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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랜드 공화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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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사랜드 공화국]][[분류:랜드사]][[분류:경제사]]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상위 문서는 [[사랜드 공화국]] 문서 참고.}}} [목차] [clearfix] == 개요 == [[사랜드 공화국]]의 경제를 다루는 문서. 공화국 경제는 1918년 4월 해방 포고에서 시작해 1946년 화폐 개혁에서 사실상 끝났다. 해방 포고는 농노를 해방하고 수문과 수로를 마을의 수문 공동체에 넘겨주었지만 땅은 옛 영주에게 남겨 두었고, 이 '물과 땅의 분리'가 공화국 경제의 가장 큰 특징이자 약점이 되었다. 공업은 [[제정 사랜드]]의 국영 병기창과 방직공장을 물려받아 1920년대 후반 짧은 호황을 누렸으나, 1929년 대공황으로 무너졌다. 1934년 이후 군부 정권은 조합주의와 군비로 경제를 다시 세우려 했고, 제2차 세계 대전과 내전은 평원의 경제를 폐허로 만들었다. == 해방 포고와 농촌 경제 == === 1918년 해방 포고 === 1918년 4월 22일 해방 포고는 약 7,700만 명의 농노를 조건 없이 해방했다. 부역과 공납, 인두세가 폐지되었고, 해방된 농민은 이주와 결혼, 재산 소유의 자유를 얻었다. 포고는 또 영주가 쥐고 있던 수문과 수로를 마을의 수문 공동체에 넘겨주었다. 제정 시기 영주 수리권이 농노제를 떠받친 핵심이었던 만큼, 수문의 이양은 혁명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포고는 땅을 나누지 않았다. 영주의 직영지는 물론, 농노들이 대대로 경작하던 분여지까지 옛 영주의 소유로 남았다. 해방된 농민들은 자유인이 되었지만 땅이 없었고, 옛 영주들은 땅이 있었지만 물이 없었다. === 물과 땅의 교착 === 반건조 평원에서 관개 없는 땅은 쓸모가 없었고, 땅 없는 물도 쓸모가 없었다. 그 결과 해방 이후의 평원 농업은 물을 쥔 마을과 땅을 쥔 지주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서로를 막을 수 있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대부분의 해방 농민은 옛 영주의 땅을 빌리는 소작농이 되었다. 소작료는 대개 수확의 절반이었고, 지주는 소작 계약에 마을의 물을 지주 땅에 우선 대 준다는 조건을 넣으려 했다. 마을의 수문 공동체는 이를 거부하며 조건이 나쁜 지주의 땅으로 가는 수문을 닫는 '물 파업'을 벌였고, 지주는 소작농을 쫓아내고 땅을 놀리는 '땅 봉쇄'로 맞섰다. 1921년부터 1926년까지 내무부가 집계한 물 파업만 2,300건이 넘었다. 1930년 기준 평원 농가의 약 62%가 소작농이었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A9F3><rowbgcolor=#00A9F3><rowcolor=#fff> '''구분''' || '''비율(1930)''' || || 자작농 || 21% || || 자소작농 || 17% || || 소작농 || 62% || 평원 농가 기준. === 양수기 지주 === 물을 잃은 지주들이 찾은 해법은 지하수였다. 1920년대 들어 지주들은 루이나에서 들여온 디젤 양수기로 자기 땅에 깊은 우물을 파기 시작했고, 이렇게 마을의 수로에 기대지 않고 농사를 짓는 '양수기 지주'가 늘어났다. 1929년 평원 서부와 중부의 사설 우물은 3만 개가 넘었다. 양수기 사업에는 루이나 자본이 활발히 투자했다. 양수기는 지주를 물 파업에서 해방했지만, 마을에는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지주의 깊은 우물이 지하수를 퍼 올리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지하수위가 눈에 띄게 낮아져 마을의 얕은 우물이 말랐다. 물을 둘러싼 마을과 지주의 다툼은 강물에서 땅속으로까지 번졌고, 1932년 소작 폭동 때 농민들이 가장 먼저 부순 것도 지주의 양수기였다. === 토지 개혁의 좌절 === 1920년 헌법은 '토지 제도는 법률로 정한다'는 한 줄만 남겼고, 이 법률은 끝내 만들어지지 않았다. 공화국이 토지 개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것은 1924년 10월 사회당의 파블로비치 내각 때였다. 파블로비치 내각은 200헥타르가 넘는 지주의 땅을 국가가 20년 분할 상환 국채로 사들여 소작농에게 나누어 주는 토지 개혁법을 국민의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1925년 3월 지주와 옛 관료가 장악한 원로원이 이를 부결했고, 국민의회는 재의결에 필요한 3분의 2를 모으지 못했다. 이후 토지 개혁 법안은 몇 차례 더 제출되었지만 모두 연립 내각의 붕괴와 함께 폐기되었다. 1934년 군부 정권은 지주의 땅을 그대로 두고 소작료 인하를 약속했을 뿐이었다. 평원에서 실제로 땅이 나뉜 것은 1941년 이후 인민군 해방구에서였다. == 공업 == === 크라슬리스크 공업 공사 === 제정의 국영 병기창과 제철소, 기관차 공장은 1921년 국영 기업인 크라슬리스크 공업 공사로 개편되었다. 농노제 폐지로 배속 농노가 사라지자 공사는 모든 노동자를 임금 노동자로 고용해야 했고, 1920년대 초에는 인건비 부담과 군수 주문 감소로 고전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철도 차량과 농기계, 양수기 생산으로 사업을 넓혀 경영을 회복했다. === 방직과 경공업 === 인터그라드의 방직공장은 공화국 시기에도 최대의 민간 산업이었다. 1925년 채무 조정 협정 뒤 루이나 자본이 다시 들어오면서 방직공장이 늘어났고, 식품 가공과 담배, 신발 같은 경공업이 인터그라드와 자톤을 중심으로 자랐다. 방직공장의 노동자는 여전히 여성이 다수였으며, 1919년 노동법으로 8시간 노동제가 도입되었다. === 1920년대 호황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A9F3><rowbgcolor=#00A9F3><rowcolor=#fff> '''연도''' || '''공업 생산''' || || 1913 || 100 || || 1920 || 61 || || 1925 || 104 || || 1928 || 132 || || 1932 || 79 || 1913년을 100으로 한 지수. 제1차 세계 대전과 1918~1920년의 혼란으로 1920년 공업 생산은 1913년의 61%로 떨어졌다. 1925년 이후 루이나 자본의 유입과 곡물 수출의 회복으로 경제가 살아나 1928년 공업 생산은 1913년의 132%에 이르렀다. 그러나 호황은 도시와 공업에 머물렀고, 소작농의 처지는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 재정과 채무 == === 제정 채무의 승계 === 1917년 임시정부는 제정의 대외 채무를 승계했다. 1914년 기준 제정의 대외 채무 가운데 약 3분의 2가 루이나에 대한 것이었다. 임시정부가 채무를 승계한 것은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협상국의 신용이 필요했기 때문이지만, 이 결정은 공화국 재정에 무거운 짐을 남겼다. 1920년대 초 공화국 세입의 약 4분의 1이 대외 채무의 이자로 나갔다. === 1925년 채무 조정 협정 === 1925년 공화국과 루이나는 채무 조정 협정을 맺어 상환 기간을 30년 늘리고 이자율을 낮추었다. 대신 공화국은 디나르를 금환본위제로 되돌리고 관세 수입의 일부를 상환 담보로 내놓았다. 협정 뒤 루이나 자본이 다시 들어오면서 1920년대 후반 호황의 바탕이 되었다. === 1932년 지불 유예 === 1929년 대공황으로 곡물 가격이 폭락하자 수출 대금이 바닥났다. 1931년 공화국은 금환본위제를 포기했고, 1932년 7월 제정 채무의 상환을 일방적으로 유예했다. 루이나 의회는 사랜드산 곡물에 보복 관세를 매겼다. 1934년 쿠데타 뒤 국가재건위원회는 제정 채무를 '차르와 지주의 빚'이라며 사실상 부인했고, 이 채무는 공화국이 무너질 때까지 상환되지 않았다. === 통화 === 통화는 제정의 디나르를 그대로 썼다. 1914년 금 태환이 정지된 뒤 전쟁과 혁명기의 인플레이션으로 디나르의 가치는 크게 떨어졌고, 1925년 채무 조정 협정과 함께 금환본위제로 돌아갔다가 1931년 다시 이탈했다. 1944~1946년에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1946년 과도정부는 구 디나르 100만을 신 디나르 1로 바꾸는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 대공황 == 1929년 대공황은 곡물 수출에 기대던 공화국 경제를 무너뜨렸다. 곡물 가격은 1932년 1928년의 38%로 떨어졌고, 소작료를 낼 수 없게 된 소작농들이 땅에서 쫓겨났다. 지주들도 양수기 대출을 갚지 못해 파산했다.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1931년 인터그라드와 크라슬리스크의 실업률은 30%를 넘었다. 1931년 일리치 내각은 공무원 봉급과 실업 수당을 깎는 긴축으로 대응했지만, 긴축은 수요를 더 위축시켰다. 1932년 평원 곳곳에서 소작 폭동이 일어나 지주의 양수기와 곡물 창고가 불탔고, 크라슬리스크 공업 지대에서는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했다. 경제 위기는 곧 정치 위기가 되었고, 1934년 쿠데타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 조합주의 경제 (1934~1944) == === 직능조합법 === 국가재건위원회는 이탈리아의 조합주의를 본떠 1935년 직능조합법을 만들었다. 법은 모든 경제 활동을 농업·공업·상업·교통·금융·전문직·공공의 일곱 개 직능 조합으로 나누고, 각 조합 안에 사용자 부문과 노동자 부문을 두었다. 임금과 가격, 노동 조건은 국가가 임명한 조합 위원장 아래에서 결정되었으며, 파업과 직장 폐쇄는 금지되었다. 노동조합은 해산되었고 노동자는 해당 조합에 강제로 가입해야 했다. === 수리관리법 (1936) === 1936년 수리관리법은 수문 공동체가 관리하던 평원의 수문과 수로를 국가 수리청의 관리로 옮겼다. 명분은 수리 시설의 효율적인 관리였지만, 수리청은 '생산성이 높은 대농장'에 물을 우선 배분한다는 원칙을 세워 사실상 지주의 땅에 물을 몰아주었다. 1918년 해방 포고의 유일한 실질적 성과였던 마을의 수리권은 이렇게 사라졌다. 같은 해 위원회는 수문 공동체가 수문을 넘겨받은 날을 기리던 공휴일 '수문의 날'도 폐지했다. === 공공사업과 군비 === 위원회는 공공사업과 군비 확장으로 실업을 흡수했다. 1937년 스베틀라 강 중류에 관개와 발전을 겸한 스베틀라 댐을 착공했고, 크라슬리스크와 서부 국경을 잇는 군사 도로 '재건 도로'를 닦았다. 1939년에는 국가 예산의 38%가 군비에 쓰였다. 실업률은 1938년 9%까지 떨어졌지만, 실질 임금은 1928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 독일과의 청산 협정 === 1938년 위원회는 독일과 청산 협정을 맺었다. 사랜드가 곡물과 구리, 철광을 보내면 독일이 무기와 기계로 갚는 방식이었고, 외화 없이 교역하는 이 협정으로 사랜드 경제는 빠르게 독일에 묶였다. 1940년 사랜드 수출의 절반 가까이가 독일과 이탈리아로 향했다. == 전시 경제 (1941~1945) == 1941년 참전 뒤 위원회는 전시총동원령으로 곡물과 광물, 노동력을 국가가 통제했다. 평원의 곡물은 징발되어 추축국의 전쟁 물자로 실려 나갔는데, 1942년과 1943년 두 해 동안 반출된 곡물만 약 410만 톤에 이르렀다. 도시에는 배급제가 실시되었고, 농촌에서는 징발을 피해 곡물을 숨기는 일이 흔했다. 1943년 연합군의 반격으로 사랜드가 전장이 되면서 경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철도와 교량, 공장이 폭격과 전투로 파괴되었고, 크라슬리스크 공업 공사의 공장 절반 이상이 1944년까지 가동을 멈추었다. 인민군 해방구에서는 지주의 땅을 몰수해 소작농에게 나누어 주는 별도의 경제가 돌아갔다. == 과도정부 시기 (1945~1949) == 1945년 휴전 때 평원의 도시와 철도는 대부분 파괴되어 있었다. 과도정부는 극심한 인플레이션 속에서 1946년 화폐 개혁을 단행했지만, 연합국의 원조는 거의 없었다. 추축국 편에서 싸운 나라였기 때문이다. 과도정부는 군대와 도시를 먹이기 위해 농촌에서 곡물을 징발했고, 해방구의 땅을 원소유자에게 돌려주도록 요구했다. 곡물 징발과 토지 반환 요구는 농촌의 민심을 과도정부에서 완전히 돌아서게 만들었고, 내전에서 인민군이 승리한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 평가 == 공화국 경제의 실패는 흔히 1918년 해방 포고의 '반쪽 해방'으로 요약된다. 수문을 마을에 넘겨준 것은 제정의 영주 수리권을 무너뜨린 혁명적인 조치였지만, 땅을 그대로 둔 탓에 평원 농업은 물과 땅이 서로를 막는 교착에 빠졌다. 공화국은 이 교착을 토지 개혁으로 풀지 못했고, 군부 정권은 1936년 수리관리법으로 물마저 지주에게 되돌려 주었다. 결국 이 문제를 끝낸 것은 법률이 아니라 내전이었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1918년의 수문 이양을 '땅을 주지 않기 위해 물을 내준 지주들의 술책'으로 서술했다. 반면 1990년대 이후의 연구는 수문 공동체가 1920년대 평원 농민의 자치와 정치 참여의 학교였다는 점에 주목하며, 이 경험이 훗날 인민군 해방구의 토지 분배를 가능하게 한 조직적 바탕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비에트는 집권 뒤 해방구에서 나눠 준 땅과 함께 수문까지 모두 집단농장으로 거두어들였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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