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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3년을 싸웠는데 회전은 다섯 번
2.1. 네 개의 국면2.2. 흑색화약, 참호, 그리고 아껴 쓰는 총알2.3. 숫자, 그리고 그 숫자를 믿을 수 없는 이유
3. 로엔필드 조우전
3.1. 배경3.2. 양측 전력3.3. 전개
3.3.1. 조우와 전개선 형성3.3.2. 중앙 돌격의 실패3.3.3. 철수
3.4. 전술적 특징3.5. 결과와 영향
4. 할브룩 습격
4.1. 배경4.2. 양측 전력4.3. 전개
4.3.1. 우회 산길 정찰4.3.2. 야간 접근4.3.3. 집적소 소각과 이탈
4.4. 전술적 특징4.5. 결과와 영향
5. 테른 고개 제1차 공방
5.1. 배경5.2. 양측 전력5.3. 전개
5.3.1. 제1일: 정면 압박5.3.2. 제2일~제3일: 화력 확인5.3.3. 제4일: 철수
5.4. 전술적 특징5.5. 결과와 영향
6. 카른 고개 야습
6.1. 배경6.2. 양측 전력6.3. 전개
6.3.1. 야간 역습6.3.2. 전초 탈취6.3.3. 반격과 원상 복귀
6.4. 전술적 특징6.5. 결과와 영향
7. 테른 고개 전투
7.1. 배경7.2. 양측 전력7.3. 지형과 방어 구조7.4. 전개
7.4.1. 준비 포격 (6월 21일~23일)7.4.2. 제1선 돌입 (6월 24일~27일)7.4.3. 왕당파 역습과 견제의 효과 (6월 28일~7월 1일)7.4.4. 제2선 붕괴 (7월 2일~3일)
7.5. 전술적 특징
7.5.1. 포병 운용7.5.2. 견제와 주공의 분리7.5.3. 흑색화약 전장의 통제
7.6. 사상자와 포로7.7. 결과와 영향
8. 카른 고개 전투
8.1. 배경8.2. 양측 전력8.3. 전개
8.3.1. 견제 공격의 개시8.3.2. 예상 밖의 돌파8.3.3. 고개 확보
8.4. 전술적 특징8.5. 결과와 영향
9. 에일마운트 전투
9.1. 배경9.2. 양측 전력9.3. 전개
9.3.1. 왕당파의 포병 집중9.3.2. 사흘간의 방어9.3.3. 포탄 소진과 붕괴
9.4. 전술적 특징9.5. 결과와 영향
10. 스톤게이트 관문 공방
10.1. 배경10.2. 양측 전력10.3. 요새 구조10.4. 전개
10.4.1. 정면 공격의 좌절10.4.2. 측면 성벽 갱도 작업10.4.3. 폭파와 함락
10.5. 전술적 특징10.6. 결과와 영향
11. 에일윈 능선 전투
11.1. 배경11.2. 양측 전력11.3. 전개
11.3.1. 능선 쟁탈11.3.2. 오를레인 백작의 전사11.3.3. 왕당파 철수
11.4. 전술적 특징11.5. 결과와 영향
12. 카엘몬트 성 공방
12.1. 배경12.2. 양측 전력12.3. 성의 구조와 한계12.4. 전개
12.4.1. 포위선 구축12.4.2. 함포 수송12.4.3. 준비 포격 (2월 2일~4일)12.4.4. 외성 붕괴와 제1차 돌입 (2월 5일)12.4.5. 갱도 작업과 2차 방벽 폭파 (2월 6일~8일)12.4.6. 외성 시가전 (2월 8일)12.4.7. 본성 포위와 항복 (2월 9일~11일)
12.5. 전술적 특징
12.5.1. 함포의 육상 전용12.5.2. 갱도 공격의 부활
12.6. 결과와 영향
13. 소규모 교전
13.1. 드럼케이드 소탕13.2. 할렌포드 도하13.3. 글렌모어 계곡 진입13.4. 산악 유격전 (1885)
14. 전술사적 평가
14.1. 흑색화약 시대 마지막 내전14.2. 포병 운용의 변화14.3. 참호와 야전 축성14.4. 철도와 경편 궤도의 역할14.5. 해군 화력의 육상 투사
15. 관련 문서

1. 개요 [편집]

루이나 계승전쟁의 주요 전투를 다룬 문서.

2. 3년을 싸웠는데 회전은 다섯 번 [편집]

"계승전쟁의 전투 목록을 처음 본 사람들은 대개 당황한다. 3년짜리 내전인데 사단 규모 회전이 다섯 번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전쟁이 소규모였다는 뜻이 아니라, 1880년대에 정면으로 맞붙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양측 지휘관이 모두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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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드 베르니에, 『계승전쟁: 세 해의 겨울』(1961)

계승전쟁은 3년을 끌었다. 그런데 사단 규모 이상이 정면으로 맞붙은 회전은 다섯 번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대대 이하의 국지전, 정찰, 습격, 그리고 포위와 공성이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지형이다. 남부 고지는 좁은 고개와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애초에 대군을 펼칠 공간이 없다. 다른 하나는 시대다. 1880년대의 화력 조건에서 정면 돌격은 하는 쪽이 두 배로 죽는 짓이었고, 이건 1877년 플레브나 공방 이후 유럽 군대라면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알면서도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방어는 참호와 후장식 소총으로 강해졌는데 공격 교리는 여전히 정면 돌격을 상정하고 있었다. 이 어긋남이 이 전쟁의 모든 전투를 관통한다.

2.1. 네 개의 국면 [편집]

① 서로 누군지도 모르고 붙던 시기 (1883년 3월~7월)
전선이라는 게 없던 시기다. 양측 부대가 이동하다 마주치면 그게 전투였다. 정찰은 기병에 의존했는데 왕당파 기병은 남부 고지 출신이라 중부 지리를 몰랐고 의회군 기병은 숫자가 모자랐다. 그래서 로엔필드 조우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양쪽 다 상대를 소부대로 알고 병력을 야금야금 집어넣다가, 정오가 되어서야 "어? 저쪽 사단인데?" 하고 깨닫는 식이었다.

② 아껴 쏘느냐 마느냐의 시기 (1883년 8월~1884년 5월)
전선이 남부 고지 입구에서 굳은 뒤다. 이 시기 의회군의 공격은 돌파가 목적이 아니었다. 리처드 A. 손힐이 시행한 압박 정찰은 대대 규모를 반복 투입해서 상대가 쏘게 만드는 것이었다. 쏘면 위치가 드러나고 탄약이 준다. 안 쏘면 정찰대가 코앞까지 온다. 왕당파는 매번 이 계산을 해야 했다.

테른 고개 제1차 공방, 할브룩 습격, 카른 고개 야습이 이 시기다. 이 중 카른 고개 야습은 왕당파가 전쟁 통틀어 딱 한 번 시도한 공세인데, 명령서에 적힌 목적이 「병사들에게 우리가 아직 나아갈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하여」였다. 군사적 목표가 아니라 사기 유지용이었다는 얘기다.

③ 준비한 대로 밀어붙인 시기 (1884년 6월~11월)
계승전쟁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계획된 작전이 실행된 시기다. 「고개열기」라 명명된 하계 공세는 반년 전부터 준비되었고, 그 준비의 절반이 철도 공사였다. 테른 고개 전투카른 고개 전투가 여기 속한다.

고개를 넘은 뒤는 싱거웠다. 왕당파에 탄약도 식량도 없었기 때문이다. 에일마운트 전투스톤게이트 관문 공방 정도가 예외였다.

④ 성 하나 부수는 데 열흘 (1884년 12월~1885년 9월)
에일윈 능선 전투에서 오를레인 백작이 전사하면서 왕당파의 조직적 저항은 끝났다. 남은 건 카엘몬트 성 공방과 그 뒤의 산악 소탕이다.
국면
기간
주요 전투
성격
조우전
1883.3~7
로엔필드 조우전
우발적 접전
소모전
1883.8~1884.5
테른 고개 제1차 공방, 할브룩 습격, 카른 고개 야습
정찰·습격·화력 확인
돌파와 진격
1884.6~11
테른 고개 전투, 카른 고개 전투, 에일마운트 전투, 스톤게이트 관문 공방
계획적 공세
공성과 소탕
1884.12~1885.9
에일윈 능선 전투, 카엘몬트 성 공방
공성·유격 소탕

2.2. 흑색화약, 참호, 그리고 아껴 쓰는 총알 [편집]

연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
이 전쟁의 전투 기록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무연화약이 없다는 사실이다. 소총 몇천 정이 일제히 불을 뿜으면 전장 중앙이 흰 연기로 뒤덮이고, 그 상태에서 200미터 앞이 안 보인다.

이게 왜 문제냐면, 당시 지휘 수단이 육성과 나팔과 군기뿐이기 때문이다. 연기 속에서 육성은 안 닿고 군기는 안 보인다. 대형이 한번 흐트러지면 재집결이 거의 불가능하다. 로엔필드 조우전에서 왕당파 종대가 갈라진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의회군이 신병 훈련 8주 중 상당 시간을 연기 속에서 옆 사람 안 놓치기에 쓴 이유가 여기 있다. 사격 자체는 며칠이면 배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참호 판 쪽이 이긴다
1877년 플레브나 공방에서 참호에 들어앉은 오스만군이 러시아군 정면 돌격을 세 번 격퇴한 이후, 유럽 군대는 야전 축성을 중시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 교훈이 방어 교리에만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공격은 여전히 정면 돌격이었다.

계승전쟁은 이 불균형이 그대로 터진 전쟁이다. 왕당파는 로마 시대 루이나 방벽 유적을 기초로 참호와 흉벽을 팠다. 남부 고지 출신 석공이 많아서 축성 질도 좋았다. 반면 의회군에게는 화력 집중 후 정면 공격 말고 선택지가 없었고, 그 결과가 테른 고개 전투의 사상자다.


총알을 세면서 쏘는 군대
1884년 이후 왕당파는 사격 자체를 아껴야 하는 상태에 놓였다. 당시 방어 교리의 핵심은 접근하는 적에게 지속적으로 화력을 퍼붓는 것인데, 그럴 탄약이 없었다.

그래서 왕당파는 최후까지 참았다가 짧게 집중하는 방식에 의존하게 된다. 이게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테른 고개 전투 첫 나흘 동안 의회군이 예상보다 큰 손실을 낸 것도, 왕당파가 소총탄만은 마지막까지 아껴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병은 더 심했다. 1884년 1월 이후 왕당파 야포에는 1문당 하루 3발 제한이 걸렸고, 나중엔 2발이 되었다. 참고로 이 시대 야포는 주퇴복좌기가 없어서 쏠 때마다 포가 뒤로 밀린다. 밀린 포를 다시 밀어 넣고 재조준하면 실전 발사 속도는 분당 두 발이 한계다. 즉 왕당파 포병은 하루에 1분 반 정도 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공성은 결국 삽으로
돌파가 안 되니까 의회군은 옛날 방법으로 돌아갔다. 땅을 파고 들어가서 폭약을 터뜨리는 갱도 작업스톤게이트 관문 공방카엘몬트 성 공방 양쪽에서 쓰였고, 둘 다 정면 공격이 실패한 뒤에 채택되었다.

강선 공성포와 강철 후장포의 시대에 성벽을 무너뜨린 건 결국 삽과 폭약이었다는 얘기다.

기병은 돌격하지 않는다

이 전쟁에서 기병 충격 돌격은 한 번도 성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시도 자체가 거의 없었다. 후장식 소총 앞에서 밀집 기병이 달려드는 건 자살이라는 걸 양측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기병은 정찰과 습격에 쓰였고, 이건 꽤 잘 먹혔다. 할브룩 습격이 대표적이다. 기병 2개 중대가 야간에 산길로 우회해서 왕당파 후방 보급 집적소를 태우고 돌아온 이 작전은, 병력 손실이 거의 없으면서 상대 보급에 결정적 타격을 줬다.


기관포는 아직 실험 중
양측 다 기관포를 소량 갖고 있었지만 야전 주력은 아니었다. 손잡이를 돌려 격발하는 다총신 방식이라 무겁고 느렸고, 무엇보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아무도 몰랐다. 이 시기 유럽 각국도 마찬가지여서 대개 요새와 군함에 붙박이로 달아 두는 물건 취급이었다.

계승전쟁에서도 관문 방어와 고정 진지에 소수 배치된 게 전부다. 참고로 진짜 자동화기인 맥심 기관총은 이 전쟁이 한창이던 1884년에 발명되었고, 실전에 쓰이는 건 한참 뒤 일이다.

2.3. 숫자, 그리고 그 숫자를 믿을 수 없는 이유 [편집]

전체 규모
구분
벨포르 연합
은사슴단
전사
약 19,000명
약 24,000명
부상
약 31,000명
약 40,000명
포로
-
약 21,000명
유형 (전후)
-
약 2,300명

주요 전투별
전투
의회군 전사
왕당파 전사
비고
로엔필드 조우전
약 900명
약 1,100명
승패 미결
테른 고개 제1차 공방
약 1,300명
약 700명
방어 측 우위
카른 고개 야습
약 300명
약 400명
원상 복귀
테른 고개 전투
약 4,100명
약 5,600명
최대 규모
카른 고개 전투
약 1,200명
약 1,800명
견제에서 돌파로
에일마운트 전투
약 800명
약 1,400명
왕당파 포탄 소진
스톤게이트 관문 공방
약 600명
약 500명
포로 1,700명
에일윈 능선 전투
약 700명
약 1,000명
오를레인 백작 전사
카엘몬트 성 공방
약 1,100명
약 900명
최후 전투

그런데 이 숫자는 사실 믿을 게 못 된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① 왕당파 기록이 없다. 남부 고지의 지방 행정 문서와 부대 기록은 1884년 여름 진격 과정에서 상당수가 불탔고, 살아남은 것도 전후 왕당파 문건 몰수·폐기 때 사라졌다. 그러니까 위 표의 왕당파 사상자는 대부분 의회군이 세어 본 숫자다. 이긴 쪽이 진 쪽 시체를 세는 상황에서 정확할 리가 없다.

② 전사와 병사(病死)를 구분할 수가 없다. 이 시대는 부상 자체보다 감염으로 죽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리스터의 무균법이 1870년대에 나왔지만 야전 적용은 한참 늦었다. 문제는 야전 병원에서 죽은 사람을 어느 전투 사상자로 계산할지 기준이 부대마다 달랐다는 것이다. 왕당파는 1884년 이후 의약품이 아예 없었으니 부상자 사망률이 극단적으로 높았고, 그만큼 경계가 더 흐리다.

③ 탈영인지 전사인지 모른다. 1884년 이후 왕당파 탈영이 급증했는데, 부대 기록에는 대부분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다. 전후 집계에서 이 중 일부가 전사자로 계상되었을 가능성이 계속 지적된다.

민간인은 아예 별개

민간인 사망은 전투 사상자와 따로 다룬다. 통용되는 추정치가 약 1만 7천 명인데 연구자에 따라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망 원인이 대부분 전투가 아니기 때문이다. 봉쇄로 굶어 죽고, 난방이 없어 얼어 죽고, 1884년 가을 초토화로 집을 잃고 그 겨울에 죽었다. 이 중 어디까지를 전쟁 사망으로 볼 것인가 자체가 판단의 영역이다.

1885년 전시 피해 조사단은 1만 명 안팎으로 집계하고 봉쇄와의 인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20세기 중반 이후 교구 매장 기록을 뒤진 연구들은 훨씬 큰 수치를 내놓는다. 어느 쪽도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게 이 분야의 기본 전제다.

3. 로엔필드 조우전 [편집]

"로엔필드는 이 전쟁에서 가장 덜 알려진 큰 전투다. 승패가 나지 않았고 어느 쪽도 자랑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 하루에 계승전쟁의 나머지 전부가 예고되어 있었다. 양측 지휘부가 이후 3년 동안 정면 회전을 피해 다닌 이유를 알고 싶다면 1883년 5월 14일의 로엔필드를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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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드 베르니에, 『계승전쟁: 세 해의 겨울』(1961)

1883년 5월 14일 루이나 중부 로엔필드 일대에서 벌어진 교전. 계승전쟁 최초의 사단 규모 전투이며, 양측 모두 상대를 오인한 채 병력을 축차 투입하다 승패를 내지 못하고 물러난 전형적인 조우전이다.

3.1. 배경 [편집]

1883년 4월 왕당파는 세 갈래로 북상 중이었다. 오를레인 백작의 남부 고지군이 테른 고개를 넘어 중앙 축선으로, 남부 관구 병력이 그 서쪽으로, 서부 관구 병력이 서부 내륙에서 각각 움직였다. 문제는 이 셋이 서로 조율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왕당파에는 이걸 조정할 총사령부가 없었다. 각 부대가 자기 판단으로 진격로와 속도를 정했고, 결과적으로 전선이 넓게 벌어졌다.

의외로 이건 초기엔 이점이었다. 의회군 입장에서 어디를 막아야 할지 판단이 안 섰기 때문이다. 세 갈래가 각기 다른 속도로 다른 방향에서 올라오는데 어느 쪽이 주공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의회군은 이 시기 조직적 방어를 하지 않고 있었다. 리처드 A. 손힐전방에서 소모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신편 부대는 아직 훈련 중이었고 정규군은 수도 방어를 위해 집결해 있었다. 소도시들이 함락되는 동안 병력을 아꼈다는 비판이 당시에도 있었지만, 손힐은 훈련되지 않은 부대를 축차 투입하는 것이 최악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5월 초 그는 방침을 부분적으로 조정한다. 왕당파 선봉의 진출 속도를 늦추고 수도 방어선 구축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북부 관구 병력 일부를 전진 배치하기로 한 것이다. 임무는 명확히 지연이었다. 여단장에게 내려간 명령서에는 「접촉 후 상황에 따라 이탈할 재량을 부여한다」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결전하지 말고 시간만 끌라는 얘기다.

정찰의 공백
이날의 모든 일은 결국 정찰 실패에서 나왔다. 당시 전장 정찰은 전적으로 기병에 의존했다. 기구(氣球) 관측은 요새전에서나 쓰였고 야전에서 쓸 물건이 아니었으며, 전신은 후방과의 연락 수단이지 전방 관측 수단이 아니었다.

그런데 양측 기병 모두 문제가 있었다. 왕당파 기병은 남부 고지 출신이 많아 중부 지역 지리에 어두웠다. 지도를 보고 움직이는 것과 지형을 아는 것은 다른 문제인데, 이들은 후자가 없었다. 의회군 기병은 반대로 지리는 알았지만 숫자가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개전 시점 의회군 기병 전력은 왕당파의 절반에도 못 미쳤고, 그 대부분이 수도권 경계에 묶여 있었다.

즉 양측 다 상대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서로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3.2. 양측 전력 [편집]

구분
벨포르 연합
은사슴단
지휘
북부 관구 제2여단
남부 고지군 제1사단
보병
약 9,400명
약 12,700명
기병
약 400기
약 900기
야포
24문 (강철 후장포)
18문 (후장포 6, 청동 전장포 12)
소총
신형 제식 (단일 규격)
구형 개조 + 수입품 (혼용)

숫자만 보면 왕당파의 압승이 예상된다. 병력은 3할 이상 앞서고 기병은 두 배가 넘는다. 그런데 실제로 중요했던 건 아래쪽 두 줄이었다.

야포의 질적 격차

의회군 야포 24문은 전부 강철 후장포였다. 내해 연안 제철소에서 생산된 신형으로, 사거리와 정확도에서 우위였다. 반면 왕당파 18문 중 후장포는 6문뿐이고 나머지 12문은 요새 재고에서 끌어온 청동 전장포였다. 포구로 장약과 포탄을 밀어 넣는 물건이니 발사 속도가 후장포의 절반 이하다.

다만 이 시대 야포의 한계는 양측 공통이었다. 주퇴복좌기가 없다. 쏘면 포가 뒤로 밀리고, 포반이 그걸 다시 밀어 넣고 조준을 다시 잡아야 한다. 교범상 분당 10발이니 뭐니 해도 실전에서 지속 사격은 분당 두 발이 한계다. 그리고 조준은 직접 조준 — 포수가 포신 너머로 표적을 눈으로 보고 쏜다. 간접 사격 개념은 이 시기에 제시만 되어 있었을 뿐 어느 나라도 실용화하지 못했다.

이게 뜻하는 바는 명확하다. 포대는 표적이 보이는 곳에 놓여야 하고, 그 말은 적 소총 사거리 안에 놓인다는 뜻이다.

탄약 규격

왕당파 소총 혼용은 이날 처음으로 실전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관구 무기고의 구형 개조 소총과 하르슈타트 공국에서 들여온 수입 소총이 같은 연대 안에 섞여 있었는데, 구경이 달라서 탄약을 서로 돌려 쓸 수 없었다.

평시에는 그냥 행정상의 번거로움이다. 전투 중에는 다르다. 한 대대의 탄약이 떨어졌을 때 옆 대대에서 받아 쓸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3.3. 전개 [편집]

3.3.1. 조우와 전개선 형성 [편집]

오전 8시경 — 기병 접촉

5월 14일 아침, 로엔필드 북쪽 완만한 구릉지에서 양측 기병 정찰대가 마주쳤다. 규모는 양쪽 다 1개 중대 수준이었다. 짧은 총격이 오간 뒤 양측 모두 물러났고, 각자 본대에 적 소부대 발견을 보고했다.

이 한 줄의 보고가 이날의 모든 것을 결정했다. 양측 지휘관은 상대를 전위 소부대로 판단했다. 그 뒤에 사단이 통째로 따라오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전 10시~정오 — 접촉 확대
양측이 각각 1개 연대를 전진시키면서 접촉면이 넓어졌다. 여기서도 서로의 규모는 여전히 파악되지 않았다. 두 가지가 겹쳤기 때문이다.

하나는 지형이다. 로엔필드 일대는 완만한 구릉이 겹겹이 이어진 지형인데, 이런 곳은 능선 하나만 넘어도 그 뒤가 안 보인다. 전형적인 관측 사각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다른 하나는 연기다. 첫 일제 사격이 오간 뒤부터 흑색화약 연기가 깔리기 시작했다. 무연화약이 없는 시대에 수백 정이 동시에 쏘면 사격선 앞이 하얗게 막힌다. 능선 뒤를 볼 수 없는데 앞도 안 보이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당시 교리대로라면 회전은 정찰 → 적 배치 확인 → 주력 전개 → 공격의 순서를 밟는다. 로엔필드에서는 이 순서가 첫 단계부터 무너졌다. 정찰 결과가 틀렸고, 틀린 판단 위에 병력이 계속 얹혔으며, 얹힌 뒤에는 수정할 방법이 없었다.

정오~오후 2시 — 본대 전개
양측 본대가 차례로 도착하면서 전선이 약 4킬로미터에 걸쳐 형성되었다. 이 시점에야 양측 지휘관은 상대가 사단 규모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물러나는 것도 간단하지 않았다. 이미 두 개 연대씩이 화력 접촉 중이었고, 접촉 중인 부대를 빼내려면 엄호가 필요하며, 엄호하려면 다시 병력을 밀어 넣어야 한다. 전투를 그만두려면 전투를 더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야포가 배치된 것도 이 무렵이다. 양측 다 직접 조준이므로 포대는 시야가 트인 능선 위에 놓였다. 의회군 포병은 개전 이래 실전 경험이 없었으나 조작 자체는 능숙했다. 포수 다수가 조선소와 제철소 출신이었기 때문인데, 이는 손힐이 신편 부대 편성 때 기계를 다뤄 본 사람을 포병과 공병에 우선 배치한 원칙의 결과였다.

3.3.2. 중앙 돌격의 실패 [편집]

오후 2시 30분 — 결심
남부 고지군 제1사단장은 중앙 돌파를 결심했다. 판단 근거는 두 가지였다. 병력에서 앞서 있다는 것, 그리고 시간을 끌면 의회군 증원이 도착하리라는 것이었다.

둘 다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실제로 병력은 3할 이상 앞섰고, 의회군 증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문제는 정면 돌격이라는 수단이었다.

대형 — 중대 종대
투입된 것은 3개 연대 약 5,000명, 대형은 중대 종대(company column)였다. 소대를 세 겹으로 겹쳐 세우고 100미터 전방에 산병선을 깔아 앞을 정리하며 전진하는 방식이다. 보불전쟁 이래 유럽 각국 군대의 표준 공격 대형이었고, 왕당파 정규 관구는 이 교범으로 훈련받았다.

중대 종대의 장점은 분명하다. 지휘 통제가 쉽고 밀집한 만큼 돌파 순간의 충격력이 크다. 산개 대형은 지형을 이용해 피해를 줄일 수 있지만 일단 흩어지면 다시 모으기가 어렵고, 훈련 수준이 낮은 부대는 산개시키는 순간 통제가 안 된다.

문제는 이 계산이 전장식 소총 시대의 것이라는 데 있었다.

오후 3시~4시 30분 — 실패
돌격은 실패했다. 원인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사거리 계산이 틀렸다.
의회군 보병은 완만한 구릉의 반사면(reverse slope)에 배치되어 있었다. 능선 너머 뒤쪽 경사면에 자리 잡는 이 배치는 적 포병 관측에서 벗어나면서도 능선을 넘어오는 적을 근거리에서 때릴 수 있는 고전적 방식이다. 그 앞에는 급조된 흉벽이 있었고 병사들은 엎드려 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신형 제식 소총의 유효 사거리는 500미터를 넘는다. 왕당파 종대는 개활지를 800미터 가까이 전진해야 했다. 다시 말해 사거리 안에서 500미터를 걸어야 했다. 분당 8발에서 12발을 쏘는 후장식 소총 9,000정 앞에서 말이다.

둘째, 종대가 표적이 되었다.
밀집 종대는 정면 폭이 좁고 종심이 깊다. 조준이 정확할 필요가 없다. 대충 그 방향으로 쏘면 누군가는 맞는다. 산병선이라면 빗나갔을 탄이 종대에서는 뒷줄에 맞는다.

이 문제는 1877년 플레브나 공방에서 이미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참호에 들어앉은 오스만군이 러시아군의 정면 돌격을 세 차례 격퇴했고, 유럽 각국 군대는 이를 보고서로 읽었다. 그러고는 야전 축성 강화라는 교훈만 뽑아 갔다. 방어는 고쳤는데 공격은 그대로 둔 것이다.

로엔필드는 그 결과가 실제로 나타난 자리였다.

셋째, 포병 엄호가 없었다.
왕당파 야포 18문 중 절반 이상이 청동 전장포였고, 후장포조차 주퇴복좌기가 없어 발사 후 재조준에 시간이 걸렸다. 실전 지속 사격 분당 두 발로는 돌격을 엄호할 화력 밀도가 나오지 않는다.

당시 교리에서 공격 지원 포격의 목표는 방어 측을 제압해 사격을 못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18문이 분당 두 발씩 쏴 봐야 분당 36발이다. 4킬로미터 전선에 흩어진 9,400명을 상대로 이 정도는 제압 사격이라 부를 수 없다.

연기 — 결정타
여기에 흑색화약이 결정타를 날렸다. 양측 수천 정이 동시에 사격하면서 전장 중앙이 흰 연기로 완전히 뒤덮였고, 왕당파 종대는 200미터 앞을 볼 수 없는 상태로 전진해야 했다.

이 시대의 전투 지휘는 육성, 나팔, 군기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연기 속에서 육성은 사격 소음에 묻혀 닿지 않고, 나팔은 방향을 알려 주지 못하며, 군기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선두 대대가 방향을 잃고 좌측으로 흘렀다. 그 뒤를 따르던 대대는 이를 알지 못한 채 직진했다. 대형이 갈라졌고, 갈라진 사실을 지휘관이 인지한 것은 한참 뒤였다.

오후 4시 30분 — 정지
왕당파 종대는 의회군 진지 200미터 앞에서 정지했다. 돌격이 정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끝났다는 뜻이다. 밀집 대형이 개활지에서 멈춰 서서 사격전을 벌이는 것은 엄폐한 방어 측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30분가량 사격이 오갔고 오후 5시경 왕당파가 후퇴했다.

이 돌격에서만 약 700명이 죽었다. 이날 왕당파 전사자의 3분의 2가 이 한 시간 반에 나왔다.

3.3.3. 철수 [편집]

양측의 판단
돌격이 실패했다고 전투가 바로 끝난 것은 아니다. 양측 모두 전선을 유지한 채 산발적 사격을 이어 갔고, 해가 진 뒤에야 접촉이 끊겼다.

의회군 여단장은 밤사이 철수를 결정했다. 근거는 셋이었다. 부여받은 임무가 지연이지 결전이 아니라는 것, 왕당파 병력이 여전히 우세하다는 것, 그리고 다음 날 왕당파 서쪽 갈래가 합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명령서에 이탈 재량이 명시되어 있었으므로 상부 승인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왕당파 사단장도 추격하지 않았다. 병력 손실이 컸고 탄약 소모가 예상을 크게 넘었다. 여기에 야간 추격의 위험이 결정적이었다. 이 시대 교리에서 야간 기동은 훈련이 잘된 소부대에게만 허용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어두운 데서 사단 규모가 움직이면 대형이 흐트러지고, 흐트러진 상태에서 반격을 받으면 그대로 무너진다.

결과적으로 양측 다 더 싸울 수 있었지만 싸우지 않기로 한 셈이었다.

5월 15일
날이 밝았을 때 의회군은 이미 8킬로미터 북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왕당파는 로엔필드 일대를 점령했다. 다만 이건 싸워서 얻은 게 아니라 상대가 내준 것이었다.

양측 모두 승리를 선언했다. 왕당파는 전장을 확보했다는 점을, 의회군은 상대 진격을 하루 이상 지연시키고 손실 교환비에서 앞섰다는 점을 들었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3.4. 전술적 특징 [편집]

① 조우전이라는 형태 자체의 문제
이 전투의 핵심은 양측 모두 상대를 오인한 채 전투에 들어갔다는 것인데, 이건 누구의 과실이라기보다 조우전(meeting engagement)이라는 형태 자체의 속성이다.

조우전에서는 정찰 → 전개 → 공격의 순서가 성립하지 않는다. 접촉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판단해야 하는데, 접촉이 시작된 뒤에는 관측이 불가능해진다. 지형에 가리고 연기에 가린다.

로엔필드는 여기에 축차 투입이 겹쳤다. 상대를 소부대로 알고 1개 연대를 보냈는데 상대도 1개 연대를 보내고, 그러다 보니 서로 병력을 조금씩 더 집어넣게 되고, 정신 차려 보니 사단끼리 붙어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병력의 축차 투입은 어느 시대든 금기지만, 조우전에서는 그걸 알면서도 피하기가 어렵다.

② 중대 종대의 마지막 사례
왕당파가 시도한 중대 종대 돌격은 계승전쟁에서 이 규모로 시행된 마지막 사례다. 이후 왕당파 부대들도 점차 산개 대형으로 이행했고, 1884년 이후로는 밀집 대형 공격이 기록되지 않는다.

다만 이 변화는 교리 개정을 통해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왕당파에는 교범을 다시 쓸 기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각 부대가 알아서 조정했을 뿐이고, 그러다 보니 부대마다 대형 운용이 제각각이 되었다. 이 문제는 1884년 3월 총사령부가 설치될 때까지 정리되지 않았고, 사실 그때는 정리할 여유도 없었다.

③ 방어 우위의 실증
로엔필드는 1880년대 화력 조건에서 방어 측이 얼마나 유리한지를 양측 모두에게 확인시켰다. 병력에서 3할 이상 앞선 쪽이 정면 돌격에 실패했고, 그 손실은 방어 측의 두 배 가까웠다.

이 인식이 이후 3년을 규정한다. 손힐은 결전 회피 방침을 더 강하게 밀었고, 왕당파는 이후 대규모 정면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1884년 테른 고개 전투에서 의회군이 열흘에 걸쳐 준비 포격과 갱도 작업을 병행한 것도 결국 이날의 교훈에서 나온 것이다.

④ 반사면 배치의 효과
의회군이 사용한 반사면 배치는 이 전쟁 내내 반복해서 등장한다. 능선 뒤쪽에 진지를 두면 적 포병의 직접 조준에서 벗어나는데, 이 시대에는 간접 사격이 없으므로 보이지 않는 표적은 때릴 수 없다.

왕당파가 이날 포격으로 의회군 진지를 제압하지 못한 데에는 화력 부족만이 아니라 이 배치도 작용했다. 능선 너머에 뭐가 있는지 볼 수 없으니 조준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⑤ 탄약 규격 문제의 첫 노출
왕당파 무장 혼용이 실전에서 처음 문제를 일으킨 것도 이 전투다. 구형 개조 소총과 수입 소총이 한 부대에 섞여 있어 탄약 재분배가 불가능했고, 돌격 실패 후 후퇴 과정에서 일부 부대가 탄약이 떨어진 채 물러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문제는 이후 계속 악화된다. 봉쇄로 수입 소총 탄약이 끊기면서 1884년 봄에는 성능 좋은 총이 탄약이 없어 창고에 쌓이는 상황까지 간다.

3.5. 결과와 영향 [편집]

구분
벨포르 연합
은사슴단
전사
약 900명
약 1,100명
부상
약 2,100명
약 2,600명
야포 손실
2문
1문

군사적 결과
전술적으로는 무승부, 전략적으로는 의회군의 목표 달성이었다. 왕당파 진격이 지연되었고 수도 방어선 구축 시간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전투가 왕당파의 북상을 멈추지는 못했다. 왕당파는 6월과 7월에 걸쳐 진격을 계속했고 7월 중순에는 수도권 외곽 60킬로미터 지점까지 접근한다. 로엔필드는 속도를 늦췄을 뿐 방향을 바꾸지는 못한 전투였다.

훈련에 반영된 것
의회군에서는 이날의 경험이 곧바로 신병 훈련에 반영되었다. 1883년 여름 이후 8주 훈련 과정에서 연기 속 대형 유지에 배정된 시간이 늘었고, 소대장 이하 지휘자에게 나팔 신호 외에 수신호와 접촉 유지 요령을 별도로 교육하기 시작했다.

왕당파에서는 이런 제도적 반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각 부대가 개별적으로 대형을 조정했을 뿐 통합된 교리 개정은 없었다. 총사령부가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기억
로엔필드는 계승전쟁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음에도 후대에 크게 기억되지 않았다. 승패가 나지 않았고 결정적이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양쪽 다 자랑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공식 기록화 가운데 이 전투를 다룬 작품은 한 점도 없다.

다만 군사사 연구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1880년대 유럽 군대가 처해 있던 상황이 이 하루에 압축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4. 할브룩 습격 [편집]

"할브룩은 계승전쟁에서 가장 값싼 승리였다. 의회군은 이 작전에 기병 두 개 중대를 썼고 스물세 명을 잃었으며, 그 대가로 왕당파의 겨울 한 달치를 태웠다. 이 전쟁에서 투입 대비 성과가 이만한 작전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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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드 베르니에, 『계승전쟁: 세 해의 겨울』(1961)

1884년 4월 27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남부 고지 북부 할브룩 일대에서 벌어진 기병 습격 작전. 의회군 기병 2개 중대가 우회 산길을 통해 왕당파 후방으로 침투해 보급 집적소를 소각하고 이탈한 작전이며, 계승전쟁에서 기병이 거둔 유일한 결정적 성과로 꼽힌다.

4.1. 배경 [편집]

전선의 상황
1884년 봄, 눈이 녹으면서 세 고개가 다시 열렸다. 그러나 의회군은 즉시 공세로 나서지 않았다. 리처드 A. 손힐이 국방위원회에서 승인받은 계획은 여름까지 준비를 마친 뒤 한 번에 밀어붙이는 것이었고, 그때까지의 두 달은 상대를 더 소모시키는 데 쓰기로 되어 있었다.

이 방침에 따라 4월 내내 시행된 것이 압박 정찰이었다. 대대 이하 규모를 반복 투입해 왕당파가 응사하게 만들고, 그 반응으로 포대 위치와 병력 배치를 파악하는 동시에 탄약을 소모시키는 것이다. 테른 고개 제1차 공방도 같은 맥락의 작전이었다.

문제는 이 방식이 비싸다는 것이었다. 4월 9일부터 나흘간 이어진 제1차 공방에서 의회군은 1,300명을 잃었다. 왕당파의 포탄 재고를 상당 부분 소진시켰다는 성과가 있었으나, 같은 결과를 더 싸게 얻을 방법이 있다면 그쪽이 나았다.

보급을 직접 친다
4월 중순 의회군 참모부에 올라온 안이 후방 집적소 타격이었다.

논리는 단순했다. 왕당파의 물자는 남부 고지 안쪽 몇 곳에 집적되어 있고, 그것을 전선까지 마차로 옮긴다. 전선에서 탄약을 소모시키는 것보다 집적소를 태우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었다.

실행 가능성이 문제였다. 정면으로는 세 고개가 전부 막혀 있었다. 그러나 산악 지대에는 지도에 없는 소로가 여럿 있었고, 이 시기 의회군은 이미 남부 고지 출신 이탈자와 접경 지대 주민들로부터 상당한 지리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할브룩
목표로 선정된 곳이 할브룩이었다. 테른 고개 남쪽 30킬로미터 지점의 소읍으로, 남부 간선 철도 종착역에서 올라온 물자가 전선으로 분배되기 전에 모이는 2차 집적소였다.

정찰 정보에 따르면 이곳에는 곡물과 사료, 그리고 일부 탄약이 쌓여 있었다. 방어 병력은 후방이라는 이유로 얇았다. 왕당파 입장에서는 정면이 막혀 있으니 후방을 두껍게 지킬 이유가 없었고, 무엇보다 지킬 병력 자체가 없었다.

4.2. 양측 전력 [편집]

구분
벨포르 연합
은사슴단
투입
기병 2개 중대 (약 240기)
집적소 경비대 (약 180명)
무장
기병 소총, 권총, 도검
구형 소총
휴대 장비
석유, 도화선, 폭약 소량
-
지원
없음 (단독 작전)
인근 수비 병력 약 400명

투입 규모만 보면 습격이라기보다 정찰에 가깝다. 240기는 정면에서 뭘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그러나 이 작전의 목표는 교전이 아니었다. 들어가서, 태우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편성도 그에 맞춰 짜였다. 두 개 중대 중 하나는 소각조, 다른 하나는 엄호와 퇴로 확보를 맡았고, 각 기병은 통상 휴대량 외에 석유와 도화선을 나눠 지녔다.

기병의 위치
여기서 짚어 둘 것이 있다. 1880년대에 기병 충격 돌격의 시대는 이미 끝나 있었다. 후장식 소총 앞에서 밀집 기병이 달려드는 것은 자살에 가까웠고, 이건 보불전쟁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다.

그렇다고 기병이 쓸모없어진 것은 아니다. 역할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 시기 기병의 주 임무는 정찰, 전초, 추격, 그리고 습격이었다. 특히 후방 보급선 습격은 기병이 여전히 잘할 수 있는, 그리고 사실상 기병만 할 수 있는 임무였다. 자동차도 항공기도 없던 시대에 하룻밤에 30킬로미터를 왕복할 수 있는 병과는 기병뿐이었기 때문이다.

하마 전투
또 하나 중요한 것이 하마 전투(dismounted action)다. 이 시기 기병은 말에서 내려 싸우는 훈련을 받았다. 기병 소총을 지급받고 보병처럼 사격전을 벌이다가 필요하면 다시 말에 오르는 방식인데, 할브룩 습격에서도 실제 소각 작업은 전원 하마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4.3. 전개 [편집]

4.3.1. 우회 산길 정찰 [편집]

정보원
작전의 성패는 길을 아느냐에 달려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길은 전부 왕당파가 지키고 있었으므로, 지도에 없는 길이 필요했다.

의회군이 확보한 정보원은 세 부류였다. 개전 이래 북쪽으로 넘어온 남부 고지 출신 이탈자, 전쟁 전 이 일대를 오가던 가축 상인, 그리고 접경 지대에서 밀수에 종사하던 자들이었다. 마지막 부류가 가장 유용했다. 이들은 직업상 세관과 순찰을 피해 다니는 길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전 정찰
4월 18일부터 22일까지 닷새에 걸쳐 소규모 정찰조가 세 차례 산길을 답사했다. 각 조는 5기에서 8기 규모였고 민간 복장을 입었으며, 야간에만 이동했다.

정찰에서 확인된 것은 다음과 같았다.

경로는 테른 고개 서쪽 15킬로미터 지점에서 시작해 능선 두 개를 넘어 할브룩 동쪽으로 내려오는 소로였다. 총 연장은 약 34킬로미터. 말이 한 줄로만 통과할 수 있는 구간이 세 곳 있었고, 그중 한 곳은 하마해서 말을 끌고 가야 했다. 왕당파 초소는 경로상에 두 곳 있었으나 야간 근무 인원이 각각 서너 명에 불과했다.

가장 중요한 확인 사항은 소요 시간이었다. 야간 행군 기준 편도 6시간에서 7시간. 즉 해가 진 뒤 출발해 자정 무렵 목표에 도달하고, 날이 밝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작전 승인
4월 24일 손힐이 작전을 승인했다. 국방위원회 사전 승인 원칙이 있었으나 이 작전은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사후 보고로 처리되었다. 손힐은 승인 각서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잃을 것이 240기뿐」이라고 적었다.

4.3.2. 야간 접근 [편집]

4월 27일 오후 8시 — 출발
일몰 직후 기병 2개 중대가 출발했다. 편제는 정찰조 12기가 선두, 소각조가 중앙, 엄호조가 후미였다. 각 기병은 재갈에 천을 감고 말굽에 헝겊을 덧대 소음을 줄였다. 금속 장비는 전부 천으로 싸거나 고정했다.

이날 밤은 달이 없었다. 작전일이 4월 27일로 잡힌 이유가 이것이었다. 어두우면 이쪽도 안 보이지만 저쪽도 안 보인다.

오후 10시 30분 — 제1초소
경로상 첫 번째 왕당파 초소는 능선 안부에 있었다. 정찰조가 먼저 접근해 근무 중이던 3명을 제압했다. 총성 없이 처리되었으며, 이 시점에 초소 인원 전원이 잠들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왕당파의 태만이라기보다 체력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884년 봄 왕당파 부대의 배급은 하루 두 끼였고 후방 부대는 그보다 적었다. 굶주린 병사가 야간 초소에서 각성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자정 무렵 — 제2초소 우회
두 번째 초소는 제압하지 않고 우회했다. 위치가 개활지에 가까워 접근 중 발각될 위험이 있었고, 무엇보다 소리를 내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우회로 약 40분이 추가로 소모되었다.

오전 1시 20분 — 할브룩 동쪽 도착
계획보다 한 시간가량 늦게 목표 인근에 도달했다. 이 지연이 이후 이탈 단계에서 문제가 된다.

정찰조가 먼저 접근해 집적소 배치를 확인했다. 창고 건물 네 동, 야적 더미 여섯 곳, 마차 계류장이 있었고 경비는 창고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야적 더미 쪽은 사실상 방치 상태였다.

4.3.3. 집적소 소각과 이탈 [편집]

오전 1시 50분 — 개시
소각조가 세 갈래로 나뉘어 진입했다. 순서는 명확히 정해져 있었다. 야적 더미부터, 그 다음 창고, 마차 계류장은 마지막.

이 순서에는 이유가 있었다. 야적 더미는 방치되어 있어 접근이 쉽고 불이 잘 붙으며, 무엇보다 불길이 크게 일어난다. 경비 병력이 그쪽으로 몰리는 사이 창고를 처리한다는 계산이었다.

계산대로 되었다. 야적 더미 여섯 곳 중 네 곳에 먼저 불이 붙었고, 경비대가 그쪽으로 달려가는 동안 소각조가 창고 네 동에 석유를 뿌렸다.

오전 2시 10분 — 교전
창고 두 번째 동에서 경비대와 마주쳤다. 여기서 처음으로 총성이 났고, 이후 20분가량 산발적인 사격전이 벌어졌다.

의회군 손실 대부분이 이 20분에 나왔다. 다만 규모는 크지 않았다. 경비대가 조직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불길이 사방에서 올라오는 상황에서 어느 쪽이 적인지 파악하기 어려웠고 인원도 흩어져 있었다.

오전 2시 40분 — 철수 개시
마차 계류장까지 처리한 뒤 철수 신호가 내려졌다. 이 시점에 창고 네 동 중 세 동, 야적 더미 여섯 곳 중 다섯 곳이 불타고 있었다.

철수는 진입로가 아닌 남쪽 경로로 이루어졌다. 왕당파 인근 수비 병력 약 400명이 동쪽에서 접근 중이라는 정찰 보고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5킬로미터를 우회한 뒤 서쪽으로 꺾어 원래 산길에 합류하는 경로였다.

오전 4시~오전 7시 — 이탈
이탈 과정이 이 작전에서 가장 위험한 국면이었다. 도착이 한 시간 늦었으므로 이탈도 그만큼 늦어졌고, 날이 밝기 시작한 상태에서 산길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전 5시 30분경 능선에서 왕당파 소부대와 접촉이 있었다. 다만 이쪽이 추격대가 아니라 우연히 마주친 순찰조였고, 규모도 작아 큰 교전으로 번지지 않았다.

오전 7시경 전 병력이 아군 전선에 복귀했다.

4.4. 전술적 특징 [편집]

① 화력이 아니라 물자를 노렸다
계승전쟁의 다른 작전들이 상대의 화력과 병력을 소모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할브룩은 보급 자체를 겨냥한 거의 유일한 작전이다.

이 발상이 나온 배경에는 왕당파의 구조적 취약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었다. 왕당파는 조병창이 없어 소모를 보충할 수 없었고, 남부 고지 내부에 철도가 없어 물자를 재배치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즉 한 번 태운 물자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② 소규모 침투의 조건
이 작전이 성립한 조건은 셋이다.

첫째, 지리 정보다. 지도에 없는 길을 아는 사람이 필요했고, 이는 밀수업자와 이탈자로부터 확보되었다.
둘째, 야간 기동 능력이다. 이 시대 교리에서 야간 기동은 훈련된 소부대에만 허용되었다. 240기라는 규모는 야간에 통제 가능한 상한선에 가까웠다.
셋째, 상대의 후방이 비어 있었다는 것이다. 왕당파는 정면 방어에 병력을 전부 쏟아부어야 했으므로 후방을 지킬 여력이 없었다.

③ 소각 순서의 계산
야적 더미를 먼저 태워 경비를 유인하고 그사이 창고를 처리한 순서는 이 작전에서 가장 잘 짜인 부분으로 평가된다.

이는 화재 자체를 양동으로 쓴 셈인데,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침투 작전에서 상대 대응을 분산시키는 수단으로 불을 활용한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④ 기병의 시대적 위치
할브룩은 기병이 충격 병과에서 기동 병과로 넘어간 시기를 보여 주는 전형적 사례다.

이 작전에서 기병은 한 번도 돌격하지 않았다. 말은 이동 수단이었고 전투는 전원 하마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기병이 아니면 불가능한 작전이었는데, 하룻밤에 68킬로미터를 왕복할 수 있는 병과가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⑤ 시간 관리의 실패
이 작전의 유일한 흠은 시간이었다. 제2초소 우회로 40분이 소모되면서 전체 일정이 한 시간 밀렸고, 그 결과 이탈이 명중 시간대에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큰 피해 없이 빠져나왔으나 이는 운이 좋았던 측면이 있다. 왕당파 수비 병력이 조금 더 빨리 반응했거나 추격이 조직적이었다면 산길에서 포위될 수 있었다. 후대의 분석은 이 점을 성공한 작전의 감춰진 위험으로 지적한다.

4.5. 결과와 영향 [편집]

구분
내용
의회군 손실
전사 23명, 부상 41명, 말 60여 두
왕당파 손실
전사·부상 약 90명
소각
창고 3동, 야적 더미 5곳, 마차 계류장
물자 피해
곡물 약 400톤, 사료 약 300톤, 소총탄 약 40만 발

보급에 미친 영향
소실된 물자의 절대량은 크지 않다. 곡물 400톤은 왕당파 전군의 며칠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점이 문제였다. 1884년 4월의 왕당파는 이미 재고가 바닥난 상태였다. 겨울을 나면서 비축분을 다 써 버렸고 봉쇄로 새로 들어오는 것이 없었으며, 남부 고지 안에서 징발할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며칠분을 잃는다는 것은 곧 며칠 뒤에 굶는다는 뜻이었다.

소총탄 40만 발의 손실도 컸다. 4월 시점 왕당파의 소총탄 잔량은 병사 1인당 30발 아래로 떨어져 있었는데, 이 40만 발은 전군에 5발씩 더 돌아갈 수 있는 양이었다.

왕당파의 대응
습격 이후 왕당파 총사령부는 후방 경비를 강화하려 했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병력을 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면 방어선에서 인원을 돌리면 그만큼 고개가 얇아지는데, 그건 더 큰 위험이었다.

대신 취해진 조치는 집적소 분산이었다. 한 곳에 모아 두던 물자를 여러 곳에 나눠 쌓는 방식인데, 이는 다시 한번 물자 관리와 수송 효율을 떨어뜨렸다. 안전을 얻는 대가로 효율을 잃은 셈이다.

의회군의 후속
할브룩의 성공 이후 의회군은 유사한 습격을 세 차례 더 시도했다. 그러나 어느 것도 같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왕당파가 경계를 강화했고, 무엇보다 태울 만한 집적소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 자체가 왕당파의 사정을 보여 준다. 5월 이후 의회군 정찰 보고에는 「목표 가치 있는 집적소를 발견하지 못함」이라는 문구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평가
할브룩은 계승전쟁에서 투입 대비 성과가 가장 컸던 작전으로 꼽힌다. 240기와 스물세 명의 전사자로 상대의 겨울 한 달치를 태웠다.

다만 이 작전이 전쟁의 향방을 바꾸지는 않았다. 왕당파의 붕괴는 이미 진행 중이었고, 할브룩은 그 속도를 조금 앞당겼을 뿐이다. 후대의 평가는 이 작전을 승부를 결정한 작전이 아니라 승부가 이미 결정되었음을 보여 준 작전으로 본다. 후방이 비어 있었다는 것, 초병이 굶주려 잠들어 있었다는 것, 태운 뒤 다시 채울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 전부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5. 테른 고개 제1차 공방 [편집]

5.1. 배경 [편집]

5.2. 양측 전력 [편집]

5.3. 전개 [편집]

5.3.1. 제1일: 정면 압박 [편집]

5.3.2. 제2일~제3일: 화력 확인 [편집]

5.3.3. 제4일: 철수 [편집]

5.4. 전술적 특징 [편집]

5.5. 결과와 영향 [편집]

6. 카른 고개 야습 [편집]

6.1. 배경 [편집]

6.2. 양측 전력 [편집]

6.3. 전개 [편집]

6.3.1. 야간 역습 [편집]

6.3.2. 전초 탈취 [편집]

6.3.3. 반격과 원상 복귀 [편집]

6.4. 전술적 특징 [편집]

6.5. 결과와 영향 [편집]

7. 테른 고개 전투 [편집]

7.1. 배경 [편집]

7.2. 양측 전력 [편집]

7.3. 지형과 방어 구조 [편집]

7.4. 전개 [편집]

7.4.1. 준비 포격 (6월 21일~23일) [편집]

7.4.2. 제1선 돌입 (6월 24일~27일) [편집]

7.4.3. 왕당파 역습과 견제의 효과 (6월 28일~7월 1일) [편집]

7.4.4. 제2선 붕괴 (7월 2일~3일) [편집]

7.5. 전술적 특징 [편집]

7.5.1. 포병 운용 [편집]

7.5.2. 견제와 주공의 분리 [편집]

7.5.3. 흑색화약 전장의 통제 [편집]

7.6. 사상자와 포로 [편집]

7.7. 결과와 영향 [편집]

8. 카른 고개 전투 [편집]

8.1. 배경 [편집]

8.2. 양측 전력 [편집]

8.3. 전개 [편집]

8.3.1. 견제 공격의 개시 [편집]

8.3.2. 예상 밖의 돌파 [편집]

8.3.3. 고개 확보 [편집]

8.4. 전술적 특징 [편집]

8.5. 결과와 영향 [편집]

9. 에일마운트 전투 [편집]

9.1. 배경 [편집]

9.2. 양측 전력 [편집]

9.3. 전개 [편집]

9.3.1. 왕당파의 포병 집중 [편집]

9.3.2. 사흘간의 방어 [편집]

9.3.3. 포탄 소진과 붕괴 [편집]

9.4. 전술적 특징 [편집]

9.5. 결과와 영향 [편집]

10. 스톤게이트 관문 공방 [편집]

10.1. 배경 [편집]

10.2. 양측 전력 [편집]

10.3. 요새 구조 [편집]

10.4. 전개 [편집]

10.4.1. 정면 공격의 좌절 [편집]

10.4.2. 측면 성벽 갱도 작업 [편집]

10.4.3. 폭파와 함락 [편집]

10.5. 전술적 특징 [편집]

10.6. 결과와 영향 [편집]

11. 에일윈 능선 전투 [편집]

11.1. 배경 [편집]

11.2. 양측 전력 [편집]

11.3. 전개 [편집]

11.3.1. 능선 쟁탈 [편집]

11.3.2. 오를레인 백작의 전사 [편집]

11.3.3. 왕당파 철수 [편집]

11.4. 전술적 특징 [편집]

11.5. 결과와 영향 [편집]

12. 카엘몬트 성 공방 [편집]

12.1. 배경 [편집]

12.2. 양측 전력 [편집]

12.3. 성의 구조와 한계 [편집]

12.4. 전개 [편집]

12.4.1. 포위선 구축 [편집]

12.4.2. 함포 수송 [편집]

12.4.3. 준비 포격 (2월 2일~4일) [편집]

12.4.4. 외성 붕괴와 제1차 돌입 (2월 5일) [편집]

12.4.5. 갱도 작업과 2차 방벽 폭파 (2월 6일~8일) [편집]

12.4.6. 외성 시가전 (2월 8일) [편집]

12.4.7. 본성 포위와 항복 (2월 9일~11일) [편집]

12.5. 전술적 특징 [편집]

12.5.1. 함포의 육상 전용 [편집]

12.5.2. 갱도 공격의 부활 [편집]

12.6. 결과와 영향 [편집]

13. 소규모 교전 [편집]

13.1. 드럼케이드 소탕 [편집]

13.2. 할렌포드 도하 [편집]

13.3. 글렌모어 계곡 진입 [편집]

13.4. 산악 유격전 (1885) [편집]

14. 전술사적 평가 [편집]

14.1. 흑색화약 시대 마지막 내전 [편집]

14.2. 포병 운용의 변화 [편집]

14.3. 참호와 야전 축성 [편집]

14.4. 철도와 경편 궤도의 역할 [편집]

14.5. 해군 화력의 육상 투사 [편집]

15. 관련 문서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