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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마테르 전쟁 Matir Krieg Matir Wa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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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83년 2월 22일 ~ 1984년 7월 18일 | |||||||||
장소 | |||||||||
북랜드 지방 | |||||||||
원인 | |||||||||
MAL기 사건, 민케 대학살에 대한 마베라의 보복 | |||||||||
교전국 및 교전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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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상페드로 4세 | |||||||||
전력 | |||||||||
-명 | -명 | ||||||||
결과 | |||||||||
반한랜드 연합군의 승리 | |||||||||
영향 | |||||||||
웨스타시아의 멸망 및 마베라로 편입 | |||||||||
피해규모 | |||||||||
1. 개요 [편집]
웨스타시아와 마베라 왕국 사이에서 1983년 2월 22일부터 이듬해 7월 15일까지 일어난 전쟁. 단 1년 7개월간 일어난 전쟁이었지만, 이 전쟁으로 웨스타시아가 멸망하고, 양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2. 배경 [편집]
웨스타시아와 마베라, 이 두 나라는 예로부터 오랜 앙숙이었다.
2.1. 마테르는 누구인가? [편집]
2.2. 마베라: 민케 교단에 대해 [편집]
2.3. 웨스타시아: 이쪽도 상황이 좋지는 않다 [편집]
한편, 이 모든 짓들을 저지른 웨스타시아도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1981년은 정부의 잘못된 부동산정책이 불러온 부동산 버블이 붕괴하면서 나라의 경제가 시궁창으로 떨어진지 3년이 채 안지난 시점이었고 이미 7대기업 3개가 도산하고 거리엔 실업자와 부랑자가 넘쳐날 정도로 상황은 크게 악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불만은 대게 정부에게 향했다. 가뜩이나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데다 정부수반 대부분이 외국인이라 정통성이 전무하던 정부였는데, 버블 붕괴는 어찌어찌 경제 호황으로 버티고 있던 군사정권의 막대한 지지율 하락을 초래했다. 전국에서 쏟아지는 반란의 낌세들은 군사경찰을 통해 속속히 군부에 보고되었고, 대게는 거사를 개시하기도 전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지만 앨빈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선 이를 이대로 계속 방치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1978년 이후로 잠잠해졌던 유고랜드 독립운동이 다시금 일어설 기미를 보이는 것도 불안의 요소 중 하나였다.
앨빈 대통령의 선택은 외부의 적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81년 9월 11일 제49차 전당대회에서 한 연설로 단숨에 자신들의 지지율을 회복시키고, 국민들을 군대로 결집시켰다. 그들은 그 연설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되, 그 책임을 IMF, 세계은행 등의 국제금융기관들과 웨스타시아가 무너지고 떨군 자본들을 줍줍한 서방세계한테 돌리면서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 동시에 당시 IMF 총재의 출신국이자 1차 랜드전쟁 시절을 제외하면 예로부터 오랜 숙적이었던 마베라에 전 국민의 적대감을 집중시키면서 전쟁 분위기를 조성했다. 마베라 지하에 묻힌 희토류들을 채굴하면 전자산업계의 반도체 보급난이 해결될 것이라는 약간의 귀띰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선전내용의 90%는 말같지도 않은 개소리였지만, 이미 2차대전 시절부터 양국간의 국민감정은 좋았던 적이 없었기에 재계의 전문가들이 반박을 준비했을때 이미 대중들은 선동되버린지 오래였고, 머지않아 그 전문가들도 군사경찰에 의해 대부분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마베라는 당연히도 적반하장이라는 식으로 대꾸했다. 외무성에서도 여러차례 항의성명을 내고 민케 학살에 대한 배상금과 사죄를 다시금 요구했지만, 웨스타시아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양국간의 관계가 슬슬 개차반이 되던 찰나, 양국간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터졌다.
이러한 불만은 대게 정부에게 향했다. 가뜩이나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데다 정부수반 대부분이 외국인이라 정통성이 전무하던 정부였는데, 버블 붕괴는 어찌어찌 경제 호황으로 버티고 있던 군사정권의 막대한 지지율 하락을 초래했다. 전국에서 쏟아지는 반란의 낌세들은 군사경찰을 통해 속속히 군부에 보고되었고, 대게는 거사를 개시하기도 전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지만 앨빈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선 이를 이대로 계속 방치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1978년 이후로 잠잠해졌던 유고랜드 독립운동이 다시금 일어설 기미를 보이는 것도 불안의 요소 중 하나였다.
앨빈 대통령의 선택은 외부의 적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81년 9월 11일 제49차 전당대회에서 한 연설로 단숨에 자신들의 지지율을 회복시키고, 국민들을 군대로 결집시켰다. 그들은 그 연설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되, 그 책임을 IMF, 세계은행 등의 국제금융기관들과 웨스타시아가 무너지고 떨군 자본들을 줍줍한 서방세계한테 돌리면서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 동시에 당시 IMF 총재의 출신국이자 1차 랜드전쟁 시절을 제외하면 예로부터 오랜 숙적이었던 마베라에 전 국민의 적대감을 집중시키면서 전쟁 분위기를 조성했다. 마베라 지하에 묻힌 희토류들을 채굴하면 전자산업계의 반도체 보급난이 해결될 것이라는 약간의 귀띰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선전내용의 90%는 말같지도 않은 개소리였지만, 이미 2차대전 시절부터 양국간의 국민감정은 좋았던 적이 없었기에 재계의 전문가들이 반박을 준비했을때 이미 대중들은 선동되버린지 오래였고, 머지않아 그 전문가들도 군사경찰에 의해 대부분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마베라는 당연히도 적반하장이라는 식으로 대꾸했다. 외무성에서도 여러차례 항의성명을 내고 민케 학살에 대한 배상금과 사죄를 다시금 요구했지만, 웨스타시아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양국간의 관계가 슬슬 개차반이 되던 찰나, 양국간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터졌다.
2.4. MAL기 격추사건 [편집]
1982년 9월 1일, 카이로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동사랜드 베젤 공항을 거쳐 마베라 트리넬 국제공항으로 이동하던 367편(기종 747-230B, 기체 등록번호 HL7442)이 웨스타시아 서부 상공에서 웨스타시아 공군에 격추당해 추락한 사건으로 마베라 국적기가 당한 사고 중 최악의 사고 규모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사고 당시에는 세계 5위, 오늘날에도 세계 12위 규모의 엄청난 사고다.
2.4.1. 격추 [편집]
1982년 9월 1일 0시 5분 무렵 367편은 웨스타시아 북동쪽 상공에 진입하였는데 이때 웨스타시아 공군은 367편의 진입을 눈치챘고 마베라 공군의 군용기라고 판단하였다. 오전 1시 30분에 367편은 웨스터시아의 영공에 진입하였지만 대응하기엔 367편이 칼펜슈타인 상공에 체공할 시간이 많지 않아 배치되었던 편대는 요격을 시도하지 않고 귀환했고 367편은 오전 2시 28분에 웨스타시아 영공을 통과하고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오전 2시 36분에 마베라항공 367편이 다시 웨스타시아 섬 상공에 접근하였고 이때 웨스타시아군은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오전 3시 5분에 367편은 뒤따라오던 마베라 항공 015편과 교신했고 서로 바람 방향이 다른 것을 알았다. 015편은 정상적으로 웨스타시아 영공을 피해서 날고 있었으므로 그랬던 것이지만 367편 조종사는 비행계획서를 체크하고 오차 범위 안쪽이라고 판단하여 자신이 항로를 이탈한 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곧이어 오전 3시 8분에 겐나디 위르겐 괴링(Gennadi Wirgen Guering, 1944–2015)이 탑승한 웨스타시아 공군 소속 유진 토네이도가 367편을 확인했다. 새벽 시간이라 아주 어두웠기 때문에 기종 식별은 불가능했고 항법등과 충돌방지등이 점멸하고 있는 것을 보고했다. 그러나 이는 면피성 답변으로, 후일 괴링의 인터뷰에 따르면 꼬리의 민항기 마크 등을 식별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괴링의 토네이도가 367편을 추격하면서 경고사격을 했지만 야간이었던 데다 괴링이 탑승한 토네이도의 탄띠에 예광탄이 없는 상태로 사격해 367편에서는 자신들이 위협사격을 당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오전 3시 5분에 367편은 뒤따라오던 마베라 항공 015편과 교신했고 서로 바람 방향이 다른 것을 알았다. 015편은 정상적으로 웨스타시아 영공을 피해서 날고 있었으므로 그랬던 것이지만 367편 조종사는 비행계획서를 체크하고 오차 범위 안쪽이라고 판단하여 자신이 항로를 이탈한 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곧이어 오전 3시 8분에 겐나디 위르겐 괴링(Gennadi Wirgen Guering, 1944–2015)이 탑승한 웨스타시아 공군 소속 유진 토네이도가 367편을 확인했다. 새벽 시간이라 아주 어두웠기 때문에 기종 식별은 불가능했고 항법등과 충돌방지등이 점멸하고 있는 것을 보고했다. 그러나 이는 면피성 답변으로, 후일 괴링의 인터뷰에 따르면 꼬리의 민항기 마크 등을 식별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괴링의 토네이도가 367편을 추격하면서 경고사격을 했지만 야간이었던 데다 괴링이 탑승한 토네이도의 탄띠에 예광탄이 없는 상태로 사격해 367편에서는 자신들이 위협사격을 당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MAL367: Mabera Air 367 climb and maintain FL350 leaving FL330 at this time. 동사랜드관제소: East Saland Control Roger. | 367편: FL330에서 FL350으로 상승한 뒤 유지하겠습니다. 마베라항공 367편. 동사랜드관제소: 동사랜드 컨트롤, 알겠습니다. |
위 무전을 367편과 동사랜드관제소가 나눴을 때 괴링의 토네이도는 367편의 바로 뒤에 있었다. 그런데 이때 동사랜드와 무전을 마친 367편이 고도를 35,000ft(10668m)로 올리기 시작했다. 기수를 들면서 속도가 조금 떨어졌기 때문에 괴링의 토네이도는 367편을 앞질러가게 되었다. 이렇게 경고사격 이후에 고도를 올린 것은 경고사격을 알아차리고 반응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토네이도의 조종사 괴링은 367편이 자신을 인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격적 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고도를 높이며 속도를 줄이는 것이 공격적 행동이 되는 이유는 첫 번째로 대다수의 전투기의 무장은 전면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뒤에 있는 비행기가 항상 유리하다. 그리고 서로 속도가 동일한 상황에서 앞에 있는 기체가 기수를 들어올리는 등의 방식으로 속도를 빠르게 줄이면 뒤에 있는 비행기가 앞 기체를 오버슛하여 앞지르게 되는데 이러면 역으로 뒤를 잡히게 되는 것이므로 공군 조종사 입장에서는 자신을 따돌리려는 리버설, 즉 공수를 바꾸는 기동인 것이란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두 번째로 전투기나 요격기는 그렇게 느려진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날기 어렵다. 전투기는 민항기에 비해 익면적도 작고 중, 고속 기동성을 중시하거나 아예 속도에 몰빵하는 설계라 민항기보다 실속속도가 훨씬 빠르다. 즉, 요격기의 조종사에게 이 행동은 전투기의 실속을 유도하는 지능적인 행동으로 비쳤고 따라서 해당 항공기는 민항기 마크는 위장용으로 그려진 것이고 전투기의 특성을 꿰고 있는 군 관계자가 탑승한 모종의 군용기라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런 우연이 없었다고 해도 367편이 괴링의 토네이도를 무시(실제로는 어두운 밤에 예광탄도 없이 사격하여 알아차리는 것이 불가능하했다.)하고 도주를 계속하는 이상 격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서부지방 웨스타시아 방공망의 대응이 그다지 신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괴링의 토네이도가 367편과 조우한 것은 이미 367편이 웨스타시아군 기지 주변을 지나서 공해로 빠져나가려는 시점이었다. 격추시키지 않으면 눈 뜨고 그대로 놓치는 수밖에 없는 데다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당시 보잉 707을 개조한 루이나 공군의 전자정찰기인 RC-135가 웨스타시아 영공을 침범했다 말았다 하면서 약올리는 비행 방식[1]에 웨스타시아 공군의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잔뜩 벼르고 있던 것도 한 몫했다.
367편의 속도가 줄어들면서 고도를 상승하며 오버슛을 하게 되자 명백하게 자신을 따돌리려고 한다고 생각한 괴링은 다시 367편의 주위를 빙 돌아 367편의 8km 뒤편으로 날아가 오전 3시 25분 무렵에 파이어스트릭 공대공 미사일 2발을 발사했다.

한발의 미사일은 주익의 엔진에 명중하였고 다른 한발은 기체 후방부에서 근접폭발했다. 367편은 미사일에 피격된 여파로 기체 후부에 구멍이 뚫리면서 급격한 감압이 일어났고 이 충격으로 최소 1개 이상의 유압장치가 완전히 파괴되었다.[2] 피격 직후 367편은 잠시 38,000ft(11582m)까지 급상승하였고 이후 약 11분간 추락하며 활공하다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이때 10여 분이나 남아 있었는데도 367편이 비상상황임을 알리고 MAYDAY를 하지 않았는지는 미스터리다.[3] 조종사들은 피격 직후 상승하던 불안정한 기체를 제어하기 위해 랜딩 기어를 내리는 시도도 했지만[4] 자동조종은 물론 정상적인 수동조종도 어려움을 느끼고 비상강하를 시작한다.
367편은 꼬리부분이 손상[5]되어 유압을 상실한 채로 주변을 강하하며 비행하다가 추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ICAO 최종조사 보고서에서는 승객들이 추락 직전까지 살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으며 괴링은 서부 해안가 근처에서 367편이 나선선회를 하면서 추락하는 것을 확인하고 기지로 복귀했다. 367편이 최후의 순간 동안 급강하한 데다 바다는 땅에 비해 충격을 반사하므로 수면을 강타한 직후 생존자가 있었을 확률은 없다. 추락 직후로 추정되는 시점에 빌베른의 오징어잡이 어선[6] 크리스쳔 로스가 폭발을 목격했다고 한다.
한편 367편과 무전이 되지 않자 015편과 동사랜드 관제소는 다급하게 367편을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심지어 동사랜드 관제소는 웨스타시아의 민간 항공관제소에도 연락을 했지만 367편이 마지막으로 보고한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이후 웨스트시아가 격추 사실을 시인하였고 부랴부랴 빌베른 해군과 루이나 해군, 마베라 해군, 그리고 민간 트롤어선까지 동원해 공해상에서 구조와 수색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으며 심지어 웨스타시아 해군과 해안경비대가 루,빌,마 구조대가 웨스타시아 영해로 진입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유력 추락 지점인 서부 해안 근해는 수색하지도 못했다.
이후 사고 현장과 인접한 빌베른 근해에서 일부 유류품과 13명분의 시체 조각을 찾았다. 한편 367편이 추락한 직후 웨스타시아는 추락지점 근해를 수색했는데 원래는 RC-135의 잔해와 블랙박스, 컴퓨터 그리고 영공침범의 증거로 마베라군의 시신을 인양하러 간 것이지만 자신들이 격추한 것이 RC-135가 아니고 그냥 민간인이 탄 민간 항공사의 민항기였다는 것을 뒤늦게 안 뒤 경악했다. 이때 367편의 파편과 블랙박스, 유류품이 수거되었다. 원래 웨스타시아는 자기들이 민항기를 격추했다는 사실을 은폐할 생각이었으나 루이나의 정보 공개로 무산되었고 루이나와 마베라의 압박 때문에 1982년 9월 26일 웨스타시아는 유류품 213점을 전달했다. 그러나 블랙박스와 잔해들은 마테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웨스타시아는 367편 블랙박스의 존재를 부인했다.
3. 경과 [편집]
3.1. 웨식트(Wexit): 비동맹노선으로 [편집]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루이나와 미합중제국을 비롯한 제1세계 국가들(특히 폴란드와 서독)은 40년전의 악몽을 다시금 떠올리기 시작했다. 군국주의 정권, 선전선동을 통한 지지율 강화, 민족에 대한 적대심 유발 및 혐오정치, 거기에 영토확장 야욕까지...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모양세 아니었던가? 해협은 다시금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웨스타시아는 경제력 이슈로 결코 그리 강한나라가 아니었지만 만약 마베라가 전쟁에서 진다면 중립을 무시하는 군국주의 특성상 시스타니아, 체르드, 델라웨어 등의 랜드해협 북부 중립국들도 도미노처럼 차례차례 무너지게 되고, 이렇게 되면 북마베라해의 재해권[7]과 영토, 각종 희토류와 천연자원들을 한랜드가 깡으로 손에 쥐어 서방세계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루이나는 마베라를 택했다. 1983년 2월 10일, 벨포르에서 열린 제7차 NLTO 정상회의에서 웨스타시아의 퇴출에 대한 안건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궁지에 몰린 I.S. 아이에스 외무부 장관은 자존심이라도 지키려 회담장을 박차고 나옴과 동시에, NLTO 자진탈퇴를 선언했다. 마베라는 유엔 총회에도 웨스타시아에 대한 제제안을 발의했지만, 은근슬쩍 자본주의 진영의 내분을 유도한 제2세계 국가들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그렇게 그해 가을부터 웨스타시아는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앨빈 대통령은 83년 12월 28일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유진그룹의 민수 사업분야 대부분을 삭감 및 매각, 그룹의 거의 모든 역량을 중공업과 전자에 집중했다. 다른 기업들도 모두 전쟁쥰비에 동원돼 이듬해 1월까지 400척이 넘는 유보트가 생산되어 해안요새에 배치되고, 국경지대 산맥 아래에는 갓 생산된 자동소총을 든 군부대들이 집결했다. 마베라도 이에 지지않아 모병제에서 징병제로 전환하고 신형 땅크 개발 및 도입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해가 밝고 2달이 지난 1984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웨스타시아는 마베라에 최후통첩문을 보냈다. 자국의 경제 사ㅋ보타쥬에 대한 배상금 39조 레티를 배상하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흘 뒤였던 2월 18일, 마베라 측에서도 최후통첩문을 날렸다. MAL기 격추사건과 민케 학살에 대한 배상금 27억 레티를 배상하지 않으면 즉각 군사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양국은 물론 서로의 최후통첩에 무시로 대응했다. 동월 20일에는 주마베라 웨스타시아 대사관이, 21일에는 주웨스타시아 마베라 대사관이 본국으로 철수를 마쳤다. 그렇게 하루 뒤인 2월 22일 새벽, 양국의 명절 콩콩절에 맞춰 선전포고문 발송 30분후 웨스타시아 육군이 마베라 국경을 넘어가면서 짧고 굵은 남북의 전란이 시작되고 만다.
결국 루이나는 마베라를 택했다. 1983년 2월 10일, 벨포르에서 열린 제7차 NLTO 정상회의에서 웨스타시아의 퇴출에 대한 안건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궁지에 몰린 I.S. 아이에스 외무부 장관은 자존심이라도 지키려 회담장을 박차고 나옴과 동시에, NLTO 자진탈퇴를 선언했다. 마베라는 유엔 총회에도 웨스타시아에 대한 제제안을 발의했지만, 은근슬쩍 자본주의 진영의 내분을 유도한 제2세계 국가들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그렇게 그해 가을부터 웨스타시아는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앨빈 대통령은 83년 12월 28일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유진그룹의 민수 사업분야 대부분을 삭감 및 매각, 그룹의 거의 모든 역량을 중공업과 전자에 집중했다. 다른 기업들도 모두 전쟁쥰비에 동원돼 이듬해 1월까지 400척이 넘는 유보트가 생산되어 해안요새에 배치되고, 국경지대 산맥 아래에는 갓 생산된 자동소총을 든 군부대들이 집결했다. 마베라도 이에 지지않아 모병제에서 징병제로 전환하고 신형 땅크 개발 및 도입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해가 밝고 2달이 지난 1984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웨스타시아는 마베라에 최후통첩문을 보냈다. 자국의 경제 사ㅋ보타쥬에 대한 배상금 39조 레티를 배상하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흘 뒤였던 2월 18일, 마베라 측에서도 최후통첩문을 날렸다. MAL기 격추사건과 민케 학살에 대한 배상금 27억 레티를 배상하지 않으면 즉각 군사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양국은 물론 서로의 최후통첩에 무시로 대응했다. 동월 20일에는 주마베라 웨스타시아 대사관이, 21일에는 주웨스타시아 마베라 대사관이 본국으로 철수를 마쳤다. 그렇게 하루 뒤인 2월 22일 새벽, 양국의 명절 콩콩절에 맞춰 선전포고문 발송 30분후 웨스타시아 육군이 마베라 국경을 넘어가면서 짧고 굵은 남북의 전란이 시작되고 만다.
3.2. 침공 후 일주일, 40년전의 악몽 [편집]
전쟁의 첫 포성은 웨스타시아가 가져갔다. 1984년 2월 22일 오전 4시, 최후통첩 기간이 만료되자마자 웨스타시아 전군에 '할아버지가 살아나셨다'라는 역사적인 개전암호가 타전되었다. 4시 3분경, 럭샤슨호르스트급 2번함 시후니제나우의 11.1인치급 주포가 에스타뉴산 너머를 향해 전쟁의 첫 번째 고폭탄을 쐈다. 이윽고 김용하 장군 휘하의 13개 포병연대와 그 유명한 구스타프 III급 열차포 6문이 포격전에 동참하고 보름달을 까맣게 가린 공군의 전폭기들이 에스타뉴산을 넘어왔다. 마베라 국왕 샹페드로 4세가 개전 사실을 보고받았을때는 이미 6,900발의 포격이 산맥 너머에 내리꽂힌 뒤였다. 한편 에스타뉴산을 넘어온 웨스타시아 공군은 할파야 공중전에서 마베라 공군을 궤멸시킨뒤 제공권을 장악, 마베라 서부의 모든 땅에 폭격을 가했다. '쿤타치 작전'이라 명명된 이 작전은 웨스타시아의 7일 전쟁 계획에 기반을 둔 사전 초토화 작전으로, 지상군이 병력을 전개하기 전에 전 마베라 영토의 거의 모든 기반시설, 인프라, 군사시설을 모조리 파괴시켜 3일 트리넬 진격을 가능케 하는것이 요지였다.
개전 3일째, 포격과 폭격이 잠잠해짐과 동시에 반 폐허가 된 트리넬 국제공항에 웨스타시아의 13개 공수여단이 투하됐다(부르군트 작전). 웨스타시아 공수군은 전차바퀴보다 큰 모든것을 싹다 죽였다. 샹페드로 4세와 왕가는 당초 수도를 지킬려 했지만, 왕궁의 코앞까지 공수부대가 진격해오자 어쩔 수 업이 칼펜시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마베라 군부의 모든 이목이 수도에 몰려있는 사이, 25일(개전 4일째) 3시경 한랜드 제6,9,7군단이 님부스시에서 마베라군 제44사단을 괴멸시켜버린 것을 시작으로 웨스타시아 육군이 마베라 남부지방을 파죽지세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쿤타치 작전의 후속으로 기획된 '바로바로싸 작전'의 요지는 일단 서부전선 중간에 위치한 369고지를 점령해 마베라 수비군을 동서로 분단, 양군의 전략적 연계를 끊은 뒤 둘로 분단된 마베라군을 베타와 감마 집단군이 해안과 산맥으로 밀어 포위섬멸하고 그러는 동안 알파 집단군은 최대한 신속한 기갑웨이브로 트리넬까지 진격해 공수군과 합류, 트리넬 시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마치 40년전의 그 나라를 보는듯한 경의로운 진격속도로 웨스타시아군은 공격 이틀만에 369고지를 점령했고, 마베라의 전력은 그들의 계획대로 동서로 갈라져 버렸다.
이제 남은것은 쌍두가 된 참새의 대가리를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동쪽의 마베라 제1,9,7군은 바르디야 전투에서 김용하 장군 휘하의 감마 집단군에게 몬타나 산맥에 포위되어 전멸해버렸고, 서부의 가다메스 수비군은 남쪽에서 몰려온 베타 집단군과 해안가를 선점한 한랜드 2군단에 의해 아게다비아 강변 방면으로 포위되어 포로 한명 없이 몰살되었다. 11사단장 시디 바라니 소장은 3시간 가량의 가잘라 대교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했지만 결국 한랜드군의 아게다비아 강 도하를 막을 순 없었다. 참새의 쌍두가 잘리면서, 이제 서부전선에 알파 집단군을 막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트리넬을 향했다.
개전 5일째, 연방방위부 국장 직권으로 화학무기 사용이 허가됐고, 그날 오후 9시경 루프트바페는 맛보기삼아 베이다에 스타인먼 화학이 갓 만든 사린, 소만, VX, 겨자가스 등의 대규모 화학무기 공습을 가했다.[8] 그곳은 마베라군의 남부주 사령부, 일명 맘무트 요새가 있던 도시였다. 이 화학탄 공습에서 도시를 수호하던 제21연대는 6시간만에 전 병력 7만명중 2,300명을 빼고 전멸했고, 몬타나주 사령부는 모두 포로가 되어 마베라 동부 야전군에 거대한 지휘 공백이 생겼다.
맘무트 요새로 총사령부를 이전한 웨스타시아 군부는 베이다의 뽕맛을 잊지 못하고 2월 26일(개전 6일째)부터 4달에 가까운 시간동안 서부전선 전역에 화학탄 폭격을 가했다. 지속된 가스폭격으로 인해 빈사상태가 된 마베라군을 한랜드 전차부대가 1차로 빠르게 쓸고 간 뒤, 독가스가 어느정도 가라앉으면 후속 보병부대가 2차로 남은 잔당들을 청소하는 전투양상이 수도에 도달할 때까지 쭈욱 반복됐다. 그것은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기동전, 일명 '전격전'이 반백년 남짓한 세월을 넘어 가장 끔찍한 형태로 부활한 것이었다.
결국 2월의 마지막날이자 개전 7일째 되던 1983년 2월 29일. 남쪽에서 달려온 알파 집단군이 트리넬에 도착함과 동시에 마베라군은 수도를 포기하고 후퇴했다. 다일타, 아일뢰는 베타 집단군에, 사오그란트(서부 한정)와 몬타나는 감마 집단군에게 점령당했다. 노르드란트는 후술할 해상봉쇄에 의해 고립되어 죽어갔다. 29일 오전 11시경, 트리넬 왕궁에 백십자기가 올라갔다. 그야말로 완벽한 웨스타시아의 승리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개전 3일째, 포격과 폭격이 잠잠해짐과 동시에 반 폐허가 된 트리넬 국제공항에 웨스타시아의 13개 공수여단이 투하됐다(부르군트 작전). 웨스타시아 공수군은 전차바퀴보다 큰 모든것을 싹다 죽였다. 샹페드로 4세와 왕가는 당초 수도를 지킬려 했지만, 왕궁의 코앞까지 공수부대가 진격해오자 어쩔 수 업이 칼펜시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마베라 군부의 모든 이목이 수도에 몰려있는 사이, 25일(개전 4일째) 3시경 한랜드 제6,9,7군단이 님부스시에서 마베라군 제44사단을 괴멸시켜버린 것을 시작으로 웨스타시아 육군이 마베라 남부지방을 파죽지세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쿤타치 작전의 후속으로 기획된 '바로바로싸 작전'의 요지는 일단 서부전선 중간에 위치한 369고지를 점령해 마베라 수비군을 동서로 분단, 양군의 전략적 연계를 끊은 뒤 둘로 분단된 마베라군을 베타와 감마 집단군이 해안과 산맥으로 밀어 포위섬멸하고 그러는 동안 알파 집단군은 최대한 신속한 기갑웨이브로 트리넬까지 진격해 공수군과 합류, 트리넬 시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마치 40년전의 그 나라를 보는듯한 경의로운 진격속도로 웨스타시아군은 공격 이틀만에 369고지를 점령했고, 마베라의 전력은 그들의 계획대로 동서로 갈라져 버렸다.
이제 남은것은 쌍두가 된 참새의 대가리를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동쪽의 마베라 제1,9,7군은 바르디야 전투에서 김용하 장군 휘하의 감마 집단군에게 몬타나 산맥에 포위되어 전멸해버렸고, 서부의 가다메스 수비군은 남쪽에서 몰려온 베타 집단군과 해안가를 선점한 한랜드 2군단에 의해 아게다비아 강변 방면으로 포위되어 포로 한명 없이 몰살되었다. 11사단장 시디 바라니 소장은 3시간 가량의 가잘라 대교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했지만 결국 한랜드군의 아게다비아 강 도하를 막을 순 없었다. 참새의 쌍두가 잘리면서, 이제 서부전선에 알파 집단군을 막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트리넬을 향했다.
개전 5일째, 연방방위부 국장 직권으로 화학무기 사용이 허가됐고, 그날 오후 9시경 루프트바페는 맛보기삼아 베이다에 스타인먼 화학이 갓 만든 사린, 소만, VX, 겨자가스 등의 대규모 화학무기 공습을 가했다.[8] 그곳은 마베라군의 남부주 사령부, 일명 맘무트 요새가 있던 도시였다. 이 화학탄 공습에서 도시를 수호하던 제21연대는 6시간만에 전 병력 7만명중 2,300명을 빼고 전멸했고, 몬타나주 사령부는 모두 포로가 되어 마베라 동부 야전군에 거대한 지휘 공백이 생겼다.
맘무트 요새로 총사령부를 이전한 웨스타시아 군부는 베이다의 뽕맛을 잊지 못하고 2월 26일(개전 6일째)부터 4달에 가까운 시간동안 서부전선 전역에 화학탄 폭격을 가했다. 지속된 가스폭격으로 인해 빈사상태가 된 마베라군을 한랜드 전차부대가 1차로 빠르게 쓸고 간 뒤, 독가스가 어느정도 가라앉으면 후속 보병부대가 2차로 남은 잔당들을 청소하는 전투양상이 수도에 도달할 때까지 쭈욱 반복됐다. 그것은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기동전, 일명 '전격전'이 반백년 남짓한 세월을 넘어 가장 끔찍한 형태로 부활한 것이었다.
결국 2월의 마지막날이자 개전 7일째 되던 1983년 2월 29일. 남쪽에서 달려온 알파 집단군이 트리넬에 도착함과 동시에 마베라군은 수도를 포기하고 후퇴했다. 다일타, 아일뢰는 베타 집단군에, 사오그란트(서부 한정)와 몬타나는 감마 집단군에게 점령당했다. 노르드란트는 후술할 해상봉쇄에 의해 고립되어 죽어갔다. 29일 오전 11시경, 트리넬 왕궁에 백십자기가 올라갔다. 그야말로 완벽한 웨스타시아의 승리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3.3. 교착 [편집]
7일간의 천지파괴가 끝나고, 전장에 새로운 해가 밝았다. 트리넬과 마베라 서부의 대부분은 웨스타시아 손에 떨어졌고, 왕가와 군 수뇌부들은 동부의 임시수도 칼펜으로 거처를 옮겼다. 2월 30일 오전 8시경 왕가를 태운 C-130 수송기가 세누시 국제공항에 내리고, 임시수도에서 하는 첫 어전회의가 시작됐다. 마베라는 이제 선택을 해야했다.
군부는 둘로 나뉘었다. 육군의 니콜라 드 몬테 소장을 주축으로 한 협상파, 공군의 마르사 엘 브라가 중장을 중심으로 한 항전파가 그것이었다.
먼저 협상파의 니콜라 소장은 조건부 항복을 주장했다. 83년 여름 시점에서 이 주장은 꽤 타당해보이는 주장이었다. 당시 마베라는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어보였다. 국토의 대부분은 한랜드에게 먹혀버린지 오래고 최전방의 3개 집단군은 전멸, 잔존 병력들은 뿔뿔히 흩어져 각개격파된지 오래라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 상태로 항전을 계속하다 한랜드군이 동부까지 밀고들어오면 나라고 머고 왕가의 목부터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개전 연설에서 드러났듯 웨스타시아의 목표는 완전 점령이 아닌, 몬타나 이북의 광산들과 중부의 공업지대들이었다. 때문에 협상을 통해 이것들을 때주면 나라의 명맥이라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니콜라 소장의 주장은 얼핏보면 그럴듯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이쯤에서 웨스타시아의 전쟁 계획을 다시 살펴보자.
* 우선 첫째날, 둘째날에는 공군과 포병대를 이용한 대규모 초토화 작전(쿤타치 작전)으로 마베라의 모든 군사적 인프라(특히 방공망)를 파괴함과 동시에 한랜드군의 주특기 공중전으로 제공권을 장악하고
* 셋째날엔 장악한 공중을 통해 트리넬에 공수부대를 투입(부르군트 작전), 국경선에 집중된 마베라측 병력을 수도성으로 교란시키고
* 넷째날에는 국경 방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바로바로싸 작전). 육군 320만을 북으로 진격 후 종심작전을 적절히 활용해 3일 안에 트리넬을 완전히 점령 후 항복문서를 받아낸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마지막의 '3일 안에 항복문서를 받아낸다' 부분이다. 브라가 중장이 꼬집은 SB계획의 유일한 허점은 이것이었다.
당시 마베라는 버블 붕괴 이후 잿더미가 된 웨스타시아에서 차량산업을 줍줍했기에[9] 전국에 자동차 공장지대가 무수히 흩어져 있었고, 이를 뒷받침할 각종 노천광산들도 남부 몬타나 산맥 부근에 다수 포진해 있었다. 차량 공업이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은 곧 땅끄 물량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었다. 반면 웨스타시아는 버블 붕괴의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도 않은 시점이라 전반적으로 공업력도 딸리고 인구 자체도 딸렸다. 마베라 영토의 반을 먹었지만[10]먹은 영토의 대부분은 서부 평원의 곡창 지대였고 전쟁의 목표인 아크다르 산맥 너머의 공업지대과 광산들은 여전히 마베라의 손. 반년 전부터 총동원령으로 억지로 공업력을 짜내서 80만 전차대군을 만들어냈지만 결국 장기적으로 봤을때 질적/양적으로 밀리는건 한랜드쪽이었다. 즉, 마테르전은 기본적으로 장기전으로 갈수록 마베라가 유리해지는 그림이었다. 앨빈 대통령은 이걸 알았기에 7일이라는 역사상 전무한 짧은 시일안에 최대한 빨리 수도를 점령해 왕가를 협상 테이블로 불러 목표물을 쟁취, 초단기로 전쟁을 끝내는 구상을 짰던 것이고, 만약 계획된 시한안에 전쟁을 끗내지 못한다면 모든것이 잘못되는 계획이었다.
또한 브라가 장군은 파시즘 국가의 특성을 고려하면 공업지대를 내주고 정전을 하더라도 한랜드는 결국 언젠가 다시 쳐들어올것이라 예측했는데, 이 상황에서 만일 웨스타시아와 정전 협상을 할시 적에게 꽤나 큰 영토를 때주는건 둘째치고 점령한 서부의 광대한 곡창지대에서 나온 농산물들을 수출해 경제회복 및 중공업을 재건할 시간을 제공, 향후 10,20년안에 일어날 2차 전쟁에 크나큰 고지를 내어주는 거나 다름업다는게 브라가 중장의 주장이었다.
국왕은 브라가의 손을 들어줬다.
83년 3월 1일. 마베라 외무성은 웨스타시아의 협상 제의에 ㅗ로 대응했다. 앞서 말한대로 최대한 빠른 종전을 원한 웨스타시아는 약간 당황했다. 한편 웨스타시아군 점령지에서는 잔존 마베라군들을 토벌하기 위한 산발적인 교전을 계속하느라 진격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83년 3월부터 마베라군은 동자오그란트, 수미나이, 노르트란트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광할한 길이의 참호선을 건설했다. 마침 3월 3일부터는 2월에 끝났던 장마가 다시 찾아와 전선 전역이 진흙으로 뒤덮혔다. 3주간 이어진 장마로 땅이 질척거려 땅끄들이 진격을 못하니 한랜드군의 전격전 전술이 돈좌, 공세가 막을 내리고 전선이 고착화되었다. 당황한 한랜드군은 전쟁 전에 연구해뒀던 인공강우 프로젝트 '나푸사 작전'을 실행, 600만톤이 넘는 HINA 분무액[11]을 전선에 뿌려 공기중 수증기를 한방에 응결, 3~4일만에 장마를 끝내려 했지만 계산 실수와 마베라 정보부 & 루이나 MIA의 분무액 생산라인 사보타쥬[12]가 겹쳐 뿌려진 불량용액이 역효과를 유발. 예보대로면 3월 중순에 그칠 예정이던 장마가 7월까지 연장되버리는 참사가 발생했다. 굳은 날씨때문에 그렇게 한달내내 내린 장마로 양측의 기갑 전력들이 대부분 봉쇄되어버리면서 남은건 보병부대 뿐이었다.
그렇게 솔로몬, 미스라타, 아크로마 전투에서 1차대전 이후 봉인되어있었던 참호전이 반백년의 세월을 넘어 부활하고야 말았다. 웨스타시아군은 여전히 미미하게 공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3달이 넘는 기간동안 전선에 변화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하루에 수킬로미터 진격에 그쳤으며 가끔은 몇미터씩 진격했던 때도 있었다. 이런 질척이는 전황은 솔로몬 공방전에서 정점을 찍었는데, 도시 하나 먹는것에 양군 총합 3만명[13]의 희생자가 발생할 정도였다. 이렇듯 양측의 손해가 극심했기에, 브라가 장군은 쏟아지는 반전 여론에 한동안 경질당할뻔 했다.
군부는 둘로 나뉘었다. 육군의 니콜라 드 몬테 소장을 주축으로 한 협상파, 공군의 마르사 엘 브라가 중장을 중심으로 한 항전파가 그것이었다.
먼저 협상파의 니콜라 소장은 조건부 항복을 주장했다. 83년 여름 시점에서 이 주장은 꽤 타당해보이는 주장이었다. 당시 마베라는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어보였다. 국토의 대부분은 한랜드에게 먹혀버린지 오래고 최전방의 3개 집단군은 전멸, 잔존 병력들은 뿔뿔히 흩어져 각개격파된지 오래라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 상태로 항전을 계속하다 한랜드군이 동부까지 밀고들어오면 나라고 머고 왕가의 목부터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개전 연설에서 드러났듯 웨스타시아의 목표는 완전 점령이 아닌, 몬타나 이북의 광산들과 중부의 공업지대들이었다. 때문에 협상을 통해 이것들을 때주면 나라의 명맥이라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니콜라 소장의 주장은 얼핏보면 그럴듯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이쯤에서 웨스타시아의 전쟁 계획을 다시 살펴보자.
* 우선 첫째날, 둘째날에는 공군과 포병대를 이용한 대규모 초토화 작전(쿤타치 작전)으로 마베라의 모든 군사적 인프라(특히 방공망)를 파괴함과 동시에 한랜드군의 주특기 공중전으로 제공권을 장악하고
* 셋째날엔 장악한 공중을 통해 트리넬에 공수부대를 투입(부르군트 작전), 국경선에 집중된 마베라측 병력을 수도성으로 교란시키고
* 넷째날에는 국경 방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바로바로싸 작전). 육군 320만을 북으로 진격 후 종심작전을 적절히 활용해 3일 안에 트리넬을 완전히 점령 후 항복문서를 받아낸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마지막의 '3일 안에 항복문서를 받아낸다' 부분이다. 브라가 중장이 꼬집은 SB계획의 유일한 허점은 이것이었다.
당시 마베라는 버블 붕괴 이후 잿더미가 된 웨스타시아에서 차량산업을 줍줍했기에[9] 전국에 자동차 공장지대가 무수히 흩어져 있었고, 이를 뒷받침할 각종 노천광산들도 남부 몬타나 산맥 부근에 다수 포진해 있었다. 차량 공업이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은 곧 땅끄 물량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었다. 반면 웨스타시아는 버블 붕괴의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도 않은 시점이라 전반적으로 공업력도 딸리고 인구 자체도 딸렸다. 마베라 영토의 반을 먹었지만[10]먹은 영토의 대부분은 서부 평원의 곡창 지대였고 전쟁의 목표인 아크다르 산맥 너머의 공업지대과 광산들은 여전히 마베라의 손. 반년 전부터 총동원령으로 억지로 공업력을 짜내서 80만 전차대군을 만들어냈지만 결국 장기적으로 봤을때 질적/양적으로 밀리는건 한랜드쪽이었다. 즉, 마테르전은 기본적으로 장기전으로 갈수록 마베라가 유리해지는 그림이었다. 앨빈 대통령은 이걸 알았기에 7일이라는 역사상 전무한 짧은 시일안에 최대한 빨리 수도를 점령해 왕가를 협상 테이블로 불러 목표물을 쟁취, 초단기로 전쟁을 끝내는 구상을 짰던 것이고, 만약 계획된 시한안에 전쟁을 끗내지 못한다면 모든것이 잘못되는 계획이었다.
또한 브라가 장군은 파시즘 국가의 특성을 고려하면 공업지대를 내주고 정전을 하더라도 한랜드는 결국 언젠가 다시 쳐들어올것이라 예측했는데, 이 상황에서 만일 웨스타시아와 정전 협상을 할시 적에게 꽤나 큰 영토를 때주는건 둘째치고 점령한 서부의 광대한 곡창지대에서 나온 농산물들을 수출해 경제회복 및 중공업을 재건할 시간을 제공, 향후 10,20년안에 일어날 2차 전쟁에 크나큰 고지를 내어주는 거나 다름업다는게 브라가 중장의 주장이었다.
국왕은 브라가의 손을 들어줬다.
83년 3월 1일. 마베라 외무성은 웨스타시아의 협상 제의에 ㅗ로 대응했다. 앞서 말한대로 최대한 빠른 종전을 원한 웨스타시아는 약간 당황했다. 한편 웨스타시아군 점령지에서는 잔존 마베라군들을 토벌하기 위한 산발적인 교전을 계속하느라 진격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83년 3월부터 마베라군은 동자오그란트, 수미나이, 노르트란트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광할한 길이의 참호선을 건설했다. 마침 3월 3일부터는 2월에 끝났던 장마가 다시 찾아와 전선 전역이 진흙으로 뒤덮혔다. 3주간 이어진 장마로 땅이 질척거려 땅끄들이 진격을 못하니 한랜드군의 전격전 전술이 돈좌, 공세가 막을 내리고 전선이 고착화되었다. 당황한 한랜드군은 전쟁 전에 연구해뒀던 인공강우 프로젝트 '나푸사 작전'을 실행, 600만톤이 넘는 HINA 분무액[11]을 전선에 뿌려 공기중 수증기를 한방에 응결, 3~4일만에 장마를 끝내려 했지만 계산 실수와 마베라 정보부 & 루이나 MIA의 분무액 생산라인 사보타쥬[12]가 겹쳐 뿌려진 불량용액이 역효과를 유발. 예보대로면 3월 중순에 그칠 예정이던 장마가 7월까지 연장되버리는 참사가 발생했다. 굳은 날씨때문에 그렇게 한달내내 내린 장마로 양측의 기갑 전력들이 대부분 봉쇄되어버리면서 남은건 보병부대 뿐이었다.
그렇게 솔로몬, 미스라타, 아크로마 전투에서 1차대전 이후 봉인되어있었던 참호전이 반백년의 세월을 넘어 부활하고야 말았다. 웨스타시아군은 여전히 미미하게 공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3달이 넘는 기간동안 전선에 변화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하루에 수킬로미터 진격에 그쳤으며 가끔은 몇미터씩 진격했던 때도 있었다. 이런 질척이는 전황은 솔로몬 공방전에서 정점을 찍었는데, 도시 하나 먹는것에 양군 총합 3만명[13]의 희생자가 발생할 정도였다. 이렇듯 양측의 손해가 극심했기에, 브라가 장군은 쏟아지는 반전 여론에 한동안 경질당할뻔 했다.
3.4. "수면위의 모든것은 웨스타시아의 적" [편집]
이제 난감한 쪽은 웨스타시아였다. 당초의 7일 전쟁 계획은 물건너간 상황에서, 병사와 물자들은 계속 갈려나가고 있는데 장마로 더이상의 진격도 불가했다. 현 시점에서 가능한 수는 그저 7월에 장마가 끝날 때까지 버티다 땅이 건조해졌을때 다시 진격하는 것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마베라 측은 곡창지대를 잃었음에도 NLTO에서 들어오는 원조가 워낙 막대했기에 오랫동안 버틸수 있었지만, 웨스타시아 측은 기껏얻은 곡창지대를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지출을 해야했다는 것이었다.
한편 지상에서 육군과 공군이 고생하는 동안 해군쪽은 내심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전쟁 초반 한랜드 육군과 공군이 트리넬을 향해 쫙쫙 밀고가면서 전승훈장 여럿따고 있을때[14] 해군쪽은...
이미 전쟁 전부터 한직 취급이었던 수상함대는 전쟁 초반에 갈려나가 비중이 공기가 된지 오래고, 그나마 물량이 많았던 잠수함대쪽은 2달동안 왕립해군을 겨우겨우 궤멸시켰더니 대중들은 육지 전황에만 관심있고, 바다에선 아직도 미사일고속정 짤짤이들과 육지에서 탈출한 마베라 수송함대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와 정신은 하나도 없는 와중에 예산은 여전히 쥐꼬리만한 괴악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애초에 해군 입장에서는 육군 및 공군 주도로 개전한 이 전쟁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존심 크리티컬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전쟁의 주인공이 되길 원했다.
알렉산더 S. 퍼킨 잠수함대 제독은 이 두 문제의 답을 알고있었다. 83년 4월 13일, 퍼킨 제독은 상부에 '브루스파팅턴 계획'의 보고서를 제출한다. 요지는 현재 가용가능한 모든 잠수함 전력을 총동원해서 마베라 연안을 지나는 모든 선박[15]을 보이는대로 격침. 마베라 밥줄인 서방 원조를 아예 끊어버려 완전히 고사시켜 버리는 것과 그것을 대규모 해군증강을 포함한 계획이었다. 누가 봐도 원조집이 어디인지는 뻔히 보였다.
반대파는 물론 어마어마했다. 이 전략의 원조집은 이걸 과하게 쓰다가 잠자던 호랑이를 건드려 패망했던 역사가 있으니 자명한 결과였다. 특히 해군이 이 전쟁에서 계속 쩌리로 남길 바랬던 육군은 외교적 리스크를 이유로 들며 끝까지 결사반대를 외쳤지만, 결국 총사령부 입장에선 이외엔 마땅한 방법도 없었기에 작전 시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계획의 가장 큰 난점은 마베라해의 해저도시 노스리지 자유시를 차지하고 있던 신동경이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곳은 NEDP 인사들과 몇몇 강대국들의 첩보기관들을 제외하면 육상 세계에 거의 알려진게 없는 미지의 땅이었는데, 당시 웨스타시아 군부에서 알고있는 거라곤 NEDP의 소굴이라는 점과 웨스타시아와 같은 민족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당시 고고학자들이 유고랜드에 남아있던 유적들을 조사해서 알아냈던 것은, 과거 웨스타시아인과 오스탈로스인은 한민족이었다가 약 2800년전에 전쟁으로 갈라져나온 사이였다는 사실이었는데, 문제는 웨스타시아 측에선 이걸 신동경측이 아는지 모르는지 알길이 없었다. 만약 신동경측이 이걸 알고있다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실상 실패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웨스타시아군은 실상 도박에 가까운 수를 던진 셈이었다.
한편 지상에서 육군과 공군이 고생하는 동안 해군쪽은 내심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전쟁 초반 한랜드 육군과 공군이 트리넬을 향해 쫙쫙 밀고가면서 전승훈장 여럿따고 있을때[14] 해군쪽은...
이미 전쟁 전부터 한직 취급이었던 수상함대는 전쟁 초반에 갈려나가 비중이 공기가 된지 오래고, 그나마 물량이 많았던 잠수함대쪽은 2달동안 왕립해군을 겨우겨우 궤멸시켰더니 대중들은 육지 전황에만 관심있고, 바다에선 아직도 미사일고속정 짤짤이들과 육지에서 탈출한 마베라 수송함대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와 정신은 하나도 없는 와중에 예산은 여전히 쥐꼬리만한 괴악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애초에 해군 입장에서는 육군 및 공군 주도로 개전한 이 전쟁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존심 크리티컬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전쟁의 주인공이 되길 원했다.
알렉산더 S. 퍼킨 잠수함대 제독은 이 두 문제의 답을 알고있었다. 83년 4월 13일, 퍼킨 제독은 상부에 '브루스파팅턴 계획'의 보고서를 제출한다. 요지는 현재 가용가능한 모든 잠수함 전력을 총동원해서 마베라 연안을 지나는 모든 선박[15]을 보이는대로 격침. 마베라 밥줄인 서방 원조를 아예 끊어버려 완전히 고사시켜 버리는 것과 그것을 대규모 해군증강을 포함한 계획이었다. 누가 봐도 원조집이 어디인지는 뻔히 보였다.
반대파는 물론 어마어마했다. 이 전략의 원조집은 이걸 과하게 쓰다가 잠자던 호랑이를 건드려 패망했던 역사가 있으니 자명한 결과였다. 특히 해군이 이 전쟁에서 계속 쩌리로 남길 바랬던 육군은 외교적 리스크를 이유로 들며 끝까지 결사반대를 외쳤지만, 결국 총사령부 입장에선 이외엔 마땅한 방법도 없었기에 작전 시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계획의 가장 큰 난점은 마베라해의 해저도시 노스리지 자유시를 차지하고 있던 신동경이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곳은 NEDP 인사들과 몇몇 강대국들의 첩보기관들을 제외하면 육상 세계에 거의 알려진게 없는 미지의 땅이었는데, 당시 웨스타시아 군부에서 알고있는 거라곤 NEDP의 소굴이라는 점과 웨스타시아와 같은 민족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당시 고고학자들이 유고랜드에 남아있던 유적들을 조사해서 알아냈던 것은, 과거 웨스타시아인과 오스탈로스인은 한민족이었다가 약 2800년전에 전쟁으로 갈라져나온 사이였다는 사실이었는데, 문제는 웨스타시아 측에선 이걸 신동경측이 아는지 모르는지 알길이 없었다. 만약 신동경측이 이걸 알고있다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실상 실패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웨스타시아군은 실상 도박에 가까운 수를 던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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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뢰에 맞아 폭발하는 카푸초함 |
RMN 카푸초(Capuccio)함은 마베라 해군(Maberra Royal Navy, RMN) 소속의 순양함으로, 4월 24일 마베라 국영방송에서 진행되던 선전 생방송 도중 웨스타시아 해군 소속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격침되었다. 해당 방송은 마베라 전역에 생중계되고 있었으며, 어뢰 피격과 함정 침몰 장면이 실시간으로 송출되면서 국민적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마베라 국내에서는 전쟁 지속에 대한 회의론과 항복 요구 여론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해당 생방송이 송출된 이후로 마베라 해군의 활동이 급격히 감소하였다[16],
3.4.1. 루이나의 1차 경고 [편집]
루이나 공화국 외교부는 웨스타시아 해군이 실시 중인 소위 "브루스파팅턴 작전(Operation Bruce-Partington)"[17]이라 불리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강력히 규탄한다.본 작전은 민간 해역과 군사적 긴장 완화 구역을 불문하고 모든 선박을 적대적으로 간주하고 격침 대상으로 삼는 비인도적 전략으로, 국제 해양법과 무력 충돌 규범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행위이다. 특히 4월 24일, 마베라 해군 소속 카푸초(Capuccio)함이 선전방송 생중계 중 어뢰 공격으로 침몰한 사건은 해당 작전의 비겁함과 도발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루이나는 웨스타시아 측에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브루스파팅턴 작전의 즉각적이고 조건 없는 중단을 요구한다.2. 해양에서의 민간 및 중립국 선박에 대한 공격은 국제사회의 공동 대응을 초래할 수 있음을 명백히 경고한다.3. 루이나는 자국 및 동맹국의 항행의 자유를 수호할 권리와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필요 시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다.루이나 정부는 평화와 국제질서를 중시하며, 어떠한 형태의 해상 도발에도 단호히 대응할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루이나 외교부의 웨스터시아에 대한 1차 규탄
3.5. 개무시 [편집]
허지만 웨스타시아 측은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루이나 외교부의 경고에도 ㅗ로 일관했고, 의외로 루이나 해군이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음에 따라[18] 웨스타시아 해군은 의외로 순조롭게 마베라 근해의 재해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5월 초부터 마베라해는 완전한 죽은 자들의 땅이 되었다.
봉쇄의 효과는 굉장했다! 서방의 원조만으로 실상 버티고 있던 마베라는 봉쇄시작 몇주만에 빠르게 무너져내렸다. 당시 마베라가 버티고있던 동부주들은 대부분이 더운 사바나 기후 + 장마로 햇빛이 안듬 크리로 도저히 농사를 지을땅이 안되었던데다, 대부분의 비축미들은 서부에 있었던 탓에 마베라는 빠르게 아사해가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굶어죽은 시체들과 거지들이 넘쳐났고, 끊임없이 오는 공습은 하나의 거대한 절망덩어리를 형성했다. 그렇게 7월이 되자 서서히 장마도 그치고, 웨스타시아군은 다시 진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망국 직전의 순간이었다.
봉쇄의 효과는 굉장했다! 서방의 원조만으로 실상 버티고 있던 마베라는 봉쇄시작 몇주만에 빠르게 무너져내렸다. 당시 마베라가 버티고있던 동부주들은 대부분이 더운 사바나 기후 + 장마로 햇빛이 안듬 크리로 도저히 농사를 지을땅이 안되었던데다, 대부분의 비축미들은 서부에 있었던 탓에 마베라는 빠르게 아사해가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굶어죽은 시체들과 거지들이 넘쳐났고, 끊임없이 오는 공습은 하나의 거대한 절망덩어리를 형성했다. 그렇게 7월이 되자 서서히 장마도 그치고, 웨스타시아군은 다시 진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망국 직전의 순간이었다.
3.6. 왕가의 분전 [편집]
마베라는 상 페드로 왕가(House of San-Pedro)가 통치하는 왕정 국가로, 전면전 발발 이후 왕실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직접 전장에 참여하는 이례적 결단을 내렸다. 국왕 상 페드로 3세(San-Pedro III)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자신의 직계 자녀들에게 실질적인 군 지휘권을 부여하며, 왕실이 국민과 함께 싸울 것임을 공식 선언했다.
“마베라의 아들딸들이여.
나, 상 페드로 3세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왕으로서가 아니라, 이 땅에 생명을 바친 모든 가문의 아버지로서 말하노라.
우리가 맞선 전쟁은 단지 국경의 다툼이 아니다. 이는 우리의 언어를, 우리의 신을, 우리의 기억을 지우려는 자들에 맞서는 싸움이다.그러므로 왕관은 더 이상 성벽 뒤에 머무를 수 없다.
나의 자식들—라파엘, 칼레드, 팔라스, 그리고 나디아—이 네 사람은 오늘부로 군의 부름을 받아, 각자의 자리에서 병사들과 함께 땀과 피를 흘릴 것이다.
나는 아버지다. 그들을 보내는 내 마음이 무겁지 않다면 거짓이리라. 그러나 나는 또한 왕이다. 피는 높이 흐르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흘러야 그 가치를 가진다.왕의 자식은, 가장 먼저 총을 들어야 한다. 왕의 집은 가장 늦게 불타야 한다.그대들도 나와 함께 싸워다오.
이 전쟁은 모든 가문의 전쟁이니, 모든 피의 헌신이 존귀할 것이다.신께 맹세하노니, 마베라는 무너지지 않노라. 왕관은 피로 지켜질 것이다.”
왕자 라파엘 페드로(Rafael Pedro), 칼레드 페드로(Kàled Pedro), 팔라스 페드로(Falas Pedro), 그리고 공주 나디아 페드로(Nadia Pedro)는 각각 해군, 육군, 병참, 공군 부문에 배속되어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이들의 활약은 ‘왕가의 분전(Royal Resistance)’이라는 표현으로 불리며 대중적 상징이 되었다.
특히 왕족이 직접 총을 들고 전선에 나선 사실은, 전황이 불리한 가운데서도 마베라 국민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 곳곳에서 자원입대가 증가하고, 국왕에 대한 충성 서약과 시민들의 자발적 구호활동이 이어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신이시여 우리 왕을 도우소서”라는 구호가 민병 조직의 표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황이 악화되면서 라파엘 페드로와 칼리드 페드로는 각각 북부 해역과 서부 전선에서 전사하였다. 이들의 죽음에 마베라 국민들은 분노하였고 떨어져가던 사기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마베라의 백성들이여.나는 지금, 아버지의 심장으로 이 말을 전하노라.
나의 장자 라파엘은 북부 해역의 칠흑 같은 밤 속에서, 함대를 지휘하던 중 적의 어뢰를 맞고 바다에 잠겼다.
나의 차남 칼리드는 제23 기갑여단과 함께 중부 전선의 사막에서 포화를 뚫고 전진하던 중, 장렬히 산화하였다.이들은 왕위 계승자였고, 피를 이은 내 살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은 마베라의 병사였다.나의 자식이 죽었다는 사실은 한 가정의 비극이 아니다. 이는 왕실의 의무가 말이 아닌 피로써 증명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라 믿는다.나는 결코 통곡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눈물이 적에게 위로가 될 수는 없기에.
그러나 나는 기억할 것이다. 두 왕자의 이름은, 앞으로 마베라의 역사서에 불멸로 남을 것이다.모든 깃발은 조기를 달라.
모든 종은 108번을 울려라.
모든 자는 이 전사를 명예로 기억하여라.
백성들이여,
왕실은 피를 흘렸다. 이제 그 피는 마베라의 흙 속에 섞여, 이 땅의 일부가 되었다.
신께 맹세하노니, 이 전쟁은 우리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계속될 것이다.
왕관은 아직 전선 위에 있다.”
3.7. 두 동맹국 [편집]
체르드는 전쟁 발발 초기부터, 마베라에 무기를 지원했던 대표적인 친 마베라 국가이다. 그러나 체르드의 참전은 단순한 우호적 제스처가 아닌, 철저한 전략적 이해에 따른 결정이었다. 마테르 전쟁 발발 직후, 웨스타시아(한랜드)가 개시한 브루스파팅턴 해상봉쇄 작전은 체르드에 직접적이고도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혔다. 이 작전은 웨스타시아 해군이 북랜드 일대의 주요 해상 수송로를 차단하여, 체르드를 포함한 국가들이 육로 외에는 외부와의 무역이 거의 불가능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특히 체르드는 서해 항만도시 파우스트를 통해 대부분의 식량, 석유, 공업 원자재를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 수송망의 마비는 사실상 국가 기능의 일부 정지를 의미했다.
경제적 고립 속에서 체르드는 상황을 곧바로 안보 위기로 인식했다. 바로 인접한 마베라 왕국이 침공을 받아 국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마베라가 함락된다면, 체르드는 웨스타시아와 국경을 맞대는 최전방 국가가 되는 셈이었고, 이는 국방 인프라가 미비한 상태였던 체르드에게 감당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이 같은 위기 의식 속에서, 체르드는 마베라를 지지하는 편에 서기로 결정한다.
사실 체르드가 마베라를 지원하기로 한 이유는 명백했다. 마베라가 이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루이나는 마테르 전쟁 초기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선언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마베라 왕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나 정부는 직접적인 무기 제공이나 군사개입이 국제 외교질서, 특히 북랜드–랜드해협 안보 균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비공식적·우회적 경로를 통해 마베라를 지원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체르드 경유 무기 임대 프로그램’이었다. 루이나는 동맹국 체르드에 '공동훈련 및 안보협력을 위한 무상임대'라는 명목으로 대규모 무기를 제공했다. 여기에는 중형 전차, 다연장 로켓포, 대공포, 통신장비, 총기와 석유 등, 전쟁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자를 제공하였다.
공식적으로는 체르드 자위 역량 강화를 위한 협력으로 포장되었지만, 이 무기들의 상당수가 곧바로 마베라 전선에 등장했으며, 체르드 육군이 '독자적 판단에 따라 마베라에 군사물자를 이전했다'고 밝히면서, 실질적 우회지원이 이루어졌음이 외교가에 널리 알려졌다.
이 과정은 철저한 외교적 암묵성과 형식적 합법성 아래 이루어졌기 때문에, 루이나 정부는 "체르드에 무기를 빌려준 것일 뿐, 체르드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체르드의 주권사항"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루이나군 내부 자료와 국방위원회 회의록 일부가 유출되면서, 해당 무기 중 다수가 처음부터 ‘제3국 이전 가능’을 전제로 출고된 사실이 드러나, 외교적 '눈가리고 아웅'이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체르드는 공화국 체제였지만, 당시 집권 중이던 보수 우파 정당이 왕정국가인 마베라와 비교적 안정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실제로 두 국가는 수년 전부터 군사 기술 협력, 국경 관리 조약 등을 통해 상호 방위체제를 조율한 바 있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체르드는 마베라와의 공동 방어를 선언하며 전면 참전했고, 결과적으로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이 북부 전선에 방어선을 형성하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반면, 델라웨어는 전쟁 발발 초기부터 웨스타시아 진영과의 정치적·군사적 연대를 추진했다. 델라웨어는 오래 전부터 마베라의 왕정 체제와 귀족 중심의 통치구조를 "시대착오적 봉건국가"라 비판해왔고, 그에 반해 웨스타시아가 추진하던 중앙집권적·파시즘적 국가 혁신 모델에는 일정 수준의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델라웨어는 당시 군정과 치안조직이 권력을 함께 장악한 준독재 국가였으며, 형식적으론 중립을 표방했지만, 웨스타시아의 마베라 침공 직후 외교적 방향을 빠르게 재조정한다. 특히 브루스파팅턴 작전의 공동 실행국 중 하나로 자처하면서, 웨스타시아와 해상봉쇄 작전의 이익 배분 협상을 맺는다. 델라웨어는 봉쇄망의 일부를 피해갈 수 있는 해역 구획권과 중계무역권 확보를 조건으로 웨스타시아와 경제 협력을 강화했고, 이는 사실상 전쟁의 공동 수행 계약이었다.
더불어 마베라가 무너지면 체르드가 북랜드의 새로운 맹주가 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델라웨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는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 이러한 판단 속에, 델라웨어는 웨스타시아와 군사협력 조약을 체결하고, 일부 병력을 웨스타시아 지휘 아래 전선에 파병하기에 이른다. 북랜드 전쟁 구도는 이로써 마베라–체르드 대 웨스타시아–델라웨어라는 양 진영 체계로 본격화되었고, 이 구도는 사실상 전쟁 후반부까지 유지된다.
경제적 고립 속에서 체르드는 상황을 곧바로 안보 위기로 인식했다. 바로 인접한 마베라 왕국이 침공을 받아 국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마베라가 함락된다면, 체르드는 웨스타시아와 국경을 맞대는 최전방 국가가 되는 셈이었고, 이는 국방 인프라가 미비한 상태였던 체르드에게 감당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이 같은 위기 의식 속에서, 체르드는 마베라를 지지하는 편에 서기로 결정한다.
사실 체르드가 마베라를 지원하기로 한 이유는 명백했다. 마베라가 이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루이나는 마테르 전쟁 초기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선언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마베라 왕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나 정부는 직접적인 무기 제공이나 군사개입이 국제 외교질서, 특히 북랜드–랜드해협 안보 균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비공식적·우회적 경로를 통해 마베라를 지원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체르드 경유 무기 임대 프로그램’이었다. 루이나는 동맹국 체르드에 '공동훈련 및 안보협력을 위한 무상임대'라는 명목으로 대규모 무기를 제공했다. 여기에는 중형 전차, 다연장 로켓포, 대공포, 통신장비, 총기와 석유 등, 전쟁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자를 제공하였다.
공식적으로는 체르드 자위 역량 강화를 위한 협력으로 포장되었지만, 이 무기들의 상당수가 곧바로 마베라 전선에 등장했으며, 체르드 육군이 '독자적 판단에 따라 마베라에 군사물자를 이전했다'고 밝히면서, 실질적 우회지원이 이루어졌음이 외교가에 널리 알려졌다.
이 과정은 철저한 외교적 암묵성과 형식적 합법성 아래 이루어졌기 때문에, 루이나 정부는 "체르드에 무기를 빌려준 것일 뿐, 체르드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체르드의 주권사항"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루이나군 내부 자료와 국방위원회 회의록 일부가 유출되면서, 해당 무기 중 다수가 처음부터 ‘제3국 이전 가능’을 전제로 출고된 사실이 드러나, 외교적 '눈가리고 아웅'이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체르드는 공화국 체제였지만, 당시 집권 중이던 보수 우파 정당이 왕정국가인 마베라와 비교적 안정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실제로 두 국가는 수년 전부터 군사 기술 협력, 국경 관리 조약 등을 통해 상호 방위체제를 조율한 바 있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체르드는 마베라와의 공동 방어를 선언하며 전면 참전했고, 결과적으로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이 북부 전선에 방어선을 형성하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반면, 델라웨어는 전쟁 발발 초기부터 웨스타시아 진영과의 정치적·군사적 연대를 추진했다. 델라웨어는 오래 전부터 마베라의 왕정 체제와 귀족 중심의 통치구조를 "시대착오적 봉건국가"라 비판해왔고, 그에 반해 웨스타시아가 추진하던 중앙집권적·파시즘적 국가 혁신 모델에는 일정 수준의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델라웨어는 당시 군정과 치안조직이 권력을 함께 장악한 준독재 국가였으며, 형식적으론 중립을 표방했지만, 웨스타시아의 마베라 침공 직후 외교적 방향을 빠르게 재조정한다. 특히 브루스파팅턴 작전의 공동 실행국 중 하나로 자처하면서, 웨스타시아와 해상봉쇄 작전의 이익 배분 협상을 맺는다. 델라웨어는 봉쇄망의 일부를 피해갈 수 있는 해역 구획권과 중계무역권 확보를 조건으로 웨스타시아와 경제 협력을 강화했고, 이는 사실상 전쟁의 공동 수행 계약이었다.
더불어 마베라가 무너지면 체르드가 북랜드의 새로운 맹주가 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델라웨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는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 이러한 판단 속에, 델라웨어는 웨스타시아와 군사협력 조약을 체결하고, 일부 병력을 웨스타시아 지휘 아래 전선에 파병하기에 이른다. 북랜드 전쟁 구도는 이로써 마베라–체르드 대 웨스타시아–델라웨어라는 양 진영 체계로 본격화되었고, 이 구도는 사실상 전쟁 후반부까지 유지된다.
3.8. 딮스마르크 추격전: 봉쇄가 뚫리다 [편집]
자세한건 딮스마르크 추격전문서를 참고.
3.9. 벵가지 상륙 [편집]
자세한건 벵가지 상륙전문서를 참고.
3.10. 대공세 [편집]
1983년 가을,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은 전선을 일제히 반격하기 시작했다. 참호전과 장마로 한동안 고착되어 있던 전황은, 7월 장마 종료와 동시에 점진적 전환을 예고했으며, 루이나를 비롯한 제3국의 물자·정보 지원이 본격화되면서 전쟁의 흐름은 서서히 ‘되돌려지기’ 시작했다. 이 대공세는 마베라 왕국 수뇌부가 전격적으로 승인한 '국민총동원계획 제12호'의 일환으로 시행된 일련의 반격 작전 묶음으로, 북부 노르트란트 회랑, 중부 솔로몬 돌출부, 남부 마레트 라인을 축으로 하는 3방향 작전이었다. 연합군은 이 작전을 통해 고착화된 전선을 타개하고, 웨스타시아군의 후방 보급망과 방어선을 붕괴시키며, 다시금 전술 주도권을 탈환하고자 했다.
3.10.1. 노르트란트 회랑 전투 [편집]
1983년 가을,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의 대공세가 시작되며 침체되어 있던 전쟁 양상이 서서히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연합군이 가장 주목한 지역은 북부 노르트란트 회랑이었다. 이 지역은 카르비크 고원과 로흐스 평야 사이를 잇는 좁고 긴 병목지대였으며, 웨스타시아군이 마베라 북부를 점령한 이래 줄곧 군수 보급의 핵심 동맥으로 기능해왔다.
웨스타시아 제3기갑군단은 이 회랑을 통해 전차 연료, 포탄, 식량, 의약품 등 각종 보급품을 남부 전선과 솔로몬 돌출부 전방까지 전달하고 있었고, 실질적으로 회랑의 유지 여부가 전선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고 있었다. 마베라와 체르드의 군사 지도부는 이 병참선을 차단하는 것이 일시적 승리가 아닌 전략적 전환을 이끌 유일한 열쇠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연합군은 병참선 자체를 공격하는 전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회랑 전체의 후방 인프라를 '침묵시킨다'는 개념의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작전은 무력 충돌에만 의존하지 않고 도로망, 철도망, 통신선, 연료 저장고, 야전 창고, 물류 집결지 등 보급 체계를 구성하는 ‘비전투 자산’을 우선적으로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루이나는 작전 초기부터 이미 정보, 공중정찰, 위성영상 분석 등을 통해 웨스타시아군 보급망의 노드(node) 구조를 정밀하게 해부하고 있었다. 이 분석을 바탕으로 루이나 공군은 마베라 공군과 협조하여 10월 중순부터 회랑 남단의 우에르테 저장기지, 라민 터널, 노스 로지 철도삼각지에 대한 집중 폭격을 개시했다.
특히 라민 터널은 웨스타시아군이 철도 화물을 통과시켜 전선으로 수송하는 주요 관문이었는데, 루이나의 폭격기 한 대가 심야 기습 폭격을 감행해 구조물 일부를 무너뜨리며 수주간 열차 운행이 전면 중단되었다. 뒤이어 마베라군 결사대가 투입되어 잔존 구조물을 완전히 폭파시킴으로써 복구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다음 타깃은 병참 수송 차량의 집결지였다. 노르트란트 중부에는 소형 물류 차량과 보급품 창고가 집적된 '케셀벨트 보급지구'가 있었는데, 루이나 공군은 이 지역에 대한 정밀타격과 함께 전자전기를 투입해 차량 무전과 위치 추적 체계를 마비시켰다. 이로 인해 웨스타시아군의 전선 배급은 혼선과 지연이 반복되었고, 식량 부족과 연료 고갈로 기계화 부대 일부는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했다. 뿐만 아니라, 루이나의 국가정찰국은 웨스타시아의 병참 암호 체계를 분석해 오발신을 유도하고, 위장된 허위 신호로 보급차량을 잘못된 경로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병참선은 물리적 파괴뿐 아니라 체계적 혼란에 의한 기능 마비 상태에 빠졌다.
8월 초, 웨스타시아 제3기갑군단의 보급지휘본부는 "회랑 남단에서 중부까지 하루 평균 보급률이 38%로 하락했다"는 내부 평가를 내놓았고, 이는 사실상 보급선의 기능 단절을 의미하는 수치였다. 포탄은 할당량의 절반도 채 도착하지 않았으며, 전차 연료는 기지 재고로만 운용 가능한 수준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병사들이 가열되지 않은 통조림과 부족한 응급약으로 생존을 버텨야 했고, 환자 이송도 중단되면서 회랑 남단은 전장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결정타는 케르덴 수로 통제소의 폭파였다. 이 수로는 회랑을 통과해 마베라 북부까지 식수와 정수 처리를 공급하던 시설로, 루이나 특수공작대가 매설한 수중 폭발물이 8월 11일 새벽 정각에 기폭되었다. 수로의 붕괴로 인해 수천 명의 병력이 식수 확보에 실패했고, 이에 따른 장티푸스 및 설사병 유행으로 비전투 손실이 실제 전투 사망자 수를 추월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노르트란트 회랑은 전투 이전에 병참이 먼저 붕괴한 전장으로 기억된다. 포성이 멎기 전, 이미 연료와 식수, 식량과 탄약이 끊긴 웨스타시아군은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의 본격적인 지상 반격은 그 뒤에 이어졌을 뿐이었다.
웨스타시아 제3기갑군단은 이 회랑을 통해 전차 연료, 포탄, 식량, 의약품 등 각종 보급품을 남부 전선과 솔로몬 돌출부 전방까지 전달하고 있었고, 실질적으로 회랑의 유지 여부가 전선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고 있었다. 마베라와 체르드의 군사 지도부는 이 병참선을 차단하는 것이 일시적 승리가 아닌 전략적 전환을 이끌 유일한 열쇠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연합군은 병참선 자체를 공격하는 전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회랑 전체의 후방 인프라를 '침묵시킨다'는 개념의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작전은 무력 충돌에만 의존하지 않고 도로망, 철도망, 통신선, 연료 저장고, 야전 창고, 물류 집결지 등 보급 체계를 구성하는 ‘비전투 자산’을 우선적으로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루이나는 작전 초기부터 이미 정보, 공중정찰, 위성영상 분석 등을 통해 웨스타시아군 보급망의 노드(node) 구조를 정밀하게 해부하고 있었다. 이 분석을 바탕으로 루이나 공군은 마베라 공군과 협조하여 10월 중순부터 회랑 남단의 우에르테 저장기지, 라민 터널, 노스 로지 철도삼각지에 대한 집중 폭격을 개시했다.
특히 라민 터널은 웨스타시아군이 철도 화물을 통과시켜 전선으로 수송하는 주요 관문이었는데, 루이나의 폭격기 한 대가 심야 기습 폭격을 감행해 구조물 일부를 무너뜨리며 수주간 열차 운행이 전면 중단되었다. 뒤이어 마베라군 결사대가 투입되어 잔존 구조물을 완전히 폭파시킴으로써 복구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다음 타깃은 병참 수송 차량의 집결지였다. 노르트란트 중부에는 소형 물류 차량과 보급품 창고가 집적된 '케셀벨트 보급지구'가 있었는데, 루이나 공군은 이 지역에 대한 정밀타격과 함께 전자전기를 투입해 차량 무전과 위치 추적 체계를 마비시켰다. 이로 인해 웨스타시아군의 전선 배급은 혼선과 지연이 반복되었고, 식량 부족과 연료 고갈로 기계화 부대 일부는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했다. 뿐만 아니라, 루이나의 국가정찰국은 웨스타시아의 병참 암호 체계를 분석해 오발신을 유도하고, 위장된 허위 신호로 보급차량을 잘못된 경로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병참선은 물리적 파괴뿐 아니라 체계적 혼란에 의한 기능 마비 상태에 빠졌다.
8월 초, 웨스타시아 제3기갑군단의 보급지휘본부는 "회랑 남단에서 중부까지 하루 평균 보급률이 38%로 하락했다"는 내부 평가를 내놓았고, 이는 사실상 보급선의 기능 단절을 의미하는 수치였다. 포탄은 할당량의 절반도 채 도착하지 않았으며, 전차 연료는 기지 재고로만 운용 가능한 수준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병사들이 가열되지 않은 통조림과 부족한 응급약으로 생존을 버텨야 했고, 환자 이송도 중단되면서 회랑 남단은 전장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결정타는 케르덴 수로 통제소의 폭파였다. 이 수로는 회랑을 통과해 마베라 북부까지 식수와 정수 처리를 공급하던 시설로, 루이나 특수공작대가 매설한 수중 폭발물이 8월 11일 새벽 정각에 기폭되었다. 수로의 붕괴로 인해 수천 명의 병력이 식수 확보에 실패했고, 이에 따른 장티푸스 및 설사병 유행으로 비전투 손실이 실제 전투 사망자 수를 추월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노르트란트 회랑은 전투 이전에 병참이 먼저 붕괴한 전장으로 기억된다. 포성이 멎기 전, 이미 연료와 식수, 식량과 탄약이 끊긴 웨스타시아군은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의 본격적인 지상 반격은 그 뒤에 이어졌을 뿐이었다.
3.10.2. 강타 작전 [편집]
솔로몬 돌출부는 마베라 중부 전선에서 유일하게 웨스타시아군이 동쪽으로 깊숙이 박힌 형태의 교두보를 형성한 지역이었다. 산지와 고원 사이로 형성된 완만한 구릉지대에 펼쳐진 이 지형은 전선의 균형을 크게 무너뜨리는 돌출된 압력점으로, 웨스타시아군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마베라 심장부를 위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반대로 마베라 측에게 이 돌출부는 전략적으로 도려내야 할 종기와도 같았다.
이에 따라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은 ‘국민총동원계획 제12호’의 중심축으로 돌출부 제거를 위한 전면적 반격 작전, 즉 ‘강타 작전(Operation smash)’'''을 수립했다. 이 작전은 명목상 48시간 동안의 강력한 포격과 기갑 돌격으로 솔로몬 돌출부의 방어선을 박살내고, 남북에서 포위망을 닫아 적 3개 사단을 고립·섬멸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더 피비린내나는 고전의 연속이었다.
전투는 1983년 9월 6일 새벽, 체르드군 제22기계화사단이 남부 전선의 평지 돌출구를 기습 공격하며 시작되었다. 북측에선 마베라군 제7기갑사단과 제18보병사단이 동시 기동하여 돌출부 전체를 감싸는 양동 작전에 들어갔다. 마베라 공군의 제공권 확보와 루이나 정찰망의 지원이 있었지만, 웨스타시아군도 이 전투만큼은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다.
특히 돌출부 중심에는 제12포병여단과 제55방공연대가 중첩 배치되어 있어, 첫날 기갑 돌파 시도에서 마베라 측 전차 36대가 순식간에 파괴되며 진격이 멈추는 사태가 벌어졌다. 공세는 멈추지 않았지만, 진격은 단 2킬로미터를 넘기지 못한 채 초반 3일간 매일 1천 명 이상이 사상되는 소모전으로 흘렀다. 체르드 측은 제41차량화사단 전면 붕괴, 제19의무단 전멸 등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입었고, 마베라군은 야전사령부를 두 차례나 이전해야 할 만큼 포격과 급습에 시달렸다. 진창과 혼란, 전열 붕괴 속에서도 9월 14일 밤, 마베라 제7기갑사단이 북측 포위망을 완성시키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고립된 웨스타시아군은 외부 보급이 차단되었고, 항복 권유 방송이 이어졌지만 저항은 예상보다 끈질겼다. 제9공병대는 후방 고지를 폭파해 일시적으로 포위망을 열었고, 제14기동보병대대는 루이나-마베라 연합 포병대를 습격해 탄약고 하나를 폭파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결정적 전환점은 9월 18일, 마베라 공군의 “에이브럼 작전” 하 강습기가 돌출부 중앙의 통신지휘소를 파괴하면서 도래했다. 이후 남측 체르드군이 동부 능선까지 밀고 들어가며 포위망을 재봉쇄했고, 9월 22일, 남은 웨스타시아 병력 9,300명은 대부분 전투불능 상태로 항복하거나 산개 탈출을 시도하다 무력화되었다.
이에 따라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은 ‘국민총동원계획 제12호’의 중심축으로 돌출부 제거를 위한 전면적 반격 작전, 즉 ‘강타 작전(Operation smash)’'''을 수립했다. 이 작전은 명목상 48시간 동안의 강력한 포격과 기갑 돌격으로 솔로몬 돌출부의 방어선을 박살내고, 남북에서 포위망을 닫아 적 3개 사단을 고립·섬멸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더 피비린내나는 고전의 연속이었다.
전투는 1983년 9월 6일 새벽, 체르드군 제22기계화사단이 남부 전선의 평지 돌출구를 기습 공격하며 시작되었다. 북측에선 마베라군 제7기갑사단과 제18보병사단이 동시 기동하여 돌출부 전체를 감싸는 양동 작전에 들어갔다. 마베라 공군의 제공권 확보와 루이나 정찰망의 지원이 있었지만, 웨스타시아군도 이 전투만큼은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다.
특히 돌출부 중심에는 제12포병여단과 제55방공연대가 중첩 배치되어 있어, 첫날 기갑 돌파 시도에서 마베라 측 전차 36대가 순식간에 파괴되며 진격이 멈추는 사태가 벌어졌다. 공세는 멈추지 않았지만, 진격은 단 2킬로미터를 넘기지 못한 채 초반 3일간 매일 1천 명 이상이 사상되는 소모전으로 흘렀다. 체르드 측은 제41차량화사단 전면 붕괴, 제19의무단 전멸 등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입었고, 마베라군은 야전사령부를 두 차례나 이전해야 할 만큼 포격과 급습에 시달렸다. 진창과 혼란, 전열 붕괴 속에서도 9월 14일 밤, 마베라 제7기갑사단이 북측 포위망을 완성시키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고립된 웨스타시아군은 외부 보급이 차단되었고, 항복 권유 방송이 이어졌지만 저항은 예상보다 끈질겼다. 제9공병대는 후방 고지를 폭파해 일시적으로 포위망을 열었고, 제14기동보병대대는 루이나-마베라 연합 포병대를 습격해 탄약고 하나를 폭파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결정적 전환점은 9월 18일, 마베라 공군의 “에이브럼 작전” 하 강습기가 돌출부 중앙의 통신지휘소를 파괴하면서 도래했다. 이후 남측 체르드군이 동부 능선까지 밀고 들어가며 포위망을 재봉쇄했고, 9월 22일, 남은 웨스타시아 병력 9,300명은 대부분 전투불능 상태로 항복하거나 산개 탈출을 시도하다 무력화되었다.
3.10.3. 마레트 라인 돌파 작전 [편집]
강타 전투 이후 중부 전선이 전술적으로 교착되자, 마베라–체르드 연합지휘부는 남부 아크로마–미스라타 일대의 전선 돌파를 전격 결정한다. 이 지역은 상대적으로 지형이 평탄하고, 고원과 평야가 만나는 완충지대에 해당해 전차기동전에 적합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전선은 오랫동안 방어 중심의 고착 상태였고, 이미 마베라군과 웨스타시아군 모두에게 지뢰대, 참호망, 고착화된 중화기 진지가 빽빽이 늘어선 "움직이지 않는 전선"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마베라군 수뇌부는 솔로몬 돌출부 붕괴 이후 전선이 일시적으로 재편되고 있는 틈을 노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웨스타시아군 제14보병사단과 제6혼성기갑대대가 재보급과 병력 충원을 위해 일부 병력을 철수한 상황을 정찰망이 포착하면서, 돌파 작전은 빠르게 실전 계획으로 전환된다.
작전명은 「브레이크사우스(Operation Breaksouth)」, 지휘는 마베라군 헨리크 로드페르 장군과 체르드군 니콜라 슈테판 대장이 공동 담당하였다. 루이나군은 작전 당시 후방 항공정찰 및 무선교란 지원, 남부 국경 초계망 확장, 차량형 전자전 장비 제공 등의 형태로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작전은 1983년 10월 3일 새벽 4시, 마베라 제2기갑사단과 체르드 제5전차여단이 선두에 서서 아크로마 북동부의 방어진지에 기습 포격을 퍼부으며 개시되었다. 루이나 항공정찰대로부터 확보된 진지 배치 정보에 따라, 포병은 지휘통신소, 탄약고, 야전 발전기 등 비탄 핵심 시설을 우선 제거했다. 뒤이어 160대 이상의 전차와 장갑차가 전속력으로 진입하며 첫 돌파 구간을 단 7시간 만에 열어젖혔다.
10월 4일, 미스라타 서측의 방어진지가 무너지며 웨스타시아군의 제14보병사단 좌익이 붕괴되었다. 남아 있던 기갑대대는 지원 없이 고립되었고, 마베라군 선봉부대는 이틀 만에 48킬로미터를 전진, 아크로마와 미스타라를 연결하는 교차 물류허브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체르드군은 이 돌파구를 확대하기 위해 ‘코브라 라인’으로 명명된 남부 능선 방어선을 포위해 들어갔고, 이에 맞선 웨스타시아군은 퇴각과 반격을 병행하는 지연전술을 펼쳤으나 지형의 한계로 인해 효과는 미미했다. 웨스타시아 측이 진지 철수를 명령한 것은 10월 7일. 그러나 이 결정은 이미 너무 늦었다.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은 미스라타 북부 비행장과 유류 저장소, 중형 철도 분기점을 포획했으며, 전선은 단 1주일 만에 남동방향으로 80킬로미터 이상 전진했다.
마레트 라인 돌파는 전통적인 교착전 양상을 뒤엎은 전격적 기갑 작전의 성공 사례로 기록되었다. 마베라군은 전차 손실 140여 대, 전사자 약 3,200명을 감수했지만, 웨스타시아군은 남부 방어망 전반이 붕괴되며 3개 여단이 후퇴, 2개 기갑중대가 포위 및 항복, 1개 야전사령부가 해체되는 전선 붕괴 사태를 겪었다.
이 돌파는 웨스타시아군이 남부에서의 작전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마베라 측은 이를 기반으로 다우엘 평야와 동부 도시권 진격 작전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루이나 정보국은 작전 직후 웨스타시아군의 내부 무전 일부를 해독하여, “동부 사단은 응답 없다(East Command is silent)”라는 문구를 국내 언론에 노출시켰고, 이는 이 작전의 상징적 명제로 퍼지게 되었다.
이 작전으로 전선 전체의 주도권이 마베라–체르드 측으로 전환되었으며, 웨스타시아군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서둘러 2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내륙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공세는 루이나의 간접 개입이 실질적인 전략 변수로 부상한 국면이었다. 특히 위성 정찰, 전자전 지원, 화학·방사능 보호장비 공급 등은 연합군의 전술적 능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으며, 루이나가 단순한 외교적 지지국을 넘어 전쟁에 일정 수준 이상 ‘투명하게’ 개입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했다.
마베라 국내에서는 이 시기부터 "트리넬을 되찾자"는 구호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국왕 상 페드로 3세는 직접 말을 타고 전선을 순시하며 군민 사기를 북돋았다. 반면, 웨스타시아 총사령부는 내심 작전의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외부에는 '임시적 반동'이라는 해석으로 일관하며 전선 유지에 몰두했다.
결과적으로, 대공세는 마테르 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전쟁 초반 7일간의 급속 침공으로 얻은 전략적 우위를 한랜드 측이 이 시기부터 급격히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마베라군의 주도 아래 전장은 점차 서쪽으로 밀려갔다.
하지만 마베라군 수뇌부는 솔로몬 돌출부 붕괴 이후 전선이 일시적으로 재편되고 있는 틈을 노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웨스타시아군 제14보병사단과 제6혼성기갑대대가 재보급과 병력 충원을 위해 일부 병력을 철수한 상황을 정찰망이 포착하면서, 돌파 작전은 빠르게 실전 계획으로 전환된다.
작전명은 「브레이크사우스(Operation Breaksouth)」, 지휘는 마베라군 헨리크 로드페르 장군과 체르드군 니콜라 슈테판 대장이 공동 담당하였다. 루이나군은 작전 당시 후방 항공정찰 및 무선교란 지원, 남부 국경 초계망 확장, 차량형 전자전 장비 제공 등의 형태로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작전은 1983년 10월 3일 새벽 4시, 마베라 제2기갑사단과 체르드 제5전차여단이 선두에 서서 아크로마 북동부의 방어진지에 기습 포격을 퍼부으며 개시되었다. 루이나 항공정찰대로부터 확보된 진지 배치 정보에 따라, 포병은 지휘통신소, 탄약고, 야전 발전기 등 비탄 핵심 시설을 우선 제거했다. 뒤이어 160대 이상의 전차와 장갑차가 전속력으로 진입하며 첫 돌파 구간을 단 7시간 만에 열어젖혔다.
10월 4일, 미스라타 서측의 방어진지가 무너지며 웨스타시아군의 제14보병사단 좌익이 붕괴되었다. 남아 있던 기갑대대는 지원 없이 고립되었고, 마베라군 선봉부대는 이틀 만에 48킬로미터를 전진, 아크로마와 미스타라를 연결하는 교차 물류허브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체르드군은 이 돌파구를 확대하기 위해 ‘코브라 라인’으로 명명된 남부 능선 방어선을 포위해 들어갔고, 이에 맞선 웨스타시아군은 퇴각과 반격을 병행하는 지연전술을 펼쳤으나 지형의 한계로 인해 효과는 미미했다. 웨스타시아 측이 진지 철수를 명령한 것은 10월 7일. 그러나 이 결정은 이미 너무 늦었다.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은 미스라타 북부 비행장과 유류 저장소, 중형 철도 분기점을 포획했으며, 전선은 단 1주일 만에 남동방향으로 80킬로미터 이상 전진했다.
마레트 라인 돌파는 전통적인 교착전 양상을 뒤엎은 전격적 기갑 작전의 성공 사례로 기록되었다. 마베라군은 전차 손실 140여 대, 전사자 약 3,200명을 감수했지만, 웨스타시아군은 남부 방어망 전반이 붕괴되며 3개 여단이 후퇴, 2개 기갑중대가 포위 및 항복, 1개 야전사령부가 해체되는 전선 붕괴 사태를 겪었다.
이 돌파는 웨스타시아군이 남부에서의 작전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마베라 측은 이를 기반으로 다우엘 평야와 동부 도시권 진격 작전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루이나 정보국은 작전 직후 웨스타시아군의 내부 무전 일부를 해독하여, “동부 사단은 응답 없다(East Command is silent)”라는 문구를 국내 언론에 노출시켰고, 이는 이 작전의 상징적 명제로 퍼지게 되었다.
이 작전으로 전선 전체의 주도권이 마베라–체르드 측으로 전환되었으며, 웨스타시아군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서둘러 2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내륙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공세는 루이나의 간접 개입이 실질적인 전략 변수로 부상한 국면이었다. 특히 위성 정찰, 전자전 지원, 화학·방사능 보호장비 공급 등은 연합군의 전술적 능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으며, 루이나가 단순한 외교적 지지국을 넘어 전쟁에 일정 수준 이상 ‘투명하게’ 개입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했다.
마베라 국내에서는 이 시기부터 "트리넬을 되찾자"는 구호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국왕 상 페드로 3세는 직접 말을 타고 전선을 순시하며 군민 사기를 북돋았다. 반면, 웨스타시아 총사령부는 내심 작전의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외부에는 '임시적 반동'이라는 해석으로 일관하며 전선 유지에 몰두했다.
결과적으로, 대공세는 마테르 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전쟁 초반 7일간의 급속 침공으로 얻은 전략적 우위를 한랜드 측이 이 시기부터 급격히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마베라군의 주도 아래 전장은 점차 서쪽으로 밀려갔다.
3.10.4. 번외: 라이넬 항 탈출 [편집]
자세한건 라이넬 항 탈출문서를 참고.
3.11. 발악: 은색작전 [편집]
1984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다.
혹한기의 추위와 폭설로 다시 공세는 둔화됐지만, 이미 전쟁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안봐도 뻔한 것이었다. 가다메스를 가로막아 상륙군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려 했던 이드리스 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고, 그렇게 마베라 중부를 성공적으로 재패한 마베라 7,8군과 체르드 6군은 10월 29일 바르디야를 집중 공략해 한랜드군의 허리를 끊어놓았다. 몇달 전의 상황과 반대로 마베라군의 아게다비아 강북 포위망이 성공적으로 구축됨으로써, 보급선이 전멸한 최전방의 한랜드군들은 마레트 라인이 돌파된 이후부터 다음 해까지 말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83년 11월 11일. 트리넬이 함락되었다. 15척의 수송선이 함락되어가는 트리넬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남은 알파 집단군도 마베라땅을 떠났다. 왕궁에 꽂혀있던 백십자기는 다시 끌여내려져 불태워졌고, 국왕은 이날 열린 수도탈환 기념연설에서 승리가 눈앞에 있음을 국민들에게 상기시켰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4주간의 공성전 끝에 베이다의 맘무트 요새에 갇혀있던 한랜드 4군이 항복했다. 웨스타시아 공세의 최후의 교두보이자 한랜드군 공세의 상징이었던 그곳이 함락되면서, 이제 한랜드군에는 가망이 없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웨스타시아군 초반 우세의 핵심이었던 369고지에도 왕관박힌 깃발이 올라가면서 에스타뉴 서부 & 동부 회랑이 모조리 함락. 전쟁 전 국경선이 거진 1년만에 복원되었다. 새해와 함께 이제 마베라군의 숙제는 영토 탈환이 아닌, 영토 확장이 되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웨스타시아군 총사령부는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특히 딮스마르크 + 수상함대 대부분의 침몰이슈로 해상 봉쇄의 주도권이 마체련합군에 넘어가버려 웨스터발트의 거리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들끓었고 배급제가 실시되는 막장 상황이 2달째 반복됐다. 게다가 이 시점부터 앨빈 대통령의 정신병이 악화되기 시작해 대통령궁에서는 히스테리와 괴성이 하루도 끊이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단순 울고만 있으면 안되는 처지였다. 그들은 무언가 굉장하고 장엄하고 뭐라 항의할 수 없을만큼 결정적으로 이 모오든 상황을 뒤집을 '비장의 카드'를 내야 했다. 그리고 웨스타시아 총사령부가 선택한 그 카드는「은색작전(Operation Silver)」이었다.
혹한기의 추위와 폭설로 다시 공세는 둔화됐지만, 이미 전쟁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안봐도 뻔한 것이었다. 가다메스를 가로막아 상륙군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려 했던 이드리스 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고, 그렇게 마베라 중부를 성공적으로 재패한 마베라 7,8군과 체르드 6군은 10월 29일 바르디야를 집중 공략해 한랜드군의 허리를 끊어놓았다. 몇달 전의 상황과 반대로 마베라군의 아게다비아 강북 포위망이 성공적으로 구축됨으로써, 보급선이 전멸한 최전방의 한랜드군들은 마레트 라인이 돌파된 이후부터 다음 해까지 말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83년 11월 11일. 트리넬이 함락되었다. 15척의 수송선이 함락되어가는 트리넬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남은 알파 집단군도 마베라땅을 떠났다. 왕궁에 꽂혀있던 백십자기는 다시 끌여내려져 불태워졌고, 국왕은 이날 열린 수도탈환 기념연설에서 승리가 눈앞에 있음을 국민들에게 상기시켰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4주간의 공성전 끝에 베이다의 맘무트 요새에 갇혀있던 한랜드 4군이 항복했다. 웨스타시아 공세의 최후의 교두보이자 한랜드군 공세의 상징이었던 그곳이 함락되면서, 이제 한랜드군에는 가망이 없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웨스타시아군 초반 우세의 핵심이었던 369고지에도 왕관박힌 깃발이 올라가면서 에스타뉴 서부 & 동부 회랑이 모조리 함락. 전쟁 전 국경선이 거진 1년만에 복원되었다. 새해와 함께 이제 마베라군의 숙제는 영토 탈환이 아닌, 영토 확장이 되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웨스타시아군 총사령부는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특히 딮스마르크 + 수상함대 대부분의 침몰이슈로 해상 봉쇄의 주도권이 마체련합군에 넘어가버려 웨스터발트의 거리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들끓었고 배급제가 실시되는 막장 상황이 2달째 반복됐다. 게다가 이 시점부터 앨빈 대통령의 정신병이 악화되기 시작해 대통령궁에서는 히스테리와 괴성이 하루도 끊이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단순 울고만 있으면 안되는 처지였다. 그들은 무언가 굉장하고 장엄하고 뭐라 항의할 수 없을만큼 결정적으로 이 모오든 상황을 뒤집을 '비장의 카드'를 내야 했다. 그리고 웨스타시아 총사령부가 선택한 그 카드는「은색작전(Operation Silver)」이었다.
3.11.1. ???: 아니 여기로 가면 되잖아 [편집]
이쯤에서 마베라, 웨스타시아 국민들뿐만 아니라 이 전쟁을 지켜보던 대부분의 세계인들은 무언가 한가지 근본적인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왜 동쪽은 안감?"
하지만 웨스타시아 군에도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1. 문제의 토브룩 회랑은 크고 알흠다운 몬타나 산맥을 끼고있는 험준한 지형으로,
"왜 동쪽은 안감?"
하지만 웨스타시아 군에도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1. 문제의 토브룩 회랑은 크고 알흠다운 몬타나 산맥을 끼고있는 험준한 지형으로,
3.11.2. 칼펜슈타인 공중전, 루프트바페의 괴멸 [편집]
3.11.3. 토브룩의 참화 [편집]
3.12. 로벤자운 작전 유출과 일시휴전 [편집]
3.13. 웨스터발트까지 10km [편집]
3.14. 종막 [편집]
4. 반전: 헤이그에서 밝혀진 것 [편집]
5. 그의 행방은 어디로? [편집]
6. 이후 [편집]
7. 기타 [편집]
[1] 이러한 방식으로 영공 근처를 지나가거나 살짝 침범하는 도발은 현재도 미제국, 중국, 소련이 서로 자주 행하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도발하면 정찰기에 집중되는 레이더 전파의 주파수와 패턴을 수집(ELINT)할 수 있고 상대국 방공망의 대응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제국이 중국 방공망 근처에서 알짱거리거나 중국, 소련이 한국 방공식별구역을 통보없이 들락날락거리는 것도 이런 일환이다.[2] B747에 장착된 4개의 유압 시스템 중 승강타를 조작할 때 쓰이는 3번 유압은 비상 강하를 하던 367편이 다시 상승하지 못한것을 고려하면 확실히 파괴되었다고 볼 수 있다.[3] 피격 직후 급격한 기내 감압으로 인해 저고도로 하강하겠다는 교신을 도쿄 컨트롤에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 무전은 잡음이 심해 동사랜드 컨트롤에서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관제사는 주파수를 확인한 뒤 다시 교신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367편과의 교신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4] 이때 엔진은 정상이라고 하는 녹음이 들린다.[5] 미사일 폭발의 여파로 추락 과정에서 공중분해됐을 가능성도 있다.[6] 어선이라고는 하지만 아마도 밀수품을 나르는 선박이었을 것이다.[7] 꽤나 중요한 문제였다. 랜드해협의 해상무역은 유럽쪽으론 북쪽의 포틸락스 해협과 북마베라해로 나가고, 아시아 및 인도양 쪽으론 동남쪽의 카이삼 해로 나가는데, 이중 북마베라 해가 나라 하나에 통째로 먹힌다는건 유럽쪽 해상무역의 통제가 가능해짐과 동시에, 아래쪽 남포틸락스 해협을 먹고있는 루이나의 패권이 약화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8] 이딴 짓이 가능했던 이유는, 웨스타시아 민족도 엄연한 아틀란티스 민족의 후손이라 태생적으로 화생방에 강한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베라에도 웨스타시아인들이 적지 않은수가 존재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추방당한지 오래였다. [9] 전자산업은 일본이 가져갔다.[10] 반을 먹었다는 서술 자체도 웨스타시아의 입장에서 서술해준 것이다, 실제로 점령지의 유지와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실제로 점령한 영토는 극히 일부라 봐야한다.[11] 웨스타시아 연방 기술개발부 소속 R.J. 라인하르트 박사가 개발해낸 물건으로, 본디 수증기 결집용 원소로 아이오딘화은을 뿌려야 했기에 비용이 천문학적이던 인공강우 기술을 기존의 7분의 1 비용으로 쓸수있게 해준 용액이다. [12] HINA 분무액의 생산은 스타인먼 화학이 담당했는데, 본토의 공장들은 독가스 만드느라 이미 바빠서 주로 점령지의 로동력을 이용해 분무액을 생산했던게 화근이었다. [13] 민간인 피해를 제외하고 3만명이다.[14] 물론 이건 해군 입장에서 그렇게 보였다는 거지, 상술했듯 육지쪽은 실제론 처음 한달 이후론 지옥같은 참호전에 빠진지 오래였다. 전승훈장을 많이딴다는건 그만큼 병사가 많이 갈려나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15] 민간선박이든 타국선박이든 상관없었다. [16] 당시 마베라 해군의 두려움은 상당했는데, 당시 음탐부사관이 과도한 스트레스로인한 정신병으로 의가사 전역할 정도였고, 근해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소리가.들리며누함대 전체가 꽁지가빠져라 도망쳤다, 후에는 이런 사실을 인지한 웨스타시아 해군이 해당 소음을 직접 녹음해서 소형 수중드론에 매달아서 마베라 해군을 겁주고 다녔다.[17] 당시에는 작전명이 공개되지 않았었는데 루이나가 경고의 의미에서 작전명을 공개한것으로 보인다.[18] 사실 이럴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루이나 해군 상부는 웨스타시아의 잠수함 전력을 과대평가 하고 있었다. 마베라 해군의 카푸초함은 루이나의 플라자 그룹에서 최신 대잠전 사양으로 업그레이드를 한 함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수출용 프로그램은 다운그레이드 버전인데다가 마베라 해군의 군 기강의 헤이함과 오랜 평화로 인한 장비 점검 불량으로 장비의 성능에 불문하고 격침당할 운명인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같은 일을 루이나 해군 상부에서 속속들이 알고있기란 불가능했고, 웨스타시아 잠수함에 대한 제한적 대잠 작전만을 승인했었으나 이마저도 곧 종료하게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