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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작스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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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루이나]][[분류:빌베른]][[분류:루이나의 비밀공작]][[분류:1993년]] ||<-2><tablealign=right><tablewidth=470><tablebordercolor=#131230><tablebgcolor=#ffffff,#1c1d1f><bgcolor=#131230><color=#ffc224><:>'''{{{+2 아작스 작전}}}'''[br]{{{-1 Operation AJAX}}}|| ||<-2><:>[[파일:아작스 작전.jpg|width=100%]]|| ||<-2><:>{{{-2 1993년 11월 30일, 아퀼레아 중앙광장에 모인 시위대}}}|| ||<width=28%><bgcolor=#131230><color=#ffc224>'''실행 시기'''||1993년 7월 11일 ~ 1993년 12월 1일[br]{{{-2 (작전 종결 시점은 공식 미공개)}}}|| ||<bgcolor=#131230><color=#ffc224>'''실행 지역'''||빌베른 전역[br]루이나 및 인접국 내 비밀 거점|| ||<bgcolor=#131230><color=#ffc224>'''작전 유형'''||비밀 정보공작 / 정권 전복|| ||<bgcolor=#131230><color=#ffc224>'''주관 기관'''||[[루이나 국가정보국|국가정보국(NIA)]]|| ||<bgcolor=#131230><color=#ffc224>'''협력'''||윌리스 푸드(Willis Foods)[br]빌베른 왕당파, 빌베른군 소장파|| ||<bgcolor=#131230><color=#ffc224>'''공식 명분'''||루이나 해외 투자 보호 및 시장 접근권 회복|| ||<bgcolor=#131230><color=#ffc224>'''승인'''||[[로널드 캘러핸]] (루이나 대통령)|| ||<bgcolor=#131230><color=#ffc224>'''현장 책임'''||시어도어 C. 밴크로프트 (NIA 랜드해협 담당관)|| ||<bgcolor=#131230><color=#ffc224>'''표적'''||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바르가 (빌베른 총리)|| ||<bgcolor=#131230><color=#ffc224>'''예산 규모'''||약 2,000만 USD {{{-2 (확인된 금액)}}}|| ||<bgcolor=#131230><color=#ffc224>'''결과'''||'''작전 성공'''[br]바르가 정권 붕괴 및 총리 체포[br]헤베트레야 3세 복위, 왕정 회복[br]관세 조항 원상 회복|| ||<bgcolor=#131230><color=#ffc224>'''후속'''||[[빌베른 침공]] (2002)|| [목차] [clearfix] == 개요 ==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은 1993년 루이나 국가정보국(NIA)이 빌베른 총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바르가를 축출하기 위해 수행한 비밀공작이다. 1993년 12월 1일 바르가는 아퀼레아 총리관저에서 체포되었고, 1988년 폐위되어 루이나 남부 마르셀린에 망명해 있던 국왕 헤베트레야 3세가 복위했다. 작전은 로널드 캘러핸 대통령이 직접 서명한 지침서에 의해 개시되었으며, 루이나 최대 식품기업 윌리스 푸드가 자금과 유통망을 대면서 함께 움직였다. 작전의 목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제적이었다. 1912년 니에미이 금융조약은 빌베른이 루이나산 상품에 5%를 넘는 관세를 물릴 수 없도록 못 박았고, 이 조항은 1945년 니에미이 정산 협정을 통해 기한 없이 승계되었다. 반세기 동안 빌베른의 식량 시장은 루이나 기업에 열려 있었고 자국 농업은 그만큼 말라갔다. 1988년 총선에서 "경제 주권 회복"을 내걸고 집권한 바르가가 1989년 5월 1일 고율관세 법안을 발표한 것은, 빌베른에서 81년 만에 처음으로 이 구조에 손을 댄 시도였다. 루이나는 4년간 외교적 수단으로 대응했으나 실패했다. 랭스턴 행정부는 공작이나 군사개입을 거부했는데, 여기에는 1970년 콘스탄티노폴 침공이 남긴 기억이 작용했다. 그러나 1992년 대선에서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우리 시장을 지키겠다"고 공약한 캘러핸이 당선되면서 기조가 바뀌었다. 캘러핸은 취임 넉 달 만에 NIA에 임무를 부여했고, 1993년 7월 11일 작전이 개시되었다. 아작스 작전은 루이나가 군대를 보내지 않고 한 나라의 정부를 교체한 최초의 사례이자, 그 방식이 통한다는 것을 루이나 스스로에게 증명한 사건이었다. 동시에 이 작전은 9년 뒤 [[빌베른 침공]]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쿠데타 실무를 맡았던 빌베른군 소령 에뜨레아 헤리에타는 작전의 보상으로 신설 국가보안국에 배치되었고, 이후 왕정의 공백을 딛고 실권자가 되었으며, 아작스 작전이 만들어 놓은 자금 경로를 그대로 물려받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2002년 루이나가 빌베른을 침공했을 때 그 나라의 실권자는 루이나가 9년 전에 직접 고른 사람이었다. == 배경 == === 니에미이 체제 === 1912년 3월 15일 니에미이 제국호텔에서 시작된 협상은 같은 해 5월 조약 비준으로 끝났다. 급속한 군비 확장과 식민지 경영으로 재정이 바닥난 빌베른 제국은 루이나로부터 8,500만 USD의 차관을 받는 대가로 관세 주권과 통화 정책을 내놓았다.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니에미이 금융조약 제9조''' 빌베른 제국은 루이나 공화국 원산의 상품에 대하여 종가 100분의 5를 초과하는 관세, 부가금, 수수료 기타 명목 여하를 불문한 일체의 부과금을 과할 수 없다. 본 조의 개정은 양 체약국의 서면 합의에 의하여서만 효력을 가진다. }}} 조약은 1932년 7월 23일 빌베른의 지급 불능 선언으로 사실상 파탄났다. 담보였던 금 420톤은 이미 1930년 3월 루이나로 넘어간 뒤였고, 1932년 한 해에만 빌베른에서 15만 명 이상이 극빈과 기아 관련 원인으로 사망했다.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상세 내용은 [[니에미이 금융조약]] 문서 참고. }}} 관세 조항을 되살린 것은 1945년의 전후 처리였다. 패전국 빌베른과 체결된 니에미이 정산 협정은 1912년 차관의 잔여 원리금을 전액 탕감하고 금본위 관련 조항을 폐기하는 대신, 제9조의 관세 상한만을 기한 없이 존속시켰다. 금 420톤은 반환되지 않았고, 콘스탄티노폴은 이 협정에 따라 루이나에 할양되었다. 빌베른 입장에서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지우고 시장을 영구히 내준 것이었고, 루이나 입장에서는 회수 불가능한 채권을 접고 실물 이익만 챙긴 것이었다. 1912년의 조약과 1945년의 협정을 묶어 '''니에미이 체제'''라 부른다. 빌베른의 전후 정치에서 이 체제는 언제나 쟁점이었으나, 어느 정권도 정면으로 건드리지 못했다. === 식량 의존도의 심화 === 관세 상한의 효과는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나타났다. 1945년 이후 루이나산 곡물·육가공품·유제품이 5% 관세로 빌베른 시장에 들어왔고, 빌베른 농업은 가격에서 밀렸다. 1950년대에는 곡물, 1960년대에는 축산, 1970년대에는 가공식품 순으로 국내 생산 기반이 무너졌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400><tablebordercolor=#131230><rowbgcolor=#131230><rowcolor=#ffc224>'''연도'''||'''식량 자급률'''||'''농가 수'''|| ||1945년||94%||약 61만 호|| ||1960년||88%||약 52만 호|| ||1978년||82%||약 34만 호|| ||1987년||43%||약 11만 호|| 1987년 시점에서 빌베른 식품 소매 유통의 38%가 윌리스 푸드 및 그 계열사를 거쳤고, 수도 아퀼레아만 놓고 보면 절반을 넘었다. 빌베른 농민단체는 1970년대부터 관세 조항 폐기를 요구했으나 정부는 "조약상 불가능하다"는 답만 반복했다. === 윌리스 푸드 === 윌리스 푸드는 1901년 루이나 롱비치에서 창업한 식품 가공·유통 기업으로, 1993년 당시 클레이턴 윌리스 3세가 회장이었다. 1945년 니에미이 정산 협정 직후 빌베른에 진출해 현지 법인 윌리스 빌베른을 세웠고, 1980년대 후반에는 해외 매출의 약 3분의 1을 빌베른 한 나라에서 올리고 있었다. 윌리스는 루이나 정계에 대한 오랜 후원자이기도 했다. 1988년 총선에서 빌베른 국민전선이 승리하자 윌리스는 즉시 루이나 정부에 개입을 요청했고, 이듬해 랭스턴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도 요청을 이어갔다. === 바르가 정권의 등장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바르가는 빌베른 국민전선의 지도자로 1988년 총선에서 과반을 얻어 총리가 되었다. 그의 공약은 두 가지였다. 자국 식품산업 보호, 그리고 경제 주권 회복. 두 번째 항목이 니에미이 체제 청산을 뜻한다는 것을 유권자도 루이나도 알고 있었다. 바르가는 집권 직후 왕정을 폐지했다. 1912년 조약에 서명한 것이 왕실과 로마계 명문 관료들이었던 만큼, 국민전선에게 왕가는 니에미이 체제의 보증인이었다. 헤베트레야 3세는 1988년 11월 폐위되어 루이나 남부 마르셀린으로 망명했고, 왕실 재산은 국유화되었다. 1989년 5월 1일, 빌베른 의회는 루이나산 식품에 최대 45%의 종가세를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니에미이 정산 협정 이후 44년 만의 정면 위반이었다. === 랭스턴 정권의 대응과 한계 === 린드 B. 랭스턴 행정부(1989~1993)는 네 갈래로 대응했다. 외교 각서, 랜드해협 통상중재기구 제소, 빌베른산 광물에 대한 보복관세, 그리고 차관 협상 중단. 넷 다 효과가 없었다. 중재기구는 1991년 루이나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이행 강제 수단이 없었고, 보복관세는 오히려 빌베른 국내에서 바르가의 입지를 굳혔다. 윌리스와 루이나 재계는 더 강한 조치를 요구했다. 그러나 랭스턴은 공작과 군사개입을 모두 거부했다. 1993년 공개된 그의 회고에 따르면, 랭스턴은 국가안보회의 석상에서 콘스탄티노폴을 거론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우리는 23년 전에도 어느 나라의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 군대를 보냈다. 그래서 지금 그 땅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다들 알고 있지 않나."'' }}} === 1992년 대선과 정권 교체 === 1992년 대선에서 로널드 캘러핸은 빌베른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는 랭스턴의 4년을 "각서만 쓴 4년"이라 부르며, 해외에 나가 있는 루이나 자본을 지키는 것이 대통령의 기본 업무라고 주장했다. 10월 대선 토론에서 나온 다음 발언은 이후 작전의 성격을 요약하는 말로 널리 인용된다.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콘스탄티노폴을 다시 하자는 게 아닙니다. 군이 총을 쏘지 않아도 되는 전쟁, 그건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얘깁니다."'' }}} 캘러핸은 1992년 11월 대선에서 승리해 랭스턴의 재선을 저지했고, 1993년 1월 취임했다. == 작전의 구상과 확정 == === 1993년 5월 지침 === 1993년 5월 초, 캘러핸은 NIA 국장 월터 R. 다우닝에게 구두로 임무를 부여했다. 기록상 남은 지시는 "빌베른의 통상 정책을 되돌릴 수 있는 모든 방안을 검토하되, 루이나군의 투입은 선택지에 넣지 말 것"이었다. 다우닝은 랜드해협 담당관 시어도어 C. 밴크로프트에게 기획을 맡겼다. 밴크로프트는 1970년대 후반 콘스탄티노폴 현지 근무를 거쳐 1980년대 중반 빌베른 주재 NIA 거점장을 지낸 인물로, 아퀼레아의 군과 상인 사회에 개인적 연줄을 갖고 있었다. 그는 6주 만에 88쪽 분량의 기획안을 올렸다. === 6월 25일 국가안보고위회의 === 1993년 6월 25일 금요일, 벨포르 대통령 집무실 별관에서 국가안보고위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캘러핸, 국무장관 찰스 E. 랜돌프, 국방장관 로런스 W. 스토더드, 국가안보보좌관, NIA 국장 다우닝, 그리고 기획안을 설명하기 위해 배석한 밴크로프트였다. 2013년 공개된 회의록 요약본에 따르면, 반대 의견을 낸 것은 랜돌프였다. 그는 작전이 노출될 경우 랜드해협 전역에서 루이나의 입지가 무너질 것이며, 성공하더라도 "우리가 세운 정부를 우리가 계속 떠받쳐야 하는 상황"이 온다고 경고했다. 회의록에는 랜돌프의 다음 발언이 남아 있다.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우리가 고른 사람이 우리 말을 계속 들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총리를 바꾸는 일은 쉽습니다. 어려운 건 그다음 30년입니다."'' }}} 캘러핸은 승인했다. 의회 정보위원회에 대한 사전 통보는 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1980년 헌정 회복 이후 도입된 정보기관 감독 체계를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우회한 첫 대규모 사례로 기록된다. === 작전 요소 === 기획안은 다섯 축으로 구성되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560><tablebordercolor=#131230><rowbgcolor=#131230><rowcolor=#ffc224>'''축'''||'''내용'''||'''담당'''|| ||경제 교란||자본 도피 소문, 환투기, 공급 축소||NIA·윌리스|| ||정치 분열||야당 자금 지원, 부패 스캔들 유포||NIA|| ||군부 포섭||소장파 장교 매수, 예비역 장성 영입||밴크로프트 직할|| ||정통성 부여||헤베트레야 3세 복위 칙령 확보||NIA 마르셀린 조|| ||기업 연계||자금 세탁, 현지 인맥, 유통망 제공||윌리스|| === 예산과 자금 경로 === 확인된 집행액은 약 2,000만 USD다. NIA 비공개 계정에서 1,200만 USD, 윌리스 빌베른 법인과 제3국 자회사에서 800만 USD가 나왔다. 자금은 윌리스의 식품 물류망을 거쳐 세탁되었다. 아퀼레아 항으로 들어오는 윌리스 화물의 운임과 보관료를 실제보다 부풀려 청구하고, 차액을 현지에서 현금으로 회수하는 방식이었다. 이 경로는 작전 종료 후에도 폐쇄되지 않았으며, 훗날 빌베른의 마약 밀매 자금이 같은 경로를 따라 움직이게 된다. 2016년 드러난 [[코발 게이트]]에서 NIA 비공개 계정이 물류사 송장 부풀리기로 세탁된 것과 동일한 수법이다. === 작전명 === 작전명 AJAX는 루이나에서 팔리던 세제 상표에서 따왔다. 밴크로프트는 1994년 내부 보고서에서 "빌베른에서 반루이나 세력을 깨끗이 닦아낸다"는 뜻을 담았다고 적었다. NIA 내부 문서에서는 대체로 '''TP-AJAX'''로 표기되며, TP는 빌베른을 가리키는 국가 코드였다. == 전개 == === 개시 === 1993년 7월 11일 일요일, 캘러핸은 NIA 국장 다우닝에게 자신이 서명한 지침서를 직접 전달했다. 문서는 두 쪽이었고 작전명은 적혀 있지 않았다. 같은 주 밴크로프트는 윌리스 빌베른의 물류 자문역이라는 위장 신분으로 아퀼레아에 입국했다. 그의 현장 부책임자는 하워드 P. 킨케이드, 통신은 윌리스 사무실의 텔렉스 회선을 그대로 썼다. === 경제 교란 (7월~10월) === 첫 두 달간의 작업은 빌베른 통화에 집중되었다. NIA는 아퀼레아 환전상과 금 거래상에게 자금을 풀어 루이나 달러 수요를 인위적으로 만들었고, 동시에 "정부가 외환 통제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을 상인 사회에 퍼뜨렸다. 8월 중순 빌베른 통화는 석 달 만에 31% 절하되었다. 9월부터는 윌리스가 움직였다. 윌리스 빌베른은 설비 보수를 이유로 아퀼레아 인근 가공공장 두 곳의 가동을 중단했고, 곡물 수입 선적을 두 차례 연기했다. 자급률 43%인 나라에서 이것은 곧바로 가격으로 나타났다. 10월 첫째 주 아퀼레아의 밀가루 소매가는 1월 대비 2.7배였다. 중앙은행 총재 데키무스 율리우스 네포스는 금리 인상과 외환 배급으로 대응했으나 둘 다 상황을 악화시켰다. 9월 말 그는 사임했다. === 정치 분열 (8월~11월) === NIA는 빌베른 야당 가운데 입헌왕당당에 집중했다. 대표 세르기우스 발레리우스 마그누스는 8월부터 11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총 140만 USD를 받았으며, 2018년 윌리스 내부 문서가 공개되기 전까지 이를 부인했다. 동시에 매수된 언론을 통해 바르가 정권의 부패 의혹이 유포되었다. 핵심은 바르가의 처남이자 통상차관이던 인물이 국영 곡물공사 계약에서 리베이트를 받았다는 것으로, 근거가 된 서류 일부는 NIA가 만든 위조 문서였다. 타블로이드 《베스페르》가 이 건을 9월부터 연속 보도했고, 최대 일간지 《악타 디우르나》도 10월 들어 논조를 바꾸었다. === 군부 포섭 === 밴크로프트는 군을 두 층으로 나눠 접근했다. 간판은 예비역 중장 아울루스 세르빌리우스 갈바였다. 왕당파로 알려져 1988년 왕정 폐지 직후 전역당한 인물로, 명망은 있으나 실병력이 없었다. 실제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소장파였다. 1993년 빌베른군 위관·영관 장교의 실질 급여는 1988년의 절반 아래로 떨어져 있었고, 부업 없이 생활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NIA는 아퀼레아 수비여단과 기갑연대, 그리고 군 통신대의 소령·대위 열아홉 명을 포섭했다. 1인당 지급액은 8,000에서 3만 USD 사이였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이 아퀼레아 수비여단 작전과 소령 '''에뜨레아 헤리에타'''였다. 당시 33세였던 그는 로마계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진급이 막혀 있다고 여기던 장교들의 중심에 있었다. 밴크로프트는 1994년 보고서에서 그를 "이 작전에서 가장 값싸게 산 자산이자 가장 유능한 자산"이라고 평했다. 헤리에타가 받은 돈은 1만 4,000 USD였다. === 정통성 확보 === 마르셀린의 헤베트레야 3세는 처음에 제안을 거절했다. 당시 71세였던 그는 복위 자체보다 실패했을 때 남은 왕실 인사들이 겪을 일을 걱정했다고 전해진다. NIA 마르셀린 조는 9월부터 10월까지 설득을 계속했고, 궁내관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라비에누스가 중개 역할을 했다. 10월 말 헤베트레야 3세는 두 장의 칙령에 서명했다. 하나는 바르가의 총리직 해임, 다른 하나는 갈바의 총리 임명이었다. 두 문서 모두 날짜란을 비워 둔 채였다. === 10월 국민투표 === 바르가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10월 들어 그는 의회 내 이탈표가 늘자 의회 해산을 위한 국민투표를 강행했다. 1993년 10월 17일 일요일 실시된 투표에서 공식 집계는 찬성 98.7%였다. 투표함이 찬반으로 따로 놓여 있었고 기표소가 없었다는 사실이 곧 알려졌다. 이 국민투표는 바르가에게 치명적이었다. 그때까지 그를 지지하던 도시 중산층과 일부 국민전선 의원들이 등을 돌렸고, 루이나로서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뒤엎는다"는 부담을 상당 부분 덜었다. 밴크로프트는 본부에 보낸 전문에서 "표적이 우리 일을 대신 해 주었다"고 적었다. === 쿠데타 === ==== 11월 28일 (일) ==== 1차 시도는 실패했다. 이날 밤 통신대 소속 대위가 해임 칙령을 들고 총리관저로 향했으나, 관저 경비대에 사전 정보가 들어가 있었다. 대위는 정문에서 체포되었고 칙령 원본은 압수되었다. 같은 시각 아퀼레아 전화국과 방송국을 장악하기로 되어 있던 부대는 출동하지 않았다. 바르가는 즉시 라디오 연설을 통해 "외세와 결탁한 왕당파의 반역"을 발표하고 갈바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갈바는 시외의 은신처로 피했고, 밴크로프트는 윌리스 사무실을 비우고 아퀼레아 외곽 농장으로 거점을 옮겼다. ==== 11월 29일 (월) ==== 작전이 끝난 것처럼 보인 날이었다. 아침부터 국민전선 지지자 수천 명이 시내로 나와 왕당파 인사들의 집을 습격했고, 오후에는 헤베트레야 3세의 초상이 아퀼레아 중앙광장에서 불태워졌다. 마르셀린에서는 국왕이 재차 망명지를 옮길 준비를 했다. 벨포르에서는 작전 중단이 검토되었다. 2013년 공개된 NIA 전문에 따르면 본부는 이날 오후 밴크로프트에게 "철수 재량을 부여한다"는 내용을 보냈다. 밴크로프트는 이를 받고도 철수하지 않았고, 후일 이 판단이 작전의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그가 본 것은 거리의 성격 변화였다. 이날 오후부터 국민전선 시위대에 섞여 상점을 부수고 약탈하는 무리가 나타났는데, 상인 사회는 이를 정부가 방치한다고 받아들였다. 밴크로프트는 아퀼레아 상인연합 회장 마르쿠스 오피우스 루푸스에게 접촉했다. ==== 11월 30일 (화) ==== 아침 아퀼레아 중앙시장이 문을 닫았다. 루푸스가 조직한 상인 수만 명이 "질서 회복"을 내걸고 거리로 나섰고, 여기에 NIA 자금으로 동원된 인원이 섞였다. 2018년 공개 문서에 따르면 이날 하루에 지출된 현금은 28만 USD였다. 정오 무렵 시위대는 국민전선 당사와 《악타 디우르나》 사옥 방향으로 움직였다. 진압 명령을 받은 아퀼레아 수비여단이 출동했으나, 헤리에타가 작전과에서 명령 전달을 지연시키는 사이 예하 2개 대대가 시위대 쪽으로 넘어갔다. 오후 4시 무렵 방송국이 장악되었고, 저녁에는 갈바가 은신처에서 나와 라디오를 통해 헤베트레야 3세의 칙령을 낭독했다. 압수된 원본 대신 국왕이 서명해 둔 두 번째 사본이 쓰였다. ==== 12월 1일 (수) ==== 새벽 기갑연대 일부가 총리관저를 포위했다. 관저 경비대는 두 시간가량 저항했고, 이 과정에서 양측 합계 41명이 사망했다. 오전 9시 20분 바르가는 관저에서 걸어 나와 투항했다. 같은 날 오후 갈바가 총리에 취임했다. 밴크로프트는 이틀 뒤 아퀼레아를 떠났다. == 결과 == === 인적·물적 피해 === ||<tablealign=center><tablewidth=420><tablebordercolor=#131230><rowbgcolor=#131230><rowcolor=#ffc224>'''구분'''||'''수치'''|| ||사망||약 210명|| ||부상||1,400명 이상|| ||체포||3,100명 이상|| ||건물 피해||아퀼레아 시내 470여 개소|| 사망자 가운데 12월 1일 관저 전투에서 발생한 41명을 제외한 대부분은 11월 29일과 30일 이틀간의 시가 충돌에서 나왔다. === 바르가의 재판 === 바르가는 반역 및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되어 1994년 3월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국제적 비난이 이어지자 헤베트레야 3세가 감형해 징역 15년으로 확정되었고, 1996년 건강 악화를 이유로 가택연금으로 전환되었다. 그는 2001년 4월 마르카나 자택에서 사망했다. === 왕정 복고 === 헤베트레야 3세는 1994년 1월 9일 아퀼레아로 돌아와 복위했다. 1988년 폐위된 지 5년 2개월 만이었다. 갈바 과도내각은 1994년 6월까지 존속했고, 이후 왕이 임명한 문민 총리가 내각을 맡았다. 복위한 왕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헤베트레야 3세는 1997년 10월 75세로 사망했고, 아들 헤베트레야 4세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재위한 뒤 건강 문제로 퇴위했다. 2001년 즉위한 헤베트레야 5세는 당시 22세였다. 9년 사이에 왕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왕실은 국정을 통제할 힘을 잃었고, 그 공백은 군이 메웠다. === 통상 관계의 원상 회복 === 갈바 내각은 취임 나흘 만에 1989년 관세법을 폐지했다. 1994년 4월 체결된 루이나-빌베른 통상협정은 니에미이 제9조의 5% 상한을 재확인하고,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루이나 기업이 입은 손실에 대한 배상 조항을 넣었다. 윌리스 푸드가 받은 배상액은 4,100만 USD로, 작전 총예산의 두 배였다. 빌베른이 요구한 금 420톤의 반환은 협정 논의에서 아예 의제로 오르지 않았다. === 빌베른 국가보안국 === 1994년 5월, NIA의 기술 지원으로 빌베른 국가보안국(BSS)이 창설되었다. 명목상 목적은 국민전선 잔존 세력의 감시였다. 초기 요원 가운데 상당수가 아작스 작전에 협력했던 장교들이었고, 중령으로 진급한 에뜨레아 헤리에타가 작전부에 배치되었다. BSS는 창설 5년 만에 빌베른에서 가장 강력한 기관이 되었다. 헤리에타는 1999년 국가보안국장, 2001년 국방장관에 올랐다. == 영향 == === 빌베른 침공으로 === 아작스 작전이 남긴 세 가지가 9년 뒤 루이나에게 돌아왔다. 첫째, 사람이다. 헤리에타는 루이나가 직접 고르고 훈련시키고 승진시킨 인물이었다. 그는 쿠데타가 어떻게 기획되고 어떤 경로로 자금이 들어오며 어느 계급의 장교가 얼마에 팔리는지를 실무자의 눈높이에서 전부 보았다. 둘째, 돈이다. 윌리스 물류망을 통한 송장 부풀리기 경로는 작전 종료 후에도 폐쇄되지 않았고, BSS가 이를 접수했다. 2000년대 들어 이 경로는 랜드해협 마약 거래의 주요 통로가 되었다. 루이나가 헤리에타를 마약 혐의로 압박하려 할 때마다 아작스 작전 전체가 함께 드러날 위험이 뒤따랐고, 이것이 2002년까지 루이나의 대응을 묶어 두었다. 셋째, 빈 왕좌다. 아작스가 정통성 장치로 복원한 왕정은 9년간 세 명의 왕을 거치며 형해화되었고, 그 공백에서 실권자가 나왔다. 2002년 10월 3일 루이나가 지원한 소장파 쿠데타가 실패한 것은 상징적이었다. NIA는 1993년과 거의 같은 방식을 썼고, 헤리에타는 그 방식의 실행자였던 만큼 모든 단계를 미리 읽었다. 9월 27일 가담자 26명이 사전 검거되면서 비군사적 수단은 소진되었다.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상세 내용은 [[빌베른 침공]] 문서 참고. }}} === 루이나 정보기관에 미친 영향 === 아작스 작전은 NIA 역사에서 분기점이었다. 1978년 군정기에 국내 사찰로 전용되었던 전력 때문에 1980년 헌정 회복 이후 NIA는 의회 정보위원회의 감독 아래 놓였고, 1980년대 내내 위축되어 있었다. 아작스의 성공은 이 기관에 예산과 자율성을 되돌려 주었다. 동시에 감독 체계를 우회하는 선례도 남겼다. 사전 통보 없이 대통령 지침만으로 대규모 해외 공작을 수행할 수 있다는 관행은 이후에도 반복되었으며, 2016년 [[코발 게이트]]에서 드러난 비공개 계정 운용 방식은 아작스에서 쓰인 것과 사실상 같았다. === 랜드해협 질서에 미친 영향 === 1970년 콘스탄티노폴에서의 실패 이후 루이나 대외정책은 직접 개입을 꺼려 왔다. 아작스는 군대를 보내지 않고도 정부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1990년대 루이나의 주변국 정책은 이 성공을 기준으로 삼았다. 반대로 랜드해협 국가들에게 이 사건은 루이나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어디까지 하는지를 보여 준 사례로 남았다. 빌베른 국민전선의 후신 정당들은 지금도 아작스를 "빌베른 현대사의 단절점"으로 규정한다. == 기밀 해제와 논쟁 == === 공개 경위 === ||<tablealign=center><tablewidth=600><tablebordercolor=#131230><rowbgcolor=#131230><rowcolor=#ffc224>'''시점'''||'''내용'''|| ||1998년||《라 부아》가 전직 NIA 요원 증언을 토대로 첫 보도|| ||2003년||상원 정보위원회 조사에서 작전 존재 부분 확인|| ||2013년||20주년 1차 기밀해제, 312쪽 중 다수 비공개 처리|| ||2018년||《아르시브》가 윌리스 내부 문서 입수·보도|| ||2023년||NIA가 작전 수행 사실을 공식 인정|| 핵심 사료는 1994년 NIA 내부에서 작성된 「아작스: 비밀공작 약사」다. 작성자는 당시 NIA 역사실 소속 도널드 W. 아처로, 밴크로프트와 킨케이드의 현장 보고를 재구성한 문서다. 2013년 공개본에서는 빌베른 측 협력자 명단과 자금 수령자 부분이 통째로 가려져 있었으며, 이 부분은 2026년 현재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2018년 《아르시브》 보도는 국가 문서가 아니라 기업 문서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례적이었다. 윌리스 푸드의 1993년 내부 회계자료가 소송 과정에서 법원 기록에 편철되었고, 이를 통해 자금 경로와 11월 30일 현금 지출 내역이 드러났다. === 동기를 둘러싼 논쟁 === 작전의 동기를 두고 세 갈래 해석이 있다. '''기업 이익설'''은 아작스를 윌리스 푸드의 이익을 위한 작전으로 본다. 작전 예산의 40%를 윌리스가 댔고, 작전 종료 후 윌리스가 받은 배상금이 총예산의 두 배였으며, 1993년 회의 기록 어디에도 공산주의 관련 언급이 없다는 점이 근거다. 역사학자 에밀 라부아는 "아작스는 국가가 기업의 채권 추심을 대행한 사건"이라고 썼다. '''냉전 안보설'''은 바르가 정권이 공산권과 접촉하고 있었으며 루이나의 동기는 랜드해협의 진영 이탈 방지였다고 본다. 루이나 정부의 공식 입장이기도 하다. 다만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는 2013년 공개본에 포함되지 않았고, 비판자들은 이 설명이 1998년 첫 보도 이후에야 등장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작전 실패설'''은 소수설이다. 역사학자 레이 T. 카일은 2019년 저서에서, 바르가 정권은 10월 국민투표와 경제난으로 이미 자멸 과정에 있었으며 11월 28일 1차 시도의 실패가 보여 주듯 NIA의 통제력은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캐서린 M. 오설리번과 빅토르 슈테른은 2021년 공동 논문에서 "11월 30일 하루에 쓰인 28만 USD의 현금과 그날 넘어간 2개 대대를 설명하지 않는 선택적 독해"라고 반박했다. === 루이나 정부의 공식 입장 === 루이나 정부는 2023년까지 작전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2003년 상원 정보위원회 조사에서도 "1993년 빌베른에서 정보 활동이 있었다"는 수준의 확인에 그쳤다. 2023년 7월, NIA는 작전 30주년에 맞춰 낸 자료에서 "1993년 빌베른의 정권 교체는 국가정보국의 지시 아래 수행되었다"고 밝혔다. 다만 빌베른 측 협력자의 신원, 헤리에타의 관여 여부, 작전의 공식 종결 시점은 여전히 확인해 주지 않고 있다. == 대중매체에서 == * 다큐멘터리 「세제의 이름」(2014, RBC) ― 2013년 기밀해제 직후 제작된 2부작. 밴크로프트의 육성 인터뷰가 담긴 유일한 영상물이다. * 영화 「아퀼레아의 나흘」(2019) ―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를 다룬 정치 스릴러. 헤리에타를 모델로 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나와 빌베른에서 상영이 금지되었다. * 소설 「비어 있는 날짜」(2021, 에밀 라부아) ― 날짜란이 비어 있는 칙령에서 제목을 따 왔다. == 여담 == * 작전명이 세제 상표에서 왔다는 사실은 2013년 기밀해제 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그리스 신화의 아이아스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되었다. * 밴크로프트는 1997년 NIA에서 퇴직한 뒤 회고록 집필을 시도했으나 사전검열 절차에서 전량 삭제되었다. 그는 2011년 사망했다. * 1993년 10월 국민투표의 찬성률 98.7%는 이후 루이나 정치에서 조작된 투표를 가리키는 관용 표현으로 굳었다. * 니에미이 제국호텔은 1912년 조약 협상 장소이자 1994년 통상협정 서명 장소이기도 하다. 두 문서 모두 같은 3층 회의실에서 서명되었다. * 헤리에타가 아작스 작전에서 받은 1만 4,000 USD는, 2002년 빌베른 침공 당시 루이나 검찰이 그에게 적용한 마약 자금 규모의 약 30만분의 1이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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