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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베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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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랜드사]][[분류:빌베른]] [목차] [clearfix] == 개요 == 빌베른의 역사에 관한 문서. == 선대 == 기원전 8세기 당시로, 루이나 남하한 켈트계열 민족과 동일집단으로 추정되는 무리가 본 지역 최초의 정착민으로 확인된다. 이후 이오니아(이요냐) 및 아카이아(아카예야)계열 민족과 여러 인도유럽어 화자들이 정착해서 유전자로 짬뽕 볶던 땅이였다. 이때의 유적은 니에미이시 TUJPATERRE'(튀파테르)언덕의 ㅈ만한 궁전인 NUEVXXVITXQEIJ'(눼빗게이이)궁전이 있으며 일부 기둥에는 벽에 바른 페인트도 0.74mm정도 남아있다! 물론 기원전 8백년경 바다민족(신동경)의 침입이 지중해를 넘어 랜드해협까지오며 겁물들을 다 조사ㅏ나버려서 조사하기가 드럽게 힘들어졌다. == 고대(빌베레나 헬레니/로마니) == 고대 그리스부터 몇몇 폴리스들이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지속적으로 지중해문명과 교류하며, 기원전 50년경 율리우스 카이사르(율리우 사예세리)의 정벌 이전까지 그리스문명의 랜드해협부의 중심이였다. 당대이 대표적 유적은 현대 니에미이시의 템플라 투 데아 아프루디티이 신전 옆의 원형극장이 있다. 극장을 제외한 신전의 나머지 부분은 로마제국 대에 대대적 보수를 거쳤고, 근대에 들어 재건축을 할때 축대만 발굴된정도이다. 기원전 200년대 후반경 로마공화국이 아이오니아 전쟁을 하며 헬레니아를 (작성중단) == 중세(레푸블리콰 == >“De’spherre’a t' ille', anne’a dej’i qonceptte’emn na’exxsistte’i est. Au, diqxxtte’e magxxj' aquratte'es, qonceptte’a t’ dej’anus por nomme’emn ajrre’i imn’signifiqantte’ est.” -SULTTE’US CRETJINESSE’- (이하 한역) >“이(빌베른) (문화)권역서 ‘기원(신의 년도)’은 존재하지 않는개념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들의 신 개념은 시대의 이름에 들어가기엔 중요하지 않다는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술투 크레치네- 빌베른사의 중세는 로마 멸망이 아닌 로마 본국과의 마지막 연락을 기준으로 280년 로마황제의 마지막 서신 답변(Rescriptte’us Ultimatte’i)을 중세의 시작으로 삼는다. 빌베른 사학계는 이 당시 부터 시대구분을 위해 고전 라틴어 표기를 하지않고 빌베른어로 고유 명사를 표기한다. 3세기의 위기의 바로 중간이였기에 브리타니아 이상으로 로마 본국과는 거리가 있던 랜드해협에 로마가 통제권을 잃는것은 당연한 수순이였다. 이때 빌베른 총독 모데라테타 암비최우세수(MODERATEST’A AMBITJOUSESX’us)가 빠르게 지방군을 사병화하고 지방의 중앙정부 세력을 처단하여 행정권을 장악하고 로마 본국에는 달랑 통보 서신 하나 보내놓은 체 지방 원로회(데쾨우리아이, Deqjourj’aj)를 승격 및 가소집하여 딕타토루(독재관)직에 오른다. 당시 로마제국이 랜드해협에 손을 놓은 후로는, 빌베른과 콘스탄티노폴과 같은 주변 세계와 교역으로 경제가 돌아가던 도시지역을 제외하면, 루이나와 같은 지역엔 권력공백이있어 켈트인들이 ㅈㄴ 설치고다녔고 명목상 아직 로마영토이던 빌베른의 암비최우세수는 [[아르타벨의 암살]]을 계획하여 현재의 루이@나를 점령한다. 4세기 초 루이나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암비최세수는 정복전쟁 이후, 내부 지주에게 토지분배에 대한 불만과 사무탁 지협에서의 사랜드제국과의 전쟁 패배로 암살당한다. 당시 빌베른의 군대는 로마의 지방군에서 갈라져 암비최우세수의 명령을 따르던중 그가 암살당하자 일부 지주의 사병으로 전락하였다. 사랜드 제국과의 전투는 겨우 지형으로 방어만 하던 수준이였으며 지주층은 사랜드와 평화조약을 맺어 군인 유지비를 줄일 생각이였다. 이로 불만과 위기의식을 가진 상당수의 직업군인이 생겼으며, 이때의 빌베른 및 기타 랜드해협의 로마 행정범위는 거대한 영토에 내실이 부실한 공화정의 무언가였다. 임시 호민관 이살템 호미누에시(JIQUEXXSALTEM’ HOMINUESTTE’i)는 이때를 노려 군인 개별에 토지 균등 분배를 약속한 뒤 반대파 지주들과 귀족 일동을 협력파(보수파 귀족)와 암최우세수 사후 위기였던 데쾨우리우들과 모의하여 제거한다. 이후 호미누에시는 [[이살템 개혁]]을 추진하여 랜드해협내와 주변국과의 교역에 집중하고 체제를 안정시켰으며, 빌베른이 자급자족을 유지하며 로마 중앙정부와의 연결을 기다릴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이러한 명목상 로마의 숙주로 남아있던 임시 체제는 4세기 후반부터 5세기까지 지속된다. 이 중앙정부가 부재한 비상체계로 유지되는 안정기 동안 빌베른은 본국으로 총 12차례 연락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5세기 초, 로마 중앙정부, 특히 동서 분할 이후 서로마는 랜드해협 영토에 관리 포기를 선언한 상황이였다. 심지어 밀라노 칙령과 콘스탄티누스 칙령으로 빌베른 과 로마본국의 문화적 괴리는 이미 상당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빌베른은 빈번히 사절단을 보내고 있었으나 매번 선박이 좌초되거나 유행병에 뒤져버리는등 로마와의 연락이 어려웠었다. 5세기 중반, 로마시에 첫번짜 빌베른 연락단이 파견에 성공되었으나 정부가 라벤나로 이동한 탓에 라벤나로 가라는 쓴소리만 듣고 동로마 통치 하의 알렉산드리아에 경유하여 동서로는 분열된 본국의 소식과 기독교 사회와의 조우만 한체 돌아가야했다. 당시 총독 승계자 카니필리우이 프로디토리우와 데쾨우리우(임시 원로원)들은, 지난 몇백년간 이어진 임시 조치를 정@상화하기 위해, 기독교화된 양 정부중 최종 통수권자인 황제를 어디로 인정할지에 대하여 회의를 소집하고 로마시의 정부기관이 직접 이전되었다 판단되는 라벤나의 서로마 황제를 최종 통수권자로 인정하였다. 허나 480년대, 비잔티움을 경유하여 라벤나로 2차 파견을 했을때 서로마는 오1도아케도르의 점령으로 로마시와 정부가 폭4해버린 상태였다. 동로마의 알렉산드리아를 경유하여 빌베른으로 돌아온 2차 파견단의 보고를 들은 빌베른 정계는 그 기단이 사라진 상태였다. 기존 빌베른의 정치체제는 임시 원로원을 구성하는 데쾨우리우들, 일부 도시대표와, 평민회를 구성하는 대표들과 호민관, 기존 로마 중앙정부에서 독재관 및 황제의 역할을 대행하는 최고 통수권자인 총독으로 구성되었는데 임시적으로 빌베른 지방 정부에 정당성을부여하는 로마 본국이 분단된 상태에서 수도등 차악으로 선택한 서로마의 권한이 소멸한 상태이기에, 빌베른은 자신을 로마의 본토가 아님에도 유일한 로마의 잔존하는 행정권역으로 정의하는 꼴이 되었다. 빌베른 이에 당시 총독이 된 프로디토리우의 황제 선포를 주장하여 본토를 빌베른으로 두자는 캄피톨랴파와 독립을 주장하는 일부 귀족을 위주로 구성된 니에미이파가 형성되었다. >“Qoxqe administratj’a patrj’i exstinxtte’ estte’witur, magxxjistratte’us potestte’i administrativwe’es qe’emn jamn exserqerre’bant pergxxje’es.[*中2. “본국 행정부가 소멸하였기에, 행정 권력의 주체를 빌베른이(그녀에) 이행하여 계속 집행한다.”]” -RETARDDE’US DEPOLITJIQUEMME’(레타르두 데폴리치켐)- 니에미이파를 포함한 일부 귀족을 제외하고, 시민과 캄피톨랴파를 제외한 보수파 귀족들은 로마라는 정당성이 국가 통치의 중심이라 여겼기에 니에미이 파를 밀어내고 489년 실권자인 당대 총독 프로디토리우가 명목상 로마의 유일하게 남은 총군단장, (암살당하지 않은)원로일동, 호민관의 허가를 받아 황제에 즉위하고 이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로마 황제에 통보한다. 이를 기준으로 빌베른은 동로마 및 본토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로마시를 명목수도로, 캄피톨랴를 도읍으로 하는 빌베른 제1제국 시기가 시작된다[*1. 물론 독립선언이라 보기엔 어렵고, 당시 빌베른 내부의 정체성은 과거 로마제국의 연장선상이였기에 황제 선포를 통하여 서로마의 행정 권한을 분할-이전한것으로 이해하는것이 옳다.]. 이때동안 빌베른은 루이나등 야만인 정벌, [[기독교 금지]], 랜드해협 내 도로 연장, 사산왕조 페르시아 및 인도등 동방 무역로 확보등 랜드해협내 패권 확보, 상업 경제 활성화와 내치 안정에 공을 들인다. 6세기까지 지중해 점령으로 바쁘던 동로마가 [[제정 사랜드]]등 각종 이교도 강대국이 넘쳐나고 물리적 거리또한 멀던 랜드해협에 관심을 두는것은 무리였고 그 후로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와의 경쟁이 중요해졌기에 빌베른과의 통합은 과거 로마제국의 숙주였다는 점 만으로 제국의 국교를 인정하지않는 타국을 다스리는것과 같았기에, 또한 점렴이후에도 몇백년전 정치체제를 기준으로 하는 현지 보수귀족층의 반발에 의해 사실상의 자치정부를 운영하는, 사실상 동로마 황제를 도장 찍는 기계로 보는, 이들입장에선 상당히 ㅈ같은 놈들이였기에 빌베른은 큰 갈등을 겪지않고 제3자의 국가로써 지중해 무역에 참가할수있었다. 제 1 제국기, 8~9세기를 기점으로 빌베른의 주 무역상대는 구매력이 ㅈ창난 서유럽이 아닌 칼리프 선출로 대세이던 아랍세계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로마를 위시로 한 동방세계로 전환되게된다. 빌베른은 이때 각종 국가에 상인과 상선 보호를 명목으로 무역소를 설치하거나 위장군함을 정박시키고, 항구 이용권을 사거나 점거하여 엠포류르(Emporjumnxxrre’)는 국외 무역항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동로마의 지배력이 약화되던 시칠리아, 남부 이탈리아 항구 도시의 보호를 발판삼아 통치권역으로 편입시키는등 근대까지 이어지는 해군국가의 초석을 놓게된다. 이때 당시 메비테리(現공서당)는 랜드해협의 관문으로써 빌베른이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랜드 내해의 군사-무역거점으로 크게 융성한다. 9세기 후반 동로마 중흥기 당시 동로마 황제는 서방 교황권, 무슬림등의 여러 세력과 분쟁중이였고 빌베른이라는 또 다른 이교도 세력과 경제적으로 경쟁중이였다. 심지어 서방 교황은 프랑크왕 샤를마뉴에 황제 직위까지 수여를 하여 동로마의 신경을 긁고있었다. 이때 빌베른은 메비테리시 내 기독교 선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황령 로마시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제 4차 본토 연락단을 파견한다. 교황에게 황제 칭호 사용에 대한 불만을 전하러 가던 연락단은 당연히 쫒겨났고, 이때 교황령에 입장한 본토 연락단은 본국 귀환도중 사망한다. 동쪽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는 연락단은 빌베른 정부에 황제 칭호 상호 인정이란 뜻밖의 소식을 전하게 된다. 서방 교황의 황제 칭호 수여에 불만이 있었으며 상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수 있는 기회라 생각한 양 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만 방문하는 제 5차 본토 연락단이 파견된 후 [[두오로메-사예세라이 협정]](Dueo-Romme’-Cajeseraj’i)을 체결[*2. 사예세라이 협정은 크게 무역-종교부분과 행정부분으로 나뉜다. 행정부분에선 양측 행정부 통치권 인정, 양측의 로마 계승 정당성과 황제권위를 인정하며 황제의 즉위는 양측의 통보와 답신이 공식화, 이를 위배하는 서방의 황제와 교황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것이다. 어찌보면, 로마 황제의 정당성이 종교에서 다시 시민 여론으로 돌아간것이다. 무역-종교부분은 빌베른 관할내 동로마 정부의 공식적 선교활동 금지, 빌베른 파간(Paganne’)의 동로마 선교 금지, 양측 종교법 적용 예외 적용 대상을 서로의 국민으로하는 국내법조항의 신설과 유지, 지중해 항구 공동관리등이 존재한다.]한다. 로마 본토라 볼수있는 그리스쪽 행정부에서 빌베른의 정당성을 인정받았기에 의미가 크다고 볼수있다. 물론 빌베른은 기독교가 아닌만큼 레반트 항구만 보호하고 국경 보호는 ㅈ도 관심 없었다. 동로마가 셀주크 제국에 레반트를 털리고 서방교황한테 서랜친 11세기, 서신만 보내고 성지 탈환과 국경 방어는 ㅈ도 안도와주는 빌베른으로는 버틸수없던 동로마를 지원하는것에,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다. 십자군은 빌베른에 동로마 황제의 요청인것을 이유로 빌베른의 적극적 지원과 항구 개방을 요청했지만, 빌베른은 사예세라이 협정이 종교와 무관함을 강조하며 두 로마는 세속적인 관계이기에 특혜를 줄수 없음을 선언하고, 셀주크와 십자군 양측을 상대로 무역을 이어간다. 이는 13세기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는 ㅂㅅ같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지된다. 4차 십자군 원정, 빌베른 정체 일동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초장, 주 무역 상대이던 이슬람을 공격하는 쪽과 동로마제국 정부를 희생하는 것에 많은 의견 충돌이 오갔고 그 과정에서 공기관 소유 목제 테이블 4구가 파손되었으며, 캄피톨랴 고위직 21명이 암살당한다. 물론 함락 소식을 전달 받은지 5일만에 함락주체가 십자군으로 파악되었단 소식을 들은 후엔 동로마 망명정부를 지원하고 트라키아 정상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이 과정에서 동로마와 공동관리하던 항구의 사용권을 사실상 전용하게되었고 중동-이태리-갈리-이스파니 지역과의 교역이 활발해졌다. 14세기, 몽골제국은 랜드 최대강국이던 제정 사랜드의 동쪽을 백지상태로 되돌린다. 이때 빌베른은 비상작물인 쌀의 공급이 ㅈ박아 버리는데 랜드산 분화로 통상작물 밀의 생산과 일조량이 감소, 기온감소가 발생하여 자영농, 도시빈민을 위시로 한 [[사이바우 봉기]]가 발생, 사랜드 전선에서 물리다가 사무탁 지협으로 말을 돌린 몽골군의 침략까지 받는다. 국경에서 벌어지던 몽골과의 전투서 12만 이상의 시민 자원병이 사망하나, 몽골과의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으며 내륙피해는 크지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로 빌베른 황제직은 잠시 공석이였으며 경제력이 크게 감소했다. 또한 루이나 - 플로렌시아등 농업생산력이 높고 민족 정체성이 강한 지역들을 대부분 잃게되었다.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복구과정에서 평민회 권한이 대폭 강화되고 자유민의 가치가 상승하였다. 노예경제는 곡물 농업부문등서는 완전히 근절되지는 못하였으나, 공급의 한계와 데쾨우리(귀족) 계급의 자본 축소로 인하여 자유민과의 계약관계로 재편된다. 또한 동로마의 황제가 5년동안 공식적인 황제로 인정을 못받는 상태였던 계기가 된다. == 근세 == “ 15세기 초, 당시 빌베른은 루이나지역과 플로렌시아 지역의 통제 실패로 대토지에서 곡물 농경지를 운영하던 데쾨우리(토지귀족)계급이 ㅈ박았으며 항구 도시인 메비테리가 르네상스의 서유럽과 교역으로 인해 새 중심지로 떠올랐다. 원로원의 구성층이 반갈당했으니 상인 계급이 속한 평민회 권한이 강해지는건 당연한 수순이였고, 기존 황제의 지지 계층이였으며 자영농의 힘을 대표하던 평민회의 성격또한 자익을 중시하게 변화한다. [*근세1. 여담으로, 기존 데쾨우리 계층이 서유럽의 르네상스 흐름에 영향받아 고전기 학문을 재연구하며 일종의 복고주의 논쟁이 생긴다. 해당 논쟁은 근세-근대 빌베른 인문학의 가장큰 동력이되었다.] 이때, 황제는 데쾨우리(토지귀족)계층과 합의하여 매관행위를 정부 허가하에 용인토록 하는 법령을 낸다. 해당 시점을 기준으로 빌베른의 정치구도는 황제, 원로원(데쾨우리등 구귀족)을 위시로 한 복고[*근세2. 황제(사예세르)직과 원로회 중심의 정치로의 복귀를 의미함.][*근세3. 르네상스때 시작해 19세기까지 계속되는 [[빌베른복고주의논쟁]]에서의 복고와 겹치지만 다른 개념임]파, 상인 연맹과 부상(負商)을 위시로 한 공화파, 일부 황제의 주 지지층이자 18세기에 민주파를 구성하게되는 자영농파로 재편된다. 15세기 중반, 동로마는 오스만 튀르크의 침략으로 소아시아반도를 잃고, 흑해로 가는 길을 잃어, 결국 콘스탄티노폴이 함락되며 멸망한다. 즉 키흑해->동로마->빌베른의 곡물 수입로, 서유럽으로 이어지는 지중해 무역이 둘다 폭4했단 의미이다. 이 시점에서 곡물을 대량으로 공급할수 있었던 계층은 노예를 소유할수있는 복고파 토지귀족 뿐이였기에, 공화파의 사회적 입지가 크게 손상된다.[*근세4. 빌베른의 콘스탄티노폴(메비테리시)이 지금의 이름을 얻게된 계기이기도 하다.] 공화파를 이루는 부상 귀족층은 수입이 반타작난 이 시기를 기점으로 포르투갈등의 국가와 비슷하게 인도양과 대서양 무역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다. 극동과 인도를 대상으로 한 장거리 무역이 활성화된 만큼, 상인연맹과 회사 형성의 초기가 이 15세기 중반이라 할수있다. 의외로 서유럽, 플로렌시아/후제정사랜드/플로렌시아/청평/북산/동사랜드로의 중개무역이 고수입이였기에 공화파 부상 귀족은 반등에 성공할수 있었으며, 고대 노예경제에서 근세 상업경제로 이행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15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까지 빌베른의 상업경제는 점진적으로 크게 발전한다. 특히 인도와 동남아, 남아시아의 항구도시의 상관에 상인 보호를 명목으로 군함을 끌고가 식민지를 건설, 17세기 초의 남미 식민지의 개척[*근세5. 의외로 이때 공화파 부상귀족보다 복고파 테쾨우리 계층이 상품작물 플렌테이션에 적극적이였어서 입지가 올랐다, 임페라토르직(관군운용권 독점)을 겸하던 황제직에, 3?권분립 비스무리하게 정치가 안정되었다.], 에도막부의 데지마와 대청국 광동지역 일부항을 통하여 극동교역에 참가하는등 원거리 무역이 번성을 이루었다. 빌베른의 이 시기를 “1차 해상 호황”이라 부르며, 로마의 후경에서 독자적 정체성을 지닌 해양제국이 됬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호황의 영향은 상업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구조와 정치철학/예술/식문화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상업과 경제 측면에서 빌베른은 무역회사와 플랜테이션 운영단체(노베-라티푼디아)가 그 중심으로써 재편된다. 인도/인지/극동의 향신료/도기/비단/은/구리등의 교역은 빌베른동인도회사등 기업을 중심으로 하여 [[루이나 오리엔탈 컴퍼니]]와 경쟁하며 항구 도시를 점거하던 형태에서 실질적인 식민지를 통치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남아메리카 플랜테이션은 복고파 데쾨우리 계층의 라티푼디(라티푼디움)운영의 연장선상이였는데, 중세의 곡물위주의 농업에서 설탕/커피/담배/차/목재등 상품작물로 이전되었다. 군의 전권은 임페라토르직에 쏠려있었고, 사병은 빌베른사 전체에서 오랬동안 금지되어있었기에, 황제의 군사적 협력이 필요한 양 파는 세금을 지불하고 이가 시민 복지와 자영농 성장에 투자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이에 조선, 금융, 무역, 제당, 제철등 근대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산업이 크게 융성한다. 사회구조측면선 앞에 서술하였듯, 상업 경제의 활성화에 따른 상업 귀족층의 형성이 큰 영향을 끼친다. 데쾨우계층과 부상귀족계층 모두 여전히 중앙조세의 영향력 하에 있기에 소작농 및 도시소상공인 계층의 성장기반이 마련된다. 이는 본토서 개인을 중심으로 한 경제주체의 단위가 완성되게 하였고, 기존의 가부장적 가구당의 사회가 해체되는데 기여하였다. 18세기의 근대 합1리주의와 만민의 평등과 결합하여 여성인권 및 본토의 노예 감소 추세에 크게 기여한다[* 어쩌면 이 변화는 근대 빌베른에 만연해진 성적 문란과 반가부장적이고 향락적인 페티시즘 중심의 특징의 나비효과가 되었던건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것이 18세기 초 빌베른 곳곳에서 번성하던 민간 소극장이다, 기존의 서민오락은 심히 공적인것으로써 콜로세움과 같이 스펙타클과 규모를 보여주는것이 특징이였으며 각종 공연 예술은 포룸 혹은 극장같은 공적이고 수익이 관여되지않은 곳 위주로 이루어졌다. 민간 소극장들은 그에 반해 종합적이고 비교적 소박한 극문학을 상영하였고, 건축적으로 이에 맞추어 개방성보단 몰입을 돕기 위한, 좁고 폐쇠적인 구조를 취하게 되었다.]. 정치와 철학 측면선 기존의 황제-평의회-원로회의 구도가 유동적이고 개인을 중심으로 변화했다는것이다. 황제와 국가회의, 계급에 대한 인식또한 절대적인 군주와 신분보단, 공화정의 전통에 기반하여 정당히 이루어져야한단 기조를 가진 움직임에 의해 변화되었다[* 원래도 군주가 국가를 소유한다는 인식이 약했던 만큼, 빌베른이 로마제국의 후신이라기 보단, 동일한 국가란 주장이 다시 주목받고, 중세동안 축적된 고전기 로마에서의 변화를 번복하는 새로운 인문사조가 시작된다; [[신고전주의(빌베른)]]즘으다.] 이러한 변화는 루이나와 서유럽에서 발달하던 계몽주의, 사회계약론과 자연법의 적극적 수용, 18세기의 근대적 합리주의와의 결합으로 나타나게된다[* 19세기 말의 빌베른 공화국의 소란스럽지 않은 개건은 이러한 점진적인 변화의 흐름이 큰 영향을 끼친것이라 할수있다.]. 3대 혁명[* 쌀나라 독립혁명, 불랑기 혁명, 명예 혁명즘으다.] 예술은 근대에 [[신고전주의(빌베른)]]으로 수렴하게되는 고전 로마기 겁축에 대한 재연구가 시작되어, 기존의 형식주의와 공공주택 숭상에서 벗어나, 주택과 상업건물등 민간적이고 소박한 곳에서도 고전기 로마건축을 접목하는 까티스타일(QEQONXDOMME’ QATTE’i)의 유행을 불러왔고, 민간 주도의 소극장과 극문학, 음악및 미술인이 개인으로써 성공할수 있게되어 어쩌면 고전 그리스기의 독립된 예술적 대상으로써의 미술과 음악의 부활을 불러왔다. (일본이랑 극동무역하다 생긴 문화에 관련된 내용을 써야하는데 까먹음) 16세기 아메리카 발견을 거친 서구세계에서 가장 극적으로 변화한 분야는 요리일것이며 이는 빌베른도 차이가 없다. 근세에 이뤄진 빌베른 식문화의 변화는 2개의 요인이 있다, 신대륙의 작물과 쌀, 플랜테이션과 서민음식. 감자와 토마토가 지중해의 식문화에 크게 영향을 끼친것을 넘어 장기적으로 인구까지 늘려준것은 유명하다. 하지만 빌베른은 사무탁 지협등 한정적인 곳에서 비상식량 내지, 노예식으로 쓰던 쌀을 대량으로 기르게 된것은 근세 이후의 일이다. 쌀은 도정하지 않았을 때엔 1~2년정도의 꽤나 엄청난 보관기관을 가지는데, 특히 인도 항로와 남미 항로가 개발된 이 시대의 빌베른은 쌀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노예식으로 사용한다[* 이것때문에 빌베른에서 현재까지도 유명한 식품회사들은 대부분 쌀 도정에서 시작하였즘으다. 장기적으로 빌베른 사회가 서양에 비해 엄청난 강점을 가진 계지, 하지만 이것때문에 기계 부분의 산업화는 좀 뒤쳐진다.]. 이것이 어느정도냐면 근세 당시의 빌베른보다 현대의 빌베른이 인구가 더 적은 정도이다. 신작물중 토마토는 값싼 소스와 감칠맛을 의미했다. 가룸, 하드치즈와 같은 고대와 중세의 ㅈ창나게 많은 소금과 발효, 테크닉, 시간, 노동력이 있어야만 얻을수 있던 감칠맛이 드디어 가열된 신선한 토마토 정도로 쉽고 싸진것이다. 현재 빌베른 요리의 핵심인 계절감이 강조되는 야채와 상시 구비된 감칠맛 및 지방맛 보조재가 이때 완성된다. 비록 노예식이긴 하지만 당대 빌베른의 대표적인 상은 일종의 케챱을 넣고 볶은 죽인 알리체 토마티(ALICCE’ TOMATTE’i)와 소금, 생양파가 들어있을것이고, 아마 당시 식문화의 특징이 가장 잘 들어날것이다. 18세기동안 빌베른의 해상무역은 영국, 루이나와같은 국가와 경쟁하며 하락세를 보이게된다. 물론 제국의 몰락 자체는 압도적인 인구부양력으로 매우 늦춰졌고 여전히 많은 유럽국가보단 좋은 효율을 보여주었다. 문화와 기술은 중간에 계속 혁신과 발전이 있긴했지만 17세기의 압도적인 신흥강국으로써의 면모는 보여주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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