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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랜드 전쟁/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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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랜드사]] [목차] [clearfix] == 개요 == [[1차 랜드 전쟁]]의 배경을 다루는 문서. 1차 랜드 전쟁은 1958년 3월 9일의 포르틸락 사건을 직접적인 계기로 3월 12일 시작되었지만, 그 뿌리는 19세기 말부터 이어진 [[콘스탄티노폴]] 조차지 체제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랜드해협의 세력 재편에 있었다. 이 문서는 포르틸락해협의 지리와 조차지 체제, 1950년대의 세력 변동, 1957년의 해협 항행 규칙, 두 진영의 형성, 그리고 개전 직전의 사건을 차례로 다룬다. == 포르틸락해협 == === 해협의 지리 === 포르틸락해협은 [[체르드]]와 [[마베라|라 마베라 연방]]이 면한 랜드해협 북부의 내해를 중앙 해역과 잇는 유일한 수로다. 체르드와 라 마베라의 입장에서 이 해협은 중앙 해역과 바깥 바다로 나가는 단 하나의 바닷길이었고, 해협 양안에 걸쳐 있는 콘스탄티노폴의 수역을 거치지 않고는 어떤 배도 내해를 드나들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해협의 통항 문제는 고대부터 랜드해협 정치의 핵심이었다. 로마는 이곳에 함대 기지와 세관을 두었고, 로마가 물러난 뒤 도시를 병합한 [[빌베른]]은 해협 요새로 통행을 통제하며 통행세와 관세로 해외 영토 경영 비용의 상당 부분을 충당했다. === 조차지 체제 === 19세기 후반 빌베른 본국이 정변과 혼란에 휩싸이자 콘스탄티노폴 총독부는 해협의 치안을 유지할 능력을 잃었다. 열강은 자국 상인이 입은 피해의 배상, 빌베른 정부에 대한 차관, 해협 항로의 보호 등을 명분으로 도시의 항만 구역을 하나둘 떼어 갔고, 19세기 말에는 [[루이나]]·[[플로렌시아]]·체르드를 비롯한 아홉 개 나라가 조차지를 두게 되었다. 조차지는 시가지 면적의 약 40%, 부두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다. 부두를 쥔 조차국들은 해협을 지나는 배의 도선, 정박, 연료 보급까지 관할했다. 조차국들은 정기적으로 '''조차국 회의'''를 열어 항만 사용 규칙과 항행 질서를 정했는데, 이 회의가 사실상 해협의 관리 기구 역할을 했다. 해협의 통항 질서를 정하는 것은 도시의 주인이 아니라 부두의 주인들이었다. 1945년 6월 2일 빌베른은 루이나와 「콘스탄티니예 양도 협정」을 맺어 콘스탄티노폴의 주권을 넘기려 했으나, 같은 해 8월 27일 도시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협정은 물거품이 되었다. 루이나는 이후에도 남항구 조차지와 자국 기업 하트웰 광업의 타우로 광산 채굴권을 지켰다. 1956년 권력을 잡은 스타투드라는 조차국들의 차관을 받는 대가로 1960년대 초부터 만료될 예정이던 조차 계약을 일괄 50년 연장해 주었다. 전쟁 직전의 해협은 약하고 부패한 현지 정부 위에 외국 조차국들이 올라앉아 운영하는 구조였다. == 전후 세력 관계의 재편 ==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랜드해협에서 가장 경계받던 나라는 라 마베라 연방이었다. 라 마베라는 해협 곳곳에 속령을 거느린 오랜 강국이었고, 1949년 수립된 [[사비에트]]는 1950년대 초까지 루이나·플로렌시아와 함께 라 마베라를 견제했다. 1952년 세 나라의 압박으로 [[고랜드]]가 라 마베라에서 떨어져 나와 바티스타 왕가의 왕국으로 독립하면서, 라 마베라는 루이나와 플로렌시아에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이 협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비에트는 1950년 [[소련]]과 동맹 조약을 맺고, 1956년에는 [[청평]]과 청소합작 협정을 체결하며 빠르게 힘을 키웠다. 랜드해협 남안에 자리한 사비에트에게 중앙 해역은 바깥 세계로 나가는 길이었지만, 그 바다는 루이나 해군이 지배하고 있었다. 사비에트가 해협 체제에 불만을 품은 체르드·라 마베라와 가까워진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1957년 12월 19일 사비에트가 첫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고 이 위성이 루이나 해군기지 상공을 하루 여섯 차례씩 지나가자, 루이나는 사비에트를 직접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루이나는 1950년대 후반부터 랜드해협에서 패권적 지위를 다져 나갔다. 1957년 하쿠센 조약으로 [[북산]]에 대한 실질적 통제권을 확보했고, 플로렌시아와의 해군 협력도 강화했다. 한편 1956년 앨빈 C. 요크의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선 [[웨스타시아]]는 라 마베라와의 오랜 적대 관계 속에서 플로렌시아와 손을 잡았다. == 해협 항행 규칙 == 1955년 무렵부터 사비에트는 체르드와 라 마베라에 무기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사비에트 항구를 떠난 수송선은 중앙 해역을 가로지르고 포르틸락해협을 지나 내해의 항구로 들어갔다. 조차국들은 항만 사용 규칙으로 상선을 통제할 수는 있었지만, 조차국이 아닌 나라의 군함이나 호송 선단을 멈춰 세울 근거는 갖고 있지 않았다. 1957년 9월 조차국 회의는 루이나와 플로렌시아의 제안으로 '''해협 항행 규칙'''을 채택했다. 조차국이 아닌 나라의 군함은 해협을 지나기 30일 전에 조차국 회의에 통보해야 하고, 무기·탄약·군용 연료를 실은 상선은 조차국 순찰대의 검문을 받아야 하며, 이를 어기는 선박은 조차국 군함이 저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규칙은 체르드를 비롯한 소수의 반대 속에 다수결로 통과되었고, 흔히 '''9월 규칙'''이라 불렸다.[* 체르드 역시 조차국이었기 때문에 조차국 회의에서 반대표를 던질 수 있었다. 체르드는 이 규칙이 사비에트 무기 수송을 막기 위한 것이며, 결국 자국의 안보를 조차국 다수에 맡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규칙은 거센 반발을 불렀다. 사비에트는 이를 '해협 봉쇄의 합법화'라고 비난했고, 체르드와 라 마베라는 해협의 자유 통항 원칙을 침해하는 조치라며 항의했다. 정작 해협의 주인인 콘스탄티노폴의 스타투드라 정부는 조차국들의 차관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해협의 규칙이 도시의 동의 없이 외국들 사이에서 정해졌다는 사실은 훗날 콘스탄티노폴이 [[오로아 조약]]의 해협 조항을 거부하는 근거가 되었다. == 동맹의 형성 == === 동맹국 === 1957년 12월 사비에트·체르드·라 마베라·고랜드는 '''4국 상호원조 조약'''을 맺었다. 조약은 가맹국 한 나라가 공격받으면 나머지 나라가 군사적으로 지원한다는 상호원조 조항과 함께, 해협 항행 규칙의 철폐를 공동으로 요구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사비에트는 가맹국들에 무기와 군사고문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조약의 부속 비밀 의정서에서 라 마베라는 고랜드의 독립과 현재 국경을 인정했다. 1952년 이후 이어진 두 나라의 갈등을 사비에트가 중재해 봉합한 것으로, 이로써 동맹국 네 나라가 하나의 진영으로 묶일 수 있었다. === 협상국 === 협상국은 하나의 조약이 아니라 여러 개별 협정이 겹쳐 만들어진 진영이었다.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는 1950년대 중반부터 해군 협력을 이어 왔고, 플로렌시아와 웨스타시아는 상호방위 협정을 맺고 있었다. 1958년에는 루이나·빌베른·북산이 랜드 안보 3국 동맹을 맺었다. '협상국'이라는 이름은 이처럼 느슨한 협상 관계로 이어진 나라들을 가리키던 언론의 표현에서 굳어졌다. === 유고랜드의 괴뢰국화 === 1958년 1월 9일 웨스타시아는 [[유고랜드]]에 친웨스타시아 정부를 세우고 사실상의 괴뢰국으로 만들었다. 유고랜드는 20세기 초 마베라령 페잔으로 건너온 한국계 이주민들이 1941년 세운 나라로, 라 마베라와 깊은 연고(네거티브)가 있었다. 라 마베라는 숙적 웨스타시아가 옛 연고지를 가로챘다며 격분했고, 유고랜드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맞닿은 사비에트와 고랜드는 해협 남안에 협상국 쪽 거점이 생긴 것으로 받아들였다. 동맹국은 이때부터 사실상 전시 태세에 들어갔다. == 포르틸락 사건 == 1958년 3월 9일 체르드행 무기를 실은 사비에트 수송선 3척과 이를 호위하던 구축함 2척이 해협 항행 규칙에 따른 사전 통보 없이 포르틸락해협에 들어섰다. 해협 입구를 순찰하던 루이나 구축함 2척이 정선과 검문을 요구했으나 선단은 이를 거부했고, 루이나 함정이 경고 사격을 하자 해협 연안의 체르드 해안포대가 루이나 함정을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이 교전으로 루이나 구축함 1척이 격침되어 승조원 100여 명이 숨졌고, 사비에트 선단은 체르드 포대의 엄호를 받으며 해협을 빠져나가 내해로 들어갔다. 3월 10일 루이나의 페닝턴 행정부는 체르드에 사과와 배상, 해협 연안 포대의 철거를 요구하는 48시간 기한의 최후통첩을 보냈고, 플로렌시아가 이를 지지했다. 체르드의 아르카디 이바노프 대통령은 자국 영해에서의 자위권 행사였다며 최후통첩을 거부했고, 사비에트는 4국 상호원조 조약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선언했다. 1958년 3월 12일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는 체르드에 선전포고했다. 같은 날 사비에트·라 마베라·고랜드가 조약에 따라 루이나와 플로렌시아에 선전포고했고, 웨스타시아와 빌베른도 동맹국에 선전포고하면서 랜드해협 전역이 하루 만에 전쟁에 휩쓸렸다. == 전쟁 책임 논쟁 == 협상국 쪽 역사서는 사비에트와 체르드가 해협 항행 규칙을 고의로 어기고 먼저 포격을 가해 전쟁을 일으켰다고 서술한다. 반면 사비에트와 체르드의 역사서는 해협 항행 규칙 자체가 불법이었으며, 루이나가 먼저 경고 사격을 했고 최후통첩도 처음부터 거부될 것을 알고 보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대체로 양측 모두 확전을 피할 기회를 놓쳤다고 본다. 특히 해협의 주인인 콘스탄티노폴을 빼놓은 채 조차국들끼리 통항 규칙을 정한 해협 체제는 처음부터 정당성이 약했으며, 이 구조가 해협 문제를 외교가 아닌 무력으로 풀게 만든 근본 원인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 각주 == [각주]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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