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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에트-고랜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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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랜드사]] ||<-4><tablealign=right><tablewidth=450><tablebgcolor=#536349><tablebordercolor=#536349> '''{{{#ffffff {{{+1 사비에트-고랜드 전쟁}}}[br][[파슈토어|{{{#ffffff د ساويېت - ګولنډ جګړه}}}]][br][[페르시아어|{{{#ffffff جنگ ساویت - گولند}}}]][br][[러시아어|{{{#ffffff Голандская война (1979—1989) [br] Савиетско-Голандская война}}}]][br]{{{#ffffff Saviet-Goland War}}}}}}''' || ||<-4><bgcolor=#fff,#000>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ttachment/사벹-꼬랜드 전쟁/so.jpg|width=100%]][br][* 사비에트 고랜드 전쟁 당시 전쟁 참전자의 회고록에서 발췌된 사진이다. 소총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은 공수군 제11정찰중대의 니콜라이 야쿠셴코(Николай Якущенко) 준위(정비반장), 뒤는 11정찰중대 소속의 BMD-1 공수장갑차이다. 1983년 고랜드 아바나에서 찍은 사진.]}}} || ||<-4> '''{{{#fff 기간}}}''' || ||<-4><bgcolor=#fff,#000> 1979년 12월 25일 ~ 1989년 2월 15일 [br](9년 1개월 3주) || ||<-4> '''{{{#fff 원인}}}''' || ||<-4><rowbgcolor=#fff,#000> '''사비에트의 지원을 받은 타라키 정권의 [[고랜드 민주공화국]] 수립[br]피델 성베르트 정권의 급진 정책과 통제력 상실[br]고랜드의 부족 세력과 이슬람 세력들의 반발''' || ||<-4> '''{{{#fff 장소}}}''' || ||<-4><bgcolor=#fff,#000> [[고랜드]] || ||<-4> '''{{{#fff 교전 국가 및 세력}}}''' || ||<-2><^|1><rowbgcolor=#fff,#000><width=50%>'''[[사비에트]]'''[br][[고랜드 민주공화국]] ||<^|1><-2><width=50%>무자헤딘[* 단일 집단이 아니라 하위 분파가 매우 다양하다. 크게 수니파, 시아파, 마오주의파로 나뉜다.][br]┗ 수니파 무자헤딘[br]┗ 시아파 무자헤딘[br]┗ 마오주의파 무자헤딘 || ||<-4> '''{{{#fff 지원 국가 및 세력}}}'''[* 중국은 수니파와 마오주의파 지원, 이란은 시아파 지원, 그 외의 국가들은 수니파 지원.] || ||<-2><^|1><rowbgcolor=#fff,#000><width=50%>소련[br]동독[br]체코슬로바키아[br]불가리아 인민 공화국[br]인도[br]베트남[br]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이 왜 이쪽에 있냐면 뮌헨 올림픽 참사에서 보이다시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에서는 파타당은 물론 극좌 테러단체인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과 조금 더 온건한 팔레스타인 해방민주전선(DFLP)을 비롯해 좌파 계열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마스가 등장한 건 팔레스타인의 내분을 유도한 이스라엘이 지원하기 시작하고 좀 이후다.] ||<^|1><-2><width=50%>[[루이나]][br][[미합중제국]][br][[유고랜드 공화국]][* 1984년 독립 이전까지는 [[웨스타시아]]의 괴뢰국이었으며, 이 시기 유고랜드를 거치는 지원 경로는 웨스타시아 정보당국이 관리했다.][br][[웨스타시아]] (~1984)[br][[마베라]][br]영국[br][[플로렌시아]][br]서독[br]사우디아라비아[br]중화인민공화국[* 사비에트가 냉전 시절에 이집트는 물론 루이나에 대항해서라도 중국에 무기를 팔아먹었으나 루이나는 티 안 나게 중국에 있던 사비에트제·소련제 무기들을 구매해 유고랜드로 넘기기 시작하였다. 즉 말해서 중국이 대놓고 지원한 게 아니라 브로커들이 지원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문화대혁명으로 초토화된 대륙을 바삐 복구하던 덩샤오핑 정권 입장에서 [[NIA]]에 중고 무기를 넘기는 건 나름 짭짤한 외화벌이 장사였는데 1억 달러를 벌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그 외에도 63식 다연장로켓 등의 중국이 독자적으로 설계한 장비들도 무자헤딘 반군에 제공되었다.][br]이란[* 반서방 감정과는 별개로 이란은 시아파를 믿는 하자라족과 같은 이란계인 타지크족 등이 주축이 된 고랜드 무자헤딘들에 한해 지지했다.][br]이스라엘[* 이란 혁명 이전인 팔라비 왕정 시절에 이스라엘을 인정했던 이란과 달리 고랜드는 인민민주당의 공산정권 수립과 사비에트의 침공 이전 왕정과 고랜드 공화국 정권 시절에도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당시 사비에트와 싸우던 무자헤딘을 지지했다.] || ||<-4> '''{{{#fff 지휘관}}}''' || ||<-2><^|1><rowbgcolor=#fff,#000><width=50%>'''[[사비에트]]'''[br]표트르 A. 스타로두보프[br]유리 V. 아브데예프[br]빅토르 S. 셀레즈뇨프[br]바실리 I. 체르냐호프[br]'''[[고랜드 민주공화국]]'''[br]피델 성베르트 ✝[br]바브락 카르말[br]무함마드 나지불라 ||<^|1><-2><width=50%>아흐마드 샤 마수드[br]이스마일 칸[br]굴부딘 헤크마티아르[br]부르하누딘 라바니[br]잘랄루딘 하카니[br]압둘 라술 사야프 || ||<-4> '''{{{#fff 병력}}}''' || ||<-2><rowbgcolor=#fff,#000>[[사비에트군]] 115,000명, 연 투입 누적인원 620,000명[br]고랜드군 65,000명[* 친정부 민병대 제외.] ||<-2><^|1>무자헤딘 연 투입 누적인원 약 250,000명 || ||<-4> '''{{{#fff 결과}}}''' || ||<-4><rowbgcolor=#fff,#000> '''무자헤딘의 승리''', '''사비에트의 철수''' || ||<-4> '''{{{#fff 영향}}}''' || ||<-4><rowbgcolor=#fff,#000> '''[[고랜드 내전]]'''[br]'''[[탈레반]]의 아바나 점령 (1996)'''[br]'''[[알자미아]]의 형성''' || ||<-4> '''{{{#fff 피해}}}''' || ||<-2><rowbgcolor=#fff,#000>[[사비에트군]] 15,051명 전사[* 사비에트 인민해로방군, 사비에트 KGB, 내무인민위원부 산하부대 합산.], 53,753명 부상[br]고랜드군 18,000명 전사, 77,000명 부상 ||<-2><^|1>무자헤딘 15만~18만명 사상[* 절반 가량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 ||<-4> '''{{{#fff 민간인 피해}}}''' || ||<-4><rowbgcolor=#fff,#000> 민간인 사망 560,000 ~ 2,000,000명[br]난민 약 470만 명 || [목차] [clearfix] == 개요 == 사비에트-고랜드 전쟁은 1979년 12월 25일부터 1989년 2월 15일까지 [[사비에트]]와 [[고랜드]] 무자헤딘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사비에트라는 '곰'을 고랜드라는 '덫'으로 잡았다는 의미에서 '곰덫'(The Bear Trap)이라고도 표현된다. 베트남 전쟁, 키프로스 전쟁 당시 소련과 중국이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무기 및 특수부대 등을 지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에서는 [[루이나]]와 [[미합중제국]]이 무자헤딘을 비공식적으로 지원했다. 사비에트는 통제력을 잃은 고랜드 공산 정권을 바로잡겠다며 대통령 피델 성베르트를 특수작전으로 제거하고 친사 정권을 세웠지만, 이 개입은 고랜드 전역의 반사 항전을 불러왔다. 10년 동안 사비에트군 1만 5천여 명이 전사했고, 고랜드에서는 최대 200만 명의 민간인이 숨지고 470만 명이 나라를 떠났다. 사비에트는 1989년 철수했지만, 사비에트가 남긴 공산 정권은 무너지지 않고 내전을 버텨 냈다. 정권은 1996년 [[탈레반]]에게 수도 아바나를 내주고 북부로 밀려났다. 한편 루이나가 무자헤딘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모여든 외국인 의용병들은 훗날 루이나를 겨누는 국제 지하드 조직 [[알자미아]]가 되었다. 20여 년 뒤 루이나는 [[루이나-고랜드 전쟁]]에서 한때 무너뜨리려 했던 바로 그 공산 정권과 손잡고 탈레반과 싸우게 되었고, 사비에트가 빠졌던 것과 비슷한 수렁에 빠졌다. == 배경 == 과거부터 고랜드는 놀라운 비옥함과 방대한 곡창지대를 자랑하며, 수많은 외세가 군침을 흘리던 전략적 핵심지였다. 특히 고원의 지형과 계절풍이 만들어내는 온화하고 안정된 기후, 지하수 자원, 범람기 기반의 수리농업 체계는 고랜드를 동방 최대의 식량 생산지로 만들었다. 그 자원적 가치로 인해 고랜드는 '랜드해협의 밀창고', 또는 '신의 식탁'이라 불리며, 세계 주요 열강의 주목을 받아왔다. 한때 고랜드는 마베라 왕국의 식민지로, 사실상 마베라의 곡물 저장고이자 방대한 농노 착취지대로 전락해 있었다. 1910년대부터 마베라령 고랜드 총독부는 대규모 농지 수탈과 수리시설 재편, 상업 농업화를 추진했고, 이로 인해 자급 농민층은 급속히 몰락해갔다. 1940년대 후반, 마베라 본국이 국제무대에서 식량을 무기 삼아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자, 이를 견제하던 루이나, 플로렌시아, 사비에트 3국은 이례적으로 연합된 외교 압박을 가했다. > "곡식은 민중의 것이지, 제국의 것이 아니다." > ---- > 1950년 루이나 국무장관 리처드 브래넌 이들 3국은 마베라에게 고랜드의 자치권을 즉각 보장하고 식민 통치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1952년 고랜드는 명목상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하지만 정치적 독립과는 달리, 경제 주권과 식량 유통 구조는 여전히 외세의 손에 있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식량 주권과 곡물 무역 통제권을 둘러싼 국제적 각축은 고랜드를 그 한가운데로 끌어들였다. 플로렌시아는 자국 식량 수급의 장기적 대안을 찾기 위해 농업 연구소와 영농법인들을 고랜드에 파견했고, 사비에트는 '식량 안보 없는 평화는 없다'는 기치 아래 고랜드 곡창지대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루이나 역시 국제 농업협력을 명분으로 기술 인력과 곡물 저장시설 투자를 확대하며 '농업 패권'을 둘러싼 신(新)식민경쟁에 참전했다. 1960년대 바티스타 왕가는 공식적으로는 중립국이자 자급자족형 농업국가로 남아 있었지만, 실제로는 서구화 정책과 수출 중심 농업 개편을 추진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플로렌시아와의 농업기술 협정, 식량 수출 계약 등을 체결하며 점차 깊숙한 외교적 연계를 형성해갔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은 자영농층의 붕괴와 전통 공동체 구조의 해체를 불러왔고, 향촌 사회는 급격한 변화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사비에트에서 귀국한 농업 기술관료들 중 일부는 토지 집단화와 곡물 유통의 국가 독점화를 주장하면서 공산주의 농업 개혁 노선을 밀어붙였고, 반대로 이슬람 성직자들과 부족 지도자들은 "신의 땅을 분배할 자는 오직 신"이라 외치며 반공·반세속 운동을 조직해 세력을 키워갔다. === 1973년 바티스타 다우드 칸의 쿠데타 ===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width=49%> [[파일:Mohammad Zahir Shah.webp|width=100%]] ||<nopad> [[파일:Mohammed-Daoud-Khan.webp|width=100%]] || || 바티스타 자히르 샤 || 바티스타 다우드 칸 || 1973년 바티스타 자히르 샤 국왕 치하의 고랜드 왕국은 비교적 안정되게 유지되면서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왕의 사촌이었던 바티스타 다우드 칸이 왕이 해외 순방을 하던 틈을 노려 쿠데타를 일으켰고, 정권을 잡은 다우드 칸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 수립을 선언하며 고랜드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다우드 칸은 자신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개혁 정책을 추진함과 동시에, 지방과 군부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공산주의자와 이슬람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반공주의·반이슬람주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이슬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다. 이에 다우드 칸 정권은 이슬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반발을 동시에 사게 되면서 국가는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 1978년, 좌익 반군의 쿠데타와 [[고랜드 민주공화국]] 수립 ===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width=52.4%> [[파일: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이미지 2.png|width=100%]] ||<nopad> [[파일:하피줄라 아민 이미지 1.jpg|width=100%]] || ||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 피델 성베르트 || 결국 1978년 좌익 군인들이 주도한 쿠데타로 다우드 칸 공화국 정권이 무너지고 다우드 칸이 쿠데타군에게 살해되면서[* 대통령이었던 다우드 칸만 살해한 게 아니라 영부인과 자녀들까지 죽였다.]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피델 성베르트 등이 이끌던 고랜드 내 최대 좌익 정당 고랜드 인민민주당 내 강경파, 곧 원리주의적으로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할크파가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여 공산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타라키는 혁명평의회 의장 겸 총리에, 성베르트는 부총리 겸 외무장관에 올랐다. === 내전: 혁명정권 vs. 반공 게릴라 친바티스타파/무자헤딘 === 이에 지방의 여러 부족들이 반발하였고, 고랜드 전역에서 이른바 무자헤딘이라는 이름의 반군 게릴라들이 들고 일어나 공산 정권에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 당시 무자헤딘에는 친바티스타 파벌들이 있었다.] 고랜드에서 지역적인 반란은 시대를 막론하고 간헐적으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1979년 이전까지는 이슬람 반군의 활동이 짧은 시간 안에 중앙정부를 붕괴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았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사비에트 고랜드 KGB 요원.jpg|width=100%]] || || 전쟁 당시 투입된 사비에트 [[KGB]] 알파 그룹 요원들 || 사비에트는 이 이슬람 세력이 고랜드 공산화에 큰 걸림돌이자 자국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수많은 사비에트 국가보안위원회(KGB)[* 소련의 KGB와 이름이 같지만 별개의 기관이다. 사비에트는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쓰며 혁명 과정에서 소련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정부 기관의 명칭과 조직 체계 상당 부분을 소련에서 그대로 들여왔다.] 요원을 고랜드에 잠입시켰다. 시설 경비와 인민민주당 정부군의 무기, 차량 사용법 훈련을 위해 파견된 [[사비에트군]] 병력도 점차 늘었다. 고랜드는 집권한 친사 세력과 정권에 포함되지 못한 인민민주당 내 온건파인 파르참파, 그리고 향촌의 이슬람 세력과 왕당파로 나뉘어 난장판이 되었다. 이슬람 세력은 이때부터 친사 세력을 사비에트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하고, 친사 세력뿐만 아니라 고랜드 거주 사비에트인에 대한 테러를 시작하여 사비에트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 사비에트의 특수작전(폭풍 333호): 성베르트 대통령 제거 === ||<tablealign=center><tablebgcolor=white,#1f2023><nopad> [youtube(bpm5dPIULF0)] || || 작전 상황을 재현한 3D 애니메이션 || 더구나 집권한 인민민주당은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1979년 9월 성베르트가 타라키 대통령을 죽이고 대통령이 되었는데 성베르트는 사비에트도 경악할 정도의 희대의 막장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일단 성베르트는 타라키의 지지자 5만 명을 처형하고 파슈툰족을 중심으로 한 친위부대를 꾸렸는데, 여기까지야 정권 공고화로 이해할 수 있지만 성베르트는 곧 고랜드 전체를 적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성베르트는 인민민주당 내 강경파인 할크파 소속으로 사비에트마저도 학을 뗄 정도로 공산주의에 집착했다. 그 예로 성베르트 정권 하에서 모든 공무원과 시민, 학생들은 공산주의의 상징인 붉은색으로 모든 사물들과 벽, 건물을 칠하는 작업에 강제로 동원되어야 했고, 집에 사용하는 가전제품이나 장식품마저도 붉은색으로 칠하거나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구를 넣어야 했다고 하며, 한 술 더 떠서 고랜드에 거주하던 사비에트인들에게도 그들이 사용하는 자동차나 자전거 등을 붉은색으로 칠하도록 권고하기까지 했다. 성베르트는 토지개혁을 실시했으나 전통적인 고랜드 부족사회의 토지 소유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 무식하게 밀어붙여 고랜드 부족들의 반발을 샀으며, 이슬람 성직자들이 반발하자 닥치는 대로 성직자들을 체포해서 처형하고 마드라사들을 폐쇄하는 자살골을 넣는다. 심지어 라마단조차 금지하려 하는 난장판에 거의 중세 유럽 수준으로 종교로 정체화된 고랜드 사회는 발칵 뒤집혔지만[* 여기서 중세 수준이라는 말은 단순히 문명이 중세 수준으로 미개하다는 말이 아니라 고랜드인들의 삶 자체가 종교와 일체화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집안의 대소사, 관혼상제, 법적인 소송과 자녀의 교육까지 이슬람교가 담당하는 형태였고, 세속화된 사회에서 어쩌다 가는 종교와 달리 고랜드에서 종교는 삶의 양식 그 자체였다.] 성베르트는 정부에 반기를 드는 지방이 있으면 '''폭격기를 동원해서 마을과 부족 단위로 몰살시키는 등''' 전국적인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다. 엄청난 수의 난민들이 유고랜드로 몰려가는 등 성베르트 정권의 실패는 더 이상 고랜드 국내 문제 수준으로 남지 않게 되었다. 이는 고랜드에 있었던 사비에트인들과 고문들을 경악하게 했고, 사비에트 고문관들은 본국으로 보내는 보고서에 성베르트 정권은 오히려 공산주의를 민중들에게 악이 되는 방향으로 주입 중이라 조속히 교정이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사비에트인들에게 내려온 권고문을 증거물로 삼아 보냈다. 1940년대 내전 끝에 자국을 공산화한 경험이 있고, 소련이 동유럽에서 겪은 시행착오도 가까이서 지켜본 사비에트 지도부는 자체적인 혁명 승리가 아닌 지도부 교체만으로 들어선 공산 정권이 강압적인 체제 변혁을 시도하면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비에트 지도부는 성베르트에게 미친 짓 그만하라고 계속 설득하려 했으나 성베르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반군은 폭증하여 16개 주에서 들고 일어났는데 4개 주가 완전히 함락되고 10개 주의 90% 이상이 반군에게 넘어갔으며, 반군의 규모도 4만 명으로 불어났다. 성베르트 정권은 말기에 아바나, 쿤두즈, 바글란 3개 주만을 겨우 통제했고, 정부군은 반란과 탈영으로 계속 약화되었다. 결과적으로 반군은 고랜드 전체의 70~90%를 점령한 상태였다. '''즉 사비에트가 개입해서 고랜드 정부의 통제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이미 성베르트 정권 때 고랜드 정부는 완전히 통제력을 상실한 후였다.''' 물론 이 관점에서도 사비에트의 침공이 고랜드 국민의 반외세 정서를 폭발시켜 반란에 더욱 불을 지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반군에게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성베르트가 당황해서 반군과 협상하려 하자 사비에트는 성베르트의 정권 유지력에 의심을 품게 된다. 사비에트가 파르참파(깃발파)와 더 밀접했던 것도 상호 불신에 불을 붙였다. 한편 사비에트의 계속된 간섭에 성베르트는 사비에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미합중제국 및 유고랜드와의 관계 개선을 시작하였다.[* 당시 유고랜드는 [[웨스타시아]]의 괴뢰국이었으므로, 유고랜드와의 접촉은 사실상 웨스타시아를 통해 서방과 선을 대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성베르트가 친서방 행보를 이전에 비해서 강화한 것은 분명히 사실이었고, 그의 미합중제국 유학 경험을 생각해보면 사비에트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나중에 공개된 자료를 보면 미합중제국은 고랜드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고랜드를 상대로 공작을 할 여력 따위가 없었고, 성베르트와의 유의미한 관계는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고, 과거 아랍 국가들이 친소·친사인 척 지원만 받아먹다가 뒤통수친 걸 본 사비에트 입장에선 성베르트가 똑같은 짓을 하려 한다고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역으로 루이나는 사비에트가 고랜드를 장악하여 식량 패권을 강화하려 한다고 의심했지만, 정작 사비에트에서는 고랜드를 그냥 식량창고로 보는 등 서로가 서로의 의도에 대해서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어쨌거나 사비에트 노동인민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성베르트가 반사로 전환하려는 증거가 나온다면 즉시 조치를 취하라고 KGB에 지시했는데, 이는 성베르트가 '반사임을 입증하라'는 지시로 들렸다. KGB는 성베르트를 찍어내기 위해 카르말 등을 시켜서 성베르트를 음해하는 공작을 가동시켰고, 성베르트가 친미합중제국파라는 보고들은 구체적인 증거가 없음에도 사비에트 지도부 내에서 어느 순간 점점 더 살이 붙어서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사비에트 지도부마저 낚아 버렸다.[* 세이아: .............우리는....대화를.....해야.....한다고요........] 이로써 사비에트는 겉으로는 친사지만 실제로는 미합중제국 등 서방 열강들의 끄나풀이라고 판단된 성베르트를 제거하고 이슬람 세력을 직접 진압하기 위해 군사개입을 결정했다. 1979년 12월 6일 정치국 회의는 제176호 결정서를 통해서 성베르트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500명의 병력을 파견하기로 하였으나, KGB 의장 유리 V. 아브데예프와 국방인민위원장 바실리 I. 체르냐호프를 위시로 하는 정치국의 핵심 멤버들은 곧 12월 12일의 밀실합의를 통해서 성베르트를 아예 제거하고 고랜드에 군사작전을 하기로 결정했다. 고령으로 병석에 있던 노동인민당 제1서기 겸 최고인민평의회 주석 표트르 A. 스타로두보프가 이 합의에 서명했고, 나머지 정치국 위원들에게는 사후 승인을 받아냈다. 최초에는 성베르트를 저격으로 죽이려 했으나 성베르트의 호위대에게 적발되어 실패했고, 12월 16일에는 성베르트를 독살하기 위해 그가 마실 펩시콜라에 독을 탔으나 성베르트의 조카 아사둘라 성베르트가 마셔버리는 바람에 또 실패했다. 이에 12월 27일, 특수부대를 보내서 대통령궁을 박살내고 성베르트를 죽이는 계획으로 가게 되었다. 왜 하필 12월 27일이었냐면, 대외인민위원장 니콜라이 P. 그라나토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12월 28일 성베르트는 유고랜드를 통해 웨스타시아 측과 접촉을 가지기로 했는데, 사비에트 지도부는 이를 성베르트가 미합중제국의 스파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12월 27일, 아무것도 모르던 성베르트는 의기양양하게 최고 지도부를 소집하여 사비에트가 자신을 돕기로 했다면서 만찬을 열었는데, 갑자기 참석자들이 중독 증상을 보이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음식을 사비에트 요리사들이 준비했다는 점에서 KGB가 음식에 독을 탄 것으로 보인다. 성베르트도 구토를 하며 쓰러졌고 사비에트 의사들의 치료를 받았는데, 오후 7시 30분부터 사비에트군 특수부대의 공격이 시작됐다. 성베르트는 처음에는 이것이 반군이나 정부 내부의 타라키 지지 세력의 공격이라 여겨 사비에트군의 지원을 요청하라고 명령했으나, 사비에트군의 공격이라는 보고에 화를 내면서 사실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사비에트와 연락을 시도했을 때 모든 회선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성베르트는 그제야 자신이 버림받은 것을 깨닫고 좌절했다. 성베르트가 처형을 당한 것인지 유탄에 맞은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거나 격렬한 총격전 끝에 성베르트는 처참하게 죽었다. 성베르트의 어린 아들도 총에 맞아 죽었고, 어린 딸도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 성베르트의 호위대 300명 중 150명도 전사했다. 눈치 없이 성베르트가 마실 펩시를 마셨던 아사둘라 성베르트는 사비에트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던 중이었는데, 성베르트가 죽은 후 투옥되어 심문을 받은 뒤 고랜드에 송환되어 카르말 신정부의 손으로 처형된다. 군사적으로 볼 때 성베르트 정권 전복공작은 전면침공이 아니라 특수부대 및 KGB 요원들에 의한 특수작전에 가까웠고, 사실상 매우 적은 희생(4명 전사)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성베르트 정권에 대한 사비에트의 쿠데타와 정부 수장 사살 직후에는 국경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략 8만 명에 달하는 사비에트군이 제40군 휘하 전력으로 고랜드에 들어와 주요 도시를 빠르게 장악했다. 이렇게 고랜드 모험은 성공적으로 끝나나 싶었다. === 친사 대통령 바브락 카르말의 공산정권 수립 === 성베르트를 제거한 사비에트는 타라키와 성베르트에게 밀려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좌천되어 있던 파르참파 지도자 바브락 카르말을 새 대통령 자리에 앉혀, 고랜드에 원래 있었던 할크파 정권을 갈아엎고 새로운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사비에트군은 고랜드군을 장악하기 위해서 할크파가 장악한 군부대를 아바나에서 빼내서 최전선으로 내보내고, 고랜드군의 중화기와 기갑차량을 정비를 목적으로 사용 불능으로 만들거나 회수하여 고랜드군을 완전히 무력화함으로써 손쉽게 고랜드군을 통제하에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원래도 탈영과 반란으로 휘청거리던 고랜드군의 전투력이 더욱 형편없어졌음은 물론이고, 성베르트를 지지하던 부대들은 성베르트의 죽음에 반발하여 탈영하거나 무자헤딘으로 잇달아 가담하기 시작했다. 침공 직후인 1980년 1월 당시 공산 고랜드군에는 10만 명의 병력이 있었으나 5개월 만에 3만 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사비에트군은 이들 부대를 장악하려고 했으나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민심도 동요하여, 원래도 정부를 싫어했던 고랜드 민중은 이제 정부를 사비에트 꼭두각시로 여겨 경멸하게 되었다. 아바나와 지방에서는 곧바로 대규모 반사 시위가 벌어졌으며, 흥분한 시민들은 길거리의 사비에트군을 공격해 살해하고 사비에트군도 진압에 나서는 등 반사 민심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무자헤딘은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기 시작했고, 단기간의 점령을 마치고 철수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사비에트 지도부는 당혹했다. 사비에트 지도부는 무자헤딘을 고립된 도적떼 정도로 얕잡아봤으나, 민중의 지지를 받는 무자헤딘은 사비에트를 상대로 매우 효과적인 게릴라 전술을 감행해왔고 사비에트군은 몇몇 도시와 간선 도로만을 간신히 점과 선으로 통제할 뿐이었다. 정확히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예견했던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K. 보그다노프 원수는 일찍이 정치국에 [[NLTO]]와의 대치가 시급한 현 상황에서 무자헤딘과 비정규전과 소모전을 벌이는 것은 불리하니 군사적 개입을 해선 안 된다고 강력히 반대했으나, 체르냐호프는 감히 정치국을 가르치려 드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자신의 반대 주장이 먹히지 않자 보그다노프는 정 개입할 거면 차라리 20만 명 이상의 대규모 부대를 투입해서 확실하게 고랜드 전역을 장악하고, 기갑부대와 공수부대를 적극적으로 동원해서 산발적으로 발생할 반란의 주요 거점들을 신속하게 장악해 저항을 조기에 진압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체르냐호프는 그러면 사비에트군이 침략군처럼 보인다는 눈 가리고 아웅인 이유로(...) 또 거절해버렸다.[* 루이나: 어라? [[루이나-고랜드 전쟁|어디서 본 것 같은데 ㅋㅋ]]] 궁지에 몰린 카르말은 사비에트에게 반란 진압을 위해 "사비에트 남부의 고랜드계 주민들은 고랜드인들과 생김새와 말이 비슷하니 이들로 편성된 부대를 투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사비에트는 1980년 노스탈린그라드 올림픽을 앞두고 있었고, 이미 정권 교체를 위해 8만 명의 병력을 배치했는데 병력을 더 보낸다면 사비에트가 완전히 침략자로 전락하는 꼴이라며 증파를 꺼렸다. 특히 대외인민위원장 그라나토프와 KGB 의장 아브데예프는 증파에 반대했다. 하지만 국방인민위원장 체르냐호프는 증파를 매우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고랜드 전국의 대규모 반란으로 상황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결국 친사 정권이 전복될 것을 우려하여 2만 명을 추가로 증파하고 전투에도 전면 개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비에트군의 증파는 고랜드인들의 더욱 큰 분노와 국제사회의 반발을 초래했다. 그리고 몇 달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무력개입은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군사비 부담으로 사비에트 경제에 치명타를 안겼다. 당시 고랜드의 집권 세력들은 사비에트로부터 자주적인 독립국 지위를 얻으려고 했지만, 사실 강제적인 독재정치와 국민들의 실정을 무시하는 경향 탓에 자국에서도 욕을 먹고 있었다. 그래도 사비에트가 바보는 아니고, 소련에 헬프콜을 쳤다. 소련은 타지키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같은 이슬람 문화권이었던 중앙아시아 지역의 연방 내 공화국들을 통치해본 오랜 경험이 있었다. 사비에트와 소련은 고랜드의 물라와 이맘들을 초청하기도 하고, 사비에트와 소련을 따르는 것은 이슬람도 믿으면서 현대화할 수도 있는 신묘한 지름길이라는 식으로 많은 선전을 했는데, 이에 고랜드 시민들과 지식인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문제는 당시 고랜드의 친사비에트 정권도 나지불라가 집권하기 이전까지[* 나지불라는 타라키와 성베르트, 카르말 등 그동안 일방적인 무신론 공산주의 정책을 펼치며 무자헤딘 등 이슬람 원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반군 세력들의 발호와 세력 확대를 초래하고 모든 사태를 사비에트에게 맡긴 채 악화시켰던 역대 고랜드 공산 정권 지도자들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고 이슬람에 친화적인 유화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미 고랜드의 보수적 이슬람주의자들은 나지불라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고 되려 나지불라와 싸우던 무자헤딘들을 지지했다.] 이슬람 교도(무슬림)들을 잘해야 코란과 알라에 매몰된 무지몽매한 촌놈 떨거지들, 심하게는 말살 대상으로 봤기 때문에 이런 프로파간다에 그리 투자를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부 보수적 이맘과 물라들은 소련 투르키스탄 지역 무슬림들은 무신론자 빨갱이들의 총칼에 굴복한 비겁한 놈들인데 어딜 우리 진짜 무슬림들에게 와서 되도 않는 설교질을 하느냐고 반발하였고, 외려 사비에트군과 고랜드 친사 정권의 정부군과 대결하던 무자헤딘들에게 남몰래 사비를 털어 돈을 보내주며 돕기도 했다. === 루이나의 사이클론 작전 (Operation Cyclone) ===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c6e7c84dcc7a1b22f3cfed1fc2bad81a88f67ef8.jpg|width=100%]] || || '자유의 전사들'로서 베인브리지 정부 시절 루이나를 방문하여 대통령궁에 초청된 무자헤딘의 지도자들. || 사비에트의 영향력이 고랜드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서방 진영은 사비에트에 저항할 수 있는 반정부 무장세력(이하 '무자헤딘')을 조직적으로 지원하였다. 이 지원은 1983년부터 1992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냉전기 서방 정보기관의 대외 개입 작전 중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되고 가장 많은 비용이 투입된 작전으로 기록된다. 추산에 따르면 전체 지원 규모는 80억~150억 달러에 달했다. 사비에트가 침공한 1979년 말 루이나는 1978년 들어선 군정 아래 있었고, 1980년 [[10.24 시민혁명]]으로 헌정이 회복된 뒤에도 한동안 국내 정치의 혼란이 이어졌다. 이 시기 루이나의 지원은 [[NIA]]가 웨스타시아 정보당국을 거쳐 소량의 자금과 구식 무기를 흘려보내는 비공식 지원에 그쳤다. 지원이 본격화된 것은 1983년 제5공화국이 출범하고 베인브리지 정부가 「사이클론」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비밀 지원 계획을 승인하면서부터다. 이 작전은 루이나의 [[NIA]], 미합중제국의 CIA, 플로렌시아의 DGSE, 영국의 MI6,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 마베라 방위성, 그리고 웨스타시아 정보당국(1984년 이후에는 유고랜드 군정보국)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빌베른, 중국 등도 자금, 무기, 훈련 인력을 비공식적으로 지원하였다. 이 작전을 통해 약 10만 명 규모의 무자헤딘 병력이 양성되었다. 작전 초기에는 루이나와 루이나 NIA가 직접 개입한 사실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유고랜드, 체르드 등을 통한 제3국 루트를 이용한 무기 지원이 이루어졌다. 당시 제공된 장비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구식 무기나 중고 사비에트제·소련제 무기들이 중심이었으며, 주요 루트는 유고랜드 국경과 고르드 벨트 등을 경유하였다. 1984년 [[마테르 전쟁]]으로 웨스타시아가 무너지고 유고랜드가 독립한 뒤, 1985년 4월 루이나와 유고랜드가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루이나군이 유고랜드에 주둔하면서 유고랜드는 사이클론 작전의 핵심 병참기지가 되었다. 그러나 1987년 이후 사비에트의 철군 가능성이 대두되자 서방은 보다 적극적으로 현대식 중화기와 첨단 무기체계를 반군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장비로는 루이나제 FGR-52 '페리트'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 플로렌시아제 밀란 II 대전차미사일, 미합중제국의 FIM-92 스팅어와 BGM-71 TOW, 스위스제 오리콘 GDF 대공포, 델라웨어제 브라이트사이드 장거리 정찰장비 등이 있었다.[* 이 중 스팅어 미사일은 반군 사이에서 '신의 화살'이라 불리며 큰 효과를 기대받았으나, 실제로는 사비에트가 이미 배치한 MANPAD 대응책과 저공 회피 전술에 맞서며 실전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반면 루이나제 페리트는 후방 보급기지 타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평가받는다.] 모병은 주로 이집트, 리비아, 사헬 지역 등지에서 이루어졌으며, 고랜드 내 소수민족, 특히 하자라인, 타지크, 쿠르멘 부족 출신 청년들이 대거 무자헤딘에 참여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말레이시아, 유고랜드, 인도네시아 등의 이슬람권에서도 '자원병'이라는 명목의 외국인 전투원이 유입되었는데, 이들의 네트워크는 훗날 [[알자미아]]의 모체가 된다. 이 과정에서 루이나 NIA는 고랜드 북부 산악지대에 소규모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민간인 신분의 '농업 기술 고문단'으로 위장하여 실질적 군사훈련과 정보 지원을 수행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1994년까지 루이나는 잔여 병력 재편과 전후 무장해체 감시를 이유로 일부 자금을 계속 지원하였으며, 일부 반군은 걸프 전쟁 이후 루이나가 이라크로부터 노획한 장비를 넘겨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간추린 역사 == === 시작 ===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width=52%> [[파일:attachment/troops_detail1.jpg|width=100%]] ||<nopad> [[파일:attachment/사련-아프가니스탄 전쟁/mem.jpg|width=100%]] || 세간에는 마치 사비에트가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고랜드에 침공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당초에 [[사비에트 노동인민당]] 중앙위원회는 고랜드 공산 정부의 사비에트군 개입 요청을 거절했다. 고랜드를 서방에 넘겨줄 수 없다는 KGB의 강력한 주장에도 1978년까지는 아직 구체적인 군사개입은 여러 옵션들 중 하나에 불과하였다. 1979년 3월 15일 발발한 헤라트 반란으로 사비에트인 2~4명이 살해되었을 때도 사비에트는 직접 개입하여 반군을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인민민주당 정권에 지원을 배가하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개입했다. 실제로 헤라트 봉기가 진압된 직후 사비에트는 고랜드 공산정권의 파병 요청을 거부했다. > "우리는 군 병력을 파견하는 것이 중대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고랜드|당신 나라]]의 상황은 '''좋아지지 않고 반대로 더 악화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는 외부 세력뿐만 아니라 당신 나라 사람들 대다수를 상대로 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국민들은 절대 이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 > '''콘스탄틴 D. 루진''' 사비에트 총리가 1979년 3월 29일 회담에서 타라키 당시 고랜드 민주공화국 혁명평의회 의장의 파병 요청에 대해 한 답변.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라트 봉기는 사비에트가 고랜드 공산정권의 지도력에 의구심을 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와 교관단이 고랜드로 보내졌다. 그러나 사비에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타라키와 그를 죽이고 권좌에 오른 성베르트는 반군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attachment/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spestnaz.jpg|width=100%]] || || 공수군 스페츠나츠 || 여기서 사비에트는 결정적인 오판을 내렸는데, 성베르트 정권을 제거하고 카르말 정권을 세우는 한편 적극 개입하여 고랜드 전역을 확실하게 갈아엎는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성베르트 정권이 제대로 통치를 못하니 갈아 버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인데, 사비에트가 본보기로 삼은 소련의 동유럽 정권교체는 상황이 엄연히 달랐다. 동유럽의 정권교체는 현지 공산세력의 도움과, 나치 독일과 무능한 기존 정부에 학을 뗀 나머지 누구라도 상관없다고 여긴 현지 국민들의 암묵적 동의로 가능했다. 사비에트는 이를 생각하지 못하고 고랜드에서도 무난하게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오판한 것이다. 어쨌건 197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사비에트 제40군은 고랜드 접경 도시 테르미스크 인근의 국경 강에 부교를 설치했고, 이튿날인 12월 25일부터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사비에트군은 본격적인 침공 시작 전인 12월 7일에 이미 민간인으로 위장한 KGB 예하 스페츠나츠 대원 700명과 친사 인사인 바브락 카르말을 입국시켜 놓았다. 초기에는 이 스페츠나츠 대원들을 이용하여 성베르트 대통령 관저의 식사에 독을 타는 방법으로 고랜드 지도부를 혼란시키려고 했으나 미리 식사를 먹어 보는 시식자들 때문에 실패했고, 저격도 오발로 실패하였다. 결국 사비에트군의 본격적인 침공에 맞춰 관저를 전면 공격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당일 고랜드군 지휘관들을 초청하여 모아두는 등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두고, 1979년 12월 27일 작전 개시와 동시에 고랜드군 지휘관은 모조리 체포되었으며 대통령궁은 스페츠나츠들이 습격했다. 대통령궁을 지키고 있던 호위대 약 300명 가운데 절반이 사살당했고, 피델 성베르트 대통령도 스페츠나츠에 의해, 과거 인민민주당이 다우드 칸 일가를 몰살한 것처럼 가족들과 함께 사살당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되었다. 정권을 통째로 박살내면 통제가 풀려난 무장단체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그래서 훗날 강대국들은 타국과 전쟁을 벌여 이기더라도 경제제재 정도로 그쳤지, 정권까지 박살내려고 하지는 않게 되었다. 물론 그 뒤에도 이 교훈을 잊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 사례가 없지는 않다.] 뒤이어 사비에트-고랜드 국경에서 전차와 장갑차들이 국경을 넘어오고, 예정대로 지상으로 달려온 기갑부대와 보병들은 몇 개 안 되는 고랜드 도시들을 점령한 뒤 카르말 정부를 세우고 성베르트를 미합중제국의 앞잡이로 격하시키면서 전쟁은 순식간에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 ====# 침공 당시 편제 #==== * 제5근위차량화소총사단 / 5th Guards Motorised Rifle Division 제101차량화소총연대 / 101st Motorised Rifle Regiment 제371근위차량화소총연대 / 371st Guards Motorised Rifle Regiment 제24전차연대 / 24th Tank Regiment 제46분리의무대대 / 46th Separate Medical Battalion 제68분리근위공병-전투공병대대 / 68th Separate Guards Engineer-Sapper Battalion 제388분리통신대대 / 388th Separate Communications Battalion 제650분리근위정찰대대 / 650th Separate Guards Reconnaissance Battalion 제1060포병연대 / 1060th Artillery Regiment 제1122대공포병연대 / 1122nd Anti-Aircraft Artillery Regiment 제1377분리대전차포병대대 / 1377th Separate Anti-Tank Artillery Battalion * 제103근위공수사단 / 103rd Guards Airborne Division 제317근위낙하산연대 / 317th Guards Parachute Regiment 제350근위낙하산연대 / 350th Guards Parachute Regiment 제357근위낙하산연대 / 357th Guards Parachute Regiment * 제108차량화소총사단 / 108th Motorised Rifle Division 제177차량화소총연대 / 177th Motorised Rifle Regiment 제180차량화소총연대 / 180th Motorised Rifle Regiment 제181차량화소총연대 / 181st Motorised Rifle Regiment 제271분리공병-전투공병대대 / 271st Separate Engineer-Sapper Battalion 제285전차연대 / 285th Tank Regiment 제333분리장비정비복구대대 / 333rd Separate Equipment Maintenance and Recovery Battalion 제479포병연대 / 479th Artillery Regiment 제738분리대전차포병대대 / 738th Separate Anti-Tank Artillery Battalion 제781분리정찰대대 / 781st Separate Reconnaissance Battalion 제1003분리대대 (스페츠나츠) / 1003rd Separate Battalion (Possible Spetsnaz) 제1049대공포병연대 / 1049th Anti-Aircraft Artillery Regiment * 제201차량화소총사단 / 201st Motorised Rifle Division 제122차량화소총연대 / 122nd Motorised Rifle Regiment 제149근위차량화소총연대 / 149th Guards Motorised Rifle Regiment 제395차량화소총연대 / 395th Motorised Rifle Regiment 제252분리통신대대 / 252nd Separate Communications Battalion 제340분리장비정비복구대대 / 340th Separate Equipment Maintenance and Recovery Battalion 제541분리공병-전투공병대대 / 541st Separate Engineer-Sapper Battalion 제783분리정찰대대 / 783rd Separate Reconnaissance Battalion 제990대공포병연대 / 990th Anti-Aircraft Artillery Regiment 제998포병연대 / 998th Artillery Regiment 전차연대 / Unidentified Tank Regiment * 제45공병연대 / 45th Engineer Regim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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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th Separate Helicopter Battalion * 제262분리헬리콥터대대 / 262nd Separate Helicopter Battalion * 제280분리헬리콥터연대 / 280th Separate Helicopter Regiment * 제292분리헬리콥터연대 / 292nd Separate Helicopter Regiment * 제302분리헬리콥터대대 / 302nd Separate Helicopter Battalion * 제335분리헬리콥터연대 4대대 / 4th Squadron, 335th Separate Helicopter Regiment === 전개 ===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attachment/345_soviet_afghanistan_war_1.webp|width=100%]] || || '''본격 제2차 세계 대전 총기 박람회.'''[*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당시 고랜드 무자헤딘들은 자국이나 유고랜드에서 들여온 무기들로 싸웠는데, 2차대전 때 사용된 영국, 소련, 나치 독일제 무기가 많았다.] [* 사진 속에는 도대체 어떤 경로로 흘러들어왔는지 짐작도 안 되는 아리사카 38식 소총도 보인다.] ||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attachment/사련-고랜드 전쟁/mj.webp|width=100%]] || || 노획한 무기를 들고 텔냐시카 차림으로 사진을 찍은 사비에트 공수군 장병들. || 오른쪽에 총구를 하늘로 향해 들고 있는 소총은 리-엔필드 소총이고, 들고 있는 DP-28도 노획한 것이다. 소련 설계의 무기이긴 하지만 당시 사비에트군은 DP와 RPD 등 바실리 덱탸료프가 개발한 기관총들을 모두 퇴역시켜 냉전 시절에 여타 친사·친소 성향의 제2, 3세계 국가들 및 반군 단체들에게 모조리 공여, 매각하고 PKM이나 RPK로 교체한 지 오래되었다. 심지어 리-엔필드의 바로 이전 세대 소총인 마티니-헨리 소총과 20세기 무기도 아닌 제자일도 현역으로 징발되어 쓰였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width=52.8%> [[파일:사련 고랜드 무자헤딘.webp|width=100%]] ||<nopad> [[파일:고랜드 전쟁 전투중인 사련군들.webp|width=100%]] || || 당시의 게릴라 활동을 펼치던 무자헤딘의 모습 || 무자헤딘의 기습 매복에 맞서 싸우고 있는 사비에트 육군들 || 공산 정권 수립 후 고랜드 공산 정권에 항거하던 무자헤딘들은 사비에트군이 침공해오자 사비에트군을 공격하면서 게릴라전에 나섰다. 이들은 산악지형이 많은 고랜드 남부의 지형을 이용해, 산악전 대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사비에트군을 게릴라전 등으로 공격하여 사상자를 냈다. 한편으로 무자헤딘은 사비에트군뿐만 아니라 사비에트가 세운 친사 카르말 정부군도 동시에 공격하였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width=46%> [[파일:사련 고랜드 탱크 부대.webp|width=100%]] ||<nopad> [[파일:사련 고랜드 MIG-17.webp|width=100%]] || || 고랜드에서 이동하는 사비에트 육군 전차들 || 1980년 2월 5일, 칸다하르 공항에 대기 중인 MiG-17 || 물론 사비에트군 역시 병력을 동원하여 무자헤딘 토벌에 나섰으나, 무자헤딘 쪽 병력 규모도 상당한 데다 애초에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는 입장이라 사비에트군이 기본적으로 불리했다. 게다가 사비에트라는 외세의 점령에 카르말의 공산 고랜드 정부군 구성원들도 크게 동요하면서 무더기로 탈영해, 침공 직후인 1980년 1월에는 100,000명이던 고랜드 공산정부군이 6월에는 고작 30,000명만 남게 된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탈영한 반군과 무자헤딘 대위.webp|width=100%]] || || 1980년 2월 28일 헤라트 근처에서 탈영한 후 사진을 찍는 고랜드 반군들 || 탈영한 병력들은 무기와 장비를 그대로 들고 반군에 가담해 반정부 진영의 화력과 전투력, 머릿수를 폭발적으로 늘려 줬다.[* 이후 전쟁 기간 내내 사비에트와 고랜드 공산정부가 군인들의 봉급을 올려주거나 빠른 승진을 제안하는 등의 당근을 써서 어떻게든 억누르려고 노력했지만, 전쟁 전 기간 동안 반군이 사용한 무기의 80%가 사비에트군과 고랜드 공산정부군에게서 노획한 것일 정도로 군대의 이반은 심각한 문제였다.][* 게다가 사비에트의 대리인인 카르말의 대응도 매우 한심했다. 반란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비상사태에 자신이 속한 상대적으로 온건한 사회주의 분파인 파르참파(깃발파)가 군부에서 열세에 처해 있고 장교 다수는 강경 스탈린주의 추종 분파인 할크파(인민파)에 충성한다는 걸 뻔히 알고도, 권력욕에 미쳐 할크파 장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할크파 장교들 다수가 급하게 제거되면서 고랜드 공산정부군의 사기와 조직력은 크게 저하됐고, 한 술 더 떠서 일부 할크파 장교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고 무자헤딘에 가담해 보복하기도 했다. 물론 강경한 사회주의자들이라 고랜드 이슬람 신앙과 충돌을 자주 일으키던 할크파 장교들의 종교 핍박에 질려, 고랜드 공산정부군의 수많은 농촌 출신 징집병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탈영해 전향하는 경우도 많았다. 파르참파의 방식대로 조금 온건하게 나서도 고랜드인들이 사회주의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사우르 혁명 이후 할크파 장교들은 강압과 폭력으로 급진적인 사회주의를 징집된 사병들에게 억지로 주입해서 탈이 났고, 성베르트 정권 당시에는 이들이 군부 다수로 올라선 실로 암담한 상황이었다. 카르말은 이 와중에 통치를 완화하고 유연하게 타협해서 어떻게든 무마해보기는커녕, 권력에 눈이 멀어 그나마 장교단의 중핵을 이루던 할크파 장교들마저 대대적으로 제거하는, 가능한 선택지 가운데 가장 최악의 수를 둔 것이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아흐마드 샤 마수드 브리핑.webp|width=100%]] || || 무자헤딘 병사들에게 브리핑을 하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 || 그리고 이때 아흐마드 샤 마수드나 압둘 하크, 이스마일 칸, 압둘 라술 사야프 등과 같이 고랜드 내 무자헤딘 조직들을 지휘한 여러 지도자들의 활약상도 두드러졌는데, 그중 가장 유명했던 것이 아흐마드 샤 마수드였다. 마수드의 활동지가 사비에트 보급로 위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고, 마수드는 주요 거점에 병력을 남겨두고 전투 발생 시 해당 지역에 기동부대를 보내어 각개격파하는 전술을 애용하여 친사 카르말 정권과 사비에트군의 속을 끓이게 만들었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고랜드 수도 아바나에서 북동쪽으로 70km 떨어진 판지시르 계곡(Panjshir Valley)에서 마수드의 무자헤딘 군대를 토벌하기 위한 사비에트군과 카르말 정부군의 대규모 공세가 무려 9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 전투 과정에서 마수드 휘하의 무자헤딘 병사들도 만만찮은 손실을 입었으나 결국 제압에는 실패했다. 1982년에 행해진 5차(12,000여 명 동원), 6차 공세를 모두 합쳐 사비에트 측에서 3,000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와중에 공산 고랜드군 1,000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하는 막장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수드는 사비에트군과 공산 고랜드 정부군 측에서 노획한 물자와 서방에서 근근이 전해주는 원조물자와 무기, 민중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對)사 항전을 이어갔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판자시르 난파된 사련 차량.webp|width=100%]] || || 1984년 2월 판지시르 계곡의 한 마을에 버려져 있는 격파된 사비에트 차량들 || 1984년 7차 공세에서는 사비에트-공산 고랜드 정부군 21,000여 명이 동원되었지만 5,000여 명의 무자헤딘을 당해내지 못하고 2,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돌아갔다. 1985년의 9차 공세에서는 공산 고랜드군 500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했고, 공산 고랜드 정부군 여단장이 무자헤딘의 공격에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사비에트 측은 결국 1986년에 공세를 중단하고 1988년이 되어서야 판지시르 계곡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width=49.8%> [[파일:헤라트 전투.webp|width=100%]] ||<nopad> [[파일:헤라트 전투 2.webp|width=100%]] || || 사비에트의 호송대를 감시하고 있는 무자헤딘 병사들 || 무자헤딘의 공격을 피하려 장애물로 몸을 숨기는 사비에트군 병사 || 문제는 북부 판지시르 계곡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전선 상황들도 사비에트군과 공산 고랜드 정부군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헤라트 등 남서부 고랜드 지역에서는 이스마일 칸이 지휘하던 무자헤딘 반군들[* 이스마일 칸은 본래 고랜드 정부군 장교 출신이었으나, 사비에트 침공 이전인 헤라트 소요사태 당시 공산 고랜드 정부군이 헤라트 시민들을 겨냥해 저지른 학살에 분노하여 군에서 탈영했다. 이후 고랜드 정부로부터 위험 인물로 지명수배를 받는 반정부군의 지도자가 된 상황이었다.]이 헤라트 공항에 주둔했던 사비에트 공군을 습격하여 공항에 배치된 사비에트군 전투기와 헬기 20여 대를 폭파시키기도 했다. 1985년 후반기에는 고랜드-유고랜드 국경에서 3km 떨어진 자와르(Zhawar)에서도 사비에트군과 무자헤딘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곳에서 무자헤딘은 동굴을 뚫어 창고와 모스크, 의료시설을 지어 놓고 사비에트군과 전투를 벌였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width=49.8%> [[파일:attachment/사비에트-아프가니스탄 전쟁/s1s.jpg|width=100%]] ||<nopad> [[파일:사비에트 고랜드 당시 무자헤딘.png|width=100%]] || 1985년 후반의 1차 공세에는 카르말의 고랜드 정부군이 주축이 되어 무자헤딘에게 무리한 공격을 가했다가 패배했고, 그 결과 오히려 무자헤딘의 사기만 높여주었다. 1986년 초에 가해진 2차 공세에는 12,000여 명의 사비에트-공산 고랜드 동맹군(이 중 2,200여 명이 사비에트군)이 재차 공격을 가해서 어찌저찌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다시 후퇴해 버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공세할 때마다 사비에트군의 병력이 충분히 동원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산 고랜드 정부군은 물론 [[루이나-고랜드 전쟁]] 당시 탈레반이 쳐들어올 때마다 도망가기 바빴던 후대의 고랜드 정부군(루이나 공식 문서상 과도 민주정부군)에 비해서는 나았지만, 근본적으로 외국군의 지시로 움직이는 도구라는 무자헤딘의 선전에 매우 취약했고 카르말의 할크파 대숙청으로 조직력도 매우 저하된 상태였다. 결국 후일의 고랜드 정부군과는 다른 이유로 전투에 소극적이었고, 주축은 사비에트군일 수밖에 없었다.] 1987년에는 고랜드 남부 유고랜드 국경 인근의 아르간다브(Arghandab)에서 나지불라 정부군이 사비에트의 지원을 받아 가면서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으나, 결과적으로 물라 나키브가 이끄는 무자헤딘에 대패하여 1,700여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 포로, 이탈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그러나 사비에트가 맞고만 다닌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루이나·미합중제국과 맞설 수 있는 강대국인 사비에트이다 보니 거의 모든 전투에서 사비에트 측의 사상자보다 무자헤딘 측의 사상자가 더 많았다. 10년 동안의 전쟁에서 사비에트군은 15,000명이 전사했는데 무자헤딘의 전사자는 6배에 달하는 90,000명이었다. 사비에트군과 무자헤딘이 정면 대결한 전투에서는 무자헤딘의 전사자가 20배 이상이었다. 1987-1988년 겨울에는 사비에트군 20,000명과 고랜드 공산군 8,000명이 팍티아 주(Paktia Province)에서 무자헤딘 20,000명에게 대규모 공세를 펼쳐 무자헤딘 3천 명을 죽이는 등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승리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전도 전술적으로는 몰라도 전략적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동년 후반에는 무자헤딘 측이 공세로 나서 일명 '화살' 작전을 발동해 고랜드 북동부[* 수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라그만 주(Laghman Province) 지역이다.]에서 고랜드 정부군을 대패시키기도 하였다. 게다가 코스트 주(Khost Province)에서는 10년에 걸쳐 사비에트-공산 고랜드 정부군과 무자헤딘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결국 사비에트 측이 퇴각하는 일도 있었다. 참고로 사비에트군이 620,000명 정도의 대군을 고랜드에 주둔시켰는데도 전과가 크지 않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것은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기간 전체의 '연인원' 개념이다. 전쟁 기간 동안 평균적으로 80,000~100,000명 정도의 사비에트군만 고랜드에 주둔하였고 내무인민위원부 보안군과 KGB의 특수부대는 다 합쳐봐야 10,000명 수준이었다. 그리고 실제 전투임무를 수행한 건 이 10,000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후일의 루이나군과 전쟁 수행방식이 완벽하게 똑같이 돌아갔다. 루이나군도 연인원 기준으로는 고랜드에 775,000명이 동원되었으나 최대 유지병력은 120,000명에 실제 전투병력은 10,000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따지고 들면 루이나군이 사비에트군보다는 전투병력이 더 많기는 했다. 이쪽은 국제안보지원군(ISAF)의 다국적군 지원도 받고 있었다.] 더구나 광활한 고랜드의 각 주요 도로와 거점 지역으로 병력을 분산시켜야 했던 사비에트군의 상황과 고랜드 남부의 험난한 지형을 생각하면 이것도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랜드는 외부에서 막대한 지원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현지에 나간 사비에트군 장군들도 크라슬리스크에 전차와 전투기 중심이 아닌 200만 명이 넘는 보병부대와 이를 지원하는 보급부대를 통해, 요충지나 도로 같은 점과 선뿐만 아니라 면인 지역을 장기간 장악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크라슬리스크의 군 수뇌부도 이에 동의하고 전략을 전면 수정하는 안을 보고했으나, 사비에트의 외교적 부담으로 이를 실행하지 못했다.[* 이는 20년 후 루이나가 [[루이나-고랜드 전쟁]]에서 고전하면서 똑같이 고려하던 방안이고, 마찬가지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게릴라전 특성상 민중과 지속적인 접촉이 필수였기에, 압도적인 머릿수를 바탕으로 면을 장악하고 민사작전을 수행하며 게릴라와 민중의 연결을 차단하는 전략에는 당할 수밖에 없다. 즉 사비에트에게 있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자 유일한 전략이었고, 이를 알고 있음에도 시도조차 못했다는 건 결국 '''시도조차 해서는 안 될 전쟁을 벌였다'''는 전략적 대참사를 직접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철군 이외에는 선택지가 말소된 상황에서도 정치적, 외교적인 이유로 전전긍긍하다가 겨우겨우 발을 빼며 이후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린 것도 루이나가 20년 뒤 똑같이 재현했다. 루이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2021년 철군 뒤 다시 돌아가기까지 했다.] 이후 고랜드에서는 무자헤딘과 사비에트군, 고랜드 정부군 간의 지리멸렬한 싸움이 지속되었다. 이렇게 끝날 기약 없이 전쟁이 장기화되자 무자헤딘의 화력과 역량, 보유 장비도 일취월장했다. 무자헤딘에 귀순한 고랜드 친사 정부군의 탈영병이 노획한 사비에트제 전차를 몰고 정부군 병영을 습격하는, 게릴라전에서는 보기 드문 일까지 일어날 정도였다고 한다.[* 사비에트: ㅆㅂ] === 절정 === 전쟁이 가장 격렬했던 것은 1984년부터 1987년까지다. 이 시기 사비에트는 지도자가 세 번 바뀌었다. 1982년 11월 스타로두보프가 사망하자 개입을 주도했던 KGB 의장 아브데예프가 제1서기 자리에 올랐고, 그는 "1년 안에 끝낸다"며 공세를 강화했다. 그러나 아브데예프는 1984년 2월 신장병으로 사망했고, 후임인 게오르기 M. 폴랸스키도 1985년 3월 병사했다. 지도부가 병상과 장례식장을 오가는 동안 고랜드의 사비에트군은 1985년 11만 5천 명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이 시기 사비에트군의 전술은 눈에 띄게 가혹해졌다. 유고랜드에서 들어오는 무자헤딘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국경 지대의 마을을 폭격해 주민을 몰아내는 이른바 「소개(疏開) 작전」이 벌어졌고, 헬리콥터로 뿌린 소형 대인지뢰가 농경지와 산길을 뒤덮었다. 사비에트군 특수부대는 국경을 넘어오는 보급 대열을 매복 공격하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주민이 떠난 땅에서 무자헤딘을 가려낼 방법은 더욱 없어졌다. 유고랜드로 넘어간 난민은 1985년 320만 명을 넘었다. 1985년 3월 54세의 빅토르 S. 셀레즈뇨프가 제1서기에 오르면서 흐름이 바뀌었다. 셀레즈뇨프는 1986년 2월 노동인민당 대회에서 고랜드 전쟁을 "피 흘리는 상처"라고 불렀고, 같은 해 11월 13일 정치국은 2년 안에 병력을 철수한다는 방침을 비밀리에 결정했다. 다만 철수는 친사 정권이 스스로 버틸 수 있게 만든 뒤에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 조건을 위해 사비에트는 먼저 고랜드 지도자를 바꿨다. 1986년 5월 카르말은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나 사비에트로 사실상 망명했고, 비밀경찰 수장 출신인 무함마드 나지불라가 뒤를 이었다. 나지불라는 1987년 1월 「민족 화해」를 선언해 무자헤딘에게 휴전과 권력 분점을 제안했고, 11월에는 새 헌법을 공포해 이슬람을 국교로 명시했다. 1990년에는 헌법을 다시 고쳐 인민민주당의 영도 조항을 삭제하고 다당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무자헤딘은 이를 사비에트의 철수 준비로 보고 협상을 거부했다. 1986년 가을 무자헤딘에게 루이나제 페리트와 미합중제국제 스팅어가 처음 공급되면서 사비에트의 제공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대로 실전 효과는 과장된 면이 있지만, 사비에트군 헬리콥터가 저공 회피 비행을 강요받으면서 근접 항공지원의 정확도가 떨어졌고 이는 지상전의 부담으로 이어졌다. 1987년 11월부터 1988년 1월까지 벌어진 「간선(幹線) 작전」은 포위된 코스트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으로, 사비에트군이 이 전쟁에서 벌인 마지막 대규모 공세였다. === 타국의 개입 === '''[[루이나]]'''는 사이클론 작전을 통해 무자헤딘의 최대 후원국이 되었다. 1984년부터는 하원의원 찰스 E. 윈턴이 국방위원회에서 사이클론 예산을 거듭 증액시키며 지원 규모를 키웠는데, 1987년 한 해 예산만 6억 달러를 넘었다. 루이나 정부와 언론 다수는 무자헤딘을 '자유의 전사'로 불렀지만, 진보 일간지 《라 부아》는 1986년 사설에서 "우리가 무장시키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우리와 다른 종류의 불관용"이라고 경고했다. 이 사설은 2001년 이후 다시 주목받았다. '''[[미합중제국]]'''은 루이나와 공조해 스팅어와 TOW 등 첨단 무기를 공급했다. 다만 미합중제국은 작전의 주도권을 루이나에 맡겼고, 무기 배분은 루이나 NIA와 유고랜드 측이 담당했다. '''[[유고랜드]]'''는 무자헤딘의 후방이자 통로였다. 1984년 독립 이전에는 웨스타시아 정보당국이 유고랜드 영토를 거치는 지원 경로와 난민촌을 관리했고, 1984년 9월 8일 독립 이후에는 유고랜드 군정보국이 이를 넘겨받았다. 서방의 무기는 고랜드와 맞닿은 나시르 알 물크 부에 본부를 둔 무자헤딘 7개 정당, 이른바 「나시르 알 물크 7당」을 통해 배분되었는데, 군정보국은 강경 이슬람주의 정당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의 이슬람당에 가장 많은 몫을 주었다. 이 편중은 전후 내전에서 큰 문제가 된다. 유고랜드 역시 대가를 치렀다. 사비에트 공군은 1986~1987년 국경 너머 난민촌을 여러 차례 폭격했고, 유고랜드 도시에서는 KGB가 배후로 지목된 폭탄 테러가 잇따랐다. 난민의 부담은 고랜드와 가까운 아랍어권 남부에 집중되어 한국어권 북부와의 지역 갈등을 키웠다. 독립 직후 안보 공백 속에 이 모든 일을 감당해야 했던 유고랜드는 1985년 4월 루이나와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루이나군의 주둔을 받아들였다. '''[[웨스타시아]]'''는 자유 진영에 가까웠지만 국익을 위해서라면 공산 진영과의 거래도 마다하지 않는 나라였다. 웨스타시아는 1979년부터 1984년까지 괴뢰국 유고랜드를 통해 무자헤딘 지원 경로를 관리하면서도 사비에트와의 교역은 끊지 않았다. 이 이중 행보는 1984년 [[마테르 전쟁]]에서 웨스타시아가 무너지면서 끝났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루이나가 내는 금액만큼 같은 액수를 내는 방식으로 자금을 댔고, 민간 모금과 이슬람 자선단체를 통해 아랍 의용병의 이동과 체류 비용도 지원했다. 전쟁 기간 고랜드로 들어간 아랍계 외국인 의용병은 3만 5천 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군사적 비중은 작았지만, 이들이 만든 인적 네트워크는 전쟁이 끝난 뒤 훨씬 큰 의미를 갖게 된다. '''중국'''은 브로커를 통해 무기를 흘려보냈고, '''이란'''은 하자라인 중심의 시아파 무자헤딘 8개 정당을 따로 지원했다. 이란의 지원은 수니파 정당들과의 경쟁 구도를 만들어 무자헤딘 내부의 분열을 부추겼다. 반대편에서는 '''소련'''이 사비에트를 뒷받침했다. 소련은 고문단과 장비를 보냈고, 앞서 서술한 대로 중앙아시아 무슬림 성직자를 동원한 선전을 도왔다. '''동독'''은 고랜드 비밀경찰의 훈련을 맡았으며, '''인도'''는 카르말 정권을 승인한 몇 안 되는 비공산권 국가였다. 국제사회의 여론은 사비에트에 불리했다. 1980년 1월 유엔 총회는 104 대 18로 외국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했고, 루이나를 비롯한 60여 개국이 1980년 노스탈린그라드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사비에트 진영은 4년 뒤 올림픽에 불참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 종말 === 1988년 4월 14일 제네바에서 고랜드와 유고랜드가 상호 내정 불간섭과 난민 귀환을 약속하는 협정에 서명했고, 루이나와 사비에트가 보증국으로 서명했다. 이 「제네바 협정」에 따라 사비에트군은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해 8월 15일까지 절반을, 이듬해 2월 15일까지 전원을 철수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협정은 양측 후원국이 각자의 동맹에게 무기를 대는 것을 막지 않았다. 사비에트는 나지불라 정권에, 루이나는 무자헤딘에 계속 무기를 보냈고, 무자헤딘 정당들은 협정 당사자도 아니었다. 1989년 2월 15일, 제40군 사령관 예브게니 V. 로디오노프 중장은 테르미스크의 「우정의 다리」를 걸어서 건넌 마지막 사비에트 군인이 되었다. 그는 다리 위에서 기자들에게 "내 뒤에는 사비에트 병사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9년 1개월 3주 만이었다. 서방의 예상과 달리 나지불라 정권은 사비에트군이 떠난 뒤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1989년 3월 무자헤딘은 유고랜드 군정보국의 재촉 속에 잘랄라바드를 공격했으나, 정부군의 완강한 방어에 막혀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사비에트의 원조가 이어지는 한 나지불라는 버틸 수 있었다. 최대의 위기는 원조의 중단이었다. 1991년 9월 루이나와 사비에트는 이듬해 1월 1일부터 고랜드 양측에 대한 무기 지원을 동시에 끊기로 합의했다. 연료와 식량까지 끊기자 정부군 민병대가 잇달아 이탈했고, 북부의 우즈베크계 민병대 지도자 압둘 라시드 도스툼마저 무자헤딘과 접촉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지불라는 1992년 3월 도스툼에게 북부 여러 주의 통치권과 관세 수입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그의 이탈을 막았다. 4월 무자헤딘 연합군이 아바나를 포위했지만, 도스툼의 민병대가 수도 북쪽 보급로를 지켜 내면서 수도는 함락되지 않았다. 수도 공략에 실패하자 무자헤딘은 서로에게도 총을 돌렸다. 마수드와 헤크마티아르가 정부군과 싸우는 한편 수도 공략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다투면서, 아바나는 사비에트 점령기에도 겪지 않았던 포격에 시달렸다. 1992년부터 1996년 사이 아바나에서만 수만 명의 민간인이 숨졌다. 나지불라는 1993년 비상조치를 선포해 1990년 도입했던 다당제를 정지하고 당명을 다시 인민민주당으로 되돌렸다. 이 혼란 속에서 1994년 칸다하르에서 물라 우마르 알-칸다하리가 이끄는 [[탈레반]]이 등장했고, 탈레반은 1996년 9월 27일 아바나를 점령해 고랜드 이슬람 토후국을 선포했다. 나지불라의 공산 정부는 북부 마자르이샤리프로 물러나 도스툼의 민병대와 함께 국토의 10~15%를 지키며 버텼다. 이 정부가 아바나로 돌아온 것은 2001년, [[벨포르 협정]]으로 한때 자신을 무너뜨리려 했던 루이나와 손을 잡고 나서였다.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상세 내용은 [[고랜드 내전]] 문서 참고. }}} == 영향 == '''사비에트'''는 이 전쟁으로 1만 5천여 명의 전사자와 5만여 명의 부상자를 냈고, 간염과 장티푸스 등 풍토병에 걸린 장병도 40만 명을 넘었다. 사비에트 체제가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10년 동안의 전비와 원조 부담은 1990년대 사비에트 경제의 장기 침체로 이어졌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고란치」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참전 사실을 드러내지 말라는 당국의 압력과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알코올 중독과 범죄, 자살 문제로 오랫동안 사회 문제가 되었다. 공식 기록이 전사자를 「국제주의 의무 수행 중 사망」으로만 적고 아연 관에 담아 조용히 돌려보낸 일은 사비에트 사회에 깊은 불신을 남겼다. '''고랜드'''가 입은 피해는 비교할 수 없이 컸다. 최대 200만 명이 숨졌고, 470만 명이 나라를 떠났으며(유고랜드 약 320만 명, 그 밖의 인접국 약 150만 명), 200만 명 이상이 국내에서 떠돌았다. 전쟁 기간 뿌려진 지뢰는 1,000만 발 이상으로 추산되며, 지금도 해마다 사상자를 낸다. '신의 식탁'이라 불리던 곡창지대도 무너졌다. 지하수로와 관개시설이 폭격과 방치로 파괴되면서 1987년의 곡물 생산량은 1978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농민들은 물을 적게 먹고 값을 잘 쳐 주는 양귀비로 옮겨 갔고, 이는 고랜드가 오늘날 유고랜드·동사랜드·빌베른과 이어진 마약 경제의 한가운데에 서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 유고랜드의 난민촌도 다음 세대를 만들었다. 난민촌 주변에 세워진 마드라사들은 성베르트 정권 시절 폐쇄된 고향의 마드라사를 대신했고, 전쟁고아로 자란 이 학교의 학생(탈리브)들이 훗날 탈레반의 주축이 되었다. '''루이나'''에게 사이클론 작전은 오랫동안 냉전기 최대의 성공 사례로 여겨졌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그 대가가 드러났다. 무자헤딘에게 넘어간 루이나제 페리트 미사일이 전후 행방불명되자, NIA는 1993년부터 1998년까지 「페리트 회수 계획」을 벌여 한 발에 최대 10만 달러를 주고 되사들였다. 공급된 900여 발 가운데 회수된 것은 60% 남짓이었다. 사비에트가 철수한 뒤 루이나의 관심은 급격히 식었고, 고랜드는 내전 속에 방치되었다. NIA는 탈레반이 등장했을 때에도 "당장의 적은 공산주의"라는 논리로 이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양가적 태도를 보였다. 불과 몇 해 뒤 루이나가 바로 그 공산 정부와 손잡고 탈레반을 치게 되면서, 이 판단은 루이나 외교사의 대표적 실책으로 꼽히게 되었다. === 알자미아의 형성 === [[알자미아]](알후라 알자미아, 아랍어로 '근본')는 사비에트-고랜드 전쟁에 참전한 아랍계 외국인 의용병 네트워크에서 태어난 국제 지하드 조직이다. 그 뿌리는 1984년 유고랜드 나시르 알 물크 부에 세워진 「무자헤딘 봉사국」이다. 이슬람 법학자 사이드 알-무카담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 재벌 가문 출신인 이브라힘 나쉬디가 함께 세운 이 기관은 이슬람권 각지에서 모여든 의용병을 모집하고, 숙소와 훈련, 고랜드 입국을 주선했다. 알-무카담은 사비에트에 맞선 고랜드의 싸움을 모든 무슬림의 의무로 규정하는 설교와 저술로 수많은 청년을 끌어들였고, 나쉬디는 가문의 자금과 인맥으로 봉사국을 운영했다. 두 사람은 전쟁의 끝이 보이자 갈라섰다. 알-무카담은 의용병들이 고랜드 무자헤딘을 돕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고 보았지만, 나쉬디는 사비에트를 물리친 경험을 바탕으로 이슬람 세계 전체를 무대로 싸울 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88년 8월 나쉬디는 이집트 출신 의사 아이만 알자와히리 등과 함께 봉사국을 거쳐 간 의용병들의 명단을 바탕으로 별도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알자미아다. 1989년 11월 알-무카담이 나시르 알 물크에서 차량 폭탄 테러로 숨지면서 봉사국의 인력과 자금은 대부분 알자미아로 넘어갔다. 테러의 배후로는 KGB, 유고랜드 군정보국, 나쉬디 측이 모두 거론되었으나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사비에트가 물러난 뒤 알자미아가 새로 정한 적은 '먼 적', 곧 이슬람 세계의 세속 정권을 뒷받침하고 유고랜드에 군대를 주둔시킨 루이나였다. 알자미아는 1990년대 탈레반의 비호를 받으며 고랜드에 훈련소를 세웠고, 2001년 알자미아가 일으킨 [[1.19 사건]]은 루이나가 [[루이나-고랜드 전쟁|고랜드에 개입]]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루이나와 알자미아의 관계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NIA는 아랍계 의용병에게 자금을 댄 적이 없으며 모든 지원은 유고랜드 군정보국을 거쳐 고랜드인 정당들에게만 전달되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돈에 꼬리표가 붙어 있지 않았고, 2000년대에 기밀 해제된 문서에서 NIA가 1986년부터 아랍계 의용병 훈련소의 존재를 알고도 이를 「무해한 종교 자선 활동」으로 분류했던 사실이 드러났다고 지적한다. 적의 적을 무장시킨 결과가 되돌아온다는 뜻의 「블로백」이라는 말은 이 사건을 계기로 루이나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 루이나-고랜드 전쟁과의 비교 == 사비에트-고랜드 전쟁은 20여 년 뒤 벌어진 [[루이나-고랜드 전쟁]]과 자주 비교된다. 두 전쟁은 초강대국이 고랜드에 직접 군대를 보냈다가 수렁에 빠졌다는 점에서 닮았고, 루이나 안에서는 "사비에트의 실수를 보고도 그대로 되풀이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bgcolor=#536349><color=#fff> '''구분''' ||<bgcolor=#536349><color=#fff>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bgcolor=#536349><color=#fff> '''루이나-고랜드 전쟁''' || || 기간 || 1979~1989 || 2001~2021, 재개입 진행 중 || || 최대 병력 || 약 115,000명 || 약 120,000명 || || 연인원 || 약 620,000명 || 약 775,000명 || || 주적 || 무자헤딘 || 탈레반·알자미아 || || 현지 동맹 || 고랜드 민주공화국 정부 || 고랜드 민주공화국 정부 || || 결과 || 철수 뒤 정권 존속, 1996년 수도 상실 || 철수 직후 수도 함락, 재개입 || 닮은 점은 여럿이다. 두 나라 모두 최대 10만 명 남짓의 병력 가운데 실제 전투병력은 1만 명 수준이었고, 도시와 간선 도로를 점과 선으로만 통제했다. 두 나라 모두 면을 장악할 대규모 증파를 검토했으나 정치적·외교적 부담으로 실행하지 못했다. 두 나라가 떠받친 현지 정부는 외국군의 꼭두각시라는 선전에 취약했고, 적은 국경 너머의 은신처와 외부의 지원을 끊임없이 받았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 국내에서 전쟁의 목표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하는 상태로 전쟁을 끌었다. 다른 점도 분명하다. 사비에트는 통제력을 잃은 공산 정권을 바로잡으려고 들어갔고, 루이나는 알자미아를 비호한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들어갔다. 그런데 루이나가 지상에서 손잡은 상대는 1980년대에 무자헤딘을 무장시켜 무너뜨리려 했던 바로 그 공산 정권이었다. 루이나는 2001년 [[벨포르 협정]]으로 고랜드의 사회주의 체제를 인정하는 대신 공산 정부군과 함께 탈레반을 공격했고, 사비에트는 탈레반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위 표에서 두 전쟁의 현지 동맹이 같은 정부인 것은 이 때문이다. 사비에트가 떠난 뒤 나지불라 정권은 7년 동안 수도를 지켰지만, 루이나가 떠난 2021년에는 같은 정부가 몇 달 만에 아바나를 내주었다. 가장 큰 차이는 그 뒤다. 사비에트는 한 번 빠져나온 뒤 다시 돌아가지 않았지만, 루이나는 국제안보지원군을 다시 보내고 2023년 이후 해마다 12억 달러 이상의 군사·재정 원조와 특수전 부대, [[플라자 그룹]]의 민간군사기업까지 투입하며 다시 전쟁에 발을 들였다. 무엇보다 두 전쟁은 원인과 결과로 이어져 있다. 루이나가 사비에트를 몰아내려고 무장시킨 전쟁의 부산물, 곧 난민촌 마드라사에서 자란 탈레반과 아랍 의용병 네트워크에서 나온 알자미아가 루이나가 싸우게 될 상대가 되었다. 루이나의 한 군사사학자는 이를 두고 "사비에트는 고랜드에서 전쟁 하나를 졌고, 루이나는 그 전쟁을 이긴 대가로 다음 전쟁을 얻었다"고 평했다. == 대중매체에서 == === 영화 === * 《불의 계곡》(1988, 루이나): 전직 NIA 요원이 사비에트군에 붙잡힌 옛 상관을 구하러 고랜드에 들어가 무자헤딘과 함께 싸우는 액션 영화. 엔딩 자막의 "고랜드의 용감한 전사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는 문구는 2001년 이후 조롱거리가 되었다. * 《제11정찰중대》(2005, 사비에트): 철수 직전인 1988년 고지를 지키다 전멸한 공수 정찰중대를 그린 전쟁 영화. 이 문서 정보박스 사진 속 부대와 같은 이름이다. 사비에트에서 그해 흥행 1위를 했으나, 실제 전투와 다른 각색이 많다는 지적을 받았다. * 《윈턴 의원의 전쟁》(2007, 루이나): 사이클론 예산을 밀어붙인 하원의원 찰스 E. 윈턴의 이야기를 다룬 정치 풍자극. 마지막 장면의 "우리는 이겼다. 그리고 끝을 망쳤다"는 대사가 유명하다. === 애니메이션·라이트노벨 === * 《모래바람 비행대》(유고랜드, 1986~1991 연재, 1989 애니메이션화): 이름 없는 산악 국가의 내전에 뛰어든 외국인 용병 조종사들을 그린 만화. 작중 국가는 가상이지만, 유고랜드 독자들은 배경이 사비에트-고랜드 전쟁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 《붉게 칠해지지 않은 거리에서》(루이나, 2016): 1980년 아바나에 배치된 사비에트 징집병과 고랜드 소년의 우정을 그린 라이트노벨. 성베르트 정권의 '붉은 칠' 정책을 제목에서 비틀었다. === 소설 === * 《아연 관의 아이들》(1991, 사비에트): 기자 안나 G. 레베데바가 참전 군인과 유족 수백 명을 인터뷰해 엮은 증언 문학. 출간 직후 참전 군인 단체와 일부 유족으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했다. * 《아바나의 연》(2003, 루이나): 루이나로 망명한 고랜드계 작가의 장편소설. 1970년대 아바나에서 연날리기를 하던 두 소년의 운명을 사비에트 침공, 내전, 탈레반 집권까지 따라간다. === 게임 === * 《오퍼레이션 사이클론》(2004, 루이나): 플레이어가 NIA 고문이 되어 무자헤딘을 훈련시키는 1인칭 슈팅 게임. 무자헤딘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 《제40군》(2012, 사비에트): 사비에트군 지휘관의 시점에서 판지시르 공세와 철수 작전을 재현하는 전략 게임. === 노래 === * 「우리는 떠난다」(1988, 사비에트): 참전 군인 출신 밴드 「푸른 베레」의 노래. 1989년 2월 철수 행렬을 중계하는 방송의 배경음악으로 쓰이면서 널리 알려졌다. * 「란다이」: 유고랜드 난민촌의 파슈툰 여성들이 전쟁과 피난을 읊은 두 줄짜리 구전 시가. 1990년대 루이나의 인류학자가 채록해 책으로 펴내면서 알려졌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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