 법학 교과서에 지금도 인용된다.
피고인들이 서로 짜고 같은 값에 주식을 사고팔아 시세를 꾸민 사실은 넉넉히 인정된다. 그러나 형벌은 법률이 금지한 행위에 대하여만 과할 수 있다. 이 법정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행위가 현행법상 죄가 아님을 선언하는 것뿐이며, 그것을 죄로 만드는 일은 의회의 몫이다.
── 루이나 대법원 1930년 6월 24일 선고, 「캐슬리 외 30인 사건」

이례적으로 대법원이 판결문 말미에 입법 필요성을 적시한 사례이며, 넉 달 뒤 증권거래법이 제정되었다.

8. 정치적 파장 [편집]

8.1. 프레스콧 정권 [편집]

프레스콧은 끝까지 자신의 관여를 부인했고 실제로 기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적 책임은 피할 수 없었다. 자율규제 전환이 그의 대표 정책이었고, 캐슬리의 자금줄이 그가 이사로 재직했던 은행이었으며, 6월 명부에 오른 관료 31명 중 22명이 그가 임명한 인사였기 때문이다.

공화연합은 1928년 선거에서 대통령직과 하원 다수당 지위를 동시에 잃었다. "프레스콧적"이라는 형용사가 방만한 금융 방임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진 것도 이 시기다.

8.2. 사회민주당의 창당 [편집]

스캔들은 자유당 내부의 균열을 결정적으로 벌렸다. 자율규제 전환에 찬성표를 던졌던 자유당 온건파와, 청문회를 주도한 노동파의 갈등이 1928년 4월 분당으로 이어졌다.

신당은 조직과 자금은 있었으나 얼굴이 없었다. 당적도 선출직 경력도 없는 특별검사를 후보로 추대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헤이슬러는 "부패를 수사한 사람"이라는 단일한 정체성만으로 선거를 치렀고, 금융 감독기관 신설·예금자 보호·이민제한법 완화를 공약했다.

8.3. 의원 불기소 논란 [편집]

6월 명부에 오른 현직 의원 23명이 단 한 명도 기소되지 않은 것은 사건 최대의 미결 과제로 남았다. 특별검사는 의원의 주식 취득이 "직무 관련성이 없는 사적 거래"라는 법무부 유권해석에 막혔고, 이를 다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1930년 증권거래법 제정 논의에서 이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으나, 공직자 재산 등록과 이해충돌 회피 의무가 실제로 법제화된 것은 1950년대의 일이다.

9. 제도 개혁 [편집]

사건이 낳은 제도 변화는 오늘날 루이나 금융 규율 체계의 원형이다.

* 1930년 증권거래법 — 시세조종·부정거래·미공개정보 이용을 형사처벌 대상으로 신설. 상장기업 회계보고 서식을 표준화하고, 연결 재무제표 작성을 의무화했다.
* 증권감독위원회 신설 — 자율규제위원회를 폐지하고 정부 독립기관을 설치. 초대 위원 5명 중 3명이 헤이슬러의 국립대 법학과 제자였다.
* 1931년 은행법 —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겸영 금지, 동일인 여신한도 도입, 예금보험공사의 상설화.
* 공인회계사 국가시험 — 감정·감사 업무의 자격을 국가가 관리하게 되었다. 캐슬리 사건에서 감정법인 세 곳이 아무런 자격 요건 없이 재평가를 수행했다는 사실이 배경이었다.
* 지주회사 규제 — 3층 이상의 지주 구조를 금지하고, 지주회사의 최소 자기자본 비율을 규정했다.

10. 평가 [편집]

10.1. 사건의 성격 [편집]

경제사에서는 이 사건을 대공황의 선행 지표로 본다. 캐슬리 그룹의 붕괴는 미합중제국발 폭락보다 2년 4개월 앞섰고, 그 원인 구조 — 부풀린 자산, 예금을 동원한 주가 부양, 감독 공백 — 는 2년 뒤 세계적 규모로 반복되었다. 헤이슬러가 취임 넉 달 만에 긴급금융법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 구조를 이미 장부 단위로 들여다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10.2. 법의 공백 [편집]

법학계에서는 "죄형법정주의가 가장 정직하게, 그러나 가장 불편하게 작동한 사례"로 다룬다. 대법원은 여론과 정반대의 결론을 내면서도 그 이유를 숨기지 않았고, 그 판결이 곧바로 입법을 강제했다. 사법이 스스로의 한계를 선언함으로써 제도를 바꾼 드문 경우다.

10.3. 비판 [편집]

* 의원 23명 전원 불기소는 특별검사 수사의 명백한 미완으로 지적된다.
* 헤이슬러가 임기 만료 전에 사임하고 대선에 출마한 것을 두고, 수사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다는 비판이 당대부터 존재했다. 후임 특별검사의 공소 유지가 부실했다는 점이 이 비판의 근거로 함께 거론된다.
* 실제 피해자 구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산 배당률은 액면 대비 8.4%에 그쳤다.

11. 여담 [편집]

* "6월 명부에 이름이 있다"는 표현은 루이나에서 부패 연루를 뜻하는 관용구가 되었다. 1978년 군정기에 국가비상위원회가 발표한 숙정 대상자 명단을 언론이 "새로운 6월 명부"라 부른 것도 여기서 나왔다.
* "캐슬리 계산법"은 근거 없는 낙관적 회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 《부패의 회계》는 1928년 루이나에서 가장 많이 팔린 비소설이었다. 헤이슬러는 인세 전액을 파산 배당에 기부했다.
* 캐슬리는 1936년 복역 중 사망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만든 구조가 "불법이 아니라 앞선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 벨포르 증권거래소는 1931년 자율규제위원회 회의록 전량을 폐기했다. 이 사실이 1950년대에 드러나면서 금융기관 기록 보존 의무가 별도로 입법되었다.
* 「렌 노트」 원본은 현재 루이나 국립기록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법학·회계학 교육 자료로 사본이 공개되어 있다.

12. 관련 문서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