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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1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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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루이나]][[분류:루이나 왕국]][[분류:루이나의 국왕]] [include(틀:역대 루이나 국왕)] [목차] [clearfix] == 개요 == [[루이나 왕국]] 제14대 국왕 [[카렐 1세]]의 생애를 다룬 문서. == 유년기 == === 출생 === 1595년 11월 8일 [[남부 고지 대공국]]의 카엘몬트 성에서 대공 제이머스 4세(훗날의 [[제이머스 1세]])와 [[아나 드 스카니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다섯 살 많은 형 [[에드먼드 드 카엘몬트|에드먼드]]와 세 살 많은 누나 [[엘리사벨 드 카엘몬트|엘리사벨]]이 있었다. 출산은 순조롭지 않았다. 아이가 너무 작고 울음이 약해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리라 여긴 사제가 새벽에 급히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이 카엘몬트 성 예배당 명부에 남아 있다. 이름은 증조부에게서 따왔다. === 병약한 아이 === 그는 몹시 허약했다. 세 살이 되도록 혼자 서지 못했고 네 살에야 겨우 걸었다. 발목과 무릎이 약해 몇 걸음마다 주저앉았기 때문에, 다섯 살 무렵부터 열 살 무렵까지 발목을 고정하는 철제 보조 신발을 신었다. 이 신발은 무겁고 소리가 커서 복도를 걸으면 멀리서도 그가 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말도 늦었다. 다섯 살까지 단어를 몇 개밖에 쓰지 못했고, 말문이 트인 뒤에는 심하게 더듬었다. 궁정 의사 하나가 혀 아래 힘줄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어머니 아나 대공비가 이를 거부했다. 대신 그는 매일 아침 낭독 훈련을 받았다. 짧은 기도문을 소리 내어 읽는 연습이었는데, 한 문장을 끝까지 더듬지 않고 읽으면 그날은 훈련을 마치는 식이었다. 어떤 날은 그것으로 오전이 다 갔다. 왼손잡이였으나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도록 교정받았다. 후대의 일부 기록자들은 말더듬이 심해진 시기가 이 교정 시기와 겹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다만 그 결과로 그의 필체는 대단히 단정해졌고, 성인이 된 뒤 서명과 문서 정서를 남에게 맡기지 않은 것도 이때 들인 습관에서 비롯되었다. 밤에 이불을 적시는 일이 열 살 무렵까지 이어졌다. 침구를 맡은 시녀 마르가 텔런이 매일 새벽 아무 말 없이 요를 갈았고, 이 일은 성 안에서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훗날 그가 시종들의 침묵과 절차를 병적일 만큼 중시하게 된 배경으로 이 시기를 드는 견해가 있다. === 성 안의 일상 === 바깥에서 뛰노는 대신 그는 실내에서 시간을 보냈다. 유모와 가정교사, 시녀 몇 사람이 그의 세계 전부였다. 이 시기에 굳어진 습관들이 평생 갔다. * 물건을 정해진 자리에 두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다. 책상 위 필기구의 순서까지 정해 두었고, 누가 흐트러뜨리면 스스로 다시 배열한 뒤에야 다른 일을 시작했다. * 소식(小食)했다. 정해진 몇 가지 외에는 손대지 않았으며, 성인이 된 뒤에도 궁정 연회에서 거의 먹지 않아 손님들을 당황하게 했다. * 노래를 전혀 부르지 못했다. 음정을 잡지 못해 예배 때 입만 움직였고, 이 습관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 라틴어를 빠르게 익혔다. 말로 하는 대화보다 글로 하는 공부가 편했기 때문이다. 열 살 무렵에는 형보다 라틴어 문장을 잘 지었다. 형 에드먼드와의 관계는 복잡했다. 에드먼드는 동생을 아꼈지만 놀리기도 했다. 카렐이 성직자처럼 조용하고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너는 대주교나 하는 게 좋겠다"며 사제 모자를 씌우려 한 일화가 전한다. 어른들은 웃어넘겼고 카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대의 기록자들은 이 장면을 즐겨 인용하는데, 그가 훗날 [[루이나 교회]]의 예식 문제에 그토록 집착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처음 조랑말에 올랐을 때는 세 번 연속으로 떨어졌다. 마구간지기가 그를 다시 태우려 하자 그는 울지 않고 스스로 등자를 잡았다고 한다. 성인이 된 뒤 그는 궁정에서 손꼽히는 기수가 되었다. === 남겨진 1년 === 1603년 봄, 아버지가 [[엘리사벨 1세]]의 사망으로 루이나 왕위를 이어받아 벨포르로 떠났다. 어머니와 형, 누나가 모두 함께 갔다. 여덟 살의 카렐만 남았다. 겨울 바다를 건너는 여정을 감당할 만큼 튼튼하지 않다는 궁정 의사들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는 이후 1년 남짓을 카엘몬트 성에서 유모 마르가 텔런과 소수의 시종만을 두고 지냈다. 이 시기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짧은 편지 몇 통이 남아 있는데, 서기가 대필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서투른 필체로 적힌 것들이다. 대부분 자신이 얼마나 건강해졌는지를 알리는 내용이며, 언제 데리러 오는지를 묻는 문장이 반복된다. 답장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카렐이 벨포르에 도착한 것은 1604년 여름이었다. 새 왕궁에서 형과 누나는 이미 자기 자리를 잡은 뒤였고, 궁정 사람들은 대공의 셋째 아이를 잘 알지 못했다. 그는 사람들이 모인 방의 구석에 앉아 벽에 걸린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는 아이로 기억되었다. 훗날 유럽에서 손꼽히는 미술 수장고를 이루게 되는 수집벽의 출발점이 이 무렵이었다.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남부 고지에서 그는 [[남부 고지 장로회]]의 간소하고 엄격한 예배 속에서 자랐다. 벨포르에서 처음 접한 [[루이나 교회]]의 예식은 그에게 전혀 다른 세계였다. 촛불과 성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움직이는 사제들의 질서정연함은,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던 아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30여 년 뒤 그가 자신이 자란 땅에 그 예식을 강요하다 왕관을 잃게 되는 일의 씨앗이 여기에 있었다. == 왕자 시절 == === 두 번째 아들 === 벨포르 궁정에서 카렐의 자리는 분명했다. 두 번째 아들이었고, 왕위와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부왕 [[제이머스 1세]]는 학문과 신학 논쟁에 몰두하는 인물이라 아들들을 세심하게 살피는 편이 아니었고, 어머니 [[아나 드 스카니아]]는 궁정 가면극과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카렐을 실제로 돌본 사람은 남부 고지에서 함께 올라온 유모 마르가 텔런과 몇 명의 가정교사였다. 형 [[에드먼드 드 카엘몬트|에드먼드]]는 정반대였다. 키가 크고 활달했으며 마상 창시합과 사냥에 능했다. 열네 살에 이미 성인 기사들과 겨루었고, 궁정 시인들은 그를 두고 옛 [[알드리크 1세]]가 돌아왔다고 썼다. 개신교 유럽은 그를 장차 가톨릭 세력에 맞설 군주로 기대했다. 카렐은 그 옆에 서 있는 아이였다. 형의 시합을 관람석에서 지켜보았고, 형의 친구들 사이에서 말수가 적었으며,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때는 대개 에드먼드의 동생으로 불렀다. === 스스로에게 부과한 규율 === 이 시기 카렐이 택한 방식은 노력으로 결함을 덮는 것이었다. 그것도 대단히 집요한 방식이었다. 열한 살 무렵 철제 보조 신발을 벗은 뒤로, 그는 매일 새벽 아무도 없는 시간에 마장에 나가 혼자 말을 탔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술도 같은 방식으로 익혔다. 스물이 될 무렵 그는 궁정에서 손꼽히는 기수가 되었고, 성인이 된 뒤에는 하루 여섯 시간을 말 위에서 보내도 지치지 않았다. 말더듬은 끝내 고치지 못했다. 대신 그는 그것을 관리하는 법을 익혔다. 말을 짧게 끊고, 문장을 미리 만들어 두고, 어려운 자음으로 시작하는 단어를 피해 다른 말로 바꾸는 습관이었다. 공식 석상에서 그가 거의 발언하지 않은 것은 오만해서가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문장을 입에 올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만 이 습관은 그를 실제보다 차갑고 거만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 수집의 시작 === 벽에 걸린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던 아이는 열세 살에 처음으로 자기 돈을 주고 그림을 샀다. 대륙 화가의 작은 성모상이었고, 값은 그의 한 달 용돈을 넘었다. 그는 이것을 침실에 걸었다가 장로회식 교육을 받은 가정교사에게 지적을 받았으나 떼지 않았다. 이후 그의 수집은 평생에 걸쳐 이어졌다. 그림뿐 아니라 조각, 메달, 판화, 태피스트리까지 손을 댔고, 즉위 후에는 대륙 왕가의 소장품을 통째로 사들이는 일까지 있었다. 재정이 어렵던 시기에도 수집만은 줄이지 않아 의회의 비판을 샀지만, 그가 남긴 수장고는 당대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 === 형의 죽음 === 1612년 8월, 에드먼드가 열병으로 앓아누웠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으나 사흘 만에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카렐은 병실을 떠나지 않았다. 의사들이 전염을 우려해 그를 내보내려 했지만 듣지 않았다. 에드먼드가 마지막 밤에 동생을 알아보고 무언가 말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무슨 말이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형은 스물둘에 죽었다. 장례는 성대했다. 개신교 유럽 전체가 애도했고, 카렐은 상주로서 행렬의 맨 앞에 섰다. 그리고 열흘 뒤 그는 왕태자가 되었다. 부왕이 그에게 "이제 네가 에드먼드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격려의 뜻이었겠으나 열여섯의 소년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후대의 전기 작가들은 이 한마디를 카렐 1세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열쇠로 자주 인용한다. 그는 평생 자기 자신으로 왕이 된 적이 없다고 느꼈고, 그렇기 때문에 왕위가 자신에게 온 이유를 사람이 아닌 다른 데서 찾아야 했다는 것이다. == 왕태자기와 이베리아 혼담 == === 왕태자 책봉 === 1612년 8월의 책봉식에서 그가 낭독해야 할 선서문은 원래보다 짧게 다시 작성되었다. 말더듬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중간에 한 번 멈췄고, 회복하는 데 십수 초가 걸렸다. 그 자리에 있던 한 외국 사절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 새 왕태자가 "형만 못하다"고 적었다. 이후 14년의 왕태자기 동안 그는 국정에 거의 관여하지 못했다. 부왕은 아들에게 실무를 맡기지 않았고, 그는 회의에 배석하되 발언하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시기에 그가 배운 통치란 대체로 관찰을 통한 것이었으며, 그중에서도 부왕이 의회와 다투다 번번이 물러서는 장면이 가장 깊이 남았다. === 렌포드 공작 === 1615년 무렵 궁정에 [[에드거 벨몬트]]라는 젊은 귀족이 등장했다. 하급 지주 가문 출신이었으나 외모가 준수하고 춤과 대화에 능해 부왕의 총애를 순식간에 얻었고, 몇 해 만에 렌포드 공작이 되었다. 카렐보다 세 살 위였던 벨몬트는 처음에 왕태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왕태자도 그를 경계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뒤집힌 것은 1618년 무렵으로, 이후 벨몬트는 카렐에게 형이자 친구이자 정치 교사가 되었다. 형을 잃은 지 6년 만에 그는 다시 형을 얻은 셈이었다. 이 결속은 카렐에게 사교와 자신감을 주었지만 판단력을 흐리게도 했다. 벨몬트가 추진한 사업은 대부분 실패했고, 그 실패의 대가는 왕태자가, 나중에는 국왕이 치렀다. === 누나의 혼인과 대륙 전쟁 === 1613년 누나 [[엘리사벨 드 카엘몬트|엘리사벨]]이 대륙의 개신교 제후 [[베르덴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혼인했다. 화려한 혼례였고 루이나는 개신교 유럽의 맹주로 대접받았다. 문제는 6년 뒤에 터졌다. 매형이 대륙의 한 왕관을 수락했다가 가톨릭 동맹군에게 참패하고 자기 영지까지 통째로 잃은 것이다. 누나 부부는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고, 루이나 안에서는 개신교 형제국을 도와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카렐은 이 문제에 개인적으로 반응했다. 그것은 외교가 아니라 누나의 일이었다. 이후 그가 대륙 개입에 집착하고 그 전비 때문에 의회와 충돌하게 되는 배경에는 이 감정이 있었다. === 이베리아 원정 === 1617년부터 궁정은 왕태자와 [[이베리아]] 왕녀의 혼담을 추진했다. 지참금으로 전비를 충당하고 이베리아를 중립화하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베리아는 왕태자의 가톨릭 개종과 루이나 내 가톨릭 관용을 요구하며 협상을 끌었고, 4년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었다. 1621년 봄, 카렐과 렌포드 공작은 부왕에게 알리지 않고 벨포르를 떠났다. 가짜 수염을 붙이고 형제 상인 행세를 하며 대륙을 가로질러 이베리아 궁정에 직접 나타났다. 왕태자가 몸소 구혼하면 상대가 차마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계산이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베리아는 협상 카드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고 판단하고 조건을 더 올렸다. 왕태자는 여덟 달 동안 이베리아 궁정에 사실상 붙들려 있었다. 왕녀와 제대로 대면한 적도 없었다. 정원 담 너머로 그를 훔쳐보다 들켰다는 일화가 전하는데, 사실 여부와 별개로 그가 처한 위치를 잘 보여 준다는 이유로 자주 인용된다. 두 사람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루이나에서는 왕태자가 가톨릭 왕국의 혼담을 걷어차고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항구에는 군중이 몰렸고 도시마다 종이 울렸으며 축포가 올랐다. 카렐이 생애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 여덟 달은 그에게 두 가지를 남겼다. 하나는 이베리아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다른 하나는 더 오래 갔다. 협상이란 상대에게 약점을 드러내는 일이며, 한 번 물러서면 요구는 반드시 늘어난다는 확신이었다. === 혼인 === 1622년, 카렐은 [[플로렌시아]] 왕녀 [[앙리에트 드 플로렌시아|앙리에트]]와 혼인했다. 신부는 열다섯이었고 루이나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혼인 조약에는 왕비가 궁정 안에서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 전속 사제와 수행단을 둘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이베리아와의 혼담을 깨뜨린 자리에 또 다른 가톨릭 왕녀가 들어온 셈이었고, 개혁파는 즉시 이를 문제 삼았다. 두 사람의 초기 관계는 나빴다. 국왕은 아내보다 렌포드 공작을 가까이 두었고, 왕비는 자신이 데려온 플로렌시아 수행단하고만 어울렸다. 1626년 국왕이 왕비의 수행단 대부분을 배에 태워 본국으로 돌려보내면서 갈등은 정점에 이르렀다. 왕비가 창문을 깨뜨리며 항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관계가 달라진 것은 1628년 렌포드 공작이 죽은 뒤부터였다. 의지할 사람을 잃은 국왕은 비로소 아내에게 돌아섰고, 이후 두 사람은 당대 궁정에서 보기 드물게 금슬 좋은 부부가 되었다. 왕비는 훗날 내전 중에 왕실 보석을 들고 대륙으로 건너가 무기를 사들이는 일까지 했다. == 즉위와 초기 의회 == === 즉위와 대관식 === 1626년 3월 부왕이 사망하고 카렐 1세로 즉위했다. 서른한 살이었다. 같은 해 6월 벨포르 대성당에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두 가지가 사람들의 입에 올랐다. 하나는 국왕이 관례와 달리 흰옷을 입었다는 점이었다. 순결과 신앙을 나타내려는 뜻이었으나, 후대에는 이것이 불길한 징조였다는 이야기가 붙었다. 다른 하나는 왕비석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앙리에트는 개신교 예식으로 관을 받을 수 없다며 참석하지 않았다. === 세 번의 의회 === 즉위 첫 4년 동안 국왕은 의회를 세 차례 소집하고 세 차례 해산했다. 첫 의회는 대륙 원정의 전비를 승인하는 대신 렌포드 공작의 책임부터 따지려 했다. 국왕은 공작을 건드리는 것은 자신을 건드리는 것이라며 의회를 해산했다. 전비가 필요했던 국왕은 의회 없이 돈을 걷었다. 유력자들에게 강제로 공채를 떠안기는 방식이었고, 이를 거부한 다섯 명의 기사를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구금했다. 이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이 국왕의 손을 들어주자, 국왕이 이유 없이 신민을 가둘 수 있다는 사실이 판례로 확인된 셈이 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 모든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1628년 세 번째 의회는 [[권리 청원]]을 가결했다. 의회의 동의 없는 과세, 이유를 밝히지 않는 구금, 민가에 대한 군대 숙영, 계엄의 남용을 모두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국왕은 전비를 얻기 위해 마지못해 재가했다. 재가문의 문구를 두고도 실랑이가 있었는데, 국왕이 처음 보낸 답변이 애매하다는 이유로 의회가 다시 요구해 결국 정식 재가 문구를 받아냈다. === 렌포드 공작의 죽음 === 1628년 8월, 렌포드 공작이 원정 준비 중이던 항구 도시의 여관에서 퇴역 장교 토마스 렌에게 살해당했다. 렌은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자신이 나라를 위해 한 일이라고 말했다. 국왕은 예배 중에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예배를 끝까지 마친 뒤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고, 이틀 동안 나오지 않았다. 바깥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벨포르 시민들은 거리에서 축배를 들었고 암살자를 기리는 노래가 나돌았다. 렌이 처형장으로 끌려갈 때 사람들이 길가에서 그를 축복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대비는 국왕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사람을 죽인 자를 신민들이 영웅으로 떠받든다면, 그 신민들의 판단이라는 것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결론이었다. === 1629년의 해산 === 1629년 3월, 국왕은 의회에 휴회를 명했다. 그러나 하원 의원들은 의장을 의자에 붙들어 앉힌 채 문을 걸어 잠그고 결의문 세 건을 통과시켰다. 국왕의 명을 받은 관리가 문을 두드리는 동안 안에서는 표결이 진행되고 있었다. 며칠 뒤 국왕은 의회를 해산했다. 주동자 아홉 명이 체포되었고 그중 한 사람은 옥사했다. 국왕은 앞으로 의회를 부를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실제로 그 뒤 11년 동안 의회는 소집되지 않았다. == 무의회 통치 == === 평화의 11년 === 1629년부터 1640년까지의 시기를 왕당파는 평화의 11년이라 불렀고 의회파는 11년의 폭정이라 불렀다. 전자의 근거도 없지 않았다. 국왕은 대륙 전쟁에서 손을 뗐고, 그 결과 루이나는 유럽이 전화에 휩싸인 동안 평화를 누렸다. 무역량은 늘었고 항구는 붐볐다. 궁정은 화려했으며 가면극과 연회가 이어졌다. 왕비와의 사이도 좋았다. 1628년 장남 [[카렐 2세|카렐]], 1630년 딸 [[마리 드 카엘몬트|마리]], 1631년 차남 [[제이머스 2세|제이머스]]가 태어났다. 국왕은 아이들을 몹시 아꼈고 가족 초상화를 여러 점 주문했다. === 돈을 만드는 방법들 === 문제는 재정이었다. 의회 없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국왕은 잊혀진 관행들을 차례로 되살렸다. * 수백 년간 방치되었던 옛 왕실 삼림의 경계를 문헌에 따라 되짚어, 그 안에 들어온 토지의 소유주들에게 벌금을 물렸다. * 일정 이상의 토지를 가진 자는 기사 작위를 받아야 한다는 옛 규정을 근거로, 작위를 받지 않은 지주들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 특정 상품의 제조와 판매를 독점할 권리를 팔았다. 비누 독점을 둘러싼 잡음이 특히 컸다. 이 조치들은 모두 형식상 합법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문제였다. 국왕은 법을 어긴 적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었고, 반대자들은 법 자체가 국왕의 편이라고 결론 내렸다. === 함세와 로스웰 사건 === 가장 큰 반발을 부른 것은 [[함세]]였다. 본래 전시에 해안 지방에만 부과하던 함대 유지비를, 국왕은 평시에 내륙 주까지 확대해 매년 걷었다. 명분은 해적으로부터 왕국 전체를 지킨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이 돈으로 함대가 증강된 것도 사실이었다. 1637년 내륙 지주 [[윌리엄 로스웰]]이 납부를 거부했다. 그가 내지 않은 금액은 크지 않았으나 그는 액수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재판은 열두 명의 법관 앞에서 열렸고, 판결은 일곱 대 다섯으로 국왕의 승리였다. 국왕은 이겼지만 실제로는 졌다. 다섯 명의 법관이 국왕에 반대했다는 사실,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국왕 측 논거의 취약함이 공개적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이 필사본으로 전국에 퍼졌다. 로스웰은 하루아침에 유명해졌고, 그의 이름은 이후 저항의 대명사가 되었다. === 콜슨 대주교와 교회 정책 === 종교 정책도 같은 방향으로 갔다. 국왕은 [[벨포르 대주교]] [[리처드 콜슨]]을 앞세워 [[루이나 교회]] 안의 고교회파를 후원하고 예배 형식을 통일하려 했다. 성찬대를 회중석 가운데에서 동쪽 끝으로 옮기고 난간을 두르게 했으며, 성직자의 복식을 규정하고, 설교보다 예식을 중시하게 했다. 어린 시절 벨포르에서 처음 본 그 질서정연한 예배를 왕국 전체에 심으려는 시도였다. 개혁파에게 이는 가톨릭으로 되돌아가는 신호로 보였다. 이를 글로 비판한 세 사람이 특별 법정에서 귀를 잘리는 형을 받고 낙인이 찍힌 사건은 특히 큰 충격을 주었다. 세 사람 모두 신사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형이 집행되던 날 형장에 모인 군중이 그들을 향해 모자를 벗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남부 고지 위기 == === 기도서 === 1637년 국왕은 [[남부 고지 대공국]]에도 루이나 교회의 공통 기도서를 도입하도록 명했다. 그는 이 조치를 대공으로서 자기 영지를 정리하는 일로 여겼다. 남부 고지의 대공은 자신이었고, 자신은 그 땅에서 태어났으며, 따라서 그 땅의 예배를 정하는 것도 자신의 권한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남부 고지는 왕국에 병합된 적 없는 별개의 정치체였다. 기도서는 신학의 문제이기 이전에 자치의 문제였다. 게다가 그 기도서는 남부 고지 교회의 총회를 거치지 않고 벨포르에서 내려온 것이었다. === 카엘몬트 대성당의 폭동 === 1637년 7월, 카엘몬트 대성당에서 새 기도서로 첫 예배가 열렸다. 사제가 기도문을 읽기 시작하자 회중석에 있던 한 여인이 앉아 있던 접의자를 들어 강단으로 던졌다. 이것이 신호가 되었다. 성당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폭동은 도시 전체로 번졌다. 그 여인의 이름은 기록마다 다르게 전하며 실존 인물인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접의자를 던지는 장면은 남부 고지 저항의 상징으로 남았다. 카렐 1세는 자신이 태어난 성의 대성당에서 자신의 기도서가 의자에 맞아 쫓겨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 국민 서약 === 1638년, 남부 고지의 귀족과 성직자, 도시 대표들이 카엘몬트의 한 교회 묘지에 모여 [[국민 서약]]에 서명했다. 국왕에 대한 충성을 확인하면서도, 총회를 거치지 않은 종교적 변경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서명은 며칠에 걸쳐 이어졌다. 사본이 남부 고지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마을마다 서명 행렬이 생겼다. 이름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표식을 남겼다. 몇 달 만에 남부 고지 성인 남성 다수가 서명했다. 국왕은 이를 반란으로 규정했다. 서약파는 자신들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없으며 다만 국왕이 잘못된 조언을 받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양쪽 모두 물러설 곳이 없었다. === 두 번의 원정 === 1639년 국왕은 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상비군이 없었다. 급히 징집된 병사들은 훈련되지 않았고 급료도 밀렸으며, 무엇보다 자신들이 왜 같은 개신교도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국왕은 접전 없이 협정을 맺고 물러났다. 1640년의 두 번째 원정은 더 나빴다. 서약파 군대가 국경을 넘어 북부 주를 점령했고, 국왕은 점령지를 되찾기는커녕 그들이 주둔하는 비용까지 매일 지불하는 조건으로 휴전해야 했다. 남부 고지 대공이 남부 고지를 상대로 벌인 전쟁이었고, 국왕은 자기 영지에서 졌으며, 그 대가로 매일 돈이 나가고 있었다. 의회를 부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 의회 재소집 == === 3주짜리 의회 === 1640년 4월, 11년 만에 의회가 소집되었다. 국왕은 전비 승인을 요구했고 의회는 11년간 쌓인 문제부터 다루자고 했다. 함세, 삼림 벌금, 독점, 귀가 잘린 사람들, 구금된 사람들의 목록이 차례로 올라왔다. 국왕은 3주 만에 이를 해산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의회를 단기 의회라 불렀다. === 장기 의회 === 그해 가을 국왕은 다시 의회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북부 주에 주둔한 서약파 군대의 비용이 계속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소집된 의회는 완전히 달랐다. 국왕에게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돈이 자신들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의원들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의회는 스스로의 동의 없이는 해산될 수 없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함세를 불법으로 선언했고, 특별 법정들을 폐지했으며, 대주교 콜슨을 탄핵해 투옥했다. 국왕은 하나씩 재가했다. 재가하지 않을 힘이 없었다. === 몰트비의 죽음 === 의회의 표적은 국왕의 최측근이자 재상이던 [[제라드 몰트비|제라드 몰트비, 콘웨이 백작]]이었다. 유능하고 냉혹한 행정가였고, 국왕에게 남부 고지를 무력으로 굴복시키라고 조언한 인물이었다. 반역죄 재판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의회는 재판을 포기하고 사권박탈법을 택했다. 죄를 입증하는 대신 법률로 유죄를 선언하는 방식이었다. 국왕은 몰트비에게 목숨과 재산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러나 벨포르 거리에는 군중이 몰려들었고, 왕궁 앞에서 왕비를 겨냥한 구호가 나오기 시작했다. 왕비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이 국왕에게 전해졌다. 옥중의 몰트비가 국왕에게 편지를 보냈다. 자신의 목숨 때문에 국왕과 왕국이 위태로워져서는 안 되니 서명하라는 내용이었다. 1641년 5월, 국왕은 사형 집행장에 서명했다. 서명한 뒤 그는 한동안 아무와도 말하지 않았다. 이 서명은 그의 생애에서 유일하게 신념보다 안전을 택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는 날까지 이 일을 후회했다. 후대의 해석은 대체로 일치한다. 이때 한 번 물러섰기 때문에, 그는 이후 어떤 사안에서도 다시는 물러서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 다섯 의원 === 1641년 겨울을 지나면서 의회 안에서도 분열이 생겼다. 국왕의 권한을 더 깎아내려는 강경파와, 이미 충분하다고 보는 온건파가 갈렸다. 국왕에게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기다리는 대신 움직였다. 1642년 1월, 국왕은 무장 호위 400여 명을 이끌고 의사당에 들어갔다. 반대파 지도자 다섯 명을 반역죄로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의원들은 이미 몸을 피한 뒤였다. 국왕은 의장석 옆에 서서 좌석을 하나하나 훑어본 뒤 새들이 날아갔다고 말하고 돌아섰다. 의사당을 나서는 그의 등 뒤로 의원들이 특권이라 외쳤다. 이 하루로 온건파는 사라졌다. 국왕이 무장 병력을 이끌고 의사당에 들어왔다는 사실 앞에서 의회는 하나가 되었고, 벨포르 시민들도 등을 돌렸다. 며칠 뒤 국왕 일가는 도시를 떠났다. 왕비는 왕실 보석을 들고 대륙으로 건너가 무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어떤 루이나 국왕도 의사당에 발을 들이지 않는 관례가 여기서 생겼다. == 내전 == === 개전 === 1642년 8월, 국왕은 서부의 한 언덕에서 군기를 올렸다. 비바람이 심해 그날 밤 깃대가 넘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전선은 지리와 계급을 따라 갈렸다. 서부와 북부의 지주 계층, 고교회파 성직자, 전통적 귀족이 국왕 편에 섰다. 내해 연안의 상업 도시, 항구, 개혁파 신자, 해군 대부분이 의회 편에 섰다. 대체로 부유한 지역이 의회 쪽이었다는 점이 결국 전쟁의 향방을 결정했다. === 초기 우세 === 개전 초 국왕군이 유리했다. 기병 전력이 앞섰고 지휘관들이 실전 경험을 가진 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첫 대규모 회전인 로엔필드에서 양측은 결판을 내지 못했으나, 그해 가을 국왕군은 벨포르 외곽까지 진출했다. 이때 국왕이 곧장 수도로 진격했다면 전쟁이 그해에 끝났으리라는 것이 후대의 일반적인 평가다. 그는 진격 대신 회의를 열었고, 협상 가능성을 검토했으며, 병력 재편을 지시했다. 그 며칠 사이 벨포르의 시민 민병대가 방어선을 구축했다. 국왕은 물러났다. 1643년까지 국왕군은 여러 전선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승리는 없었다. === 신형군 === 판세가 뒤집힌 것은 1645년이다. 의회는 그해 봄 [[신형군]]을 창설했다. 지역 부대들을 해체하고 하나의 상비군으로 재편한 것으로, 세 가지가 이전과 달랐다. 출신이 아니라 능력으로 지휘관을 뽑았고, 급료를 정기적으로 지급했으며, 전국 어디로든 이동시킬 수 있었다. 총사령관은 엘름스터 출신의 하급 지주이자 의회 의원이었던 [[시몬 하드윅]]이었다. 그는 기병 지휘관으로 이름을 얻은 인물이었고, 부대 안에서 예배와 규율을 엄격히 요구했다. 국왕 측은 이 조직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귀족이 아닌 자들이 지휘하는 군대가 얼마나 가겠느냐는 것이었다. === 하버포드 === 1645년 여름, 하버포드 근교에서 양군이 맞붙었다. 국왕군은 병력에서 이미 열세였고 기병의 우위도 사라진 뒤였다. 전투는 반나절 만에 끝났다. 국왕군 주력이 궤멸했고 포병 전부와 보급 열차를 잃었다. 그중에는 국왕의 개인 문서함도 있었다. 여기서 나온 서신들이 문제였다. 국왕이 대륙의 가톨릭 세력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한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의회는 이를 인쇄해 전국에 뿌렸다. 이 문서함은 군사적 패배보다 더 큰 타격이었다. 그때까지 국왕을 나쁜 조언자에게 둘러싸인 선량한 군주로 보던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 === 항복 === 1646년 봄, 국왕은 마지막 거점을 떠나 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가 향한 곳은 의회군이 아니라 북부 주에 주둔한 남부 고지군이었다. 계산이 있었다. 자신은 남부 고지의 대공이고, 그들은 국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에 명시한 사람들이며, 종교 문제만 양보하면 자신을 지켜 주리라는 것이었다. 남부 고지군은 그를 아홉 달 동안 데리고 있었다. 그동안 협상이 오갔고, 국왕은 기도서 문제에서 물러설 뜻을 내비쳤으나 확답은 끝내 주지 않았다. 그사이 의회는 남부 고지군의 밀린 주둔 비용을 정산하겠다고 제안했다. 1647년 1월, 남부 고지군은 정산금을 받고 철수하면서 국왕을 의회에 인도했다. 사람들은 이 거래를 오래 기억했다. == 항복과 유폐 == 인도된 국왕은 북부의 [[뉴어크 성]]에 유폐되었다. 대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시종을 두었고 산책과 서신 왕래가 허용되었으며 방문객도 받았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이 여전히 협상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그랬다. 의회 온건파, 남부 고지 장로회, 신형군 지휘부 세 세력은 서로를 불신했고, 저마다 국왕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국왕은 세 곳 모두에 서로 다른 조건을 흘리며 시간을 끌었다. 어느 쪽과도 최종 합의에 이를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나라가 왕 없이는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1646년 가을, 그는 유폐지를 빠져나가 남부 고지로 향하려다 사흘 만에 붙잡혔다. 창살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 오판해 준비가 부실했고, 협력자들이 배를 대기로 한 지점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탈출 시도가 결정적이었다. 그때까지 국왕을 협상 상대로 남겨 두려던 온건파의 입지가 무너졌다. 신형군 지휘부 안에서는 이 사람과는 어떤 합의도 지켜지지 않으리라는 판단이 굳어졌다. 그해 겨울 그는 벨포르로 이송되었다. == 재판과 처형 == === 특별 고등법원 === 의회 안에서도 국왕을 재판한다는 결정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온건파 의원들이 군에 의해 의사당 출입을 저지당한 뒤에야 [[특별 고등법원]] 설치가 가결되었다. 남은 의원은 전체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재판은 1647년 1월 20일에 시작되었다. 법정에 들어선 국왕은 모자를 벗지 않았다. 자신보다 높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표시였다. 낭독된 기소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wiki style="border-left:5px solid #8f2f5c; padding:8px 18px;" 루이나 왕국 인민의 이름으로, 그리고 이 법정에 부여된 권한에 따라 아래와 같이 고발한다. 카렐 드 카엘몬트는 루이나의 국왕으로서 이 왕국을 다스릴 권한을 받았다. 그러나 그 권한은 그의 소유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법에 따라, 법이 정한 한계 안에서, 이 왕국의 인민을 이롭게 하라는 조건으로 위임된 것이었다. 왕관을 쓰는 자리에서 그가 한 선서 또한 그와 같았다. 그는 이 나라의 법을 지키고 그 법에 따라 다스리겠다고 신 앞에서 맹세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권한을 뒤집어, 제한 없고 폭압적인 통치를 세우려는 뜻을 품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인민의 대표를 그 자리에서 몰아냈다. 스스로 소집한 의회를 세 차례 흩어 버렸고, 마지막에는 열한 해에 걸쳐 의회를 부르지 아니하였다. 그 열한 해 동안 그는 어느 누구의 동의도 없이 신민의 재산에 손을 대었다. 전시에만, 그것도 해안에만 부과되던 함대의 부담금을 평시에 내륙까지 넓혀 해마다 걷었고, 잊혀진 삼림의 경계를 되짚어 벌금을 물렸으며, 작위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주들에게 돈을 물렸고, 물건을 만들고 파는 권리를 팔아 이득을 취하였다. 이에 응하지 아니한 자들은 죄목을 듣지도 못한 채 갇혔다. 그는 의회가 올린 청원을 재가하여 이러한 일을 다시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으나, 그 약속에 서명한 손으로 이듬해에 같은 일을 하였다. 또한 그는 신민의 양심에 손을 대었다. 자신이 정한 예식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법정에 세워 귀를 자르고 낙인을 찍었으며, 이 왕국에 병합된 바 없는 남부 고지에까지 자신의 기도서를 강요하였다. 그곳 사람들이 이를 거부하자 그는 그들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두 차례 군대를 일으켰다. 이 전쟁으로 왕국의 북부가 점령당하였고, 그 점령의 비용마저 이 나라의 인민이 물었다. 그는 인민의 대표들이 모인 의사당에 무장한 병력을 이끌고 들어와 의원 다섯 사람을 잡아가려 하였다. 이 나라의 어떤 국왕도 하지 않은 일이며, 어떤 법에도 근거가 없는 일이었다. 그해 여름 그는 자신의 백성을 상대로 군기를 올렸다. 그로부터 네 해 동안 이 땅에서 벌어진 일을 이 법정은 낱낱이 열거하지 아니하겠다. 로엔필드에서, 카른무어에서, 하버포드에서, 그리고 이름조차 남지 않은 수백 곳의 들판과 마을에서 이 나라의 사람들이 이 나라의 사람들을 죽였다. 불탄 집과 갈아엎지 못한 밭과 아비 없는 아이들이 그 결과다. 이 모든 피는 그가 스스로 시작한 전쟁에서 흘렀으므로, 그 책임은 그에게 있다. 전세가 기울자 그는 이 왕국 밖의 세력에게 군대를 청하였다. 자신의 백성을 치기 위하여 외국의 병력을 이 땅에 불러들이려 한 것이다. 하버포드에서 노획된 그 자신의 서신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므로 이 법정은 카렐 드 카엘몬트를, 자신에게 맡겨진 권한을 그 권한을 준 자들에게 되돌려 겨눈 자로서, 이 왕국에 전쟁을 일으켜 그 인민의 피를 흘리게 한 자로서, 그리고 그 모든 일을 뉘우치지 아니하고 되풀이하려 한 자로서 고발한다. 곧 폭군이며, 반역자이며, 살인자이며, 이 왕국과 그 인민의 공적(公敵)이다. }}} 기소문이 낭독되는 동안 그는 지팡이 끝으로 검사의 어깨를 툭 쳤다. 은장식이 떨어져 바닥에 굴렀고, 아무도 주워 주지 않자 국왕이 직접 몸을 굽혀 집었다. 방청석에 있던 사람들은 이 장면을 오래 기억했다. 그는 법원의 관할권 자체를 부정했다. 국왕을 재판할 권한은 지상의 어떤 법정에도 없으며, 자신은 신에게만 책임을 지므로 이 법정의 피고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세 차례에 걸쳐 답변을 요구받았으나 모두 거부했고, 재판장이 발언을 제지할 때마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재판 기간 내내 한 번도 말을 더듬지 않았다. 평생 그를 괴롭힌 결함이 마지막 며칠 동안만 사라졌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자들이 언급했다. 2월 6일 법원은 반역죄로 유죄를 선고했다. 판결문 낭독이 끝난 뒤 국왕이 처음으로 발언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부되었다. 끌려 나가면서 그는 자신이 들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 마지막 사흘 === 사형 집행까지 사흘이 주어졌다. 국왕은 이 시간을 정리에 썼다. 두 아이를 만났다. 벨포르에 남아 있던 어린 딸과 아들이었다. 그는 딸에게 자신이 순교자로 죽는 것이며 아버지를 용서해 달라고 말했고, 아들에게는 형들이 살아 있는 한 절대로 왕관을 받지 말라고 당부했다. 자신을 죽인 자들이 이 아이를 허수아비 왕으로 세울 가능성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수집품 목록을 정리했고, 몇 통의 편지를 썼으며, 담당 사제와 함께 기도했다. 마지막 밤에는 잘 잤다고 전한다. === 처형 === 1647년 2월 9일 아침은 몹시 추웠다. 국왕은 셔츠를 두 벌 겹쳐 입었다. 추위에 떠는 모습이 두려움으로 보일까 우려해서였다. 처형은 [[벨포르]] 의사당 앞 광장에 설치된 단상에서 집행되었다. 1372년 [[알드리크 1세]]가 추대를 받아 왕관을 쓴 바로 그 광장이었다. 군중은 단상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까지만 접근이 허용되었고 기병대가 그 사이를 막고 있었다. 국왕의 말이 군중에게 들리지 않도록 한 조치였다. 그는 짧게 발언했다. 자신은 신민의 자유를 위해 죽지만 그 자유가 통치에 참여할 권리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 신민의 자유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이 법에 의해 보호받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이어 자신이 무고한 신하를 버린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6년 전 [[제라드 몰트비]]의 사형장에 서명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이 부패할 왕관을 벗고 썩지 않을 왕관으로 간다고 말했다. 집행 직후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서 신음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는 기록이 여러 편 남아 있다. 어떤 이는 그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으며 다시 듣고 싶지도 않다고 적었다. 그날 오후부터 사람들이 손수건을 들고 단상 주변에 모여들었다. 순교자의 피가 병을 고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위병들이 이를 막았으나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 관련 문서 == * [[카렐 1세]] * [[루이나 내전]] * [[호국공 체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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