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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에트-고랜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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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정 === 전쟁이 가장 격렬했던 것은 1984년부터 1987년까지다. 이 시기 사비에트는 지도자가 세 번 바뀌었다. 1982년 11월 스타로두보프가 사망하자 개입을 주도했던 KGB 의장 아브데예프가 제1서기 자리에 올랐고, 그는 "1년 안에 끝낸다"며 공세를 강화했다. 그러나 아브데예프는 1984년 2월 신장병으로 사망했고, 후임인 게오르기 M. 폴랸스키도 1985년 3월 병사했다. 지도부가 병상과 장례식장을 오가는 동안 고랜드의 사비에트군은 1985년 11만 5천 명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이 시기 사비에트군의 전술은 눈에 띄게 가혹해졌다. 유고랜드에서 들어오는 무자헤딘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국경 지대의 마을을 폭격해 주민을 몰아내는 이른바 「소개(疏開) 작전」이 벌어졌고, 헬리콥터로 뿌린 소형 대인지뢰가 농경지와 산길을 뒤덮었다. 사비에트군 특수부대는 국경을 넘어오는 보급 대열을 매복 공격하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주민이 떠난 땅에서 무자헤딘을 가려낼 방법은 더욱 없어졌다. 유고랜드로 넘어간 난민은 1985년 320만 명을 넘었다. 1985년 3월 54세의 빅토르 S. 셀레즈뇨프가 제1서기에 오르면서 흐름이 바뀌었다. 셀레즈뇨프는 1986년 2월 노동인민당 대회에서 고랜드 전쟁을 "피 흘리는 상처"라고 불렀고, 같은 해 11월 13일 정치국은 2년 안에 병력을 철수한다는 방침을 비밀리에 결정했다. 다만 철수는 친사 정권이 스스로 버틸 수 있게 만든 뒤에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 조건을 위해 사비에트는 먼저 고랜드 지도자를 바꿨다. 1986년 5월 카르말은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나 사비에트로 사실상 망명했고, 비밀경찰 수장 출신인 무함마드 나지불라가 뒤를 이었다. 나지불라는 1987년 1월 「민족 화해」를 선언해 무자헤딘에게 휴전과 권력 분점을 제안했고, 11월에는 새 헌법을 공포해 이슬람을 국교로 명시했다. 1990년에는 헌법을 다시 고쳐 인민민주당의 영도 조항을 삭제하고 다당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무자헤딘은 이를 사비에트의 철수 준비로 보고 협상을 거부했다. 1986년 가을 무자헤딘에게 루이나제 페리트와 미합중제국제 스팅어가 처음 공급되면서 사비에트의 제공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대로 실전 효과는 과장된 면이 있지만, 사비에트군 헬리콥터가 저공 회피 비행을 강요받으면서 근접 항공지원의 정확도가 떨어졌고 이는 지상전의 부담으로 이어졌다. 1987년 11월부터 1988년 1월까지 벌어진 「간선(幹線) 작전」은 포위된 코스트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으로, 사비에트군이 이 전쟁에서 벌인 마지막 대규모 공세였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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