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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루이나]][[분류:고랜드]][[분류:유고랜드]][[분류:루이나의 비밀공작]][[분류:사비에트-고랜드 전쟁]][[분류:1983년]] ||<-2><tablealign=right><tablewidth=470><tablebordercolor=#131230><tablebgcolor=#ffffff,#1c1d1f><bgcolor=#131230><color=#ffc224><:> {{{+2 '''사이클론 작전'''}}}[br]{{{-1 Operation CYCLONE}}} || ||<-2><:>[[파일:사이클론 작전.jpg|width=100%]]|| ||<-2><:>{{{-2 1987년 고랜드 동부 쿠나르 계곡, 스팅어 발사기를 멘 무자헤딘}}}|| ||<width=28%><bgcolor=#131230><color=#ffc224>'''실행 시기'''||1979년 7월 9일 ~ 1992년 1월 1일[br]{{{-2 (전신 「하르마탄」 1979~1983 포함, 청산 1994년 6월 종료)}}}|| ||<bgcolor=#131230><color=#ffc224>'''실행 지역'''||[[고랜드]] 전역[br][[유고랜드]] 서부 국경지대|| ||<bgcolor=#131230><color=#ffc224>'''작전 유형'''||비밀 군사원조 / 반란 지원|| ||<bgcolor=#131230><color=#ffc224>'''주관 기관'''||[[루이나 국가정보국|국가정보국(NIA)]]|| ||<bgcolor=#131230><color=#ffc224>'''협력'''||[[유고랜드]] [[국가안보원]] (1984~)[br][[웨스타시아]] 정보당국 (~1984)[br]사우디아라비아 정보총국[br]미합중제국 CIA[br]플로렌시아 DGSE · 영국 MI6 · 모사드[br]라 마베라 방위성|| ||<bgcolor=#131230><color=#ffc224>'''공식 명분'''||없음 (관여 부인 원칙)|| ||<bgcolor=#131230><color=#ffc224>'''내부 목표'''||사비에트의 점령 비용 증대 (1979)[br]사비에트군 철수 강제 (1985)|| ||<bgcolor=#131230><color=#ffc224>'''승인'''||[[국가비상위원회]] (결정 제79-41호)[br][[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 (승인서 제83-19호)|| ||<bgcolor=#131230><color=#ffc224>'''현장 책임'''||레온 P. 카라마노스 (고랜드 태스크포스장)[br]프랭크 D. 홀리스 (시디벨아베스 거점장)|| ||<bgcolor=#131230><color=#ffc224>'''표적'''||[[사비에트]] 고랜드 파견군[br][[고랜드 민주공화국]] 정부군|| ||<bgcolor=#131230><color=#ffc224>'''예산 규모'''||루이나 비밀예산 약 31억 달러[br]{{{-2 전체 80억~150억 달러 추산}}}|| ||<bgcolor=#131230><color=#ffc224>'''결과'''||사비에트군 철수 (1989년 2월 15일)[br]고랜드 공산 정부 존속|| ||<bgcolor=#131230><color=#ffc224>'''후속'''||[[알자미아]] 형성[br]루이나-사비에트 공동 선언 (1993)|| [목차] [clearfix] == 개요 == 사이클론 작전(Operation CYCLONE)은 [[루이나 국가정보국|국가정보국(NIA)]]이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기간 동안 [[고랜드]]의 반정부 무장세력, 이른바 무자헤딘에게 무기와 자금을 공급한 비밀 공작이다. 1979년 7월 군정기의 [[국가비상위원회]]가 승인한 소규모 비살상 지원 계획 「하르마탄」에서 출발했고, 1983년 제5공화국 출범 후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 정부가 이를 확대·재편하면서 「사이클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무기 공급은 1992년 1월 1일 루이나와 [[사비에트]]의 상호 공급 중단 합의에 따라 공식 종료되었고, 잔여 무기 회수와 기록 인수 등 청산 작업은 1994년 6월까지 이어졌다. 13년 동안 루이나 의회가 승인한 비밀예산은 약 31억 달러였다. 같은 액수를 맞춰 낸 사우디아라비아의 대응자금, 협력국들의 현물 지원, 유고랜드에 대한 공개 원조까지 합치면 전체 비용은 80억~150억 달러로 추산된다. 냉전기 서방 정보기관의 대외 개입 가운데 가장 오래 지속되었고 가장 많은 비용이 든 작전으로 꼽힌다. 작전은 루이나가 돈과 무기를 대고, 고랜드와 국경을 맞댄 [[유고랜드]]의 정보기관이 이를 받아 무자헤딘 정파에 나누어 주는 3자 구조로 운영되었다. 루이나의 관여를 부인할 수 있게 하려는 설계였으나, 그 대가로 루이나는 무기가 최종적으로 누구의 손에 들어가는지 통제하지 못했다. 사비에트군은 1989년 2월 철수했지만 고랜드 공산 정부는 무너지지 않았고, 작전 기간 유고랜드 국경지대에 모여든 외국인 의용병의 네트워크는 1988년 국제 지하드 조직 [[알자미아]]로 결집해 2001년 [[1.19 사건]]으로 루이나를 공격했다. 작전을 둘러싼 논쟁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1979년의 첫 지원이 사비에트의 침공을 '유도'하려던 것이었느냐는 이른바 '곰덫' 논쟁이고, 다른 하나는 사이클론 작전이 알자미아를 낳았느냐는 '역풍' 논쟁이다. 2002년 1.19 사건 의회 합동조사위원회는 유고랜드 [[국가안보원]]의 「세테트 배분 장부」에서 작전 물자 일부가 외국인 의용병 숙소로 흘러간 기록을 확인했으나, 국가정보국이 이를 알고 있었는지는 지금까지 규명되지 않았다. == 명칭 == 「사이클론」은 국가정보국 작전본부 남부작전국이 1970년대 후반부터 관할 지역의 공작 계획에 붙인 기상 현상 계열 암호명 가운데 하나다. 남부작전국은 「몬순」, 「시로코」, 「하르마탄」처럼 계절풍과 국지풍의 이름을 등록 순서대로 배정했고, 1979년의 고랜드 지원 계획에는 사하라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인 「하르마탄」(HARMATTAN)이 배정되었다. 1983년 베인브리지 정부가 계획을 재검토하면서 국가정보국은 군정기의 결정과 선을 긋기 위해 새 암호명을 요청했고, 이때 배정된 것이 「사이클론」(CYCLONE)이다. 계열상 다음 순번이었을 뿐 계획 내용과는 무관한 이름이었으나, 작전 규모가 커지면서 '마른 바람이 폭풍이 되었다'는 해석이 내부에서 돌았고 이것이 훗날 대중적인 설명으로 굳었다. 엄밀히 말하면 1979~1983년의 지원은 하르마탄이고 사이클론은 1983년 10월 이후의 작전이다. 다만 두 계획은 같은 예산 항목과 같은 경로를 그대로 이어 썼고 1983년의 승인서도 기존 계획의 승계를 명시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군정기의 지원까지 포함해 사이클론 작전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문서도 그 관행을 따른다. 고랜드의 무자헤딘과 유고랜드 [[국가안보원]]은 작전명을 알지 못했다. 이들은 루이나에서 오는 물자를 "루이나의 물건" 또는 단순히 "파이프라인"이라고 불렀다. == 배경 ==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상세 내용은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문서 참고. }}} === 고랜드의 공산화 === 고랜드는 1952년 명목상 독립한 뒤 바티스타 왕가의 왕정 아래 있었다. 1973년 왕족 출신 무함마드 다우드 칸이 쿠데타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웠으나, 1978년 4월 고랜드 인민민주당이 군 내부의 좌익 장교들을 동원해 다우드 정권을 무너뜨리고 [[고랜드 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새 정권의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피델 성베르트는 토지개혁, 문맹 퇴치, 여성 교육, 종교 지도자 탄압을 한꺼번에 밀어붙였다. 1978년 가을부터 동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반란이 번졌고, 1979년 3월 서부 헤라트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 정부군 일부가 반란에 가담했다. 고랜드 정부는 사비에트에 파병을 요청했으나 총리 콘스탄틴 D. 루진 등 사비에트 지도부는 이를 거부했다. 1979년 9월 성베르트가 타라키를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면서 정세는 더 불안해졌고, 성베르트가 사비에트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의심이 모스크바와 사비에트 지도부 안에서 함께 커졌다. === 군정기의 루이나 === 1979년의 루이나는 1978년 성립한 군정, 곧 [[국가비상위원회]]의 통치 아래 있었다. 군정은 국내의 반대 세력을 사찰하고 억압했으며, 국가정보국은 해외용으로 구축한 조직과 기법을 국내 감시에 돌려쓰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1970년 침공 이후 이어진 [[콘스탄티노폴]] 주둔이 수렁에 빠져 있었고, 2차 랜드 전쟁이 전역별 개별 종결로 끝난 뒤에도 사비에트와의 대립은 그대로였다. 군정 지도부에게 고랜드는 두 가지 의미를 가졌다. 하나는 사비에트 남부 국경의 불안정을 이용할 기회였고, 다른 하나는 국내의 정통성 위기 속에서 반공 외교의 성과를 보여줄 수단이었다. 1979년 4월 국가정보국이 국가비상위원회에 제출한 정세 평가는 고랜드의 반란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사비에트가 "동맹 정권의 붕괴를 방관하기 어려운 국면"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 웨스타시아와 유고랜드 === 고랜드와 국경을 맞댄 [[유고랜드]]는 1958년부터 [[웨스타시아]]의 괴뢰국(유고랜드 공화국)이었다. 웨스타시아는 1956년 쿠데타로 집권한 앨빈 C. 요크의 군사정권 아래에서 자유 진영에 가까우면서도 국익이 걸리면 공산권과도 거래하는, 이른바 '줄다리기 외교'를 펴고 있었다. 고랜드에서 반란이 시작되자 반정부 세력의 지도자들과 난민이 유고랜드 서부 국경지대로 넘어왔다. 웨스타시아 정보당국은 이들의 거처와 국경 통행을 관리하며 고랜드 문제를 대외 협상의 카드로 쓰기 시작했다. 고랜드에 닿는 육로는 사실상 이 국경지대뿐이었으므로, 루이나가 고랜드에 개입하려면 웨스타시아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이 의존 관계는 1983년 웨스타시아가 NLTO에서 퇴출되고 [[마테르 전쟁]]이 시작되면서 작전의 첫 번째 위기가 된다. == 하르마탄 (1979~1983) == === 결정 제79-41호 === 1979년 6월 국가정보국장 에밀 S. 가르니에 해군 중장은 국가비상위원회 안보분과에 고랜드 반정부 세력에 대한 비밀 지원안을 제출했다. 지원안은 현상 유지, 비살상 지원, 무기 지원의 세 가지 선택지를 비교했고, 국가정보국은 두 번째를 권고했다. 권고안에 첨부된 평가서는 비살상 지원이 반란을 장기화하는 효과가 있으며, 그 결과 "사비에트의 직접 개입 가능성을 유의미하게 높일 수 있다"고 적었다. 이 한 문장이 훗날 '곰덫' 논쟁의 출발점이 된다. 7월 9일 국가비상위원회는 결정 제79-41호로 비살상 지원을 승인했다. 규모는 약 50만 달러로, 선전물 인쇄비, 휴대용 무전기, 의약품, 현금이 포함되었다. 전달은 전적으로 웨스타시아 정보당국을 거치도록 했고, 루이나 요원의 고랜드 입국은 금지되었다. 국가정보국은 이 계획에 남부작전국의 다음 순번 암호명인 「하르마탄」을 등록했다.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우리는 콘스탄티노폴에서 9년을 보냈다. 사비에트라고 그런 9년을 보내지 말라는 법은 없다." ---- 1979년 7월 9일 국가비상위원회 안보분과 회의록 (발언자 미기재, 2014년 공개) }}} 회의록이 공개된 2014년 이후 이 발언은 군정이 처음부터 사비에트를 고랜드의 수렁으로 끌어들이려 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었다. 반면 같은 회의록에는 "개입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는 발언과, 지원 규모를 50만 달러 이하로 묶자는 제안이 함께 실려 있다. === 침공과 무기 지원으로의 전환 === 1979년 12월 25일 사비에트군이 고랜드 국경을 넘었고, 27일 특수작전 「폭풍 333호」로 성베르트를 제거한 뒤 바브락 카르말을 새 지도자로 세웠다. 국가비상위원회는 1980년 1월 4일 결정 제80-2호로 지원의 성격을 무기 지원으로 바꾸었다. 루이나의 관여를 감추기 위해 공급 무기는 공산권 계열로 한정되었다. 국가정보국은 이집트와 [[빌베른]]의 구식 재고, 이스라엘이 노획한 공산권 무기를 사들여 웨스타시아 관할 항만으로 보냈고, 웨스타시아 정보당국이 이를 유고랜드 서부까지 육로로 옮겼다. 첫 선적분인 구식 볼트액션 소총 1만 정과 탄약은 2월 초 국경지대에 도착했다. 1980년 지원액은 약 3,000만 달러였다. 같은 해 사우디아라비아 정보총국은 루이나 의회가 승인하는 액수와 같은 금액을 별도 계정으로 내기로 합의했다. 이 '대응자금 원칙'은 작전이 끝날 때까지 유지되었으며, 사우디 자금은 국가정보국이 관리하는 스위스 은행 계좌로 들어갔다. === 군정 붕괴 이후의 존속 === 1980년 10월 [[10.24 시민혁명]]으로 군정이 무너졌을 때 하르마탄은 국가정보국 정규 예산의 「대외 협력 경비」 항목 안에 들어 있었다. 1981년 설치된 정보기관 조사위원회는 군정기 국가정보국의 국내 사찰을 조사했으나 국외 작전은 조사 범위 밖이었다. 하르마탄은 1981년 2월 새로 구성된 의회 정보위원회의 비공개 회의에 한 차례 보고되었을 뿐, 제4공화국 정부(1980~1983) 아래에서 별도의 재검토 없이 매년 비슷한 수준으로 갱신되었다. 지원액은 1981년 5,000만 달러, 1982년 6,000만 달러였다. 군정이 시작한 공작이 군정을 무너뜨린 정부 아래에서 아무런 단절 없이 이어졌다는 점은 훗날 제4공화국의 '관성 승계'로 비판받았다. 이 시기 지원의 목표는 사비에트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괴롭히는 데 있었다. 국가정보국 내부 문서는 무자헤딘이 사비에트군을 몰아낼 수 있다고 보지 않았고, 사비에트군의 주둔 비용을 높이면서 고랜드 문제를 국제 여론의 쟁점으로 유지하는 것을 현실적인 목표로 잡았다. == 작전의 구상과 확정 == === 1983년 재검토 === 1983년 제5공화국이 출범하자 베인브리지 정부는 군정기에서 넘어온 비밀 공작 전반을 재검토했다. 헌정 회복 후 도입된 비밀 작전 승인 절차는 모든 비밀 공작에 대통령의 서면 승인서와 의회 정보위원회 통보를 요구했는데, 하르마탄은 군정기 결정을 근거로 갱신만 되어 왔기 때문에 이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밟아야 했다. 국가정보국장 윌리엄 J. 케슬러는 하르마탄을 폐지하지 않고 확대할 것을 건의했다. 1981년 임명된 케슬러는 사비에트 남부 국경의 소모전이 랜드해협 전체의 세력 균형에서 루이나에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보았고, 군정기의 소극적인 목표로는 그 효과를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국무부는 웨스타시아에 대한 의존이 지나치고 사비에트와의 긴장이 커질 수 있다며 신중론을 폈으나, 국방부와 국가안보보좌관실은 확대에 찬성했다. === 대통령 승인서 제83-19호 === 1983년 10월 14일 국가안보회의를 거쳐 베인브리지는 대통령 비밀작전 승인서 제83-19호에 서명했다. 승인서는 기존 계획을 승계한다고 명시하면서 목적을 다시 정의했고, 같은 날 국가정보국은 남부작전국 계열의 새 암호명 「사이클론」을 등록했다. 이로써 1979년의 결정은 형식상 종료되고, 같은 작전이 새 근거 위에서 이어지게 되었다.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제2항''' 국가정보국은 고랜드 국민의 저항을 지원하여 사비에트의 고랜드 점령에 드는 정치적·군사적 비용을 높인다. 이를 위하여 무기, 탄약, 통신 장비, 의약품 및 자금을 제공할 수 있다. '''제4항''' 이 승인서에 따른 지원은 루이나 정부의 관여가 드러나지 아니하는 방식으로 하며, 지원 물자의 배분은 협력국 정보당국이 행한다. ---- 대통령 비밀작전 승인서 제83-19호 (2009년 부분 공개본) }}} 승인서는 의회 정보위원회에 통보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의 정보위원회는 설치된 지 3년이 채 되지 않은 기구였고, 위원들은 승인서 본문만 열람했을 뿐 시행 지침과 예산 세부는 받지 못했다. === 작전 원칙 === 승인서에 딸린 국가정보국 시행 지침은 다음 다섯 가지 원칙을 정했다. * '''관여 부인''': 루이나 원산 무기는 공급하지 않으며, 공급 무기는 공산권 계열로 한정한다. (1986년 폐기) * '''3자 배분''': 국가정보국은 물자를 협력국 정보당국에 인도하는 데서 역할을 마치고, 무자헤딘 정파에 대한 배분은 협력국이 전담한다. * '''불입국''': 국가정보국 요원은 고랜드 영내에 들어가지 않는다. * '''대응자금''': 사우디아라비아는 루이나 의회가 승인한 액수와 같은 액수를 낸다. * '''외국인 불접촉''': 고랜드인이 아닌 외국인 전투원과는 접촉하지 않으며, 이들을 지원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 원칙들은 루이나의 법적·외교적 위험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국가정보국이 물자의 최종 수령자를 알 수 없게 만드는 구조가 되었다. 특히 3자 배분과 외국인 불접촉은 서로 맞물려, 국가정보국은 외국인 의용병과 접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들에게 물자가 갔는지 알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구조는 훗날 역풍 논쟁의 핵심 쟁점이 된다. == 조직과 경로 == === 루이나 측 === 작전은 국가정보국 작전본부 남부작전국이 맡았다. 1984년 2월 남부작전국 안에 고랜드 태스크포스(GTF)가 설치되었고 레온 P. 카라마노스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카라마노스는 벨포르 항만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콘스탄티노폴 거점에서 경력을 쌓은 현장 요원이었으며, 본부의 결재 절차를 우회하는 방식으로 악명이 높았다. GTF는 1984년 7명으로 시작해 1987년 정원 42명이 되었다. 무기 체계 선정은 1984년 GTF에 합류한 육군 특수전 장교 출신 대니얼 S. 오어가 맡았다. 오어는 소총 위주였던 지원 품목을 박격포, 대공 화기, 암호 통신 장비, 폭약 중심으로 바꾸는 이른바 '무기 바구니' 개편안을 작성했고, 이는 1985년 이후 확전의 기술적 설계도가 되었다. 현지에서는 유고랜드 수도 시디벨아베스의 국가정보국 거점이 유고랜드 [[국가안보원]]과의 연락을 맡았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거점장을 지낸 프랭크 D. 홀리스는 불입국 원칙 때문에 전선을 직접 볼 수 없었고, [[국가안보원]]의 보고와 정찰 사진에 의존해 전황을 파악했다. 국경 도시 세테트에는 물자 인수를 확인하는 4~6명 규모의 연락 사무소가 있었다. 의회에서는 하원 국방위원회 소속 하원의원 찰스 E. 윈턴이 작전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다. 윈턴은 1984년 고랜드 난민촌을 방문한 뒤 사이클론 예산 증액을 개인적인 과제로 삼았고, 1984년부터 매년 국방위원회 심사 과정에서 증액을 관철했다. 국가정보국이 요청한 액수보다 많은 돈을 의회가 먼저 얹어 주는 이례적인 상황은 대부분 윈턴의 작품이었다. === 유고랜드 [[국가안보원]] === 1984년 9월 8일 유고랜드가 독립하자 웨스타시아 정보당국이 맡던 경로와 난민촌 관리는 신설된 유고랜드 [[국가안보원]]이 넘겨받았다. [[국가안보원]]은 웨스타시아 지배기 유고랜드 공화국 내무 기구의 국경 담당 인력을 흡수해 만들어졌으며, 초대 국장 장태순 중장이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작전의 유고랜드 측 책임을 졌다. [[국가안보원]]은 루이나에서 받은 물자를 세테트 등지의 창고에 모은 뒤 [[나크시에 로스탐]]에 사무소를 둔 수니파 7개 정파, 이른바 '나크시에 로스탐 7당'에 할당했다. 무자헤딘 훈련도 [[국가안보원]]이 맡아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유고랜드 서부의 훈련장 7곳에서 약 10만 명이 교육을 받았다. 1985년 루이나군이 유고랜드에 주둔한 뒤에는 육군 제7특수전단 파견대가 유고랜드 군 시설에서 [[국가안보원]] 교관을 훈련했는데, 무자헤딘을 직접 가르치지 않고 '교관의 교관'에 머무른다는 형식으로 불입국 원칙과 외국인 불접촉 원칙을 동시에 지켰다. [[국가안보원]]의 배분은 정치적이었다. 가장 많은 몫은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의 이슬람당에 돌아갔는데, [[국가안보원]]은 이 정파가 가장 잘 조직되어 있고 유고랜드의 통제를 받아들인다고 보았다. 반면 판지시르 계곡의 아흐마드 샤 마수드처럼 독자 노선을 걷는 지휘관은 소속 정파를 통해 상대적으로 적은 몫을 받았다. 국가정보국은 이 편중을 알고 있었으나 3자 배분 원칙에 따라 개입하지 않았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560><tablebordercolor=#131230><rowbgcolor=#131230><rowcolor=#ffc224> 정파 || 지도자 || 성향 || 배분 비중(1987) || || 이슬람당(헤크마티아르파) ||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 이슬람주의 || 24% || || 이슬람협회 || 부르하누딘 라바니 || 이슬람주의 온건 || 19% || || 이슬람연합 || 압둘 라술 사야프 || 살라피 || 17% || || 이슬람당(할리스파) || 무함마드 유누스 할리스 || 이슬람주의 || 15% || || 이슬람혁명운동 || 무함마드 나비 무함마디 || 전통주의 || 11% || || 국민이슬람전선 || 사예드 아흐마드 길라니 || 친바티스타 || 8% || || 국민해방전선 || 시브가툴라 모자데디 || 친바티스타 || 6% || 시아파 정파는 7당 체제에 포함되지 않았다. 하자라족을 중심으로 한 시아파 무자헤딘은 이란의 지원을 받았고, 사이클론 물자는 거의 받지 못했다. === 협력국 === * '''사우디아라비아''': 정보총국이 대응자금을 냈다. 국가 자금과 별도로 왕실 인사와 민간의 기부금이 자선 단체를 거쳐 유고랜드로 들어왔는데, 이 돈은 사이클론 계정을 거치지 않았고 상당 부분이 외국인 의용병 쪽으로 흘러갔다. * '''미합중제국''': CIA가 스팅어 휴대용 방공 미사일과 TOW 대전차 미사일을 공급했다. 작전의 주도권은 루이나에 맡겼고, 무기 배분은 국가정보국과 유고랜드 측이 담당했다. * '''중국''': 공식 지원이 아니라 브로커를 통한 간접 판매였다. 56식 소총, 중기관총, 63식 107mm 다연장로켓 등을 유고랜드로 넘겼으며, 이 거래로 1억 달러를 벌었다는 말이 돌았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 '''이집트''': 공산권 계열 구식 무기 재고를 팔았다. 외국인 의용병의 주요 출신국이기도 했다. * '''이스라엘''': 노획한 공산권 무기를 제3자를 거쳐 공급했다. 모사드는 작전의 운영 기관 가운데 하나였다. * '''플로렌시아''': DGSE가 참여했고 1987년 이후 밀란 II 대전차 미사일을 공급했다. * '''영국''': MI6가 참여했고 1986년 블로파이프 휴대용 방공 미사일을 공급했으나 무자헤딘이 다루기 어려워 성과가 거의 없었다. * '''라 마베라''': 1984년 이후 방위성이 자국 관할 항만의 하역과 통관을 비공개로 처리했다. * '''빌베른''': 구식 소총 재고를 넘겼고 1986년부터 산악 수송용 노새를 조달했다. 이 밖에 스위스 오리콘사의 35mm 대공포와 델라웨어의 브라이트사이드 야간 정찰 장비가 상업 경로로 구매되어 1987년 이후 공급되었다. === 보급 경로 === 보급 경로는 세 차례 바뀌었다. * '''1980~1983년''': 해상 수송 → 웨스타시아 관할 항만 하역 → 웨스타시아 정보당국의 육로 수송 → 유고랜드 서부 국경지대 * '''1983~1984년''': 웨스타시아가 경로를 동결하자 체르드를 경유하는 전세 항공편으로 우회 * '''1984~1992년''': 라 마베라 방위성이 처리하는 항만 하역 → 철도·화물차 → 세테트 창고([[국가안보원]]) → 고르드 벨트를 넘는 노새·낙타 대열 → 고랜드 마지막 구간인 고르드 벨트는 유고랜드-고랜드 국경을 따라 남북으로 뻗은 산악 통로 지대로, 수백 개의 오솔길과 계곡이 얽혀 있어 사비에트군이 끝내 봉쇄하지 못했다. 세테트에서 고랜드 동부 전선까지 물자가 도착하는 데는 보통 3~6주가 걸렸고, 겨울에는 일부 고개가 닫혀 수송량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 자금 === ||<tablealign=center><tablewidth=420><tablebordercolor=#131230><rowbgcolor=#131230><rowcolor=#ffc224> 연도 || 루이나 || 사우디아라비아 || || 1979 || 50만 달러 || - || || 1980 || 3,000만 달러 || 3,000만 달러 || || 1981 || 5,000만 달러 || 5,000만 달러 || || 1982 || 6,000만 달러 || 6,000만 달러 || || 1983 || 8,000만 달러 || 8,000만 달러 || || 1984 || 1억 6,500만 달러 || 1억 6,500만 달러 || || 1985 || 2억 5,000만 달러 || 2억 5,000만 달러 || || 1986 || 4억 7,000만 달러 || 4억 7,000만 달러 || || 1987 || 6억 3,000만 달러 || 6억 3,000만 달러 || || 1988 || 5억 달러 || 5억 달러 || || 1989 || 4억 2,000만 달러 || 4억 2,000만 달러 || || 1990 || 2억 8,000만 달러 || 2억 8,000만 달러 || || 1991 || 2억 달러 || 2억 달러 || || '''합계''' || '''약 31억 3,550만 달러''' || '''약 31억 3,500만 달러''' || 루이나 측 예산은 1984년까지 국가정보국 비밀예산의 「대외 협력 경비」 항목에서 나왔다. 1984년 예산 1억 6,500만 달러 가운데 4,000만 달러는 국가정보국이 요청하지 않은 것으로, 윈턴이 국방위원회 심사에서 얹은 증액분이다. 1985년부터 1987년까지는 마테르 전쟁 참전에 따른 전시 추가경정예산의 국방부 「해외 협력 경비」 항목이 주된 통로였다. 국방 예산은 국방위원회 소관이었으므로 이 기간 사이클론 예산의 상당 부분은 정보위원회의 세부 심사를 거치지 않았다. 1987년 가을 휴전 이후 예산은 다시 정보위원회 심사로 돌아왔고, 1988년 예산이 처음으로 전년보다 줄었다. 두 나라의 비밀예산 약 63억 달러에 미합중제국·중국 등 협력국의 지원과 현물 공여를 더하면 직접 비용은 약 70억 달러다. 여기에 1985~1991년 루이나가 유고랜드에 제공한 공개 경제·군사 원조 약 42억 달러와 난민 지원을 어디까지 작전 비용으로 볼지에 따라, 전체 추산치는 80억 달러에서 150억 달러까지 벌어진다. == 전개 == === 경로의 위기: 마테르 전쟁과 유고랜드 독립 (1983~1985) ===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상세 내용은 [[마테르 전쟁]] 문서 참고. }}} 1983년 2월 10일 벨포르에서 열린 제7차 NLTO 정상회의는 MAL 367편 격추 사건과 민케 대학살을 이유로 웨스타시아의 퇴출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퇴출 안건을 주도한 것은 루이나였다. 웨스타시아는 NLTO 탈퇴를 선언하는 한편, 루이나가 라 마베라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으면 고랜드 경로를 열어 주지 않겠다며 4월부터 유고랜드 서부로 가는 물자 수송을 동결했다. 국가정보국은 웨스타시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체르드를 경유하는 전세 항공편으로 물자를 옮겼는데, 운송비는 해상 경로의 세 배에 달했고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양도 적었다. 1983년 하반기 무자헤딘이 받은 물자는 상반기의 40% 수준으로 떨어졌다. 국가정보국은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유고랜드 공화국 내무 기구 안에서 독립을 지향하던 국경 담당 관리들과 비공식 접촉을 시작했고, 이들이 웨스타시아 정보당국 몰래 난민촌과 국경 통행을 관리해 주었다. 이 관리들이 이듬해 유고랜드 [[국가안보원]]의 모체가 된다. 1984년 마테르 전쟁으로 웨스타시아 체제가 무너지고 9월 8일 유고랜드가 독립했다. 국가정보국은 11월 신생 유고랜드 정부와 비공개 협력 약정을 맺어 [[국가안보원]]을 작전의 공식 배분 기관으로 삼았다. 1985년 4월 [[루이나-유고랜드 상호방위조약]]과 [[루이나-유고랜드 주둔군지위협정]]이 동시에 체결되고 루이나군이 유고랜드에 전개하면서, 유고랜드는 작전의 핵심 병참기지가 되었다. 같은 1985년 루이나는 마테르 전쟁에 직접 참전했고, 베인브리지는 의회 동의를 얻어 전시비상령을 선포했다. 전시 체제는 사이클론 예산이 국방 예산을 통해 대폭 늘어날 수 있는 통로를 열었다. === 확전 (1985~1986) === 1984년의 [[정지궤도 위기]]를 거치며 루이나와 사비에트의 대립은 정점에 이르렀다. 1985년 3월 사비에트에서는 보리스 카멘스키가 서기장에 올랐고, 그는 집권 첫해 고랜드 파견군에 더 공세적인 작전을 허용했다. 1985년 사비에트군 병력은 최대 11만 5천 명까지 늘었다. 루이나는 이에 맞서 작전 목표 자체를 올렸다. 1985년 5월 국가안보회의는 국가안보결정 제85-7호로 작전 목표를 "사비에트의 점령 비용 증대"에서 "사비에트군이 고랜드에서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예산은 1985년 2억 5,000만 달러, 1986년 4억 7,000만 달러로 뛰었고, 오어의 무기 바구니 개편안이 본격 적용되었다. 새로 들어간 품목은 120mm 박격포, 중국제 다연장로켓, 저격소총, 군용 폭약과 원격 기폭 장치, 암호 무전기였다. 국가정보국은 국가정찰국이 촬영한 사비에트군 기지와 보급로의 정찰 사진을 [[국가안보원]]에 제공했고, [[국가안보원]]은 이를 표적 정보로 가공해 정파 지휘관들에게 넘겼다. 사진을 제공하되 무자헤딘에게 직접 보여 주지는 않는다는 방식은 3자 배분 원칙의 연장이었다. 폭약 공급은 내부에서 논란을 낳았다. 1985~1986년 아바나에서 일어난 차량 폭탄 공격과 상가 폭파 사건 가운데 일부에 사이클론 경로로 들어간 폭약이 쓰였다는 정황이 [[국가안보원]] 보고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국가정보국 법무관실은 1986년 1월 "도시 지역의 비전투원 피해에 대하여 국은 배분 단계의 통제권이 없다"는 의견서를 냈고, 폭약 공급은 줄어들지 않았다. === 관여 부인 원칙의 폐기 (1986) === 1986년 초 국가정보국과 국방부는 사비에트의 공격 헬리콥터가 무자헤딘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고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공산권 계열 무기만으로는 이를 막을 수 없었고, 남은 선택지는 서방제 무기, 곧 루이나와 미합중제국의 무기를 넣는 것이었다. 이는 관여 부인 원칙을 버린다는 뜻이었다. 1986년 3월 국가안보회의에서 국무부는 사비에트와의 확전 위험을, 국방부 일부는 최신 무기 기술이 사비에트로 넘어갈 위험을 들어 반대했다. 케슬러와 윈턴은 원칙을 지키는 비용이 무자헤딘의 패배라고 주장했고, 베인브리지는 4월 원칙 폐기를 승인했다. 이 결정으로 루이나제 페리트(FGR-52) 대전차 미사일과 미합중제국제 스팅어(FIM-92) 방공 미사일이 공급 목록에 올랐다. 같은 해 6월 베인브리지는 나시르 알 물크 7당 대표단을 대통령궁에 초청해 공개적으로 만났다. 루이나 정부는 이를 "고랜드 국민에 대한 도덕적 지지"라고만 설명하고 무기 지원은 여전히 확인하지 않았으나, 이 만남 이후 루이나의 관여는 사실상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 스팅어와 페리트 (1986~1987) === 스팅어는 1986년 가을 처음 공급되었다. 9월 하순 고랜드 동부 잘랄라바드 비행장 인근에서 무자헤딘이 사비에트군 공격 헬리콥터 3기를 격추한 것이 첫 전과로 기록되었고, 무자헤딘은 이 미사일을 '신의 화살'이라 불렀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스팅어 미사일 약 1,000발과 발사기 250여 기가 공급되었다. 스팅어의 효과는 당시와 이후의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 [[국가안보원]]과 무자헤딘은 1989년까지 사비에트·고랜드 항공기 269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으나, 이후 공개된 사비에트 측 기록의 손실은 이보다 훨씬 적다. 사비에트군은 1987년 초부터 기만탄 사용, 고고도 비행, 야간 작전으로 전술을 바꾸어 피해를 줄였고, 사비에트 지도부의 철수 결정은 스팅어가 도착하기 전인 1985~1986년에 이미 내려져 있었다. 오늘날에는 스팅어가 사비에트의 항공 작전을 위축시킨 것은 사실이나 실전 성과는 선전된 것보다 제한적이었고, 철수의 원인이라기보다 철수를 앞당긴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루이나제 페리트는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로, 사비에트군 기갑 차량보다 후방 보급기지와 수송대 타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무자헤딘은 사거리가 긴 페리트로 기지 외곽의 연료 저장소와 탄약고를 공격했고, 1987년 한 해 동안 사비에트군 수송대의 야간 이동이 크게 줄었다. 페리트는 루이나 원산이 명확한 무기였기 때문에, 1987년 사비에트가 노획한 발사기를 기자회견에서 공개하면서 루이나의 관여를 입증하는 물증이 되기도 했다. === 절정 (1987~1988) === 1987년 사이클론 예산은 6억 3,000만 달러로 정점에 이르렀다. 밀란 II, TOW, 오리콘 35mm 대공포, 브라이트사이드 야간 정찰 장비가 이 시기에 들어갔고, 빌베른과 중국에서 조달한 노새 약 2,000두가 고르드 벨트 수송에 투입되었다. 사비에트와 고랜드 공산 정부는 유고랜드를 직접 압박했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고랜드 국가정보부(KhAD)와 사비에트 정보기관의 지원을 받은 조직이 유고랜드 국경 도시에서 폭탄 공격을 벌였고, 사비에트 공군기가 유고랜드 영공을 침범해 난민촌과 훈련장을 폭격한 일도 수십 차례였다. 1987년 7월 세테트 시장에서 일어난 차량 폭탄 공격으로는 72명이 사망했다. 1987년 가을 루이나의 마테르 전쟁 개입이 휴전으로 끝나고 연말 [[12.23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면서 루이나 국내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의회는 전시 예산을 통해 정보위원회 심사를 피해 온 관행을 문제 삼았고, 1988년 사이클론 예산은 처음으로 전년보다 줄어든 5억 달러로 책정되었다. 1988년 4월 고랜드와 유고랜드는 루이나와 사비에트를 보증국으로 하는 제네바 협정에 서명했다. 사비에트군은 5월 15일 철수를 시작했다. 협정은 외부 세력의 무기 공급 중단을 담지 않았고, 루이나와 사비에트는 각자의 공급을 계속했다. ==== 세테트 무기고 폭발 ==== 1988년 4월 3일 오전, 세테트 외곽에 있던 [[국가안보원]]의 사이클론 중앙 무기고가 폭발했다. 로켓과 박격포탄이 주변 주거지로 날아가 민간인 93명이 사망하고 1,100여 명이 다쳤으며, 저장되어 있던 물자 약 1만 톤이 소실되었다. 소실된 물자에는 스팅어 미사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고랜드 정부는 사고로 발표했으나, 폭발이 루이나 측의 스팅어 재고 실사를 2주 앞두고 일어났다는 점 때문에 [[국가안보원]]이 빼돌린 물자의 흔적을 지우려 했다는 의혹이 곧바로 제기되었다. 사비에트의 공작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유고랜드 의회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는 공개되지 않았고, 사건은 지금까지 미규명으로 남아 있다. 장태순 [[국가안보원]]장은 같은 해 교체되었다. ==== 알자미아의 결성 ==== 사비에트군 철수가 진행 중이던 1988년 8월 18일, 유고랜드 나크시에 로스탐의 한 가옥에서 이브라힘 나쉬디 등 외국인 의용병 지도자 13명이 새 조직의 창설에 합의했다. 루이나 정부는 이 회합을 알지 못했다. 이 조직이 [[알자미아]]이며, 작전과의 관계는 아래 외국인 의용병 문제 문단에서 다룬다. === 철수 이후 (1989~1991) === 1989년 2월 15일 사비에트군의 철수가 끝났다. 국가정보국과 [[국가안보원]]은 공산 정부가 몇 달 안에 무너질 것으로 예상했고, [[국가안보원]]은 3월 나시르 알 물크 7당의 임시정부를 고랜드 영내에 세우기 위해 동부의 잘랄라바드 공세를 기획했다. 그러나 무자헤딘은 정규전에 익숙하지 않았고, 사비에트가 남긴 대량의 무기와 계속되는 원조로 무장한 고랜드 정부군은 도시를 지켜 냈다. 넉 달 가까운 공세 끝에 무자헤딘은 약 3,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같은 시기 루이나 국내에서는 [[루이나 헌정 위기|3.29 헌정 위기]]가 일어났다. 3월 30일 베인브리지가 헌법재판소에서 파면되었고, 사이클론을 승인한 대통령은 그해 12월 12일 내란 수괴로 처형되었다.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와 조기 대선을 거쳐 취임한 [[테디 해밀턴]] 정부는 1989년 가을 사이클론 작전의 전면 재검토를 지시했다. 재검토 보고서는 사비에트군이 떠난 뒤 작전의 목표가 사라졌으며, 무자헤딘 정파들이 공산 정부보다 서로를 상대로 더 많이 싸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989년 7월 북부에서 헤크마티아르파 지휘관이 마수드 휘하 지휘관들을 매복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두 세력의 충돌이 공공연해졌다. 해밀턴 정부는 작전을 단계적으로 줄이면서 사비에트와 상호 공급 중단을 협상하기로 결정했다. 예산은 1989년 4억 2,000만 달러, 1990년 2억 8,000만 달러로 줄었다. 무자헤딘의 거의 유일한 성과는 1991년 3월 동부의 호스트를 점령한 것이었다. 이는 전쟁 기간 무자헤딘이 장악한 첫 주도(州都)였지만, 공산 정부의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 종료와 청산 (1991~1994) === 1991년 9월 13일 루이나와 사비에트는 제네바에서 고랜드 내 모든 세력에 대한 무기 공급을 1992년 1월 1일부로 함께 중단한다는 '상호 공급 중단 합의'에 서명했다. 사비에트에서는 같은 해 국내 위기로 카멘스키가 실각했으나, 후임 안드레이 유르첸코 지도부는 합의를 이행했다. 1992년 1월 1일 사이클론 작전의 무기 공급은 공식 종료되었다. 이후의 청산 작업은 세 갈래로 이루어졌다. * '''잔여 물자 처리''': 유고랜드 창고에 남은 물자 가운데 중화기는 회수하거나 유고랜드군에 이관했고, 소화기와 탄약은 대부분 현지에 남았다. * '''스팅어 회수''': 1990년부터 시작된 회수 사업이 1994년까지 이어졌다. 국가정보국은 미사일 한 발당 8만~15만 달러를 주고 사들였다. 공급된 약 1,000발 가운데 실전 발사 약 340발, 세테트 폭발 소실 추정 약 150발, 회수 210발을 빼면 약 300발의 행방이 확인되지 않았다. * '''기록 인수''': 1992년 [[국가안보원]]은 작전 기간의 배분 기록과 국경 출입 기록을 국가정보국에 넘겼다. 이 안에는 외국인 의용병 11,400명의 출입 기록과 「세테트 배분 장부」가 들어 있었으나, 국가정보국은 이를 분석하지 않고 문서고에 보관했다. 1994년 6월 고랜드 태스크포스가 해체되면서 청산이 끝났고, 국가정보국은 1995년 의회 정보위원회에 비공개 「사이클론 종결 보고서」를 제출했다. 무기 공급이 끊긴 뒤 고랜드에서는 무자헤딘 정파 사이의 내전이 격화되었다. 공산 정부는 아바나와 북부 거점을 지키며 존속했고, 1996년 탈레반이 아바나를 점령하자 북부로 밀려나 버텼다. == 외국인 의용병 문제 ==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상세 내용은 [[알자미아]] 문서 참고. }}} === 유입 === 1981년 요르단 출신 성직자 무스타파 알카디리가 세테트에 '결집의 집'이라는 뜻의 민간 숙소 바이트 알자미아를 열었다. 숙소는 걸프 지역의 기부금으로 운영되었고, 이슬람권 각지에서 온 자원자들은 여기서 신원을 등록하고 기초 교육을 받은 뒤 무자헤딘 정파에 배속되어 전선으로 갔다. 이듬해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재벌 가문 출신의 이브라힘 나쉬디가 유고랜드에 들어와 숙소 운영비의 대부분을 가문 자금으로 대기 시작했다. 외국인 의용병은 이집트, 리비아, 사헬 지역을 중심으로 사우디아라비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유고랜드 등지에서 모였다. 전쟁 기간 유입 인원은 2만~3만 5천 명으로 추정되며, 1992년 [[국가안보원]]이 국가정보국에 넘긴 출입 기록에서 확인된 인원은 11,400명이다. 이들은 군사적으로는 비중이 작아 전체 무자헤딘 전력의 1%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국경지대의 숙소와 훈련장을 거치며 출신국을 넘어선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국가안보원]]은 외국인 의용병의 입국과 통행을 막지 않았고, 이들을 주로 사야프의 이슬람연합과 헤크마티아르의 이슬람당에 배속했다. 의용병의 자금은 사이클론 계정이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의 민간 기부금과 나쉬디 가문의 돈에서 나왔다는 것이 루이나 정부의 일관된 설명이다. === 국가정보국의 인지 === 외국인 불접촉 원칙에 따라 국가정보국은 의용병과 접촉하지 않았다. 국가정보국이 이들의 존재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1985년부터 [[국가안보원]] 보고와 세테트 연락 사무소의 보고에 아랍 의용병 숙소가 꾸준히 등장했으나, 고랜드 태스크포스는 이를 "군사적으로 무의미한 규모의 종교 자원자"로 분류했다. 1987년 4월 12일 세테트 연락 사무소의 2년차 요원 마리 C. 들로네는 본부에 전문 한 통을 보냈다. 이른바 「세테트 전문 87-0412」다. 들로네는 아랍 의용병들이 무자헤딘 정파와 별개의 독자적인 조직망을 만들고 있고, 이들이 사비에트만큼이나 루이나를 적대하며, [[국가안보원]]을 거친 사이클론 물자 일부가 이들의 숙소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하면서 [[국가안보원]]에 정파별·수령처별 배분 명세를 요구할 것을 건의했다.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이들은 고랜드를 위해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고랜드는 이들에게 첫 번째 전장일 뿐이며, 이들이 다음 전장으로 지목하는 곳은 사비에트가 아니다. 숙소에서 거듭 확인되는 표현은 '루이나 다음'이 아니라 '루이나'다." ---- 세테트 전문 87-0412 (2002년 공개) }}} 고랜드 태스크포스는 2주 뒤 "배분은 유고랜드의 권한이며, 수령처 명세를 요구하는 것은 3자 배분 원칙에 어긋난다"는 짧은 회신을 보냈다. 전문은 그대로 보관되었고, 15년 뒤 1.19 사건 의회 합동조사위원회에서 공개되었다. 카라마노스는 2002년 위원회 증언에서 이 전문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진술했다. === 세테트 배분 장부 === 「세테트 배분 장부」는 [[국가안보원]] 세테트 창고의 1986~1989년 출고 기록 세 권이다. 1992년 기록 인수 때 다른 서류와 함께 국가정보국으로 넘어왔으나 분석되지 않은 채 보관되었고, 2002년 1.19 사건 의회 합동조사위원회가 문서고를 조사하면서 처음 확인되었다. 장부에는 1987~1988년 '바이트-1', '바이트-2', '바이트-3'이라는 수령처 부호로 출고된 물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위원회는 이 세 수령처가 알카디리 숙소 계열의 외국인 의용병 시설이라고 판단했다. 출고 내역은 화물차 46대, 무전기 300여 대, 굴착·건설 장비 11대, 박격포탄, 페리트 미사일 112발 등으로, 같은 기간 세테트 창고 출고량의 약 3.8%였다. 쟁점은 장부 일부 면에 남은 세테트 연락 사무소의 확인 서명이었다. 1988년 출고분 4개 면에 연락 사무소 요원의 약식 서명이 있었는데, 국가정보국은 이것이 창고에 들어온 물자의 총량을 확인한 서명일 뿐 출고처를 확인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위원회는 이 설명을 반박할 증거를 찾지 못했고, 서명한 요원이 누구인지도 특정되지 않았다.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국가정보국이 외국인 의용병에게 직접 자금이나 무기를 제공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정보국이 공급한 물자의 일부는 외국인 의용병 조직에 도달했으며, 국가정보국은 이를 알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다. 위원회는 국가정보국이 이를 실제로 알고 있었는지 판단할 수 없다. ---- 1.19 사건 의회 합동조사위원회 최종 보고서 제7장 (2002) }}} 일부 언론은 장부에 기록된 굴착·건설 장비가 고랜드 동부 토라보라 일대의 동굴 시설 확장에 쓰였다고 보도했다. 2001년 루이나-고랜드 전쟁 초기에 알자미아 지도부가 물러나 버틴 곳이 바로 이 동굴 시설이었다. 다만 장비의 최종 사용처를 입증하는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 == 결과 == === 군사적 결과 === 사비에트군은 1989년 2월 15일 고랜드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사비에트군의 전사자는 약 15,051명, 부상자는 약 53,753명이었고, 무자헤딘 사상자는 15만~18만 명으로 추정된다. 민간인 사망자는 56만~200만 명, 난민은 약 470만 명에 달했다. 사이클론 작전이 철수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평가가 엇갈린다. 철수를 이끌어 낸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사비에트 지도부가 1985~1986년 국내 경제 사정과 전쟁 비용을 이유로 이미 철수를 결정했으며 작전은 그 시점을 조금 앞당겼을 뿐이라는 평가도 있다. 다만 무자헤딘이 10년 동안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던 물질적 기반의 상당 부분이 작전에서 나왔다는 데에는 이견이 적다. === 고랜드 === 1985년 이후 작전의 목표는 사비에트군의 철수였지만, 그 뒤에는 공산 정부가 무너질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었다. 이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공산 정부는 사비에트의 계속된 원조, 민병대 포섭, 무자헤딘의 분열 덕분에 1992년 공급 중단 이후에도 살아남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작전이 남긴 대량의 무기는 1990년대 고랜드 내전의 연료가 되었다. 정파들은 사이클론 시기에 받은 무기로 서로 싸웠고, 국경지대의 무기 시장과 아편 거래는 이 시기에 자리를 잡았다. 1996년 아바나를 점령한 탈레반의 초기 병력 가운데 상당수는 유고랜드 난민촌의 종교학교 출신이었다. === 유고랜드 === 유고랜드는 작전의 최대 수혜자이자 최대 피해자였다. 독립 직후의 신생국은 작전을 통해 루이나의 공개 원조 약 42억 달러와 루이나군 주둔이라는 안보 보장을 얻었다. 반면 수백만 명의 고랜드 난민, 국경지대에 넘쳐난 무기와 마약, 사비에트와 고랜드 정보기관의 보복 공격을 떠안았다. 가장 오래 남은 유산은 [[국가안보원]]이었다. 작전의 배분 권한을 독점하며 성장한 [[국가안보원]]은 1990년대에 국가 안의 국가로 불릴 만큼 비대해졌고, 서부 국경지대의 무장 세력과 맺은 관계를 작전 종료 후에도 유지했다. 2011년 나쉬디가 카르바즈에서 5년 넘게 은신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국가안보원]] 일부의 비호 의혹이 제기된 것도 이 관계의 연장선에서 이해된다. === 루이나 === 작전은 1980년대 말 루이나에서 가장 성공한 비밀 공작으로 평가받았다. 국가정보국은 군정기의 국내 사찰로 실추된 위신을 이 작전으로 회복했고, 윈턴은 1990년 의회 연설에서 "루이나는 단 한 명의 병사도 잃지 않고 사비에트를 물러나게 했다"고 말했다. 이 평가는 2001년 1.19 사건 이후 뒤집혔다. 제도적으로 작전은 1980년 헌정 회복 후 도입된 비밀 작전 감독 체계의 첫 대규모 시험대였고, 그 한계를 드러냈다. 전시 예산을 통해 정보위원회 심사를 우회한 1985~1987년의 관행은 1990년 정보예산법 개정으로 금지되었다. == 영향 == === 알자미아와 1.19 사건 === 1988년 8월 결성된 알자미아는 처음부터 사비에트가 아니라 루이나를 주적으로 삼았다. 알자미아가 내세운 명분은 유고랜드에 주둔한 루이나군에 의한 "점령", 사이클론 작전으로 의용병을 불러 모았다가 등을 돌렸다는 "배신", 1993년 공동 선언 이후 루이나와 사비에트의 "야합"이었다. 세 명분 가운데 둘이 이 작전에서 직접 나왔다. 2001년 1월 19일 알자미아는 [[1.19 사건]]으로 루이나 본토를 공격했다. 사건 직후 언론은 공격을 계획한 지도부 다수가 1980년대 유고랜드 국경지대를 거친 의용병 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했고, 사이클론 작전은 그해 내내 루이나 정치의 중심 쟁점이 되었다. 이후 루이나는 [[루이나-고랜드 전쟁]](2001~2021)에 들어갔다. === 루이나-사비에트 관계 === 1991년의 상호 공급 중단 합의는 고랜드를 둘러싼 대리전을 끝낸 첫 양자 합의였고, 1993년 루이나-사비에트 공동 선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알자미아는 이 협력을 이슬람권을 나눠 갖는 강대국의 "야합"으로 규정했다. 이 흐름은 2001년 하나의 역설로 완성되었다. 루이나는 사이클론 작전으로 맞섰던 사비에트, 그리고 무너뜨리려 했던 고랜드 공산 정부와 손잡고 탈레반과 알자미아를 공격했다. 2001년 12월의 [[벨포르 협정]]은 루이나가 고랜드 공산 정부를 인정하고 사비에트가 이를 부속 의정서로 뒷받침하는 형식이었다. 사이클론 작전의 적이 루이나의 동맹이 되고, 작전의 수혜자 가운데 일부가 루이나의 적이 된 셈이다. === 무기 확산 === 행방이 확인되지 않은 스팅어 약 300발은 1990년대 내내 국제 무기 시장의 관심사였다. 1987년 이란 혁명수비대가 노획 또는 구매한 스팅어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1990년대에는 랜드해협 각지의 무장 조직이 스팅어를 구하려 한 정황이 여러 차례 포착되었다. 대부분의 스팅어는 배터리 수명이 다해 2000년대 초에는 사용이 어려워졌다는 것이 정설이나, 이 문제는 국가정보국이 1994년까지 회수 사업을 계속한 이유가 되었다. 페리트는 사정이 달랐다. 단순한 구조 때문에 유지가 쉬웠던 페리트는 1990년대 고랜드 내전에서 계속 쓰였고, 2000년대 루이나-고랜드 전쟁 기간 루이나군이 탈레반 무기고에서 루이나제 페리트를 노획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 루이나 정보기관 === 1.19 사건 이후 국가정보국은 비밀 군사원조에 '최종 사용자 확인' 의무를 도입했다. 2003년 개정된 시행 규정은 협력국을 통한 무기 지원이라도 국가정보국이 수령처 명세를 받고 표본 검증을 하도록 했으며, 이를 받을 수 없는 지원은 대통령 승인서에 그 사실을 명시하도록 했다. 사이클론 작전의 3자 배분 원칙을 뒤집은 규정이다. == 기밀 해제와 논쟁 == === 공개 경위 === 작전의 존재는 1985년 무렵부터 루이나 언론에 '고랜드 파이프라인'이라는 이름으로 보도되었고, 1986년 베인브리지와 7당 대표단의 회동 이후 사실상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그러나 루이나 정부는 작전 기간 내내 무기 지원을 공식 확인하지 않았다. * '''1995년''': 「사이클론 종결 보고서」가 의회 정보위원회에 비공개 제출되었다. * '''1998년''': 전 국가비상위원회 안보분과 위원 루시앙 M. 바랭이 주간지 《[[코망테르]]》 인터뷰에서 1979년 결정의 경위를 밝혀 '곰덫' 논쟁이 시작되었다. * '''2002년''': 1.19 사건 의회 합동조사위원회 최종 보고서에서 세테트 전문 87-0412와 세테트 배분 장부가 공개되었다. * '''2009년''': 30년 경과 기밀 해제 심사에 따라 결정 제79-41호 본문과 대통령 승인서 제83-19호 일부가 공개되었다. * '''2014년''': 정보공개 소송 끝에 1979년 7월 9일 국가비상위원회 안보분과 회의록이 공개되었다. * '''2019년''': 승인서 제83-19호 시행 지침과 1985~1987년 국방 예산 집행 명세에 대한 공개 청구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거부되었다. === '곰덫' 논쟁 === 1998년 바랭은 《코망테르》와의 인터뷰에서 1979년 7월의 결정이 사비에트의 개입 가능성을 알고 내린 것이었다고 밝혔다. 사비에트-고랜드 전쟁을 가리키는 '곰덫'(The Bear Trap)이라는 별칭은 이 인터뷰에서 퍼졌다.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우리가 사비에트를 고랜드로 밀어 넣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들어갈 확률을 알면서 높였을 뿐이다. 그날 회의실에서 그 가능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곰은 덫이 있는 줄 알고도 들어갔고, 우리는 덫을 놓았다는 사실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 루시앙 M. 바랭, 《코망테르》 1998년 3월 호 }}} 이 주장을 둘러싼 견해는 세 갈래로 나뉜다. * '''유도론''': 1979년 평가서의 "개입 가능성을 유의미하게 높일 수 있다"는 문장과 2014년 공개된 회의록의 콘스탄티노폴 발언을 근거로, 군정이 사비에트의 개입을 의도했거나 적어도 바랐다고 본다. * '''무관론''': 50만 달러 규모의 비살상 지원이 사비에트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없었다고 본다. 1990년대 일부 공개된 사비에트 측 자료에서 침공의 동기는 성베르트에 대한 불신과 그의 서방 접근 가능성이었고, 루이나의 지원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바랭의 발언은 군정의 결정을 사후에 미화하려는 자기 정당화라는 것이다. * '''위험 수용론''': 군정이 개입을 유도하지는 않았으나, 개입 가능성을 알면서 그것을 억제할 이유로 보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본다. 오늘날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다. 이 논쟁은 루이나 국내에서 군정에 대한 평가와 얽혀 있다. 군정에 비판적인 쪽은 유도론을 통해 군정의 냉소적인 대외정책을 강조하고, 군정의 대외 성과를 인정하려는 쪽은 바랭의 발언을 군정의 전략적 선견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결정이 내려진 1979년 7월 당시 사비에트 지도부가 이미 파병을 한 차례 거부한 상태였다는 점은 공통의 전제다. === 역풍 논쟁 === 사이클론 작전이 알자미아를 낳았느냐는 질문은 1.19 사건 이후 루이나에서 가장 오래 계속된 정보기관 논쟁이다. * '''직접 책임론''': 작전이 국경지대의 훈련장, 무기, 자금 흐름, 그리고 [[국가안보원]]의 권력을 만들었고, 알자미아는 그 기반 위에서 태어났다고 본다. 세테트 배분 장부는 작전 물자가 실제로 의용병 시설에 들어갔다는 직접 증거로 제시된다. * '''무관론''': 의용병의 자금은 걸프 지역의 민간 기부금에서 나왔고, 국가정보국은 의용병과 접촉한 적이 없으며, 장부에 기록된 물자는 전체의 4%에도 못 미친다고 본다. 알자미아가 루이나를 겨눈 실제 동기는 1990년대의 루이나군 주둔과 루이나-사비에트 협력이지 1980년대의 작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 '''구조적 책임론''': 국가정보국이 의용병을 지원하지 않았더라도, 배분을 전부 맡기고 수령처를 묻지 않도록 설계된 작전 구조 자체가 결과를 만들었다고 본다. 국가정보국은 몰랐을 수 있으나 그것은 알 필요가 없도록 스스로 만든 무지였다는 것이다. 들로네의 전문과 고랜드 태스크포스의 회신은 이 견해의 상징적인 근거가 되었다. 알자미아 스스로는 사이클론 작전을 루이나의 "배신"의 출발점으로 서술해 왔다. 루이나가 이슬람 전사들을 이용하고 버렸다는 이 서사는 역설적으로 작전과 조직 사이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것이어서, 직접 책임론자와 알자미아가 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른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 루이나 정부의 공식 입장 === 루이나 정부는 2002년 1.19 사건 합동조사위원회 보고서에 대한 답변서에서 처음으로 작전의 존재를 공식 인정했고, 그 뒤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루이나 정부는 사비에트의 침략에 맞선 고랜드 국민의 자위권 행사를 지원하였다. 이 지원은 고랜드 국민에게 제공된 것이며, 국가정보국은 고랜드인이 아닌 외국인 전투원에게 자금이나 무기를 제공한 사실이 없다. 협력국을 통해 배분된 물자의 최종 사용에 관하여 확인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음을 인정하며, 정부는 이를 제도 개선의 교훈으로 삼는다. ---- 1.19 사건 의회 합동조사위원회 보고서에 대한 정부 답변서 (2002) }}} 1979년 결정에 대해서는 "군정기의 결정으로, 현 정부가 그 의도를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 대중매체에서 == * '''《붉은 협곡》'''(1988): 루이나의 액션 영화. 퇴역 특수부대원이 고랜드에 잠입해 무자헤딘과 함께 사비에트군과 싸우는 내용으로, 개봉 당시 흥행에 성공했다. 마지막 장면의 헌사 "고랜드의 용감한 전사들에게"는 1.19 사건 이후 반복해서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2001년 이후 루이나 방송사들은 재방송 때 이 헌사를 잘라 내고 내보냈다. * '''《윈턴의 전쟁》'''(2007): 찰스 E. 윈턴과 레온 P. 카라마노스를 주인공으로 한 루이나 영화. 작전을 경쾌한 정치 희극으로 그렸으며, 사비에트군 철수 후 윈턴이 고랜드 재건 예산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실제 윈턴이 1990년 재건 예산을 요청했다는 기록은 없어 각색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 '''《바람의 회계》'''(2004): 《르 마탱》 기자가 쓴 논픽션. 세테트 배분 장부를 중심으로 작전의 자금과 물자 흐름을 추적했으며, 구조적 책임론을 대중적으로 알린 책으로 평가된다. * '''《곰덫》'''(2010): 루이나 방송공사(RBC)의 4부작 다큐멘터리. 바랭의 생전 인터뷰 원본과 사비에트 참전 군인들의 증언을 함께 실었다. == 여담 == * 작전을 승인한 두 정부는 모두 비극적으로 끝났다. 하르마탄을 승인한 군정은 첫 무기가 국경에 도착한 지 여덟 달 만에 무너졌고, 사이클론을 승인한 베인브리지는 사비에트군이 철수를 끝낸 해에 내란 수괴로 처형되었다. 작전은 두 정부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 고르드 벨트 수송을 위해 빌베른과 중국에서 들여온 노새는 1986~1991년 약 5,500두였다. 노새 조달 예산은 국가정보국 예산서에 「산악 운송 지원」이라는 항목으로 잡혔는데, 1988년 정보위원회 심사에서 한 위원이 이를 차량 구매비로 알고 단가가 지나치게 싸다고 문제 삼은 일화가 있다. * 무자헤딘이 스팅어를 부른 '신의 화살'은 루이나에서도 유행어가 되어, 1987년 무렵 정치 풍자 만화에서 예상치 못한 결정적 한 방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 카라마노스는 1991년 국가정보국을 퇴직했고, 2002년 합동조사위원회 증언에서 "우리는 전쟁을 이겼고, 그다음에 무엇이 오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예산을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영화 《윈턴의 전쟁》의 마지막 장면의 모티프가 되었다. * 들로네는 1999년 국가정보국을 떠났다. 2002년 전문이 공개된 뒤 언론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했고, 위원회에 제출한 서면 진술에서 "그 전문은 경고가 아니라 질문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라고만 적었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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