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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렌시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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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랜드해협]][[분류:플로렌시아]] [목차] [clearfix] == 개요 == [[플로렌시아]]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플로렌시아의 역사는 크게 네 층으로 나뉜다. 460년 폴로놀족이 세운 폴로놀 왕국에서 1706년 왕정 폐지까지 이어진 약 1,250년의 왕정, 1706년 혁명과 1711년 시민혁명으로 시작된 공화정과 해외 식민제국의 시기, 산업화 이후 세 차례의 경제성장과 두 차례의 공황을 거친 경제 강국의 시기,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두 차례의 랜드 전쟁을 거쳐 [[NLTO]] 창립 회원국으로 자리 잡은 현대다. 국호가 바뀐 것은 1706년 한 번뿐이지만, 그 한 번의 개명은 이전 시대 전체를 '폴로놀'이라는 이름 아래 묶어 두는 경계선이 되었다. 플로렌시아사를 관통하는 논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왕권과 귀족, 그리고 하층민 사이의 권력 배분이다. 1200년 폴로놀 의회의 성립, 1404년 국왕 주도의 종교개혁, 1706년 혁명과 1711년 시민혁명은 모두 이 배분을 새로 정한 사건이었다. 둘째는 국가와 시장의 관계다. 1876년 공황 이후 정부가 공공사업·통화개혁·복지 제도로 경제에 직접 개입한 경험은 1929년 대공황과 두 차례 세계대전 이후의 재건에서 되풀이되었고, 오늘날 플로렌시아 경제정책의 기본 틀로 남아 있다. 플로렌시아 경제사에서는 근대 이후의 성장을 세 차례의 경제성장으로 나누어 부르는 것이 관례다. 산업혁명과 철도 부설이 이끈 1차 경제성장, 1876년 공황 이후 정부 주도 복구가 이끈 2차 경제성장,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복구가 이끈 1920년대의 3차 경제성장이 그것이다. 세 번의 성장이 모두 위기나 전쟁 직후의 재건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은 플로렌시아 사학계가 자국 근대사를 '재건의 역사'로 부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 선사 시대 == [[랜드해협]]에 사람이 들어온 것은 인도 북부에서 유럽으로 향하던 민족 이동의 일부가 해협 쪽으로 갈라져 나오면서부터로 본다. 해협 일대에서 농경과 신석기 문화가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이 오늘날의 플로렌시아 지역이며, 이 지역에서 시작된 농경은 기원전 300년 무렵까지 해협 전역으로 퍼져 곳곳에 농업공동체의 흔적을 남겼다. 플로렌시아 고고학계가 이 시기를 자국사의 출발점으로 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지역의 너른 평야와 완만한 구릉지는 곡물 재배에 알맞았고, 강 하류의 충적지를 따라 정착촌이 늘어났다. 청동기와 철기가 차례로 보급되면서 정착촌은 부족 단위로 묶였는데, 이 부족들 가운데 훗날 왕국을 세우는 폴로놀족이 폴로놀 평야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폴로놀이라는 이름이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후 수 세기가 지난 뒤의 일이지만, 그 이전부터 폴로놀 평야에는 같은 언어와 장례 풍습을 공유하는 부족 연합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200년대 초 로마의 군대가 오늘날의 [[콘스탄티노폴]] 일대에 주둔했다는 기록이 나타난 뒤, 로마의 화폐와 도기, 포도 재배 기술이 교역로를 따라 폴로놀 평야까지 들어왔다. 폴로놀족 거주지에서 출토되는 로마 화폐와 암포라는 이 시기 교역의 규모를 보여 주지만, 로마가 이 지역을 직접 통치했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4세기 이후에는 [[빌베른]]이 해협 각지로 세력을 넓혔고, 폴로놀족 부족 연합은 이 압력 속에서 더 큰 정치체로 결집해 갔다. == 폴로놀 왕국 == === 건국과 초기 왕조 === 460년 폴로놀족 부족 연합의 수장 오도바르가 왕을 칭하면서 폴로놀 왕국이 성립했다. 건국의 배경으로는 빌베른의 팽창에 맞서 흩어져 있던 부족들을 하나의 군사 지휘 아래 묶을 필요가 흔히 꼽힌다. 오도바르가 세운 베랑 왕조는 이후 600년 동안 왕위를 이었다. 초기 왕국의 군주제는 오늘날 생각하는 중앙집권 국가와 거리가 멀었다. 왕은 부족장 회의에서 추대되었고, 전쟁과 대외 교섭에서는 최고 지휘권을 가졌지만 각 부족의 토지와 재판은 여전히 부족장들이 관할했다. 왕위 계승도 장자 상속으로 정해져 있지 않아, 왕이 죽을 때마다 왕족 가운데 누가 추대될지를 두고 부족장들 사이의 흥정이 되풀이되었다. 6세기 초 베랑 왕조의 왕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교회가 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새 축이 되었고, 수도원과 주교좌를 중심으로 문자 기록과 행정이 조금씩 자리 잡았다. === 통합 왕조의 성립 === 11세기에 들어 베랑 왕조는 잇따른 계승 분쟁으로 힘을 잃었다. 1060년 마지막 왕이 후사 없이 죽자 폴로놀 평야 최대의 영주 가문인 로셀 가문의 고드랭이 고드랭 1세로 즉위했고, 초기 왕조는 이로써 소멸했다. 로셀 왕조는 이전 왕조와 달리 왕권의 기반을 부족 연합이 아니라 왕령지와 국왕 관리에 두었다. 고드랭 1세와 그 후계자들은 반란을 일으킨 영주의 영지를 몰수해 왕령으로 삼았고, 왕령지마다 국왕이 직접 임명한 관리를 보내 세금과 재판을 맡겼다. 부족장 회의는 형식만 남은 자문 기구로 바뀌었으며, 왕위는 장자 상속으로 고정되었다. 플로렌시아 사학계는 이 1060년을 중앙집권 왕국이 성립한 해로 보며, 로셀 왕조는 1706년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646년 동안 왕위를 지켰다. === 십자군과 폴로놀 의회 === 1175년 폴로놀 왕국은 국왕 위그 3세의 주도로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원정은 군사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왕국 안에서 교황의 영향력을 크게 키웠다. 원정에 나선 귀족들은 교회에 토지를 맡기거나 기부했고, 교황청이 파견한 사절은 주교 임명과 십일조 징수에 깊이 관여했다. 이 시기부터 폴로놀 교회는 왕국 안에서 왕권과 나란히 서는 또 하나의 권력이 되었다. 원정의 비용은 대부분 귀족들이 부담했다. 전비와 몸값을 치르느라 빚을 진 귀족들은 국왕에게 그 대가를 요구했고, 1200년 국왕 필리베르 2세는 귀족들에게 특허장을 내려 영지 재판권과 과세 동의권을 인정했다. 이 특허장에 따라 국왕이 새로운 세금을 걷으려면 성직자와 귀족 대표가 모인 회의의 동의를 얻어야 했는데, 이것이 폴로놀 의회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전비 조달을 위한 임시 회의에 가까웠으나 13세기 중반부터 정기적으로 소집되었고, 13세기 말에는 주요 도시의 대표도 의석을 얻었다. 폴로놀 의회는 왕권을 제약하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귀족 특권을 법으로 고정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의회가 인정한 면세 특권과 영지 재판권은 이후 500년 동안 귀족 신분을 규정하는 근거가 되었고, 평민에게 세금 부담이 쏠리는 구조도 이때 만들어졌다. 1711년 시민혁명이 폐지한 귀족 특권의 상당수는 그 기원을 1200년의 특허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지중해 무역체제 === 중세 랜드해협의 국제 질서는 빌베른공화국과 제정 사랜드 사이의 전쟁을 거치며 짜였다. 이 전쟁에서 빌베른공화국이 승리한 뒤 해협에는 폴로놀 왕국, [[라 마베라 연방|라 마베라]], 제정 사랜드, 빌베른 제1제국의 네 강국이 지중해 무역을 나누어 맡는 체제가 자리 잡았다. 폴로놀 왕국은 폴로놀 평야의 곡물과 포도주, 양모를 수출하고 동방의 향신료와 비단을 들여오는 중계 거점 역할을 했으며, 해안 도시들은 이 무역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다만 폴로놀 왕국의 영토가 오늘날의 플로렌시아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폴로놀 평야와 빌베른 사이에 자리한 오르비에 평원은 해협에서 손꼽히는 곡창지대였지만, 이 시기에는 빌베른의 영토였다. 폴로놀 왕국은 독립 왕국으로서 빌베른과 대등하게 교역하고 동맹을 맺었으나, 국경 곡창지대를 둘러싼 분쟁은 중세 내내 두 나라 관계의 불씨로 남았다. === 중세 도시와 상업 === 무역이 커지면서 해안과 강 하류의 도시들도 성장했다. 12세기 후반부터 국왕은 재정 지원의 대가로 주요 도시에 자치 특허장을 내주었고, 특허장을 받은 도시는 시장을 열고 관세를 거두며 자체 시 참사회를 운영할 수 있었다. 도시의 상인과 장인은 업종별 조합을 만들어 가격과 품질, 도제 제도를 관리했고, 조합의 대표들이 시 참사회의 의석을 나누어 가졌다. 필라델피아는 이 시기에 왕국의 중심 도시로 떠올랐다. 강 하구의 항구 도시였던 필라델피아는 로셀 왕조의 왕들이 궁정을 두면서 행정 중심지가 되었고, 13세기에는 왕국 최대의 교역항이자 사실상의 수도로 자리 잡았다.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은 왕실에 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관세 징수권과 독점 교역권을 얻었으며, 13세기 말 도시 대표가 폴로놀 의회에 의석을 얻는 데에도 필라델피아 상인들의 영향력이 컸다. 도시의 성장은 농촌 사회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도시 시장에 곡물과 포도주를 내다 파는 길이 열리면서 일부 농민은 부역 대신 화폐로 지대를 내게 되었고, 영주들 역시 도시 상품을 사기 위해 화폐 수입을 원했다. 그러나 이 변화는 폴로놀 평야의 상업화된 지역에 한정되었고, 내륙의 영지에서는 부역과 현물 지대에 기반한 장원 질서가 14세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 중세 후기의 대혼란 == === 몬타나 화산과 대기근 === 1321년 몬타나 화산의 대분화는 중세 후기 랜드해협 대혼란기의 출발점이 되었다. 분화 이후 수년 동안 해협 전역의 기온이 떨어지고 여름 냉해가 이어졌으며, 곡물 수확량은 평년의 절반 아래로 줄어든 해가 잦았다. 곡물 수출로 번영하던 폴로놀 왕국은 이 충격을 가장 크게 받은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흉작이 겹치자 곡물 가격이 폭등했고, 농촌에서는 굶주린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기근은 국가와 교회에 대한 신뢰를 흔들었다. 영주들은 흉작 속에서도 지대를 줄이지 않았고, 교회는 십일조를 거두면서도 구휼에는 소극적이었다. 이 시기 연대기에는 수도원 창고의 곡물을 약탈한 농민들의 이야기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기근 자체는 1330년대 들어 차츰 가라앉았지만, 이때 생긴 불신은 곧이어 닥친 흑사병을 거치며 훨씬 깊어졌다. === 흑사병 === 1349년 흑사병이 랜드해협에 대유행하면서 폴로놀 왕국은 전례 없는 인구 손실을 겪었다. 당시 왕국 인구 약 1,700만 명 가운데 510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인구의 약 30%에 해당한다. 사망률은 인구가 밀집한 해안 무역 도시에서 특히 높았고, 일부 촌락은 주민 전체가 사라져 버려졌다. 인구 급감은 노동력 부족으로 이어졌다. 경작할 사람이 없는 토지가 늘어나자 살아남은 농민과 노동자들은 더 높은 임금과 더 낮은 지대를 요구했고, 영주들은 법령으로 임금을 묶어 두려 했다. 기근에 이어 역병까지 겹치는 동안 교회는 이를 신의 징벌이라 설교했지만 성직자들 역시 속수무책으로 쓰러졌고, 일부 고위 성직자는 영지를 버리고 달아났다. 흑사병을 거치며 사람들 사이에 퍼진 것은 교회가 이 재앙 앞에서 아무런 답도 주지 못했다는 인식이었다. 흑사병의 장기적인 결과는 농촌 질서의 변화였다. 임금 동결령은 곳곳에서 지켜지지 않았고, 일손이 부족한 영주들은 떠나려는 농민을 붙잡기 위해 부역을 줄이고 지대를 화폐로 받는 계약을 받아들였다. 14세기 후반부터 폴로놀 평야에서는 영지에 묶인 예속 농민이 줄어들고 계약에 따라 땅을 빌려 경작하는 소작농이 늘어났다. 반면 이러한 양보를 거부한 내륙의 영주들은 오히려 부역을 강화하려 했고, 이 차이는 뒤이은 농민 봉기가 어디에서 가장 격렬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 몽골 침략과 오르비에 평원 수복 === 14세기 몽골의 침략은 해협의 세력 균형을 바꾸어 놓았다. 빌베른은 국경에서 벌어진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12만 명이 넘는 시민 자원병을 잃었고, 황제의 자리가 한동안 비는 혼란에 빠졌다. 이 틈을 타 빌베른이 다스리던 농업 지대들이 잇따라 떨어져 나갔는데, 폴로놀 왕국은 이때 오랫동안 분쟁을 겪던 오르비에 평원을 수복했다. 오르비에 평원의 수복은 흑사병으로 무너진 왕국 재정에 숨통을 틔워 주었다. 평원의 곡물 생산은 곧 왕실 수입의 큰 몫을 차지하게 되었고, 오르비에는 이후 플로렌시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남았다. 다만 수복한 땅을 누가 나누어 가질지를 두고 국왕과 대귀족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고, 평원의 농민들에게는 새 영주가 이전 영주보다 더 무거운 부담을 지우는 일이 많았다. === 농민 봉기와 종교 전쟁 === 1351년 기근과 역병, 과중한 지대에 시달리던 폴로놀 평야의 농민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몇 달 만에 진압되었지만, 봉기 지도자들이 영주뿐 아니라 수도원과 주교좌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전의 농민 반란과 성격이 달랐다. 종교에 대한 불신이 분노로 바뀐 것이다. 같은 무렵 설교자 장 모르방은 성직자의 청빈과 성서의 모국어 번역을 주장하며 교황청의 권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모르방의 가르침은 도시의 장인과 상인, 봉기에 가담했던 농민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졌고, 그 추종자들은 모르방파로 불렸다. 교황청이 모르방파를 이단으로 선언하자 교황을 지지하는 영주들과 모르방파를 받아들인 도시·영주들 사이의 대립은 무력 충돌로 번졌다. 이른바 종교 전쟁은 1368년부터 1402년까지 3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전쟁은 한 번의 결전이 아니라 영지와 도시 단위로 벌어진 소모전이었고, 양측 모두 상대 진영의 교회와 수도원을 불태우는 일이 잦았다. 교황청은 교황파 영주들에게 자금과 파문령을 지원했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그 개입은 오히려 교황의 권위를 떨어뜨렸다. 신앙의 문제를 두고 시작된 싸움이 결국 누가 폴로놀 교회를 다스릴 것인가라는 정치의 문제로 바뀌어 갔다. == 근세 == === 1404년 종교개혁 === 30여 년의 전쟁 끝에 사태를 수습한 것은 국왕이었다. 1404년 국왕 앙셀름 4세는 생레미 칙령을 반포해 폴로놀 교회를 교황청으로부터 분리하고 국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선언했다. 칙령은 교회 재산의 상당 부분을 왕실로 귀속시키는 한편, 모르방파와 기존 신앙을 따르는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예배할 권리를 인정했다. 앙셀름 4세의 개혁은 신앙의 문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국왕은 종교개혁 운동을 교황청과 교황파 대귀족을 동시에 약화시키는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고, 몰수한 교회 재산으로 왕실 재정을 다시 세웠다. 주교 임명권이 국왕에게 넘어오면서 교회는 왕권을 떠받치는 기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1404년의 개혁은 종교 갈등을 해소하는 동시에 로셀 왕조의 왕권을 전례 없이 강화했다. 칙령 이후 폴로놀 교회는 국왕이 임명하는 대주교 아래 교구 조직을 새로 짰다. 교황청에 보내던 헌금과 교회 재판의 상소는 모두 폐지되었고, 성직자는 국왕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 했다. 교황청은 앙셀름 4세를 파문했지만, 30여 년의 전쟁으로 권위를 잃은 교황청의 파문은 왕국 안에서 거의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한 생레미 칙령은 이후 폴로놀 사회의 성격을 크게 바꾸었다. 모르방파 상인과 장인들이 박해 없이 활동할 수 있게 되면서 해안 도시의 상업이 되살아났고, 해협의 다른 나라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이들이 폴로놀로 이주했다. 오늘날 플로렌시아가 스스로를 관용의 전통을 가진 나라로 설명할 때 가장 먼저 꼽는 사건도 1404년의 칙령이다. === 폴로놀 르네상스 ===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걸쳐 폴로놀 왕국은 이른바 폴로놀 르네상스를 맞았다. 흔히 1510년을 그 전성기로 꼽는데, 이 무렵 해안 도시의 상업은 중세 무역체제의 규모를 넘어섰고, 은행업과 해운업으로 부를 쌓은 신흥 상업 계층이 등장했다. 상인 가문들은 화가와 건축가, 학자들을 후원했으며, 필라델피아를 비롯한 도시에는 새 양식의 궁전과 공공건물이 들어섰다.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모르방파가 번역한 모국어 성서와 고전 번역본이 널리 읽혔다. 그러나 번영의 이면에서는 세금 불균형이 서서히 문제가 되었다. 1200년 이래의 특권에 따라 귀족과 성직자는 대부분의 직접세를 면제받았고, 늘어나는 왕실 지출은 평민과 신흥 상인에게 부과되는 세금으로 메워졌다. 상인들은 막대한 부를 쌓고도 정치적 발언권을 얻지 못했고, 농민과 도시 하층민은 물가 상승 속에서 오히려 더 가난해졌다. 평민과 귀족 사이의 빈부격차가 이 시기부터 눈에 띄게 벌어졌다. 국왕의 권위 강화와 귀족의 특권은 서로 맞물려 이 격차를 굳혔다. 국왕은 귀족들의 면세 특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그들의 충성을 얻었고, 귀족들은 궁정의 관직과 연금을 받는 대신 의회에서 국왕의 과세안에 반대하지 않았다. 하층민과 귀족 사이의 불평등은 이후 200년 가까이 이어졌고, 사회 전반의 불안정으로 쌓여 갔다. === 조세 반란과 의회의 정지 === 16세기 후반부터 쌓인 불만은 크고 작은 조세 반란으로 터져 나왔다. 반란은 대개 새 세금이 부과되거나 흉작으로 곡물 가격이 뛸 때 일어났으며, 세금 징수원을 쫓아내고 징세 장부를 불태우는 방식으로 시작해 인근 촌락과 소도시로 번지는 경우가 많았다. 반란의 주력은 농민과 도시 하층민이었지만, 세금 부담에 불만을 품은 소상인과 지방 관리가 가담하기도 했다. 국왕 정부는 반란을 군대로 진압한 뒤 주모자를 처형하고, 반란이 일어난 지역에 더 무거운 세금을 매기는 식으로 대응했다. 반란이 되풀이되는 동안 폴로놀 의회는 갈등을 풀어 줄 통로가 되지 못했다. 의회에서 귀족과 성직자 대표는 자신들의 면세 특권을 지키는 데 몰두했고, 도시 대표들은 세금 부담을 농촌으로 떠넘기려 했다. 1614년 소집된 의회는 새 세금안을 두고 신분 대표들이 서로 대립하다 아무런 결론 없이 해산되었는데, 이것이 혁명 이전의 마지막 의회였다. 국왕은 이후 의회 없이 통치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고, 폴로놀 의회는 1706년까지 92년 동안 한 번도 소집되지 않았다. === 절대왕정과 빌베른 침공 === 의회가 멈춘 17세기에 로셀 왕조의 왕들은 의회를 거치지 않고 통치하는 방식을 굳혀 갔다. 국왕은 칙령과 국왕 참사회를 통해 과세와 입법을 처리했고, 지방에는 국왕이 직접 파견한 지사를 두어 귀족의 영지 행정까지 감독하게 했다. 상비군이 창설되고 국왕 관리가 지방 행정을 장악하면서 폴로놀 왕국은 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절대왕정 국가가 되었다. 귀족들은 정치적 자율성을 잃는 대신 궁정의 관직과 면세 특권을 지켰고, 필라델피아의 궁정은 귀족 사회의 중심이자 국왕의 권위를 과시하는 무대가 되었다. 이 무렵 해협의 바다에서는 폴로놀과 빌베른, 이베리아 계열 해상 세력이 무역 항로를 두고 경쟁하고 있었다. 1672년 국왕 테오도르 2세는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빼앗기 위해 빌베른 본토를 침공했다. 침공 초기 폴로놀군은 빌베른 국경 지대 깊숙이 진격했고, 빌베른은 대륙 방어를 위해 막대한 육군과 전비를 쏟아부어야 했다. 그 결과 빌베른의 해상 무역과 상업 선단은 눈에 띄게 약해졌으며, 해협의 바다에서 빌베른이 차지하던 자리는 폴로놀과 [[루이나]]가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초기의 진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빌베른은 국경의 요새선에 병력을 집중해 폴로놀군의 진격을 막아 냈고, 전쟁은 곧 요새를 사이에 둔 지루한 공방전으로 바뀌었다. 여러 해에 걸친 전쟁은 강화 조약으로 끝났는데, 폴로놀 왕국이 얻은 것은 국경 요새 몇 곳과 빌베른 항구에서의 관세 특혜 정도에 그쳤다. 영토로 보면 초라한 결과였지만, 해상 무역의 판도를 바꾸었다는 점에서 폴로놀 궁정은 이 전쟁을 승리로 기념했다. 한편 전쟁은 폴로놀 왕국에도 큰 부담을 남겼다. 전쟁이 여러 해 동안 이어지면서 왕실은 막대한 빚을 졌고, 그 빚을 갚기 위해 평민에게 매기는 인두세와 소비세가 거듭 인상되었다. 1690년대에는 흉작과 전염병까지 겹쳐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조세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빌베른 침공은 절대왕정의 힘을 보여 준 전쟁이었지만, 동시에 그 절대왕정을 무너뜨릴 재정 위기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 혁명과 공화국 == === 1706년 혁명 === 18세기 초 폴로놀 왕국의 재정은 사실상 파산 상태였다. 빌베른 침공 이래 쌓인 전쟁 부채의 이자만으로 왕실 수입의 절반 가까이가 빠져나갔고, 국왕 루도빅 5세의 정부는 새 세금을 만들거나 기존 세금을 올리는 것 말고는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1704년과 1705년 연이은 흉작으로 빵값이 두 배 넘게 뛰자, 오랫동안 쌓여 온 하층민의 불만은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1706년 3월 수도 필라델피아에서 새 소비세 부과에 항의하는 시위가 봉기로 번졌다. 장인과 도시 빈민, 부두 노동자가 봉기의 중심이었고, 정치적 발언권을 요구해 온 신흥 상인들이 자금과 조직을 댔다. 봉기 진압에 투입된 수비대 일부가 시위대 편으로 돌아서면서 수도의 통제권은 며칠 만에 봉기 세력에게 넘어갔다. 봉기 세력은 92년 동안 열리지 않았던 폴로놀 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고, 지방 도시들이 잇따라 봉기에 호응했다. 루도빅 5세는 의회 소집에 동의했지만, 소집된 의회는 국왕이 기대한 과세 동의 기구가 아니었다. 도시 대표와 봉기 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의회는 국왕의 과세권을 박탈한 데 이어 그해 가을 왕정 폐지를 선포했다. 루도빅 5세는 폐위되어 국외로 망명했고, 460년 폴로놀 왕국 건국 이래 1,246년 동안 이어진 왕정은 이로써 끝났다. 왕정을 폐지한 의회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국호를 바꾸었다. 새 국호 플로렌시아(Florentia)는 '꽃피다'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따온 이름으로, 오랜 억압 끝에 인민의 나라가 비로소 피어났다는 뜻을 담았다. 봉기 당시 시위대가 옷에 달았던 흰 백합은 혁명의 상징이 되었고, 훗날 국화로 지정되었다. 오늘날의 국가 「꽃의 영광」(La Gloire des Fleurs)도 이 무렵 혁명 행진가로 불리던 노래에서 비롯되었다. === 공화국 초기의 혼란 === 1708년 의회는 공화국 헌법을 제정하고 공화정을 정식으로 수립했다. 그러나 새 헌법은 일정 금액 이상의 세금을 내는 재산 소유자에게만 선거권을 주었고, 그 결과 의회는 부유한 상인과 지주, 혁명에 합류한 옛 귀족들이 차지했다. 혁명의 주력이었던 장인과 도시 빈민, 농민은 정작 새 체제의 정치에서 밀려났다. 공화국 초기의 정치는 상류층과 하층민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얼룩졌다. 상류층이 주도한 의회는 왕정 시절의 부채를 정리하기 위해 다시 소비세를 올렸고, 귀족의 면세 특권 가운데 상당수를 그대로 두었다. 하층민은 혁명이 주인만 바꾸었을 뿐이라고 반발했다. 여기에 왕정 복고를 노리는 왕당파의 반란이 지방에서 일어나고, 망명한 루도빅 5세를 지원하려는 외국의 움직임까지 겹치면서 새 정치 체제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1708년부터 1711년까지의 3년은 흔히 공화국의 가장 위태로운 시기로 불린다. 가장 큰 위협은 내륙 지방의 왕당파 반란이었다. 1709년 봄 옛 대귀족 가문들이 거느린 사병과 혁명에 반감을 품은 농민들이 로셀 왕조의 복위를 내걸고 봉기했고, 반란군은 한때 내륙의 주요 도시 몇 곳을 장악했다. 공화국 정부는 수도의 민병대와 정규군을 동원해 1년 가까운 싸움 끝에 반란을 진압했지만, 그 과정에서 반란 지역의 촌락이 불타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반란을 진압한 공화국은 살아남았으나, 전비를 대기 위해 다시 세금을 올려야 했고 이는 하층민의 불만을 한층 키웠다. === 1711년 시민혁명 === 1711년 필라델피아와 주요 도시의 하층민이 다시 봉기했다. 이번 봉기는 왕정이 아니라 상류층이 장악한 공화국 의회를 겨냥했고, 봉기 세력은 선거권의 확대와 귀족 특권의 완전한 폐지를 요구했다. 귀족과 부유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봉기가 몇 달 동안 끊이지 않자 의회는 결국 요구의 상당 부분을 받아들였다. 이를 1706년 혁명과 구분해 시민혁명이라 부른다. 시민혁명의 결과 채택된 「플로렌시아 권리 선언」은 법 앞의 평등, 신앙과 언론의 자유, 재산권, 과세에 대한 동의권을 모든 시민의 권리로 규정했다. 귀족의 면세 특권과 영지 재판권은 폐지되었고, 귀족 신분은 법적 의미를 잃었다. 선거권은 여전히 모든 성인 남성에게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재산 기준이 크게 낮아져 도시 장인과 자영농 상당수가 투표할 수 있게 되었다. 권리 선언에 적힌 '자유, 평등, 정의'는 이후 플로렌시아의 국가 표어가 되었다. 플로렌시아 사학계는 1706년과 1711년을 하나의 혁명이 두 단계로 진행된 것으로 본다. 1706년 혁명이 누가 나라를 다스릴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해 왕정을 폐지했다면, 1711년 시민혁명은 누가 시민인가라는 물음에 답해 신분제를 해체했다. 권리 선언이 만든 질서는 이후 수차례 헌법이 바뀌는 동안에도 기본 골격을 유지했으며, 플로렌시아는 이 시기를 근대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기념한다. 플로렌시아의 혁명은 해협의 다른 왕국들에도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한 나라의 인민이 국왕을 폐위하고 신분제를 폐지했다는 소식은 각국 궁정에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일부 나라는 플로렌시아 서적의 반입을 금지하기도 했다. 반대로 각국의 개혁가와 상인들 사이에서 권리 선언은 널리 읽히는 문서가 되었다. 18세기 내내 플로렌시아가 해협의 군주국들 사이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일이 잦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 식민제국과 산업화 == === 해외 팽창 === 시민혁명으로 정치가 안정되자 플로렌시아는 눈을 바다 너머로 돌렸다. 빌베른 침공 이후 확보한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바탕으로 플로렌시아의 선단은 랜드해협 바깥으로 항로를 넓혀 갔고, 18세기 동안 해협 밖에 여러 식민지를 확보했다. 이 가운데 훗날 독립국이 되는 아르카디아, 테라바드리아, 네오바르디아, 셀레스티아의 네 곳이 플로렌시아 식민제국의 중심이었다. 네 식민지는 성격이 서로 달랐다. 아르카디아와 테라바드리아에는 본국에서 건너간 이주민이 대규모로 정착해 농장과 도시를 세웠고, 이주민 사회는 일찍부터 자체 의회를 두고 본국과 자치권을 다투었다. 네오바르디아는 원주민 인구가 많은 가운데 소수의 본국 관리와 상인이 지배하는 교역·자원 식민지였고, 셀레스티아는 해협 바깥 항로를 지키는 해군 기지와 중계항으로서 전략적 가치가 컸다. 이 차이는 훗날 각 식민지가 독립한 시기와 방식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식민지 무역은 본국의 상업 자본을 키웠다.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설탕과 면화, 목재와 광물은 본국 항구에서 가공되어 다시 해협 각국으로 팔려 나갔고, 이 무역을 중개한 해운 회사와 무역 회사는 18세기 플로렌시아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뒤이은 산업혁명에 필요한 자본과 원료의 상당 부분도 이 식민지 무역에서 나왔다. 본국에서 권리 선언을 채택한 공화국이 바다 건너에서는 식민지를 지배했다는 모순은 당대에도 지적되었다. 식민지 원주민에게는 권리 선언이 규정한 시민의 권리가 적용되지 않았고, 플랜테이션과 광산에서는 강제 노동이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본국 의회에서는 권리 선언의 원칙을 식민지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과 식민지는 본국 법의 바깥에 있다는 주장이 맞섰으며, 강제 노동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법으로 금지되었다. === 루이나 식민지 독립전쟁 개입 === 18세기 후반 해협 바깥에서 플로렌시아의 가장 큰 경쟁자는 루이나였다. 1775년 남아메리카 동부 연안과 내륙에 형성된 루이나의 열두 개 식민지 연합이 과세와 정치적 차별, 자치권 문제를 둘러싸고 본국에 반기를 들자, 플로렌시아는 이를 루이나를 견제할 기회로 보았다. 플로렌시아는 처음에는 무기와 자금을 비밀리에 지원하다가 이후 공개적으로 식민지 편에 서서 참전했고, [[빌베른]]과 이베리아 세력도 식민지 편에 가세하거나 루이나를 견제하는 방식으로 개입했다. 전선은 대서양과 카리브 해, 인도양, 해협의 내해 입구 주변까지 넓게 펼쳐졌다. 플로렌시아 해군은 루이나의 보급선을 끊고 식민지 반군에 대한 해상 지원을 맡았으며, 해협 입구의 해전에서는 루이나 함대와 여러 차례 맞붙었다. 1783년 전쟁은 식민지 연합의 독립으로 끝났고, 루이나는 해협 바깥의 가장 큰 식민지를 잃었다. 플로렌시아가 이 전쟁에서 얻은 것은 경쟁국의 약화였지만, 그 대가도 적지 않았다. 참전 비용은 다시 막대한 국가 부채로 남았고, 공화국 정부는 이를 갚기 위해 식민지에서 거두는 세금과 관세를 늘렸다. 식민지 이주민 사회에 쌓인 불만은 한 세기 뒤 아르카디아와 테라바드리아의 독립 운동으로 되돌아왔다. 한편 이 전쟁에서 적으로 싸운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는 20세기에 들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같은 편에 서게 된다. === 산업혁명 === 1780년대 들어 증기기관이 공장에 도입되면서 플로렌시아의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기계화된 것은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면화를 가공하는 면직 공업이었다. 증기기관으로 돌아가는 방적기와 직조기가 수공업을 대체하면서 면직물 생산량은 수십 년 사이에 몇 배로 늘었고, 면직물은 곧 플로렌시아의 주력 수출품이 되었다. 공장은 석탄과 물을 구하기 쉬운 강가와 항구 주변에 몰렸고, 그 주변으로 공장 도시가 빠르게 자라났다. 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인구로 도시는 급속히 팽창했지만, 주택과 상하수도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좁은 골목에 공동주택이 빽빽이 들어섰고, 오염된 물과 과밀한 주거 환경 탓에 전염병이 되풀이되었다. 장시간 노동과 아동 노동도 이 시기 공장 도시의 일상이었다. 산업혁명은 농촌도 바꾸었다. 공장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곡물 수요가 커졌고, 오르비에 평원과 폴로놀 평야에서는 울타리를 치고 경지를 통합해 대규모로 경작하는 상업적 농업이 확산되었다. 윤작법과 개량 농기구가 보급되면서 생산성은 높아졌지만, 공유지를 잃은 영세 농민들은 땅을 떠나 도시의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농촌에서 밀려난 인구가 도시의 노동력이 되는 이 흐름은 19세기 내내 이어졌다. === 필라델피아 재개발 === 수도 필라델피아는 공장 도시의 문제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었다. 19세기 초 필라델피아의 인구는 반세기 전의 두 배를 넘었지만 도시의 골격은 중세 시가지 그대로였고, 인구 대비 도시 기반시설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1810년대에 잇따른 콜레라 유행은 도시 개조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여론을 만들었다. 1820년 공화국 정부는 도시계획가 필리프 오드랑을 필라델피아 개조 책임자로 임명했다. 오드랑은 구시가의 좁은 골목을 헐어 도시를 가로지르는 대로를 내고, 대로 아래에 상하수도망을 묻었으며, 도심 곳곳에 공원과 광장을 배치했다. 대로변 건물에는 높이와 외관을 통일하는 건축선 규제가 적용되어, 오늘날 필라델피아 구도심의 정연한 가로 경관이 이때 만들어졌다. 개조 사업은 20여 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쫓겨난 빈민들이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는 문제도 함께 남겼다. 개조를 마친 필라델피아는 해협을 대표하는 근대 도시로 이름을 알렸다. 1861년 필라델피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만국박람회를 개최해 플로렌시아의 공업 제품과 식민지 산물, 새로 정비된 도시의 모습을 세계에 선보였다. 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철골 유리 전시관은 박람회가 끝난 뒤에도 헐리지 않고 남아 필라델피아의 상징적인 건축물이 되었다. === 철도 시대 === 1827년 필라델피아와 외항 생마렌을 잇는 첫 증기철도가 개통되면서 플로렌시아의 철도 시대가 열렸다. 1830년대에는 정부의 보증을 받은 민간 철도 회사들이 경쟁적으로 노선을 놓아 수도와 주요 공업 도시, 항구, 오르비에 평원의 곡창지대를 잇는 간선망이 갖추어졌다. 플로렌시아 전역에 선로를 까는 사업은 그 자체로 막대한 일자리와 철강·석탄 수요를 만들어 냈다. 철도는 물류와 인구 이동을 편리하게 만들었고, 도시화는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농촌을 떠난 인구가 공장과 철도, 항만에서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되었고,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아 소비를 시작하면서 국내 시장이 커졌다. 플로렌시아 경제사에서는 이 시기를 1차 경제성장으로 부른다. 산업혁명이 생산을 바꾸었다면, 철도는 그 생산물이 팔리는 시장을 전국으로 넓혔다. === 노동 문제와 선거권 확대 === 경제성장의 과실이 고르게 나누어진 것은 아니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하루 14시간이 넘는 노동과 낮은 임금, 잦은 산업재해에 시달렸고, 불황이 오면 가장 먼저 일자리를 잃었다. 19세기 초 공장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에 항의해 기계를 부수거나 작업을 멈추는 일이 잦았다. 공화국 정부는 처음에 이를 치안 문제로만 다루어 노동자의 결사를 금지했지만, 파업과 소요가 되풀이되자 태도를 조금씩 바꾸었다. 19세기 중반 공화국 의회는 아동 노동을 제한하고 공장 노동 시간에 상한을 두는 공장법을 제정했고, 이어 노동자의 결사와 공제 조합 활동을 합법화했다. 노동자들의 공제 조합은 질병과 실업에 대비해 조합비를 모으는 상호부조 조직으로 출발했지만, 점차 임금 교섭과 정치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뒤이은 1878년의 실업 수당과 공공 주택 제도는 이 공제 조합들이 오랫동안 요구해 온 것이기도 했다. 정치적 권리의 확대도 같은 흐름 속에서 진행되었다. 1711년 권리 선언 이후에도 선거권에는 재산 기준이 남아 있었고, 공장 노동자 대부분은 투표할 수 없었다. 노동자와 소상인들은 재산 기준의 폐지를 요구하는 청원과 시위를 거듭 벌였으며, 의회는 19세기 동안 몇 차례에 걸쳐 기준을 낮춘 끝에 19세기 후반 성인 남성 보통선거를 도입했다. 1706년과 1711년의 혁명이 약속한 시민의 정치 참여는 한 세기 반에 걸쳐 조금씩 현실이 된 셈이다. === 차펨하임 스트리트 === 1835년 필라델피아에 증권거래소가 들어서면서 그 주변 거리가 플로렌시아의 금융 중심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차펨하임 스트리트로 불리는 이 거리에는 곧 대형 은행과 보험 회사, 해운 회사의 본사가 모여들었다. 철도 회사의 주식과 채권, 식민지 개발 회사의 증권이 이곳에서 거래되었고, 차펨하임 스트리트는 해협의 자본이 모이는 창구가 되었다. 차펨하임 스트리트의 성장은 플로렌시아 경제의 성격을 바꾸었다. 공장과 식민지 무역에서 번 돈이 다시 금융 시장으로 흘러들었고, 기업들은 은행 대출과 주식 발행으로 사업을 키웠다. 금융의 성장은 철도와 공업의 확장을 뒷받침했지만, 동시에 실물 경제와 동떨어진 투기가 자랄 토양이 되기도 했다. 그 위험이 처음으로 현실이 된 것이 1876년 공황이었다. == 1876년 공황과 재건 == === 투기 거품과 붕괴 === 1870년대 중반 플로렌시아의 금융 시장에는 과도한 투자가 몰렸다. 철도 노선이 거의 다 놓인 뒤에도 새 노선 계획을 내건 회사들이 주식을 발행했고, 식민지 광산과 농장 개발을 내세운 회사들의 주가도 치솟았다. 경기 호황에 들뜬 대중은 너도나도 주식 투자에 뛰어들었고, 기업들은 주가 상승을 노려 무리한 투자를 이어 갔다. 실제 경제 실적과 무관하게 자산 가격이 부풀려지면서 주식 시장은 비이성적인 상승을 겪었다. 1876년 주식 시장의 과도한 투자와 금융 기관의 부실 대출이 누적된 끝에 결국 거품이 터졌다. 대형 철도 회사 한 곳이 채권 이자를 갚지 못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가가 폭락했고, 그 회사에 거액을 빌려준 은행들이 연쇄적으로 파산했다. 예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은행 앞에 줄을 섰고, 은행이 문을 닫자 그 은행과 거래하던 기업들도 무너졌다. 기업 파산과 은행 붕괴가 잇따르고 실업률이 급증하면서 플로렌시아 경제는 심각한 침체에 빠졌다. 공황의 충격은 차펨하임 스트리트에만 머물지 않았다. 은행이 대출을 거두어들이자 멀쩡하던 공장들도 운영 자금을 구하지 못해 문을 닫았고, 공장 도시에서는 노동자의 3분의 1 가까이가 일자리를 잃었다. 곡물 가격이 떨어지면서 오르비에 평원의 농민들도 빚을 갚지 못해 땅을 잃었다. 1877년 겨울 필라델피아에서는 실업자들의 시위가 폭동으로 번져 군대가 투입되었고, 이 사건은 공화국 정부가 경제 정책의 방향을 바꾸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 정부 주도 복구 === 1876년 공황 이전까지 공화국 정부는 경제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공황이 2년 가까이 이어지고 실업자들의 시위가 폭동으로 번지자 정부는 방침을 바꾸었다. 새로 구성된 내각은 시장의 자율 회복을 기다리는 대신 국가가 직접 일자리와 신용을 공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878년부터 시행된 일련의 복구 정책은 플로렌시아 정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첫 사례로 평가된다. 복구 정책의 첫 축은 공공사업이었다. 정부는 실업률을 낮추고 인프라를 재건하기 위해 도로와 철도, 항만을 복구하고 확장하는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였고, 실업자들은 이 공공사업에 고용되었다. 둘째 축은 통화와 금융 개혁이었다. 1878년 정부는 중앙은행인 플로렌시아 은행을 설립해 통화 발행권을 일원화하고, 금본위제를 채택하면서 새 통화 플로렌을 도입했다. 여러 은행이 제각기 발행하던 은행권이 정리되면서 통화 가치가 안정되었고, 부실 은행은 합병과 청산을 거쳐 재편되었다. 주식 시장의 투기 행위에 대한 규제도 이때 처음 도입되었다. 이때 도입된 플로렌은 이후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며 가치가 크게 흔들렸지만, 통화 단위로서는 한 번도 바뀌지 않고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다. 플로렌시아 은행 역시 1878년 설립 이래 통화 정책을 맡는 중앙은행으로 존속하고 있으며, 차펨하임 스트리트 초입에 자리한 본점 건물은 1878년 개혁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셋째 축은 소비와 복지였다. 정부는 내수를 살리기 위해 세제 혜택과 소비자 보호법 등 다양한 소비 진작 정책을 폈고, 이는 기업의 투자를 다시 활성화시켰다. 또한 공황 이후의 실업과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업 수당과 공공 주택 공급 같은 복지 제도를 도입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경제는 1880년대 초 안정 단계에 들어섰고, 은행이 안정되면서 신용 공급도 정상화되었다. 이 시기의 회복과 성장을 2차 경제성장이라 부른다. 1878년의 복구 정책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제도보다 관념이었다. 시장이 스스로 회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국가가 공공사업과 통화 정책, 복지로 경기를 떠받친다는 발상은 이후 플로렌시아 정치에서 좌우를 가리지 않는 합의로 굳어졌다. 1929년 대공황과 두 차례 세계대전 이후의 재건에서 플로렌시아 정부가 택한 정책은 모두 1878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 첫 식민지 독립 === 공황은 식민지에도 파장을 미쳤다. 본국 경제가 흔들리는 동안 식민지 이주민 사회는 본국이 더 이상 자신들을 보호하거나 부양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고, 오랫동안 요구해 온 자치를 넘어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공황 수습에 매달린 본국 정부에는 식민지에 군대를 보내 독립 운동을 누를 여력이 없었다. 1880년 아르카디아가, 1883년 테라바드리아가 차례로 독립했다. 두 곳 모두 이주민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자체 의회를 오래 운영해 온 정착 식민지였기 때문에, 독립은 대규모 전쟁 없이 본국과의 협상을 거쳐 이루어졌다. 플로렌시아는 독립을 승인하는 대가로 두 나라와 통상 조약을 맺어 무역 관계를 유지했다. 두 정착 식민지의 독립은 플로렌시아 탈식민의 첫 단계였으며, 교역·자원 식민지였던 네오바르디아와 전략 거점이던 셀레스티아는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본국의 지배 아래 남았다. == 세계대전 시대 == === 제1차 세계대전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플로렌시아는 협상국 편으로 참전했다. 한 세기 전 식민지 독립전쟁에서 적으로 싸웠던 루이나와 같은 편에 섰고, 제정 사랜드 역시 협상국의 일원이었다. 훗날 사비에트가 되는 나라와 한 진영에서 싸웠다는 사실은 20세기 후반의 대립을 생각하면 역설적인 대목이다. 플로렌시아의 참전 동기는 복합적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협상국 측과 맺은 조약에 따른 의무였지만, 해협 바깥 항로와 남은 식민지를 지키려는 계산, 그리고 19세기 후반 이래 급성장한 동맹국 측 해군력에 대한 경계가 함께 작용했다. 개전 당시 플로렌시아의 여론은 전쟁이 몇 달 안에 끝날 것이라는 낙관에 기울어 있었고, 필라델피아 역에는 출정하는 병사들을 환송하는 인파가 몰렸다. 그 낙관이 무너지는 데에는 반년이 걸리지 않았다. 루이나 본토가 전쟁 내내 공격받지 않았던 것과 달리 플로렌시아는 본토가 전장이 되었다. 개전 직후 동맹국 군대가 국경 지방으로 밀고 들어왔고, 플로렌시아군은 국경 지방 깊숙한 곳에서 간신히 진격을 멈춰 세웠다. 이후 전선은 참호선을 따라 굳어졌고, 양측은 몇 킬로미터의 땅을 두고 수년 동안 소모전을 벌였다. 1916년의 베르세 전투는 넉 달 동안 이어진 끝에 양측 합쳐 5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지만 전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전쟁은 플로렌시아 사회 전체를 동원했다. 성인 남성 대부분이 징집되었고, 그 빈자리를 여성과 식민지에서 동원된 노동자가 채웠다. 공장들은 면직물 대신 포탄과 군복을 만들었으며, 정부는 식량과 석탄을 배급제로 관리했다. 1918년 전쟁이 협상국의 승리로 끝났을 때 플로렌시아의 군인 사망자는 약 94만 명, 민간인 사망자는 약 17만 명에 이르렀다. 전선이 지나간 국경 지방에서는 도시와 촌락, 철도와 공장이 폐허가 되었고, 포탄에 뒤집힌 농지는 수년 동안 경작할 수 없었다. 전쟁은 국내 정치의 모습도 바꾸었다. 개전 직후 주요 정당들은 정쟁을 멈추고 거국 내각을 구성했으며, 노동 단체들도 전쟁 기간 파업을 자제하기로 약속했다. 그 대가로 정부는 노동 단체를 전시 생산 위원회에 참여시켰고, 이는 노동계가 국가 정책 결정에 공식적으로 참여한 첫 사례가 되었다. 공장과 사무실, 병원에서 전쟁 수행을 떠받친 여성들의 역할은 전후 여성 참정권 요구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한편 전쟁 말기로 갈수록 식량 배급의 불공평과 전쟁 부당이득을 둘러싼 불만이 커졌고, 휴전 직후에는 제대군인과 노동자들의 시위가 잇따랐다. === 전후 복구와 네오바르디아 독립 === 전쟁은 식민지 지배의 기반도 흔들었다. 네오바르디아는 전쟁 동안 수만 명의 병사와 노동자를 본국 전선에 보냈고, 그 대가로 자치 확대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네오바르디아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와 파업이 일어났다. 전쟁으로 지친 본국에는 이를 무력으로 누를 여력도, 그럴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1919년 무렵 플로렌시아는 네오바르디아의 독립을 승인했다. 아르카디아와 테라바드리아에 이은 탈식민의 두 번째 단계였다. 네오바르디아의 독립은 앞선 두 정착 식민지와 달리 원주민 다수가 주도한 독립이었다. 독립 이후 네오바르디아 정부는 플로렌시아 기업이 소유하던 광산과 농장 일부를 국유화했고, 보상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두 나라 관계는 한동안 냉랭했다. 관계가 정상화된 것은 1930년대 대공황 속에서 두 나라가 서로의 시장을 필요로 하게 된 뒤였다. 본토에서는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대규모 복구 사업이 시작되었다. 정부는 1878년의 경험을 되살려 국경 지방의 도시와 철도, 공장을 재건하는 공공사업을 벌였고, 전쟁에서 돌아온 제대군인들을 복구 현장에 고용했다. 파괴된 도시 일부는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지만, 상당수는 넓은 도로와 새 주택 단지를 갖춘 도시로 다시 지어졌다. 복구 사업은 192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 1920년대의 번영 === 인프라 재건과 전후 경제 부흥 정책에 힘입어 플로렌시아 경제는 1920년대 초반부터 빠르게 성장했다. 복구 수요가 공업 생산을 끌어올렸고, 전쟁 동안 억눌렸던 소비가 한꺼번에 살아났다. 자동차와 가전제품, 라디오 같은 새 상품이 중산층 가정에 퍼졌고, 투자와 소비가 함께 늘면서 산업 생산도 크게 늘었다. 이 시기를 3차 경제성장이라 부른다. 사회와 정치도 달라졌다. 전쟁 동안 여성들이 맡았던 역할을 근거로 한 참정권 운동이 결실을 맺어 1920년대 초 여성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졌고, 이로써 플로렌시아는 성인 남녀 모두가 투표하는 보통선거를 갖추게 되었다. 대도시에서는 영화관과 무도장, 대중 신문이 번성했고, 필라델피아는 해협 대중문화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전쟁 세대의 상실감과 전후의 풍요가 뒤섞인 이 시기의 분위기는 훗날 플로렌시아 문학과 영화가 즐겨 다루는 소재가 되었다. 주식 시장도 활황을 맞았다. 차펨하임 스트리트에는 다시 투자자들이 몰려들었고, 주가는 해마다 최고치를 새로 썼다. 1876년 공황 이후 도입된 투기 규제가 있었지만, 반세기 가까이 지나는 동안 규제는 느슨해졌고 신용 거래가 다시 늘었다. 번영의 절정에서 경고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 대공황 === 1929년 대공황은 플로렌시아 경제를 다시 한 번 무너뜨렸다. 해협 전역의 주가 폭락과 무역 위축이 플로렌시아에도 그대로 밀려왔고, 수출이 급감하자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은행들은 부실 대출을 안고 흔들렸으며 실업률은 몇 년 사이 네 배 가까이 뛰었다. 불황은 정치적 긴장으로 번졌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와 파산한 농민,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제대군인들 사이에서 의회 정치에 대한 불신이 커졌고, 극좌와 극우 단체들이 거리에서 세력을 넓혔다. 1932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실업자 행진이 경찰과 충돌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1876년 공황 이후 반세기 동안 쌓인 국가 개입의 경험과 복지 제도는 사회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막는 완충 장치가 되었고, 공화국은 불황기를 거치며 체제 위기로까지 치닫지는 않았다. 플로렌시아 정부의 대응은 1878년의 방식을 한층 큰 규모로 되풀이한 것이었다. 정부는 1930년부터 대규모 공공사업에 착수했는데, 그 상징적인 사업이 차펨하임 스트리트 재정비였다. 19세기의 낡은 건물들이 헐린 자리에 철골 구조의 고층 건물이 들어섰고, 당시 유행하던 아르데코 양식의 은행과 사무용 건물들이 거리를 채웠다. 오늘날 차펨하임 스트리트를 대표하는 아르데코 스카이라인은 불황기 실업 대책의 산물이다. 통화 정책도 바뀌었다. 금본위제 아래에서는 통화량을 늘릴 수 없어 경기 부양에 한계가 있었고, 금 유출이 계속되자 정부는 1931년 금 태환을 정지하고 금본위제에서 이탈했다. 1878년 도입된 금본위제는 반세기 만에 막을 내렸다. 이와 함께 은행 예금 보호 제도와 증권 거래 감독 기구가 신설되었고, 실업 보험과 노령 연금이 확대되었다. 플로렌시아 경제는 193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회복되었지만, 그 회복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다음 전쟁이 찾아왔다. === 제2차 세계대전 ===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플로렌시아는 루이나와 함께 연합국 편으로 참전했다. 전쟁 초기 플로렌시아 해군의 주된 임무는 해상 교통로 방어였다. 1940년부터 1941년까지 독일 수상함대가 루이나의 해상 보급로를 끊으려 벌인 통상파괴전, 이른바 [[대서양-랜드해 전투]] 동안 플로렌시아 해군은 연합군 호송선단의 호위에 참여했다. 해협 바깥에 남아 있던 셀레스티아의 해군 기지는 이 시기 연합군 함정의 중계 기지로 쓰였다. 1941년 사랜드 공화국이 추축국과 조약을 맺고 참전하면서 전쟁은 해협 안으로 번졌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같은 편이었던 나라가 이번에는 적이 된 것이다. 사랜드군이 해협 남부 전선에 투입되자 플로렌시아는 이 전선에 대규모 지상군을 보내 연합군의 일원으로 싸웠다. 본토는 점령되지 않았지만, 해안 도시와 항만은 추축국 공군의 공습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전쟁은 다시 한 번 사회 전체의 동원을 요구했다. 정부는 개전과 함께 전시 경제 체제를 선포하고 군수 생산과 식량, 연료를 통제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 만들어진 전시 생산 위원회를 부활시켜 노사 대표를 참여시켰다. 남은 식민지 셀레스티아에서도 병력과 노동력이 동원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뒤 셀레스티아의 정치 지도자들은 이 동원의 대가로 자치 확대를 요구했다. 두 번의 세계대전 모두에서 식민지 동원이 곧 독립 요구로 돌아왔다는 점은 플로렌시아 탈식민사의 반복되는 유형이다. 1945년 5월 해협의 전쟁이 끝났을 때 플로렌시아는 승전국의 자리에 있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모두 승전국으로 마쳤지만, 30년 사이 두 번의 총력전을 치른 대가로 인명과 재정의 손실은 컸다. 두 전쟁을 거치며 플로렌시아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루이나와의 동맹이 국가 안보의 중심축이라는 것이었고, 이 인식은 전후 플로렌시아 외교의 출발점이 되었다. == 랜드 전쟁과 냉전 == === 전후 재건과 새로운 성장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플로렌시아는 다시 한 번 국가 주도의 재건에 나섰다. 공습으로 파괴된 항만과 공장이 복구되었고, 정부는 에너지와 철도, 주요 은행 일부를 국유화해 재건 투자를 직접 이끌었다. 전쟁 동안 확대된 배급과 가격 통제는 몇 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풀렸고, 1878년 이래의 복지 제도는 의료 보험과 가족 수당을 더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보장 체계로 확대되었다. 재건이 일단락된 1950년대 중반부터 플로렌시아는 성장 전략을 크게 바꾸었다. 1956년을 기점으로 정부는 교육 시스템을 개혁해 기술 인력을 대규모로 양성하고, 과학 연구와 개발(R&D)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공과대학과 국립 연구소가 잇따라 세워졌고, 기업의 연구 개발에는 세제 혜택이 주어졌다. 이러한 투자로 플로렌시아는 첨단 기술 산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플로렌시아는 국제 무역 협정과 외국 자본 유치를 통해 수출 주도형 경제로 전환했다. 화장품과 의류, 액세서리, 향수 같은 명품 브랜드와 와인, 치즈 같은 식음료가 해외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의약품과 비료, 각종 화학 제품, 항공기와 항공기 부품의 수출도 크게 늘었다. 전통 산업의 고급화와 첨단 산업의 육성을 동시에 추진한 이 전략으로 플로렌시아는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 1차 랜드 전쟁 ===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상세 내용은 [[1차 랜드 전쟁]] 문서 참고.}}} 1958년 3월 12일 해협의 열강들 사이에 [[1차 랜드 전쟁]]이 일어났다. 열강들의 이권 다툼과 군사적 패권 경쟁, 민족주의와 식민지 문제가 한꺼번에 충돌한 전쟁이었다. 플로렌시아는 [[루이나]], [[웨스타시아]], [[빌베른]]과 함께 협상국을 이루어 [[사비에트]], [[고랜드]], [[체르드]], [[라 마베라 연방]]의 동맹국과 맞섰다. 플로렌시아는 협상국을 이끈 나라였다. 앙드레 뒤몽 총리의 정부는 개전 직후 전시 내각을 꾸리고 협상국의 공동 작전 계획을 주도했으며, 5년 넘게 이어진 전쟁 동안 약 5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이는 약 250만 명을 투입한 루이나의 두 배에 이르는 규모로, 협상국 가운데 가장 많은 병력이었다. 전쟁은 1963년 11월 30일 협상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플로렌시아는 전사와 실종을 합쳐 약 38만 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전쟁은 국내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5년 넘는 총동원으로 산업 생산은 다시 군수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1956년 이후 추진해 온 수출 산업은 한동안 성장을 멈추어야 했다. 전비를 대기 위해 소득세와 법인세가 대폭 인상되었으며, 정부는 물가와 임금을 통제했다. 전쟁 막바지에는 장기전에 지친 여론이 조기 강화를 요구하며 뒤몽 정부를 압박했지만, 뒤몽 총리는 협상국의 결속을 이유로 전쟁을 끝까지 이끌었다. 1차 랜드 전쟁은 플로렌시아의 대외 정책에 두 가지 흔적을 남겼다. 하나는 협상국으로 함께 싸운 루이나·빌베른과의 군사 협력이 전쟁 뒤에도 이어져 상설 동맹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전쟁이 식민지 체제를 크게 약화시켰다는 점이다. 전쟁 동안 식민지의 인력과 자원을 동원한 열강들은 전쟁이 끝난 뒤 식민지의 독립 요구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 셀레스티아 독립과 탈식민의 완결 === 1차 랜드 전쟁이 끝나고 2년 뒤인 1965년, 플로렌시아의 마지막 주요 식민지였던 셀레스티아가 독립했다. 셀레스티아는 해협 바깥 항로의 해군 기지로서 전략적 가치가 컸던 탓에 가장 오래 본국의 지배 아래 남아 있었지만, 전쟁 이후 탈식민의 흐름 속에서 본국 정부는 협상을 통한 독립을 택했다. 플로렌시아는 독립 이후에도 일정 기간 셀레스티아의 해군 기지를 임차해 사용했다. 독립 협상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셀레스티아의 독립 운동 세력은 즉각적인 완전 독립을 요구했고, 본국 정부와 군부 일부는 해협 바깥 항로의 거점을 잃을 수 없다며 단계적 자치를 고집했다. 협상이 교착된 1964년에는 셀레스티아 항구에서 대규모 파업과 시위가 벌어졌고, 이를 계기로 본국 정부는 완전 독립을 받아들이는 대신 해군 기지 임차 협정을 함께 체결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1차 랜드 전쟁을 막 끝낸 플로렌시아 여론은 또 다른 식민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셀레스티아의 독립으로 플로렌시아의 식민제국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플로렌시아의 탈식민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는데, 1880년과 1883년 정착 식민지였던 아르카디아와 테라바드리아의 독립,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네오바르디아의 독립, 1965년 1차 랜드 전쟁 이후 셀레스티아의 독립이 그 세 단계다. 오늘날 플로렌시아는 옛 식민지 네 나라와 경제·문화 교류를 이어 가고 있으며, 식민 지배의 역사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플로렌시아 사회의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 NLTO 창설 === 1969년 4월 4일 플로렌시아는 루이나, 빌베른과 함께 북랜드해 조약에 서명하고 [[NLTO]](북랜드해협 조약 기구)를 창설했다. 1차 랜드 전쟁 때 협상국으로 함께 싸운 세 나라가 전시 연합을 상설 군사동맹으로 굳힌 것이다. 조약은 가맹국 한 나라에 대한 무력 공격을 가맹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는 집단 방위 조항을 두었다. NLTO 창설로 플로렌시아의 안보 정책은 루이나를 중심으로 한 동맹 체제 안에 자리 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어져 온 루이나와의 협력이 조약으로 제도화되었으며, 플로렌시아는 창립 회원국으로서 동맹의 공동 방위 계획과 지휘 체계 수립에 참여했다. === 2차 랜드 전쟁 ===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상세 내용은 [[2차 랜드 전쟁]] 문서 참고.}}} 1973년 7월 14일 [[2차 랜드 전쟁]]이 일어났다. 냉전 구도가 파국적으로 격화하는 가운데 해상 교통로와 자원을 둘러싼 이권 분쟁, 민족주의와 이념의 대립이 겹쳤고, 곳곳의 국지전이 연쇄적으로 확전되면서 차가운 전쟁이 뜨거운 전쟁으로 바뀌었다. 플로렌시아는 루이나, 웨스타시아, 빌베른, [[북산]]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으로 [[청평]], [[동사랜드]], 사비에트, 고랜드, 체르드, 라 마베라 연방의 공산 진영과 맞섰다. 자크 르몽 총리의 정부는 개전 직후 NLTO 가맹국으로서 참전을 결정했다. 전쟁은 제3차 청북전쟁과 마베라 내전, 루이나의 체르드 침공 등 여러 전역에서 동시에 전개되었고, 플로렌시아는 연합국의 해상 교통로를 지키고 전선에 병력과 물자를 보내는 병참에서 큰 역할을 맡았다. 전쟁은 1976년 10월 2일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2차 랜드 전쟁은 NLTO가 창설된 뒤 동맹이 함께 치른 첫 전쟁이었다. 플로렌시아에게 이 전쟁은 1969년에 만든 동맹이 실제 전쟁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확인한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동맹의 의무가 자국이 직접 공격받지 않은 전쟁에까지 참전을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전쟁 기간 플로렌시아 국내에서는 참전 범위를 둘러싼 논쟁이 이어졌다. 1차 랜드 전쟁을 겪은 세대는 동맹에 대한 의리를 앞세웠고, 전후에 태어난 세대는 해협 반대편의 전쟁에 자국 병력을 보내는 것이 정당한지를 물었다. 이 논쟁은 이후 플로렌시아 의회가 해외 파병에 사전 동의를 요구하는 관행으로 이어졌다. === 국가과학단지와 레제르바-13 참사 ===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상세 내용은 [[플로렌시아 수몰지구]] 문서 참고.}}} 1956년 이후의 과학기술 투자는 1960년대에 국가과학단지 사업으로 이어졌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북서부 리본강의 수력 개발과 과학 벨트 조성을 묶는 기초 구상이 마련되었고, 1963년 7월 사업 부지가 특별관리구역으로 예비 지정되었다. 1967년 2월 「국가과학단지 조성법」이 제정되면서 레제르바 과학단지가 확정되었으며, 1969년 3월 착공해 1974년 10월 1단계 시설이 준공되어 부분 가동에 들어갔다. 레제르바 과학단지는 정보·소자·바이오 융합 연구의 국가 거점이었다. 국립 나노·소자연구원과 국가 고등계산센터, 생물안전동이 단지 안에 들어섰고, 1983년 3월에는 연산·인공지능 핵심 시설인 A-클러스터가 1차 구축되었다. 단지는 1980년대 플로렌시아 첨단 산업 정책의 상징이었다. 1987년 9월 14일 오전 2시 17분 리본강 상류 댐이 연쇄적으로 붕괴하면서 레제르바 과학단지 전 구역이 급격히 침수되었다. 정부는 오전 5시 40분 일대를 재난특구로 선포했지만, 공식 집계로 1,204명이 사망하고 337명이 실종되었다. 연구 시설과 데이터센터, 실험동은 인공호 수면 아래 그대로 가라앉았다. 레제르바-13 참사는 국가 주도 개발에 대한 플로렌시아 사회의 신뢰를 크게 흔들었다. 대규모 댐과 과학단지를 한데 묶은 설계가 적절했는지, 붕괴 이전에 위험 신호가 무시되지 않았는지를 두고 조사가 이어졌다. 수몰 구역은 지금도 국가 재난특구로 지정되어 군경이 상시 통제하고 있으며 민간인의 접근은 전면 금지되어 있다. 참사 이후 플로렌시아의 과학기술 정책은 방향을 바꾸었다. 국가 연구 기능을 한곳에 모으는 대형 단지 방식 대신 전국 대학과 지역 연구소에 연구 거점을 분산하는 방식이 채택되었고, 댐과 발전소, 연구 시설 같은 대형 국가 시설에는 독립 기관의 안전 검사가 의무화되었다. 레제르바에서 잃은 연구 인력과 자료를 복구하는 데에는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 현대 == 20세기 후반을 지나며 플로렌시아는 식민제국에서 NLTO 중심의 동맹국이자 수출 강국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오늘날 플로렌시아는 이원집정부제 아래 삼권분립과 보편참정권을 갖춘 공화국으로, 민주주의 지수는 10점 만점에 8.6점이다. 대통령과 의회의 신임을 받는 총리가 행정권을 나누어 가지며, 1차 랜드 전쟁과 2차 랜드 전쟁에서 모두 총리가 전시 정부를 이끌었듯 정부 운영의 실무는 총리와 내각이 맡는다. 인구는 약 7,800만 명, 명목 국내총생산은 약 3.9조 달러, 1인당 국내총생산은 약 5만 달러에 이른다. 명품과 식음료, 의약·화학, 항공 산업이 수출을 이끌고 있으며, 필라델피아의 차펨하임 스트리트는 여전히 해협의 금융 중심지다. 1878년 이래의 국가 개입 전통은 오늘날의 두터운 복지 제도와 공공 부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과거사에 대한 평가도 현대 플로렌시아의 중요한 쟁점이다. 1706년과 1711년의 혁명은 국가 정체성의 뿌리로 기념되지만, 같은 공화국이 두 세기 넘게 식민지를 지배했다는 사실은 그 기념을 불편하게 만든다. 옛 식민지 출신 이주민 공동체와 역사학계는 강제 노동과 식민지 동원의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해 왔고, 정부는 부분적인 사과와 기록 공개로 응해 왔다. 레제르바-13 참사 역시 국가 주도 개발의 그늘을 보여 주는 사건으로 교과서에 실려 있다. 냉전은 2차 랜드 전쟁 이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해협의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대립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플로렌시아는 NLTO의 일원으로 이 대립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두 차례 랜드 전쟁의 기억은 플로렌시아의 국방 정책에 짙게 남아, 플로렌시아는 해협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해군과 공군을 유지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동시에 대외 선전과 군비 경쟁이 일상이 된 냉전 구도 속에서 군사비 부담과 복지 지출 사이의 균형은 플로렌시아 정치의 오래된 쟁점으로 남아 있다. 외교에서 플로렌시아는 NLTO 창립 회원국으로서 루이나, 빌베른과의 동맹을 안보의 중심에 두고 있다. 1672년의 침공과 1775년의 개입으로 한때 각각 적이었던 두 나라가 오늘날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라는 점은 플로렌시아 근현대 외교사의 흐름을 압축해서 보여 준다. 현 대통령은 마들렌 드 라 포레, 현 총리는 로랑 바슈롱이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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