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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라이카/역사
(r9 RAW)
==고대== 라이카 본토는 척박한 땅이었다. 이 땅에서 처음 살던 이들은 스스로를 베스터인이라고 불렀다.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유물로 종합해 보건데, 라이카의 농경은 늦게 시작되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최초의 고대 국가 자이테스 왕국은 3세기 경 수립되었고 5세기 경 멸망했다. 자이테스 법전, 톨지어 왕궁 등의 유산이 전해져 온다. 자이테스 법전은 노예 제도 명시, 세금 납부, 고대 시민 사회의 체계 등을 규정한 법률이었다. (라이카인들은 이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어, 현재 라이카의 헌법 이름도 노이에 자이테스 즉 새로운 자이테스이다.) 톨지어 왕궁은 현재 옛터와 훼손된 조각상 몇 개가 전해져 온다. 규모는 작은 편이며 라이카의 관광명소 중 하나다. 자이테스 왕국의 유명인물로는 셰다르 장군이 있다. 셰다르 장군은 치밀한 분석과 부하의 말을 경청하는 것을 통해, 항상 유리한 상황으로 아군을 위치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츠바이란트 지방에서 그의 격전을 보여주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셰다르의 부하였으나 셰다르 사후, 그의 자리를 노폴트 장군이 이었다. 노폴트는 화려하고 장대한 전술을 구사하며, 횟수는 적지만 빛나는 전과를 남겼다. 기원후 402년 자이테스의 왕 치무스가 남긴 역사 기록에는 당시 사회의 모습이 잘 실려 있다. 치무스 대에는 전국을 6성 25주로 나누었고, 각 주마다 주장을 파견하여 6성의 성주들에게 보고를 올리게 했다. 6성은 지역을 구분하는 단위다. 성주는 부분적인 군사력과 함께 왕의 중앙 군사력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주장은 각 주의 통솔자다. 세금, 인수조사, 각 주의 재판, 치안 등을 책임진다. 6개월마다 성주에게, 1년마다 왕에게 보고를 올렸다. 자이테스 시대의 의복은 척박하고 거친 날씨에 알맞은 옷이 많았다. 보라색을 만들기가 어려웠기에, 보라색이 고귀한 색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 전통은 현대까지 이어져, 예복에 보라색 포인트를 넣는 것이 관습이다. ==중세== ==근대== ===연합제국 성립=== 1779년, 세력을 키우던 라이카 왕국은 힐켄팔렌 왕국과 연합해 라이카 제국을 선포한다. 초대 황제는 라이카의 세하린 가문의 알베르트 1세였다. 서기 1783년, 라이카의 팽창을 경계하던 오스텐 왕국은 코페네스 맹약을 맺고 라이카를 침공한다. 맹약에는 오스텐 왕국, 비테발트 왕국, 라인룬트 공국이 참여한다. 이 전쟁은 코페네스 전쟁이라고 불린다. 전쟁 결과 오스텐은 회복 불가한 타격을 입고 라이카에 합병된다. 비테발트와 라인룬트는 평화조약 하에 물러난다. 이에 라이카는 안정기에 접어든다. 19세기는 산업혁명의 시대였다. 라이카 황실의 주도 하에 이뤄진 산업혁명은 라이카의 국력을 크게 올려주었으나, 부의 불평등,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인구 과밀 등 다양한 문제를 낳았다. 다수의 철학자, 사회학자들이 이 시기에 활발히 활동했다. 산업혁명과 함께 라이카 곳곳에서 실시된 교육은 시민 계층의 성장을 낳았다. 1832년, 4월 혁명에 의해 라이카 황실은 준입헌군주제가 된다. 상원과 하원의회, 근대적 법률과 재판 절차의 수립 등이 이때 탄생하나 황제의 엘리트독재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인치란트 전쟁=== 1965년 라이카 인치란트에서 시작된 내전. ====배경==== 라이카 왕국은 제국 내에서 발언권이 가장 강력한 지방이었다. 당시 라이카 내에서는 힐켄팔렌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공공연히 존재했다. 힐켄팔린 출신은 급여, 승진, 휴가 등 다양한 방면에서 차별을 받았다. 이런 차별은 정부 기관에서도 공공연히 이뤄졌다. 1963년의 국정감사 보고서에 적혀 있을 정도였다. 여기에, 라이카가 제 1차 랜드 대전에 참여하며 두 지역 간 감정은 악화된다. 상대적으로 빈곤층이 많던 힐켄팔렌 지역에서 징집과 단순 노동력 보충이 이뤄졌다. ====에위그힐켄 탄생==== 1964년 6월 3일, 힐켄팔렌 주는 다른 6개 주와 연합하여 에위그힐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라이카 제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수장을 내란 수괴로 몰지만, 이미 지난 1차 랜드 대전에 지쳐 황실과 내각을 외면하던 남라이카 사람들은 오히려 공산주의 정부에 동조한다. 양국 간의 소규모 무력충돌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렇게 불안정한 상태로 1년이 흘렀다. 1965년 9월 21일에는 북라이카 전투기가 남라이카 영해를 침범하는 사건도 일어났더. 1965년 9월 25일에는 남라이카의 곡사포 포탄에 맞아 국경 지대인 인치란트의 제국군 초소가 파괴되는 일도 벌어진다. 이에 북라이카가 10월 1일 전쟁을 선포하면서 인치란트 전쟁은 막을 올린다. ====흑색 작전==== 그러나 남라이카군의 비장의 작전, 흑색 작전이 등장한다. 라이카 동부의 늪지대는 진군에 어려움이 따르는 지역이다. 인민군은 이곳 앞까지 군사력을 집중시킨다. 당연히 이곳에서 출발해 항공 수송, 상륙작전, 해상 지원으로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여긴 북라이카. 헌데 인민군은 1965년 10월 24일,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초고속 진격으로 늪지를 우회, 북라이카 내부로 진격한다. 동시에 늪지의 인민군을 공격하려던 제국군도 인민군 해군, 공군에게 두들겨 맞는다. 이로 인해 제국군 주병력은 치명타를 맞는다. ====베저부르크 포위전==== 베저부르크라는 북라이카의 도시에서 제국군은 결집, 인민군의 날개를 자를 작전을 세운다. 목표 대상은 인민군 제3집단군. 베저부르크 시는 시가지이고, 험준한 산악으로 둘러싸여 있어 진입로가 한정되어 있었다. 이에 제국군은 포위진을 쓰면 유리하다고 판단해 이곳을 결전 장소로 정한다. 그러나 인민군도 계획을 수정한다. 공중우세와 첩보전, 전황 분석을 통해 제국군의 목표가 베저부르크라는 것을 눈치챘다. 먼저 45번 국도와 49번 국도에서 행군 중인 제국군 4개 사단의 뒤를 포격과 폭격으로 막아 고립시켰다. 4개 사단은 하는 수 없이 베저부르크로 진입한다. 베저부르크를 포위하려는 인민군을 처음으로 가로막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포위된 제국군 4개 사단이었다. 북쪽 입구로 진입한 그들은 베저부르크를 포기하고 그대로 진군해 남서쪽 입구까지 전진했다. 포위하는 양날개의 허리가 끊길 뻔했으나, 인민군은 북쪽 입구로 전진해 제국군의 뒤를 노린다. 제국군은 결사항전했지만, 1965년 11월 7일 패주한다. ====증류수 작전==== 북라이카는 수도 방위를 위해 증류수 작전을 발동한다. 이는 북라이카 네벨스부르크 제3방면군 사령관 울프 하이만이 세운 작전이었다. 민간인을 포함시키고 주병력도 민간인으로 위장한 후, 네벨스부르크를 주력군이 포기하는 것처럼 위장한다. 그런 다음 네벨스부르크 내의 인민군을 한 점으로 유인, 역으로 격파하면 끝인 작전이었다. 제국재상, 군무상서가 모두 찬성하였으나 황제는 그 유인할 한 점이 황궁이라는 사실에 경악한다. 그러나 재상은 수면제를 먹여 황제를 납치 후 네벨스부르크 탈출에 성공한다. 증류수 작전의 클라이맥스가 오르는 1965년 12월 22일. 인민군은 황궁을 점령하고 자축한다. 그들은 북라이카 입장에서는 치욕스럽게도 황좌를 불태우는 일을 저지른다. 그러나 그날 밤 이어진 북라이카의 집중 폭격, 포위섬멸전은 인민군을 피떡으로 만든다. 훗날 살아남은 인민군의 한스 바데로프 중사는 "황궁이 불바다가 되었다. 정전부터 별궁까지 무차별적으로 포탄과 항공폭탄에 맞아 파괴되었다. 황제에 대한 존경심은 승리 앞에서는 눈 멀어 버렸다." 라고 회고했다. 남라이카는 공군을 동원해 폭격을, 병력 충원을 통해 포위를 막아 보려고 했다. 물론 제국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규모의 폭격 작전을 양동작전 삼아, 위장공군 병력을 남라이카 수도에 묶어두었다. 또 인민군의 보급선을 줄줄이 끊으며 처절하게 싸웠다. 결국 보급, 병력손실 등의 타격 때문에 인민군은 후퇴하며 증류수 작전은 성공으로 남는다. 여담으로 사태가 해결된 뒤 제국재상은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렸으나 황제는 5분 안에 울음을 그칠 것을 전제로 그를 용서했다는 풍문이 있다. ====백색 작전==== ====황색 작전==== ===종전=== 2년 동안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라이카 본토는 초토화되었다. 군인 사망자가 52만 명, 민간인 사망자가 540만 명이 나온 대규모 전쟁이었다. 민간인 피해를 키운 요인으로는 다양한 요인이 지목된다. 1. 지역감정 2. 대규모 공습 3. 소모전 구도 1967년 1월 9일, 북라이카의 탄저균 병기가 남라이카의 수도 발즈부르크 시를 강타했고, 15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에 북라이카와 남라이카 양국에서 반전 여론이 속출했고, 카를 항구 선상반란을 시작으로 양국 내에서 반란들이 터져나온다. ===분단=== 탄저균으로 대규모 인명이 살상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미합중제국, 루이나, 사비에트 등은 휴전을 제안한다. 남라이카 측은 1967년 2월 3일, 북라이카 측은 2월 5일에 이를 승낙함으로써 인치란트 전쟁은 종결된다. 남라이카 지방에는 에위그힐켄이 건국되고 그 즉시 유엔에 가입하게 된다. 북라이카 지방에는 라이카 제국 그대로 존재하나, 입헌군주제로 전환된다. ====북라이카==== 종전 후 북라이카 황실은 권위가 크게 추락했다. 탄저균 병기가 황제의 주도로 인해 투하된 것이 밝혀졌고, 이를 부인하는 황실은 민중에게서 외면당했다. 의회와 내각은 전쟁 전에도 자신들의 권력 확대를 요구했지만, 종전 후 이들은 시민 혁명을 일으키며 황실의 단순한 상징적 위치만을 인정하게 된다. 내각의 수장, 블룸하르트 리히텐은 황궁으로 향하여 황제에게 서명을 요구한다. 황실은 근위대를 동원해 내각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리히텐은 대규모 경비대와 헌병대를 동원하여 무차별 진압을 가했다. ==현대== 황제는 상징적 위치로만 남아 있겠다는 2월 6일 선포문에 서명하고, 북라이카는 내각책임제 국가의 길을 걷게 된다. 황제가 직접 내리던 귀족 작위는 모두 상징적인 이름으로만 남게 되었고, 황실 예산은 내각에 의해 제한과 견제를 받게 된다. 황제는 2월 6일 선포문에 서명할 당시 제국재상과 국무상서, 군무상서 3요직의 임명식은 앞으로도 황실이 주최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모두 내각에 의해 선출되지만, 국민의 혼란과 오랜 전통을 깨지 않고자 황제가 형식상의 임명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내각은 이를 받아들였고, 오늘날까지도 3요직은 황제가 형식상 임명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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