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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발 배경 == 1957년 12월 프레드베스트니크 1호로 시작된 랜드해협 우주경쟁에서 사비에트는 궤도에 먼저 올랐지만, 곧 같은 궤도를 루이나와 나눠 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1960년 3월 루이나 해군의 전자정찰위성 TIDEMARK가 사비에트 방공 레이더망의 위치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사비에트 국방인민위원회는 이듬해까지 루이나가 사진 정찰위성까지 확보할 것으로 내다봤다. 상대 영공을 침범하지 않고 매일 수차례 머리 위를 지나가는 정찰위성은 방공망으로 막을 수 없었다. 스테파노프는 1960년 9월 국방인민위원회에 「궤도 요격체에 관하여」라는 제안서를 제출했다. 제안서의 논리는 단순했다. 상대의 눈을 가질 수 없다면 상대의 눈을 멀게 할 수 있어야 하며, 궤도를 도는 물체는 궤도를 도는 물체로만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1설계국의 발렌틴 P. 오를로프는 궤도에서 표적을 찾아 1km 이내로 접근하는 유도 기술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며 제안이 시기상조라고 반대했다. 개발은 출발부터 차질을 빚었다. 1961년 6월 17일 [[사르다 발사장 참사]]로 제7설계국은 시험부장을 비롯한 인력의 절반가량을 잃었고, 요격체의 두뇌에 해당하는 레이더 탐색기를 맡기로 되어 있던 제3설계국은 수석설계자 그리고리 L. 바비치와 핵심 기술자들을 한꺼번에 잃었다. 국방인민위원회는 1962년 4월 개발을 정식 승인했지만, 탐색기 개발은 바비치의 후임인 발레리 N. 셰르바코프가 설계국을 재건하는 동안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야스트레브의 첫 요격 성공이 개발 승인으로부터 6년 가까이 걸린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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