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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다 발사장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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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사비에트]][[분류:랜드사]][[분류:랜드해협 우주경쟁]][[분류:폭발 사고]] [include(틀:사건사고)] * 러시아어: Катастрофа на космодроме Сарда * 영어: Sarda Launch Site Disaster * 루이나 측 통칭: 사르다 폭발, 6월 17일 사고 ||<-2><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cd0000,#cd0000><tablebgcolor=#fff,#1f2023><bgcolor=#cd0000,#cd0000><color=#ffd700,#ffd700> {{{+1 '''사르다 발사장 참사'''}}}[br]{{{-2 Катастрофа на космодроме Сарда}}} || ||<-2><bgcolor=#fff,#1f2023> [[파일:사르다 발사장 참사 추모비.jpg|width=100%]][br]{{{-2 사르다-2 시 중앙공원의 추모비}}} || ||<width=28%><bgcolor=#cd0000,#cd0000><color=#fff> '''발생 일시''' || 1961년 6월 17일 토요일[br]18시 52분 (현지 시각) || ||<bgcolor=#cd0000,#cd0000><color=#fff> '''사고 종료''' || 같은 날 20시 50분경 진화 || ||<bgcolor=#cd0000,#cd0000><color=#fff> '''발생 장소''' || [[사비에트]] 카스탄 자치지역[br]사르다 발사장 제12발사대 || ||<bgcolor=#cd0000,#cd0000><color=#fff> '''사고 유형''' || 로켓 폭발, 화재, 유독가스 누출 || ||<bgcolor=#cd0000,#cd0000><color=#fff> '''원인''' || 2단 엔진 조기 점화 || ||<bgcolor=#cd0000,#cd0000><color=#fff> '''관련 기관''' || 인민해방군 로켓포병[br]제7설계국 · 제3설계국 || ||<bgcolor=#000><color=#fff> '''사망''' || 92명 ^^공식^^[br]{{{-2 현장 87명, 병원 5명}}}[br]{{{-2 비공식 추정 120~130명}}} || ||<bgcolor=#FFBB00><color=#000> '''부상''' || 49명 || > 당대회가 두 주 뒤요. 추진제를 빼면 한 달이 걸리오. 나는 주석 동지께 한 달을 달라고 말할 수 없소. > ---- > 이고리 D. 네스테렌코 원수, 1961년 6월 16일 밤 제12발사대 현장 회의에서. 제3설계국 기사 안드레이 L. 투마노프의 1989년 증언 > "당신은 왜 살아 있소?"[br]"전화를 받으러 벙커에 내려가 있었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 ---- > 표도르 I. 카라신 최고인민평의회 주석과 제7설계국 수석설계자 예브게니 A. 스테파노프의 대화, 1961년 7월. 배석자의 회고 [목차] [clearfix] == 개요 == 1961년 6월 17일 [[사비에트]] 카스탄 자치지역의 사르다 발사장 제12발사대에서, 제7설계국이 개발한 탄도미사일 K-7의 첫 비행시험을 준비하던 중 2단 엔진이 발사대 위에서 조기 점화되어 기체가 폭발한 사고. 추진제가 채워진 로켓 주변에 모여 있던 군인과 기술자 92명이 사망하고(공식 집계) 49명이 부상했다. 사망자 가운데에는 인민해방군 로켓포병 총감이자 K-7 국가시험위원회 위원장이던 이고리 D. 네스테렌코 원수, 유도·제어계통 분야의 최고 권위자였던 제3설계국 수석설계자 그리고리 L. 바비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비에트 정부는 사고 직후 모든 사실을 비밀에 부쳤고, 네스테렌코가 공무 비행 중 항공기 사고로 순직했다고 발표했다. 사고의 존재는 1989년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으며, 사망자 수와 명단은 1996년 국가조사위원회의 재조사를 통해 확정되었다. 다만 명단에 오르지 않은 건설대대 징집병이 추가로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있어, 실제 사망자는 120~130명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이 사고는 [[랜드해협 우주경쟁]]과 해협 미사일 경쟁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단일 사고이며, 추진제를 채운 로켓 위에서 정비 작업을 강행하게 만든 일정 압박과 규정 위반이 결합해 일어난 인재(人災)로 평가된다. == 배경 == === 7분과 상온 저장 추진제 === 1950년대 사비에트의 주력 탄도미사일이었던 제1설계국의 S-2는 산화제로 액체산소를 사용했다. 액체산소는 영하 183도에서 보관해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증발하기 때문에 미리 채워 둘 수 없었고, S-2는 발사 명령을 받은 뒤 추진제를 주입해 실제로 발사하기까지 약 9시간이 걸렸다. 1950년대 후반 루이나 해군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개발에 착수하면서 이 9시간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해협 안에서 발사된 루이나의 미사일이 7분 안팎이면 사비에트에 도달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발사에 9시간이 걸리는 미사일은 보복 수단이 될 수 없었다. 사비에트 국방인민위원회는 1958년 상온에서 장기간 탱크에 채워 둘 수 있는 저장성 추진제를 사용해 명령 후 30분 안에 발사할 수 있는 미사일의 개발을 지시했고, 그 결과물이 K-7이었다. K-7은 길이 31.5m, 직경 3.0m, 발사 중량 약 138t의 2단 액체추진 탄도미사일로, 연료는 하이드라진 계열, 산화제는 질산 계열의 상온 저장 추진제를 사용했다. 두 추진제는 서로 닿기만 해도 저절로 발화하는 자연발화성 조합이어서 별도의 점화 장치가 필요 없었지만, 그만큼 누출과 오작동에 취약했고 둘 다 강한 독성을 띠었다.[* 질산계 산화제는 공기 중에서 적갈색의 유독한 이산화질소 기체를 내뿜는다. 사고 당일 화재 진압이 늦어진 주된 이유도 이 기체였다.] === 제1설계국과 제7설계국 === K-7 개발은 사비에트 로켓 개발을 양분하던 두 설계국의 경쟁 속에서 진행되었다. 제1설계국 수석설계자 발렌틴 P. 오를로프는 독성이 강하고 취급이 위험한 저장성 추진제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액체산소 로켓의 준비 시간을 줄이는 방향을 주장했다. 반면 제7설계국 수석설계자 예브게니 A. 스테파노프는 준비 시간 문제는 추진제를 바꾸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고 봤다. 국방인민위원회는 1958년 스테파노프의 손을 들어 줬고, K-7의 성패는 곧 제7설계국의 존립과 직결되는 문제가 되었다. K-7에는 제7설계국 외에도 여러 기관이 참여했다. 유도·제어계통은 그리고리 L. 바비치의 제3설계국이, 2단 엔진은 제9설계국이 맡았으며, 시험 전체는 인민해방군 로켓포병 총감 이고리 D. 네스테렌코가 위원장을 맡은 국가시험위원회가 지휘했다. === 당대회라는 기한 === K-7의 첫 비행시험은 원래 1961년 4분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1960년 루이나가 첫 전자정찰위성 TIDEMARK를 궤도에 올리고, 같은 해 루이나 해군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시험 소식이 전해지자 사비에트 지도부는 일정을 앞당길 것을 요구했다. 최종적으로 정해진 기한은 1961년 6월 26일 개막하는 사비에트 노동인민당 제6차 당대회였다. 최고인민평의회 주석 표도르 I. 카라신은 당대회 연설에서 "몇 분 안에 날아오를 수 있는 새 로켓"을 발표할 계획이었고, 그 전까지 K-7의 첫 발사가 성공해야 했다. 이 기한 때문에 K-7 1호기는 여러 부품의 지상 시험을 생략하거나 축소한 채 발사장으로 보내졌다. 1996년 국가조사위원회는 1호기의 계통 시험 항목 가운데 약 40%가 발사장 도착 이전에 완료되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했다. == 진행 == ||<tablealign=center><bgcolor=#cd0000><color=#fff> '''일시''' ||<bgcolor=#cd0000><color=#fff> '''내용''' || || 6월 12일 || 1호기 발사장 도착 || || 6월 14일 || 제12발사대 기립 || || 6월 16일 14시 || 추진제 주입 시작 || || 6월 16일 21시 40분 || 파열판 조기 작동 || || 6월 16일 23시 || 수리 강행 결정 || || 6월 17일 오전 || 분배기 교체 || || 6월 17일 16시 || 투마노프 서명 거부 || || 6월 17일 18시 40분 || 스테파노프 벙커 이동 || || 6월 17일 18시 52분 || 2단 점화·폭발 || || 6월 17일 20시 50분 || 진화 || === 추진제 주입 (6월 12일~16일) === K-7 1호기는 1961년 6월 12일 열차 편으로 사르다 발사장에 도착해 조립동에서 최종 조립을 마쳤고, 6월 14일 새로 건설된 제12발사대에 세워졌다. 제12발사대는 K-7 전용으로 지어진 발사대로, 사고 당시에도 주변 배선 작업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 건설대대 병력이 케이블 도랑 공사를 병행하고 있었다. 6월 16일 14시 추진제 주입이 시작되어 19시에 완료되었다. K-7은 원칙적으로 추진제를 채운 상태에서 수주간 대기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지만, 시제품인 1호기의 밸브와 밀봉재는 72시간까지만 보증되어 있었다. 즉 1호기는 6월 19일 저녁까지 발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추진제를 모두 빼내야 했다. 추진제를 빼내면 부식된 밸브와 배관을 교체해야 했기 때문에 재발사까지는 최소 3주가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 현장 회의 (6월 16일 밤) === 6월 16일 21시 40분, 발사 전 전기 점검 도중 제어계통의 오류 신호로 1단 연료 계통의 파열판[* 추진제 배관을 막고 있다가 전기 신호를 받으면 터지면서 길을 여는 일회용 격막. 한 번 작동하면 되돌릴 수 없다.] 두 개가 조기 작동했다. 연료가 엔진 직전의 주 밸브까지 흘러든 상태가 되면서, 로켓은 절반쯤 발사 절차에 들어간 채로 멈춘 셈이 되었다. 같은 점검에서 발사 순서를 제어하는 주 프로그램 분배기[* 발사 과정의 각 단계 명령을 정해진 순서대로 내보내는 전기기계식 장치. 순서대로 돌아가는 접점이 현재 어느 단계에 있는지에 따라 전원이 들어왔을 때 내보내는 명령이 달라진다.]의 결함도 발견되었다. 23시 네스테렌코는 발사대 옆 가건물에서 현장 회의를 열었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추진제를 빼내고 3주 이상 발사를 미루거나, 추진제를 채운 채로 발사대 위에서 결함을 고치는 것이었다. 당시 로켓포병 규정은 추진제가 주입된 로켓에 대한 정비 작업을 금지하고 있었다. 제3설계국과 제9설계국의 일부 기술자들이 추진제 배출을 주장했지만, 네스테렌코는 당대회 일정을 들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테파노프 역시 추진제를 채운 채 수리하는 방안에 동의했으며, 그는 훗날 이 동의를 평생의 짐으로 여겼다고 회고했다. > 그날 밤 가건물 안의 누구도 규정을 몰라서 어긴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규정을 알았고, 규정을 지키면 무엇을 잃는지도 알았다. 그리고 규정을 어기면 무엇을 잃을 수 있는지는 계산하지 않았다. 나는 원수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반대했다면 달라졌을지는 모르겠지만,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 ---- > 예브게니 A. 스테파노프, 유고 회고록 《도면 위의 사람들》(1991) === 추진제를 채운 채로 (6월 17일 오전~오후) === 6월 17일 오전 기술자들은 조기 작동한 파열판을 교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신 연료 차단 밸브를 잠가 해당 계통을 격리했다. 이어 결함이 발견된 주 프로그램 분배기를 예비품으로 교체했다. 교체 작업에는 제3설계국 기술자 10여 명이 투입되었고, 작업은 로켓 바로 아래 발사대 구조물 위에서 이루어졌다. 문제는 새 분배기였다. 예비 분배기는 공장 시험을 마친 뒤 초기 위치로 되돌려지지 않은 채 출하되어 있었고, 그 접점은 발사 순서의 후반 단계, 즉 2단 엔진 점화 명령 직전 단계에 멈춰 있었다. 이 상태에서 제어계통에 전원이 들어가면 분배기는 곧바로 2단 엔진 점화 명령을 내보내게 되어 있었다. 기술자들은 분배기가 전원 인가 시 스스로 초기 위치로 돌아간다고 믿었는데, 이는 구형 분배기에만 해당하는 기능이었다. 16시경 제3설계국 기사 안드레이 L. 투마노프는 교체된 분배기의 상태가 검증되지 않았다며 작업 확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확인서는 다른 기술자의 서명으로 처리되었다. 17시 30분 국가시험위원회는 18시 50분 발사 준비를 재개하고 19시 30분에 발사한다는 일정을 확정했다. 이 무렵 발사대 주변에는 170~190명이 모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규정상 추진제가 주입된 로켓 주변에 머물 수 있는 인원은 20명 이내였다. 그러나 수리 작업에 투입된 기술자들, 발사 부대 병력, 케이블 도랑 공사를 하던 건설대대 병력에 더해, 첫 발사를 직접 보려는 설계국 간부와 위원회 관계자들이 발사대를 떠나지 않았다. 네스테렌코는 로켓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작업을 지켜봤다. 그가 벙커로 들어가지 않자 다른 간부들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 18시 52분 === 18시 40분경 스테파노프는 크라슬리스크의 국방인민위원회 당직실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기 위해 약 400m 떨어진 지하 벙커로 내려갔다. 전화의 용건은 발사 예정 시각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제7설계국 부국장 미로슬라프 A. 드로즈도프가 그와 동행했고, 비슷한 시각 투마노프도 교체된 분배기의 도면을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고 벙커로 향했다. 18시 50분 발사 준비 재개 신호가 내려졌다. 시험 촬영반 하사 바실 D. 코바치는 절차에 따라 발사대 주변 자동 카메라 여섯 대를 가동한 뒤 대피호로 들어갔다. 18시 52분, 발사 준비의 첫 단계로 제어계통에 전원이 인가되었다. 새 분배기는 그 즉시 2단 엔진 점화 명령을 내보냈다. 2단 엔진이 발사대 위에서 점화되자 그 화염이 바로 아래 1단 산화제 탱크의 상부를 뚫었다. 수 초 뒤 1단의 연료와 산화제가 한꺼번에 섞이며 폭발했고, 직경 약 120m의 화구가 발사대를 덮었다. 로켓에서 50m 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즉사했다. 그보다 멀리 있던 사람들은 발사대 바깥으로 달아났지만, 발사대를 둘러싼 두 겹의 철조망 울타리에는 출입문이 하나뿐이었다. 울타리 앞에 몰린 사람들 위로 불붙은 추진제가 쏟아졌고, 흘러내린 추진제는 공사 중이던 케이블 도랑을 따라 번졌다. > 모두가 울타리 쪽으로 뛰었습니다. 울타리는 두 겹이었고 문은 하나였습니다. 저는 문으로 가지 않고 케이블 도랑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릅니다. 도랑 위로 불이 지나갔습니다. 이상하게도 불은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소리를 낸 것은 사람들이었습니다.[br][br]불이 지나간 뒤 도랑 끝으로 기어 나왔을 때, 제 옆에서 같이 흙을 파던 동기 네 명 중 셋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나중에 받은 명단에 없었습니다. > ---- > 제12발사대 건설대대 상병 에를란 K. 투르숀바예프, 1996년 국가조사위원회 진술 > 벙커 계단을 반쯤 내려갔을 때 땅이 흔들렸습니다. 올라가 보니 발사대가 있던 자리에 해가 하나 더 떠 있었습니다. 저는 도면철을 든 채로 서 있었습니다. 그 도면을 가지러 가라는 지시가 없었다면 저는 분배기 옆에 있었을 겁니다.[br][br]서명하지 않은 사람이 살고, 서명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저는 30년 동안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 > 제3설계국 기사 안드레이 L. 투마노프, 1989년 주간지 《스베토치》 인터뷰 === 화재와 구조 === 화재는 약 2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사르다 발사장 소방대는 폭발 직후 출동했지만 질산계 산화제에서 뿜어져 나오는 적갈색 유독가스 때문에 40분 가까이 발사대에 접근하지 못했다. 당시 발사장에는 이 기체를 막을 수 있는 방호복과 방독면이 소방대원 수에 한참 못 미치게 비치되어 있었다. 발사대 주변의 아스팔트는 녹아내렸고, 울타리의 철조망 일부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휘어 있었다. 불길은 20시 50분경 잡혔다. 19시 30분경 첫 부상자 수송 트럭이 27km 떨어진 사르다-2 시의 군병원에 도착했다. 병상 72개 규모의 병원에는 그날 밤 54명의 부상자가 한꺼번에 들어왔고, 당직 외과 군의관은 2명뿐이었다. 이튿날인 6월 18일 새벽 4시, 전신 화상을 입은 14명이 수송기 편으로 크라슬리스크 중앙군병원 화상 병동으로 이송되었다. > 첫 트럭이 들어왔을 때 저는 환자의 계급을 알 수 없었습니다. 군복이 몸에 녹아 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급 대신 숨을 쉬는지로 순서를 정했습니다. 그날 밤 병원에는 72개의 침대와 54명의 환자와 2명의 외과의가 있었습니다. 새벽이 되어서야 크라슬리스크에서 온 군의관들이 사고의 규모를 처음 물었고, 우리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발사대에 몇 명이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 > 사르다-2 군병원 외과 군의관 소령 나탈리야 P. 브라니스코바, 회고록 《사막의 병동》(1993) 21시 10분 스테파노프는 국방인민위원회에 첫 보고 전문을 보냈다. > 18시 52분 제12발사대에서 발사 준비 중 2단 엔진의 비정상 점화로 제품 파괴, 화재 발생. 네스테렌코 동지를 포함한 발사대 인원 다수 생사 불명. 현 시점 사상자는 100명 내외 또는 그 이상으로 추정되며, 그중 수십 명은 사망한 것으로 보임. 부상자 후송 중. 지시 바람. 스테파노프. > ---- > 예브게니 A. 스테파노프가 1961년 6월 17일 21시 10분 국방인민위원회에 보낸 전문. 1996년 국가조사위원회 공개 == 원인 == === 기술적 원인 === 직접적인 원인은 교체된 주 프로그램 분배기가 초기 위치로 되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제어계통에 전원이 인가된 것이다. 분배기의 접점이 2단 엔진 점화 직전 단계에 멈춰 있었기 때문에, 전원이 들어가는 순간 분배기는 앞선 단계들을 모두 건너뛰고 2단 점화 명령을 내보냈다. 1961년 조사위원회와 1996년 국가조사위원회는 이 결론에 모두 동의했으며, 코바치가 가동한 자동 카메라 여섯 대 가운데 네 대가 남긴 필름이 2단 엔진의 점화에서 1단 폭발까지의 과정을 초 단위로 확인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그 밖에 다음과 같은 기술적 요인이 사고를 키운 것으로 지적된다. * 전날 밤 1단 연료 계통의 파열판이 조기 작동해 연료가 주 밸브까지 차 있었기 때문에, 1단이 파손되자 추진제가 즉시 대량으로 섞였다. * 구형과 신형 분배기의 초기화 방식이 달랐으나 이를 명시한 작업 지침이 없었다. * 2단 엔진의 점화 명령을 막는 별도의 차단 장치가 없어, 분배기 하나의 오류가 곧바로 점화로 이어졌다. * 자연발화성 추진제의 특성상 점화 장치 없이도 두 추진제가 만나는 순간 연소가 시작되었다. === 조직적 원인 === 그러나 두 조사위원회는 모두 기술적 결함 자체보다, 결함이 대량 인명 피해로 이어지게 만든 조직적 요인을 더 중시했다. 분배기의 오류는 로켓 한 기를 잃게 만들 수 있었지만, 92명을 죽게 만든 것은 그 로켓 주변에 170명 넘는 사람이 서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 '''추진제가 주입된 로켓에 대한 정비 금지 규정 위반''': 추진제를 빼내는 대신 채운 채로 수리하기로 한 6월 16일 밤의 결정. * '''발사대 체류 인원 제한 위반''': 규정상 20명 이내였던 체류 인원이 실제로는 170~190명에 달했다. * '''지휘관의 현장 체류''': 국가시험위원회 위원장이 로켓 20m 앞에 머무르면서, 하급자들이 자리를 떠날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 '''이의 제기의 무시''': 분배기의 검증 부족을 지적한 기술자의 서명 거부가 다른 서명으로 대체되었다. * '''일정 압박''': 당대회라는 정치적 기한이 모든 결정의 전제가 되었다. * '''발사대 설계''': 출입문이 하나뿐인 두 겹의 철조망이 대피를 막았고, 발사대 주변에서 공사가 병행되고 있었다. 1996년 국가조사위원회 보고서는 이 사고를 "한 사람의 실수가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던 위험을 아무도 멈추지 않은 결과"로 규정했다. == 피해자 == === 사망자 === 1996년 국가조사위원회가 확정한 사망자는 92명이다. ||<tablealign=center><bgcolor=#cd0000><color=#fff> '''구분''' ||<bgcolor=#cd0000><color=#fff> '''현장''' ||<bgcolor=#cd0000><color=#fff> '''병원''' ||<bgcolor=#cd0000><color=#fff> '''계''' || || 군인 || 66 || 3 || 69 || || 민간 기술자 || 21 || 2 || 23 || || '''계''' || '''87''' || '''5''' || '''92''' || 현장 사망자 87명 가운데 34명은 시신의 훼손이 심해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고, 이들은 사르다-2 시 외곽의 합동묘지에 함께 묻혔다.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도 상당수는 유품으로 확인되었다. 주요 사망자는 다음과 같다. * '''이고리 D. 네스테렌코'''(1903~1961): 포병 원수. 인민해방군 로켓포병 총감, K-7 국가시험위원회 위원장.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는 인민영웅 금성장과 녹아내린 원수 견장, 18시 52분에 멈춘 손목시계만 수습되었다. * '''그리고리 L. 바비치'''(1911~1961): 제3설계국 수석설계자. 사비에트 탄도미사일 유도·제어계통의 최고 권위자로, 분배기 교체 작업을 직접 감독하고 있었다. 주머니에 있던 설계국 금고 열쇠 꾸러미로 신원이 확인되었다. * '''드라간 M. 페트로비치'''(1919~1961): 제9설계국 부수석설계자. K-7 2단 엔진의 설계 책임자였다. * '''레오니트 A. 쿠즈민'''(1924~1961): 제7설계국 시험부장. 스테파노프의 최측근으로, 스테파노프가 벙커로 내려간 동안 발사대에서 그를 대신하고 있었다. * '''스토얀 I. 게오르기예프'''(1917~1961): 대령. 사르다 발사장 제2시험국장. 군인 사망자 가운데 절반 이상은 20세 안팎의 징집병이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카스탄 자치지역 출신의 카스탄계였다. === 병원 사망자 === 사고 후 병원으로 옮겨진 부상자 가운데 5명이 치료 중 사망했다. ||<tablealign=center><bgcolor=#cd0000><color=#fff> '''이름''' ||<bgcolor=#cd0000><color=#fff> '''직책''' ||<bgcolor=#cd0000><color=#fff> '''사망일''' || || 보리스 N. 셀레즈뇨프 || 국방기술위원회 부위원장 || 6월 29일 || || 누르벡 A. 사디코프 || 연료반 하사 || 7월 3일 || || 파벨 V. 클리모프 || 제3설계국 기사 || 7월 9일 || || 미하일 T. 고르바크 || 총감 수석부관 중령 || 7월 21일 || || 이반 R. 즐라타노프 || 통신반 병장 || 8월 14일 || === 부상자와 생존자 === 치료 중 사망한 5명을 제외한 부상자는 49명(군인 38명, 민간 기술자 11명)으로, 대부분 2~4도 화상과 질산계 가스 흡입에 따른 폐 손상을 입었다. 생존자 상당수는 이후 수년간 호흡기 질환에 시달렸으며, 1996년 국가조사위원회가 연락이 닿은 생존자 31명 가운데 19명이 만성 폐질환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폭발 순간 발사대를 떠나 있었던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다. 스테파노프와 드로즈도프는 벙커의 전화 때문에, 투마노프는 도면 심부름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스테파노프는 벙커 출구로 뛰어 올라가다 열기에 얼굴과 손에 화상을 입었고, 사고 9일 뒤 심장 발작을 일으켜 3개월간 업무에 복귀하지 못했다. 그는 부상자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 > 규정대로 준비 재개 신호와 함께 자동 카메라 여섯 대를 켰습니다. 발사가 아니라 준비 단계라는 건 알았지만, 켜지 않으면 규정 위반이었습니다. 그날 제12발사대에서 누군가 규정대로 한 일은 아마 그것 하나였을 겁니다. 그리고 그 필름이 나중에 모든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br][br]조사위원회가 필름을 돌려 볼 때 저도 그 방에 불려 갔습니다. 화면 가장자리에 의자 하나가 보였습니다. 3초 뒤 그 의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 ---- > 시험 촬영반 하사 바실 D. 코바치, 2001년 사비에트 국영방송 인터뷰 == 은폐 == === 항공기 사고 === 6월 19일 사비에트 노동인민당 정치국은 비공개 회의를 열어 사고를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튿날인 6월 20일 당 기관지 《노동인민》은 네스테렌코 원수가 "공무 비행 중 항공기 사고로 순직했다"는 짧은 부고를 실었다. 6월 23일 크라슬리스크에서 국장이 치러졌으며, 관은 봉인된 채 열리지 않았다. 6월 26일 예정대로 제6차 당대회가 개막했다. 카라신 주석은 개막 연설에서 "우리의 새 로켓은 몇 분 안에 날아오를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연설은 사고 9일 뒤에 이루어졌으며, 연설문에는 사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 조사위원회 === 사고 이튿날인 6월 18일 오후, 국방인민위원회 제1부위원장 아나톨리 S. 코르닐로프를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가 사르다에 도착했다. 코르닐로프는 현장에 모인 생존자와 발사장 인원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동지들, 우리는 누구도 재판에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원인을 밝히고, 피해를 복구하고,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 ---- > 아나톨리 S. 코르닐로프 조사위원장, 1961년 6월 18일 사르다 발사장 조사위원회는 7월 22일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는 분배기의 미초기화를 직접 원인으로, 추진제 주입 로켓에 대한 정비와 과다 인원 체류를 피해 확대 원인으로 지목하면서도 책임은 "집단적 규정 위반"으로 정리했다. 형사 처벌은 없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의 약속과 달리 사르다 발사장장 스타니슬라프 P. 보이노비치 대령은 해임·강등되었고, 제3설계국 부국장 1명이 징계를 받았다. 보이노비치는 사고 당일 크라슬리스크 출장 중이어서 발사장에 없었다. 보고서는 '특급 비밀'로 분류되어 1996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카라신 주석은 7월 초 스테파노프를 크라슬리스크로 불러 사고 경위를 직접 보고받았다. 이 자리에 배석했던 인물의 회고에 따르면 카라신이 처음 던진 질문은 사고 원인이 아니라 "당신은 왜 살아 있소?"였다. === 유족 === 다른 사망자의 유족들에게는 가족이 "시험장에서의 사고로" 사망했다는 통보만 전달되었고, 일부 설계국 기술자의 유족에게는 네스테렌코 원수와 같은 항공기에 탑승했다가 사망했다는 설명이 주어졌다. 사망진단서에는 사인이 "화상"으로만 적혔고 사망 장소는 "군 부대"로 기재되었다. 유족들은 비밀 유지 서약서에 서명해야 했으며, 유족 연금은 지급되었지만 '공무 중 사망' 지위는 1990년에야 인정되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34명의 유족은 가족이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1996년 국가조사위원회는 이들 유족 가운데 상당수가 30년 넘게 가족이 실종된 것으로 알고 지냈다고 기록했다. > 남편이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관은 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믿었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br][br]28년 뒤 잡지를 읽다가, 남편이 탔다던 비행기가 그날 크라슬리스크 공항의 격납고에서 정비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날 저는 남편의 두 번째 부고를 받은 셈입니다. 첫 번째 부고는 남편의 죽음을 알렸고, 두 번째 부고는 나라가 28년 동안 제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 ---- > 그리고리 L. 바비치의 부인 마리야 A. 바비치, 1989년 《스베토치》 독자 편지 == 공개 == === 해협 너머의 추정 === [[루이나]]는 사고 두 달 뒤부터 이상 징후를 파악하고 있었다. 1961년 8월 [[루이나 국가정보국]]은 사르다에서 대형 사고가 발생해 고위 장성을 포함한 수십 명이 사망했다는 첩보를 보고하며, 네스테렌코의 항공기 사고 발표와 이 첩보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1962년 3월에는 그해 처음 사르다 상공을 촬영한 KESTREL 정찰위성 사진에서 제12발사대 주변의 대규모 화재 흔적이 확인되었다. > 사진 속 제12발사대 주변에는 직경 약 300m의 검게 탄 원이 있고, 그 가장자리를 따라 울타리의 흔적이 보인다. 발사대 구조물은 새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사고가 있었다는 것은 확신하지만, 그 규모에 대해서는 추정할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 ---- > 루이나 국가정보국 영상 판독 보고서, 1962년 3월 (1998년 기밀 해제) 1964년 11월 센츄리움에서 망명한 인민해방군 정보총국 대령 유리 K. 베레진은 루이나 정보당국에 사고의 개요를 진술했고, 1966년 1월 《르 나시오날》이 그의 진술을 토대로 "사르다에서 300명 이상 사망"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루이나 언론이 이 사고를 다룬 첫 보도였으나, 사망자 수는 크게 부풀려져 있었다. 사비에트는 이 보도를 "제국주의 정보기관의 날조"라고 일축했다. 1976년에는 루이나로 추방된 사비에트 화학자 보리슬라프 T. 얀코비치가 과학잡지 《과학과 사회》에 기고한 글에서 사고에 쓰인 추진제의 성질과 사고 경위를 비교적 정확하게 서술하며 사망자를 약 100명으로 추정했다. === 1989년 인정 === 사비에트 안에서 사고가 처음 공개된 것은 사고 28년 뒤였다. 1989년 4월 16일자 주간지 《스베토치》는 기자 타티야나 I. 멜니크가 생존자와 유족을 취재한 기사를 게재했다. 기사는 네스테렌코가 탔다던 항공기가 사고 당일 크라슬리스크 공항에서 정비 중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항공기 사고 발표가 거짓이었음을 입증했다. 국방인민위원회는 기사가 나온 지 닷새 뒤 "1961년 사르다 발사장에서 상당수의 인명 피해를 낸 사고가 있었다"고 처음으로 인정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사망자를 61명으로 발표했다. 61명이라는 숫자는 1961년 조사위원회 보고서의 부록에 적힌 '신원 확인 사망자' 수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신원 미확인자와 병원 사망자가 빠져 있었다. 유족과 생존자들은 이 숫자에 반발했고, 이는 이후 국가조사위원회 설치 요구로 이어졌다. === 1996년 국가조사위원회 === 1994년 사비에트 정부는 퇴역 대령 블라디미르 I. 이브니치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위원회는 1961년 보고서와 부대 인사 기록, 병원 기록, 자동 카메라 필름을 대조하고 생존자와 유족을 면담해, 사고 35주기인 1996년 6월 17일 사망 92명(현장 87명, 병원 5명), 부상 49명이라는 최종 집계를 발표했다. 사망자 명단은 2001년 공개되었다. 그러나 위원회 스스로도 이 숫자가 최종적인 것은 아닐 수 있다고 밝혔다. 사고 당일 제12발사대에서 케이블 도랑 공사를 하던 건설대대 병력은 시험 인원 명부에 올라 있지 않았고, 해당 부대의 출근 기록은 1970년대에 폐기된 상태였다. 위원회는 건설대대 병력 가운데 적어도 11명이 현장에 있었을 것으로 보았으나 사망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설계국 관계자들이 회고록 등에서 제시한 120~130명이라는 추정치는 이 미확인 인원을 포함한 것이다. == 영향 == === K-7 계획과 메치 === 사고로 K-7 계획은 중단되지 않았다. 조사위원회 보고서가 제출된 뒤 시험은 1961년 9월 재개되었고, 10월 29일 K-7 2호기가 첫 비행에 성공했다. K-7은 1963년 실전 배치되어 사비에트 최초로 명령 후 30분 안에 발사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이 되었다. 이후 K-7은 제7설계국의 부분궤도 폭격체계 「메치」의 발사체로 개량되어, 1967년 부분궤도 시험을 거쳐 1968년 실전 배치되었다. 사고가 남긴 가장 큰 손실은 사람이었다. 바비치의 사망으로 제3설계국은 수석설계자와 핵심 기술자 상당수를 한꺼번에 잃었고, 사비에트 탄도미사일의 유도 정확도 개선은 수년간 정체되었다. 한편 스테파노프가 살아남은 것은 이후 사비에트 우주개발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그날 발사대에 있었다면 제7설계국은 수석설계자와 시험부장을 동시에 잃었을 것이고, 이후 제7설계국이 주도한 메치, 무장 우주정거장 「크레포스트」, 위성 요격 무기 「야스트레브」도 지금과 같은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 그날 나를 벙커로 부른 전화는 크라슬리스크에서 발사 시각을 묻는 전화였다. 우리를 서두르게 만든 바로 그 목소리가 나를 살렸다.[br][br]사람들은 제7설계국이 살아남았다고 말하지만, 살아남은 것은 설계국이 아니라 나 한 사람이었다. 설계국은 그날 발사대 위에서 절반이 죽었다. 나는 남은 절반과 새로 온 젊은이들을 데리고 다시 로켓을 만들었다. 그 로켓들이 무엇이 되었는지는 모두가 안다. 나는 그들이 그것을 원했을지 알지 못한다. > ---- > 예브게니 A. 스테파노프, 유고 회고록 《도면 위의 사람들》(1991) === 6월 17일 규정 === 사고 이후 국방인민위원회는 1961년 8월 명령 제61-117호 「추진제 주입 로켓 취급 규정」을 제정했다. 이 규정은 통칭 「6월 17일 규정」으로 불리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추진제가 주입된 로켓에 대해서는 추진제를 배출하는 것 외의 정비를 금지한다. * 추진제 주입 후 발사대 체류 인원은 12명 이내로 하고, 명단을 사전에 작성한다. * 발사 30분 전부터는 체류 인원 전원이 방호 시설로 대피한다. 직위와 계급을 불문한다. * 제어계통 부품을 교체한 경우 2인 이상이 초기화 상태를 확인하고 서명한다. * 발사대 울타리에는 사방에 출입문을 둔다. * 추진제 주입 후 발사대 주변 공사를 금지한다. 특히 세 번째 항목의 "직위와 계급을 불문한다"는 문구는 네스테렌코의 현장 체류를 직접 겨냥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사비에트 로켓포병과 궤도방위군의 교범에는 지금도 이 규정의 제정 경위가 첫 장에 실려 있다. === 우주경쟁에 미친 영향 === 사고는 해협의 미사일 경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고로 K-7의 실전 배치는 당초 계획보다 약 2년 늦어졌고, 1962년 루이나의 KESTREL이 확인한 사비에트의 중거리탄도미사일 발사대가 루이나의 기존 추정치인 120~150기에 한참 못 미치는 46기에 그친 데에는 K-7 배치 지연도 한몫을 한 것으로 본다. 당시 루이나 정보당국은 이 차이의 원인을 알지 못했고, 사르다 사고와 미사일 격차 논쟁의 관계는 1990년대 들어서야 연구자들에 의해 연결되었다.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상세 내용은 [[랜드해협 우주경쟁]] 문서 참고.}}} == 추모 == 1963년 사르다-2 시 중앙공원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비석에는 "로켓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라는 문구만 새겨졌을 뿐, 날짜도 사고 내용도 적히지 않았다. 사고 날짜는 1989년 공식 인정 이후 추가되었고, 1997년에는 국가조사위원회가 확정한 92명의 이름이 새겨졌다. 2011년 사고 50주기에는 추모비 옆에 "이름을 찾지 못한 이들에게"라고 새긴 작은 비석이 따로 세워졌는데, 이는 명단에 오르지 못한 건설대대 병력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같은 해 추모식에는 국방인민위원장이 처음으로 참석했다. 사르다 발사장에서는 매년 6월 17일 18시 52분에 1분간 사이렌이 울린다. 1962년 이후 사르다에서는 6월 17일에 발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으며, 이 관행은 1990년 발사장 운영 규정으로 명문화되었다. 사비에트 우주비행사들은 비행 전 이 추모비에 헌화하는 것을 관례로 삼고 있다. == 대중매체에서 == * 《18시 52분》(2002): 사비에트 국영방송의 다큐멘터리. 2001년 공개된 자동 카메라 필름의 일부를 처음으로 방송에 사용했으며, 투마노프와 코바치 등 생존자들이 출연했다. * 《벙커의 전화》(2011): 사고 50주기에 맞춰 제작된 사비에트 영화. 스테파노프를 모델로 한 수석설계자가 주인공이며, 발사대 회의부터 폭발까지의 이틀을 다룬다. * 《사막의 불》(1966): 《르 나시오날》의 연재 기사. 베레진의 진술을 바탕으로 한 루이나 최초의 보도로, 사망자 수를 비롯해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았다. == 여담 == * 네스테렌코의 손목시계는 1997년부터 인민해방군 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시계는 지금도 18시 52분을 가리키고 있다. * 스테파노프는 1984년 사망할 때까지 매년 6월 17일 사르다를 찾아 추모비 앞에서 18시 52분을 맞았다고 한다. 제7설계국 직원들 사이에서는 그가 이후 모든 발사를 벙커의 전화기 옆에서 지켜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투마노프가 서명을 거부한 작업 확인서의 원본은 1996년 국가조사위원회가 1961년 조사 서류철에서 찾아냈다. 확인서의 서명란에는 투마노프의 이름이 줄로 지워진 채 다른 기술자의 서명이 들어가 있었는데, 그 기술자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 제12발사대는 1961년 말 같은 자리에 재건되어 199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폭발 당시 휘어진 철조망 울타리의 일부는 철거되지 않고 발사대 옆에 보존되어 있다. * 사고 당시 사비에트의 우주비행사 후보들은 사르다에 없었으나, 이듬해 1962년 첫 유인 비행에 나선 세르게이 T. 라도프는 비행 전 추모비가 세워질 자리에 들러 묵념했다고 회고했다. == 관련 문서 == * [[랜드해협 우주경쟁]] * [[사비에트 인민해방군]] * [[메치]] * [[루이나 국가정찰국]] * [[루이나 국가정보국]]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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